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9월호

  • 작성일 2021-09-01

기획의 말

2021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지은, 「귀를 찾아서」를 읽고 (《문장웹진》 2021년 8월호)

돌아보지 않아도 아는 표정
그 얼굴을 모른 척하기 위해
길 없는 곳을 헤맵니다.

문장웹진 9월호 살펴보기

옆자리 약혼자 키나

옆자리 약혼자 키나 주하림 베드로 성당 기둥에 발을 딛고 있는 천사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선 입장료를 내고 입국심사대를 거쳐야 하는데 인파 속 키나의 약혼자는 사라지고 키나는 하늘을 날기엔 너무 작은 날개들을 바라보고 있다 교황 방 치장을 위해 젊은 날을 석회벽에 그려 넣은 궁중화가 그가 매일 붓을 쥐고 올려봤을 천장의 암흑 그가 그렸던 마리아상은 전부 사랑하던 여자의 얼굴이었대 그녀 이름은 마르게리타 루티 나폴리 항구 레스토랑 키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마리게리타 조각을 집는다 버팔로 치즈 우유 비린내 키나의 약혼자는 약간 굳은 얼굴로 에스프레소잔 가라앉은 크레마를 젓는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나를 보며 윙크하는데 손등에 입맞춰 주는데 여름에도 가을에도 나폴리에선 아직 마피아들이 밥을 먹고 술을 팔고 키나는 그들을 피해 피자집에서 줄을 섰지만 호텔방으로 돌아와 그들에게 피자박스처럼 팔려가는 꿈을 꾸기도 한다 8월의 차가운 카푸치노, 다른 연인, 망각의 다른 얼굴 창문이 열릴 때마다 수음하는 옥상의 로마인 그것을 기다리는 키나 해변과 카페테라스에서 바닷바람에 타들어가는 담배 그때마다 키나는 고국의 절망을 암흑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생각한다 멀리 지중해 절벽에 둘러싸인 해변 검은 모래 검은 자갈들 바닷물이 밀려올 때마다 망각에 필요한 건 연습이 아니라 메이크업을 끝낸 얼굴이나 휘파람을 불며 키나를 걱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일지 몰라 잊지 못한 것들이 무엇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야 키나 너는 내게서 자유로워져 누구와 놀든 누구와 집에 가든 로컬버스를 타고 절벽과 언덕을 수없이 왕복하고 새벽이면 키나는 홀로 눈이 떠졌다 돈 포토 싸이런스 우리는 세속에서 죽었다 베드로 성당 천장으로 울려 퍼지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 로만 카라 검은 신부복을 입은 검은 피부의 사제들이 천장을 올려다보는 키나 곁으로 다가온다 내일은 북부로 가는 기차를 타 선반 위에 누군가 짐 싣는 걸 도와줄 거야 그에게 기대야지 잠든 그의 낮고 무거운 악몽 속으로 들어가는 내 옆자리 누군가의 약혼녀 키나

  • 2021-09-30
파유 破有

파유 破有 김언희 목구멍으로 치미는 머리통때문에 의도와는무관하게치밀어오르는머리통 숨통을틀어막는머리통 때문에삼키려는 죽을힘과 뱉으려는죽을힘때문에 과호흡때문에 나와나를 산채로 갈라놓는사랑 때문에나를반으로반의반의반으로쪼개는 이쑤시개가되도록쪼개는사랑 때문에막젓가락질을 배운아이가 서툰젓가락질로집요하게후벼파고있는눈알설익은 그눈알때문에화분을깨고나오는 징그러운뿌리처럼내두눈을 뚫고나오는나도 모르는눈빛 때문에자다가벌떡 일어나앉아헉헉헉짖게하는이름때문에 과호흡때문에비닐봉지를 덮어쓴얼굴때문에 매순간이과 호흡인 매순간때문에

  • 김언희
  • 2021-09-30
POV

POV 이세인 비 내리는 가을밤이면 나는 이불 밖으로 발을 내놓고 눕는다 잠든 사이에도 발은 어디든 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풀테니 다리 위를 뛰어가고 있다 비가 쏟아지고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고 다리 밑에서 흙탕물이 휘몰아친다 오늘은 나를 태운 비행기가 떠나기 이틀 전이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토끼 모양 섬을 온몸으로 껴안기 위해 맨발로 빗속을 달리기로 한다 누군가의 로만 바스 누군가의 코니쉬 파이 누군가의 런드리 그것들이 시야를 빠르게 지나가고 나는 이토록 빨리 뛰어 본 적 없이 언덕을 오른다 35도 각도로 기울어진 지붕 위를 내달리면 내 세상도 딱 이만큼 기울어진 것 같아 아늑하고 평온해진다 멀리서부터 감색으로 물드는 하늘 골목에는 민둥한 승용차 껍데기들 그리고 오래된 지붕들보다 조금 더 기울어진 녹색 언덕 아래 구름 조각을 던지고 있는 사람과 원반을 찾아 뛰어가는 커다란 개가 있다 나는 빗속으로 비와 함께 추락한다 구겨진 보닛을 퉁 퉁 두드리면 언제 찌그러졌냐는 듯 다시 판판해진다 내 발자국, 사라진다 로만 바스의 사람들은 목욕탕에 앉아 생굴 먹는 것을 즐겼고 나는 빗속에 투명하게 앉아 다시 자라지 않을 이 언덕을 내려다본다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들을 사랑해 버려서 내 시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자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한다 이 꿈에서 젖은 버드나무 냄새가 난다

  • 2021-09-30
[리뷰] 월간 〈읽는 극장〉 5회 – 작정하고 ‘추락’

[리뷰] 월간 〈읽는 극장〉 5회, 〈작정하고 ‘추락’〉 리뷰 아르코예술극장 개관 40주년 기념 월간 읽는 극장 5회, “작정하고, ‘추락’”연극〈추락ll〉에 대해 나누는 연출가와 번역가의 문학 낭독회 예술은 우리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고, 쾌락을 즐기거나 맘껏 눈물 흘릴 수 있게도 해 줍니다. 또 어떤 예술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무례함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있는가 하면, 무시하고 모른 척하고 있던 그 지점을 끄집어내어 대화의 장에 올려놓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관객으로서 불편한 작품을 봐야 할까요. 불편한 그 낯선 감각을 마주한 후 다시 그전처럼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라면 오히려 다르게 질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불편함이 관객인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 줄까요? ‘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가, 불편함을 왜 느껴야 하느냐’라는 거부감 섞인 불평 대신 ‘그럼 우리는 그 불편함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떨까요? 그 설명되지 않는 낯선 감각과 마주할 때, 여태껏 세상에 존재해 온 언어는 왜 이를 왜 설명하지 못하는지 의문을 품어보고자 합니다. 7월의 〈읽는 극장〉은 〈작정하고,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존 쿳시의 소설 『추락』을 원작으로 한 연극 〈추락Ⅱ〉을 연출한 김한내 연출가 그리고 연극에 관객으로 함께 한 송섬별 평론가가 자리했습니다. 연극 〈추락Ⅱ〉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 루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사는 50대 백인 남성으로 대학교수입니다. 어느 날 루리는 자신이 가르치는 멜라니라는 학생과의 성추문을 혐의로 학내 조사위원회에 소환돼 권고사직을 당하고, 딸 루시가 운영하는 농장으로 떠나 함께 지내게 됩니다. 루리는 쉬기도 하고 루시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기도 하는데 그러던 중 루시가 폭력적인 사건을 당합니다. 원작과 연극의 중심이 되는 이 이야기에는 성폭력과 젠더 불평등, 인종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 등 다양한 문제와 맥락들이 섞여 들어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연극은 힘의 질서가 휘청이며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서 행해지는 혐오와 증오에 대해 말합니다. 송섬별 번역가는 원작 소설에 대해 좋아하기도 싫기도 한 복잡한 소설이라고 감상을 밝히며, 루리와 루시라는 두 명의 주요 인물에 대한 묘사가 불균형할 정도로 치우쳐져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소설 자체가 루리 교수의 행적을 따라 진행된다거나 그의 내면까지 상세히 서술되어 그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설명할 기회를 충분히 가지는 반면, ‘루시의 내면은 루리 교수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수수께끼처럼 제시’된 것이죠. 김한내 연출가의 말한 바로는 연극을 본 관객들 역시 ‘그런 폭력을 당한 후 아버지의 적극적인 설득과 여전히 다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의 위협에도 왜

  • 2021-09-06
[책방곡곡] 경북 영주 샘터서점(3회)

[책방곡곡] 경북 영주 샘터서점(제3회) : 동시, 똑똑! - 김현숙 동시집 『아기 새를 품었으니』 - 모임 / 2021-08-09, 저녁 7시, 샘터 3층 사회/원고정리 : 권화빈참여자 : 의상대사, 우옥영, 김미경, 우병훈 책읽기 모임 ‘영주시 100인 독서클럽 휴(休)’ : 책을 통해 삶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 권화빈 :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벌써 8월 입추가 지나 이제 선선한 바람이 창에 밀려드는 가을 문턱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8월 9일 오늘 모임의 책 이야기를 진행할 사회 권화빈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김현숙 동시인의 동시집 『아기 새를 품었으니』를 가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마지막 모임을 통해 이야기 나눌 이 동시집(2020, 3차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도서)은 어릴 적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보냈던 나의 과거의 기쁨과 행복, 추억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또 시골 길을 걸어가면서 맞는 소소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시를 통해 어릴 적 순수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킬 수 있기에, 동시가 주는 행복은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동시집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듣고 싶어요. 의상대사 : 코로나 바이러스 급증으로 집콕 하는 이들이 늘어나 거의 모이지 않고 있습니다. 저도 근신(?) 중입니다. (일동 웃음) 우옥영 : 여름 휴가철이 코앞이라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 같아서, 여러 가지 걱정을 하면서 집콕 하고 있어요. 웬만한 큰 볼일 아니면 나다니는 걸 줄이고 있어요. 김미경 : 사랑의 교회 전광훈 목사가 8·15 광화문 집회를 선동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우울해져요. 사회 각계각층에서 협조가 잘 되어 하루빨리 코로나 정국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의상대사 :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2차 접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힘든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병훈 : 어서어서 우리들의 일상이 회복되어 웃는 모습을 양껏 보고 싶습니다. 권화빈 : 안동 SK 바이오사이언스 임상 3상 착수가 진행되고 있어서, 국내 백신이 조만간 우리 곁에 찾아올 듯합니다. 이번 여름휴가는 집에서 그냥 세숫대야에 얼음 넣어 발 담그고(세숫대야 피서법?) 조용히 시간을 요리하며 즐기시는 게 상책인 듯하네요! 물론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어야겠지요. (웃음) 그럼 오늘의 책 이야기 상자를 슬슬 열어 볼까요. 표지에서 따스함과 정겨움이 느껴지고, 아기 새와 어미 새의 품어 주고 품게 되는 생명의 신비로움이 가득 담겨 있는 동시집입니다. 책의 표지는 그 책의 얼굴과 같아요. 책의 첫인상이라 평생(?)을 좌우해요. 우옥영 : 책 표지를 보니까 가까운 숲에서 본 둥지 위의 새들을 상상하게 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기 새를 지키기 위한 어미 새의 모정, 우리네 어머니의 삶과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동 웃음) 김미경 : 내 집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조금

  • 2021-09-01
단 하나의 아이

[단편소설] 단 하나의 아이 정이현 ? KBS 라디오 문학관에서 오디오북을 만나볼 수 있어요 누구나 어린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한나는 어린이라는 대상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당신도 한때는 아이였다거나 모든 어른의 내면에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웅크리고 있다거나 하는 문장을 들으면 바나나 껍질을 삼키다 만 것 같은 기분이 될 뿐이었다. 노 키즈 존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지나치게 소란스러워서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이라면 그게 누구든 얼마나 어리든 얼마나 늙었든 자신이 앉아 있는 곳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노 피플 존. 한나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세계는 거기에 가까웠다. 그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 케이 파라디소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한나가 새로 일하게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근방에서 가장 큰 곳이었다. 20대 초중반 몇이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막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기 전에 사회 경험을 쌓으러 왔다는 남학생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손이 빠르고 성격이 싹싹해서 금세 매장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여기선 네가 에이스야. 알바생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매니저가 농담이랍시고 그런 말을 던질 때 모두 못 들은 척했다. 한나는 그 말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나머지는 쓸모없다는 뜻인가 하는 불안감을 지우기 힘들었다. 레스토랑 바깥의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 냉정한 세계였다. 어느 날, 브레이크 타임에 주방 한구석에서 와인 잔의 물기를 닦다가 그와 사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는 다른 지역의 관광전문대를 휴학 중이라고 했다. 한나도 휴학 중이라고만 말했는데 그는 굳이 학교 이름을 물어 왔다. 학교 이름을 들은 그가 놀라는 시늉을 했다. “와, 한나 씨 공부 잘했네. 그런데 왜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느닷없이 훅 밀고 들어오는 사람은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엄마는 종종 말했다. 목적이 있는 거야. 만만하게 봤거나. 한나는 엄마를 신뢰하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 말만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나는 조그맣게 어깨를 으쓱하는 시늉을 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다니다 만 대학은 4년제였고 행정구역상 서울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 그것이 그 학교가 가진 유일한 장점이었다. “과외라거나 학원이라거나 그런 데 있지 않아요?” “그런 자리 구하기가 쉽지도 않고.” 한나는 덤덤하게 말을 잘랐다. “왜요? 요즘엔 과외 연결해 주는 사이트도 많은데.” “저 같은 경우는, 뭐랄까, 좀 애매해서 딱히 경쟁력이 없더라고요.” 사실에 가까웠다. 간간이 과외 사이트나 어플리케이션을 훑어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선뜻 구직자로 등록할 결심은 하게 되지 않았다. 중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수능 영어시험에서 몇 등급을 받았는지 명기해야 하고, 대학에 어떤 전형으로 합격했는지까지 밝혀야

  • 정이현
  • 2021-09-01
메리의 집

[단편소설] 메리의 집 박지음 내 안에는 불 켜진 방이 있다. 그 방은 선과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평생 꿈꾸며 찾던 공간. 메리의 집을 찾아가려고 모인 오늘, 나는 그녀들에게 묻고 싶었다. - 쓸데없이. 또 나가서 싸돌아다닐 생각이냐? 양말을 신는 내게 엄마가 소리 질렀다. 나는 거실에 있는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입은 붉은 조끼가 어딘가 익숙했다. - 엄마 어디 가? 엄마는 대답하지 않고 내 방문을 닫았다. 문밖에서 중얼거리는 엄마의 말이 들렸다. -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나이만 먹어서. 옛날 같으면 애들 대학교까지 보낼 나이야. 좀 얌전하게 집에 있을 일이지… 나는 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명치가 꽉 막혔다. 가슴을 두드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려가라. 내려가라. 제발, 내려가. 현기증이 나며 눈앞이 흐려졌다. 식은땀에 겨드랑이가 끈적거렸다. 다시 샤워해야 할지 모른다. 내려가. 제발 내려가. 전세가 오르고 직장에서 잘리지 않았다면 엄마의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 년 넘게 일해서 얻은 내 아파트는 가격이 세 배로 뛰더니 전세도 두 배로 올랐다. 원래 전세대출을 끼고 있던 터였다. 직장에서 잘리고 나자 방법이 없었다. 전세가 내려가지 않는 한, 내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집은 경기도 외곽에나 가능했다. 나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사들였던 소품으로 꾸민 내 공간을 정리했다. 엄마의 집으로 들어갈 때 내가 들여놓을 수 있는 짐은 한계가 있었다. 나는 소품 대부분을 온라인 중고 마켓에 팔았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엄마가 나가자 갑자기 숨이 쉬어졌다. 조여졌던 명치가 풀려 덩어리가 내려갔고 뇌에 산소가 돌면서 눈앞이 맑아졌다. 나는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오늘 그녀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기를 키워 준 공간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땅에 자기 공간을 만든 여자 생각이 났다. 메리 린리 테일러. 너는 어디에서 살고 싶니? 엄마가 들으면 놀고 자빠졌다고 비아냥거릴 테지만. 왜냐하면, 나는 어디서 살고 싶다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까. 어디든 받아 주기만 하면 일할 직장이 절실했고, 엄마의 집 외에 나를 재워 줄 공간도 없으니까 내게 너무 멀고 철학적인 질문인 줄 알면서도 묻고 싶었다. 질문과 답은 돈이 들지 않으니까. 남들 살 집만 짓다가 지 살 집은 사 놓지도 못한 것이. 엄마는 TV에서 집에 대한 프로만 나오면 투덜거리곤 했다. 엄마의 집에 들어와서 한동안 방에만 있었다. 가시방석이었다.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았고 먹어도 체했다.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사람이 문밖 소파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어서였다. 어디든 나갈 곳을 찾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방에 누워서 넷플릭스 채널을 돌려보는 내게 잔소리를 하던 엄마는 어느 날부턴가 출근하듯 나갔다. 엄마는 아빠의 연금을 받으며 생활했기에 일하지 않아도 노후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었다. 교회에서 집사들과 봉사활동과 전도를 하고 다녔던 것으로 안다. 나는 엄마의 삶을

  • 박지음
  • 2021-09-01
소녀와 산

[창작 - 그래픽노블]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소녀와 산 박은선 작가소개 / 박은선 홍익대학교 조형대학 애니메이션전공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영화전공 2010년부터 웹툰작가로2018년부터 다큐감독으로 활동중 《문장웹진 2021년 9월호》

  • 박은선
  • 2021-09-01
겨울 거리를 다니는 기술

겨울 거리를 다니는 기술 정고요 의사의 왕진 가방에는 환절기의 병이 담겨 있다. 가방을 열면 잔기침이 터져 나오고 바닥에는 열이 끓는 이마가 잠들어 있는데 거리에는 차가운 것이 내리고 있다. 겨울이면 깨어나고 봄이면 잠드는 것. 간혹 이른 봄의 이상한 기후는 불면증 때문이다. 확실히 날씨도 불면을 한다. 날씨의 불면을 걱정하는 사람은 불면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간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면서 밤이면 깨어나고 아침에 잠든다. 숱하게 원하였으므로 원하지 않는다. 겨울을 혹은 겨울 아닌 것을 믿지 않으면서 의사의 왕진 가방은 무거워진다. 겨울의 서식지에서 차가운 것을 다 맞는 의사의 어깨는 무겁지 않다. 이를테면 달력에도 없는 날씨 속에 의사는 있다. 한 번 맞기 시작하면 두 번째부턴 의미 없는 것들 사이에 의사는 있다. 의사를 대신하여 의사의 외투가 젖는다. 완성할 것이라고는 상처밖에 없는 사람에게로 의사는 간다. 그들에게 가는 것 말고는 어떤 방법도 없다. 의사는 걷는 대신 달려간다. 차가운 것 가운데 입김이 인다. 13월의 날씨가 펼쳐져 있는데 잠시 따뜻하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적절한 겨울이다. 잠들지 않아서 겨울을 자랑하는 사람의 침대 맡에 도착하여 의사는 왕진 가방을 연다. 그것은 거대한 상자처럼 열린다. 거대한 상처처럼 열린다.

  • 정고요
  • 2021-09-01
눈동자를 그리려는 순간

눈동자를 그리려는 순간 김지녀 어떤 목소리가 나올까 말하기 직전의 입술은 플라스틱처럼 굳어 있는데 뿌리를 내리려는 씨앗처럼 살짝 벌어져 있는데 눈동자가 그려지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나를 향해 돌진할 것 같아 나는 나를 들킬 것 같아 눈동자를 그리지 못한 얼굴 앞에서 검은색 갈색 초록과 파란색을 붓에 묻히기만 했다 눈동자 없는 눈을 찬바람이 불어 나오는 동굴처럼 놔두고 거의, 라고 적었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 2021-09-01
나의 탄소 일기

나의 탄소 일기 김해선 위층 베란다에서 공사하는 소리가 난다 유리를 깎는 소리 벽에 구멍을 뚫는 드릴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뿌리가 깨진 어금니를 뽑아내던 기계소리와 비슷하다 어금니 조각들을 핀셋으로 제거하자 구덩이가 생겼다 구덩이는 내부를 보여주지 않고 다물지도 않는다 텅 빈 구덩이에 혀끝이 닿을 때마다 깊은 협곡을 지나 국경을 넘을 때 마주쳤던 구덩이가 떠오른다 절벽 아래 팬 구덩이에서 아이 울음소리 염소와 닭 우는 소리가 났다 참새들이 사라진 지붕 위를 날아가고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드릴 소리에 빨려 들어간다 비누 거품을 묻히고 면도하는 소리도 가까이 온다 맨 끝에 있던 깨진 어금니처럼 베란다 건조대에 걸려 있는 빈 옷걸이가 흔들거린다 창문 너머 보이지 않는 투명한 뿌리를 달고 비행기가 날아간다 높은 산등성이를 지나 다른 나라로 들어갈 때 멈추지 않고 타던 냄새는 무엇이었을까 어디선가 거위 우는 소리가 들린다 봄부터 시큰거리고 피가 나던 자리에 약솜을 틀어막아도 핏물이 배어 나온다

  • 김해선
  • 2021-09-01
〈오늘의 그래픽노블 이야기 3〉 – 공동의 작업, 사이의 장르 - 이동은 ‧ 정이용의 작품 세계

[리뷰 - 그래픽노블]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오늘의 그래픽노블 이야기 3〉 공동의 작업, 사이의 장르 - 이동은 ‧ 정이용의 작품 세계 김유진 1. 글과 그림이 만나는 공동 작업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을 처음 접했을 때 두 작가의 역할 구분이 궁금했다. 그림책이든 그래픽노블이든 대개 글 작가와 그림 작가를 구분해 ‘모모 글, 모모 그림’으로 표기하지만 그들이 출간한 모든 책에는 그들의 이름만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 날개에 적힌 작가 프로필을 꼼꼼히 읽고서야 이동은 작가가 글을, 정이용 작가가 그림을 담당하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최근작인 『진, 진』과 『토요일의 세계』에서는 둘의 프로필마저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쓴다. “주로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동은이 글을 쓰고,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정이용이 그림을 그린다”라고.) 글과 그림으로 각자의 역할을 분리해서 내세우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그들의 실제 작업 과정이 단지 역할 분담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긴밀한 공동 작업이기 때문일 거라고 예상했다. 이 글을 준비하며 인터뷰를 찾아보니 역시 그랬다. 《씨네 21》(2021.1.13) 인터뷰에 따르면 이들의 작업 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이동은이 완성한 시나리오를 한 번에 주면, 정이용이 그 원고를 피드백 하고, 그렇게 수정해서 완성한 원고로 함께 콘티 작업과 캐릭터 디자인을 한다고 한다. 이후 정이용이 매일 이메일로 원고를 보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밀하고 탄탄한 공동 작업인 셈이다. 의견을 조율하는 좀 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위 인터뷰를 직접 인용하는 게 나을 듯하다. 정이용시나리오를 받아 작업하면서 디테일을 고치는 일이 꽤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납득이 되어야 그릴 수 있어서 납득이 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이동은 작가에게 설정을 바꾸자고 할 때도 있다. 편집적인 것을 바꿀 때는 이동은 작가에게 이야기한다. 이동은정이용 작가가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주로 의견을 주는 부분은 어떤 인물의 감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친절하다는 식이다. 그런 질문은 영화 작업을 할 때 키 스태프나 배우들이 하는 질문과 비슷하니까 시나리오를 보완하거나 보완하기 싫으면 싸우거나 한다. 정이용 작가의 그림 해석에 생각이 다를 때도 있다. 〈환절기〉에서 용준과 수현 외모가 비슷하게 그려졌다. 영화는 단역이 잠깐만 나와도 구분이 되는데, 만화는 인물마다 그림체로 구분이 확실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낸다. - 〈씨네 21〉(2021.1.13) ‘만화 〈진, 진〉 펴낸 이동은· 정이용 - 감정을 절제하고 덜 보여주는 것이 더 어렵다’ 첫 책 『환절기』의 공동 작업이 우연히 시작되었다 해도 2013년 출간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방식의

  • 2021-09-01
누구라도 낳아야 한다

누구라도 낳아야 한다 임수현 한 아이가 지나갔지. 내가 낳은 사람 같았어. 호수를 사이에 두고 내 허락도 없이 살아 있었지. 손을 잡고 싶었어. 아이가 아름답고 호수가 아름다워. 나는 내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언제나 의지가 부족하다. 호수를 향해 빵을 던진다, 빵을 따라 날아가는 새들, 내 손을 보고 있는 새들. 내가 낳지 않은 새들, 새들이 내게 명령했으면 좋겠다. 아이를 낳으라고 너는 낳을 수 있잖아, 하지만 새들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것보다는 새가 알을 낳는 게 언제나 더 현명하다. 새들처럼 사랑하고 낳으라고 나는 명령하고 싶다. 앞에 가는 사람들에게, 이따 만날 친구들에게. 부드러운 빵을 나누어 주면서 말해 본다면 승산이 없지는 않겠지. 난 정말 알에서 죽고 싶다. 아이의 흔적을 따라 빵을 떨어뜨린다. 너 한 입, 나 한 입, 나누어 먹는 심정. 까만 개미들이 따라오고, 개미들은 이제 그만 번식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하면 빵이 아깝다. 이 빵은 친구 줄 건데. 이제 곧 엄마가 될 친구가 먹을 빵인데, 미진, 혜영, 수희, 난영. 그리고 나까지 우리 중에 누군가는 항상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한 번도 사람을 낳지 않은 사람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빵을 사러 가는 것이다. 그렇게 호수를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호수에 못 들어간다. 물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친구들에게도 물은 안 주고 빵만 줄 것이다. 미진아, 이게 선순환이라는 거다. 호숫가를 통과하며 나는 생각했다.

  • 임수현
  • 2021-09-01
계속하는 시

계속하는 시 신미나 이 시는 한 점에서 태어난다 하늘 높이 높이 공을 던져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아래로 아래 로 떨어지는 한 움큼의 진주알을 계단 아래로 던져서 토, 독, 토드드드득 구르고 타고 넘고 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것 저항과 율동 사이에서 두 점을 찍은 선분의 양쪽을 잡아 늘여 직선이 되려는 집요한 운동 양쪽으로 한없이 길어지는 나아가는 화살표 눈에 보이지 않는 시는 기체 흐르면서 몸의 모양을 바꾸는 것은 언어 부피는 늘지만, 무게는 변함없는 시의 형식 비정형의 선 사선으로 내리다 원이 되는 빗물처럼 곧은 선이 굽은 선을 만나 반직선이 되고 다시 이어지는 만화경 속에 이윽고 눈의 결정

  • 2021-09-01
백지와 마주하기-서序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백지와 마주하기-서序 : 시 읽기 현장1) 김준현 백지 : 백지(白紙)를 공간으로 인식할 때 흰색은 텅 빈 것입니다. 무의 상태-부재를 증명합니다. 이 공간에 존재(활자)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 모든 작가의 숙명입니다. 종이 위에서 채도가 다른 흰 물감을 존재로 인지하는 화가들의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글자가 견인하는 의미와 소리의 영역에서 색 또한 폭력적인 구분 속에 묶인 하나의 단어-의미에 불과할 뿐입니다. 빨강, 주황, 파랑, 노랑, 보라. 이렇게 써놓아도 우리의 눈은 다만 이토록 흰 종이와 이토록 검은 글씨-백을 배면에 두고 존재하는 흑의 다양한 모양새를 통해 시시각각 의식으로 전환되는 글자들을 볼 뿐입니다. 면벽행위 : 2020년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집으로 나온 책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에서 진은영 시인이 쓴 산문 「기침, 종이, 죽음, 또 기침」의 두 구절을 가져옵니다. “문학을 해서 다행이다. 펜, 종이, 영혼만 있으면 된다. 어쩌면 영혼이 안 필요할 수도 있다. 끄적거리고 있는 흰 종이 위에서 찾아내면 되니까.” “나는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떠돌다가 종이에 닻을 내리기라도 하듯이 내가 곧 써내려갈 흰 종이 뒤에 숨겨져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집과 거리, 그들의 삶과 죽음을 문득 생각한다.” 여기서 흰 종이는 세계를 가리고 있는 막(膜)인 동시에 작가 개인의 영혼 옮기기에 선행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집과 거리, 그들의 삶과 죽음’에 닿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마주할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면벽행위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인연-생각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그러니 활자로 응집되어 뜻이 되려는 것들을-속가(俗家)의 인연을 뜻 아닌 것으로 두어 세계의 바깥쪽-무(無)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모습은 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하다고 했던 『금강경』의 한 구절을 생각할 때 지금 현재 이 세계의 형상은 언젠가 사라질 것-무로 돌아갈 것-지금 여기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바라보았을 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 절대적 허무 앞에서 영혼을 준비하지 않은 채 쓰는 자들에게 이 흰 세계-무엇을 말하는 순간 사라지는 침묵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깜지 : 중학생들이 ‘깜지’라는 벌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깜지 쓰기’는 종이를 오로지 글자만으로 빽빽하게 채워 캄캄하게 만들어야 하는 작업입니다. ‘잘못했습니다.

  • 2021-09-01
청포도

청포도 손진은 부연 지붕 아래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품을 하며 물방울로 맺히는 햇빛에 게으르게 머릴 굴려 본다 이봐, 오늘 밤 어때? 칙, 담배 꺼내 물고 달 처녀 불러내던 갈기 구름 아래 어슬렁대며 햇살 낚아채던 한 번씩 장대비에 두개골 깨지고 싶은 건달의 시절은 진즉 담을 넘어 떠나버렸다 우아하게 분사되는 스프링클러 앞에 사육우처럼 하루 더 속절없이 또 하루 몸피 늘려 가는 머리칼 바람에 날리지도 못하는 저치들은, 별수 없이 수인이 다 돼 간다 헌데 분이 묻은 하품을 잘 익었다고 푸푸, 옛 추억 내뱉는 입술은 또 무언가 칸칸이 포개진 방 안에 머릴 포개고 트럭에 실려 가는 출옥수가 왜 저리 심드렁한가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는 말은 수정될 때가 되었다 팅팅 불은 저 우울의 안구 앞에서 * 이육사, 「청포도

  • 손진은
  • 2021-09-01
그들의 가나안

[단편소설] 그들의 가나안 조영한 1 뉴질랜드(New Zealand)는 두 개의 섬, 북섬과 남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뉴질랜드 국민의 칠할은 도시들이 있는 북섬에서 살았고 나머지 삼할은 자연경관이 보존된 남섬에서 살았다. 북섬에서도 도시가 차지하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드물었고 다수의 지역은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산악과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래전 식민지 시대의 수도이자 현재 최대 도시인 오클랜드(Auckland)에도 중심부에만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고 주변부로 갈수록 인구밀도가 낮아지면서 양, 알파카, 포섬, 키위, 사슴과 같은 동물들이 머무는 영역이 많았다. 노스 쇼어(North Shore), 오클랜드 북쪽 권역에 속하는 도시였다. 그곳은 교육열이 높아서 학군이 형성된 지역이었고 시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주거가 밀집해 있었다. 그곳의 인구는 약 이십삼만 명이었으나 주거지 근처로 자연의 정서를 간직한 초지와 바다가 있어서 공기는 맑았고 하늘에 매연이 드리우는 날도 적었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서 토 베이(Tor Bay), 머레이즈 베이(Murrays Bay), 마이랑이 베이(Mairangi Bay), 캠벨스 베이(Cambbells Bay), 브라운즈 베이(Brawns Bay)와 같은 마을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서 중간 지대는 마이랑이 베이로 곳곳에 카페와 식당, 펜션과 풀밭이 있었다. 앞뒤로 이웃한 바닷가 마을들의 색채가 장밋빛이라면 마이랑이 베이의 빛깔은 석양빛이었다. 모래톱에 깔린 모래는 수시로 바람에 흩날렸고 바람막이숲에 서 있는 종려나무들은 통일감이 옅고 개체성이 강한 모습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마이랑이 베이의 차도와 산책로에는 잡풀과 자갈이 많았다. 사람들은 바닥에 살얼음이 깔릴 정도의 날씨만 아니면 신발도, 양말도 벗고 맨발로 거리를 다녔다. 그들은 스스로를 키위(Kiwi)라고 불렀고 그러한 이름을 가진 키위새와 과일 키위를 좋아했다. 미풍이 불어오는 산책로에는 피케 티셔츠와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아이들이 걷고 있었다. 여자들은 금발에 눈빛이 새파랬으며 남자들은 발육이 빨라서 키가 껑충했고 어깨는 튼튼했다. 온종일 햇볕을 쬐어도 키위들의 피부는 붉어질 뿐 거뭇해지지 않았고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있어서 돌부리가 있는 바닥을 디뎌도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 그는 모래톱에서 걷고 있었다. 해풍이 코끝에 닿았고, 모래가 바람에 떠올라서 얼굴과 팔뚝을 스쳤다. 하늘에 구름이 덮여 있어서 날씨는 흐렸으나 주변이 어두운 날에도 바다 저만치에 떠 있는 무인도 랑기토토(Rangitoto)는 산책객의 눈에 띄었다. 그 섬은 구멍이 뚫린 회색빛 현무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정상과 가까운 곳에는 붉은 꽃을 피워낸 포후투카와(Pohutukawa) 나무들이 빽빽했다. 섬은 밤낮과 날씨에 상관없이 포후투카와를 지니고 있어서 언제나 불타는 모습으로 보였다. 날이 저물었다. 그는 운동화에 묻어 있는 모래를 털고 둑길에 올라왔다. 둑에는 벤치와 화덕이 있어서 날씨가 화창한 날이나 휴일 저녁이면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서 바비큐 파티

  • 버닝해머
  • 2021-09-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