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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년 만에 만난 그 M

  • 작성일 2013-10-02
  • 조회수 396

                                     사십년 만에 만난 그 M

 초등학교 5학년을 거의 마칠 무렵 나는 타지에서 전학을 왔다. 5학년 까지 다니던 학교의 친구들은 먼 거리로 인해 전학과 동시에 연락이 끊겼다. 전학 온 학교에서 일 년여를 마저 다니고 졸업을 하였다. 일 년을 다닌 것만으로 육년을 함께 한 친구들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추억에 온전히 함께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함께했던 아련한 어린 날들의 그리움에 나는 언제나 언저리로 비껴나 있었다. 어쩌다 만나 떠올리는 즐거웠던 어린 시절 이야기에도 내가 아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그들의 추억 속에 내 비중은 여섯 마디 중에 한 마디에 불과했다. 그 한마디의 추억조차도 친구들이 오래도록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 보다는 기억 속에서 지워주길 바라는 것들이 더 많은 유년이었다. 이러 저러한 이유와 어정쩡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나는 초등학교 동창회는 기피하게 되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 속에 그 M이 있다.

전학을 온지 얼마 안 된 어느 음악시간이었다. 모두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추어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풍금소리를 따라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이 갑자기 선생님께 새로 전학 온 나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해 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일어나 노래를 불러야 했다. 나는 섬집아기 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 노래에~.....’하며 열심히 불렀다. 그러나 일 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을 통솔하던 위치에 있던 그 M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치고 발을 구르며 “아주 책을 읽어라 읽어!” 하며 마구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웃음을 겨우 참고 있던 반 아이들도 참았던 웃음을 일시에 터트리며 한바탕 난리가 났다. 노래를 다 부르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린 마음에 그 창피함은 말 할 수 없이 큰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로 아이들의 놀림은 계속되었고 사십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들은 그날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웃곤 한다.

나는 내가 그렇게 노래를 못하는 음치인 줄을 그때 확실히 알았다. 그 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나는 불혹의 중반 정도를 넘기까지 절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나에게 노래는 즐거움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래방 문화가 생긴 후에 내 공포는 극에 달했다. 사소한 모임에도 사람들은 노래방을 종점으로 삼아 노래방 앞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져야 즐거운 모임이었으며, 나아가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떠들곤 한다. 나에게는 고통의 시간이며 가슴을 졸여야 하는 피 말리는 시간이었음을 아무도 모른 체 언제나 모든 모임은 그들만의 축제로 끝이 났다. 커피향이 그윽한 곳에서 하트가 올려 진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미소로, 가로수 길을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축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섬집아기의 트라우마로 노래방 말만 나오면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또 내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마구 웃어젖히는 환영에 시달리며 섬집아기는 긴 시간 나를 괴롭혔다.

언제나 모든 문제는 답이 있다. 음악을 담 쌓고 사는 나에게 어느 날 친구가 음악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 보라고 조언했다. 듣는 음악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친구가 “너 노래 못하는 거 대한민국이 다 알아. 그냥 한 번 해 보는 거야. 잘하려고 하지 마. 흥미를 갖는 거야!” 라고 말하며 한번 불러 보기를 종용했다. 마지못해 노래를 불렀고 역시 친구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고 말았다. 친구가 “그래도 박자는 맞추네. 자꾸 부르면 된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지만 역시 타고난 음치임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날의 트라우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잊혀져갔다.

나이가 들며 각진 마음은 모서리가 깎이고 늙어 간다는 고독감은 그저 사람을 만나는 자체만으로 행복해진다. 한 마디의 추억을 공유할지라도, 별로 유쾌한 기억을 남기지 않았어도 지나간 시간들은 다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나이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사십년이 지나고야 처음으로 동창회를 참석하기로 하였다.

내가 가장 나이 들어 보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공들여 화장을 하고 동창회 장소로 나갔다. 하나 둘 동창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동창도,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는 동창도 모두가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얼마 후 매끄럽게 빠진 외제차 한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M 이었다. 훤칠한 키에 여전한 모습이었다. 내가 노래의 공포에 시달리는 동안도 잘 먹고 잘 살았나 보다. 사십년 만에 얼굴을 보자 맥없이 웃음이 나왔다. 사실 그 M은 동심에 솔직했을 뿐이다. 타고난 음치인 내 탓이지 동심의 감정에 솔직했던 그 M 탓은 아니다. 그 M이 내 음치를 일찍 일깨우지 않았다면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더 많은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그 M으로 인해 친구들이 오래도록 음치인 나를 기억해 준다는 사실이다. 노래 좀 못하면 어떤가! 세상 소풍이 끝나고 돌아가야 하는 귀천이 가까울수록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준다는 것이 더 기쁘지 않은가! 이제 그날은 지워주길 바라는 유년의 기억이 아니라 기억해 주길 바라는 그날이 되었다.

어릴 적 교실에 울려 퍼지던 풍금소리가 듣고 싶다. 풍금소리는 시골 마을에 울려 퍼지던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아련한 그리움이 되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가만히 두 눈을 감으면 풍금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선가 풍금의 선율이 울려 퍼지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아름다웠던 내 유년의 바다에 띄웠던 종이배 하나 유유히 흘러 내게로 온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