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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바람자루 속에서」 중에서

  • 작성일 2011-06-09
  • 조회수 1,737




 
김도연, 「바람자루 속에서」 중에서
 
 
 
 
길을 막은 채 태연히 서 있는 짐승은 처음이었다. 졸음을 쫓아준 데 대한 답례로 그는 짧고 가볍게 경적을 울렸다. 고라니의 귀가 쫑긋 올라갔지만 여전히 비켜서지는 않았다. 다시 경적을 울리고 차를 조금씩 앞으로 이동시켰다. 그제야 고라니는 굳어버린 듯한 몸을 풀고 돌아서더니 산이 아닌 다리 위로 겅중겅중 뛰어갔다.
다리를 무사히 건넌 그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고라니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검은 소나무숲 입구에 서 있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오른편 유리창을 내렸다. 다리의 마지막 가로등 빛을 뒤집어쓰고 있는 고라니의 표정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분했다. 잘 가. 다음부턴 절대 고속도로로 들어오지 말고. 여긴 굉장히 위험해. 하지만 고라니는 아무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만 간다. 어쩌면 고라니에게도 다리를 건너는 게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나쁜 놈! 어디선가 날아와 뒤통수를 치는 말에 그는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번갈아 살폈지만 고라니도 Y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전방에 낙석주의 구간입니다. 탄력을 받지 못한 차는 소사 고개를 올라가느라 헉헉거렸다. 마치 출렁거리는 물을 항아리 가득 담은 채 지게에 짊어지고 고갯길을 올라가는 것 같았다. 졸음은 쏟아지는 별빛처럼 다시 몰려왔다. 대관령 아래의 집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갔다. 일 킬로 전방에 횡성 소사휴게소가 있습니다. 백오십 년 된 아가위나무가 휴게소 마당에서 흰 꽃을 피우고 있네요. 졸리시면 그 꽃그늘 아래서 잠시 쉬어가십시오. 그는 눈을 떴다. 시린 얼음장 같은 소름이 등을 타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깜박 졸았던 순간의 아찔함이 냄비 속의 물이 끓듯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차창을 열고 초여름 밤의 바람을 차 안으로 불러들였다. 고갯길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가슴을 다소 진정시킨 그는 내비게이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소리였어? 나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소사고개를 오르내리는 그였다. 하지만 방금 전의 안내 말은 그동안 나비의 입을 통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전방에 낙석주의 구간입니다. 이어서 휴게소가 있습니다. 나비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아가위나무의 흰 꽃을 상상하며 고갯마루를 향해 차를 몰았다. 불빛 너머 어둠 속에서 안개가 꾸역꾸역 내려오고 있었다. 쩡―하는 울림과 함께 귀가 먹먹해졌다.
 
 
 
◆ 작가_ 김도연 -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강원일보, 199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2000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함.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십오야월』,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산문집 『눈 이야기』가 있음.
 
낭독_ 정재학 - 시인. 1996년 《작가세계》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가 있음.
문지현 - 배우 및 성우. 연극 〈경숙, 경숙아버지〉 등에 출연.
출전_ 『이별전후사의 재인식』(문학동네)
음악_ 김미정 작곡, 이원경 편곡
애니메이션_ 박지영
프로듀서_ 김태형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고 있자면 괜한 반발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내비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지 않기로 작정했지요. 수없이 경로를 이탈했지만 내비는 바보 아니냐고 짜증 한번 내지 않습니다. 알아듣도록 차분히 일러줄 뿐더러 정보를 뒤적여 새로운 길을 계속 제시해주지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어느 지점 일제히 자동차들이 속도를 늦추는 때가 있습니다. 차간 거리가 딱딱 맞아떨어집니다. 몇 미터 전방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걸 내비가 알려주었기 때문이지요. 그 사이를 재빠르게 빠져 달려가는 차가 있다면 십중팔구 내비를 달지 않은 차겠지요. 전방에, 전방에, 전방에…… 내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무슨 소리였어?”라고 되물었다면 더 이상 내비는 내비가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함께하고 있는 건 내비라고 이름 붙여진 다른 무엇이지요.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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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오랜 꿈 중에 하나는 아마도 자연과의 다감한 융화(融化)가 아닐까. 자본은 융화가 아니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침탈(侵奪)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의 품속을 꿈꾼다. 특히나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은 메말라가는 인성 때문인지, 아니면 시멘트 문명의 염증 때문인지 모성에 흠뻑 젖고자 한다. 시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시 속에서 창출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연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데다가 그 조홧속이 천변만화(千變萬化)라 간절함만 솟구칠 뿐, 대부분 거기에 다다르지 못한다. 시인들은 그 문턱에서 허덕이며 자기 문자속의 졸렬함이나 한탄하기 일쑤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 아닐까. 자연은 그저 말로만 자연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조홧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인 스스로 천변만화의 변신에 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변신이어서는 곤란하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아닌 듯 그러하게, 그러한 듯 아니게'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침내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변신은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전이라는 뜻이 가미된 변전(變轉)이어야 하지 않을까. 변전, 그렇다. 변전으로 물질적 속성마저도 달라져야 비로소 '우주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새로운 자연계'를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전은 쉽지 않다. 특히 현대사회에 살면서 변전으로 가는 길은 산 첩첩 물 첩첩이다. 자본 문명에 매몰된 비인간적이고 척박한 욕망이 자연과의 교감을 딱 가로막고 있다.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증식하는 이 욕망은 범주의 경계가 없다. 이성과 감성을 두루 다 말아먹고 만다. 현대인들의 심리적 병리 현상은 다 여기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비하면 변전을 주춤거리게 하는 문자의 욕망쯤은 차라리 순진하다 할 것이다. 나는 천박한 욕망의 습윤(濕潤)이 자연계로 향하는 시의 발길을 붙잡는다고 믿는다. 자연과 인간, 혹은 물(物)과 아(我)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가 드문 이유도 다 이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근래에 이르러 폭발적인 관심 대상이 된 시인 백석쯤이 거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시인 아닐까.이렇게 생각할 때 같은 연대에 김사인 시와 호흡하고 있음은 다행스럽다. 그도 또한 백석처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교감의 기를 순환하고 있는 듯 비친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조용한 일」 작가․낭독_ 정우영 - 1960년 태어나 1989년 《민중시》로 등단했다.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집이 떠나갔다』,『살구꽃 그림자』, 시평에세이『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시는 벅차다』등이 있다. * 배달하며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초입부터 눈도 많이 내렸죠. 겨우내 산야가 훤합니다. 북국의 정취마저 물씬하여 위뜸 살던 백석 시인의 시들이 생각납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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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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