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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저녁의 운명」

  • 작성일 2013-10-07
  • 조회수 2,655




이병률, 「저녁의 운명」
저녁 어스름
축대 밑으로 늘어진 꽃가지를 꺾는 저이

저 꽃을 꺾어 어디로 가려는 걸까

멍을 찾아가는 걸까
열을 찾아가는 걸까
꽃을 꺾어 든 한 팔은 가만히 두고
나머지 한 팔을 저으며 가는 저이는

다만 기척 때문이었을까
꽃을 꺾은 것이
그것도 흰 꽃인 것이

자신이 여기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소리치려는 것일까
높은 축대를 넘겠다며 가늠을 하는 것일까

나는 죽을 것처럼 휘몰아치는
이 저녁의 의문을
어디 심을 데 없어
그만두기로 한다

대신 고개를 숙이고 참으며 걸으려 한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려고 할 때나
아름다움을 받아내려고 할 때의 자세처럼
분질러 꺾을 수만 있다면
나를 한 손에 들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운명이라도 밀어야 한다





시·낭송_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등이 있음.

출전_ 『눈사람 여관』(문학과지성사)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들꽃이 찬란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많은 것은 구절초라는 꽃입니다. 그 곁을 지나가자면 나도 모르게 한두 송이를 따게 됩니다. 코에 댑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쓴 것과 달콤한 것의 절묘한 배합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향기에 절제가 있는지요.
내 속에는 악마도 많건만 나는 어쩐 일로 꽃과 그 향기를 좋아하는 것인고. 꽃의 무엇이 나를 이끄는고. 좋으니 여럿 꺾어 가져가기도 합니다. 헌데 그것이 '멍'에게, 혹은 '열'에게 가져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멍'쪽에 무게를 둡니다. 멍, 들여다보면 그것도 꽃이거든요. 속삭이기까지 하는 꽃이지요.
저녁은 나라가 바뀌는 때이지요. 새로운 나라로 가기 위해 흰 꽃을 꺾어 든 '저이(이 호칭이야말로 꽃 꺾는 이를 부를 만한 호칭이군요)'를 몰래 숨어서 따라가고 싶은 저녁입니다. 가을이구요.

문학집배원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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