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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1984년

  • 작성일 2013-12-18
  • 조회수 6,892

<1984년> / 조지 오웰

 

  내가 처음 조지 오웰을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 읽은 동물농장을 통해서다. 그때 나는 제목만 보고 책을 집어 들었었다. 사람과 돼지가 술잔을 같이 기울이는데 누가 돼지고 누가 사람인지 알 수 가 없다던 그 마지막 문장을 수십 번을 읽었었다. 여러 번의 쉬는 시간을 거치며 읽었고, 책 끝에서 나는 나를 짓누르는 공황 상태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교실이 왁자지껄했는데, 내 주변은 거꾸로 먹먹했다. 느리게 일어나서 책꽂이에 다시 동물농장을 꽂아두는데, 솔직히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식의 공포는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회상하기에 그것은 너무나 이른 만남이었다. 조지 오웰의 이름은 내게 그렇게 각인되었다.

  그러던 중 대학에 와서 문득 너도나도 읽어보라고 권하는 1984년을 읽게 되었다. 너도나도 권하는 대학생 권장도서였고, 당시 나는 열렬히 고전에 심취하던 학생이었다. 마음에 드는 번역본을 고르느라 한참을 서점에서 지냈었다.

  1984년은 특정한 미래가 무대다. 반유토피아, 우리가 결코 만들어서는 안 되는 특정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오세아니아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자신들을 지배하는 당에 반기를 들고 전복을 꾀하지만, 그의 부질없는 노력이 어떻게 빅 브라더에 의해 굴복되는지 다루고 있다.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중년의 남자로, 외부당의 기록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그는 현존하는 모든 기록, 책, 신문, 연설문 등을 위조하는 일을 한다. 빅 브라더가 했던 말실수들, 또는 당이 잘못 예측한 통계 -경제성장전망을 좋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아니거나- 그리고 사상범죄를 저지르고 사라진 사람들의 기록을 말살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의무다. 오세아니아에서는 모든 정보가 철저하게 조작될 수 있다. 그것이 과거에 있었던 일지라도 말이다. 빅 브라더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손아귀에 넣고, 필연적으로 미래마저도 통치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윈스턴 스미스는 골동품 상점에 들러 일기장을 하나 산다. 법에 그렇게 명기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일기를 쓰는 것은 당에 위배되는 행위이므로, 윈스턴 스미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윈스턴 스미스는 그는 생각을 글로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재 오세아니아가 가진 정치제도에는 자유가 없고, 심히 부적절하게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음을 점점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일상 생활에서도, 오세아니아의 주민들은 가난하고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다. 특별한 내부당원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진짜 빵과 커피와 술과 차를 구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모든 정보와 통계는 철저히 조작되며 시민들은 세뇌되고 단순해지는데, 의구심을 품기라도 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상경찰이 바로 처단한다. 이렇게 잡혀온 사람들은 사상범이라 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사상범죄자이다. 그는 당의 눈을 피해 일기를 쓰고 외당의 하급공무원인 줄리아와 사랑을 나누고 (오세아니아에서는 당을 향한 애정 외에는 그 어떤 애정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 해서도 안 된다.) 반역자인 골드스타인과 형제단에 접촉을 시도한다.

  결국에 윈스턴 스미스는 고발되어 사상경찰에 체포된다. 체포되는 과정에서도 그는 자신이 믿는 신념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매우 강견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상황이 얼마나 지옥으로 치닫더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배반치 않으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은 윈스턴 스미스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는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걷어차이고, 내팽개쳐진다. 윈스턴 스미스는 모든 것을 심지어는 지어내서 자백하고, 사랑하는 여인마저 배반한다. 그 과정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자신이 고문 앞에서 버틸 수 없음을, 그 누구도 버틸 수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가 믿었던 것들과 신념이라 자부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수했던 절대원칙들마저 빼앗기고 다시 교육받는다. 그는 빅 브라더를 증오했지만, 결국에는 사랑하게 되고, -물론 거기에는 이어지는 심문과 전기충격과 사상훈련이 있다- 당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자신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렇게 비참한 사회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무언가 해보려 일어서지만 여지없이 짓밟힌다. 책의 중간쯤에 가면 윈스턴 스미스도 읽는 사람도 꽤나 희망에 차서 빅 브라더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골드스타인과 그의 형제단이 나타나서 전체주의에 빠진 나라를 구하지는 않을까 기대도 해본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 밝혀졌듯이 모든 것은 조작되었고, 윈스턴 스미스는 믿었던 오브라이언에게 배신당한다. 오세아니아에 윈스턴과 같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빅 브라더가 정립한 오세아니아의 체제는 정말로 튼튼해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킬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1984년>을 읽을 때 나는 북한을 떠올리며 읽었다. 당에 의해 모든 정보가 통제 조작되고, 서로를 동무라 부르고, 이웃이 이웃을 감시하며 자식이 부모를 고발한다는 장면이 북한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문에 관해서는 북한이 <1984년>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또한 빅 브라더가 사람들을 통치하는데 쓰는 방법에 이중사고라는 것이 있는데, 북한이 사람들을 통치할 때 쓰는 방법과 매우 흡사했다. 이중사고는 상반되며 모순된 견해를 동시에 믿는 것이다. 빅 브라더는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서 생각과 논리라고 할만한 것을 빼앗는다. 세뇌 교육 후에 남는 것은 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무지인이다. 북한 사람들한테 김일성은 낙뢰와 바람을 부르는 신이고, 한국과 미국은 자유의 나라가 아니라 억압의 나라다. 하지만 정말로 폐쇄적이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인지 모른다. 사실을 위조하고 사람들을 거기에 세뇌시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윈스턴 스미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억압받는 사회에서의 첫 일탈은 생각을 하는 데서 시작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혁명은 언제나 사람들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인지하던 순간에 벌어졌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체주의는 외부의 공격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내부에서, 빅 브라더가- 김일성이 신이 아님을 사람들이 깨달았을 때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인권이 결여된 사회가 어떠한 양상을 띄는지 <1984년>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는 자유를 박탈당한 일상이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게 해주고, 민주주의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말한다. 그리고 우상화된 독재자가 사회를 주무를 때에 고통 받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소리친다. 오세아니아와 빅 브라더는 우리가 결코 향해서는 안 되는 미래다.

  <1984년>이 사람들에게 크게 호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독재정치하는 국가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1984년>을 읽으면서 독재정치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1984>년을 읽고도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해가 결여되었다고 말 할 수 있어야지, 해석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984년>에서 당이 가진 체제에는 불만이 많지만 그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했던 윈스턴의 애인 줄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난 다음 세대엔 관심이 없어요. 난 단지 우리에 대해 관심 있어요."[i]줄리아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자유였다. 자유를 바라는데 그 자유 안에는 '나' 밖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줄리아가 말하는 자유는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는가 아닌가로 구분된다. 자명한 논리와 생각을 빼앗기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말이다. 세상이 던지는 즐거움에 휩쓸려버리면 문제를 의식하더라도 그것을 개선할 의지도 이유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줄리아의 태도가 무지하며 실로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 말할 수 있겠지만, 줄리아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 역시 순간의 재미를 위해 살고, 지금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팽개친다. 그러니 내가 살아있지 않을 미래, 다음 세대에 관심이 없는 것은 어찌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내가 지금 여기서 술 한 병 더 비우는 것이, 더 노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것이 나중에 어떤 파급으로 다가올는지는 궁금하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21세기 사람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자명한 역사도 왜곡되는 지금,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는 참 알기 어렵다. 어디로 가는지 보기도 힘들 뿐더러, 그런 것들을 신경쓰기에는 너무나 바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로부터 손을 떼어도 좋다는 병명거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도리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고 규범과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가차없이 처벌한다. 인권주의자들이 비명을 지른다. 법에 의해 사람이 죽는다고. 하지만 힘으로서 실천될 수 없는 규칙과 도리는 도리가 아니다. 그것은 방관일 뿐이다. 자유가 아니다. 지켜 마땅한 도리가 팽개쳐진 미래야 말로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나라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 냉철히 판단하고 왜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지 사고하고, 사실이 날조되는 사회가, 독재정치가 전체주의가 왜 그른지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귀찮다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화에서 발을 떼고 수도승처럼 살 수 있다. 또는 줄리아처럼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선에 머물며 개인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살 수 있다. <1984년>에서는 프롤들이 그러한 삶을 산다. 그들은 시대가 가는 대로, 남들 따라 즐기고 싸구려 술과 포르노에 절어서 산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경종의 목소리가 남아있다면, 우리가 그렇게 무지하게 살아서는 안 됨을, 사람은 짐승이 아니고 본능이나 욕구에 앞서서 모든 선하고 이롭다고 할만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지는 않겠는지 촉구해본다.

 

 

2012년 7월 16일

 

 


[i] George Orwell, <1984> (서울: 웅진씽크빅, 2009),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