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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작성일 2012-03-19




 
 서효인,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평화는 전투적으로 지속되었다. 노르망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인천에 닿기까지, 당신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검독수리가 보이면 아무 파티션에나 기어들어 둥글게 몸을 말았다. 포탄이 떨어지는 반동에 당신은 순한 사람이었다. 늘 10분 정도는 늦게 도착했고, 의무병은 가장 멀리에 있었다. 지혈하는 법을 스스로 깨치며 적혈구의 생김처럼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전투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통신병은 터지지 않는 전화를 들고 울상이고, 기다리는 팩스는 오지 않는다. 교각을 폭파하며 다리를 지나던 사람을 헤아리는 당신은 정확한 사람이다. 굉음에 움츠러드는 사지를 애써 달래며 수통에 논물을 채우는 당신은 배운 사람이다. 금연 건물에서 모르핀을 허벅지에 찌르는 당신은 인내심 강한 사람이다. 허벅지 안쪽을 훔쳐보며 군가를 부르는 당신은 멋진 사람이다. 노래책을 뒤지며 모든 일을 망각하는 당신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시_ 서효인 - 1981년 전남 광주 출생.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이 있음.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함.
  낭송_ 장인호 - 배우. 영화 <고지전>, <하울링> 등에 출연.
   출전_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민음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
 
 

 
  세계대전이 백년간이나 지속된다면? 헉! 이 무슨 끔찍한 상상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싶은 마음으로 슬슬 시를 읽어나가 보세요. 시의 중반부에 접어들면 누군가 나를 관찰하고 있는 듯한 께름칙한 기분이 들지 않나요? 시의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어째 기분이 점점 더 요상해집니다. 과거의 일로 이미 끝난 줄만 알았던 세계대전이 지금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강력하게 들기 시작하는! 문자를 통해 기묘한 3D체험을 하게하는 흥미로운 시입니다. 어떤 전쟁광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아닌 척하는 또 어떤 전쟁광은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진압과 전쟁이 필요하다고. ‘당신은 사람이다’ ‘당신은 사람이었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등으로 섬세하게 변주되는 이 기발한 ‘사람학’의 문장들 앞에서 이따금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은, 그래도 아직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문학집배원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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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사람으로 살기 참 죄스럽고 힘들다.

    • 2012-03-19 23:32:4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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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많은 사람들이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우리의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섬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탈 속에 사람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평화와 군 기지는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 2012-03-19 09:43:0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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