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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연애의 여왕」 중에서

  • 작성일 2011-12-01
  • 조회수 2,189




 
김경욱, 「연애의 여왕」 중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다섯 권의 소설을 찾아 읽은 것은 취재원에 대한 예의 때문도 극성팬을 자처하는 여자친구의 성화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다. 연애소설의 여왕도 아니고 연애의 여왕이라니! 질척거리는 감상이 싫어 연애소설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였다. 타인의 삶이 못 견디게 궁금할 때는 자서전이나 전기를 읽었다.
  연애의 여왕이 쓴 다섯 권의 책을 읽어치우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문장은 감상적이고 이야기는 작위적이었다. 주인공은 희귀병에 걸렸고 죽음은 사랑이 정점에 오른 순간 찾아왔다. 죽는 쪽은 대체로 여자주인공이었다. 여자주인공의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 그것도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의 몸을 빌려 나타나기도 했다. 남자주인공이 죽어야 할 때는 교통사고가 동원되었다. 죽음의 방식은 달랐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비극적으로 죽는다는 점에는 예외가 없었다. 여자친구가 빌려준 책의 뒷부분은 눈물 자국투성이였다.
  첫 번째 소설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마흔한 번 나왔다. 두 번째 소설에는 마흔일곱 번, 세 번째 소설에는 쉰두 번, 네 번째 소설에는 쉰여섯 번, 다섯 번째 소설에는 쉰아홉 번. 갈수록 태산이었다. 다음으로 빈도가 높은 단어는 ‘운명’이었다. 각각 서른두 번, 서른다섯 번, 마흔한 번, 마흔다섯 번, 쉰한 번 등장했다.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일단 손에 쥐면 끝장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소설은 어김없이 갈 데까지 갔다.
  집과 스튜디오를 오가는 지하철에서,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까페에서 연애의 여왕의 책을 펼쳐든 사람들이 적잖이 눈에 들어왔다. 십중팔구 젊은 여성이었는데 하나같이 손꼽아 기다리던 고백이라도 듣는 듯 상기된 얼굴이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내 손에 들린 책을 일별하고는 수상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공공연히 드러내지 못하는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나눌 법한 은밀한 미소였다.
 
 
 
 
작가_ 김경욱 - 1971년 광주 출생.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 「아웃사이더」가 당선되어 등단.. 소설집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와 장편소설 『황금사과』 『천년의 왕국』 등이 있음.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독_ 한동규 - 배우. 연극 <예술하는 습관>, <정약용 프로젝트> 등에 출연.
출전_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창비)
음악_ 심동현
애니메이션_ 박지영
프로듀서_ 김태형
 
 
 

 
얼마 전 출간된 지 십 년이 지난 제 소설을 꺼내 읽을 기회가 있었어요. 자신의 소설을 소리내어 읽는 것도 어색한데 10년 전 소설이라니요, 그 소설은 제가 쓴 소설 같지가 않았어요. 중간중간 말도 꼬이고 어느 부분에선 지금의 제 리듬으로 살짝 바꾸어 읽기도 했지요. 다행히 그 부분까지 읽지는 않았는데, 그 다음 페이지 중간쯤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는 거예요. 당신을 제 몸보다도 사랑합니다, 였는데요. 그 단편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 그 단편이 실린 소설집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딱 그 소설 속에서 한 번. 그렇지만 강렬하게 쓰였다면 쓰였을 그 말. 10년 동안 조금씩 변화해왔다고 믿었는데, 어쩌면 전 그동안 조금씩 삶의 윤기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어요. 10년 전엔 적어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거죠.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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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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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모두들 외로워서 이 지경이구나... ㅋㅋㅋ

    • 2011-12-07 01:07:0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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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사랑은 중독입니다. 어떻습니까? 소설 한 편에 사랑이 만 번이 나오면 어떻습니까? 사랑이 메말라버린 이 시대에 소설가들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뭐 어떻습니까? 사랑을 믿어야겠지요.

    • 2011-12-04 13:44:1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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