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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난초」

  • 작성일 2013-06-03
  • 조회수 2,480




이병기, 「난초」

1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冊)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시_ 이병기 - 1891년 전북 익산 출생. 주시경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수학하고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가람시조집』, 『역대시조선』, 『국문학전사』, 『국문학개설』, 『가람문선』 등을 간행하였다. 연희전문강사, 서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8년 작고하였다.

낭송_ 홍서준 - 배우. 뮤지컬 '우리 동네', '위대한 캐츠비' 등에 출연.

출전_ 『난초』(미래사)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정정화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봄꽃으로는 아마도 마지막 차례로 개량종 철쭉이 그 화려한 빛깔을 뽐내다가 막 떨어졌습니다. 꽃 곁에 앉았습니다. 꽃 곁에 앉으면 잠시나마 이 '가죽 자루'도 식물성이 된 듯합니다. 꽃의 오고 감, 그 빛깔과 향기로 싣고 오고 싣고 간 뜻이 무엇인지...... 앉아 있어봅니다.
가람 선생. 뵌 적 없고 그 생가 한번 찾아가본 적 없으나 왠지 나의 할아버지나 되는 듯한 분. 그분의 덤덤하기 그지없는 일기장를 넘겨보면서 '그렇지, 그렇지, 그럴 뿐이지' 하며 혼잣말을 했었지요. 대가란 과연 몇 겹은 벗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시끄럽디 시끄러운 세상입니다. 시시비비가 난무합니다. 세상 잠시 등 뒤에 두고 난을 곁에 두었습니다. 옛 책 뒤적이나 깜빡 잠들다 깨니 난이 피었습니다. 모르면 모를까 어찌 그 꽃을 두고 자리를 뜰 수 있을까요. 이 할아버지의 마음 심지에서부터 번져 나오는 기쁨이 보입니다. 책을 넘길 때마다 향기가 일어납니다. 문장들이 다 향기였을 겁니다. 여기 무슨 시비가 있겠습니까. 그저 참일 뿐입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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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난초 향기는 물밀듯 밀어, 책에 묻어오다.

    • 2013-06-19 10:30:0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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