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을 그리는 소녀
- 작성일 201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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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을 그리는 소녀
내 눈은 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높다. 행복한 마음에 커다란 운동장 잔디에 앉아 푸른 촉감의 잔디에 손을 얹으면 그와 동시에 세상이 하얗게 변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세상에 내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내 앞에 보이는 건 연필심이 유난히 까만 연필 하나. 난 그걸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다시 편안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안심하며 자리에 앉으면 다시 까만 연필심이 보인다.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놀랍도록 눈부신 햇살이 비친다.
너 늦은 거 아니야? 엄마가 재촉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난 천천히 가방을 싼다. 그래 펜 있고, 연필도 있고, 아 맞다 오늘 비가 온댔나? 우산도 챙겨야 하나? 이런 저런 생각에 짐을 싸는 내 손이 점점 더 느려진다. 그럴수록 엄마의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너 가긴 가는 거야? 얼른 나와 엄마도 약속 있단 말이야. 알았어요. 지금 나가요. 서둘러 엄마의 차에 앉으면 들뜨기 시작한다. 얼른 하고 싶다. 오직 이 생각이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운다. 여기.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꼭 챙겨 먹고. 알지? 그럼요. 저 가볼게요. 언제나처럼 엄마는 내게 만 원 짜리 한 장을 쥐어 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높다란 건물. 딱 봐도 도시적인 분위기에 번잡한 골목. 전형적인 학원가에 위치해 있는 이곳.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분위기는 언제나 아늑하다. 특히 그 건물 5층, 그 곳으로 가면 더.
선생님 저 왔어요. 언제나처럼 경쾌하게 들어선 건물 안은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어? 자리를 옮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에 나가서 다시 봐도 여긴 ‘꿈 그림.’ 꿈 그림이 분명한데, 내가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왔던 그 곳이 맞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두침침한 내부에 보이는 건 깔끔하게 정돈 된 분위기에 달랑 남아 있는 책상 2개. 어떤 것도 남아 있질 않았다. 내가 1년을 다니며 그렸던 ‘꿈’의 그림. 그 어떤 것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그림을 그리던 모든 친구들도, 선생님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오늘이 내 생일인가? 내 깜짝 생일 파티인가? 라는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할 만큼 이곳 분위기는 전과 달랐다. 작은 미술실이지만 아무 것도 없이 책상 2개만 달랑 남아 있으니 책상 2개가 방을 모두 메워 버린 기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책상 위에 포스트잇이 남아 있었다.
밥은? 먹었어?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큰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먹었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밥은 무슨. 내가 지금까지 몇 시간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그림 많이 그렸나 보구나. 하나 가져와. 도대체 엄마는 언제 보여주게. 응?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가 약간 취해 있다. 취하면 귀여워 지는 우리 엄마의 부탁이 오늘은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보여드릴게요. 너무 늦지 마요. 나 이제 끊어요. 전화를 끊고 나니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아, 내가 그림을 그리던 시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구나. 그림을 그릴 때는 몰랐는데, 혼자 있으니 너무도 크게 느껴진다. 왜 일까. 왜 ‘꿈 그림’이 문을 닫아야 하는 걸까. 선생님은 왜 내게 미리 말해주시지 않은 걸까. 애들은 왜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걸까. 선생님은 왜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포스트잇만 남기고 가버리신 걸까. 난 왜 엄마에게 더 이상 ‘꿈 그림’에 다닐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은 걸까. 엄마가 술에 취해서? 말해도 기억 못할까봐? 아니, 그건 분명히 아닌데. 이 말도 안 되고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밥도 안 먹고 건물 앞에 주저앉아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렇다고 온 종일 여기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지나니까 배도 조금씩 고파오고, 피곤하기도 하다. 그림을 그릴 때는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던 시간이 이렇게도 길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왔던 그대로 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얼굴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뭐지. 이렇게 익숙한 얼굴은. 내 뒤로 지나쳐 간 그 애를 가만히 쳐다보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온다. 아. 이게 뭐야. 배고픈가? 하지만 이상하다.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 내가 배고파서 예민한 거겠지.
엄마가 카레라이스를 해놓고 나가셨다. 분명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돈도 주셨는데, 또 카레라이스라니. 그러고 보니 엄마 없이 혼자 집에 있던 적도 얼마 없는 거 같다. 배도 고픈데 잘 됐네. 카레라이스 배 터지게 먹어야지. 자리에 앉아 밥을 푸고 카레를 붓고 막 먹으려는데, 눈에 띄는 게 보인다. 약? 하얀 봉투에 돌돌 쌓여 있는 건 분명 약이였다. 엄마, 어디 아프신 건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어디가 편찮으신 거야. 보통 봉투에 무슨 병원이라고 적혀 있을 텐데, 이 약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가 않다. 불안함이 밀려와 입맛도 떨어진다. 잠이나 자야지. 근데 그럼 이제 난 매일 집에 있는 건가? ‘꿈 그림’에 갈일도 없으니까. 이런 생각이 드니 다시 우울해진다. 내가 사는 이유 중 하나가 ‘꿈 그림’이었는데. 아무튼, 난 그렇게 엄마가 오시기 전에 잠이 들어 버린 것 같다.
일어나! 얼른 빨리! 아침인 거 같은데 엄마의 목소리가 어제보다 더 큰 거 같다. 참, 내가 말씀을 안 드렸지. 이제 더 이상 ‘꿈 그림’은 없다는 걸.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저기 엄마. 얼른 일어나야지. 저기 엄마. ‘꿈 그림’ 없어졌어요. 깨자마자 조심스럽게 일어나 말씀드리니 표정이 굳어지신다. 뭐라고? 엄마에게도 ‘꿈 그림’은 큰 존재였나. 엄마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니 좀 이상하기 까지 하다. 사실 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꿈 그림’이 문을 닫았거든요. 건물 안이 까맣고 책상 두 개만 놓여있었어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허탈해서 수업 시간 동안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엄마의 표정은 이제 전보다 훨씬 더 초조해지고 굳어간다. 아니, 아예 파랗게 질렸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엄마.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엄마는 뭔가에 맞은 것처럼 질린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셨다. 난 오랜만에 낮잠을 자기 위해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얼마나 잔걸까. 몸이 개운할 정도로 자고 일어나니 배가 고프다. 어제 저녁도 먹지 않고 자서일까. 엄마. 저 일어났어요. 배고픈데 밥 좀 주세요.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는데, 엄마가 없다. 지금 어디 가실 시간이 아닌데? 어디 가신 거지. 뭔지 모르게 드는 다급한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을 가는데도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문자를 보내 봐도 답이 오지를 않는다. 어제 밤, 약을 볼 때부터 느껴졌던 불안감이 점점 더 심해진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 어쩌면 그게 ‘꿈 그림’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
엄마. 저에요. 전화도, 문자도 답이 없으니까 불안해서 메시지 남겨요. 받자마자 바로 연락 주세요. 밥 먹고 있을 게요.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것 뿐 이었다. 진짜 생각해보면 난 ‘꿈 그림’과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하루 만에 무기력해지는 걸 보니까. 어제 먹지 못한 카레를 먹으려 하는데 문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엄마가 분명했다. 문 앞에 가보니 엄마가 계셨다. 아까보다 더 질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엄마. 내가 음성 메시지 남겼는데 보셨어요?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얘야. 엄마의 눈빛이 이젠 흔들린다. 슬퍼 보이고 힘들어 보인다. 점점 더 확실해진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게. 엄마 무슨 일 있는 거죠. 그렇죠? 저 약은 뭐예요? 우선 저것부터 설명해 주세요.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엄마가 왜요?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왜지. 엄마도 이상하지만 나도 이상해. 어제부터 나도 정말 이상해.
잠을 자려고 누울 때마다 가위가 눌려 잠이 좀처럼 오지를 않는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고통스러웠을지, 아팠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고통스러워도 좋으니까 제발 이 모든 게 꿈이길 하루에도 백 번씩 바란다.
아침이 밝으면, 내 일과는 우리 아이를 깨우는데서 시작한다. 깨우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아서 내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다. 잠을 잘 때 우리 아인,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가끔 깨우기 전에 울기도 한다. 소리 없이. 우리 애가 듣지 못하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이 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지.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꿈 그림’에서 왜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지. 아니,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아이가 찾아가는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단 하루도 술 없이는 살 수 없게 됐다. 술이라도 먹어야, 내 술주정 때문에 기분이 나아지니까. 아니라면, 아니었다면 난 지금 이 아이를 보지 못했을 테니까.
내 아이 스케줄 못지않게 내 스케줄도 여유롭다. 병원에 갔다가 취할 때까지 술을 먹고 아이를 데리러 가기 2시간 전부터 집에서 자면서 아이 연락을 기다리는 일. 그게 내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이고, 전부이다. 어떤가요? 전보다 많이 나아졌나요?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아시다시피 기억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돌아오는 게 아니에요. 아시죠? 특히 따님 같은 경우는 더더욱……. 네, 알아요. 아는데, 그래도 진전이 전혀 없는 건가요? 언제까지 우리 아이는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죠. 언제까지……. 병원에 도착하기 전. 항상 울지 말자. 오늘은 울지 말자. 수십 수백 번을 다짐해도 항상 마찬가지다. 울지 않을 수는 없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자, 여기요. 이젠 이 방법이 마지막이에요. 이 방법 이외에는 없어요. 이건 자기 의지의 문제거든요. 1년이라는 긴 시간을 매일 같이 울었던 내가 불쌍해 보인 걸까. 아니면 정말 이게 마지막이라고 여긴 걸까. 뭐가 됐든지 간에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마지막’ 이라며 약을 내밀었다. 나머지는 우리 아이의 의지라면서. 저기요, 어머님. 1년 내내 어머님을 만나면서 항상 궁금했던 게 있는데, 여쭤 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우리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난 뭐든 말할 수 있으니까. 의사 선생님이 몇 초를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이유가 뭔가요? 아이가 기억을 되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쉬운 질문이다. 아니, 하지만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그 날은 내가 40년을 살아오면서 있었던 모든 날 중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날이었다. 파란 하늘이 너무도 눈부신 어느 날이었다. 내 아이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내가 남편과 이혼 했을 때도 그 앤 날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너무도 성숙하고 사려 깊었고,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게 미술이었다. 공부는 중상위권 정도였는데, 내가 보기엔 하면 충분히 상위권에 갈 만한 능력이 있는 애였다. 우리 애여서가 아니라 정말로. 난 아이를 설득 시키고 싶었다. 공부 해봐. 내가 보기에 넌 충분히 오른다니까? 지금 하위권도 아니잖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의 대답은 하나였다. 나 엄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지금 보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 뿐 이에요. 이거 하나만 부탁드려요. 난 이혼했고, 그렇다고 잘 살지도 않았고, 그 애에겐 형제도 없었다. 그 애에게 내가 공부를 하라고 강요하는 건 이젠 내가 미안해졌다. 그렇게 그 아인 미술 학원에 다녔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도 들리지 않고 미술 학원으로 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다가 집에 왔다. 그런 아이의 입가에는 항상 미소가 걸려있었다. 난 그걸로 충분했다. 아이가 행복한 걸로.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음에도 짜증한 번 안내고 웃어준 걸로.
언제부터였을까. 아이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던 건. 어느 순간부터 아프다면서 학원을 안 가려고 하고, 잘 가던 학교마저 조금은 꺼려하는 기분이었다. 난 그 때 아이가 변할까봐 무서웠다. 아빠가 없는 자식은 티가 난다는데. 난 우리 아이가 그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도 내 자존심 때문에도 난 그 소리만은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를 다그쳤다. 엄마가 너한테 많은 걸 바라니?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 그림. 그거 하게 해주는데 더 이상 엄마가 뭘 더 해줘야 해? 잘 다니던 학원도 핑계대고 빠지고, 이제는 학교까지 가기 싫어하고. 엄마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니. 응? 내 다그침에 아이는 내게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듣고 있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 아이는 내게 아프다는 말도, 힘들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묵묵히 학교와 학원을 오고 갔다. 그게 문제였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제발 그 때로 날 돌려주기만 한다면 난 딱 그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아이를 다그치던 그 때로. 이젠 다그침 대신 아이를 안아줄 수 있는데. 이젠 정말 안아줄 수 있는데…….
여보세요? 어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쉬고 있던 나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네, 여기 경찰인데요. 경찰? 순간 멈칫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소리에 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높은 빌딩. 그 빌딩 5층에 있는 작은 미술 학원. 바로 아이가 다니던 ‘꿈 그림’ 이라는 미술 학원이었다. 난 미친 듯이 울며 달리며 그곳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주저앉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전등이 나가 까만 미술 학원에는 주위에 경찰이 가득 했고, 그 가운데는 우리 아이가 있었다. 책상은 달랑 2개 있었고, 책상에는 파랗고 아늑한 하늘 그림 한 장만이 놓여있었다. 아이는 울고 있었다. 울려는 의지가 아니라 마치 비가 쏟아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가득 웅크리고 앉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아이를 일으키려는 경찰들을 모두 뿌리치며 가만히 울고만 있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팔과 다리, 심지어 얼굴까지 파란 멍으로 가득했다. 옷이 반쯤 찢겨져 나간채로 그렇게 아이는 울면서…….
나와 아이는 같이 병원에 입원 했다. 아이의 모습을 본 난 그 자리에서 쓰러져 실려 왔고, 아이는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울던 아이는 나와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고 했다. 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나는 우리 아이에게 달려갔다. 얼굴이…… 성한 곳이 없었다. 아이를 보자마자 또 미친 듯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이렇게 아픈 우리 아이의 엄마였다. 가슴이 정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니, 무너진다고 하기에도 너무 부족했다. 우리 아이가 당한 건, 우리 아이가 힘들었던 건, 우리 아이가 이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건 우리 아이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성폭행 때문이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술 없이는 살지 못하게 된 것이.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내가 그 때 아이에게 다그치지만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다정하게 한 마디만 해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건데. 다 나 때문이었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려 했던 걸 말렸어야 했고, 아이가 힘들어 하던 이유를 물어 봤어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어 하던 나에게 전화가 왔다. 정신 병원이었다. 의사는 마치 내게도 병이 있는 것 마냥 나를 쳐다봤다. 그래, 나에게도 병이 있는 것 같을 정도로 난 무너져 있었다. 적어도 아이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깨어난 아이는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다시 그 끔찍했던 일이 있기 전 같이 행복해 보였다. 아이를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차올랐지만 더 이상 울 수는 없었다. 애써 웃고 있는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같이 애써 웃어주는 일이었다. 전화를 받고 찾아간 정신 병원에서 나는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여기 앉으세요. 아이의 상태를 봤는데……. 우리 아이는 몸도 아팠고 마음도 아팠다. 그 때 그 일로, 우리 아인 그 때 그 일을 모두 잊었다. 의식적으로 우리 아이가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난 똑똑하지 않았고 많이 배우지 않아서 세상에 어떤 정신병이 있는지 잘 모른다. 그냥 의사 말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생각이 그 기억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더 심각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아인 모든 기억을 잃으면서도 그림을 좋아했다. 깨어나자마자 우리 아이가 찾은 건 그림 도구였으니까. 우리 아이는 기억을 잃었지만, 장소와 배경을 잊지는 않았다. 이미 폐쇄 되고 없어진 ‘꿈 그림.’ 우리 아이는 상상 속에 아직도 그 곳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아이가 가는 곳은 그저 그 아이가 상상하는 공간이었다. 그 아이는 지금 상상 속에서 꿈꾸고 있다. 자신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과, 자신이 있어서 힘들었던 그 곳을 우리 아이는 상상 속에서 기억하며 상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 아이를 데려다 주면서, 5층을 바라보면 너무도 황폐하다. 바보가 되어 버린 우리 아이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 저 곳은. 희망을 없애 버린 저 곳은. 내겐 너무나도 역설적인 곳이었다.
아이의 기억을 찾아 주려고 하는 이유요? 네.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대로 사는 게 아이에게 더 행복할 수도 있어요. 상상 속의 ‘꿈 그림’을 제외하고 댁의 따님은 정상입니다. 아이가 기억을 찾게 되면 많이 힘들어 집니다. 아시잖아요. 물론 잘 안다. 아이가 다시 그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찾아내면 힘겨워 진다는 사실을. 당연하겠죠. 아마 알게 되면 다시 나와 아이 둘 다 몇 달을 힘들게 보내야 할 거에요. 하지만 이렇게 1년을, 다시 2년을, 10년을 살 수는 없어요. 우리 아인 지금 바보에요. 바보……. 자기가 지금 웃으면서 행복해 하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도대체 어떤 일 때문에 지금 자기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상상 속의 공간만을 오고 가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라고요!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오른다. 아플 것이 분명하지만, 나도 1년간 미친 듯이 힘든 고통 속에 죄책감에 덮여 살아 왔듯이 우리 아이는 그 것보다 더 힘들 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자신 있다. 우리 아이를 다그치지 않을 자신이……. 아파하는 아이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줄 자신이…….
아이가 점점 느끼고 있다. 자기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내가 의사 선생님께 받아 온 약을 빻든지 갈든지 해서 아이 몰래 아이에게 먹이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를 혼자 두고 나가기도 했다. 아이가 학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거기에 책상 2개와 포스트잇 하나만 남았다고 말했으니까. 약을 먹자마자 아이가 바로 기억해내는 것이 무서워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게 내가 아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아이는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살아 왔던 1년. 그 1년을 앞으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엄마가 운다. 왜 우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그냥 머리만 너무 깨질듯이 아프다. 다신 너를 다그치지 않을 거야. 너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엄마는 그 때처럼 하지 않을 거야. 기억해봐. 힘들어도 기억하려고 해 보자. 내가 옆에 있어 줄 거야. 엄마의 말이 하나도 이해가 안 가지만, 난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알 것 같다. 엄마에게 지금 있는 문제는 나랑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걸. 엄마가 내게 뭔가를 지금 요구하고 있다는 걸. 그런 엄마가 너무나 힘들어 보인다는 걸. 엄마가 뭔가를 계속해서 말한다. ‘기억’ 해보자고. 넌 바보가 아니라고. 머리가 점점 더 고통스럽게 아파온다. 깨질 것 같이 고통이 느껴진다. 비명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아무 이유도 없이 난 지금 울고 있기까지 하다. 머리가 너무 깨질 듯이 아파 와서 엄마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다. 내 몸 어딘가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만! 엄마 그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비명 소리가 나온다. 내 말에 엄마의 울음도, 말도 모두 멈췄다. 난 그저 멍하게 엄마를 바라본다.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엄마를 본다. 내가 ‘꿈 그림’에 갔을 때, 책상 2개랑 포스트잇만 남아 있었다고 했죠? 엄마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포스트잇에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엄마가 가만히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그림이 있었어요. 파란 하늘이. 세상에 이렇게 예쁜 그림이 있나 싶을 정도로 파란 하늘이. 사진을 찍은 것 같았어요, 순간 저는. 근데 그 그림이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꿈 그림’은 없어. 라고. 엄마에게 어떤 대답을 바랬던 것도, 내가 뭔가를 기억해보려고 노력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난 그냥 이야기 하고 있었다. 엄마. 나 그 파란 하늘을 찾고 싶어요. 보러 가고 싶어요. 엄마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살짝 웃는다. 비웃음도, 아프고 슬픈 웃음도 아니었다. 작은 미소였다. 나 역시 엄마의 작은 미소에 같은 미소로 화답하고 엄마를 지나쳐 조용히 집을 나섰다. 포스트잇에 그려져 있던 그 파란 하늘을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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