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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풀밭 위의 식사」 중에서

  • 작성일 2010-04-22




전경린, 「풀밭 위의 식사」 중에서
 
 
 
 
삶에는 인간 개인의 내부의지뿐 아니라 섭리라는 외부의지가 틀림없이 작용했다. 그것이 이른바, ‘때’라고 하는 우주의 간섭이었다. 나와 세상을 구별 못하던 아이의 시간, 나와 타자를 구별 못하던 소녀의 시간, 생리를 하며 여자의 몸을 살게 되는 시간, 자아를 발견하는 시간, 자연으로까지 신체 감각기관이 열리는 시간, 인생과 싸우는 시간, 싸움을 멈추고 평화협정을 맺는 시간, 현재를 아는 시간, 나를 3인칭으로 여기는 시간, 긴장이 풀리고 선량해지는 시간, 죽음을 향해 돌아가는 고독의 시간, 육체를 잃고도 의식이 뭉쳐 있을 시간, 그마저도 해체될 시간……
 누경과 함께 애월의 해안에서 일몰을 볼 것이다. 오름에 올라 세찬 바람을 맞으며 함께 화산 분화구를 한 바퀴 돌 것이다. 검은 바위들의 해안을 지나고 용머리 해안을 맨발로 걸을 것이다. 김영갑 갤러리에서는 바람의 아픔에 통각이 저리기도 할 것이다. 해수욕장에서는 금실처럼 쏟아지는 태평양의 햇살 아래서 두 팔을 활짝 펴고 깔깔거리며 웃는 누경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상미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와 놀거나 해안을 달리거나 모래 해변에 누워버리거나 바위에 붙은 굴이나 말미잘을 무료하게 건드리는 것을 바라보고 싶었다. 심지어 인서 형과 누경이 나란히 모래밭을 걸어 아득히 멀어져간다 해도 눈을 떼지 않고 마음속 깊이 담을 것이다. 물론 속으로 몇 번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별로 좋지 않은걸…… 비자림 숲속에서는 우연인 듯 뒤따라 걷다가 마음을 조금 더 털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기현은 누경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세상도, 삶도, 우리 마음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심연의 외줄 위에서 안간힘을 다해 현재를 제어하려는 아둔하고 흐릿하고 가냘픈 의식의 줄타기뿐이야. 야윈 불빛 깜박이는 그 가난 속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 그 가난 속에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것이 젊음의 마지막에 빠져들었던 내 사랑의 이야기라 해도, 있었던 일 그대로 좋은 시간이었어. 난 괜찮아. 이렇게 가깝고도 먼 근처에서 당신을 바라볼게. 누경, 그러니 웃어. 당신은 편안하게 웃어……”
 섬에 밤이 오면 해변에 나가 술을 마시고 취할 것이다. 첫날도 둘째 날도 셋째 날도…… 그렇게 다들 조금씩 더 친해질 것이다. 마지막 날쯤, 누경은 오늘밤 흘린 눈물의 이유를 말해줄지도 모른다. 누경이 어떤 말을 하든 기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들어줄 것이다. 사랑하며 살기를 바랐으나 사랑이 어긋나는 것을 받아들이며,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담담하게……
 기현은 어둠 속에서 슬쩍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인생이 고독할 거라고 했던가, 모든 것이 마구 흘러가버릴 거라고, 아무것도 곁에 머무는 것이 없을 거라고 했던가…… 그러나 알고 보면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고, 다시 돌아나가지도 못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으로 살 수 있을 뿐이다.
 
 
작가 / 전경린 - 196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물의 정거장』, 장편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등이 있음. 문학동네소설상, 21세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독 / 윤미애 - 배우. ‘12월 이야기’ ‘늦게 배운 피아노’ 등 출연.
장인호 - 배우. ‘위선자 따르뛰프’, ‘갈매기’ 등 출연.
출전 / 『풀밭 위의 식사』(문학동네)
음악 / 심태한
애니메이션 / 김은미
프로듀서 / 김태형
 

전경린의 언어와 문장은 무척 정교하고 아름다워요. 터져나올 듯 강렬한 감각을 지적인 통찰의 껍질이 멋지게 감싸고 있죠. 얼마든지 진지하지만 충분히 불온하구요. 극단적으로 뜨거우면서도, 뒷모습을 보이지 않는 담담한 비관과 허무 같은 게 끝내 마음을 흔듭니다. 전경린의 소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의 뜨겁고도 부정적인 갈망, 저는 늘 그게 부럽더라구요.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다”는 김수영의 시가 떠올라요.
 
문학집배원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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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많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 어덯게 사는게 잘사는것인지....그래도 잘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열심히 살아가고있습니다 웃으면서.....누구나 자기의 삶을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갈뿐이다 "공감"

    • 2010-04-22 12:15:4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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