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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소년을 위로해줘」 중에서

  • 작성일 2011-03-03
  • 조회수 3,058




 
은희경, 「소년을 위로해줘」 중에서
 
 
 
비밀세 징수시간.
엄마가 호두가 든 파운드케이크를 잘라 내 앞의 접시에 놓는다.
옆에는 사과홍차, 그리고 엄마 앞쪽에는 캔맥주 두 개.
- 어딜 가도 좋은데…… 전화기는 끄면 안 돼.
- 그래?
- 날 봐. 안 들어오는 날은 있지만, 전화기 꺼놓는 거 봤어?
- 아니.
다음 순간 재빨리 진실을 깨닫는 강연우.
- 잠깐, 내가 안 걸어봤으니 그건 모르잖아.
- 안 끄거든? 끄면 그건 단절이야. 고립되는 거라구.
- 조난 같은 거?
- 아시네요.
엄마가 캔맥주 따는 모습은 볼 때마다 불안하다. 왜 아니겠어. 고리를 붙잡는 순간 하얀 거품이 비질비질 새어나오더니 고리가 똑 부러지고 만다. 내가 그 캔을 집어다가 끄트머리만 남은 고리를 눌러서 다시 따 건네준다. 받자마자 탁자에 내려놓지도 않고 곧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신민아씨.
- 네 인생이니까 네 맘대로이긴 해. 하지만 너 아직 미완성품 기계잖아. 무슨 오작동을 일으킬지 몰라. 그리고, 사고가 생기면 혼자 해결도 못하거든. 정서적으로 불완전하고 사회적으로는 무능하단 말야.
인간은 다 그렇지 않나.
- 청소년기는 특히 더 그래.
또 신민아 식 독심술 시작.
- 실수는 좀 해도 되지. 작은 사고쯤은 저질러보는 것도 괜찮아. 근데 실수 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게 있어. 치명적인 사고. 그건 평생을 따라다닌다구. 바로 그런 걸 막아주라고 있는 울타리 아니겠어? 전화기가 꺼져 있으면 울타리가 어디로 출동해.
- 그렇긴 하네.
몸속에 칩을 박아넣을 수도 없고.
- 도움 받아야 할 때 도움 못 받는 거, 그런 걸 고립이라고 하는 거야. 고독은 늘 있는 거고 자기 문제지만 고립은 달라. 절망하고 상관있단 말야. 생각해봐. 내가 너한테 도움을 줄 수 없어서 일이 크게 잘못됐다. 너, 그거 나한테 아주 나쁜 짓하는 거야. 안 그래?
- 접수.
만약 채영이 고립된다면, 이라고 생각하니 쉽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상상력과 이해력이 저절로 향상되는군. 세상이 명쾌해지고 말이지.
- 주변의 위험한 물건 다 치워놓고 마음껏 놀게 해주는 것, 그게 방목이야. 대부분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지만 결정적일 때는 개입을 해야 해. 그러니까, 멀리 있더라도 연결은 끊어지면 안 된다 이거야. 그런 걸 방목의 기술이라고 하지.
 
 
 
작가_ 은희경 -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같은 해 첫 장편 『새의 선물』로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등이 있음.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독_ 이준식 - 배우. 연극 <햄릿기계>, <안개여관> 등에 출연. 황혜영 - 배우. 연극 <타이피스트>, <죽기살기>, 등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하모니> 등에 출연.
출전_ 『소년을 위로해줘』(문학동네)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아이 키우는 일에는 정답이 없지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부모도 아이도 같이 성장해 나가는 거겠지요. 그 속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무엇일까요? 부모가 자기를 믿고 지지한다는 것만 알면, 제아무리 날고뛰는 사춘기라 해도 크게 잘못되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지켜보다가, 그게 어느 한계를 벗어날 때 돕는 부모, 멋지지 않나요. ‘널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아이들이 걷고 싶은 길을 막아버리는 걸까요.
무단외박하고 들어온 고교생 아들과 엄마의 대화예요. 서로 믿는 모자간의 쿨한 대화, ‘방목의 기술’이 상큼하네요.
 
문학집배원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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