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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나리

  • 작성일 2013-06-23
  • 조회수 535

희나리

*희나리- 덜 마른 장작 (쉽게 타버리지 않는다, 변치 않는다)

1. 1991년 2월 어느 날 경숙의 일기

언니가 죽은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나는 아직 둘째 언니를 마음으로부터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녀의 자살은 동생인 내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시신을 확인하러 경찰서에 가던 날도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치?’ 하고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었다. 그곳에서 언니의 시신을 확인하고 생전에 유품들을 건네받았을 때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 순간의 악몽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두 번 흔들었다. 정신을 차려 간신히 언니의 일기장을 챙겼다.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난 ‘자살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치?’ 라고 되묻고 있었다.

언니의 일기장 한 페이지가 얼룩져 있다. ‘희나리’ 생전에 언니가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가사다. 그리고 그 뒷장을 펼쳐보니 마지막 유언 같은 게 빼곡히 적혀 있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의 필체는 단정하다. 그래서 마치 누군가가 언니의 일기를 대필해 놓은 것 같다. 언니의 일기를 자주 들춰보는 바람에 일기장 겉이 오래된 수험서마냥 나달나달하다. 결국 난 그 일기장에서 언니의 타살을 입증해줄 아무런 단서나 증거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일 년이 흘러버렸다. 희나리-물에 젖어 퇴색하지 않은 흰 장작개비처럼 언니는 그렇게 내 곁에 오래 머물러있다.

2. 1989년 2월 19일 늦은 겨울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당신!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고 때리고, 그것도 제일 소중한 사람한테···

당신이란 사람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 죽고 싶을 만큼···

내가 말하면 들은 척도 안하고,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내가 울면 당신은 내 뺨을 사정없이 때렸지.

그래서 당신 앞에선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어.

당신은 내가 정말 싫어진 거야. 그런 거야?

사람이 미워지면 뒷모습만 봐도 싫다는데······

내가 뭘 어쨌는데, 나한테 병신이니, 바보 천치니 뭐?

그것도 모자라 날 죽일 듯 덤벼들어 발로 차고, 때리고 못살게 구는데?

그래, 당신은 분명 상처가 많은 사람일거야.

자랄 때 엄마가 아빠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자랐는지도 모르겠어.

아빠의 폭력이 그대로 대물림된 걸 거야.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술 취한 당신 앞에서 본능적으로 떨고 있는 내 모습이 불쌍하지도 않았어?

술에 취해 들어오던 당신의 발자국 소리에 늘 가슴이 부들부들 떨렸어.

심장이 쫄딱 오그라드는 느낌, 그건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르지.

난 당신을 피해 어디로든 숨고 싶었어, 알아?

제발 날 좀 그냥 내버려둬. 렛잇비, 렛잇비, 렛잇비.

 

3. 1988년 4월 21일

어제 언니가 다녀가고 새 핸드백이 생겼다. 벽에 걸린 자주색 핸드백에 은근히 맘이 설렌다. 평일은 야근에 잔업이 많아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니까 주말에나 가끔 핸드백을 쓰게 될 것 같다.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몇 번 사양했지만 큰 언니는 외출용으로 핸드백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된다며 내게 이걸 선물로 안겨주고 갔다. 난 봉투에 삼 만원을 넣어 차비하라고 언니의 가방 속에 몰래 넣었다. 돈을 넣으면서 핸드백은 내가 산 셈 쳐야지 했다. 언니는 고속버스에 오르고서야 봉투를 열어볼 것이다.

언니가 다녀간 뒤에 맘이 쓸쓸했는데 밤에 은자가 과자를 사들고 놀러왔다. 동생들 밖에 없는 은자에게 난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 은자는 벽을 쳐다보며 넌 핸드백 선물해줄 사람도 있고, 언니도 있어 좋겠다며 몇 번이나 말했다. 계집애, 지는 남자친구도 있으면서 괜한 질투와 시새움이다. 

박인희의 가요 테이프를 자주 들어서 너무 늘어졌다. <목마와 숙녀>, <그림자 벗을 삼아>를 듣고 있으면 외로움이 한결 덜어지는 기분이다. 새벽녘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구창모의 것으로 바꿔 들어야겠다. 희나리는 내가 좋아하는 가요다. 가사에 왠지 속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늘 노래 속 주인공이 궁금해진다. 정말 실연당한 남자의 노래처럼 들린다. 오늘 밤은 ‘희나리’나 실컷 들으며 잠들어야겠다.

4. 1988년 10월 5일

오늘로 그와 만난 지 딱 백일이 된다. 우리는 백일을 기념해 백일주를 마시기로 했다. 그가 일이 늦게 끝나 회사 앞에서 은자랑 한참을 기다렸다. 은자 남자친구는 바쁜 일이 생겼다며 함께 하지 못했다. 자취하는 동생 영미도 우리와 합석했다.

나는 그가 술에 취하면 어쩌나 조심스러웠다. 술이 좀 과하면 그는 내게 이유도 없이 폭력을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현철 씨는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일주일 전 그에게 맞은 귀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다. 음악이 시끄러운 술집에 앉아 있으려니 한쪽 귀가 울리고 계속 멍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해도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철 씨는 평소와는 다르게 유머를 섞어가며 이야기하고 가끔 큰 소리로 웃었다. 백일주에 이어 그는 시내 꽃집을 들러 내게 소국을 한 다발 선물해주기도 했다. 영미는 꽃집에서 현철 씨를 졸라 장미꽃 한 송이를 기어이 받았다. 같이 자취하는 동생이니 자기도 챙겨야 한다면서 말이다.

우리의 백일은 둘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여자들 수다에 묻혀 웃고 떠들며 지나가버렸다. 다행히 현철 씨가 선물한 소국은 자취방 벽에 핸드백과 나란히 걸려있다. 저 꽃다발이 시들지 않고 영원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그가 요즘 자꾸 나랑 여관에 가자고 조른다. 예전엔 영화관에서 그냥 손만 잡는다고 하고선 입을 맞추더니 요 근래는 자꾸 키스하면서 가슴께로 손이 올라온다. 마냥 싫지만은 않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날 술 먹고 현철 씨가 내 코피를 터뜨리지만 않았어도 난 그와 잠을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철 씨는 상당히 주사가 심한 편이다. 술을 많이 먹게 되면 눈알이 삵의 눈같이 벌겋게 된다. 그가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하고 몇 마디 대꾸하면 대든다고 하면서 계속 쥐어박는다.

그런데 그날은 얼떨결에 뺨을 두 대나 맞고 코피까지 흘렸다. 무슨 말 끝에 내가 현철 씨에게 이기적이라고 그랬다. 나쁘다고,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른다고 대든 것이다. 그래, 현철 씨는 주사가 심한 것이다. 남자니까, 그 정도의 성깔쯤은 터프한 남자라면 누구나. (여기까지 쓰고 그날 속상한 기억이 되살아나 울었다) 그는 나쁜 남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현철 씨를 길들여 보리라. 그의 못된 손버릇을 고치기 전엔 결단코 그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으리라.

5. 1988년 12월 어느 날

며칠 전 주말에 이모와 엄마, 막내가 자취방에 다녀갔다. 연락도 없이 내 자취방에 불쑥 들이닥친 것이다. 엄마는 현철 씨와 내가 동거한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회사일이 오전에 끝났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동네 슈퍼에 들렀다. 거기서 라면 몇 개와 참치 캔, 칫솔 따윌 샀다. 슈퍼 아줌마가 누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시골 아줌마들이 귤 한 봉지를 사가며 내가 사는 곳을 묻더란다. 현철 씨는 어제 시골 어머님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며 짐을 꾸렸었다. 설마 고향에서 엄마와 이모가 올라오진 않았겠지 하며 자취방에 올라왔다. 자취방 문 앞에 낯익은 운동화와 구두가 보였다. 귀에 익은 엄마 목소리도 문 밖으로 흘러 나왔다. 아무 예고도 없이 내 자취방을 쳐들어온 엄마와 이모, 막내가 너무 싫었다.

내가 방문을 ‘드르륵’ 열었을 때였다. 그녀들은 신문지를 넓게 펴고 주인 없는 방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물과 김, 찰밥 따위를 가득 벌려놓고 왁자지껄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눈치도 없이 막내가 ‘언니’하며 나를 반겼다. 이모에게만 말없이 눈인사를 하고 기분 나쁜 듯 행동했다. 낡은 비키니 옷장을 열었다. 이미 옷장은 그녀들의 두툼한 겨울 잠바와 목도리가 점령해버렸다. 엄마는 사촌오빠에게 전화가 걸어 오늘 잔업이 없는 날이라고 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한사코 밥을 먹으라고 권했다. 난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왔노라 둘러댔다. 그리고 비키니 옷장 구석에 걸려있던 현철 씨 잠바를 뚤뚤 뭉쳐 얼른 내 옷 밑으로 구겨 넣었다.

엄마와 이모가 먹던 걸 대강 치우더니 “이리 와 앉아봐.”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뜸 “언제부터니?”했다. 현철 씨와의 동거사실을 직접 확인하니 좋으냐고 묻고도 싶었다. 막내는 호기심에 눈을 빛냈고, 이모와 엄마도 화가 치솟아 있었다. 엄마의 시시콜콜한 질문들에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아야만 했다.

그날 저녁 잠자리가 불편해 밤새 뒤척였다. 당장 그와 헤어지라며 다그치던 엄마는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도 자꾸만 눈이 떠졌다. 새벽에 막내가 불현듯 일어나 “언니, 물” 했을 때까지도 난 깨어 있었다. 어서 날이 밝아 그들을 배웅하고 내 방에 홀로 있고 싶었다.

6. 1989년 1월 둘째 주 어느 날

현철 씨와 산부인과에 들러 아이를 지우고 왔다. 의사는 6주라고 했다. 입덧이 막 느껴지던 때였다. 병원에서 영양제까지 맞았지만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찔어찔하다. 자취방에 돌아와 이부자리를 펴고 바로 누웠다. 현철 씨는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와 내 머리맡에 오렌지 주스와 인스턴트 깨죽, 우유와 빵 따위를 사서 늘어놓았다. 내가 힘들어하자 그는 내 이마를 한번 짚어보더니 쉬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난 달 엄마와 이모가 막 다녀간 뒤였다. 이상하게 먹은 것이 자꾸 체했다. 그리고 음식만 보면 구토가 밀려왔다. 어느 날엔가 회사에서 돌아와 전기밥솥에 밥을 앉혀놓았는데 밥 끓는 냄새가 역겨워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날 냉장고 안의 반찬도 모두 하수구에 부어버렸다. 평소 생리가 불규칙한 편이라 두 달을 그냥 건너뛰었는데도 병원을 찾지 않은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뒤늦게 임신인가 싶어 약국에서 테스트기를 사와 해보니 빨간 두 줄이 선명하게 나왔다. 별로 반갑지 않았다.

내가 아이가 생긴 것 같다고 하자 예상대로 현철 씨는 다짜고짜 병원부터 가자고 했다. 하긴 처음부터 기대도 안했었다. 다만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병원에 가야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그날 밤 이후로 그는 이, 삼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젯밤 늦게 돌아온 현철 씨는 오랜만에 날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러면서 아이는 결혼한 뒤에 천천히 낳아도 되지 않겠냐며 날 위로했다. 속상해서 눈물이 나왔다. 까만 점 같았던 뱃속 아이에게 미안하다.

 

7. 1989년 1월 29일, 30일

아이를 지운 이후로 멍한 기분이 오래 간다. 오늘이 29일인가 30일인가 헷갈린다. 금요일 불현듯 시골집에 다녀오겠다던 현철 씨는 나간 뒤 감감무소식이다. 금요일부터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다. 그도 없는 자취방에 계속 혼자 누워 지냈다. 토요일 은자가 먹을 걸 사들고 다녀가긴 했다. 은자는 내게 죽을 끓여주고 번개탄으로 연탄불도 살려주고 전기장판의 먼지도 떨어주었다. 은자가 시골에나 가 있을 현철 씨를 회사에서 보았다고 했다. 가죽잠바를 걸치고 한껏 멋을 내서 시내를 돌아다니더라고 일러주었다. 은자에게 더 이상 현철 씨 얘길 하지 말아달라고 힘겹게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잘못 보았겠지 하며 애써 웃어 넘겼다. 은자는 팥빵과 바나나 우유를 사와선 내 입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은자가 간 뒤에 다 토했다. 입맛이 없고 나른하다. 계속 잠이 퍼붓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하기도 싫어 계속 잠만 잤다. 자고 일어나 화장실에 몇 번 들락거리고 토하고 방에 들어와 쓰러지듯 눕고를 반복했다. 딱히 어디가 아픈 것 같진 않은데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일어나 1월 달력을 한 장 북 찢고 새로운 맘으로 2월을 맞고 싶은데 마음뿐이다. 베개가 축축할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잠결에 부스스 깨어나 흐느꼈다. 그가 날 보러 와야 할 텐데, 전화 한 통 없는 그를 기다리게 된다.

8. 1989년 2월 4일

설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엄마가 언제 결혼할거냐고 자꾸 물어왔다. 집에 가니 식구들 모두 현철 씨 타령이다. 난 이번 추석에 그와 같이 집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언니는 결혼해 둘이 같이 벌면 살기가 더 낫지 않겠냐고 하고 막내는 잘 생겼어? 라고 자꾸 묻는다. 그러나 지금 내 지갑엔 현철 씨 사진이 한 장도 들어있지 않다. 

회사 아이디어 공모에서 우수상으로 26인치 컬러TV를 상품으로 받아 안방에 들여놓았다. 집에 텔레비전이 두 대가 생겼다. 세배하러온 조카들이 신기한 듯 안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조카들에게 설날 특선 만화영화를 틀어주었다. 언니는 내게 언제 그런 재주가 있었냐며 놀리고 막내도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고향에서 김부각이며 유과, 가래 떡, 인절미 식혜 등등 간식거릴 많이 싸들고 왔다. 석 달 전 영미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래도 주말이면 꼭꼭 들르는 영미와 은자가 고맙다. 시골에만 다녀오면 그녀들은 뭘 서로 더 못 가져가 안달이다. 그녀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줄 수 있어 좋다.

현철 씨 귀가가 늦다. 또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올까? 그와 살게 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뜻하지 않은 임신과 중절수술이 두 번이나 있었고 잠 못 드는 병(딱히 우울증이라고 말하긴 싫다)을 앓았다. 그와 산부인과 병동에 두 차례나 다녀온 이후 나를 대하는 게 예전 같지가 않다.

여전히 사흘걸이로 술에 취해 들어와 시비를 걸며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허리를 다쳐 몇 번 침을 맞았다. 그에게 따귀를 맞아 귀를 상했다. 중이염이 심해져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다. 은자에게는 더더욱 말하기가 싫다. 은자는 현철 씨를 다방 레지하고 바람이나 피우는 남자로 알고 있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독한 술에 취해 들어온 현철 씨를 피해 어디로든 숨고만 싶다. 그의 발자국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두방망이질 친다. 삵의 눈 같은 그의 눈을 피해, 억센 손아귀를 피해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그가 제 정신일 때 조목조목 따져야겠다. 왜 변했냐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나랑 사느냐고? 내가 이상해져서 그런 거냐고?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회사에서도그를 만나기가 힘들다. 요즘 그의 외박이 잦다.

9. 1989년 4월 5일

그가 짐을 싸들고 홀연히 자취방을 나갔다. 회사에서 돌아와 보니 그의 잠바도 그가 아끼던 운동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증거다. 한 달 전 아니 그 전부터 예상해오던 일이다. 이번 추석에 그를 데리고 고향에 인사를 가려고 했는데 나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은자랑 영미한테는 당분간 비밀이다. 현철 씨가 시내 다방에서 자주 보이더라는 말을 듣긴 했다. 설마 다방레지와 바람을 피우진 않았겠지 했는데 소문이 사실인 것 같다. 하긴 나 같은 공순이나 다방레지나 뭐가 다를 게 있으랴 싶다.

쉬는 날이라 오후에 은자와 영미가 자취방에 놀러왔다. 생일 축하한다며 비싼 케이크 대신 봉지에서 맥주와 통닭을 꺼냈다. 영미는 저보다 두 살 연하의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고 마냥 들떠 있었다. 남자친구 자랑에 그냥 몇 번 웃어 주었다. 은자는 뭔가 눈치 챈 듯 나에게 맥주를 따라 계속 건넸다. 은자는 옛날 개그맨 흉내를 내서 한참을 웃었다. 그녀들과 통닭에 맥주 몇 병을 마시고, 다 늦게 저녁으로 자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배불리 먹었다. 영미는 남자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먼저 가고 초저녁에 은자랑 잠시 누워 이야기를 나눴다.

“현철 씨는 안 와? 많이 늦네.”-“요즘, 가끔 안 들어와.” 하며 내가 쓸쓸히 웃자 은자는 내 손을 꼭 한번 잡아주고 갔다. 은자가 가고나자 어둠처럼 외로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가시나,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일어나 방의 창문을 꼭꼭 여몄다. 오늘 밤도 잠자긴 다 글렀다.

(언니의 메모)

어떻게, 나를 떠나버린 그 사람을 향해 용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가 있어...

나에게는 고통이, 슬픔이, 상처가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 아직도 그날의 일들이 가득한데... 그래서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어떻게 내가 날 버린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있겠어?

눈물이 흐르고 이렇게 아직도 이렇게나 아픈데......

너무 마음이 슬프고 아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를 만큼 아직도 슬픔이 가득하고 잊을 수가 없어, 

삶이란 게 지긋지긋해, 구질구질해, 견디기 힘들만큼......

나는 행복해질 자격도, 웃을 자격도, 원하는 사랑을 가질 자격도 없나봐.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아, 나는 늘 웃고 있지만 외로웠고, 언제나 혼자였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다......

10. 1989년 9월 2일

다시 혼자되는 게 두려워 회사 기숙사에 들어왔다. 은자도 3개월 만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남자와 헤어진 게 내게는 적잖은 위로가 됐다. 현철 씨는 회사를 옮겼다. 시내 다방레지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도 들려왔고, 주말에 그 애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우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현철 씨는 잘 생기고 옷 입는 취향이 독특해서 그녀들 눈에 잘 띄기도 했을 것이다.

정말 현철 씨는 그 애를 사랑해서 같이 데리고 사는 건가? 그도 어찌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이 생긴 건 아닐까? 아직도 난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술 먹고 그가 행패를 부린 뒷날이면 온 몸에 멍이 들어 아침도 못 먹고 누웠다가 회사버스를 놓쳐 늦게 출근한 적도 많았는데... 그의 폭력이 일상처럼 익숙해질 정도가 되자 그는 어느 날 내게서 홀연히 떠나버렸다. 뭐가 그렇게 싫었을까? 무엇이 그를 못 견디게 했을까? 그가 보고 싶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나는 안다.

며칠 전 시내 다방에 은자랑 가본 적이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에게 내 자취방에 남아있던 자잘한 짐들 (전기면도기, 칫솔, 담배, 일제 라이터, 개봉도 하지 않은 새 속옷 따위)을 전해주기 위해서 그곳에 갔다. 하지만 그날 현철 씨와 다방레지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일일휴가를 내어 어디 바닷가에 놀러간 건 아닌지 은근히 질투가 났다. 은자랑 다방을 나오는 길에 쓰레기통에 그의 흔적이 담긴 검은 봉지를 통째로 쏟아버렸다. 차라리 입지 않은 그의 속옷을 갈가리 찢어서 버렸어야 했다. 마음과는 정반대로 그것들에 자꾸 눈길이 가서 뒤돌아보았다.

기숙사에 재 입소하자 날 반기는 건 착한 우리친구 은자뿐이다. 후배 영미는 요새 연하의 남자친구와 연애중이라 한창 멋을 부리더라는 말을 은자에게 전해 들었다. 영미는 은근히 내숭에 제 실속만 차린다. 약간 얄밉기도 하다. 점심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은자랑 영미 흉을 보면서 잠시 잃었던 웃음을 되찾았다. 은자에게 왜 남자친구랑 헤어졌는지 묻고 싶었는데 간신히 참았다. 은자도 말을 꺼리는 눈치인데다 그런 이야길 나누기엔, 짧은 점심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 

오늘 밤은 박인희의 노래도 구창모의 ‘희나리’도 잠드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희나리 노래 가사나 적다가 스르르 잠이 들면 좋겠다. 여자 넷이 기거하는 이 방에선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금물이다. 최대한 적게 몸부림치고 곱게 잠드는 게 그녀들이나 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방편이란 생각도 든다. 오늘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울 것 같다......

11. 1990년 1월 25일

이번 주말이면 난 고향에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게 될 것이다. 일주일 병가를 신청해 기숙사에서 쉬고 있어 집에 내려가는 게 겁이 난다. 어젯밤에도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며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해를 거듭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불면증과 무기력증, 그리고 이어지는 폭식과 식사거부 이 모든 게 우울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의사가 말해주었다. 병원 약을 먹으면 졸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품이 나오고 잠이 쏟아진다. 수면제가 섞였을지 모를 일이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 몸에 기운이 쭉 빠져나가고 그만 주저앉고 싶어진다. 힘이 없고 다리에 맥이 풀려 서 있는 것도 힘들다. 이렇게 무작정 쉬다보면 결국 직장도 포기해야 할 텐데 생각이 많아진다.

지난주부터 병원에 우울증 약을 타러 가지 않고 여기저기 약국에 들러 수면제를 사서 모았다. 옷장 서랍엔 수면제 약들이 점점 쌓여가고 있다. 소화제 한 두 알도 삼키기 힘든 내가 과연 저 많은 알약을 다 삼킬 수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에 걱정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은자는 헤어진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는가 보았다. 영미도 연하의 남자친구와 잘 되어가는 지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 아픈 나는 그녀들에게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현철 씨를 한번 보고 싶다. 불쑥 그의 회사로 찾아가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내 자신이 괴롭고 불쌍하다. 때때로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이미 남의 남자인걸 뭐 하러 하며 한숨도 쉬어본다. 한때는 날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나 없으면 단 하루도 못산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그에게 따져 묻고 싶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지금 난, 혼자다. 결국 나 혼자 남았다. 이 모든 건 날 무참히 짓밟아 버린 현철 씨 때문이다.

고향에 못 간다고, 갈 수 없다고 일단 핑계를 대자. 설 연휴에 기숙사가 텅 빌 때 보일러실에서 목을 메자. 아니지! 목을 메는 건 기숙사 안이 되어선 안 되겠지? 기숙사 뒷산 소나무가 좋겠다. 아니, 기숙사 밖 창고나 화장실이 더 낫지 않을까? 아니다. 그간 사서 모은 수면제를 술과 함께 털어 넣고 깊은 잠이 들면 그 뿐이다.  휴가가 끝나면 누군가 날 발견해 경찰에 신고하겠지? 그게 제발 은자나 영미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 난 실연당했다. 사흘걸이 그 남자의 무수한 구타와 폭력을 참아내며 견뎠다. 사랑이 지나쳐서 그럴 수도 있겠지 라며 난 그를 받아주었다. 그런 내가 잘못됐나? 난 맞고 참은 것 밖에 없는데 그에게 결국 차여버렸다. 참는 건 능사가 아니다. 불쌍한 년, 지지리도 복도 없는 년, 이 세상에 존재해야할 가치나 이유가 없는 년.

기숙사에 재입소해 처음으로 손목을 긋던 날이 생각난다. 사과를 깎던 과도였는데 유난히 칼끝이 예민했다. 손목을 베고 온전한 정신이 남았을 때 옆방 문을 두드렸던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말한 기억이 났다. 그날 밤, 깨어보니 피범벅이 된 소매 끝으로 붕대를 감은 손이 희미하게 보였다. 소매 끝에 피딱지들이 서로 엉켜 붙어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 날 빤히 쳐다보며 은자가 말했다. “야, 살기 싫음 그냥 조용히 죽어, 남 고생시키지 말고!”라고 말하던 그 친구의 붉어진 눈동자가 생각이 났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는 한참 동안 울었던가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은자 말이 맞다. 남 고생시킬 이유도, 여력도 없다. 그냥 조용히 죽고 싶다.

12. 1991 2월 28일 -경숙의 일기

둘째 언니의 자살은 막내인 내게 큰 충격이었다.

어린 시절 국민교육헌장을 줄줄이 외울 정도로 언니는 암기력이 뛰어났다. 반에서 항상 일 이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를 믿고 언니는 종종 게으름을 피웠다. 성적이 점점 떨어졌다. 언니의 성적표엔 ‘두뇌는 명석하나 노력이 부족함.’이란 말이 적혀 있기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언니는 농업고등학교 원예과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그녀는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것 같다. 고 2때부터 언니는 주말에 나돌기 시작했다. 인근시내 남자애들과 미팅을 하고 나이트를 뛰고 막차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밤에 집에 돌아온 언니에게선 덜 지운 화장냄새와 싸구려 담배냄새가 짙게 풍겨났다. 언니가 땀범벅이 되어 가쁜 숨을 내쉬며 싸구려 티와 청바지 따위를 아무렇게나 벗어 거실에 내던질 때 그녀는 이미 학생신분을 떠나 있었다.

언젠가 밤늦게 들어온 언니에게 엄마는 연탄집게를 휘두르며 나가라고 악을 썼다. 언니는 그 밤 정말 내복차림으로 몰매를 맞고 대문 밖으로 쫓겨났다. 문 앞에서 한 시간을 추위에 덜덜 떨다가 들어왔다. 눈발이 날리던 꽤 추운 날이었다. 한밤의 소란을 몰래 지켜보면서도 엄마가 무서워 대문 빗장을 풀어주지 못했다. 방에 들어와 옷도 벗지 않고 누운 언니의 몸은 불덩이였다. 그 열기가 내 이불까지 전해져 왔다. 언니가 밤새 뒤척이며 끙끙 앓을 때 나는 모른 척 돌아누워 잠만 잤다.

언니는 농고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리고 곧바로 S시의 전기회사에 입사했다. 사촌오빠가 근무하고 있던 곳이었다. 솔직히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꽃을 좋아하고 시와 조용한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녀와 전기회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엄마 명을 꺾을 수 없어, 동생들 학비를 대기 위해 마지못해 일하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 걱정과는 다르게 언니는 직장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갔고, 매년 두 세 차례 나오는 휴가에는 선물가방이 늘 양손에 들려있었다. 회사 내 아이디어 공모에 당선되었다며 26인치 컬러 텔레비전을 들고 집에 왔을 때도 그녀는 무척 행복해보였다.

애인을 데리고 온다던 언니는 추석 때 선물가방만 잔뜩 들고 와선 이상하게 풀이 죽어있었다. 그가 선물해줬다는 것들은 모두 언니가 직접 고른 것들이라고 했다. 단박에 탄로 날 거짓말을 왜 하는 지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는 그와 다시 재회하게 되리라는 어설픈 기대를 품었는지도 몰랐다. 그와 다시 불꽃같은 연애라도 할 셈인지 그 남자이야기를 할 때 언니의 얼굴은 늘 붉게 상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기장에 무수히 적힌 언니의 메모와 일기, 노래가사들은 그녀가 그 누구에겐가 원한을 샀다거나 타인에게 죽음을 당할 만큼 나쁜 생을 살아왔다거나 하는 증거로는 매우 불충분했다. 결국 난 언니의 자살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부질없는 사랑에 목을 매더니 결국 회사 뒤편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진짜로 목을 맸다. 왜 언니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그 속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일기장만이 내 손에 남아있을 뿐이다.

고교시절 그녀가 엄마에게 맞고 들어와 내 옆에 누워서 아픈 신음을 토해낼 때도 돌아누워 잠든 척 했던 것처럼 나는 그녀 삶의 아픈 상처들을 모르는 척 했다.

친구였던 은자 언니, 자취하던 후배 영미, 그리고 그녀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차지했던 단 하나뿐인 남자친구인 현철도 언니의 아픔을 끝끝내 감싸주지 못했다.

그녀의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나와 우리 가족들은 사는 날 동안 가끔 죄의식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동생으로서 난 둘째언니의 자살에 일면 동조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에필로그 (못다 한 이야기)

언니가 죽은 후 사촌오빠 편에 은자언니 얘길 전해들을 수 있었다.

현철이란 그 사람은 언니가 죽은 뒤 몇 달 후 다시 S전자회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다방레지와 잠시 살림을 차렸던 그는 통장과 몇 십 만원의 비상금까지 털리고 난 뒤 혼자가 되었다. 다방레지는 시내 유명한 모텔공사를 담당했던 홀아비 십장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단다. 현철은 언니의 죽음이후에 일 년 넘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었고, 은자 언니를 찾아가 자기가 떠난 이후 생전의 언니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한동안 술과 담배에 절어 지내던 그를 착한 은자언니가 도와줬단다.

은자 언니와 고향 후배 영미는 끝내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니의 시신을 재빨리 수습해 급하게 장례를 치루는 바람에 그녀들에게 알리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친척 오빠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은자 언니가 비밀리에 결혼을 했는데 그 상대방이 바로 현철 씨였다고 했다. 그녀는 박 현철과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낳고 지금은 부부사원으로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단다.

대학 초년생 때 잠시 외가에 머물렀을 때 친척오빠가 명절 때 외할머니를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은자언니와 박 현철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꼬치꼬치 캐묻지도 말았어야 했다. 언니의 자살로 죄의식을 느끼며 채무자처럼 살아야 할 사람은 우리 가족과 나 하나로 족하다고, 일기장 속의 그들은 언니의 죽음에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고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전의 언니 삶의 중요한 축이었던 그 둘, 은자언니와 현철은 끝내 언니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일기를 읽지 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