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옷을 벗는 곳
- 작성일 201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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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 좀 전 일로 요동쳤던 그녀의 숨소리가 가슴 끝까지 들이마시다가 멀어져가는 파도처럼 잔잔해진다. 파도는 철썩 거리다가, 넘실거리다가, 너울거리다가 이제는 잔잔한 파문처럼 사그라졌다. 난 볼 수밖에 없다.
‘그녀를 안아.’
하지만 내 팔은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엔 그토록 병신같이 움직이던 몸뚱이가 이번엔 병신처럼 굳어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돌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다. 고개를 돌린다. 시선을 맞추고, 그녀를 삼킬 듯이 눈을 감았다. 깜깜해진 머릿속에서 여러 소리가 메아리처럼 왔다 갔다 한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비명소리, 수백 명이 두드리는 듯한 타자소리, 목덜미에 바늘처럼 소름 돋게 하는 ‘크크크’ 웃음소리. 이 소리들은 겹쳐지고 합쳐지고 곧이어 섞일수록 탁해지는 물감처럼 소리는 검정색 비명으로 모였다.
다시 눈을 떴다. 원룸이 흐릿하게, 점점 또렷이 눈에 찾아온다. 제일먼저 다시 그녀가 보였다. 그리고 분홍색 벽지, 가터벨트, 탁상 위 시계. 눈물이 흐른다. 이제 기억은 다시 선명해졌다.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은, 가장 완벽한 시절은, 행복했던 세월은 도미노와 같다. 단 하루, 어쩌면 한 순간에도 무너지고 다시 무너져 결국은 폐허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재를 만들기 까지 거듭된 인과와 인과의 도미노의 맨 처음, 단 한 조각은 어디에서 쓰러졌던 것일까. 아빠가 집을 나간 그날? 아니면 엄마의 죽음과 전신마비를 안겨준 교통사고의 그날? 아니면 여동생이 서럽게 울면서 돌아왔던 연예인 오디션의 그 날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인생의 낮과 밤을 가르는 지평선 이란게 있다면 내겐 그 지평선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내 생각을 과거까지 되짚어도 내가 생각 할 수 있는 시작의 맨 처음, 첫 도미노 조각은 내 과거 밑바닥에 있는 태어난 순간 한 줌뿐이다. 이렇게 밑바닥 까지 가라앉아 봐도 저 위엔 수많은 지평선과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고 난 그 중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그게 날 답답하게 만든다.
동생은 누군가가 이 집에 들어오면 우선 가슴이 턱 하고 답답해진다고 했다. 그 다음엔 뜨거운 돌이라도 삼킨 것처럼 가슴을 찢어내고 싶어지는데 다른 사람이 이 집 앞에 서는 게, 이 집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비명을 토하고 싶다고 했다. 오디션을 본 그 다음날 부터였다. 그 때문에 도우미 아줌마도 더 이상 부르지 못했고 생필품은 배달로 주문하는 무인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살결이 보드랍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연예인 하라는 소릴 많이들은 동생은 학교에 가는 대신 집에서 컴퓨터를 하고, 같은 침대에서 내 옆에 붙어 잤다. 전신마비가 점점 심해지는 내가 그 애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같이 누워주는 것뿐이었다.
그 애가 내 옆에서 손을 잡고 자면 나는 분홍색 벽지를 보았다.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고 끝났다. 동생은 인터넷을 했고, 라면을 끓였고, 가끔은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고 울고, 눈을 질끈 감으며 나를 안았다. 이젠 오빠밖에 없어, 그런 말을 들으면 얘가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궁금하면서도 물어볼 수 없는 질문 때문에 그 한나절 내내 답을 고민해봤다. 그 애가 내 옷을 벗기고 씻겨줄 때에도 그나마 이 아이는 모니터와 나에게라도 마음을 열어주는걸 위안으로 삼아야 되는 걸까 생각을 했다.
그 아이는 움직이지 않는 내 몸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따뜻한 말을 하는 대신 그 애가 외롭다 느껴질 때면 그저 내 눈 속에 그 아이를 담았다가, 눈을 감고, 다시 떴다. 감았다 떴을 때 그 아이는 누군가와 즐겁게 채팅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웃은 낯이었다. 다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 또 감았다, 떴다. 뻐끔 뻐끔 하품처럼 눈을 감았다 뜨고 또 감았다 뜨는 동안 동생은 여러 사람들과 채팅을 했다.
어느 날부터 모니터에게 살짝 옷을 열어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때에도 나는 꿈벅꿈벅 눈만 감았다 떴다. 통장 잔액이 얼마 안 남아서? 아니면 설마 내가 닳고 닳게 봐왔던 그 애 가슴을 보겠다고 아무 말도 안 한 거였을까? 프라이버시 없는 원룸에서 그 애는 채팅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채팅방에 사람들이 더 들어오고 새벽 밤에 몇몇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음담패설을 날렸을 거고 그렇게 무르익은 분위기에 여동생은 흥을 돋우기 위해 장난삼아 가슴을 보여줬다.
나는 그렇게 누워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만 했지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든 나는 포르말린 속의 표본처럼 있을 수밖에 없는데 기하급수적으로 뻗어나가는 생각의 가지들을 굳이 늘릴 필요가 있을까. 그만하자. 가장 단순한 결론에 안주하고 생각하는 걸 그만하자.
이런 복잡함과는 별개로, 도미노는 계속 무너지고 있다. 이미 지나온 옛 과거까지 왔지만 머릿속 내가 느끼는 그것은 이미 처참한 폐허다. 모두 한 사건, 한 조각에 무너진 거다. 어차피 과거에 대한 집착은 후회로 남을 수밖에 없는 걸 아는데도 난 아직도 이렇게 폐허를 걷고 있다. 머릿속의 나는 한 생각뿐이다. 어디에서, 이 모든 게 잘못 되어 버린걸까. 당연히 답을 낼 수 없는 질문. 답을 내려 할수록 가슴이 지끈 거린다. 그 애가 말했던 것처럼 눈을 감고, 비명을 토하고 싶다. 눈을 감으면 다시 거품 같은 생각들이 아메바처럼 합쳐졌다, 흩어지길 반복한다. 느껴지는 것은 면도칼로 눈을 긋는 날카로움, 얇은 종이로 성대를 베어내는 듯한 비명. 비명을 토하고 싶다. 이 모든게 생생해져 눈을 떴다. 그녀가 아직 자고 있다.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싶은데, 손은 눈물을 닦을 수 없다. 새어나오는 울음은 억지로 막은 딸꾹질처럼 히끅 히끅 하고 나온다. 아직 아무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데 자정을 달리는 초침소리가 현재는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도미노는 계속 무너지고 있다. 점점 더 가속이 붙어 뱀처럼 꼬리를 남기며 달려간다.
흐느적흐느적
마침내 뱀처럼 허물을 벗은 동생은 모니터 앞에서 허리를 흔들었다. 인터넷 방송에서 시청자에게 받은 풍선으로 돈과 바꾼 그 아이는 착실하게 성장해서 스타가 되었다. 더 많은 풍선을 받기 위해 예명도 ‘달래’로 짓고 아래부터 벗는 대신 얼굴은 가리는 방송을 시작했다.
내가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면 그 애는 속옷을 갈아입고 내가 보이지 않게 카메라 앵글을 맞춘다. 그러면 핑크빛 벽지를 배경으로 동생은, 달래는 방송을 시작한다. 그 애가 춤을 추고 있을 때 나는 살며시 눈을 떠 바라봤다. 물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 애가 사람을 피하는 일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현재가 있지 않았을까. 돌아간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야 될까. 지잉 하고 진동하는 기구들을 쓸 땐 도대체 풍선을 얼마나 받길래 저 비치는 속옷이며 기구를 사고 내 배도 채우는 걸까, 생각도 했다. 이렇게 생각만 하다 잠이 들면 다음날엔 여동생에게 인터넷 댓글 알바를 했다는 돈을 받는다. 가끔은 입고 있는 추리닝에서 팬티 레이스가 삐져나와 있는걸 봐도 모르는 체 한다. 칸막이 하나 없는 원룸에서의 일상은 마치 연극처럼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연기로 하루하루 지탱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달래가 내 앞에서 요염하게 옷을 벗었다. 달래는 집에서 입는 후줄근한 박스티를 벗어 던지고 보아뱀 같은 란제리 속옷을 보여줬다. 그리고 물었다.
“좋아?”
좋아... 소리는 나오지 못하고 ‘좋아’란 단어만 뻐끔거린 내 입안에 달래의 혓바닥이 들어왔다. 첫 키스였다. 속옷까지 벗어던진 달래는 내 손을 가슴에 움켜쥐게 했다. 처음 느끼는, 뜨겁고 근질근질 하고 조이는 것 같은 긴장감이 아랫도리에 솟구친다. 그녀가 팬티를 벗기자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달래는 그걸 귀엽게 바라봤다. 그녀 안은 축축했다.
여동생은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고단한 방송을 마친 새벽이었다. 내 첫 경험이 꿈이었다는 실망감... 그리고 그 애 얼굴로 그런 경험을 했다는 미안함, 팔을 움직일 수 없는데 팬티는 축축하게 젖었다는 당혹감이 이어달리기처럼 차례차례 찾아온다. 결국엔 결론지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그 애를 생각하며 성욕을 해소 했다는 사실을.
그게 그 애한테 플라톤적인, 에로스적인, 사랑이라고 붙일 수 있는 감정을 느꼈단 뜻은 아니지만 난 느끼고야 말았다. 그보다 한참 아래차원에 있는 아랫도리에서 시작되는 감정을. 이건 기본적인 욕구도 충족 못된 것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사고다, 매일 밤 보이는 허물 벗은 방송 때문에 정신이 피폐해 진 것이다, 머릿속에선 인정할 수 없는 명제에 대해 반론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내 아랫도리가 여동생에게 반응했다는 명제는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 짧은 밤 동안 실수로 햄스터를 죽여 버린 소년처럼 두려움과 함께 많은 궁리를 하게 되었다. 내가 내 성욕을 혼자 해결 할 수 있는 능력만 있었으면, 많은 일이 훨씬 더 쉬워졌을 거다. 여동생은 내 팬티를 갈아입히며 일부러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난 일부러 그 애에게 ‘댓글 알바는 적성에 맞니’등의 어색한 말이나 더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내 허리를 일으켜주다가 잠깐 짓는 그 애 인상 때문에 나를 더럽다고 생각 하고 있는 걸까, 아님 내가 그 앨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등등 골머리를 앓으며 하루를 복잡하게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그러나 동생은, 계속 내 옆에 누워 자기로 했다. 내 밤꽃 냄새를 맡고도 모른 척 그 날 밤 내 옆에서 잘 수 있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도 동생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가 밤마다 범하는 금기는, 타이르거나 깨우치게 하거나 혼내는 대신 하루의 평범함 속에 묻혔다. 일종의 거래였다. 그 애가 밤마다 그 애에게 느끼는 애욕을 무시하는 대신에 나도 그 애의 방송을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우리 둘이 아닌 다른 한 사람만 더 있었어도 성립되지 못할 섬세한 거래였다.
그렇게 어색함은, 죄책감은 우리의 일상 뒤에 보이지 않게 덥혀졌다. 실체를 보여주기보단 서로의 그림자를 보고, 보여주는 게 서로에게 더 편했다는 것을 나와 동생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
이 일이 익숙해지니 하루는 가뿐해졌다. 그저 상대가 숨기고 싶은 것만 고르고 가려서 보지 못하면 되었다. 그래서 여동생의 일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 정액 묻은 팬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 하는 고민 대신 난 매일 밤 동생이 옷을 벗는 모습을 지켜봤고, 꿈에 찾아오는 ‘달래’와 몸을 섞고 난 뒤엔 아무 말 없이 동생에게 뒤처리를 부탁할 수 있었다. 이런 일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누군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애에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동생은 나에게 몸을 주지 않는, 그야말로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일상에 대해 나는 무엇을 근거로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그렇지? 괜히 죄책감 가질건 없었던 거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자고 있었다. 나도 별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지금은 생각하는 것도 하기 싫어졌다. 그렇게 결벽증 환자처럼 과거만 미친듯이 헤매고 있어봐야 뭐가 달라지나. 지금은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허파까지 숨이 닿도록 크게 들이 쉬어봤다. 그리고 내쉬었다. 다시 들이쉬고 내쉴 땐 가슴에 추라도 얹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세 번째, 네 번째 쉴수록 추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잠잠해 있던 그녀도 호흡이 점점 더 커지고, 무거워졌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답답해서 그러는 것 일거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이 답답할까. 키치스러운 벽지에 갇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던 것이 답답했던건 아닐까. 그래, 나도 분명 저 벽지가 답답했다. 답답해서, 나가려고 했던 거다.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로, 저 벽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기적은 종종, 타이밍을 못 맞추고 노크도 없이 찾아온다.
그날 밤도 여동생은 ‘달래’가 되어가고 있었다. 허물을 벗으며 카메라 앞에서 새로 주문한 레이스 달린 브래지어를 보여줬고, 약 올리듯 남은 옷도 리듬에 맞춰 벗을 듯 말듯 아찔하게 흔들었다. 누워있는 나와 멘트를 날리는 그 애 얼굴은 안보이게, 벽과 가슴 아래만 보이도록 철저히 계산한 카메라 각도였다. 그리고 나는 여느 때처럼 누워서 달래의 방송을 보고 있었다. 저렇게 풍선을 몇 천개씩 주고도 모니터로 밖에 보지 못하는 시청자가 수천명이 넘었다. 그 사람들이 달래고, 어르고, 풍선을 바치며 겨우 보는 가슴과 은밀한 곳을 난 그냥 누운 채로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으로 삼고 살 수 있었다면 난 그대로, 일상적으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서로에게 보지 못하는 영역을 남겨두는 대가로 받는 이 특권에, 나는 더 뭔가를 바라고 싶었을까. 여동생과 더 깊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바라보기만 하지 않는 진지한 관계를 원했던 걸까, 아니면 그 애 방송에 동참해 남성들의 부러움을 받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애가 더 리얼한 신음을 내도록 도와주려고? 별 어처구니없는 생각들 까지 끄집어내 봐도 모르겠다. 지금은 이렇게 심각하게, 의문으로 회상되는 생각이 그저께에는 너무 무신경하게, 홀린 듯이 떠올랐다.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아무 생각 없이 툭, 하고 따 먹은 것 같았다.
이런 후회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것도 모른 채 나는 무심히 그 애를 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 이 생각은 침대에 누워있는 나에게 후렴처럼 반복되어 떠올랐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 왜 라는 질문은 하지 못하는 채 생각만 두근두근 머릿속에서 고동친다. 더더욱 가까워지고 싶다. 생각이 너무 커진 나머지 나도 모르게 속삭였던 것 같다. 하지만 여기까지 달래는 눈치 채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꼴깍 삼킨 침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타고 뱃속까지 넘어갔다. 가슴이 턱 하고 답답했고, 타는 숯이라도 삼킨 것처럼 뜨거웠다. 조그마한 연못의 파문으로 시작된 이 생각은 점점 일렁이고 너울거리다가 이젠 파도처럼 철썩 철썩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었다. 염불처럼 백번이고 천 번이고 머릿속으로 외우기만 할 뿐이었다. 가까워지고 싶다. 그 몸에, 그 살에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쾅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은 기억 안 나지만 나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널부러지는데는 0.3초정도 걸렸을 거다. 그 처음 0.1초 동안 생각했다. 벽을 힘껏 쳐낸 듯한 이 소리는 옆집에서 난걸까, 그런데 왜 내가 떨어지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찰나에 뒤를 돌아보니 수년간 움직이지 않던 다리가 벽을 박차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0.1초 만에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발은 내 발이 아니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다. 머그컵을 실수로 떨어트린 5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도리질도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침대에서 떨어지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남은 0.1초는 체념한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떨어지고 난 후엔 어떻게 될까,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처럼 지탱되던 하루하루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님 처음 몽정을 경험했던 그때처럼 여동생은 다시 거짓을 한줌 더 쥔 채로 살아가줄까. 나는 잠꼬대로 떨어진 척을 해야 될까, 눈은 감고 있어야 될까. BJ 달래는 벌거벗은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생각이 많아졌을 달래는 나를 보다가 방송영상에 널브러진 나와 그 애 얼굴이 보이는걸 보고 황급히 카메라를 가렸다. 나는 최대한 그 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애에게 일으켜져 침대에 누울 때 까지 병신 같은, 병신 같은 몸뚱이 한 생각만 했다. 그러면서 그 애 젖꼭지가 목덜미에 닿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애도 불룩해진 내 바지를 보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조용한데, 방송 채팅창엔 정말 불이 나도록 알림 음이 떴다. 보였을 거다. 이전까지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던 네모난 카메라 화면에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내가 튀어나왔을 거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그곳 까지. 카메라는 낡은 웹캠대신 새로 장만한 거였다.
달래는 다시 동생으로 돌아왔다. 컴퓨터를 끄고, 추리닝과 반팔을 입었다. 물론 아직 우리가 지켜왔던 무대 위였기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아주 조금의 진실이 드러나니 새삼 어색하고 새삼 낯설어진 것들에 대해 말을 해야 될까, 아니면 전처럼 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될까. 마치 수백 명이 입을 맞춰온 벌거벗은 임금의 행렬에서 눈치 없는 한 꼬마가 소리치는 것 같았다.
‘벌거벗었다!’
그 말에 알몸으로 걸어가는 임금도, 침묵을 지킨 사람들도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행렬은 계속된다. 하지만 이번엔 누구는 얼굴이 붉어지고 누구는 바지가 불룩해진다. 그래도 이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그렇게 전처럼 아무 말 없이 살아야겠지? 이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은 방바닥에 웅크린 채 잠들고 있었다. 나 혼자 침대에서 잠든 건 그날이 몇 년 만이었다.
그저께보다 더 가까운 어제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일상이었던 것 같다. 별수 없이, 평소처럼 살았다. 그건 누워서 라디오를 듣고 동생이 먹여주는 밥을 먹는 일상이다. 그래, 그 애가 컴퓨터 앞에 앉아 온종일 인터넷만 하긴 했지만 그 오후는 그저 365일 중의 하루였고 그 하루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런 하루였다. 어색함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어제 늦은 저녁까지 내내 잠을 잘 수 있었다.
내가 깬 건 밤 10시쯤이었다.
"씨팔!"
여동생은 짧게, 그렇게 말하고 카메라를 껐다. 속옷 차림으로 어젯밤 그 애는 그렇게 연신 씨팔만 되뇌었다. 왜 그러냐고 묻는 내 말에 대답 대신 옷을 입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잠시 멈칫하고, 그대로 밖에 나갔다.
단 하루, 단 한 순간만으로도 인생은 낮에서 갑자기 밤으로, 어쩔 땐 그 반대로 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태양은 이미 지는 중, 떠오르는 중이었던 것 같다. 다만 면도날처럼 매끄러운 지평선을 지나자마자 바뀐 낮과 밤의 호칭에 적응하지 못한 거였다. 그것도 단지, 막이 내린 후의 진실에 우리 둘 다 적응 하지 못한 거였을까.
동생은 오늘 늦은 저녁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작은 생수병을 든 채로. 먼저 내 입에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줬다. 그러나 배고픔이나 목마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무슨 말을 해야 될까. 나의 대답은 아슬아슬하게 찍어야 되는 객관식 문제였다. 곁눈질로 그 애를 봤다.
"화는 많이 풀렸어?"
동생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뽀얗던 얼굴은 머리 두피까지 새빨갰다.
"집어치워."
집어치워? 그 말은 아직 안 풀렸다는 걸까 그리고 심지어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그래 화는 많이 풀렸냐는 착한 오빠인척 하는 대답부터가 오답이었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동안 동생은 집안의 창문을 닫았다. 화장실 작은 창 까지 닫고, 부엌에서 식칼을 꺼냈다. 그 칼로, 부엌의, 창자 같은 가스 호스를 푸욱하고 찔렀다. 생선 배 처럼 갈라진 틈새로 쉬익 하고 밥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동생은 내 옆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툭 하고 식칼을 내려놨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응? 오빠... 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애는 겉옷을 벗었다. 번데기 같았던 겉옷 안에선 브래지어가 나왔고, 팬티가 나왔고, 가터벨트가 나왔다. 달래였다. 그 애가 옷을 벗자 그 안에선 달래가 나왔다.
"여기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 이렇게 말하기 전까진 뜨거운 걸 삼킨 것처럼 너무 아팠어. 찢어내고 싶을 정도로. 누가 복도 앞을 지날 때 마다, 누가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입이 없는 것 같애. 답답해. 오빠도 알지 않아? 몸은 지랄 맞게 뜻대로 안될 때 답답함."
달래는 겉옷에서 반쯤 남은 술병을 꺼냈다. 유리 굴곡 너머로 젖은 달래의 눈만 돋보기처럼 비쳤다. 그대로 한 모금 마셨다.
"만약에, 단 하루 한 순간만으로도 무너져버리는 삶이 있다면 그건 도미노 같을까? 우리 어릴 때 같이 했던 거. 그럼 어디서부터 잘못 놓이기 시작한 걸까. 오빠 내가 말하지 못했던 답답함이 있어... 오디션 보러 갔을 때 생각나?"
대답 대신 그녈 계속 바라봤다. 그 날은 동생이 집에 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웅크려 울던 날이었다.
"부모님이 계셨으면, 누군가 나랑 같이 있었으면 지금 우리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난 옷 벗고 돈이나 받고 오빠는 그런 날 몰래 보는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는 않는 그런 지금 모습. 그때 오디션은 2시간도 안 걸렸던 것 같애. 프로듀서란 사람이 날 데려갔어. 연예인이 되려면 오디션을 보기 전에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나랑 그 사람 둘만 남았어. 내가 어떤 걸 겪었는지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도 모르겠어. 기억이란 게 깨져서 조각만 남은 거 같애. 이게 무슨 기억이었을까, 모르겠지만 그 조각 위를 걸으면 발이 베이고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흘러나오는 것 같애. 그렇게 아프면 생각이 나. 그날 너무 아팠는데 소리 지르면 날 때렸어. 비명을 토해야겠는데 양말 같은 게 내 입안에 가득 차있어서 뱉을 수가 없어."
그리고 달래는 흐느끼는 것도 아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어릴 적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엄마 품안에서 울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게 울다가, 달래는 뭔가 걸린 것처럼 기침을 했다. 다르게 보면 걸린 걸 토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 모습은 입술을 타고 흐른 맑은 침 까지 선명하게 기억난다.
달래는 남은 물을 마셨다. 그냥 물을 마셨는데 치익 하고 불을 끄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어쩌면 쉬잇 거리며 새는 가스소리를 그렇게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갑갑할 땐 관심을 받고 싶었어. 누군가 내 옆에 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게 돼. 근데 동시에 누군가가 내 영역에 들어오면 죽을 것 같이 무섭게 돼.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방송을 한 거였는데, 내 얼굴이 인터넷 곳곳에 팔리니까 도저히 방송을 할 수가 없던 거야. 그래서 밖엘 나간거야."
"어색해. 이런 말 듣는 거, 어색해. 힘들어..."
힘겹게 말을 뱉었다. 그리고 달래는 가만히 있었다.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가스 새는 소리만 우리 둘 사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뒤론 시간이 그렇게 5분? 10분? 우리에게 1년이나 2년이 남은 것도 아닌데 그저 무의미하게 툭툭 시간들은 과실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초침은 틱틱 하고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시계는 일곱 시 오십이분을 막 지났었다.
초침이 막 8시 정각을 가르는 59분의 60초를 지났다. 달래는 브래지어 끈을 풀었다. 가터벨트 끈도 풀었다. 마지막으로 팬티도 내렸다.
"밖에 그냥 나 혼자 있는 것 같으니까 나 빼고 모든 게 짓누르는 거 같았어. 그냥 밤공기도 내 가슴을 틀어막았어. 그러니까 남자가 떠올랐어. 내가 가진 몸만으로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니까. 그래서 남자만 찾으면 나머진 정말 쉬웠어. 모텔에 이끌려 가는 것도, 옷을 이렇게 벗는 것도. 그 사람은 나처럼 말랐는데 가슴은 큰 여자는 처음이래. 솔직히 기쁘진 않았어. 아무 생각 없었거든. 내가 왜 벗는지. 근데 벗고 나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 방금까지도 정말 쉬웠는데. 그래서 그냥 침대에 누웠어.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내 위에 올라타 앉았다.
"이렇게 내 위에 올라탔어. 그리고 오므려진 내 다리를 벌리고 그걸 넣으려고 그랬어. 그러니까 내 안에서 뭔가 토해져 나오는 것 같았어. 슬픈 건지 화가 난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는데 비명이 나왔어. 나도 처음 듣는 비명이었어. 그 놈이 닥치라고 배를 때렸는데 그대로 몸이 정신을 놓은 것처럼 기절했어. 그렇게 기절할 수도 있더라. 그리고 정신이 드니까 오늘 아침이었어."
그녀는 내 팔을 베고 옆에 누웠다. 난 천장만 보고 있었다. 마음이 도저히, 그녀에게 다가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오늘 내내 모텔 침대에서 누워있었는데 인터폰으로 전화가 왔어. 시간 다 되었으니까, 나가라고. 난 그냥 시간을 더 연장했어. 돈은 있었는데 나가서 뭘 할지 몰랐거든. 냉장고엔 생수가 있고 그 남자가 사온 술도 있었는데 목이 마른데도 손끝도 갖다 대기 싫었어. 그냥 침대에 누워서, 지금 있는 돈만큼 시간을 연장하고 그대로 있고 싶었어. 온 몸이 마비된 것처럼.
바보 같은 줄은 알지만 누워있으니까 이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거야. 내가 다시 과거로 간다면, 어디로 가서 다시 시작해야 될까. 오빠랑 그렇게 못 본 척 하며 살아가기 이전? 아니면 내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나대기 이전으로? 아니면 오빠가 교통사고 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될까. 그런 생각이 나더라. 그러다가, 오빠 생각이 나서 그냥 집에 왔어."
"내 생각은 왜. 나 때문이라서?"
그녀는 천장을 바라봤다. 초침이 몇 초 움직일 동안 그대로 가만있었다. 그러다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 남은 물을 모두 먹여줬다.
"그냥. 오빠 밥 챙겨줘야 된다는 게 생각이 나서 집에 왔어."
그 말을 듣고 난 그녀의 얼굴을 봤다. 기분은 밤을 샌 것처럼 나른한데 천장의 무의미한 벽지를 보기 보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다른걸 보고 싶었다.
나는 내 팬티를 갈아 입혀주는 동생을 동생, 혹은 그 애라고 부른다. 그리고 허물을 벗고 허릴 흔드는 동생은 달래라고 부른다. 그리고 실밥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벗은 달래는 그녀라고 부르기로 했다. 오랜 연극이 끝나고 그녀는 더 이상 몸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영역 안에 성큼 다가와 있다. 하지만 그녀의 나체가 더 이상 불편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너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그녀는 지금 풀씨처럼 흔들리는 숨을 쉬고 있다. 조금씩, 짧게, 그리고 더 가늘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단 한 사람밖에 못 들었을 조그마한 숨을 짧게 들이쉰다.
나는 그런 가느다란 떨림까지 바라봤다. 감는 것도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보고 있었다. 이미 내 얼굴 위로 말라붙은 눈물의 강줄기가 두 줄기 있었지만 아직도 마음이 아려온다는 건 더 토해내야 할 울음들이 많이 남았단 뜻인 것 같다. 그러나 울음은 짓눌린 것처럼 무거운 가슴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런 답답함과는 별개로 나는 홀가분했다. 더 이상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의 책임을 물어볼 과거의 사건은, 원인은, 결과는 알 수 없었다는 게 날 가볍게 만든다. 결국 이제껏 생각하는 시간동안 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녀는 방금 막 잠들었다. 잔잔한 파동 같던 숨이 사그라 앉았다.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보고만 있었다. 보면서 생각했다. 숨죽였던 일상, 동생과 달래와 그녀, 유령처럼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던 소리들, 반면 육중하게 내 가슴을 짓누른 답답함, 표본처럼 바짝 마른 내 무기력함. 나는 마지막으로, 천년 만에 다시 움직이는 낡은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녹슨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어둠이, 고요함이 서서히 내게 스며든다.
이제 기억은, 다시 흐릿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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