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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중에서

  • 작성일 2009-12-31
  • 조회수 3,344




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중에서 
 
 
내 공부방에는 신우정이 만든 제품이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모니터 없는 컴퓨터였다. 신우정이 그 컴퓨터를 보내왔을 때만 해도 나는 신우정이 다니는 회사가 뭘 만드는 회사인지 몰랐다. 처음 만든 게 컴퓨터였으니 컴퓨터 만드는 회사인 줄로만 알았다. 컴퓨터를 써보려고 포장을 뜯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모니터가 없었다.
이상한 기계였다. 라디오 같은 컴퓨터였다. 목소리로 말을 입력할 수 있었고 검색도 가능했다. 물론 검색 결과는 컴퓨터가 읽어주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못 찾는 내용도 많았고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음성인식기능이나 음질은 훌륭했다. 다음날 나는 다시 신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우리 회사 올해 야심작이잖아.”
“시각 장애인용이야?”
“아니.”
“그럼 뭐 하자는 거야? 이런 게 팔리기는 할 것 같냐?”
그해 겨울에 그 물건은 엄청난 히트를 쳤다. 신우정은 계속 비슷한 유의 제품을 만들어냈다. 최첨단 기능에 시각 디스플레이가 전혀 없는 핸드폰이 다음 히트 상품이었다. 지도를 보여주지 않고 말로만 길을 가르쳐주는 내비게이션 장치도 있었다. 길을 물어보면 가끔은, “글쎄요, 애매한데요” 하고 답답한 소리를 내뱉는 기계였다. 뒤이어 정확한 시간을 가르쳐주지 않고 “곧 점심시간입니다” 따위의 애매한 소리만 하는 시계가 출시됐다. 정확한 몸무게를 가르쳐주지 않는 체중계도 꽤 잘 팔렸다. 경쟁사들이 좀더 많은 감각을 기계에 담으려고 애쓸 때 신우정은 기계로 들어가고 나가는 감각의 숫자를 줄이려고 애썼다. 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저 꿈틀거리기만 하는 핸드폰도 있었다. 브랜드명이 ‘꼼지락꼼지락’이었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갔다. 세상에는 똑똑한 것보다 멍청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신우정의 유작은 입출력장치가 아예 하나도 없었다.
“그냥 돌 같은데.”
아내가 말했다.
“하지만 이 전기코드는 뭘까. 분명히 전자제품인데.”
“오빠, 언니한테 또 속은 거라니까. 전기 꽂아도 아무 변화 없잖아. 소리도 안 나고 열도 안 나고.”
“뭔가 작동할 텐데. 존재한댔어.”
다시 오분이 넘게 침묵이 흘렀다. 아내가 말했다.
“코드를 꽂으면 존재가 생겨나고 코드를 빼면 존재가 사라진다는 거야? 존재가 그런 건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누군들 시원하게 답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인공 존재에 전원을 꽂아놓고 주말 내내 설명서를 탐독했다. 설명서는 이런 식이었다. 본 제품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 공법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방법론적 회의 공법은 감각기관의 정확성을 하나씩 의심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작가 / 배명훈 - 1978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2005년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 시작. 연작소설집 『타워』가 있음.
낭독 / 홍서준 - 배우. ‘뮤지컬’, ‘우리 동네’, ‘위대한 캐츠비’ 등 출연.
안민영 - 배우. ‘물의 정거장’, ‘한여름밤의 꿈’ 등 출연
출전 /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음악 / 정진영
애니메이션 / 김은미
프로듀서 / 김태형

『타워』라는 기발하고 솜씨 좋은 연작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작가가 문예지에 새 단편을 발표했군요. 엉뚱하지만 공감이 갑니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면서, 내 생각과 비슷한 것, 바로 이런 느낌일까요. 그런데…… 음…… 정확한 몸무게를 가르쳐주지 않는 체중계는 어떤 사람들이 샀을까? 어디에서 읽었는지 생각 안 나는데, 우리나라 여성들은 평균 이하 체중인데도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한다죠. 욕망이란, ‘감각기관의 정확성을 하나씩 의심’하는 방법론적 회의 공법으로 만들어졌을까요? 하지만 남성들은 평균인데도 대부분 자신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다던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일는지?

문학집배원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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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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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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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익명

    꼼지락꼼지락 핸드폰 귀여운데요. 존재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군요. 뭘까요?숫자보다 존재자체를 생각하게 하는...

    • 2010-01-14 19:06:3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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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뭔가 불분명하고 불명확하고 뭔가 감추어진 게 남은 것이 더 낭만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죄다 구미가 당길만한 제품들이군요^^ 재밌으면서도 생각할 것들을 많이 던져 주는 글입니다.

    • 2009-12-31 15:14: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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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웬지 탄산음료를 마신 듯 상쾌하면서 즐거워지는데요. 정말 이런 기계들이 나온다면 좋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작가에게 흥미가 느껴지네요 점점 초정밀, 초정확성에 길들여지며 안절부절하는 현대인에게 처방전처럼 제공될 이런 발명품들. 기대해봐도 될까요

    • 2009-12-31 10:37:2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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