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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재와 빨강」 중에서

  • 작성일 2010-04-15
  • 조회수 5,003




편혜영, 「재와 빨강」 중에서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까지 미리 염려하기에 미래는 너무나도 까마득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과거의 시간이었다. 현재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미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방대해서 멀고도 멀었다. 어차피 그가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뿐이었다. 석유처럼 검은 하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언제나 제 할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시간은 진창 속에 빠져 있기도 하고 오물과 섞이느라 더디 흐르기도 한다. 그러니 미래는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 하루종일 지나간 생애를 곱씹듯, 검은 하수를 바라보며 과거를 떠올리는 일에 매달렸다. 그의 머리에 가득 찬 과거는 온통 사소하고 볼품없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에는 미래의 어느날 그가 몸서리치며 그리워할 풍경이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한 일들이었다. 어느 한해의 마지막 밤 전처가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피아노학원에서 조율이 안된 피아노로 연주해주던, 그래서 울먹이는 것처럼 들리던 쇼팽의 쏘나타, 전처를 처음 안았던 모텔 천장에 달린, 두 사람의 땀을 식히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던 파란 날개 선풍기, 철지난 바닷가에서 탔던, 삐걱거리며 흔들리던 공중관람차 같은 것이었다. 어린시절 친구들을 쫓아 뛰다가 넘어져 부러진 앞니와 그 앞니를 지붕으로 던져올리며 새에게 물어가라고 빌던 어머니의 말투도 떠올랐다. 맨홀 틈새로 스며든 빛이 만들어낸 먼지기둥을 볼 때면 햇빛이 길게 스며들던 마루에서 전처가 그의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놓고 웃음을 터뜨리던 것도 떠올랐다. 발톱이 두꺼워 그 나른한 붓질을 느낄 수 없었지만 고개를 수그린 아내의 머리카락이 발등에 닿아 간지러웠다. 매니큐어가 발라진 걸 잊고 부서 사람들과 싸우나에 갔다가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
 그 일들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 그는 덥고도 더웠지만 계속해서 아내를 안고 싶게 한 파란 날개 선풍기 때문에 울 것 같았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음이 떨려 좋은 줄도 모르고 들은 쏘나타 때문에, 지붕에 던져올린, 새가 물어갔는지 쥐가 물어갔는지 알 수 없는 부러진 앞니 때문에, 빨간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발톱 때문에 울 것만 같았다.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영영 멀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하고 미세한 생활의 결을 다시 매만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작가 / 편혜영 -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오이가든』『사육장 쪽으로』, 장편소설 『재와 빨강』 등이 있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함.
 
낭독 / 윤미애 - 배우. ‘12월 이야기’ ‘늦게 배운 피아노’ 등 출연.
출전 / 『재와 빨강』(창비)
음악 / 김인철
애니메이션 / 강성진
프로듀서 / 김태형
 

벽돌 같은 단단한 문장-이것은 성석제가 『재와 빨강』의 추천 글에 쓴 말이에요. “나는 이 소설에서 젊은 날 헌책방에서 느꼈던 클래식한 책 냄새를 맡는다”라고도 썼군요. 공감! 편혜영 소설을 읽으면 이 문장을 왜 썼지, 라고 생각되는 게 단 한 줄도 없어요.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지요. 이 미모의 소설가를 만나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저 부드러움이야말로 진정한 건조함의 스케일이다. 그 안에서 스스로 제 뼈의 질서를 찾아냈으니. 익명의 온건한 부속품이 모여 거대한 구조물들을 구성하고, 그것들로 이루어진 인공도시 위로 이 세계의 불길한 바람이 조용히 불어와 남몰래 지층을 흔들고 있다는 것, 그런데 그걸 포착하는 사람의 균형 잡힌 천진한 표정이란!
 
문학집배원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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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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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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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익명

    눈물이 나네요. 아..

    • 2012-04-03 16:33:2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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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게 느껴질 떄 시간이 지난 것이겠죠. 과거가 된 것이죠.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생각나는데요. 오랫동안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 2010-09-02 01:29:2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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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추억이 남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진정 슬픈 일입니다.그러나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숭고한 사랑의 마음을 계속 보내며 만드는 추억을 항상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2010-04-17 11:04:3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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