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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작성일 2008-07-07
  • 조회수 6,475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 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 출처 :『현대시』2008년 3월호

 

 

● 詩, 낭송 - 송경동: 1967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나 2001년『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함. 구로노동자문학회와 전국노동자문학연대 등과 함께 활동하며 시와 산문으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음. 

 

송경동 시인은 “나도 / 여느 시인들처럼 / 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나는 늘 거리에 서야만 한다”며 고단한 노릇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억울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늘 함께 해왔지요. 하지만 정직하고 겸손한 그에게 ‘배후’나 ‘선동’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시인을 움직이는 힘은 어떤 조직이나 이념이 아니라, 저 살아 숨쉬는 자유의 바람과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무너진 담벼락과 걷어 채인 좌판을 통해 우주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노래해 온 셈입니다.

 

2008. 7. 7. 문학집배원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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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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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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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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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8건

  • 익명

    이런 걸 연고주의라 하는군요.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참 비릿하고 싸늘하군요.

    • 2011-12-22 09:26:5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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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울컥했습니다. 진심이 담긴 문장에 울컥했습니다...

    • 2008-07-31 01:36:0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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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이하동문입니다. 자꾸만 들어도 작가님의 육성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저도 시인님과같은 곳에 가입하렵니다

    • 2008-07-21 11:26:5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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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저 눈가리고 귀막은 윗분들께 이 시에 실어 저도 함께 말하고 싶네요바람에 선동당하고 들과 바다에 밀려 나섰노라고..

    • 2008-07-09 09:13:1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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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시인의 육성으로 듣는 시낭송 정말 감동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힘주어 밖으로 쏟아내는 시인의 목소리에서 삶을, 진짜 시를 봅니다.

    • 2008-07-08 22:00:5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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