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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수알도 부팔리노「그날 밤의 거짓말」

  • 작성일 2009-02-12
  • 조회수 4,621



 

「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그들은 앉아 있었고, 사령관은 서서 위협적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나는 카르타지네의 그 로마인처럼 평화냐 전쟁이냐,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를 옷 속에 넣어 너희들에게 가져왔다. 나는 너희들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고문과 회유가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지금 내가 너희에게 하는 제안은 아마 솔깃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죽음과 치욕 사이에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종류의 치욕, 즉 치욕을 안고 사느냐와 치욕을 안고 죽느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령관은 돌연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많이 고대사를 읽은 모양이다. 덜 엄숙하고 더 냉정하게 말하겠다. 자, 너희들 두목 이름을 대라. 알아둘 것은 나는 너희에게 신념을 배신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단지 사람 하나를 배신하면 된다. 누가 배신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도 모르게 할 것이다. 철저히 비밀로 감춰지기 때문에 자기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 내가 인간의 속성을 잘 아는데, 수치심은 쉽게 잊히는 법이다. 그 수치심에 대한 보상으로 지방 총독인 내가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너희 모두를 사면하고 아르헨티나 식민지로 추방시켜주겠다. 물론 사태가 진정되면 너희들이 원할 경우 귀국할 수도 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사령관은 계속했다.

"하룻밤이 남았다. 그 여덟 시간 동안 목숨을 구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헛된 영광을 쫓는 게 좋을지 생각해보아라. 협상 조건이 마음에 들거든 이렇게 하면 된다. 관례상 죄수들은 처형당하기 전날 밤 감방을 나와 아래층에 있는 위안실에서 족쇄 없이 지낸다. 그곳에는 벌써 신부 한 명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이따 그곳에 가면 내일 축제에 초대된 다섯 번째 손님과 너희 모두를 위한 편안한 침대,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네 개의 백지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들 편할 대로, 하지만 가능한 천천히 해주길 바라는데, 그 백지 위에 각자 다른 죄수들 모르게 거부를 뜻하는 가새표를 하든가, 아니면 내가 너희들에게 물은 이름을 적어 넣으면 된다. 표시를 한 다음 종이를 작은 상자 속에 넣는 거다. 내일 아침 내가 돌아와서 확인했을 때, 가새표가 그려진 종이가 네 개라면 너희들은 죽게 된다. 반대로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 개라도 이름이 적혀 있다면, 네 사람 모두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누가 배신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때 남작이 자기 앞의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잠시 후 다른 죄수들도 침을 뱉었다.

 

● 출처 :『그날 밤의 거짓말』, 이레 2008

 

 

● 작가 : 제수알도 부팔리노 - 1920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인 코미소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함. 고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러 문학작품들을 번역함. 소설 『전염병 전파자의 잡다한 이야기』『맹인 아르고』『상처 받은 남자』, 에세이집『그림자 박물관』등이 있음. 캄피엘로 문학상, 스카노 문학상, 스트레가 상 등을 수상함.

● 낭독 - 기주봉 : 배우. 연극『관객모독』『리어왕』, 영화『주먹이 운다』『지구를 지켜라』『와일드 카드』, 드라마『불멸의 이순신』『부활』 등에 출연.
이상희 : 배우. 연극 『특급호텔』『선녀와 나무꾼』『기차』『봉순이 언니』등에 출연.

● 음악 : 박태종

 

저도 침을 뱉습니다. 어릴 때부터 단체행동이라는 말을 참 싫어했거든요. 그게 뭡니까? 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잘 하더라도 그건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그렇다면 왜 열심히 꿈을 좇으며 살겠냐구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단체행동하면 어쨌든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누구냐면 단체행동을 시키는 사람들이죠. 사령관처럼. 누군가 배신하면 주동자의 이름을 알게 되니까 그걸로 좋고, 아무도 배신하지 않으면 죄책감 없이 다들 죽일 수 있으니까 그걸로 좋은 거죠. 우리, 가능한 한 단체행동을 시키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누가 시키더라도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단체행동은 절대로 하지 말기로 해요.

 

2009. 2. 12.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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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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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다음 내용이 무척 보고 싶어집니다.

    • 2010-10-23 20:43:4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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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치욕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 치욕을 안고 죽어야 한다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 침을 뱉을 만 한 일이네요. 작가님 말씀대로, '누가' 시키더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많이 어렵지만요 ^^;

    • 2009-02-12 18:38:0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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