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김병호, 「세상 끝의 봄」

  • 작성일 2013-05-07
  • 조회수 2,530





김병호, 「세상 끝의 봄」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느냐고

물어오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 시·낭송_ 김병호 -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97년 《월간문학》,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 연구서 『주제로 읽는 우리 근대시』가 있다. 2013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 출전_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문학수첩)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다른 것이 아닌, 꽃을 쓰는 일에는 무슨 생각이 딸려 오는지요. 꽃을 쓸어 묻는 일에는 무슨 기억이 딸려 오는지요. 살아온 기억보다는 그 너머의 것, 세상에 오기 전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것만 같지 않는지요?

신(神)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한 영혼이 있습니다. ‘이쪽’의 삶에 묻어나는 질문의 무늬들이 끝내 지워지지 않아 견습 수행자가 된 한 영혼이 있습니다. 막 시작한 또 다른 생이 목련 꽃의 낙화들을 쓸고 있습니다. 멍이 든 얼굴들을 쓸고 있습니다. 어머니였다가 아버지였다가 또, 한때 보고 싶은 이였다가 이내 빗자루 끝에 쓸려가는 부질없는 얼굴들.

실은 목련도 밤새 서성이고 망설이며 보따리를 싸서 떠나온 꽃인지 모릅니다. 멀고 먼 밤을 걸어서 온 꽃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 견습 수녀님, 제 얼굴을 쓸고 있는 목련 나무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중심’에 서는 일의 내력이 이러할 것입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추천 콘텐츠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익명

    수녀님의 인생같은 봄이네요. 떨어진 꽃잎을 보니 쓸쓸한 생각도 드는 군요.

    • 2013-06-18 12:57:37
    익명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