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憐愛)
- 작성일 2013-12-15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407
연애(憐愛)
아직도 그 순간 생각하면 마음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것만 같다. 그 순간의 떨림, 그 순간의 추억,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평생을 통틀어 그런 느낌을 다시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28년을 넘는 세월 동안 해보지 못한 게 참 많았다. 남들 다 가는 클럽도 안 가봤고(용기가 없어서 못 가봤을 지도 모르겠다),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한 번 해보지 않았고(집이 재벌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넉넉한 덕분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것 같다), 누군가의 시선이 꺼려질만한 유흥업소도 한 번 가지 않았다. 사실, 이뿐만이 아니다. 보통의 남자라면 한 번쯤은 다 해봤을 만한 것들은 해보지 않았다.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술, 담배, 여자. 그 어느 것도 지금까지 인생에서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순간까지 섹스도 없었다. 남들도 그렇게 봤었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나쁠 건 없었지만 참 무엇인가의 결핍 때문에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 허전한 마음에 익숙해질 걸 하는 마음이 든다. 괜히 뭔가를 채우겠다는 부질없는 욕망 때문에 클럽에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 클럽에 갔던 순간의 쾌락, 그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보상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친놈이 된 것만 같았다.
클럽까지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았다. 남들이 알아보는 것도 마음에 거슬렸고 왠지 타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말 완전무결하게 때 없이 순수하게 살아왔는데 그곳에 들어가면 마치 낙인이라도 찍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실제로 누군가 낙인을 찍는 건 아니니까 괜찮았다. 더 걱정이 앞서는 것은 혹시 누가 와서 '유하준 아나운서 아니에요?'라고 묻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예능프로에 자주 나간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 마사지 자체를 많이 받지 않은 터라 알아볼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이라는 건 언제나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 문제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안 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지만 축지법을 쓴 것처럼 발걸음은 어느새 클럽 앞으로 와있었다.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 약간은 어색하게만 보이는 메이크업, 표준어가 아닌 서울말, 얼굴을 반이나 덮고도 남을만한 선글라스라는 인화성 물질에 자기 합리화라는 불을 당겨 철저히 무장했다. 나름대로 성공이었다. 적어도 삐끼는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단 한 사람만 알아보지 못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도 알아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만약에 누군가 알아보는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언제나 이렇게 만약의 상황에 대한 가정이 철저했다) 신데렐라가 마법이 풀린 것처럼 도망을 가야하는 것일까. 그러면 더 의심을 할 텐데……아니면 태연한 척 있을까. 그러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글쎄……그것도 좋지는 않은 방법이겠다. 음……그래! 능청스럽게 하는 거야. '아, 그렇죠? 그렇지 않아도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유하준 아나운서가 들으면 별로 좋아하지는 않겠어요.'라고 하지 뭐. 아, 역시 철저한 준비! 이 정도면 더 없이 완벽하다. 더구나 대낮처럼 환한 것도 아니고, 또, 그 시간에 녹음된 라디오 방송이 나오지 않는가! 방송국에 있지 않고서는 그 방송이 녹음인지, 생방송인지 알게 뭐람!! 정말 이럴 때 보면 준비성 하나는 끝내주는 것 같다. 아니, 끝내주지.
안내해준 자리로 앉아 그대로 술을 마셨다. 들어왔지만 솔직히 약간 겁이 나서 그걸 어떻게든 감춰보고 싶었다. 처음 온 것 같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글로 배운 클럽에서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고자 했다.
몸 속 곳곳으로 알코올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여전히 오그라든 상태로 펴지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던 까닭에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잘생긴 사람은커녕 클럽 죽돌이 같은 놈들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 쓰다듬으려 하지를 않나, 단 3초도 보고 있기 힘들 정도의 얼굴로 추파를 던지는 놈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심지어 화장실도 제대로 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 좁은 공간에서 무슨 유혹을 해보겠다는 건지 이리 저리 추근덕 대는 걸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잠시도 참을 수 없었지만 몇몇 고귀한 유전자를 보유한 분들의 아우라가 탈출하고자 하는 유혹을 상쇄시켜버렸다.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술값이 아까우니 술이라도 먹고 가자고.
그렇게 술로 몸을 가득 채워도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허전하기만 했다.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마음이라는 것이 쉽게 채워질 수가 없는 것이구나, 그 어떤 것도 마음을 가득하게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그 허한 마음을 술로 채워갔었다. 집으로 갈 수 있을 정도의 정신만을 남겨두고 미치도록 취해보고 싶었다. 취하지 않고는 버티기가 힘들어 돌아버릴 것만 같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가 더 불쌍해 보였다. 이렇게 다른 것에 의지하고 있는 스스로가 애처로워 보였고, 나중에는 육신조차도 힘겨워졌다. 그 순간 정신이 남아 있었는지 이렇게 있다가는 신분이 들통 날 위험이 있다는 신호가 미약한 신경을 일깨워 발걸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위로받고 싶었던 헛헛한 마음은 온통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채 돌아서 초췌해진 육신을 이끌고 나오고 있던 순간이었다.
"괜찮으세요?"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넘어지려던 순간 그 사람이 자신의 품으로 당겨 내게 처음으로 했던 말이었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겠다는 것보다 이 포근함과 따스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앞서 그렇게 기댄 채 멍하게 눈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괜찮으냐며 똑바로 일으켜 세워줬다. 그 때서야 정신이 들어 대답을 했다.
"네...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했던 말이 고작 추임새 같은 것이었다. 너무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려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만 꾸벅이고 돌아서서 나왔다. 이 순간 들뜬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지만 동시에 빨리 떠나야 할 것 같았다. 클럽을 정신없이 빠져나와 차를 잡으려 했으나 그 사람이 내 손을 먼저 잡아 날 돌려세웠다.
"어, 유……"
그 순간 설렘도 잠시 가슴이 철렁했다. 돌려세운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정체(?) 때문이었던 것이다. '유'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자체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You have a boyfriend?"
반전이었다. boyfriend? 그 말에 바로 눈을 뜨고는 몇 번을 깜박였다. 뭐지, 이건? 당황스러운 반응에 그 사람은 그저 웃어버렸다.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다시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미안해요. 캐나다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돼서, 습관적으로 영어가 나와 버렸네요."
그러고는 또 다시 웃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오묘한 감정이 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다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또, 그 사람의 손은 아직까지 내 손 위에서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저, 뭐라고 했죠?"
당황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자 또 한 번 웃어 보이며 남자가 있냐고 이야기를 했고, 잠시의 고민도 없이 없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붙잡고 있던 손을 신나게 이끌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지만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저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혹시 이 사람이 인신매매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조직 폭력배 얼굴마담은 아닐까 별에 별 생각을 다 하며 두려움에 떨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걱정이 조금도 머릿속을 스치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이 가슴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우리 저기 가요. 밤늦게 위험하잖아요."
그 사람이 가리킨 곳은 오색찬란한 불빛이 번쩍이는 러브호텔이었다. 가슴이 더욱더 심하게 뛰는 것 같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낼 뿐이었다.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다시 옮기고 있었다.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과 연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시간이 흘렀지만 그 순간에 희열과 감동은 아직 떠나질 않고 있다. 아직도 온몸에 전율이 흐르듯 남아 있는 것만 같다. 며칠 동안 구름 위로 붕붕 떠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어 슬쩍, 슬쩍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입술이 닿은 순간 그대로 그 사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흡입력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강력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일찍이 경험해볼 수 없었던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오묘한 감정이 있을 수 있다니, 세상은 오래 살아봐야 한다는 옛 어른의 말이 생각날 정도였다. 너무도 강렬했던 그 순간의 기억과 정신은 물론 온 육신을 지배해 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사람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고, 어딜 가든 간에 그 사람의 흔적 속에 헤어 나올 수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선뜻 먼저 연락해볼 수는 없었다. 혹시 답장도 주지 않으면 어쩌나,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언어의 조합으로 가슴을 후벼 파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쉽사리 문자도 해볼 수 없었다. 더구나 누군가 이 휴대폰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없지 않아 있었다. 유명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입사와 동시에 포털에서는 스스로의 존재가 어느 정도는 개방되고 말았으니까. 때문에 모든 것이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치도록 타오르는 이 감성을 너무도 똑똑한 이성이 적절히 지배하려 드는 꼬락서니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쩌면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때론 가능성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고 그것은 내게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먼저 연락을 준 것이다. 보고 싶다고,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그 말을 기대했지만 식상하다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말 밖에 하지 않았다. 날씨가 어떠냐고, 밥은 먹었느냐고 내심 고맙기는 했지만 마음을 도통 읽을 수 없으니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싶었다. 진짜 이거 뭐야? 이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래도 관심이 있으니까 전화를 줬겠지? 그럴 것이라 믿고 서로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먼저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이야? 답답한 놈이 먼저 하는 거지 뭐……
보자마자 뭐라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모텔로 향했다. 너무 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세상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이런 감정 속에서 잠시나마 있을 수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고 기쁨이었다. 어쩜 이렇게 황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첫 순간의 그것은 두려움, 기대, 설렘과 같은 것에서 시작되었다면 이번에는 설렘이 충만한 상태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감정들이었다. 스스로의 신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저절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었구나, 이성이라는 것이 마비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구나를 쾌감 하는 순간이었다. 아주 원초적인 동물의 상태로, 가장 원시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편안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자체가 황홀했다. 태어나는 순간 먹고 자는 것부터 통제받으며 살아온 우리네 인생에서 무엇인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값진 것이고 귀중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렇게 감정, 좀더 솔직히 욕정에도 모든 장애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온몸의 전율로 화답하자 이 순간만큼은 신선이 된 것만 같았다. 지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더욱더 간절해지고 더욱더 아프게만 전해져온다. 그 순간에는 뜨거웠는데, 지금은 눈시울만 뜨거워지려 한다. 멈추고 싶었던 그 생각이 그 순간의 기쁨 때문만이 아니라 어쩜 육감으로 이런 순간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을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가슴은 뛰고 있었다. 서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말이 다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최고의 소통이었다. 말을 하지 않고서도 말을 모두 전할 수 있는 단계……서로 아직 진솔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해본적은 없었지만 이런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하는 느낌이 가슴 속으로 자꾸만 비집어 들어왔고, 머릿속으로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 확신은 술자리에서 진실로 바뀌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몇 번 문자하면서 말은 이미 형에게 편하게 하라고 했었다.
"기다린 사람이 매일 그런 이야기를 해요?"
순간 웃음을 짓는다.
"왜 웃어요?"
다시 한 번 더 웃음을 보낸다. 차마 뭐라 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너도 나 기다렸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걸 모른다는 듯이 저렇게 능청스럽게 말을 한다. 솔직히 말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 너 왜 그래?"
"뭘요?"
사실 감정이 확 달아오르고 있었다.
"보고 싶으니까 먼저 보자고 이야기를 했지. 꼭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결국 터지고 말았다.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해버렸다. 그러면서 괜히 술만 마셔버렸다. 형은 웃기만 웃었다. 대체 그 웃음은 뭐란 말인가! 아휴~이 세상에 해석해야 될 것들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온통 복잡하기만 하다. 그냥 단순해지기로 하고 술을 또 마시려는데, 어라! 잔을 뺏어 형이 마신다.
"혼자만 마시냐? 내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도 뺏어 먹는 게 어디 있어요?"
"내 맘이다."
이미 마음을 다 읽어버렸다는 건지, 뭔지 정말……그러면서 다시 하는 말은 더욱더 가관이다.
"너 정말 키스 끝내주더라."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뭐라고 해야할까, 음 저……그냥...뭐....이런 걸로 말을 해야하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복잡해지는 동안 안면은 이미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가고 있었다.
"뭐야? 선수다 이거야?"
"그래요. 뭐 선수예요. 선수 가지고 노는 사람은 어디 뭐 마담이라도 되는 모양이죠?"
그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또 좋아한다. 미칠 지경인데 혼자서 신이 났다.
"너 나랑 만날래?"
순간 또 머리를 돌려야 했다. 지금 이건 만나는 게 아니면 또 뭔가? 심심풀이 땅콩이야 뭐야? 아 정말 오늘따라 왜 이런지……
"지금은 만난 거 아님 뭔데요?"
"너 진짜 물건이구나!"
"좀 전에 못 보셨어요, 제꺼?"
그 말에 좋아 죽으려고 한다. 혼자서 환장한 듯 웃는다. 그 웃음이 해맑아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가슴이 설렌다. 저런 사람이 지금 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폭풍감동은 아니고 스멀스멀 기어와 이 가슴을 모두 휘어 감는 것만 같다. 그렇게 우리는 밤새 술을 마셨고, 끝내준다는 키스를 화장실에서도 했다. 하마터면 술집 안에서도 할 뻔했지만 억지로 만류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 자리에서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만 세상의 시선이 두려울 뿐이었지……지구가 움직이고(원래도 지구가 움직이고 있지만)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아,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는구나, 세상이 나를 위해서도 움직여주는 구나 싶었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줬으면 했다.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미칠 것 같다. 이렇게 숨이 막혀오기는 처음이다. 뭘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만 두려움과 괴로움, 고통과 아픔이 온통 가슴을 휘감아오고 있을 뿐이다.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에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고, 또 어떤 순간에는 괜찮다고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위로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가슴을 쥐어뜯고 만다. 그 사람 번호는 이미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존재 자체도 '도도완'이라는 이름 석 자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아련한 기억 속에서 홀로 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눈물……속 시원하게 흘리고 싶었다. 그 마저도 펑펑 터져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압박하듯 눈물샘도 압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저 체증처럼 답답하게 가슴을 압박해오는 것처럼, 심장을 좀더 오그라들게 만들어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게 만드는 것처럼, 눈물샘도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이 여겨졌다. 차라리 펑 터져버렸으면 차라리 좋겠지만 어떤 것도 터져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죽었다고 생각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 마저도 되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는 전화를 하면 통화중으로 되는 날도 있고, 어떤 순간에는 전원이 꺼져 있다가 다시 켜지는 날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했다. 100% 나를 피하고 있다는 것.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혹시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집안에 무슨 일은 있는 것이 아닌가, 직장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갖가지 가정을 해봤지만 이렇게 장기간 연락이 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이럴 수는 없다. 누가 먼저 시작을 했는데, 누가 먼저 정을 주고 웃음을 줬는데 상처 받는 사람은 왜 그 사람이 먼저가 아닌 것일까……
"..너, 너 왜 이래?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그 순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가 중요할 뿐이었다. 누가 쳐다보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왜 하필 그 순간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툭 하고 나서 그냥 샘솟아 흘렀다. 그 순간 수연이가 옆에 있다는 것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로지 스스로의 감정에 복받쳐 터져 나와 버렸다.
그 사람과 연락이 되지 않은 후에는 어떤 곳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먹으면 먹는 대로, 잠이 오면 자는 대로……그렇게 있다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날에는 아파트 옥상까지 한 번 올라가보기도 했지만 워낙 철저한 경비 체계에 그 앞까지 밖에 갈 수 없었다. 솔직히 다른 건물 옥상을 가고자 했다면 또 갈 수도 있었겠지만 막상 며칠이 지나니까 귀찮아지고 이렇게까지 괴로워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때로는 용기가 나지 않기도 했고, 결정적으로는 방송국 때문(어떻게 생각하면 덕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에 그런 시도를 쉽사리 할 수 없었다. 얼굴 나가는 방송은 별로 없었지만 시간 엄수를 생명으로 하는 곳에 펑크를 낼 수는 없었다. 또, 모든 것에 완벽해야 한다는 그 강박관념이 발걸음을 방송국으로 향하게 만들었고, 돌아오는 길은 늘 그렇듯 녹초가 되어 있었고 고통스런 감정은 그 감정대로 피곤함은 또 피곤함대로 밀려와 그냥 잠에 드는 순환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피곤함마저도 극복할 만한 고통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가슴 속에 암처럼 뭔가 스멀스멀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요즘 분장을 더 두껍게 해야 할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했고, 실장님은 목소리 좀 어두워진 것 같다고 한 소리 하시고, 게시판에는 게시판대로 가뭄에 콩 나듯 있는 팬이 라디오를 듣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글을 남겨놓았다. 그런 반응들에는 모두 알 수 없는 웃음으로 넘겼지만 그럴수록 아픔은 더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누군가 더 들춰내는 것만 같아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고자 또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시련과 고난이었다. 괜히 휴대폰에 신경질을 내며 던지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수연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 연기를 하며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며 전화를 준 것이었다. 역시 10년 지기를 속일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휴일이고 한 번 보자고 했었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나 자신을 미리 구원하기 위해 불러냈던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수연이는 그러고도 남을 친구고, 그럴...여자니까……
수연이를 생각하면 복잡한 감정이 오간다. 여자 친구? 여자인 친구? 단지 조사 하나의 차이지만 참 복잡했다. 이젠 '인'이라는 조사 없이는 수연이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수연이 쪽에서는 여전히 아닌 듯 했다. 여전히 '남자 친구'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는 듯 보였다. 나아가서는 미래의 남편감으로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괜히 이런 TV가 어떠냐, 쇼핑몰 소파가 신혼 부부가 쓰기에는 너무 크지 않느냐, 애는 몇 명이 좋을 것 같으냐는 그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한다. 물론, 오랜 지기이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연히 술 마실 기회가 생겼었다. 그날따라 둘 다 술이 너무 잘 들어가는 터에 고천년 묵은 이야기까지 다 꺼내며 헛소리를 해댔다. 서로의 치부를 꺼내 웃기도 했고, 여행 갔던 이야기도 했고,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지 모르는 대학 동기들의 연애 이야기도 했다.
그러다 우리 이야기로 돌아왔다. 서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할 이야기 자체도 별로 없었지만(사실 연애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넌 대체 누굴 좋아했는데? 만인의 연인도 아니다, 정수도 아니다, 지훈 선배도 아니다, 너 여기 자체가 고장난 건 아니지?"
가슴을 치면서 말을 했다.
"고장 났으면 굿이라도 벌일 판이다?"
"당연히 벌여야지. 둘도 없는 친구가 병원 가도 못 고치는 병에 걸렸는데. 안 그래?"
순간 눈을 흘기며 신경질적으로 한잔 마셨다. 그러면서 난 계속해서 수연이가 알만한 남자 중에 빠트린 사람을 계속 생각해 봤다. 아무리 술기운이었지만 빠트린 사람은 없었다. 걔는 너무 어려서 그렇다, 그놈은 너무 바람둥이 같아서 싫었다, 또 누군가는 못생겨서 마음도 안 가더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나갔는데 핑계를 만드는데 도사가 아닌가 할 정도였다. 정말 오늘에서는 결판을 내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모든 남자를 생각해봤지만 더 이상 없었다. 그러다 슬쩍 물었다.
"혹시 너 나 사랑하니?"
그 순간 갑자기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생 처음 그런 모습은 처음 봤었다. 갑자기 정말 당황스러워졌다. 아무리 달래도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연신 눈물을 닦아냈지만 그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계속 해서 흘러내렸었다.
"참 빨리도 물어 본다"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그럼 그게 진짜였단 말인가? 장난삼아 물어봤던 말이 진짜였다는 건가? 왜 그런 몹쓸 질문을 해서……갑자기 뭐라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다만 누군가를 상처 주는 질문에 이어, 더 깊은 상처를 주게 될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미안해. 정말……"
무엇인가 더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너무 불편해서 기억 속에서 다 지웠던 것 같다. 다음날 수연이는 늘 그렇듯이 행동을 했다. 뭔가 꺼림칙한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했고, 그렇게 말해주는 수연이가 고마웠다. 그 후 지금까지 쭉 단 한 번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하지 않았다. 그렇듯 수연이는 늘 날 위해주는 그런 친구이자…… 그런 여자였다.
그런데 그날은 참 반대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수연이 앞에서 울고 있었다. 마치 복수당한 느낌 같기도 했지만 수연이가 그 꼴을 보고자 온 것은 아니었겠지만……정말 어느 순간에는 미치도록 울고 싶었는데 뭔가 가슴 속에 콱 막혀 울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그날따라 그 사람과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을 여기 저기 다니게 되었다. (진짜 수연이가 모든 걸 알고 그런 경로로 데려가서 복수하려고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들기도 했었다.) 그 사람이 즐겨 피우던 담배를 보면 피우고 있는 모습이 머릿 속에 떠올랐고, 함께 걸었던 길을 지날 때에는 옆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 때문에 주위를 돌아보기도 했고, 비슷한 이름을 걸어두고 영업하는 치과, 한의원, 미장원을 볼 때면 더욱더 미칠 것만 같았다. 특히, 그 사람과 첫 만남이 있었던 그곳을 지났을 때에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수연이가 사온 커피를 마시다가 와락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필……하필……그 커피가 그 사람이 즐겨 마시던 그 브랜드였다. 도저히 넘어 가지지가 않았다. 눈물과 함께 주르르 쏟아져 나오며 그대로 눈물이 샘솟아 오르고 말았다. 흰색 와이셔츠는 이미 커피로 물들었고, 얼굴 역시 눈물과 커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수연이가 닦아준다고 닦아줬지만 주위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 큰 남자가 길 한 복판에서 펑펑 울고 있지, 그걸 또 여자가 닦아주고 있지……게다가 몇몇 알아보는 사람 탓에 수연이는 찍지 말라는 이야기도 함께 했어야 했다. 수연이는 대충 어느 정도 닦고는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 차를 탔다. 재수 없게도 택시기사 마저 알아봤었지만……
그 다음날 무슨 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냥 그대로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세상은 너무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주식은 연일 상승세를 이어갔고, 세계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나날이 우승을 차지했다. 안 좋은 건 모두 이 가슴 속으로 다 들어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 실장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 해외연수를 권유하셨다. 어차피 몇 년 뒤에 보낼 예정이었는데 지금 미리 다녀오라고 하셨다. 나쁠 게 없었다. 정말 이 공간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으니까……그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곳을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한 번은 더 보고 싶었다. 영화처럼 한 번 저절로 만나지길 몇 날 며칠을 기도했으나 모르는 사람만 잔뜩 지나갈 뿐이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닮은 사람이라도 보였으면 했지만 그 조차도 없었다.
"그럼, 최종적인 연수 목표는 어떻게 되십니까?"
"아나운서 저널리즘에 대해 제대로 한 번 연구해 보고 싶어요. 사실 요즘 아나운서가 되고도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동료들도 꽤 많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말을 하는 것을 업으로 지녔다면 언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 또한 저널리즘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저널리즘이 어떠한 형태가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모색해 보고 싶네요. 선진국의 방송 시스템을 직접 체험하면서요."
"네, 부디 그 목표 꼭 이루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드디어 인터뷰가 끝났다. 휴~ 무슨 유명인사도 아니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여성지에서 나왔는데 세간의 관심이 많다는 둥, 섭섭해 할 팬을 생각해서 필요하다는 둥 다 보이는 거짓말을 해가면서 인터뷰를 하자고 한다. 섭외 자체가 어려운 걸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으로 그걸 차마 거절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거짓말처럼 보인다 해도 그네들 또한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참 너무 형식적이었다. 하긴 내 대답이 더 형식적인 것은 아닌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가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 될 거고, 이 여성지는 대박날 거 아닌가! 나를 재물로 바쳐서……
그 생각들이 한 켠에 지나가는 동안 익숙한 향기가 스쳤다. 분명했다. 그 향기다. 분명히……그 사람이다. 일어서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슴 뛰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일단 가야했다. 아니더라도 가야했고, 아니다 하더라도 뭔가 말을 하고 싶었다. 왜 그랬느냐고, 어디서 뭘 했느냐고……제발, 제발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외치며 다가갔을 때 그 사람이 먼저 돌아봤다. 정확했다. 순간 어지러웠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형……"
억지로 해낸 말의 전부였다. 그 사람은 약간 당황스러워 하는 듯 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바라봤다. 무엇 때문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옆에 그 여자.
"어쩐 일이야?"
그 여자를 한 번 훑어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야기 하려고 했다.
"여기서 인터뷰가 있었는데……형은 어쩐 일이야?"
멋쩍은 듯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응, 아참 인사해요."
그 여자를 보며 이야기를 했다.
"안녕하세요."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에 큰 눈망울, 오똑한 코, 립스틱이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입술……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자였다.
"여긴 한 때 같이 좀 놀던 동생, 그리고 여긴 곧 결혼할 사람"
놀..던..동..생...
솔직히 언젠가 결혼은 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사람을 완벽히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사람 옆에서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 이상 바란 것도 아니다. 그냥 그거면 좋았는데……놀던 동생 나부랭이에 불과하다니……그것도 한 때……그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지만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뭐라고 더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것도 표현할 수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말해봤자 둘 다 손해다. 그런 생각들이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가자, 어쩔 수 없이 똑같이 인사 밖에 할 수 없었다.
"미인이시네요."
"그치? 마음은 더 비단 같아."
그 여자가 웃는다. 괜히 짜증이 난다.
"저 실례지만 형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데 잠깐만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네, 그러세요. 얼마든지. 결혼하고는 자주 부르지 마세요."
눈웃음을 치며 이야기 한다. 그 사람에게 보통 빠진 게 아닌 듯싶다. 그렇게 잠깐 그 사람을 빌려 카페 복도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표정이 확 바뀐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다.
"왜?"
그 말에 수천, 수만 가지의 하고 싶었던 말들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바빠. 뭐야?"
눈을 감고 억지로 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번호 바꿨어요?"
"아니."
"왜 안 받아요?"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 이유는 좀 전에 다 설명된 것 같은데?"
"...설명이 됐다고요?"
"아나운서씩이나 되는 놈이 머리가 그것 밖에 안 되진 않을 테고……모른 척 하는 거야, 모른 척 하고 싶은 거야?"
칼만 안 들었지 온통 쑤셔 대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더 이상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실낱같이 숨을 쉬는 자체가 짜증난다. 차라리 이대로 숨을 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뭔가를 해야 하는 건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동안 쉴 새 없이 문자가 오지 않았나 확인을 하기도 했고, 혹 방송 중에 전화를 못 받은 것은 아닌가 하며 방송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을 들여다봤지만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살았는데, 기대를 하고 살았던 내 자신이 우스워져 버렸다. 지금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프게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 앞에 서있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지만 그건 그런 느낌을 받고 있을 뿐이었고 너무도 멀쩡했고 말문만 막힐 뿐이었다.
"저 사람 기다리거든?"
"...저 사람 기다리는 것만 보이고...제가 그 동안 기다린 건 안 보이세요?"
"그것까지 보여야 할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고 남의 마음 함부로 상처낼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지만 그 말만은 해야 했었다. 마지막 발악이라고 하고 싶었고 내 이 고통스러운 심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 사람의 가슴에 닿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그러나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 되고 말았다. 엄청난 비수가 되어 심장의 정 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마구 돌리는 것만 같았다.
"계약이라도 했어? 문자 주면 답장해야 하고, 전화주면 꼭 받아야 한다고 누가 도장 찍고 싸인 이라도 했어? 그 마음은 너 혼자 상처내고 아파하는 건데 왜 그따위로 말을 하지?"
뒤에 벽이 없었다면 그대로 넘어갔을 것이다. 벽이라도 있었기에 그곳에 기대어 조그맣게 숨이라도 쉴 수 있었던 같다. 숨 쉬고 있다는 자체가 다시 괴로워지려 했었다. 차라리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죽는 편이 낳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약간 어지럽고 매스꺼웠지만 참을 만했다. 아니, 다시 어지러워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억지로 숨을 쉬려 했다. 차라리 숨을 멈추고 싶지만 계속 숨이 진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하지만 더 불쾌하고 더러운 건 눈을 떴을 때, 그러니까 억지로 눈을 떴을 때, 그 사람이…… 그 사람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 자신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렇게 더 이상 살아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강렬했지만 너무도 짧았던 순간의 터질 것 같은 그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어 발걸음을 여기 이곳까지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제 마지막 발걸음만 옮기면 그만인 것이다. 더 이상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려 할 필요도 없고 그냥 한 걸음만 더 움직이면 정말 그만인 것이다.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자체가 억울하고 불쾌하다.
정작 그 사람은 너무도 멀쩡한데……
오히려 더 좋아 보이기도 하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구차한 목숨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고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이다.
자존심도 상하고……
그러한 것들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밥을 먹지 못했을 때의 그 공허함 이상으로 내 이 정신을, 육체를 미친 듯이 괴롭힌다.
그 괴로움에서 자유롭고 싶어 여기까지 왔다. 후회가 없다면 솔직히 거짓말이겠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결정 자체에 대해서는 만족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생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그 거룩한 권리를 실현해 나가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과 함께 두 팔을 벌렸다. 실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순간 마치 카메라가 한 화면을 가만히 붙잡고 있는 것처럼 공중에 떠있다는,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도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다음 생은 마음껏 꿈꾸고, 마음껏 사랑할 수 있기를……
영원히 이 순간이 멈추기를……
뭐지? 아직도 뭔가를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순간쯤이면 모든 것이 마비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아직 뭔가 실낱같은 빛이 감지되는 것 같다. 멀리서 희미한 소리도 들리고……재수 없게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인가!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이 느낌이 뭐지………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무슨 소리가 시끄럽게 규칙적으로 들리기도 하고……뭔지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 다만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그러다가 문득! 심장이 뛰는 느낌을 받았다. 늘 원해왔던 거다. 그토록 꿈꿔왔던 순간이다. 설마 이 순간이 꿈은 아니겠지……지금 비록 앞이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느낌!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품안에 지금 들어가 있다.
뭔가 툭! 하고 하나 뜨거운 것이 얼굴 위로 떨어진다. 또 연이어서 떨어진다. 뭔가 계속해서 방울지어 떨어져 얼굴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비가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 사람의 눈 속에서 떨구어내는 감정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파하고 있었구나... 그래도 이렇게 아파하고 있었구나. 날 위해 아파해 주고 있었구나. 진짜 죽게될지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시도해 보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그래,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면야……한 번쯤은, 한 번쯤은 시도해볼 만하기도 하다. 그 사람의 마음을, 사랑했던 이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었으니까……
얼굴 위로 너무 많은 방울들이 수없이 떨어진다. 이렇게 슬퍼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못됐게 하지를 말지. 왜 괜히 그렇게 못 됐게 해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하고 이 지경에 이르도록 했단 말인가! 너무 괴롭다. 괴로울 정도로 눈물들이 많이 떨어진다. 그 순간 이 사람 눈물을 멈출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 많이 떨어져 흡사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아마 미세하게 살아난 후각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몰랐을 지도 모른다.
냄새. 이 냄새는 분명 어머니의 화장품 냄새다. 몇 십 년을 함께 보내온 어머니의 그 냄새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의 눈물이 그 사람과 함께 섞여 떨어지고 있었나 보다.
어머니……엄마……분명 미치도록 슬퍼하고 있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다. 엄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유언도 하나 없이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진 자식을 어떻게 생각할까. 마냥 슬퍼만 하겠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체……정말 죄송한 마음 밖에 들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말 조차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영원히 비밀은 몰랐으면 좋겠다. 그 비밀을 알게 된다면 더욱더 미쳐 할 테니까.
그나저나 그 비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혀 의심 없이 내 모든 것을 믿어주셨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봤다. 흥신소를 통해 아들의 뒷조사를 하시지는 않을까 하고. 엄마는 극성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학교 성적은 나보다 엄마가 더 빨리 알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방송국 권력 구도 역시 경력자 이상으로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도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역으로 내가 엄마에게 흥신소를 붙여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엄마에 대한 궁금증이 모두 풀렸다.
다행이라 해야 할 지, 불행이라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 귀가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그 사람이……
흥분해서 엄마에게 대드는 것 같았다.
"바라는 게 이런 거였어요?"
"몰라."
"같이 아파해주고 이해해주려 하지는 못할망정 이게 뭐예요?"
"우리 하준이 아나운서야. 아무리 얼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건……좀 치명적이잖아? 엄마로서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아? 입장 바꿔 생각해봐!"
"아뇨! 엄마라면……엄마라면 모른 척 하고 함께 아파해줬을 거예요. 적어도 아들 좋아하는 놈 찾아와서 헤어지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어떻게 대하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식으로 협박하지는 못할 거예요! 적어도 자기 아들한테 상처 주라고 맞선까지 일부러 보게 할 수는 없을 거라고요!!!"
이게 뭐야!!!
왜 감각이 하나씩 살아나고 그래. 차라리, 차라리 모든 감각이 오전치 못했으면 좋을 걸……감각이 하나씩 살아나고, 그 감각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을 알아차리면서 혹시, 혹시 이렇게 다시 살아난다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는데……이젠 그 마저 두렵다. 살아난다고 해도 이 세상을 어떻게 똑바로 볼 수 있을지가 무섭다. 무서운 정도를 넘어선다. 또 다시 벼랑 끝에 설 수 밖에 없도록 만들 것 같다. 이 순간 차라리 빨리 죽어졌으면 좋겠다……그 사람의 품안에서……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