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호 – 두 사람 – 잘 있어
- 작성일 201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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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11월호 살펴보기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사적 기억의 역사, 그 사소함의 윤리 ― 윤성희와 김금희의 소설을 중심으로 이병국 1. 그것은 어렵다 서로 한 덩어리로 굳게 뭉친다는 뜻의 연대는 주체와 타자의 단순한 결합뿐만 아니라 주체의 타자화/타자의 주체화를 포함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서로의 내밀함을 공유하고 주체와 타자의 구분을 지워 하나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그 안에서 타자는 더 이상 타자로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는 자신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의심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배척하기 위한 목적에 복무하기도 한다는 것을 사회 여러 부문에서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특정 집단이 드러내는 혐오가 자기 이외의 것을 타자화 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연대의 힘이다. 사회적 약자이자 개별적 존재들은 자신을 향한 혐오에 맞서 단독으로 맞설 수 없다. 그들은 모여야 하며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향한 혐오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으며 폭력과 좌절로부터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바로세울 수 있다. 이러한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개별 존재들의 자기 증명은 중요한 요소이다. 하루하루 삶과 생활에 치여 살아가는 개별 존재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 특히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는 존재들 이를테면, 여성, 노동자,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등 하층 계급이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편적 인간 군상으로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을 끌어들이는 전략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우회를 통해 뜻을 형성해 나간다. 곁을 나누고 서로의 사적 기억의 역사를 공유하는 작은 연대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더 이상 타자로서의 그들이 아닌 우리가 된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타자/주체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공유된 우리를 통해 서로의 한때를, 더 나아가 오랜 시간을 기억하고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증거하고 외부를 포용하여 더 큰 연대로 나아가는 밑바탕이 된다. 그것은 대체로 이루어내기 어렵다. 잉여적 존재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타인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자신에
- 이병국
- 2018-11-01
원룸전사 김경후 나는, 비상구, 창문 없이, 축축하고 얼룩진 판대기와 판대기 사이, 나는, 나의, 비상구, 불이 나지 않아도, 지진나지 않아도, 살려주세요, 소리치지 않아도, 여기, 나는 하루 종일, 비상구, 곰팡이 피고 지루해도, 끝의, 끝, 잡고, 나는, 나의, 비상구, 끝방에 붙은 끝방이어서, 아니야, 방 안에 스물네 시간 비상등, 켜져서, 아니야, 머리맡에 비상탈출 완강기, 있어서, 아니야, 판대기와 판대기 사이, 내 몸보다 나는 작은, 나의 비상구, 학교 종소리보다 자주 들리는 앰뷸런스 소리, 경찰차 소리, 저쪽, 끝방 아저씨, 오늘, 괜찮을까, 모두 괜찮아도, 괜찮지 않은, 나는, 나의 비상구, 눅눅한 벽 뒤 검은 매미허물들, 멀리 날아갈 것처럼 들러붙어 있다
- 2018-11-01
흰 죽 김경후 심장이 하얀 새가 날고 있어 여기, 이것 봐 아이는 차가운 숟가락을 휘적대고만 있다 반 친구들은 스키 타러 간대 펑펑 눈송이 쏟다 얼었다 다시 녹아 흐르는 동안 점점 말갛게 묽어 가는 흰 죽 다 식은 죽 심장이 하얀 새는 너무 멀리 가는 새 이것 봐 누군가 가리킨다 텅 빈 침대 투명하게 남은 날갯자국들 창밖엔 활강하며 쏟아지는 흰 죽 냄새 나는 벚꽃들
- 2018-11-01
[단편소설] Cafuné 구효서 * 당신을 본 순간 저는 욕조가 갖고 싶어졌습니다. 욕조라니요. 처음 본 사람에게서 욕조 같은 것을 떠올리다니, 기괴하지 않나요. 그날 고마신사의 어떤 부분이 욕조를 연상케 했을까요. 당신의 어깨 뒤로 신사의 처마 끝이 보였을 거예요. 그랬더라도, 그런 걸 떠올렸대도 갖고 싶다는 데까지 생각이 가 닿지는 않을 텐데, 그랬습니다. 당신을 본 순간 저는 욕조가 갖고 싶어졌어요. 봄이었고 이루마 시 경계의 고마신사에는 벚꽃이 피었고 버드나무 가지가 연록으로 물들었습니다. 그곳에 당신이 있었지요. 행사의 진행을 맡을 임원 두 사람과 함께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기억할까요. 그날 당신이 검은 진 바지에 검은 카디건을 입었던 것을요. 그래서였던가 무척 헌칠해 보였습니다. 차이나칼라 안쪽의 흰 반 폴라 때문에 어딘가 신부님처럼도 보였는데, 그래서 신사의 풍경과는 아무래도 안 어울릴 법했는데, 절묘하게도 신사의 풍경과 당신의 차림이 서로를 오롯하게 반영하던걸요. 그런데 욕조라니요. 제 상상이 예의 없고 불온하다고 여겼습니다만 냉큼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어째서 당신과 일행이 저를 고마신사에서 기다렸는지 곧 알아차렸어요. 고마신사는 고려신사였으니까요. 高와 麗 사이에 작은 글씨로 句를 새겨 넣은 나무 현판도 하나 있었지요. 조선 귀족이 참배를 왔다가 고려와 고구려를 구분하라고 적어 넣은 것인데 지금껏 여전히 고려신사라고 쓰고 고마신사로 읽는다고 당신은 당신 특유의 굵고 낮은 목소리로 말해 주었습니다. 황도 복숭아색 아코디언 스커트를 입고 바다를 건너온 고려인을 당신과 일행은 고려신사에서 맞이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저는 행사의 주인공이 아니었을뿐더러 국가나 민족의 대표성을 띠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건 조금도 없었죠. 그럴 자리도 아니었고요. 저는 당신의 책을 번역한 일개 번역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주인공은 당신이었어요. 번역가가 원작자의 신간 기념행사에 초대를 받은 일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만 고구려신사에서까지 맞아 주다니요. 이메일로 당신의 초대를 받았을 때도 그랬듯 신사에서 행사장인 아미고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저는 몸 둘 바를 몰라 이루마의 고운 봄 경치가 어지럽기만 했습니다. 그 지경이었는데 욕조라니요. 사실 당신을 보는 건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죠. 출판사로부터 당신의 작품 번역을 의뢰받던 날 책날개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았으니까요. 당신의 책을 번역하고 후기를 쓰느라, 그리고 보도자료의 일부를 서포팅하느라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당신의 사진을 몇 개 더 보았습니다. 작가라기보다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미용업계의 전문인 같다는 인상이었어요. 웨이브 진 윤기 나는 머리, 날 선 셔츠 칼라, 흰 피부, 가지런한 어깨, 친절한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입매, 언제나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겸손한 사람의 눈빛 때문이었을까요. 글쎄요, 미용업계의 전문인 남성은 그럴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제가 상상하는 작가의 모습과는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신사에서 당신을 보았
- 2018-11-01
믿음의 문제 이진희 할머니는 늘 묵주를 손에 쥐고 계셨다 절대 그것만은 뺏기지 않겠다는 듯 체구가 몹시 작은 나의 할머니는 무척 키가 큰 아들을 둘 낳고 길렀다 키가 큰 것 말곤 두 아들은 많은 것이 달랐다 아버지의 성도 식성도 삶의 궤적도 할머니는 주일이라면 반드시 평일엔 시간이 날 때마다 성당을 찾았다 할머니의 두 아들 역시 신을 섬겼지만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성을 냈다 각자 아버지 없이 자란 두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와 큰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가 믿었던 신은 어떤 얼굴들을 하고 있었을까 만나기만 하면 화를 내고 서로를 멀리했던 할머니와 큰아버지와 나의 아버지 그들이 믿던 신을 나는 믿지 않는다 믿지 않으면서 불같이 화를 낼 때가 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일까 이것이 믿음의 문제일까
- 이진희
- 2018-11-01
읍니다 이진희 토끼들이 들판을 지나 갔 에서 나의 받아쓰기는 멈췄습니다 마지막 교시의 세 번째 문장이었습니다 소풍에 나선 나의 토끼들은 지우개의 무차별 공격을 피하느라 고운 꽃이 핀 꽃밭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탁 트인 풀밭에서 놀지 못했습니다 배낭 속 점심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뉘엿뉘엿 마지막 문장이 끝나버렸습니다 그날은 하필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학교에 들른 아버지가 교실 창밖에서 나를 지켜본 날 읍니다에서 습니다로 바뀐 읍니다는 웁니다와 비슷한 말일까요? 학습전과에 제시된 비슷한 말과 반대말을 그대로 의심 없이 외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때 그토록 읍니다였으나 이제는 습니다인 읍니다를 습니다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그날의 소풍을 즐기지 못한 나의 토끼들은 완성하지 못한 세 번째 문장의 언저리에서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에서 웁니다 아직도 이따금 읍니다 읍니다 웁니다
- 이진희
- 2018-11-01
[단편소설] 부드러운 것들 오현종 왜 이제 내 이야기는 안 써. 윤호가 물었다. 잊어버렸어. 나는 그렇게 답했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 진심을 맨손바닥처럼 펼쳐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헤어진 지 오래된 사람에게. 잊었다는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대꾸가 없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지, 나는 머릿속으로 셈해 보았다. 금요일 밤, 아니 자정 무렵 누웠으니 토요일 새벽일 테다. 금요일 누군가와의 술자리. 자정 너머 전화. 모든 일들이 한번에 이해되었다. 술을 또 많이 마셨나 봐.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어. 이제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윤호의 동네, 윤호의 집 도어가 열렸다 닫혔다. 그 소리가 귓가로 넘어왔다. 학기말이라 더 정신이 없어. 다음 주는 컨퍼런스에서 발표가 있는데······. 윤호야말로 몇 분 전 자신이 건넨 질문을 잊어버린 듯 요즘의 일상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립대학 6년차 교수로서의 일과와 작성하고 있는 논문의 주제까지. 나는 응, 응, 그렇겠지, 하고 되도록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답을 해주었다. 그가 근황을 물었을 때는 두 군데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9학점 강의를 하고 있다고 들려주었다. 어디선가 엿듣는 사람이 있다면 일 년에 한두 번쯤 만나 점심을 같이 먹는 친구나 동료의 대화로 짐작할 법한 통화였다. 오래 알고 지냈다는 점만은 맞지만, 그와 나는 더 이상 친구도 동료도 아니었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가족의 죽음을 맞닥뜨린다 해도 부고를 알리지 않을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만치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였다. 9년 만의 통화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니 더더욱 그랬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늘밤 걸려온 전화가 9년 만에 처음은 아니었다. 윤호는 지난 월요일 밤에도 전화를 걸어왔었다. 잠이 설핏 들었을 때 인스턴트 메신저로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두어 번 수신을 거부하다가 휴대전화를 구겨진 이불 위에 소리 나게 엎어 놓았다. 그때 뒤집어진 휴대폰이 어떤 경로로 통화 상태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베개 옆에서 내 이름을 소리치듯 부르는 소리가 한 번 두 번 세 번 연달아 들려왔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애초에 들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나는 휴대폰 전원을 껐다가 삼십 분 후에 다시 켰다. 윤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월요일에 통화할 때 내일 저녁 같이 먹기로 했었지. 그래서 전화한 거야. 뭘 먹고 싶은지. 미리 물어봐야 하잖아? 윤호는 언젠가 그랬듯 떼쓰는 소년처럼 말했다. 내가 전화한 건 너 때문이야, 라고 책임을 전가하려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 저녁이 내일이 아니라 벌써 오늘이 되어버렸다고 정정해 주지 않았다. 어디든 괜찮아. 뭐라고? 뭐가 괜찮아? 넌 왜 목소리가 작아. 누가 듣기라도 해? 왜 그렇게 안 들리게 말해. 끊고 싶어서 그러지. 윤호는 무언가 물으려 전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화를 낼 대상을 찾는 사람 같았다. 그가 확인하
- 2018-11-01
[기획-원피스인문학] "실체가 없는 공허한 적이다" ― 와포루, 빅 맘, 사카즈키, 호디와 '악' 권혁웅 1 연일 무서운 뉴스가 쏟아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 이웃들을 잔인하게 해쳤다는 소식들이다. 전남편이 아내를, 혼자 된 남자가 헤어진 연인과 그 가족을, 예비신랑이 예비신부를, 고등학생이 이웃집 소녀를, PC방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을 무참히 살해했다. '치정'이나 '원한', '심신미약'과 같은 말이 범행동기 칸에 적히겠지만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벌어진 일의 '알 수 없음'에 대한 분식(粉飾)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희생자들이 지금의 처지로 자신을 내몰아서, 평소 자신을 무시해서, 1000원을 돌려주지 않아서, 심지어는 그저 호기심으로 죽였다고 말한다. 저 사건들에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상대를 '해칠 수 있는' 능력 내지 자격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여겼다는 것.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상대를 소유물 내지 사물로 여겨 함부로 부수거나 파괴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이런 무서운 권력을 어떻게 부여받았을까? 왜 그들은 자신이 아닌 모든 자들을 파괴해도 좋은 장난감처럼 여겼을까? 상대에게 위해를 끼치는 모든 생각이나 행동을 우리는 나쁘다고 말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곧 그 근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는 생각이나 행동은 특별히 '악하다'고 말한다. 원피스 세계 역시 약육강식의 세계여서 다양한 악의 형상들이 출현한다. 악은 늘 선과 짝을 이룬 개념이다. 그런데 선/악이라는 영역은 원피스 세계의 두 대립세력인 해군/해적이라는 실체적 범주와 겹쳐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 일당이 법에 의해서는 악으로 정립된 해적들이다. 밀짚모자 해적단은 원피스 세계를 횡단하면서 선의 이름 뒤에 숨은 악과 악의 이름 아래 모인 선의 실체를 폭로해 나간다. 원피스 세계의 몇몇 인물들을 통해서 악의 범주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선/악'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옳음/그름'이라는 뜻이 하나라면, '좋음/나쁨'이라는 뜻이 다른 하나다. 두 경우는 매우 다른 내용을 뜻합니다. 옳음/그름은 초월적 가치 기준과 의무 개념을 함축하지만, 좋음/나쁨은 내재적 가치 기준과 행복/기쁨의 개념을 함축하기 때문이죠. 옳음/그름은 왜 초월적 가치 기준을 전제하느냐? 철수가 영희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순수하게 내재적으로만 보면 영희가 그 거짓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영희가 새로 산 옷이 철수가 보기에는 영 아닌데 그렇다고 진실을 이야기했다간 그날 분위기를 완전히 망치겠죠. 그럴 때는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거짓말은 그른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덕적 판단은 철수와 영희 사이의 내재적인 지평 바깥에 어떤 초월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 판단은 "~하지 말아야
- 권혁웅
- 2018-11-01
[기획 -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10 - 문예지 신인 살펴보기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강소희, 김영삼, 송민우, 차유진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230"]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작과비평》 2018 가을)[/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김지연, 「작정기」 (《문학동네》 2018 가을)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조시현, 「동양식 정원」 (《실천문학》 2018 가을) [/caption] 김주선 : 저희가 진행하는 《문장 웹진》 좌담회가 드디어 10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짝짝짝) 김주선 : 10회까지 했다니 새삼 신기하고 놀라워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네요. 이번에 다룰 작품은 모두 문예지 신인 당선작입니다. 한동안 신인 작품을 다루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번 작품들에서 그런 아쉬움을 상쇄했으면 합니다. 저희가 다룰 작품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창작과비평》 2018 가을》, 김지연의 「작정기」(《문학동네》 2018 가을), 조시현의 「동양식 정원」(《실천문학》 2018 가을)입니다. 먼저 장류진의 소설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일'의 기쁨과 슬픔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데 이 소설은 기존에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서사의 흐름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습니다. 기존의 수많은 소설들이 익히 그려 온 절망적인 정조나 상황에서 벗어나 있어요. 유머도 있고요. 이전과는 약간 다른 신선한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강소희 : 저도 이 소설이 어쩌면 비참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다루면서도 절망적인 정조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어요.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의 자세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을 흔히 자아실현의 길로 제시하는데, 사실상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 꿈이 깨어진 시대잖아요. 대학을 졸업한 수많은 친구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니까요. 그렇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없는 이들이 삶은 비참하고 절망적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이 소설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당연히 슬픔은 있지만 소소한 기쁨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의 행복은 일의 성취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취미나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 혹은 기대하지 않은 작은 선물 같은 것에서 찾아진다는 사실을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기도 하고요. 차유진 : 요즘 덕후들이 참 많죠. 그게 왜 그럴까 하고. 처음에는 워낙 다양하게 아는 것들이 느는 중에도 자기 취향이 분명
- 2018-11-01
[글틴 - 인터뷰] 구름에 달 가듯이 시 멘토-멘티의 만남 ㅇ 인터뷰어 : 윤석정 시인ㅇ 인터뷰이 : 김가은(필명-김줄) 청소년, 그러니까 나의 청소년은 시에 푸욱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지난 2015년 7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시 멘토 '고래바람'으로 활동하면서 나는 청소년의 나와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로 즐거웠으나 때때로 아프기도 했다. 그래서 글틴 친구들에게 마음을 가까이 두기도 했고 멀리 두기도 했다. 그렇게 글틴에서 보낸 시간은 구름에 달 가듯이 지나갔다. 딱 일 년이 지난 추억 속 한 장면을 꺼내듯 지난 10월 18일 대학로에서 김줄(17, 아래 '김')을 만났다. 글틴의 인연 때문일까. 우리는 처음으로 대면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나만의 착각일 수 있으나) 우리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두서없는 말들이 오갔지만 시로 인해 공감했고 시로 인해 풍성했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술 익은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전문 불규칙적이면서 모순적인 윤 : 이메일 주소를 보니 'pomoq'이다. 철자(spelling)가 특이하다. 김 : 알파벳이 좌우대칭을 이룬다. 불규칙적인 것, 모순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이메일만은 대칭적이면서 모순적이지 않게 했다. 윤 : 왜 이멜만인가. 누군가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이어서? 김 : 그렇다. 윤 : 필명 '줄'이 에너지 단위 줄(joule)이라고 들었다. 과학을 좋아한다고? 김 : 맞다. 매년 좋아하는 과목이 바뀐다. 폭넓게 지식을 얻고 싶어서다. 윤 : 나와 인터뷰를 하니 어떤가? 김 : 너무 반갑고 기분이 좋다. 이런 자리가 쉽지 않다. 인터뷰 섭외 전화를 받고 '진짜요!'라고 외쳤다. 윤 : 나도 직접 만나니 반갑다. 작년 1월 중등부로 처음 활동하면서 시 '우울증', '열등감'을 연이어서 발표했다. 김 : 흑역사다. 윤 : 혼자 시를 쓰다가 처음으로 보여준 건가? 김 :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내 시를 읽어 준다는 게 신기했다. 윤 : 글틴이라는 공간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 :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생각했다. 우물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느낌. 요즘은 뜨문뜨문 글을 발표하고 있다. 윤 : 소설에도 관심이 있지 않은가. 김 : 내게 소설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어떠한 대상이나 사물을 보면 서사를 만들어야겠다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열심히 서사를 만들고 있지만 소설의 문장으로 풀어내기가 어렵다. 자꾸 문장이 나를 쪼이고 쪼인다. 윤 : 그렇군. 언제부터 시를 썼나. 김 : 본격적으로 시를 쓴 것은 작년이다. 그전에는 국어 수행평가로 시를 써봤고 시를 싫어했다. 그런데 시에 대한 선입견을 딱 깼던 계기가 김선재 시인의 시 '얼룩의 탄생'을 읽고 나서였다. 시가 한 행에서 그다음 행이 나와 서로 연결되어 완결 짓는다는 관념을 바꿔 준 것이다. 그 시는 매우 직관적이어서
- 고래바람
- 2018-11-01
불시착 최백규 활주로 끝에 소년이 서 있다 그어버릴게 번지듯 퍼뜨려지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갈 거야 시동을 걸자 걷다가 질주하자 손을 흔들며 위험한 것을 소리치면서 꿈에서 친구를 죽이고 자퇴하겠다는 여자 친구를 달래다가 머리를 넘긴 채 식물원과 미술관을 걷는다 손차양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자면 몇 백 년 전 당신과 이곳에 다녀간 내가 가지런히 덮을 옷을 지어 살고 있다 대공원과 경복궁에 나비가 있다는데 꽃밖에 보이지 않고 여름을 밟는 걸음이 곱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 현관에 머무르면 이 집에는 미열이 없고 마른 욕실이 있다 멀거니 걸어도 깨진 적 없는 당신의 무릎을 안으며 흰 발을 만져 주던 일이 오래다 그런 삶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않는 국경을 허물어 폭설 속에서 한없이 연착되고 싶었다 평일 내내 손등으로 떨어지는 찬물을 맞으며 그릇만 씻었다 서걱거리는 우유를 시리얼에 붓고 종이 위에 그려진 얼음을 흰 손수건으로 훔치기도 하며 마룻바닥을 쓸다가 발목에 혈관이 뛰어 징그러워 잘 봐둬 나중엔 뛰고 싶어도 못 뛸 때가 온다 늙은 개를 오래 발음하듯이 살이 나간 선잠을 접던 당신과 휴일의 숙소는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백사장 같다 헐거워진 몸에서 나도 모르게 떠내려가면 어떻게 하나 악력이 희미해지는 계절이 와도 여전히 손을 잡고 있을까 아무 걱정 없이 석양에 물든 아이들이 철길 건너로 달아나는데 전선 위 늘어선 새 떼 맑은 죽이 끓어 넘친다 몇 년 후에 다시 사랑하자 했을 때 다음 생에도 이미 폐허라는 걸 알았다 꽃을 먹고 죽으면 나비로 태어난다는 미신을 믿었다 오래된 착륙이었다
- 2018-11-01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21세기 뷰티풀 엑스라는 변종들 - 2018년을 통해 본 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 전영규 1. 21세기의 변종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숙고할까요? 소비에트적 세기, 전체주의적 세기, 자유주의적 세기의 교차에 대하여 개념에 의거해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인 한 유형의 단위(공산주의적 영웅 행위, 근원적 악, 승리를 거둔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일은 세기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숙고하려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실제로 우리 철학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세기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세기 속에서 사유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있었던 사유의 단순한 전개가 아닌 이 세기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사유하는 걸까요? 전달된 사유가 아닌 사유란 무엇일까요? 이전에는 사유되지 않은 것들과 더불어서, 더 나아가 이 세기 속에는 과연 무엇이 사유되었던 걸까요? -알랭 바디우, 『세기』 중에서1) 1) 알랭 바디우, 박정태 옮김, 『세기』, 이학사, 2014, 14-15쪽. 그렇다면 21세기를 맞이한 한국문학에서는 과연 무엇이 사유되고 있는 것일까? 새천년이 된지도 18년이 흐른 지금, 한국문학은 무엇을 사유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 문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전에는 사유되지 않은 것들을 들여다보는 일. 바로 이것이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을 역사적 단위는 세기라는 범주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 바디우는 세기와 관련한 인간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세기라는 구句가, 경험적인 단순한 연대기적 순서 매기기를 넘어서, 과연 세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위해 어떤 적합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2) 사유는 곧 의문이다. 그의 말은 세기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주체화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여기서 '세기 속에서 일어났던 것'들을 선택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이미 우리는 최근까지 "공산주의적 영웅행위, 근원적 악, 승리를 거둔 민주주의"를 연상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었
- 하얀연못
- 2018-11-01
미래진행 최백규 거리의 흰 여름은 해변 끝에서 밀려왔다 쓸려가고 지구가 있다 무사히 열대를 건축할 때마다 게스트하우스에 칠해져 바닷물만 나누어 먹는 미성년들 하나의 우리는 열사병이다 이국의 해수욕장에서 죽음을 연습하고 낯선 중앙선을 따라 교복의 맥박으로 휘청거리다 헤드라이트에 머리카락 적셔지듯 끝나지 않을 방학이다 이곳이 장마 신기루로 푸릇하면 인생에서 무중력만 골라 아름다울 수 있다 우주가 돌아서 슬프다 늙어도 힙합이나 아이돌을 좋아할 수 있을까 미래학자는 영원히 미래학자인가 더 이상 추하고 싶지 않아서 환각을 터뜨리다가 그루피 혹은 히치하이커로 익사할 수 있을 것이다 파도를 참는 표정과 몸짓의 사생아들을 가장 먼 행성으로 놓칠 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척했다 어린 묘지들로부터 달려가며 파열하는 국경에서 섬망하다가 거리의 아름다움은 거리에 있다 너와 나를 죽이는 절정에 세상은 실패했다 불을 끄고 손목을 놓았다
- 2018-11-01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똥 누기 게임'으로 회귀하는 압력의 역학관계1) 장예원 "세계는 말이야 압력에 의해 이뤄진 것 같아. 압력으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구분한 거지."(박민규의 「깊」 中) 1. 압력의 균형 – 無事한世上이病院이고꼭治療를기다리는無病이끗끗내있다.2) 우리는 대기권이라는 공기로 가득 찬 바다에 살고 있지만 공기의 압력을 느끼지 못한다. 외부 대기압과 동일한 크기로 인간 신체 내부에서 밀어내는 압력의 균형 때문이다. 이 균형이 어긋나면 인간 신체는 문제가 생긴다. 그 어긋남이 소소하면 신체는 이를 조절하여 변화된 압력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지만 이 압력의 균형이 극단적으로 무너지면 물질로서의 신체는 '생명현상'을 멈추게 된다. 박민규의 소설 「깊」에서 룸의 지루한 일상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간 빌, 그리고 지구의 중심으로 나아갔던 공(孔)과 희생된 디퍼들의 시체들은 마치 물 밖에 던져진 심해어처럼 장기(臟器)들이 터져 나왔다. 물질로서의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물리적 압력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 외에도 인간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도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의식'과 '지향성'은 '정신세계에 거주하는 것'들로서 '나'의 내부에서 보자면 특별하고 고유하며 무한한 존재이지만 외부에서 보자면 뇌파기록 장치에 기록된, 파동의 변화가 있는 추상적인 '선(線)' 정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양상을 형상화한 구체물이 될 수 있다. '정신세계에 거주하는 것'들 역시 물질과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압력의 균형, 즉 '정상성'을 획득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러한 생존을 위한 균형 감각에 대한 인식은 타자를 비롯한 세계와 자신에 대한 거리감각을 형성하게 하고 이는 소설 미학적으로 아이러니와 연결된다. 그러나 최근 젊은 소설들에서 보이는 '거리감각'은 서사소통구조로서의 기법적인 것이기보다는 그것이 곧 현실의 실제, 그 자체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양상으로 판단된다. '거리감각'은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소설을 쓰기 위해 습득해야 할 미학적 기법이기보다는 그것이 곧 세계 자체이자 생존방식이기 때문에 이미 태생부터 몸에 밴 습관이자, 일종의 '
- 장예원
- 2018-11-01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소녀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조대한 1. 메르스가 확산되기 이전 즈음의 일이다. 녹번동에서 종로를 향해 가는 702번 버스에서, 마스크를 쓴 대여섯 명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것에 대해 유난을 부린다는 인식이 조금쯤은 있었던 듯싶다. 의아했던 것은 당시 마스크를 착용한 이들이 모두 어린 혹은 젊은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였을 테지만, 유행하는 아이템처럼 귀에 걸쳐진 그녀들의 흰 마스크는 일상의 색채 속에서 유달리 도드라졌다. 얼마 후 강남역 인근의 노래방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참혹한 죽음을 슬퍼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추모 행렬에 동참했던 여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문은 기시감처럼 떠올랐다. 왜 그녀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가? 물론 그것은 질병과 시선의 우연한 폭력을 막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었을 것이지만, 조금 다른 대답을 위해서는 다소 긴 우회로가 필요할 것 같았다. 2. 근대 이전의 시에서 근대시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시작점에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있다. 그는 《소년》 창간호 권두에 해당 작품을 실었다. 어쩌면 그에게 근대의 기획은 소년의 기획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근대의 미래상을 소년의 무한한 가능성에 겹쳐 보려 했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소년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 살점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를 해친 환희와 죄책감을 동시에 경험한 소년들은 그 유대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상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루이 16세라는 봉건적인 아버지를 청산한 후에야 벽안의 소년들은 근대라는 이름의 어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근대와 근대의 전환기에서 우리의 소년들은 스스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다. 일제의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부친의 주검만을 얻었을 따름이다. 폭력적인 새아버지에 의해 죽여야 할 라이오스를 상실해 버린 오이디푸스들은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할 위험에 처했다. 미래를 향한 충만한 가능성과 설렘으로 시작된 근대적 소년
- 조대한
- 2018-11-01
시계태엽 오렌지 조인호 구급차 안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약 일 분간 멈췄기 때문이었다. 응급실에서 집중치료실로 집중치료실에서 수술실로 옮겨질 때까지 나는 그녀의 심장이 캘리포니아산 오렌지 한 알, 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서부 애너하임에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던 그해 그녀는 세상에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그녀를 작은 바구니에 담아 고아원 앞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해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오렌지처럼 따사로웠고, 그녀는 오렌지처럼 붉은 얼굴로 바구니에 담겨 웃고 있었다. 모든 위대한 사람은 꼭 바구니에 담겨 버려진다는 걸 교회에 다녀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테지만, 그녀는 평생 기적을 일으키거나 그러지 못했다. 다만 그녀에게 기적이 있다면 그녀가 아주 아주 어렸을 때 양부모가 있는 미국의 디즈니랜드에 갔었다는 사실이었다. 1981년까지 그녀는 고아원에서 지냈다. 얼굴이 까만 남자와 결혼했고 그해 나를 낳았다. 다행히 그녀는 나를 바구니에 담아 그녀가 자랐던 고아원 앞에 버려두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를 품에 안고 매일 같은 저녁 시간에 머리를 감겨 주던 기억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2014년 그녀의 심장이 한 번 멈추었을 때 중환자실에서 그녀는 내게 캘리포니아에 산다던 양부모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나의 어머니를, 미국에 초대했다던 미국인 양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녀가 약 기운에 빠져 꾼 꿈이라고 생각했다.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그녀가 아주 아주 어렸을 때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던 양부모의 초대를 받아 미국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 그림책 속에나 나오는 하얀 이층집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고 다시 가난한 고아원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너무나 기적 같아서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미국에 가본 적 없는 내가 캘리포니아 월마트에 가서 여기요, 오렌지 하나 주세요, 말하면 미국인은 알아듣지 못한다. 여기요, 오륀지 하나 주세요, 말해야 한다. 오렌지를 오렌지라고 부르면 오렌지가 아닌 것처럼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그녀의 세계가 모두 가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 채 12시간 넘게 수술 중 불 켜진 보호자 대기실에서 내가 떠올린 그녀의 오렌지는, 그랬다. 나는 눈을 감고 골동품 상점으로 들어선다. 그 상점은 미국에 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소도시 어디쯤일 것이다. 골동품 상점 안에는 작은 시계태엽 오렌지 하나가 놓여 있고, 미국인 양부는 카운터에 앉아 있다. 딸랑, 하며 종이 울리고 검은 머리에 눈이 찢어진 동양인 소녀 하나가 문을 열고 맨발로 뛰어 들어온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손깍지를 끼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수술실 앞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노란 선이 있다. * 그 너머 그녀의 디즈니랜드가 있다. 그곳은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 조인호
- 2018-11-01
유도소년의 올바름 조인호 내가 유도소년이었던 시절 나는 흰 띠 돼지 녀석에게 깔린 채 벌레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다 빅맥버거 빵 사이에 낀 싸구려 패티 한 장처럼 깔린 채 나는 약 30억 년 전 암모나이트처럼 생각이 한없이 굳어져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난 맛없다 날 먹지 마! 난 맛없다 날 먹지 마! 돼지 녀석은 착했다 유도 관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고, 특히 이가 하얘서 웃을 땐 아 ······ 인정하기 싫지만 멋졌다 나는 그 녀석에게 깔린 채 그 녀석의 살 냄새를 맡으며 그 녀석의 땀에 젖은 유도복에서 아직도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 어쩐지 꽃밭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녀석과 내가 도장 바닥을 다이슨 진공청소기처럼 이리저리 쓸고 다닐 때 세상의 모든 유도소년들이 녀석과 날 보며 아, 씨발 저 새끼들 봐라, 존나 웃기네 처웃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 부둥켜 얽힌 채로 녀석은 날, 지그시 눌러 주며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지, 야이, 씨발아, 내가 우습지? 내가? 나는 그 녀석에게 깔린 채 숨을 헐떡이며 아니, 네 웃는 모습은 약간 설레고 넌 특히 이가 하얗고 네 엄마가 빨아 준 유도복에선 봐라, 이렇게 좋은 꽃 냄새가 난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그 힘 속에서 내 얼굴은 자꾸만 붉은 노을처럼 부끄러워지고 이윽고 내려앉는 저녁의 어스름처럼 녀석의 힘은 그렇게 내 세상에 눌러앉았다 * 독자여, 당신도 똑같다 당신이 내 병신 같은 시를 읽을 때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단 하나다 야이, 씨발아, 내가 우습지? 내가? 어느 날 길을 걷는데 그림자가 내게 말했다 이봐 친구, 할 수만 있다면 가위로 네 녀석의 두 다리를 잘라내고 싶다 경고하는데 내게서 충분히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이라도 법원에 내고 싶은 심정이니까 그럴 땐 그림자라도 업어치기 한판으로 땅바닥에 눕혀 주고 싶지만 어차피 그림자는 땅바닥에 붙어 있다 내 인생이 옥스퍼드 백과사전쯤 되는 두께로 기록된다면 좋을 테지만, 옥스퍼드 사전 맨 마지막 장 맨 마지막 줄에 깔린 그 낱말을, 누가 신경이나 쓸까 난 내 유도복이 빨랫줄에 걸린 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좋았다 봐라, 흰 띠로 묶은 유도복을 어깨에 걸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걷는 유도소년이었던 나를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돼지 녀석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유도관에 들어선다 우리 아들이 힘이 참 약해요 겁도 참 많죠 유도소년 중 가장 마른 애로 하나 골라 주세요 그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돼지 녀석에게 깔린 채 누르기 한판으로 질 때까지 세상의 모든 올바름을 배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블 위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하지만 봐라, 성경책을 들추면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그러므로 나 역시 그것에 맹세한다 야이, 씨발아, 내가 우습지? 내가?
- 조인호
- 2018-11-01
[단편소설] 노래하는 사람 서유미 ? KBS 라디오 문학관에서 오디오북을 만나볼 수 있어요 지하철이 A역으로 들어서는데도 은주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깨에 내려앉은 졸음은 끈적하고 에어컨의 바람은 자리를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시원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앉아 있고 싶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깼을 때 지하철은 이미 A역을 지나 버렸다. 내려야 할 곳에서 멀어지자 은주의 잠은 달아났다. 내선 순환선이 다시 A역에 도착하려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릴 것이다. 은주는 반대 방향의 지하철로 갈아타는 대신 이어폰의 볼륨을 높인 다음 휴대용 향수를 꺼내 뿌렸다. 머스크와 삼나무 향이 얼굴을 감쌌다. 3일 전만 해도 퇴근길에 포일에 싸인 김밥을 먹으며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입안의 김밥을 꼭꼭 씹었고 늦을까 봐 시간을 수시로 확인했다. 카페 근처의 쓰레기통 앞에서 생수로 입안을 헹구고 포일을 동그랗게 구겨 버릴 때마다 김밥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했다. 퇴근한 뒤 지하철로 이동하는 동안에만 쉬고 다시 일하러 가는 삶에 대해 특별한 저항감은 없었다. 언제부터 투잡을 했는지 떠올리는 것보다 투잡을 안 하던 때를 떠올리는 편이 더 빨랐다. 낮에 쇼핑몰의 상담원이나 텔레마케터로 일하고 퇴근 뒤 카페나 고깃집,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게 십 년째인지 십일 년째인지 모르겠다. 일하던 카페가 문을 닫게 돼서 3일째 저녁 일을 쉬었더니 휴가를 받은 기분이다. 아무도 자신을 부르지 않고 손에 물을 묻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이 느슨해졌다. 1시간 30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서울의 외곽을 돌 거라고 생각하자 여행자의 심정이 되었다. 앞과 옆이 다 오픈되어 있고 옆 사람과 허벅지가 닿는데도 느슨한 기분은 훼손되지 않았다. 소변이 마려웠지만 참을 만했고 방광이 꽉 찬 기분은 금세 익숙해졌다. 손 안에서 민 팀장의 전화가 울렸다. 점심때 전화를 안 받았더니 퇴근길에 또 전화했다. 오후에 사무실에서 마주쳤을 때 그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서로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은주는 손 안의 진동을 느끼면서도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쇼핑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상품 정렬 방식을 낮은 가격순으로 해서 살펴봤다. 아름다운 옷들이 아래쪽에 묵직하게 깔렸다. 여름은 빠른 속도로 깊어졌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좀 더 얇고 시원한 옷들이 필요했다. 집 앞 포장마차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찐 옥수수와 중국식 호떡, 계란빵을 하나씩 샀다. 3일 동안 매일 간식거리를 사서 집에 들어갔다. 엄마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봉지 안의 것을 하나씩 꺼내 먹는 걸 보면 손과 발끝으로 하루 동안 쌓인 피로와 독소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엄마는 관절염 때문에 하루 종일 혼자 텔레비전을 보며 지냈다. 출근 전에 도시락을 싸면서 은주는 밥통의 밥을 확인하고 물통을 채워 놓고 서랍 위에 간식거리를 올려 두었다. 견과류 한 봉과 우유 한 팩, 계피 사탕 몇 알. 쇼핑몰이나 카페에서 일할 때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혼자 지내
- 서유미
- 2018-11-01
혼니 김현 오늘은 사평이 말했다 엄마, 바다 화났어? 아직 화났어? 사평은 난생처음 바다를 보고 꽃게를 보고 꽃게처럼 옆으로 걷다가 모래사장에 꽃게를 그리고 그 순간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된다 그날 사평의 가슴에 남들은 모르게 슬픔이 밀려왔다 밀려가지 않았지 아직 어린 나이에 망망대해의 진리를 알 수 없을 텐데도 사평은 짐작했다 엄마, 엄마 냄새는 너무 예뻐. 아직, 예뻐. 사평은 파도가 높아 부모가 신선해물탕집에서 간장에 고추냉이를 너무 많이 풀어서 알을 먹다가 눈물바람으로 휘청거리는 걸 보고 들었다 여보, 이맘때면 자꾸 현이 오빠 생각이 나 그 오빠가 그렇게 쉽게 갈 오빠가 아닌데 어쩌다가 그리 쉽게 가냐 가길 여보, 저기는 참 어두컴컴하다 보이는 게 없네 여보, 이맘때면 자꾸 현이 언니 생각이 나 그 언니 그렇게 쉽게 갈 거면서 뭘 그렇게 어렵게 살았을까 여보, 우리는 모두 연약해 앞뒤가 꽉 막혀서 부모가 소주잔을 들고 우두커니 창밖을 보는 사이에 사평은 펄펄 끓는 해물탕에서 꽃게를 꺼내려다가 눈물이 터졌다 인생의 뜨거운 맛을 보았다 처음으로 부모는 사평 때문에 바다에서 멀어졌다 자러 갔다 꿈에서도 미더덕을 씹어서 입안에 물이 가득했다 엄마, 화났어? 아직 화났어? 사평은 부모가 신선하게 잠든 사이에 깨어나서 햇빛 창가에 앉아서 부모가 그리워하던 이와 대화했다 너도 부모 되어 알리라 사평은 놀라 검푸른 바다를 마음에 엎지르고 커나가리라 그땐 몰랐으나 사평은 부모의 슬픔 냄새를 그때부터 잊지 못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이었다
- 김현
- 2018-11-01
[기획-인터뷰] '랩'소디 인 블루: 여섯 개의 트랙 ― 컨소울이라는 장르 이민하 어떤 실험은 자신의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즉흥적으로 쏟아 내는 몸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기록하는 것이 실험의 전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만난 래퍼 컨소울은 컨소울 자신의 음악실이자 실험실이다. 그러니까 1992년 11월에 태어난 그는 딱 26년짜리 몸 안에 작업실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문 앞에는 'Konsole'이라는 문패를 걸어 두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작업실은 한 평 한 평 평수가 늘어날 것이다. 컨소울을 만난 건 10월 1일, 우리 동네 '아나키브로스(Anarchy Bros)'에서였다. 골목 깊숙이 아늑하고 은밀하게 자리 잡은 이 카페는 지난해 봄 이삿집 구하러 다닐 무렵 찜해 두었던 곳이다. 그 후 가족들과 한 번, 지인들과 한 번, 이번이 고작 세 번째 방문이지만 몸보다도 마음이 머물기에 좋은 장소 같았다. 컨소울에게 단골집이 있다면 그리로 갈 참이었지만 부천에 사는 그는 흔쾌히 이곳으로 와 주었다. "다리는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요."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문자를 주고받아서인지 신기하게도 어제 만난 사이처럼 편안했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난 건 6월이었다. 낯가림이 있는 내가 낯가림이 있는 그에게 인터뷰를 청하고 미리 얼굴도 익히려고 만든 저녁 자리였다. 수에게 부탁했고 수와 동행했었다. 지난봄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며칠을 주저하면서도 끝내 뿌리치지 못한 건 어렴풋이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음악을 아꼈고 그라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터뷰 말고 이야기. 그보다 조금 앞서 그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러나 진심으로 "내가 그럼 밥 사 줘야겠네." 수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발목의 인대가 끊어져 수술 후 병원에서 3개월이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가을에 다시 만난 컨소울은 적당히 낮고 적당히 느리고 적당히 조용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음악, 소년 ― 그런데 이름 말이야. 영어로도 그렇고 한글 표기도 그렇고 어떤 게 맞아? ― 리셋 이후엔 Konsole만 써요. 그게 처음에 만들었던 거예요. 한글로는 옮기기 나름이니까 상관없어요. 흔히 '컨소울'로 알려져 있고 '콘소울'이나 '컨솔'로도 불리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다. 초창기 공연 때 라인업에 우연히 'Konsoul'로 표기된 이후 그냥 그렇게 써 왔다고 한다. 나도 처음엔 'Korean soul'쯤으로 짐작했었다. 흔한 말로 힙합 하면 '소울'이니까. 하지만 그의 작명은 의외로 단순했다. 게임을 즐겼던 중학생 시절 '콘솔게임(console game)'에서 착안했다고.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단순했다. 어느 날 온라인상의 게임 친구가 음악을 할 거라며 자작곡을 들려주었다. '난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는 생각했고 정말 해 버렸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어서 게임 할 시간에도 수업 시간에도 음악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해외 음악을 듣긴 했지만
- 이민하
- 2018-11-01
근면한 인생의 고소미 김현 주인님 오늘은 출근하며 저도 모르게 말해버렸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우수에 젖어서 바늘로 손목을 흠뻑 찔렀습니다 과연 제게 한이 있을까요 주인님은 한이 있는 사람을 매질하고 싶다고 하셨죠 울음이 없는 사람을요 매미 울고 작은 개 한 마리가 화단을 뛰어 다녔습니다 저는 죽을 결심을 하였습니다 주인님은 싫어하시겠죠 살아 있는 것이 한을 쌓는 것이니까요 핏방울을 꿰뚫어보면 보입니다 저의 밑바닥 숙변이요 냄새는 지독해도 먹음직스러워서 주인님이 제 숙변을 저의 가장 나중 지닌 것으로 여겨 주면 간질이면 해죽해죽 웃었습니다 인간의 우주란 이토록 광활하지요 저는 주인님이 일하고 온 발가락을 핥으라고 하면 좋아요 어쩔 줄 몰라요 허공을 향해 불알을 까고 두 손 두 발을 들었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영롱하죠 맛있는 겁니다 인간사는 주인님은 저한테 그렇게 예쁘게 굴어 놓고 가정에서는 점잔을 빼고 앉아 시대와 역사를 고려하며 혀를 차고 욕을 하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홍동백서조율이시를 따지겠죠 하찮은 인간이라는 것 그게 제가 주인님을 따르는 유일한 이유랍니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저만 흉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점심에는 매콤달콤한 주꾸미를 깻잎 위에 올려 먹으며 공 이사와 허 부장이 들려주는 지난한 노조의 역사를 청취하였습니다 노조 부심 오지고요 그런데도 공 이사는 전립선비대증에 시달리고 허 부장은 우울하여 개를 내다버렸습니다 그런 이들이 지난날 강성노조의 일환으로 투석하였다는 허풍선만으로도 알이 터졌습니다 식감이 재밌죠 알 중의 알은 임의 알 임의 알을 입에 넣고 굴려 보았습니다 어디까지 가나 가나 하니까 아주 가더라고요 태초로 임의 알에서 태어난 비굴과 치욕을 저는 어린 나이에 좋아했지요 대머리가 되려고요 그러니 주인님이 밤이면 밤마다 제게 가발을 씌울 때면 사타구니가 뻐근하고 눈물이 솟습니까 안 솟습니까 명색이 저도 과장인데요 저도 주인님의 갈라진 턱이 싫어요 핥고 싶어요 죽여주세요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저는 쌈무 위에 마지막 주꾸미와 날치알을 얹어 먹으며 기원했어요 오늘은 임도 먼 곳에서 헐벗은 마음이길 거룩하게 다리를 들고 오줌을 찔끔찔끔 싸다가 눈물 육수가 터져 마음으로 흘러 건널 수 없는 강을 이루길 주인님 주인님에게도 버젓이 임이 있겠죠 어딘가로 흘러가 버린 둘이서만 하다가 셋이서도 하고 넷이서도 하고 인류애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셨죠 그래도 오늘은 단둘이 해요 공이 허리를 숙이자 허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개새끼를 생각하노라 오늘은 세상이 참 아름답고 죽을래요 잠시라도 주인님의 밧줄에 목을 끼고 낑낑거릴래요 매질을 독점할래요 주중에는 고소하게 근면하게 살아 있었으니까요
- 김현
- 2018-1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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