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驛사망유희

  • 작성일 2013-06-13
  • 조회수 733

驛사망유희

 1. 당산역

그러니까 2차 호프집을 나와 노래방을 갔다. 들어가자마자 캔맥주로 건배부터 하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첫 곡은 나를 포함한 신입 인턴들의 쿵따리샤바라. 흥 반 고통 반으로 노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니 오 부장이 새로 딴 맥주 한 캔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강선구 인턴 똘끼가 장난이 아니네, 라는 괴상한 건배제의와 함께 나는 맥주를 마셨고 안주로 집어든 새우깡이 입 안에서 ‘바삭’ 소리를 냄과 동시에 타임머신을 탔다.

7시30분. 집에서 나왔어야 할 시간에 잠에서 깼다. 어제 입은 양복 그대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잠이 든 모양이었다. 꼴에 귀소본능이라고 용케 집은 찾아왔네. 싸고, 씻고, 닦고를 거의 동시에 한 후 자주색 셔츠와 검은색 양복바지를 입고 집에 나선 시각이 7시 50분. 공식적인 지각은 면하겠지만 인턴들은 보통 30분 일찍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 지하철 9호선 당산역 앞에 도착했다. 버스 후문이 열리자마자 머리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몇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질 수 없지. 머리의 물기도, 뜀박질도.

기나긴 계단을 지나 열차 플랫폼에 다다랐다. 9호선은 출퇴근 러시아워 타임엔 10분에 한 번씩 급행열차를 운행한다. 즉, 급행열차를 한 번 놓치면 100분과도 같은 1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행히도, 지하철 위치 전광판을 보니 급행열차는 전 정거장을 막 출발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그나마' 적은 플랫폼 앞에 서서 호흡을 골랐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 신논현, 신논현 행 급행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방송이 나옴과 동시에 줄을 선 사람들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 열차를 놓치면 나는 인턴으로서의 관례를 떠나 그냥 공식적인 지각이었다. 열 명의 인턴 직원 중 6개월 후 정직원이 되는 인원은 단 두 명. 그리고 상사들이 귀띔하길 인턴들을 평가할 때 가장 반영이 많이 되는 사항은 출퇴근 현황이라고 했다.

문이 열렸다. 팝콘 터지듯 사람들이 밀려나왔다. 오랜 전쟁에서 살아남은 패잔병처럼 다들 지치고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약 20분 후의 내 모습이 아닐까. 그 와중에 들려오는 기관사의 청천벽력, 출입문 닫겠습니다. 타기는커녕 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문을 닫겠다니 이게 웬 부조리한 소리인가.

전투가 시작됐다. 나는 양팔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앞 선 사람의 등을 밀었다. 내 앞 사람도 앞의 앞 사람의 등을 밀었고, 내 뒷사람은 내 등을 밀었고, 내 뒤의 사람은 뒤의 뒤에 사람에게 등일 밀렸다. 그렇게 도미노처럼 밀고 밀려 꾸역꾸역 지하철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닫겠다는 말 좀 그만해. 나는 채 들어가지 못한 몸을 구겨 넣기 위해 앞사람의 등을 어깨로 들이 받았다. 여기저기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나 하나만의 원인은 아니었다. 옆에 선 50대 아저씨는 부비부비하듯 엉덩이부터 들이밀었다.

전쟁은 끝났다. 패배한 사람들이 객실 창문 밖에서 울상을 지었다. 기관사도 아직 술이 덜 깼는지 그놈의 출입문 닫겠다는 말을 출입문이 닫힌 다음에도 계속 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지하철은 출발했다. 이제 행위 예술이라도 하는 듯한 기괴한 자세로 약 20분을 참는 일만 남았다.

내 양 옆에는 20대의 덩치 큰 남자와 40대의 마른 남자가 내게 등진 자세로 서 있었다. 마치 '좌 청년 우 중년'에게 호위 받는 기분이었다. 내 뒤에는 아담한 체구의 여고생이 없는 틈에서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내 등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

검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20대 여자였다. 등 쪽이 유난히 깊게 패인 원피스라 가슴 앞으로 엑스 자를 한 내 양 팔뚝에 여자의 맨살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부담스러워 팔을 내렸다간 여자의 허리나 둔부에 닿게 될 테고, 아예 팔을 내려버린다면 서로 민감한 부위끼리 맞닿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자세가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승객 중 절반 이상이 고속터미널 역에서 내린다. 혹시 이대로 깊은 잠에 들어도 사람들 틈 사이에 섞여 자동으로 내리게 될 터였다.

검은 원피스가 뒤를 돌아본 건 국회의사당 역을 통과한 직후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양 옆을 살폈다. 다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었다. 여자의 시선이 아무래도 내 쪽에 가까웠다. 앞에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얼굴이 무척 하얬다. 이목구비는 평범했으나 군살 없고 피부가 좋아 남자들이나 동성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고백 꽤나 받았을 타입이었다. 그런 여자가 4년 째 솔로인 나를 빤히 바라본다니, 가슴이 두근거려야 정상이겠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두근거리긴 했는데 사랑에 빠진 심장박동과는 거리가 먼 ‘콩닥콩닥’이었다.

"이봐요."

여자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때마침 지하철은 여의도역에 도착했다.

2. 여의도역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여의도역부터 동작역까지는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훨씬 많은 곳이다. 열리는 문에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상관없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거기에 몸집이 작은 여성이라면 내리기가 매우 힘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리기도 전에 사람들이 밀려들어온다면 꼼짝없이 지하철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결국 발만 동동 구르다가 내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고속터미널 역까지 가는 것이다.

내 옆의 옆에 있는 40대 여성이 딱 그랬다. 좀 내리자고 소리 소리를 질렀지만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이곳에서는 대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밀려들 무렵에는 본인도 포기했는지 한숨만 연발하며 눈을 감는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아줌마 왜 급행을 타셨어요.

"이봐요, 아저씨. 내 말 안 들려요?"

검은 원피스였다. 뭐랄까, 이 상황에서 여자가 나를 부른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었다고 할까. 자세가 불편하면 말없이 등을 한 번 튕겨주는 것만으로도 해결될 일이었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지하철이 다시 움직일 무렵 나는 대답했다.

"네?"

검은 원피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글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서 있는데요?"

검은 원피스가 잠시 다른 곳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더욱 매서워진 눈빛으로 나를 다시 쳐다봤다.

"왜 이쪽 방향으로 서 있는 건데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뭐랄까, 정말로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가 싶은, 사실은 다른 일로 나를 추궁하고 싶은데 그에 대한 꼬투리를 찾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이 상황에서 생겨날 수 있는 덫은 거의 하나로 압축되므로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결백했다.

"이쪽으로 내리니까요."

"그래서 내릴 때까지 이 방향으로 서 있는 게 정상이라 이거죠?"

자꾸 질문만 받으니 짜증이 났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뭔가요?"

검은 원피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내 질문에 잠시 주춤했지만 페이스는 유지했다.

"그럼 측면으로 서 있는 사람은 내리는 곳이 없는 거네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이쯤 되자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무료한 공간이었다. 핸드폰을 들여다 볼 최소한의 공간조차 없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눈을 감고 번뇌에 시달리는 것만이 전부였다. 재미를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지루함이란 죽음과도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들을 구원한 메시아가 된 셈이다.

"팔을 왜 그러고 있는 건데요?"

"뭐가 잘못됐나요?"

"제 등에서 계속 꿈틀꿈틀하시잖아요."

"밀고, 밀리다보니 그런 거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다리는요? 다리는 왜 자꾸 움직이는데요?"

"자세가 불안하니까요."

"제 머리에 대고 숨은 왜 그렇게 쉬시는데요?"

"네?"

나는 끝내 할 말을 잃어 되묻고 말았다. 검은 원피스가 승기를 느꼈는지 치고 들어왔다.

"지하철 탈 때부터 굳이 제 뒤에 선 거 다 알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만지고 싶어요?"

"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벌어지다니. 검은 원피스가 워낙 확신에 차 있어 사람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상대가 이목구비가 불균형하고 체중이 많이 나가는 중년 이상의 여자였다면 대부분 내 편이 들어주겠지만, 애석하게도 검은 원피스는 예쁘고 몸매도 좋았으며 젊었다. 남자들조차 내 편이 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서 몸 안 돌려요? 왜요? 더 창피 당할래요?"

여자는 이제 승리를 확신했는지 내게 쐬기를 박기 시작했다. 쇠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눈앞이 핑핑 돌았다. 도무지가 비현실적이었다. 꿈일지도 몰랐다. 어제 그렇게 과음을 했잖은가. 그냥 꿈이라 확신하고 귓방망이를 후려칠까.

"네?"

같은 말만 계속하는 내가 미웠다. 별 수 없었다. 머릿속에 다른 단어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집에서 야동이나 보시고 방향 돌리라고요, 아저씨."

야동. 그래 남자라면 으레 본다는 그 야동. 건강한 남자의 상징이라는 괴 소문으로 더욱 당당하게 포장된 그 야동. 모르는 남녀 혹은 인간과 동물의 성교를 훔쳐보며 저 예쁜 여자 혹은 저 동물과 성행위를 하면 어떨까 하는 망상을 품게 해주는 그 야동. 평소 소원했던 성기와 나의 사이를 가깝게 해주는 바로 그 야동.

하지만 나는 4년 전 연인과의 이별 이후로 야동과도 작별했다. 그렇게 얘기하면 꼭 참기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일관되게 대답해 왔다. 힘들지 않다고. 왜 안 힘들어? 안 꼴리니까. 왜 안 꼴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물론 친분이 두텁지 않은 사람에게는 순화해서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저 야동 안 보는데요?"

대답이 적당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기저기서 남자들이 픽픽 웃는 소리는 들렸다. 그 웃음의 의미는 뻔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이 야동을 보지만, ‘거의 모든’과 ‘모든’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이건 어떤 정숙하고 신성한 맹세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고 흥미가 생기면 언제든지 다시 볼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4년 간 야동을 보지 않았다. 그 뿐이었다. 왜 아침마다 똥을 싸느냐고 물어본다면 아침마다 똥이 마렵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듯 본능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그럼 너는 여자에 아예 관심이 없느냐? 아니, 왜 없겠는가. 여름만 되면 눈이 핑핑 돌아가는데. 그저 야동을 안 볼 뿐이라고.

"아저씨가 야동을 보든 안 보든 내 알 바 아니고요. 불쾌하니까 좀 떨어져 주시죠."

야동은 하나의 키워드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의 투쟁본능에 불씨가 붙었고 물에 젖은 장작들에는 휘발유가 떨어졌다. 이대로 몸을 돌린다면 나는 검은 원피스의 말처럼 성추행을 한 사람이 된 거고, 많은 사람들이 SMS에, SNS에 지하철 9호선 무슨 남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공유하겠지. 억울하다. 4년 간 야동도 안 봤는데. 억울하다!

"말이 좀 심하네요. 그리고 저 아저씨 아닙니다."

"그럼 뭐 오빠라고 불러드려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줌마."

"뭐라고요?"

검은 원피스가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그 시점에 지하철은 다음 역을 도착했다. 이번 역은 노량진, 노량진 역입니다. 9호선 일반열차나, 1호선으로 갈아타실 분들은 이번 역에서 하차하시길 바랍니다.

3. 노량진역

출입문이 열렸다. 전 역에서 하차에 실패했던 40대 여성이 이번에야 말로 내리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사람들 틈을 비집었다. 간신히 출입문 근처까지는 도달했으나 밀려드는 인파에 떠밀려 부메랑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성은 처음보다 한층 깊이 있는 한숨을 내뱉었다.

출근시간 지하철 역 최고의 지옥구간답게 도저히 없을 것 같은 틈을 벌려 사람들은 들어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혔다. 신장이 작고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다음 역까지 가는 동안 호흡곤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급기야는 정신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검은 원피스였다. 내 쪽을 바라보던 그 자세로 인파가 밀려들자 의도치 않게 내 품에 와락 안기는 꼴이 된 것이다. 찌그러진 표정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차니 짜증이 확 솟구쳤다. 물론 프리지아 샴푸냄새는 싫지 않았다.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장난해요?"

검은 원피스는 어떻게든 틈을 벌리려고 끙끙대며 내게 말했다.

"제 쪽에서 붙었나요? 누가 장난을 한다는 겁니까."

나 역시 있는 힘을 다해 여자와의 틈을 만들었다. 덕분에 주위 사람들만 죽을 맛일 터였다. 뒤에 있던 여고생은 마침내 핸드폰 만지는 건 포기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지하철이 출발할 즈음엔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나와 검은 원피스가 서로 끌어안고 몇 분을 견디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샴푸냄새는 못내 아쉬웠지만.

"아까 몸을 돌렸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요. 혹시 이것도 노린 건가요?"

"그러니까 방향을 틀면 해결되는 문제였나요?"

"해결되죠.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거니까."

"등인가요? 엉덩이가 아니고?"

"뭐라고요? 와, 진짜 변태네."

"이성적으로 얘길 해요. 등보다 엉덩이가 더 돌출되어 있으니 서로 뒤를 돌아보면 당연히 엉덩이가 먼저 닿잖아요. 아줌마는 엉덩이보다 등이 더 튀어나왔나보죠? 무슨 노틀담의 곱추도 아니고."

"누가 아줌마에요."

"그럼 뭐 누나라고 불러드려요?"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번 공격은 컸다. 그로기 상태였던 내가 카운터펀치를 날리자 사람들도 흥미를 다시 느낀 기색이었다. 실제로 압박하던 사람들이 자진해서 틈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일종의 '특설링'이 형성된 셈이다.

"의도적으로 제 뒤에 서서 팔과 다리로 몸을 터치했잖아요. 이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한 게 잘못된 일인가요? 아저씨 같은 사람 때문에 여자들이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말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거라고요."

"전제부터 틀렸어요. 제가 양 팔을 안 들었으면 아줌마랑 저는 더 붙었을 거고 그랬으면 닿는 부위가 팔과 다리로 그쳤을까요? 이런 아수라장에서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는 붙게 마련입니다. 아니, 아줌마는 지금 앞에 사람이랑 전혀 접촉 없어요?"

"어쩔 수 없는 것과, 의도적인 건 다른 거예요. 아저씨는 탈 때부터 다른 자리로 갈 생각 안 하고 제 뒤에 섰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지하철에서 빈 공간에 자리를 잡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그게 하필 아줌마 뒷자리였다고 이걸 몸을 더듬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하는 건 오버죠."

"아줌마 소리 자꾸 할래요? 보자보자 하니까."

"아저씨 눈에는 아줌마만 보이는 법이죠."

"거…"

이야기가 이정도 쯤 진행되자 내 옆으로 세 사람 건너 있던 오지랖 넓은 남자가 끼어들었다. 진짜배기 아저씨였다.

"몸 닿는 게 그렇게 싫으면 급행열차를 타질 말았어야지."

검은 원피스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장이 풀렸는지 나는 의도치 않게 한숨을 쉬었다.

"같은 남자라고 편드는 거예요?"

나는 승기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했다.

"남녀 싸움으로 몰고 가지 마세요. 이건 아줌… 아니 당신과 나 둘의 문제입니다. 기본적인 지하철 에티켓에 관한 문제라고요. 보세요. 지금 당신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더 협소한 공간에서 지하철을 타게 됐습니다.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조차 당신에게 빼앗긴 거라고요."

검은 원피스가 씩씩거리며 나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혼잡한 지하철에서 서로 몸이 닿은 것을 문제 삼는다면 대한민국에 성추행 범이 아닌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그 혐의는 당신도 피해갈 수 없겠죠. 이런 혼잡한 지하철을 매 번 이용해 왔었다면 말이에요."

검은 원피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달라지는 건 조금씩 붉어지는 눈시울뿐이었다. 특별히 울릴 마음은 없었으므로 나는 슬슬 결정타를 준비했다.

"저는 당신이 헐벗고 있다는 이유로 유흥업소 종사자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저와 몸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변태로 몰지 말아주세요. 사과는 받지 않겠습니다."

입가에 미소가 베이는 것을 간신히 막으며 나는 말을 맺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몸을 돌려주시죠."

여자의 울상을 보고 있자니 절로 엔도르핀이 돌았다. 오늘의 무용담은 청중들의 입과 손을 타고 온오프라인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가겠지. 몰래 핸드폰 동영상 촬영을 한 사람이 있다면 악녀를 물리친 용사 정도로 제목이 붙어 성원을 받을지도 몰랐다. 머지않아 각종 대중 매체들의 인터뷰가 쇄도하고 회사는 인망이 두터워진 나를 정규직 사원으로, 아니 곧바로 대리 정도는 달아줄지도 몰랐다. 아니지, 차라리 식당을 하나 차리는 건 어떨까. '강선구의 용감한 설렁탕', '강선구의 통쾌한 부대찌개' 같은 식으로 작명을 하면 불티나게 팔리겠지.

검은 원피스는 나의 망상과는 상관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을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눈을 감거나 이어폰을 꼽거나 하며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하철은 달렸다.

"최악이야."

검은 원피스가 읊조렸다. 고개만 내리면 입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운 위치였다. 게다가 검은 원피스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미인이었다. 이러다 내 육체가 솔직한 반응이라도 보이면 공든 탑에 불이 붙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나는 검은 원피스를 애써 외면하고 다른 생각을 시도했다. 얄궂게도 그 생각의 끝은 항상 검은 원피스였다. 얇은 어깨끈을 아래로 내리거나 치마를 위로 들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화가 날 정도로 솔직한 본능이었다.

"이번 내리실 역은 동작, 동작역입니다. 계속해서 사당역 방면으로 가실 분들은 이번 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음성이 나왔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원래대로 가져왔다. 검은 원피스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대단한 근성이었다.

동작 역에서 내릴 사람들이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앞, 옆으로 신호를 보냈다. 내 뒤에 있던 여고생도 내 옆구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틀어 여고생이 빠져나갈 틈을 내줬고 마침내 여고생은 검은 원피스와 내 사이로 들어왔다. 검은 원피스의 얼굴이 있던 곳에 여고생의 뒤통수가 자리 잡았다. 비로소 시선에 자유가 생겼다.

여고생이 있던 내 등 뒤로 새로운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신장이 나와 엇비슷한 여자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변태 씨."

4. 동작역

동작역에 이르면 압박도, 불편도, 인내도 절정에 달한다. 인간의 압축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증명이라도 하듯 사람들은 쌓여갔다. 40대 여성은 이제 내리는 건 둘 째 치고 목숨의 위협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숨통 트일 공간을 찾지만 쉽지 않았다. 고마 숨 좀 수입시더. 그녀가 절규했다.

검은 원피스는 끝내 몸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면대 면으로 몸을 붙인 채 지하철은 출발했다. 우리는 서로 최대한 마찰 면을 줄이기 위해 팔과 다리를 비틀어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길어야 5분이었다. 군대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나날을 떠올리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갑자기 나타난 허스키였다. 무슨 생각인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무릎으로 내 엉덩이를 발정난 개 마냥 더듬고 있었다. 문이 열린 직후라면 이해하겠지만 문이 닫히고 지하철이 출발한 다음에도 이럴 때는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 정황을 다 떠나서 다짜고짜 내 귀에 대고 '변태'라는 말을 했으니 의도고 나발이고 뻔했다. 여자의 무릎이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서 있는데요?"

"지금 팔다리로……."

나는 말을 중단했다. 플래시백처럼 검은 원피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말을 왜 하다가 말아요? 뭐 저 때문에 불쾌한 일이라도 있었나 보죠?"

"누굴 바보로 압니까? 그만두세요."

"그만 둘 게 있어야 그만두죠."

그러면서 허스키는 무릎으로 내 엉덩이를 꾹 눌렀다가 뗐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이쯤 하세요. 똑같이 한 번 해드려요?"

"어때요? 당황스럽죠?"

허스키가 쿡쿡 웃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들은요. 이런 상황을 수시로 겪어요. 이 사람이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아니면 사람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건가?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한데.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야, 괜히 생사람 잡는 거면 어떡해. 나한테 해코지하면 어떡해. 조금만 참자, 참자…… 이해하겠어요?"

"그래서요?"

"이해력이 부족하네요. 그런 데도 얘기를 했다는 건 굉장히 용기를 낸 거거나, 아니면 도저히 참기 힘들 정도로 심했다거나 둘 중 하나라는 얘기라고요. 당신은 지금 용기를 낸 건가요, 도저히 참기 힘들었던 건가요?"

"용기고 나발이고 일부러 그러는 걸 뻔히 아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에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거짓말 말아요."

"내가 일부러 했다는 증거가 있나요?"

"왜 없어요. 우선 유독 움직임이 많다는 거, 점점 이상한 데까지 다리를 뻗어온다는 거, 그리고 나한테 변태라고 했다는 거!"

"그럼 당신도 일부러 그랬던 거겠네요."

"뭘 일부러 해요!"

"역지사지 해봐요. 다른 사람도 당신처럼 그런 기준이 있을 거고, 당신이 그 기준 이상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죠. 당신이 이정도 터치까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고요. 불쾌함이란 감정은 상대적인 겁니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허스키 말이 옳아서라기 보단 분위기가 다시 엉뚱하게 흘렀기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저 남자 진짜 최악이야 라는 여자의 말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지하철은 벌써 신반포역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킥킥 웃는 검은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를 악 물었다.

"맞아요. 불쾌함은 상대적이죠. 하지만 나의 불쾌함과 무관한 절대적인 기준은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봐요. 성적 수치심을 못 느끼는 소아를 향해 저지르는 추행과 폭행은 어떤가요. 아이들이 불쾌해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못하는 건가요? 반대로 할아버지가 손주의 뺨에 뽀뽀를 했을 때 아이가 불쾌해 했다면 이건 처벌 대상이 되는 건가요?"

"손주가 싫어하는 데 억지로 했다면 당연히 처벌 대상이 되죠.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싫다는 건 하면 안 되죠."

"싫다는 건 당연히 하지 말아야죠. 이를 말릴 사람이 없고, 말리는 데도 무력을 행사한다면 법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할아버지가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에 했던 이런 행동을 처음부터 처벌로 귀결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상황입니까."

"잠깐요. 뭔가 엉뚱한 소릴 자꾸 하시네요. 그럼 당신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앞사람을 터치했다 이건가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대부분 내가 든 예시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몇몇은 내가 아예 아동 성범죄자로 오해한 듯 치를 떨었다. 남은 시간은 30초 남짓,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렀다.

이대로 문이 열리면 나는 지하철 성희롱 남이나 아동 성범죄자 등으로 소문이 날 거고, 네티즌 수사대에게 신상이 밝혀져 개인정보가 노출되겠지. 경찰들은 날 조사할 거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인턴 생활에는 애로 사항이 생긴다. 연애는 두말할 것도 없겠고.

이번 역은 고속터미널, 고속터미널 역입니다.

억울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었다면……. 쓰레기 새끼. 검은 원피스가 나직이 말했다. 허스키의 칠판 긁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 끝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기관사가 말했다.

"앞 열차와의 간격 조정을 위해 우리 열차 당분간 정차하겠습니다. 편안한 객실 내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맙소사. 눈이 번쩍 뜨였다.

5. 연착

열차가 멈췄다. 곳곳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40대 여성은 이제 9호선을 타면 본인의 성을 갈겠다며 김숙자나 박숙자나 어차피 숙자는 숙자인 소릴 했다. 나 역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불만이 생겼겠지만 지금은 쾌재를 불렀다.

"제가 보기엔 그쪽이 제 말을 엉뚱하게 해석 한 거 같은데요?"

내 말을 신호탄으로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고지를 눈앞에 둔 마지막 싸움에 모두들 귀를 쫑긋 새운 모양이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긴장감은 마지막으로 도전한 행정고시의 최종 면접 이후 처음이었다.

"자, 시간이 없으니 돌려말하지 말고 풀어봅시다. 지하철을 탈 때 내리는 문이 있는 방향으로 서는 게 잘못한 일일까요?"

허스키가 말했다.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죠.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게 되는 상황이면 방향을 바꿀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 말인즉슨 불편을 주지 않는 상황이면 일반적으로 그 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게 맞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맞다, 아니다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불편을 끼치지 않는다면 어느 방향을 봐도 상관없다는 거죠."

"그 불편이라는 게 등과 등을 맞대는 걸로 해소가 된다 이거죠? 그렇다면…"

이 때 검은 원피스가 끼어들었다.

"당연하죠. 누구 같은 변태들은 엉덩이가 닿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말했다.

"아, 좋습니다. 등을 맞대면 해소된다고 해요. 그럼 그 다음 사람은요?

"네?"

허스키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다음 사람은 어떡해야 하냐고요."

"그거야 당연히 자세를 반대로 취하면… 아…"

"내가 내 앞사람과 등을 맞대면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과는 절대 등을 맞댈 수 없습니다. 서로 마주본 자세가 되거나, 지금처럼 같은 방향으로 서는 모습이 되겠죠. 이해하시겠어요?“

"자세를 조금 비스듬히 하면…"

"앞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뒷사람은 비스듬히 지하철을 타자 이건가요?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본인이 비스듬히 서 있었으면 되는 거잖습니까. 이해력이 부족하네요."

그 때 지하철 스피커가 울렸다. 약 30초만 더 정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논점을 흐리지 말아요. 중요한 건 당신이 등 뒤에서 과도한 터치를 했다는 거고, 그 때문에 상대방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거잖아요."

"내가 만약 성욕을 품었다면 양 팔을 내렸겠죠. 그 편이 더 과도한 거 아닙니까? ‘지하철 매너 손’ 주장할 때 뭐라고 했었나요. 불쾌한 터치를 줄이기 위해 팔을 들어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저는 그 말 그대로 불쾌한 터치를 줄이기 위해 팔을 든 겁니다. 그게 오히려 불쾌했다는 건 자승자박이에요."

"저는 지하철 매너 손 주장한 적 없어요. 하필 속살을 노출한 부위에 팔을 두고 있었으니 과도한 터치라고 당연히 느낄 수 있죠."

"천보다 살이 더 많이 보이는 의상을 입고는 '하필' 이라고요? 노출이 많은 의상을 입었으면 살이 많아진 만큼의 불편을 감수해야죠. 왜 상대방에게 배려를 강요합니까? 그럴 거면 노출이 적은 옷을 입었으면 됐잖습니까."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덜컹하고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결승점이 눈앞이었다.

"전형적인 한국 꼰데 식 발언인데요? 결국 문제는 여자들의 노출이라는 거군요."

"무슨 황당한 소립니까. 그걸 지금 문제시 삼은 건 바로 여자, 아니 여자인 당신들이죠."

"뭐가 황당해요. 방금 노출이 적은 옷을 입으라는 얘길 했잖아요. 저만 들었나요?"

"노출에 대한 얘긴 나중에 또 만나면 하죠. 시간이 없어요."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죠? 그럼 일방적인 기준에 의해 공공연히 성추행 범으로 몰린 제 수치심은 어떡할 건가요?"

"가관이네요. 그럼 성적 모멸감을 꾹 참고 견디는 게 맞았다?"

"아니요. 참을 필요는 없죠. 그렇지만 상대방에게 또 다른 수치심을 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나요?"

"성적인 수치심이 당신이 겪은 수치심과 비교될 만큼 하찮은가요? 엄밀히 말하면 당신은 성범죄를 저지른 거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무고죄를 저지른 셈이군요."

"현행범에게도 무고죄가 성립되나요?"

"무고한 사람을 현행범으로 만들었으니 성립하겠죠."

허스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허" 하고 탄식했다. 그 사이 스피커에서는 열차가 고속터미널 역에 도착한다는 말을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반복했다.

"성적 수치심을 견디다 못해 용기를 내서 자제해 달라고 얘기했지만, 돌아오는 건 불쾌하다는 핀잔과 수정 없는 변명뿐이로군요. 좋아요. 아주 좋은 민주주의 국가에요."

"의도와 상관없는 인지로 상대방을 성추행 범으로 몰고, 오해가 있었다는 설명을 했지만 모든 말을 곡해하고 죄인 다루듯 일방적으로 자유를 속박하는군요. 당신이 말하는 평등은 저울과 같아서 균형을 맞추기가 무척 어려운 모양입니다."

마침내 지하철이 멈췄다. 출입문 열린다는 말과 함께 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렸다.

6. 고속터미널역

문이 열렸다.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펼치듯 사람들은 해방을 위해 좁은 문으로 서로를 밀었다. 밀지 말라는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비틀비틀 문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다음 역이 종착지인 사람들도 인파에 휩쓸려 의도치 않은 하차를 했다. 40대 여성은 지옥 같은 감옥을 탈출한 쇼생크의 어떤 사람처럼 천장을 보며 기쁨을 만끽했다.

검은 원피스와 허스키의 행방은 묘연했다. 내릴 역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헝클어진 넥타이를 추켜올리며 에스컬레이터 앞에 줄을 섰다. 8시40분. 생각보다 연착이 길었다. 갈아탈 버스가 지연되면 꼼짝 없이 지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평안했다.

여기저기서 내 얘기가 들려왔다. 일행과 수다를 떨거나, 전화 통화로 친구나 애인에게 얘길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문자를 입력하기도 했다.

"야, 아까 봤냐? 존나 찌질하지 않냐, 그 새끼? 그냥 맞다 아니다 하고 무시하면 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그렇게 이겨 먹으면 지 인생에 훈장 하나가 더 생기나."

"대박이었어. 그 여자들 나중에 진짜 막나가더라. 같은 여자지만 솔직히 좀 부끄럽더라."

"동영상 찍었어? 인터넷에 올려."

"지가 만졌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것이지. 뭘 잘했다고 뻗대냐. 병신."

"나도 저번에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말문이 탁 막히더라. 무슨 일하는 사람일까."

가을. 6개월간의 인턴 일정은 회사 사정 상 3개월로 종료됐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았지만, 사건 당일에 했던 지각이 뼈아프게 컸던지 결국 정직원이 되진 못했다. 예상보다 상심이 크진 않았다. 아니, 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안도할 정도였다. 역시 평범한 월급쟁이로 사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집에는 자급자족하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다. 다시 돌아온 고시원은 예전 그대로 좁고 어두웠지만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은 편했다. 책상 앞에 앉아 두꺼운 형법 책을 다시 폈을 때는 희열감마저 생겼다. 나는 A4용지를 가로로 뉘어 커다란 글씨로 한 문장을 적어 벽에 붙였다. 속뜻이야 나만 알면 그만이었다.

[목적은 수단을 지배한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