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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 작성일 2019-06-01

[글틴스페셜]



무제



곽다혜




열일곱, 17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들 말하는 3년의 시작점. 달려야 하는 순간들만을 앞에 두고 나는 퍽이나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다들 그렇지 않을까.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확실히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희망찬 꿈과 현실, 그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해준 것은 특별히 더 거창한 것도 아닌, 지금에서야 말하는 나의 기억이다.


'검문 있겠습니다. 성인은 신분증 제시해 주시면 됩니다.'
사진으로만 본 DMZ, 실감나지 않았던 곳.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것을,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은 통일대교 위에서 검문을 받았을 때였다. 철저한 신분 검사와 무장하고 훈련하는 수 명의 군인들. 태어나 처음 겪는 검문에 나는 나를 찾기 위해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는 경계를 지나왔고, 그 경계의 안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로 차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꼈다. 처음 보는 얼굴들과 이름들 그러나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낭독회에서 신철규 시인은 '시인은 백조 같다'고 했다.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있지만 물 밑에서는 바삐 발을 움직이고 있다고. 비슷한 시를 쓰지 않기 위해, 다른 말을 찾아 머리끝까지 쥐어짜 내는 시인을 말한 것이었다. 시인은 '바닥에서 건져 올리는 것'이고, 시를 쓰려면 쓰는 사람이 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생생히 기억난다. 어둠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그 어둠 속에서 버티면서 색다른 말을 얼마나 찾아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박찬세 시인은 '~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쓴다고 했다. 나는 내 마음에 들게 써지지 않아 종이를 덮었던, 시간이 없다고 핑계 대며 책을 읽지 않았던, 노력은 하지 않으며 성공만을 바랐던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제일 아쉬웠던 점은 내가 그날 그 시간에 시집을 가져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책을 몽땅 사들고 가서 사인을 받고 싶다. 책 표지에 내 이름과 사인을 받으며 말하고 싶다. 그날 덕분에 저는 더 성장하게 되었다고, 바닥으로 내려가 버티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그러니 우리 같이 조금 더 버텨 보자고, 감사하다고.


눈을 감았다 뜨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올해 가장 춥다더니 별로 오지도 않던 눈이 이곳에서 하루가 지나니 가득 쌓여 있는 모습에 우리는 창문에 달라붙어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이 오며 새하얗게 쌓이는 풍경은 절경이었다. 하지만 폭설로 제3땅굴과 북한을 볼 수 있는 도라전망대는 가보지 못하고 도라산역과 도라산평화공원만 다녀오게 됐다. 도라산평화공원에서는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선물이 있다는 소식에 모두가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안 뛰었다. 언니들도 안 뛰었다. 같이 수다 떨고 사진을 찍으며 풍경을 감상했을 뿐. 저 멀리서 코와 귀가 새빨개지도록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사슴과 풍경을 구경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새하얗게 펼쳐진 눈에 최초로 내 발 도장을 찍는 것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영역에 내가 처음으로 도전한다는 기분이, 나의 발걸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짜릿함을 선사했다. 그저 하얀 눈 위에 내 발 도장을 찍는 것이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새하얀 눈 같은 꿈에 나라는 존재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하나씩 한 발자국씩 찍고 있으면 어느 순간 눈이 다 없어져 있지 않을까. 눈이 다 없어진 바닥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써져 있지는 않을까.


강영숙 작가는 '글 쓰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자유에 대한 제약을 받는 반면 허구의 영역은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다고, 그렇기에 자신은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학교의 제약, 사회의 제약, 우리는 모든 삶에서 제약을 받고 있지만 유일하게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인 상상의 영역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나의 글에 대하여 김선재 작가는 물었다. 이 글에서의 나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나이는 몇인지 등등에 대해 너는 설명할 수 있냐고. 입이 차마 열리지 않았다. 김선재 작가는 소설은 뻔뻔하고 정교하고 치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사소한 것까지도 설계하고 써야 한다고. 워크숍이 끝난 뒤 나는 한 세상을 그대로 책 한 폭에 옮겨 놓고 내 손으로 그 세계를 하나하나 이끌어 나가는 것, 그게 소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교하지 않다면 그 세계에는 하나하나 구멍이 날 것이고, 서서히 모이는 구멍은 언젠가 반드시 눈에 확연히 드러나게 될 테니까. 나는 그 길로 노트에 끼적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설은 하나의 세계라고. 내가 만들어낸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창조물이라고. 만들어낸 이상 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나라는 사람 속에 새겨 넣었다. 까먹지도 잊지도 말아야 할 것.
소설은 하나의 세계이고 창조물이다.


지혜의 숲에서 값진 책 선물을 받고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옮겨 보기로 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숨겨진 노력들을 찾아보는 방향으로. 새로 나온 따끈따끈한 책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손때가 묻어 있길 바라기로 했다. '나'라는 책을 들어 올리면 나에게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 있기를 바라기로 했다.


세상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 우리의 죄의 역사가 담겨 있는 곳, 그러나 무엇보다 찬란하게 꽃피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DMZ.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순간들. DMZ 남방 한계선에서 2km가량 떨어진 파주 캠프그리브스, 그곳에서 나는 진짜 나의 2019년을 시작했다.
















곽다혜

작가소개 / 곽다혜

작가 지망생. 2003년 춘천 출생. 성수여자고등학교 재학 중.


《문장웹진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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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협성마리나 G7]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인 날들 천운영 1. 여행과 나날 여행 짐 꾸리는 데는 꽤 능숙하다 자부하는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좀 고심을 많이 했다. 여행자와 거주자를 오가는 ‘여행과 나날’을 위해 필요한 것들. 가방 하나에 담을 수 있을 만큼만, 있어야 하는 것과 있으면 좋은 것 사이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것만 추려서. 목표는 기내용 캐리어 하나였는데, 추울까 불편할까 모자랄까 들었다 놓았다 하다 보니, 24인치 캐리어에 백팩까지 꽉 채우고 말았다. 그런데 또 막상 가서 풀어 보니 텀블러는 두 개나 챙겼으면서 꼭 필요한 약주머니는 통째로 두고 왔다. 비상약이야 그렇다 치고 일정 시간에 복용해야 하는 처방약들은 어쩌란 말인가. 짐을 풀다 말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내과를 찾아갔다. 딱 보기에도 연식이 오래된 병원이었다. 새로 진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진단서로 약만 처방받으면 될 일이니 상관없었다. 나이 든 간호사와 더 나이 든 대기실의 환자들. 대화로 짐작건대 서로의 사정까지 다 알고 지내는 단골들만의 병원인 듯했다. 할머니가 진료실에 들어간 지 꽤 지났는데 나올 기미가 안 보이자 간호사가 내게 다가와 변명하듯 말했다. 치매야 치매, 하루가 멀다 하고 와서 약 내놓으래. 소화 안 되고 허리 쑤시고. 약을 그렇게 드시니 소화가 안 되지. 오늘은 아들이 돈 훔쳐 갔다고 하소연. 원장님은 그걸 또 다 들어줘. 힘들게 왜 그걸 다 받아 주고 있냐고. 환자의 비밀인지 간호사의 하소연인지. 정감 있다 해야 할지 대책 없다 해야 할지. 오랜 기다림 끝에 들어간 진료실에서 마주한 것은, 데스크 간호가 왜 그리 세세히 문진을 했는지 알겠는 의사의 상태. 허리가 기역자로 꺾여 머리가 거의 책상에 닿을 것 같았는데, 그나마도 목을 못 가누는 어린애마냥 흔들흔들 매가리가 없는 것이, 의사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환자처럼 보였다. 의사가 내게 물었다. 어디 불편해? 불편한 거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다 들어줄게. 요즘 뭐 힘들어?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지혈증약을 먹어야만 되는 몸 상태를 말해야 하나. 하도 글이 안 써져서 이 먼 곳까지 왔다 말해야 하나.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의사가 재촉했다. 지금 고통스러운 게 뭐야? 다 말해 봐. 저 깊은 곳의 통증까지 끌어올려야 하나 어쩌나. 여기가 내과인가 정신과인가 성당인가. 그냥 처방전이나 내주시라고요, 하고 싶었다. 내게 들을 하소연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번엔 다른 걸 들어야겠다 나섰다. 어디 심장 소리 좀 들어 보자. 의사가 다짜고짜 청진기를 들이댔다. 숨소리도 아니고 심장소리. 나는 얼결에 외투를 벌리고 가슴을 밀었다. 이곳저곳 청진기가 지나갔다. 거기서 무슨 소리가 들리겠나 싶은 곳까지 구석구석. 이제 그만하시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을 때, 의사가 마침맞게 청진기를 떼며 웃었다. 잘 뛰고 있네. 잘 뛰고 있어. 못 뛰고 있으면 여기 왔겠냐고요,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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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서포터즈] 가능성의 길이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 - [문학주간 2025] 도움―닿기 문장서포터즈 2기 김이성 1 안녕하세요. 어느덧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네요. 개인적으로는 문장서포터즈 2기 ‘쓰담’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문학 콘텐츠를 여러분들께 소개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문학을 매개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 무척 보람찬 시간이었죠. 아마 이 글을 보고 계실 때쯤이면 새해가 밝아있을 텐데요. 저는 이번 원고를 구상하면서 파일 제목을 ‘세밑에서 새해로’라고 붙여놓았대요. 마지막 원고를 작성하며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과연 새해에는 또 어떤 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새해에도 역시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쓰담’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것처럼 무엇보다 가능성을 믿는 한 해가 된다면 좋겠네요. 최근에 읽은 소설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엄마, 나 소설 안 쓸래. 일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래.”1) (엄마는 이렇게 답하죠. “쓸 거면서 또 저런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앞의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렸어요. 일하고 사랑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말하는 인물의 태도가 미래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때로는 이렇게 작고 사소한 다짐이 우리를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길로 나아가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저도 이제 새해라는 가능성을 향해 첫발을 내디뎌보려 하는데요. 그전에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공유하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새 출발을 앞두고 있던 제가 문학의 도움을 받아 용기를 얻었던 순간이죠. 새해로 도약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 중인 분들에게 세밑에서 전하는 저의 후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그 순간을 전해보아요. 2 지난 2025년 가을, 일상을 지속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는 문학주간 행사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관련 소식을 찾아보았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 물리적으로 문학과 멀어져 있던 시기였기에 문학의 힘을 빌려 조각난 일상을 수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문학주간과 관련된 글을 찾아 읽고, 저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어요. : 기획의도 우리가 만약 어떤 트랙을 달리고 있다면 그리 머지않은 곳에 구름판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견고하고 상상할 수 있지만 막상 상상한 대로는 닿지 않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은 몹시 중요합니다. 높이 뛰어오르려면 적당한 타이밍을 생각하고 안정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죠. 문학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구름판을 감각하게 해줍니다. 내가 아닌 삶과 삶으로 이루어졌기에 분명 나인 세계 같은 것들이요. 문학은 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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