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규「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 작성일 200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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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이덕규
먼 들판에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허기가 밀려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댈 때가 있다 사람을
삼시 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이다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主食)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밥에게 먹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빈 밥통의 떨림
그러나,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밥통의 고요한 중심에 내려가 맑은 공명을 즐기듯
먹먹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논두렁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감쪽같이 배고픔이 사라지고 어떤 기운이 나를 다시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그 힘은
내 마음 어딘가에 마지막으로 밥을 제압하기 위해 비축해둔 또 다른 밥의 농밀한 엑기스인 치사량의 독과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사나흘 굶고도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벌떡 일어나 품을 팔았던 어머니들처럼
수시로 닥치는 밥의 위기 때마다 마지막인 듯 두 눈 부릅뜬 채 막다른 곳으로 밥을 밀어붙이면 비로소
밥은 모락모락 두 손 들고 밥상 위로 올라온다
그래 먼 들판에서 하던 일 마저 끝내고
허적허적 돌아와 그 원수 같은 한 그릇의 밥을 죽이듯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내 마음의 근골 깊은 절미항아리 속으로
낮에 축낸 한 숟가락의 독이 다시 꼬르륵, 들어차는 소리 듣는 것이다
● 출처 : 『밥그릇 경전』, 실천문학사 2009
● 詩 . 낭송 : 1961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나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함.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릇 경전』 등이 있음.
옛집 부엌 한 구석에 놓여 있던 절미항아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밥을 지으려고 쌀을 됫박으로 퍼내면서 딱 한 옴큼씩 쌀을 덜어내 그 항아리에 담곤 하셨지요.
나중을 위해 덜어내 비축해둔 절미항아리 속 한 옴큼의 쌀 같은 것이 우리 마음에도 있지요. 아무리 우리의 삶이 가난해지고 바닥으로 고꾸라져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려는 불굴의 힘 같은 것,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왜 없겠는지요.
내일을 위해서 절미항아리에 한 옴큼의 희망을 넣어두세요. 그것이 후일 삶의 공복감을 밀어내 주겠지요. 캄캄한 이곳으로 문득 들어오는 저 한 줄기 천연의 햇빛을 보세요. 저것은 우리가 어느 날엔가 아껴둔 것이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본래 지니고 온 빛이기도 하지요.
2009. 5. 25. 문학집배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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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건
밥의 예찬론 같아 우리집 둘째 딸아이가 생각나네요.어찌나 밥이 맛있던지...먹고 또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고인생도 '밥' 같은것 같네요.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처럼...
밥에 대한 재밌는 발상이네요. 우리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닌 제압해야 할 대상이라니
밥과 나는 농부궁합니다아침에 같이 눈을 떠서온종일 같이 농사를 짓고집에 같이 들어와서같이 잠이드는...뗄레야 뗄 수 없는..우린 농부궁합이다..
삶에 대한 강렬함이 느껴집니다. 늘 밥상 앞에서 다음 끼니를 걱정하던 엄마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한톨이라도 밥을 흘리면 심하게 나무라셨던, 꼭 쌀이 떨어질때면 먹성이 좋아진다고 걱정하셨던, 텅비어가는 쌀항아리를 열면서 한숨을 내뱉으셨던, 그때 어머니 소원은 쌀항아리에 그득하게 쌀이 넘쳐서 몇달은 쌀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는거라고 읊조리셨는데, 저는 지금도 한끼의 밥을 죽이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밥 한그릇과의 줄다리기가 아웅다웅하며 늙어온 친구처럼 정답게 느껴지는 시입니다.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지만 다시금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밀어붙이고 두 손 들게하는 독한 기운이 다시금 필요한 시기란 생각이 듭니다. 농부시인이라선지 땅과의 교감, 밥과의 교감이 참 깊으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