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스 그라벨
- 작성일 2013-12-20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1,141
옴니스 그라벨
1 옴니스의 친구들
옴니스 그라벨(Omnis Gravelle)은 1967년 5월 1일에 태어나 2013년 10월 24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출생과 사망이라는 이벤트는 이 두 날짜에 희미한 역사성을 덧씌웠고, 그녀를 알던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생전에 사용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릴 적 숨을 빠뜨린 우물로 다시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그 각별한 날짜들에게 불어넣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친구들과 개인적이고 내밀한 정신적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잘 몰랐고, 그녀의 장례식이 치러지기 전까지는 그들 ‘전원’이 한 번도 같은 자리에 모여본 적이 없었다. (소규모로는 여러 번 모였으리라.) 그들은 장례식에 모인 50여 명 중 서로 알던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가장 많은 연락처를 얻은 사람은 카르멜 지의 편집장이었다가 최근에 퇴직한 레미였다.
장례식이 끝난 뒤, 사람들은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드문드문 가로등이 박힌 밤거리로, 50여 명으로 이루어진 사람덩어리가 천천히 풀어지고 있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거나 술집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규모로 모여서 술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들도 매번 함께 옴니스를 찾아가던 그 모임으로 모여 매번 가던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은 매우 좁아서 근처에 앉은 사람의 훈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묘한 슬픔이 그곳에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레미는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옴니스의 친구'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내향적이라는 것과 자신이 가장 옴니스의 마음에 깊게 들어가 보았다고 자부한다는 것. 옴니스의 마음에 관해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 역시 자부한다고 밝혔다. 장례식장에서 그들은 서로에게서 '침착한 향기'(내향적인 사람들이 공유한다는 동질감)를 느꼈지만, 그들 각자가 지닌 '옴니스와의 통로'는 세상에서 가장 유일한 것이었다.
남성 작가는 '작가'라고 하고 여성 작가는 '여성 작가'라고 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설에, 여성으로서의 눈과 손이 선사하는 따뜻한 차별성을 애써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사랑에 대해 회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장작개비처럼 마른, 푸른 빛깔의 허벅지를 지닌 몇 명의 여성들을 우리들 독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들의 회의가 이룩한, 거의 신성할 정도로 쓸쓸한 죽음도 포함해서) 그러나 옴니스 그라벨은 그중 어느 쪽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무덤덤했다.
이를 사랑에 대한 애매한 태도로 받아들였던 옴니스의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심리학자이자 아마추어 철학자인 쟝은 그것을 가장 확실한 태도라고 하였다. 그는 레미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이기도 했다.
(옴니스의 마음에 관해, 그는 그 거대한 현관에 다다를 수 없는 자신의 겸허함을 인정하고, '향기'와 '통로' 따위를 부정함으로써 옴니스의 다른 친구들과 궤를 달리하려고 했다. 그 철저하게 이성적인 접근이 오히려 자신과 옴니스와의 관계를 유일한 것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쟝은 자신이 비판하던 레미와 본질적으로 같은 위치로 스스로를 내린 것이다.)
쟝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랑에 대한 무관심과 사랑의 무조건적인 포용이 그녀의 작품이 완성을 향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세계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곳에 사랑이 흐르는 것을 허용한다는 그녀의 방식은 어쩌면, 종교적인 의미를 배제한 신(자연)을 연상시켰다.
역사학자 코니가 가장 관심을 둔 것은 바로 그녀의 개인사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스토커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현재가 아닌 과거를 쫓아가는 일이었다. 그는 역사학자도 아니었다. ‘화석 복원자’ 코니는 과연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저는 역사를 다루듯이 화석을 다루고, 화석을 다루듯이 역사를 다룹니다. 스토킹하기에 적합한 재능을 지닌 마음이 저를 이 ‘뫼비우스의 띠’로 끌고 왔죠." (A.F. 뫼비우스가 살아있었다면 이 단어가 남용되는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러나 실제로 그가 옴니스에 대해 밝혀낼 수 있었던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옴니스를 알았을 법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녀를 알지 못했다. 레미는 그 이유가 그녀의 비밀을 함부로 밝히려는 시도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려는 '역사의 의지'가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쟝은 레미를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운운하는 말로 비난했고, 다수는 공감했으며 당사자는 몹시 불쾌해했다. 그러나 쟝은 코니를 옹호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과거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녀의 현재, 즉 그녀의 작품들과 그녀와 함께 보내는 소소한 시간들이 중요했다.
한편 직업 불명의 노인, 피에르가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그는 쟝의 말을 토대로 했다.
"그건 아마도 그 사람들이 옴니스를 기억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라네. 사랑이 있는 곳에서만 기억이 자라나지. 옴니스는 아무도 평등하게 사랑하지 않았고, 소설 속의 세계를 다루었듯이 현실의 세계도 다루었겠지."
노인의 말에 따르면, 애정뿐만 아니라 미움, 가장된 무관심 역시 사랑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영향 받지 않고, 영향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현실을 다루는 방식을 조금씩 바꿔오기 시작하던 때부터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범위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옴니스의 친구들이었다.
우리가 술집을 나왔을 때, 마침 다른 술집에서도 한 무리가 나오고 있었다. 방금 연락처를 나누었던 몇 명이 보였다. 우리는 가루처럼 어둠속으로 흩어졌다.
2 소설 두 편
이때까지 출간된 그녀의 소설은 2권뿐이다. 첫 번째 책의 이름은 「종이감옥」이고, 8개월 뒤에 출간된 두 번째 책은 「작가가 없는 세계」이다. 나는 그 제목을 보고, 두 책 모두에 작가로서의 강한 자의식이 투영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나, 직접 읽어보고 난 뒤엔 오히려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옴니스가 죽기 몇 달 전에, 우리들은 그녀의 살롱에 모두 모여 ‘낭독회’를 연 적이 있었다. 「종이 감옥」을 읽던 쟝이 점점 빈번하게 시계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눈치를 줄 법도 했지만, 아무도(옴니스 본인도) 그러지 않았다. 모두 자리에서 뒤척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지루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의 친구가 되는 조건이 그녀의 소설에 흠뻑 빠지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옴니스는 그녀 자신의 친구이기도 했다.
쟝은 이렇게 얘기했다.
“분명한 건, 옴니스의 소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힘들단 겁니다.”
쟝은 옳았다.
그에 관한 사례가 있다. 낭독회 몇 달 전, 그러니까 거의 1년 전의 일이었는데, 문학평론가 프랑크는(지금 그는 다른 나라에 있다) 독자들에게 옴니스의 글을 소개하고 싶어 했었다. 당시 카르멜 지의 편집장이었던 레미와 다투었던지라, 다른 인맥이 없었던, 그보다는 자존심의 문제로, 그는 자신의 글만으로 사람들에게 옴니스를 읽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그 글을 보고 레미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자네도 자네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군그래.” 레미는 그 다음에 나에게 그 원고를 넘겨주었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가독성이 매우 적은 글이었다는 건 확실했다. 그 후로 레미와 프랑크는 화해했지만, 그 글이 독자들에게 읽히는 일은 어느 지면에도 없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장례식 다음 날, 우리는 다소 넓은 카페에서 다시 모였다. 한 예술가가 죽으면, 그의 추종자들은 사명감만으로도 쉽게 모이는 법이다.
“그건 프랑크의 역량이 떨어지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어.” 레미가 말했다.
“사실 프랑크의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요. 하지만 맞는 말이에요. 옴니스를 읽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니까요. 우연히 발견한 다음에 읽는 것.” 쟝이 말했다.
그건 옴니스의 친구가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녀의 소설은 특유의 분위기만 극복하면 그 다음부터는 잘 읽히는 편이었지만, 그런 상황까지 도달하기도 어려웠다. 확실히 그녀의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사로잡지도,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독자의 입맛대로 예술적이지도 않았다. (그밖에도 있다. “표지가 너무 구려요.” “우리들 중엔 아무도 파워블로거가 없죠.” “원래 친구가 권하는 소설은 읽기 싫어지지 않나요?”)
그 결과, 지금까지 옴니스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한 사람은 수십 명 남짓 되는 옴니스의 친구들뿐이었다. 카르멜 출판사에서 1쇄 분량으로 찍은 천 권 중 제대로 팔린 것은 150여 권이었고, 그중 56권은 우리들의 서재에, 나머지 94권은 도서관, 헌책방, 혹은 생뚱맞게 만화 및 대중소설 대여점에 있거나, 아니면 사고로 소실되었을 것이다. (화재 2건, 태풍 1건이 있었고 그 사이에 옴니스의 책이 희생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또 몰라요, 옴니스를 ‘읽은’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을지?” 내가 말했다.
“그랬다면 진작 옴니스의 집을 ‘찾아’왔겠지.” 레미가 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레미의 말에는 억지가 있지 않을까? 아무리 옴니스의 책을 읽는 일이 특별하다고 해도, 아니 어느 독자가 책에 감명을 받았다고 작가의 집까지 찾아오겠는가? (애초에 주소는 어떻게 알고?) 하지만 그의 말은 거의 사실이었다.
만약 어떤 독자가, 정말로 한가하고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그래서 감히 작가의 집 현관을 두드릴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레미의 말도 일리가 있게 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옴니스의 친구들은 모두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결국 옴니스의 책이 취향에 맞기 위한 조건은 ‘시간만 무지 많은 참견쟁이’가 되는 거로군요.”
내 말에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긴 하지만, 그들도 한가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은 숨길 수 없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쟝이 말했다. “일단 해봤어요.”
“한 번 보지.” 레미가 답했다.
“부끄럽군요. 글 쓰는 덴 영 젬병이어서.”
쟝은 그녀의 두 소설, 「종이 감옥」과 「작가가 없는 세계」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있었다. 그녀를 본격적으로 독자들에게 소개할 프로젝트의 어려운 시작을 맡은 셈이었다. 레미는 종이를 들고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종이 감옥」
아파트에 살던 한 소설가가 죽은 뒤, 취재팀이 찾아온다. 그의 이웃들은 여태껏 아파트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고, 지루한 일상에 이야기할 거리가 생겨서 도리어 기뻐하는 편이었다. 몇 주가 흐르고, 이제 아무도 누가 죽었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을 즈음, 아파트 주민들은 한 사람씩 몰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아직도 비어있는 소설가의 집으로부터, ‘창작욕’ 같은 것이 파문을 그리듯이 퍼져나가고, 몇 달이 흐른 뒤 단지의 모든 사람들이 소설을 쓰게 된다. 어느새 단지에서는 소설 쓰는 모임이 형성되고, 그 아파트는 일종의 명물이 된다. 다시 찾아온 취재팀은 사람들의 소설들을 살펴보고, 그 내용들이 ‘무의식적인 이음새’에 의해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 순서로든 원고들을 엮으면 돌림노래처럼 겹쳐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소설가의 빈 집에 자신이 쓴 원고를 쌓아두기 시작한다. 대략 2년 동안 몇 백 권 분량의 원고가 쌓인다. 그러나 그 집은 누군가에게 팔리게 되고 사람들은 자신이 썼던 것을 모두 가져가야 되는 처지에 놓인다. 취재진 중 하나가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그곳에 원고를 놓자고 제안하나, 결국 성사되지 못한다.
레미가 읽는 것을 멈추었고, 우리는 모두 묘한 기분에 빠졌다.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되니 이상하네요.” 코니가 말했다.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하네. 이렇게라도 생략하지 않으면 이미 요약이 아니게 되지.” 노인 피에르가 말했다.
레미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정도면 뼈대로서는 나쁘지 않다고 봐. 이건 소개글일 따름이고, 줄거리 이상을 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까.”
“생략된 것 중에서 아쉬운 내용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코니가 물었다. 나는 쟝을 바라보았다. 왠지 누군가 대답한다면 그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답한 것은 쟝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민들이 쓴 소설의 내용 그 자체지. 옴니스는 죽은 소설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았어. 그의 삶도, 그의 소설도. 오히려 초점은 죽은 소설가가 아닌, 주민들이 쓴 소설에 맞춰져 있지.”
“옴니스는 이 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소설 속의 소설들도 써 놓았을 거예요. 몇 백 권을 전부 쓰지는 않았겠지만. 그런데 사실 소설들의 내용이 이어져 있는 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소설들의 배경이 모두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니까요.”
“중요한 건 그 소설들이 추리물에 가깝다는 것이지. 그것도 정확히 712권의 추리물. 무엇보다도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가 중시되는 장르 아닌가.”
“뭐 그거야 직접 읽어보면 알 일이고. 또 중요한 건 추리물의 성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순서로든’ 원고를 배열해도 그럴듯한 짜임새의 소설이 된다는 것이잖나. 712권을 일렬로 배열하는 방법은 712!(1부터 712까지의 자연수를 모두 곱한 숫자), 천문학적인 수치가 되지.” 레미가 말했다.
“제목과의 연관성도 고려해봐야 해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원고를 가져가버리고 나서 모두 예전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잖아요. 물론 소설을 쓰는 2년 동안에도, 무엇인가를 쓴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하게 살았겠지만. 그 712권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글이었어요. 아파트 한 단지가 통째로 담겨있는 소설 말이에요. 결말을 보면 몇 십 년 만에 문학 관계자들이 가까스로 원고들을 모으지만, 이미 상당 권수가 소실되어 버리죠. 생명력을 잃었다는 말이겠죠. 일종의 역사가 되어버려 박물관에 갇힌 유물들처럼 말이에요. 식물인간의 관점에서 몸을 감옥이라고 표현할 수 있듯, 이 제목도 마찬가지인 것 아닐까요?”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쟝이 말했다. “이미 712권이 완성되어가던 때부터 그 아파트는 ‘종이로 만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옴니스는 소설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어.”
“소설의 한계요? 저는 그 주민들이 소설의 한계를 넘었다고 생각했었는데요.”
그때 레미는 쟝이 쓴 다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작가가 없는 세계」의 소개글이었다.
「작가가 없는 세계」
세상은 문학이 필요 없어진 사회로 진화했다. 새롭고, 더욱 ‘현실에 가까운’ 예술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아무도 문학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한편 소설가 K는 자신이 죽으면 소설을 쓰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문학이 여전히 부흥하는 가상세계를 글로써 창조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수면처럼 현실의 잔상을 그대로 자신의 원고 위에 ‘빠뜨린’ 다음 그 세계를 수정하는 방법으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영원히 보존하려고 했다. (“역시 난해해지는 군.” 레미가 말했다.) 그러나 그 가상의 세계에서도 문학은 그 시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문학이 도태되는 이야기로 흘러가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첫 번째 목표를 포기하고, 결론을 내린다. 이 문학이 필요 없어진 현재의 세상에서도 소설을 쓰는 자기 자신이 존재하듯이,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소설을 쓸 것이라는 가정이 그 결론이었다. 그는 소설 속에 소설가인 자신의 아이를 낳은 셈이었고, 소설 속의 인물은 소설 속의 소설을 쓰고, 그곳에서 태어난 단 하나의 소설가가 또 소설을 쓰고…… 그렇게 그 세계가 전승된다.
모두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쟝이 옴니스의 소설을 최대한 해치지 않기 위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법한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해버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왠지 3차원의 인물을 2차원 위에 압착시켜버린 듯한 그런 이질감이 들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인물은 피에르였다.
“만약 K가 자신의 글을 ‘문학이 부흥하는 결말’로 작위적으로 수정해버렸다면 그 세계는 위태로워지지. 옳은 선택이었어.”
“하지만 그 주인공은 거의 미쳐버려서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 아닐까요?” 코니가 말했다.
“자신은 그게 논리적이라고 생각했겠지. 현실의 자신이 ‘마지막 소설가’라고 생각했단 것부터 오류였어. 사실 옴니스가 그런 부분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
그것은 쟝의 대답이었다. 그는 언제나 비판적인 사람이었고, 쟝의 그런 특성은, 둘이 서로 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레미가 쟝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줄거리만 들으면 거의 단편에 가까워요. 옴니스는 이 소설에서는 아예 소설 속의 소설 속의…… 소설까지 한꺼번에 집필했잖아요. 그래서 분량이 또 어마어마해진 거죠. 그리고 옴니스가 다룬 ‘일상’들은 전부 배제한 채 가장 비현실적인, 그러니까 소설다운 내용들만 남겨놓았잖아요. 누군가 보면 SF스럽다고 생각할 지도 몰라요.”
“나 역시 그런 일상적인 부분이 옴니스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네만,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쓰는 것이니 어쩔 수 없겠지.” 레미가 말했다.
“소설 속의 소설 부분을 얘기해보죠. 「작가가 없는 세계」란 제목처럼, K가 쓴 소설에서는 소설가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아요. 그저 메마른 문체로 도시의 삶들을 서술할 뿐이죠.”
“메마르면서도, 유려하지.” 레미가 끼어들었다.
“소설 속의 소설 속의 소설도,”
“잠깐, 옴니스가 ‘몇 번째’ 소설까지 작성했지?”
쟝은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하죠. 옴니스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실존하니까, ‘0’으로 하고, 「작가가 없는 세계」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는 ‘1’로 하죠.”
“소설 속의 소설은 ‘2’이고, 그 다음은 ‘3’인 거군. 그러면 ‘몇’까지 등장하지?”
코니가 열심히 「작가가 없는 세계」 양장본을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한 손가락 마디 크기의 포스트잇에 숫자들을 적었다. 쟝은 아까 중단된 말을 이었다.
“어쨌든 ‘3’세계도, 그 후의 세계들도 소설가는 등장하지 않았죠. 겉으로 보기엔 ‘2’에서 대가 끊긴 건데, 하지만 ‘3’에 등장하는 세계가 소설가를 한 명 쯤 품고 있으리란 희망에서 - ”
그순간 나는 어린왕자를 떠올렸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과연 소설가 한 명만으로 그 세계가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 - K는 일부러 자신의 소설(2)에서 소설가 캐릭터를 배제한 거죠. 그런데 소설가가 없으면 그 다음 소설(3)이 쓰일 수 없게 되잖아요.”
3 거울과 우물
9개월 전, 우리는 옴니스의 집에 모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옴니스의 얼굴엔 주름 하나 없었고, 방에는 항상 맑은 향기가 감돌았다. 옴니스의 집은 두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곳은 우리 같은 손님을 접대하는 살롱, 다른 곳은 그녀의 서재였다. 서재는 그녀가 글을 쓰는 곳이었는데, 그녀 자신 이외엔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 본 적 없었다.
그녀는 언뜻 보기엔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얼굴이었으며, 목소리는 굵고 차가우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자신감 같은 것을 띠고 있었는데, 마치 붉은 고급 천위에 놓인 은괴를 연상시켰다.
책상 위에는 각기 다른 색깔의 차(우리는 모두 취향이 달랐다)를 담고 있는 찻잔들과 「작가가 없는 세계」가 놓여 있었고, 우리는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소설가 없이 소설이 등장하는 거였죠.” 쟝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 많은 소설가들을 한꺼번에 등장시키기는 어려우니까, 내 나름대로 머리를 짠 셈이죠.” 옴니스가 말했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렸다.
K가 소설을 쓴다. 그의 펜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원고지를 향해 흘러내리는 풍경들은 모두 그가 사는 세계를 닮아있다.
펜 끝에는 외눈이 달려있다. 그 눈은 원고지를 향해 뛰어든다. 눈이 공기 중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대로 머무른 채 있으면, 그 눈은 어떤 ‘이상한 바람’의 작용을 받아 근처의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되며, 사람 속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지배당한 주인공이 된다. 그것은 어디에나 침입할 수 있다.
K의 외눈은 외딴 건물로 들어가는 남자를 뒤따라간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는다. 남자가 화장실을 나온 뒤에도 그 외눈은 화장실에 남아 있다. 그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소설 속에 거울이 등장하면, 그게 다음 소설로 넘어갔다는 징표로군요.” 코니가 말했다. “더 신기한 건, 그 사실을 잠시 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거예요.”
쟝이 설명했다. “그건 만들어진 세계가 원래의 세계보다 좁기 때문이지. 어떤 세상 안에서는 그 세상보다 커다란 거울을 만들 수 없다는 거지.”
쟝은 거실 구석에 놓인 텅 빈 새장을 바라보았다.
“새장의 바깥에선 새장을 비출 수 있지만 내부에선 그럴 수 없지, 안 그래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옴니스는 무표정했다. 쟝은 계속 설명했다.
“예를 들어, ‘패러디’같은 것은 그 원본이 있어야만 가능한 거잖아? 「작가가 없는 세계」에서 거울이 등장하고 나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세계가 좁아졌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이 세계가 그 전 세계의 반영임을 암시하는 여러 가지 장치에 의해서 말이야. 패러디는 그중 독특한 한 가지 사례고.”
나는 그 소설의 결말을 기억한다. 거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그 앞에 서서 뚫어지게 거울만을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점점 사소한 움직임조차 사라지며, 일종의 광석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소설 속의 소설을 만들게 되는 일을 계속하게 되면 세계가 좁아지다가 결국엔 한계에 이르지. 예컨데 사람 하나만이 설 수 있는 공간과 시간으로 말이야. 소설가 캐릭터는 마지막 세계에서 등장하게 되는데, 그때 쯤 되면 다음 세계가 좁아졌음을 설명하기 위해 아까 말한 방법을 굳이 쓸 필요도 없게 되지. 물리적으로 좁아진 것만 그려도 충분하니까. 딛고 설 땅이 좁아진다던가. 이때 주인공이 자신을 멈춰버리는 결말은 이를테면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소설가로서의 자의식과 그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맞나요?” 쟝은 옴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표정으로 빈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때의 그녀는 마치 자기 자신의 집에 초대받은 손님 중 하나로서 와 있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그녀가 소심하거나 유난히 내향적이어서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모든 공간들을 평등하게 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심한 평등함. 그것은 그녀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실패하는 사람들을 그릴 뿐이었고, 그녀 스스로가 실패를 겪지는 않았다. 그녀의 ‘외눈’은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과는 무관했다. 카메라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카메라에게 거울을 보여주었다. 카메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실패일까? 그것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녀의 표현 중 '어릴 적 숨을 빠뜨린 우물로 다시 찾아가는 듯한' 이라는 게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녀가 쓴 것 중 가장 이질적인 표현이었다. 그녀는 함부로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아니 아예 내면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 숨을 빠뜨린 우물로 다시 찾아가는 듯한.' 내가 아는 옴니스의 친구들 중 이 표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기억하더라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문장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에 쓰여서이기도 했고, 해일과도 같은 풍경의 서술에 묻힌 작은 은반지 같은 문장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4 미발표작
“67번째까지 있군요.” 코니가 말했다.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는 분명 거울이란 단어, 혹은 거울을 암시하는 단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집중력을 쏟아 부었을 것이다. 화석을 대하듯이. 나는 그런 그를 좋아했다.
레미는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은 「작가가 없는 세계」를 집어 들었다. 책이 더욱 무거워 보였다. 레미는 세 손가락만으로 책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들, 기억나나? 옴니스가 그때 했던 말. 다음 작품에 대해 했던 이야기 말이야.”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9개월 전의 기억이었다. 모두의 찻잔이 비워지고 나서, 옴니스가 말문을 열었다. 상당한 침묵이 흐른 뒤였다.
“요즘은 3번째 소설을 쓰고 있어요. 완성되면 출판은…… 힘들 것 같군요. 하지만 여러분에겐 보여드리겠어요.”
“제가 출판사에 어떻게 좀 해볼게요.” 레미가 말했다.
“아니에요. 잘 안 팔릴 거라던가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부담스러울 거예요. 그러니 이번 소설은 여러분만 보아주었으면 해요.”
나는 그녀의 목소리로부터 어떤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타올라 재가 된 것 같은 흔적이었다. 아마 그것은 그녀의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난 연소였고, 침착한 목소리였음에도, 그것은 본래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옴니스의 얼굴에 죽음이 겹겹이 쌓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 레미가 뭐라고 말했다.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옴니스가 죽기 전에 내게 이 열쇠를 맡겼지.”
레미는 기묘하게 생긴 쇳조각을 흔들었다. “옛날의 애인이 만들어주었데. 열쇠 제작자였다더군.”
“결혼했었나?”
“아니, 결혼하지는 않았고. 결혼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 사람이 사고로 죽는 바람에 헤어지게 되었지. 옴니스에게 직접 들은 얘기야.”
“그럼 그때 만든 열쇠를 지금까지 쓰고 있었다는 거네요.”
이때 쟝이 말했다. “서재 안이 궁금하군요. 세 번째 소설도 틀림없이 그 안에 있을 겁니다. 어서 열어봅시다.”
우리는 서재의 문 앞에 모였다. 레미는 열쇠가 쥐어진 오른손을 들고 잠시 서 있었다. 그 열쇠는 마치 면봉의 끝에 머리카락 뭉치들이 꼬여있는 것 같기도 했고, 불타는 나무가 무너지기 직전의 모습 같기도 했다. 실용성을 고려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열쇠는 자물쇠에 쉽게 들어갔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열쇠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끊어진 것이다. 소리로 봐선 산산조각난 것 같았다.
“뭐죠?” 코니가 물었다.
“내가 그런 것 아냐.” 레미가 답했다.
레미는 손가락을 모아, 자물쇠 구멍 밖으로 드러난 열쇠기둥의 끝부분을 잡아당기려 했다. 결코 쉬울 리 없었다. 게다가, 간신히 그 가느다란 기둥을 붙잡았을 때 기둥이 자물쇠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때 노인 피에르가 나섰다. 그는 자물쇠를 잡았다. 레미가 입을 벌렸다.
“그럴 리가 - ”
자물쇠를 비틀자 그것은 한 번 더 크게 “우두둑” 소리를 내며 돌아갔고 문은 단번에 열렸다. 피에르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고 우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열쇠는 관상용이었을까요? 그럼 왜 레미에게 열쇠를 맡긴 거죠?”
레미가 답했다. “글쎄. 그래도 방금 전의 ‘관례’가 있어서 더욱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아니면 사실은 의외로 첨단의 열쇠라서…….”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서재에 들어간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피에르가 문을 닫은 순간이었다.
“앗!”
피에르가 빠르게 손을 떼었다.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몇 초가 흐른 뒤 문손잡이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녹았군.” 피에르가 말했다.
“뭐가요?” 레미가 물었다.
“열쇠 말이야. 방금 넣은 열쇠가 녹아서 자물쇠 구멍을 채웠어. 갇힌 거지.”
은색 액체 한 방울이 구멍 밖으로 흘러나와 손잡이 밑 부분에 맺혀 있다가 굳어졌다. 더 이상 연기는 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잠잠해진 지 몇 분이 흐르고 나서, 쟝이 손잡이를 당겨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안 되는 군요."
“겁먹을 필욘 없어. 저런 낡은 문은 힘을 합치면 금방 무너질 거야. 음… 옴니스가 우리를 가두려고 한 이유도 아직 분명하지 않고 말이야. 아무 생각 없이 이러진 않았을 것 아닌가. 어, 중요한 건 소설을 찾는 거야. 일단 문은 신경 끄고, 여길 조사하도록 하지.”
레미는 그렇게 말한 뒤 서재 벽을 더듬었다. 그의 손이 스위치를 누르자, 방은 은은한 빛으로 가득 찼다. 책장이 도미노처럼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모두 빽빽이 책이 꽂혀 있었다.
“왠지 내 생각과는 다른데.” 쟝의 말이었다.
“뭐가요?” 코니가 물었다.
“아, 왠지 옴니스의 서재는 다른 작가들의 서재와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나는 한 책장으로 다가가 ‘위대한 개츠비’ 한 권을 꺼내어 들었다.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 익숙한 첫 문장이 옴니스의 필체로 적혀있었다.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한마디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휙휙 넘겨보았다. 모두 옴니스의 글씨였다. 그녀가 ‘위대한 개츠비’ 한 권을 통째로 다시 쓴 셈이었다.
“충분히 다른 것 같은데요.”
모두들 책 한 권씩을 펼쳐서 읽고 있었는데, 경악하는 눈치였다.
“이게 전부!” 코니가 외쳤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필사본은 점점 내가 알던 ‘위대한 개츠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원작의 내용이 퇴색하고, ‘옴니스’라는 인장이 페이지마다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같은 과정은 어떤 물건이 시간이 지나 낡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옴니스의 문장이 마치 부패와 침식과 탈선의 문장인 것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책들이 원래의 내용과 인물들을 버리고 제멋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새로운 ‘위대한 개츠비’를 계속 읽어보았는데, 책의 원래 등장인물들이 마지막으로 (우연히) 등장한 것은 책이 3분의 1가량 남았을 때였고, 나머지는 그들과 같은 도시에 사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엑스트라들의 이야기는 원래 있어야 할 이야기보다 잡다하고 시끄럽고 비현실적이었다. 다만 그 비현실은 ‘현실이 소설보다 비현실적일 때가 있다’는 말을 변호하는 비현실이어서, 그저 미친 사실들을 담담하게 반영했던 것이다. 무게 없이.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개츠비’와 ‘에스메랄다(옴니스가 바꾼 내용의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둘 다 ‘일어날 법한’ 일이라면, 작가가 다르거나 그 내용이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인, 또는 다른 학문적 의미의) 중요성이 다르더라도 옴니스 자신이 주장하는 소설이 성립할 수 있었다. 옴니스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았다.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책장에 꼽았을 때, 근처에 서로 다른 두께의 ‘위대한 개츠비’들이 3권 더 있었다. 확인해본 바, 모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또한 옴니스는 그 작가의 문체를 따라 해서 나머지 내용을 작성한 것 같았다. 그 결과는 완전히 임의대로였는데, 원작의 내용은 삭제되거나 무언가가 덧붙여지거나 아니면 잘게 토막이 나서 종이 이곳저곳에 흩뿌려졌다. 예컨대 보르헤스의 단편들 중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수록된 것들은 거의 하나하나가 중-장편 수준으로 두께가 불어나 있었는데, 피부가 부풀어 오른 익사체처럼 보르헤스가 희석되고 그 남은 넓은 자리에는 무의미한 글자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어떤 명민함도 찾을 수 없었고, 지루했다.
“여긴 모두 필사본뿐이로군… 웬만한 소설들은 모두 있는 것 같아.” 레미가 말했다.
“아쉽게도 모든 ‘새’ 소설들이 놀라움을 전해주는 건 아닌 것 같군요.”
쟝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책을 덮었다. 주간지만큼이나 얄팍한 ‘돈키호테’였다. 그는 ‘돈키호테’가 적어도 20권은 꽂혀져 있는 책장에 자신이 읽고 있던 ‘돈키호테’를 꽂아 넣었다.
“저쪽에 길이 더 있는데. 저쪽으로 가 보자고.” 레미가 말했다.
자세히 보니 이 방은 매우 길쭉한 모양이어서 방을 한 바퀴 돌려면 꽤 걸어야할 것 같았다. 옴니스의 서재가 이런 곳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일단 끝까지 가보자는 목표로 걸었는데, 처음에는 방의 가로로 책장이 대여섯 개 정도 놓여있었다. 그런데 갈수록 벽과 벽 사이가 좁아지더니, 책장 사이의 간격도 줄어들고, 결국엔 기껏해야 사람 두 명이 손을 잡고 지나갈 수 있는 수준으로 너비가 좁아졌다. 책장도 딱 한 줄 들어가고 나니 그마저도 안 되어, 우리는 기차놀이 하듯이 줄을 지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레미, 쟝, 피에르, 나, 코니 순이었다.
“책이 달라졌어요.” 코니가 말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책장에 꽂혀있는 것들이 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요리, 전화번호부, 동식물도감 등. 헌책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을 법한 표지들을 지니고, 전부 옴니스의 글씨들로 채워져 있었다. 다만 요리책은 그 전 페이지에 나온 요리들을 조금씩 응용한 요리들로 채워져 있었고, 전화번호부는 익명의 사람들과 번호들로 역시 불어나 있었다. 아마도 모두 없는 번호일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지만, 이런 실용서적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쓰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 같군요.”
쟝은 한 경제서적을 보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별로 전문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다이어트 요법’을 다룬 책에 자못 흥미가 생기긴 했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 우리는 계속 걸어갔다.
“그나저나 도무지 믿을 수 없군.” 피에르가 말했다.
“그러게요.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혼자서 쓸 수 있었다는 걸까요?” 레미가 말했다.
“옴니스가 무슨 특별한 로봇을 개발했거나, 평행우주에서 옴니스가 천 명 정도 넘어오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할 거야.”
“천 명이 들어오기엔 좀 좁아 보이는데.”
“책이 또 바뀌었군요.” 코니가 다시 말했다.
우리는 책장을 보았다. 그곳 역시 책들로 꽉꽉 매워져 있었는데, 책은 딱 두 가지였다. 「종이 감옥」과 「작가가 없는 세계」였다. 쟝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말로 ‘종이 감옥’이군. 어쩌면 ‘작가가 없는 세계’도 맞는 것 같고. 옴니스의 책만 잔뜩 쌓여있는데 옴니스가 없으니까.”
나는 한 권을 펼쳐서 읽어보았다. 물론 모든 내용이 원래의 소설과는 달라져 있었지만, 그것은 ‘옴니스 자신의 소설’이었기 때문에 아까 전에 비하면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원래 이야기의 중심이 없는 소설들이었고, 원래 이상한 소설이었다. (우리가 쟝이 쓴 줄거리 요약이 기묘하다고 여긴 것도 그것이 원래는 전무한 이야기의 중심을 끌어내서 쓴 요약문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동시에 어느 쪽도 옴니스의 소설이라고 확답할 수 없다는 말도 되었다. 생각해보니 오히려 이상한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고?
우리가 그곳에 아주 잠깐 서 있는 사이, 기껏해야 한 문장정도 읽을 시간에, 우리는 그 두꺼운 책 한권을 모두 읽어버린 것이었다. 코니가 쟝을 바라보았다.
“쟝, 이거 좀…”
“이상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계속 읽고 있었는데, 그 찰나에 벌써 한 책장에 있는 책들을 절반 정도 읽어버린 것 같았다. 레미가 쟝의 팔을 잡았다. 쟝이 의아하다는 듯이 레미를 쳐다보았다.
“슬슬 가지. 이럴 시간 없어.”
“시간은 충분하지 않나요?”
“아니… 오히려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
레미는 자신의 앞으로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쟝도 어쩔 수 없이 책을 제자리에 꽂고 레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피에르가 지긋이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실 그보단 저 앞에는 또 무슨 책이 있을지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젠가 우리는 쟝을 보고 ‘무너진 책에 깔려죽기 딱 좋은 인간’이라고 한 적 있었는데, 그 말에 따르면 이곳은 그의 무덤이 되기 이상적인 곳이었고, 그것이 이따금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걸어갔다. 복도는 넓어지지도 좁아지지도 않은 채 영원히 이어져있을 것만 같았다. 그 당시에 모두가 ‘차라리 지금 돌아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겠지만, 아무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단지 친했던 작가의 서재에 들러 그녀의 마지막 작품을 찾는, 지극히 단순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똑같이 생긴 희뿌연 조명들이 그곳을 밝히고 있었다. 어둠보다 독한 빛이었다. 아마 그 끝에는 옴니스의 세 번째 책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지나온 곳에는 글을 쓸 만한 책상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곳에 그녀의 책상도 있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루했다. 그러나 이미 나의 머리가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지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듯이, 우리는 점점 매혹되며, 서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5 쪽잠
책들은 점점 두꺼워졌다. 어느 시점이 되자 책 하나가 책장의 한 칸을 전부 차지할 정도가 되었으며 그때부터는 쟝도 책을 꺼내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점점 더 두꺼워지는 책을 수용하기 위해 책장도 옆으로 계속 넓어졌다. 이렇다보니 표지 또한 넓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그곳에까지 글자들이 침투해 있었다.
“마치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는 것 같군.” 피에르가 말했다.
“이 정도로 큰 서재라도 그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레미가 답했다.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모든 생물 및 사물들의 수에, 그것들이 의미를 지닌 채 존재하는 시간을 곱해서 나온 값에, 시점 상 중복되는 이야기들을 최대한 뺀 것이 이 행성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의 ‘최솟값’일 텐데, 그런 걸 담으려고 계획했다가는 지구가 종이들로 폭발해버릴 겁니다.” (레미는 가끔 이런 쓸데없는 수식을 만드느라 귀한 시간을 낭비했다.)
“종이가 모자랄 텐데 무슨 수로 지구를 폭발시키나?”
“희고 반질반질한 것만이 종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SF와 판타지 같은 장르까지 포함시키면 이야기의 분량은 더더욱 어마어마하게 늘어나죠.”
“하지만 그것들 중에 작가의 손에 의해 글로 쓰일 만한 가치를 지닌 게 얼마나 되겠나?”
“옴니스가 지금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는 약간의 원망이 섞여있었는데, 마치 옴니스가 아직까지 살아서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어둠속에서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시야로 들어오는 수없이 많은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든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마치 옴니스가 어둠으로 변하고, 그 어둠(자기 자신)속에서 책들을 끝없이 낳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소설 쓰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입력된 단어들로 의미 있는 문장들을 만들어내고 모든 가능한 사건들을 조합하고 적절하게 배열한다면 이와 같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우리가 단체로 짧은 잠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 내부의 무의식이라면 이런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평범한 인간의 유전자도 분석한 결과 상당한 정보를 지녔듯이, 이 세상을 반영한 우리 무의식의 유전자라면 이 정도 분량의 책 정도는 우습게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책들이… 점점 얇아지고 있군요.” 쟝이 말했다.
눈에 그다지 뜨이진 않았지만 방금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얇아져 있었다. 조금 더 걷자 책들이 거의 처음의 두께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책장의 경우는 달랐다. 여전히 책 한 권이 책장 한 칸을 차지했고, 그 두께에 맞춰 책장의 너비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쟝은 지나가는 책장마다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그리고 꽉 낄 정도로 좁아진 시점에서, 그 장소의 「종이 감옥」표지에 펜으로 표시를 해놓았다. 길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헨젤과 그레텔'처럼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딱히 의미가 있는 행동이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단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쟝이 가끔 그런 짓을 하면 덜 따분할 것 같았다.
“융통성 없는 책장이군. 어디까지 ‘얇아’지려고 하는지.” 피에르의 말이었다.
“책장보다 책의 중요성이 높아졌다는 상징이 아닐까요? 보통은 책장에 맞춰 책을 넣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그 반대니까요. 융통성 없는 쪽은 책이죠.” 쟝이 답했다.
“책이 얇아진다고 해서 굳이 책장까지 좁아질 필요는 없지 않나.”
그동안 책은 더욱 얇아져서 소책자에 이르게 되었고, 손톱 끝이 겨우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이젠 저것들을 꺼내려면 갈고리 같은 게 있어야겠군.”
결국 책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책장은 두 개의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육안으로는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 내부의 간격(1)’과 ‘책장과 책장 사이의 간격(2)’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책장들은 수많은, 똑같이 생긴 나무판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책장과 책장 사이의 간격(2)’은 그대로였던 반면,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 내부의 간격(1)’은 극도로 좁아지다가 두 나무판이 서로를 삼켜버려 그 (1)의 값이 마이너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만일 쟝이 그곳에 손이라도 집어넣으려고 했다간 곧바로 그곳이 블랙홀처럼 그의 손을 빨아들여서 뼈조차 남기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다.
“이젠 차라리 책장과 책장 사이(2)에 책을 꽂는 게 낫겠군.” 레미가 말했다.
곧이어 나무판들마저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1)의 마이너스 값이 두 나무판의 두께마저 넘게 되어, 즉, 서로의 끝부분까지 완전히 먹어치운 것이다.
책장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바람에, 우리의 옆에 더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지만 우리는 그곳에 투명한 벽장이 있는 것처럼 여전히 반대쪽 벽에 붙어서 걸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청각이 좋은 코니는 그 소리에 특히 민감했다. (가끔 ‘석유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말은 허풍으로 받아들인다 쳐도)
“저거 들려요? 윙- 하는 소리 말이에요. 너무 소름끼치는데요.”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있는 것 같아.” 쟝이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티슈 한 장을 꺼내 그 공간으로 던졌다. 그것이 바닥에 유난히 느리게 떨어지고 나서, 우리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그 티슈를 관찰했다. 바닥에 떨어진 뒤에도 티슈는 조금씩 진동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다시 몇 미터를 걸은 뒤 티슈를 던지는 것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코니가 말했다. “이제 소리가 덜 들려요.” “안 들릴 때까지 이야기 해.”
그 공간에 들어가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나서, 쟝은 그 자리를 하얀 수정테이프로 표시했다.
“여기서부터 ‘2차선’이야.”
나는 수정테이프로 표시된 경계 너머로 살짝 손을 대어 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아보았다. 그러자 어떤 예리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물었다.
“이거 정말 뭐가 있는 게 맞아요?”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혹시라도 모르니까 안전을 기하는 게 최선이지. 코니의 귀도 믿을 법 하니까.”
“애초에 옴니스가 이런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요.”
레미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나도 옴니스가 어째서 우릴 이렇게 고생하게 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현실이 아니야. 옴니스의 집은 이렇게 크지 않다고. 지하라고 해도 이렇게 기다란 공간이 땅 속에 마련되어 있다고 보기 힘들어. 아니, 그것보다도 저놈의 책이랑 책장부터가, 실제로 옴니스가 글을 썼느냐를 떠나서, 만들기가 불가능한 것 아닌가. 간격이 서로 ‘마이너스’가 되는 책장이라니.”
나는 손가락 상처 부위를 꾹 눌러보았다. 피 한 방울이 배어나왔다. 방금 전 무심결에 거의 종잇장처럼 얇아진 나무판에 손을 대어보았을 때, 그것이 날이 잘 든 칼처럼 피부를 슥 베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일종의 최면이라고 생각하네. 걸릴 조건은 처음에 있었던 그 이상한 모양의 열쇠. 걸린 것은 자물쇠로 들어간 열쇠가 부러졌을 때부터이지.”
“그럼 깨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코니가 물었다.
레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글쎄… 당연한 것 아닌가. 일단 끝까지 가보는 수밖엔 없겠군.”
우리는 앞을 바라보았다. 길이 넓어져서 그나마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책장이 사라진 뒤에 벽을 유심히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그것은 석회질이었고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었다. 그것과 관련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그 벽이 공기에 오래 노출되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마 쟝이 책에 표시를 해놓은 이유와 거의 같을 것이다. 으레 그런 법이지.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그 지식을 받아들인 거야. 음, 벽에 수분이 많군, 하고.
문득 옴니스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가령 시는 원래 길이가 짧으니까 어떤 글자든지 쓸모가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쓰여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어떤 예술이든 그 요소 - 예컨대 미술에서의 터치, 음악에서의 음표, 춤에서의 동작 등이 ‘제대로’ 쓰여야 하는 것이다. 그건 어떤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이 너무 완벽한 구성으로 되어있어서, 그 작은 부분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일 것이다. 소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것이 꼭 좋은 소설의 조건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대체로 좋은 소설들은 그런 특징을 지닐 확률이 높았다.
옴니스의 소설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느 문장도 다른 문장으로 쓰일 수 있고, 어느 인물과 풍경도 다른 풍경으로 대체될 수 있다. 옴니스의 책을 읽었음에도 ‘옴니스의 친구’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삶의 깊이’가 없다고 했었다. 나는 떠올렸다. 어렸을 때 읽었던 소설 속의 인물들을 흠모하던 나 자신을. 그들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다른 인물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영생을 누렸든, 몰락과 함께 작품 속에서 스스로를 지워버렸든, 모두 소설의 인물로서는 성공한 인물들이었다. 일상적인 것들을 주로 다루고 인물들이 비범함과는 거리가 먼 소설을 쓰는 소설가들도 적지 않았지만, 나는 격렬한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자신의 삶에 불을 던져 넣어 종이로 만든 몸을 활활 태우거나, 햇빛처럼 빛나는 얼음을 꽂아 넣어 모든 것을 얼린 뒤에 그 해부된 조각들을 혈관 하나하나까지 관찰하는 이야기들만이 나의 갈증을 채울 수 있었다. 혹은 둘 다 충족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삶의 깊이’라. 전자는 바닥을 태워서 만든 깊이일 것이고, 후자는 바닥이 스스로 얼어붙어 제 안에 동굴을 만들어서 생기는 깊이일 것이다. 불과 얼음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완전한’ 글을 썼다. 어째서 내가 옴니스의 소설을 읽게 되었는지, 좋아하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분명 처음엔 얼마 안 읽다가 덮어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한참 뒤에 같은 장소에서 아직까지도 팔리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있던 「종이 감옥」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간 읽다가 덮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 충동적으로 그 책을 샀는데, 계산하면서도 ‘돈이 아깝지 않나’ 생각했던 게 기억났다. 어떤 진실도 담겨 있지 않은 삶들.
내가 그녀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여태껏 작가(와 인물들) 각자의 절절한 진실들이 담긴 소설들을 읽어왔음에도 나의 삶에서 일말의 진실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부터였다. 그녀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혹은 발견하고서도 모른 척 했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비판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토록 팔리지 않는 것도.
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레미가 외쳤다.
“문이다!”
마침내 끝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 문은 황금색이었다. 황금 같았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황해서 눈물을 흩어버리려고 눈 주변의 근육을 움찔거렸는데, 땅이 질퍽한 게 느껴졌다. 그것은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쟝이 말했다.
“이 젖은 땅은 눈물을 상징하겠군요.”
그 땅을 모조리 젖게 만든 건 또 누구의 눈물이었을까. 쟝은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살짝 화가 나있는 것도 같았고, 매우 안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살짝 비틀거린 채 있는 쟝은 그 자체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사실 그는 몹시 지쳐보였다. 모두가 이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땅은 더더욱 물기가 많아지고 있었다. 레미가 말했다.
“여기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군. 넘칠 것 같으니 말이야. 그러니 어서 문을 열어보도록 하지.”
레미는 황금으로 된 문을 밀었다. 안은 어둠이었다. 차례대로 들어갔다. 내가 마지막이었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이미 그곳은 호수가 되어 있었다. 물이 나를 삼켜 버릴까봐,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닫았다.
방 안은 매우 넓었고 어두웠고 길을 알려주는 어떤 표시도 없었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둠속에 빛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빛이 우리의 생각을 몰아내고 머릿속의 자리를 차지한 것 같았다.
빛의 가운데에는 책이 있었다. 빛은 그 책에서 나오고 있었다. 책은 한 눈에 봐도 거대했다. 우리들 중 하나가 그 위에 누워도 될 정도였다.
표지엔 「종이 감옥 + 작가가 없는 세상 =」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자 하나가 나의 펼친 손바닥만 했다. 압도하고 있었다. 빛이 머릿속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므로, 우리는 힘겹게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저 ‘수식’의 답은… 책 안에 있겠군.” 피에르의 목소리였다.
“제 생각엔 옴니스의 자의식이 이곳에서 드디어 드러난 것 같은데요.” 쟝의 목소리였다. “이때까진 거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연출로 보여주고 싶어 할 줄은 몰랐네.” 레미의 목소리였다. 강렬한 빛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래가지고서…(숨이 가빠서 말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책을 펼쳐본다 해도, 빛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나는 외쳤다.
“일단 펼쳐봐!” 레미의 목소리였다.
아직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은, 코니로 추정되는 형체가 (두꺼워 보이는) 커버를 잡았고, 내가 합류해서 간신히 커버를 넘겼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커버가 반대편 땅에 부딪혔다. 빛이 더욱 강렬하게 쏟아져 나왔다. 쟝이 최대한 침착한 말투를 유지하려 애쓰며 외쳤다. “너무 밝군!”
6 꿈
죽은 옴니스가 우리에게 최면을 걸었었다는 건 우리 모두 인정하는 바였고, 우리가 지나온 길들은 결국 그녀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빛에 대해서는, 그녀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에서 이루어낸 일종의 ‘극복’이라고 생각했다. 교향곡을 들을 때 흔히 마지막 악장에서 음을 고양시켜 카타르시스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과 같았다.
코니는 여전히 정신이 없어서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 같았고, 피에르와 레미는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피에르는 그 빛을 ‘인생의 최후에서 얻은 삶의 긍정’이라고 보았고 레미는, 좀 더 어렵게 접근한 것 같았는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의 빛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적어도 옴니스가 그것(진실)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쟝은 우리의 생각을 듣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그는 그 빛이 독자의 눈을 가릴 정도로 너무나 밝아서 정작 독자에게 그 빛을 전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코니를 깨우고(어떻게 깨웠는지는 모르겠다) 쟝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레미는 그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자 화를 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우리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하나는 우리의 몸이 한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빛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우리의 생각이 섞여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 빛이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한 것 같다고, 쟝이 추정했다. 하지만 이제 빛이 멀어져서, 각자의 생각들도 점점 희미해졌기 때문에 쟝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방금 전 서로의 생각을 읽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혼란의 빛 속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착각. 흥분으로 이루어진.
깨어나 보니, 나는 무엇엔가 강력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눈을 간신히 뜨자, 토막 난 팔 하나가 보였다. 지금 팔을 움직일 수 없는 걸 보면 그것이 나의 팔인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릴 수도, 몸의 다른 부위를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몸은 나의 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눈을 굴렸다.
내가 들러붙어 있는 곳은 아스팔트 도로 위였고, 저 위에 태양이 보였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았다.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는 방금 전까지 저 태양에 가까이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이 땅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몸이 으스러졌고, 죽은 것 같지는 않지만 움직일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보였다. 도시인 것 같았다. 문득 이곳이 옴니스의 소설 속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걸어왔다. 그는 레미였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한 레미였다.
“자네는 이제 깨어났나 보군.”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어떻게 레미가 저렇게 멀쩡히 걸어 다니는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모습과 목소리를 하고 있는데도 내가 그를 알아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레미는 그런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일단 길을 지나는 사람들 중 아무나 바라보게. 웬만하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말이야.”
아직 아무 의문도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았지만, 나는 긴 회색 코트를 입은 한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그 사람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상상해보게. 궁금한 게 많겠지만, 일단 해보게”
이렇게 바닥에 짜부라져 있는 것이 갑갑했으므로 군생각 없이 따랐다.
그는 뭘 하고 있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이젠 그가 나니까, 그를 나라고 생각해야겠군. 그래, 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지? 옛 친구를 기다리고 있지. 그는 내 동창이야. 그는 잠시 후에 버스를 타고 이곳에 도착하겠군. 그런데 조금 늦는데. 뭐 지각이 습관인 친구이니 말이야. 그러면 잠깐 편의점에 들러 담배라도 살까?
그때 그가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편의점 방향이었다. 그게 우연인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그는 내가 있는 쪽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치 문워크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나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잘됐군.” 레미가 말했다.
그러고선 그 남자는 나에게 ‘빨려 들어와’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눈이 나의 눈이 되었다. 그 다음 순간, 나는 일어나 있었다. 나는 회색 코트를 입고… 그렇다. 나는 그로 변한 것이다. 그러면 원래의 그는 어디로 갔는가?
그때 나와 눈높이가 같아진 레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눈치 챘지만, 놀랍게도 그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치엔 완전히 으스러져 있는 누군가의 몸뚱이가 있었다. 그건 나였다. 내 얼굴은 여전히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옛날에 본 공포소설을 떠올렸다. 늙거나 병들 때마다 자신의 몸과 건강한 다른 사람의 몸을 바꾸면서 살아가는 마녀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내가 그 마녀였다. 그 남자는 갇힌 것이다.
“걱정 말게. 어차피 저 자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가. 그것도 엑스트라지. 신경 쓸 필요는 없네. 무엇보다 자네를 이곳에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면 당신은 처음에 어떻게 일어난 거죠?”
“처음에 스스로 일어난 것은 쟝이었어. 역시 똑똑한 친구지… 그리고 그가 나와 피에르를 도와주었지. 이제 자네도 일으켰으니 코니를 찾는 일만 남았군. 그전에…”
레미는 아직까지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져 있는 나의 몸을 가리켰다.
“…저것을 처리해야지.”
그때 멀리서 또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쟝과 피에르였는데, 쟝은 조금 더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예전의 쟝과 비슷한 인상이었고, 피에르는 어린 아이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비닐 천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쟝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큼지막한 금속 집게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집게로 ‘시체 조각’을 집어 넓게 펼친 천에 올려놓은 뒤 감싸서 꼼꼼히 묶었다. 나의 시체를 들고 우리는 걸어갔다.
“나는 아침에 깨어났지. 지금은 오후 3시고.” 쟝이 말했다.
“서로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 거죠?” 내가 물었다.
“글쎄, 아무래도 본질은 변하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저 둘을 봐.”
쟝은 피에르와 레미를 가리켰다. 둘 다 썩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몸이 불편한 건 여전해.” 피에르가 말했다. “몸은 분명 아이인데 기분은 여전히 늙은 몸 그대로야. 그런데 자네는 분명 성적인 것을 기대했겠지?”
레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이 몸을 얻은 뒤에 따로 시간을 내서 좀 ‘만져’봤죠. 하지만 남자일 때랑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실망했지 뭡니까. 아무래도 여자였던 적이 없다 보니 여자의 몸이 자신의 몸이라고 상상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주름이 많아져 있었다. 그 사실이 특별한 감회로 다가오진 않았다. 진짜 몸이 아니니까?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나는 말했다.
“제 생각엔 그냥 옴니스의 배려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이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아마 가상의 이름표 같은 걸 통해 ‘손님’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했겠죠. 본질이요? 글쎄요, 관성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이때까지 그렇게 느껴왔으니까,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도 하군… 자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거랑은 별개인 것 같군. 아마 옴니스가 우리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놓은 것 같네.”
나는 피에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버지와 아들 같았다. 쟝과 레미는 부부라고 별로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 어울렸다. 그런 놀이는 사실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들은 손을 잡고 걸었다. 그편이 더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원래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이들밖에 없었고, 이들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어째서 이곳의 사람들이 우리가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도, 시체를 들고 가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우리는 없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우리의 입장에선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그들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 반대였을지도 몰랐다. 옴니스가 우리의 꿈속에 심어놓은 그녀의 도시는 매력적이었지만, 사실은 빨리 현실로 돌아오고 싶었다.
시체를 땅에 묻고, 코니를 찾아 그에게 일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할머니를 택했다. 왜 그렇게 선택하였는지 묻자, 그는 우물쭈물하며 “그래도 젊은 사람의 몸을 빼앗는 것보단 덜 미안해질 것 같아서” 라고 답했다. 그가 늙어본 적 없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할머니치곤 매우 씩씩한 걸음걸이였다. 반면 피에르는 자신이 아이였을 때의 움직임을 조금씩 기억해내는 것 같았다. 늙고 지혜로운 피에르가 그 순간에는 잡자기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이로 느껴져서, 그 손을 더욱 굳게 잡았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면 되죠?” 코니가 말했다.
“일단 도시를 둘러보도록 하지.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도 흐르는 법이니까, 어떻게든지 우리는 결말에 도달할 것이네.” 레미가 답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성별도, 나이대도 거꾸로 변한 그들의 대화가 매우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물었다.
“그럼 이곳이 그 ‘세 번째 소설’ 안이라고 확신하시는 거죠?”
레미는 저물어가는 태양을 가리켰다.
“우리가 그 거대한 책에서 보았던 빛이 정말로 저 태양의 빛이었다면, 저게 완전히 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글쎄요. 어두워지겠죠. 상징적인 어둠이든 실제 어둠이든.”
레미는 푸흐흐, 하고 웃었다. 그리고 쟝에게 말했다.
“자네가 갈 길을 정하게. 아무래도 우리들 중엔 자네가 가장 어디로 가야할 지 잘 알 것 같으니 말이야.”
쟝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도시 밖으로 나가보고 싶군요. 이 소설의 배경이 어디까지일지 궁금하거든요.”
이때 나는 레미가 비로소 쟝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것이 진짜로 레미가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것인지, 아니면 이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로 (이야기의 진행을 위한) 인위적인 조작을 받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옴니스는 소설을 쓸 때 무엇보다도 개연성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이 세계에 어디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레미가 쟝을 인정했다’는 결과가 충분히 가능성을 지녔다면 그대로 그 일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다른 독자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레미의 인정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건들이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전개로 자연스럽게 흘렀지만, 가끔씩 나는 ‘정말로 이럴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말로 그럴 수밖에 없을까? 하지만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인물이 되는 꿈을 꾸는 우리는 소설의 안에 있는 걸까, 아니면 밖에 있는 걸까?
우리는 쟝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이 점점 줄어들었고, 높이 또한 대체적으로 낮아지고 있었다. 그 빈자리는 제멋대로 자라난 식물들이 채웠다. 다른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나는 가다가 길거리에 난 풀을 하나 뜯어서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그 순간 머릿속에 그 식물의 이름과 특징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런 것들을 누군가 나의 머릿속에 서술하고 묘사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는 우리가 도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쟝은 무안해하며 다시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곧 다시 우리의 방향은 도시로 향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공간이 비틀려 있는 것 같군. 이래서야 나가는 것은 무리겠는데요.” 쟝이 말했다. “아마 옴니스는 우리가 나가기를 바라진 않았나보군요.”
“그럼 돌아가야겠네. 도시의 중간으로 가야 하나?” 레미가 말했다.
“아무래도 소설을 쓰는 사람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새웠을 테니까.”
“어떻게 찾죠?” 코니가 물었다.
“글쎄. 소설이니까 찾다보면 나오지 않을까.” 쟝이 답했다.
그때 우리는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도로를 발견했다. 마침 자동차 하나가 도시의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로의 끝은 화산재처럼 짙은 안개로 싸여있었는데, 자동차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그것의 모든 소리도 삼켜져버렸다. 나는 그것이 다시는 이 도시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배수구 같았다.
우리가 도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던 도중에, 나는 모종의 변화가 생긴 것을 느꼈는데, 그건 우리가 조금 더 ‘현재 모습’에 맞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쟝은 처음부터 이 몸이 어색하지 않았으므로 별로 해당하는 바가 없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확실히 그랬다. 코니는 점점 걸음이 느려지고 푸념이 늘어났으며, 피에르는 (발이 아프다고 칭얼거려서 지금은 내가 업고 있다) 나를 올려다보는 동글동글한 두 눈하며 표정이, 아예 자신이 노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레미는 이따금 쟝을 ‘응시’했는데, 그것은 쟝마저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때의 레미는 확실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피에르처럼 예전에 그런 몸이었던 경우와는 달리, 코니와 레미는, ‘몸의 기억’을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이 가상 세계의, 가상으로 만들어진 몸으로 그렇게 섬세하게 느끼는 게 가능할 것이라 생각진 않아.” 쟝이 말했다.) 이제껏 그런 몸에 대해 ‘상대방으로서’ 경험해온 이미지를 지금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것에 가까웠다.
“완전히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일이지. 여장 남자 같은 사람들도 겉으로 보기엔 보통 여자들보다도 여성스럽게 행동할 수 있잖아.”
“그럼 내가 여장남자란 말이야?” 레미가 발끈했다.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죠.”
레미와 쟝은 그런 식으로 투닥거리며 걸었다.
우리는 도시로 들어섰다.
밤이 되었음에도 거리는 사람으로 넘쳐흘렀고, 빛들은 거리를 낮처럼 밝게 비추려는 작정인 듯 사람들의 머리 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나란히 서 있는 가로등과 가로등의 빛끼리 서로 밀어내었고, 그 밑을 지나는 우리들의 그림자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그림자들의 길이가 달랐으므로 시침과 분침, 초침으로도 보일 법했다. 잠시 후 그것들이 길이를 교환하며 서로를 바꾸었다. 또 다른 그림자들이 자라나고 줄어들고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달은 없었지만 (원래 없었던 건지, 그날이 하필 그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대신에 도시의 사람들이 밝혀놓은 빛들이 있어서 하늘은 외롭지 않아보였다. 별들도 모두 물러난 하늘이었다. 수십 개의 빛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빼앗고 돌려주고, 그 자체로 뒤섞이고 쏟아지고 솟아오르고 안개처럼 밀도를 지닌 채 퍼지고 있었다. 분탕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태양이 없는 시간을 맞고 있었다. 태양을 그리워하는 의식일까? 그러나 빛들은 자신들이 태양이 되겠다는 듯 한껏 뒤엉킨 채 부풀어 올라 바벨탑 같은 것을 쌓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그림자를 저곳에 맡겨버린 듯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낮고 좁은 세계였다. 그녀가 그린 공간은. 하지만 그 모든 광경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름다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따뜻했다. 어째서 그렇게 느낀 건지는 모른다. 그 거리를 계속 걷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 걷고 싶지는 않았다.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세계에.
피에르가 졸라서 길거리 음식(무슨 고기가 들어간 빵이었다)을 사주고 있었는데, 레미가 뭔가를 가리켰다.
그것은 표지판이었다. ‘…의 길’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라고 적힌 부분은 지워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게 우리를 위한 길일까?” 레미가 말했다.
“찾는 수고는 덜었군요.”
쟝은 별 의심 없이 그 표지판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표지판이 가리킨 곳은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길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들은 그 텅 빈 거리를 인식조차 못하거나 혹은 암묵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발적이든 타의적이든 그들의 피하는 행동이 그 거리를 오히려 두드러지게 보이게 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지금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기 때문에 그 거리가 우리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
쟝이 가장 먼저 그 길에 들어섰고, 레미가 그 뒤를 따랐다. 코니는 힘겨운 종종걸음으로 따라갔고, 나는 아직까지 저쪽 길 건너편에 정신이 팔린 피에르를 챙기며 그 길로 들어섰다. 피에르는 아쉬워하고 있었고, 내가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저쪽으로 달려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거의 아이가 된 것이다. 나는 그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길은 어두웠다. 건물들이 들쑥날쑥한 높이로 서있었고 교묘하게 이 길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것은 과연 의도적인 장치일까? 우리는 다시 옴니스의 서재로 돌아와서 그 복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저 보이지 않는, 건물들 너머로 사람들의 소리, 사람들이 만들어 낸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들어왔다. 그 소리는 더욱 외롭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지만, 우리를 더욱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은 얼마 걷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 사이의 침묵은 무엇보다도 길었다.
“저기 문이 있군.” 쟝이 말했다.
우리는 멈춰 서서 그 문을 보았다.
그때 나는 옛날에 읽었던 글을 떠올렸다. 눈 속에 갇혔을 때, 몸이 눈 속에 박혀 움직이기 힘들고 머리가 어지럽고 균형감각을 잃었을 때, 중력이 어느 곳으로 작용하는지 알기 위해선 눈가루 같은 것을 떨어뜨려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글의 요지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같은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 후에 내가 ‘나의 생각’을 위해 기억을 왜곡시켰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글을 읽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여기에 정육면체 모양의 방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갇혀있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중력이 바뀌므로 어느 곳이 벽이고 어느 곳이 천장, 혹은 바닥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벽이라고 바라봤던 부분은 잠시 후에 발자국이 찍히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벽을 정해야 할까? 가장 적절하다고 여겼을 때, 그 상태에서의 중력에서 한 쪽 벽면에 문을 그린다. 그러면 나중에 내가 불가피하게 그 문을 밟아야 할 일이 생겨도 그것은 계속 문이다.
우리가 본 문이 바로 그런 문 같았다. 그 문은 따로 건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양쪽 옆에 생겨난 담장이 이 길의 끝에 와서 서로 만나면서, 그 가운데에 달려 있었다. 비록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려준 문이었지만 문이 거기에 있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세상에서 중력을 정하는 건 내가 아니었으므로.
쟝은 모든 일행이 문 바로 앞에 도달할 때까지 잠시 멈춰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모이자, 그는 문을 열었다.
낯익은 복도가 펼쳐졌다. 우리가 옴니스의 서재를 지나오며 거쳤던 그 복도였다. 그 뒤로는 예상할 수 있는 길이었다. 우리가 걸어온 순서를 거꾸로 되짚어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지나자 쟝이 수정테이프로 표시해놓은 바닥이 보였다. 나는 다시 그곳에 손을 대어 보았다.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느낌. 곧이어 그 옆의 허공에서 서서히 책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코니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여전히 소리를 잘 들었다. 오히려 그는 할머니다운 신경을 부리며 귀를 막았다.) 어느 부분에서 멈춰 서서, 쟝은 아까 자신이 표시한 책을 찾아내었다. 그도 자신이 남겨놓은 표시들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때 레미가 말했다.
“뭐가 떨어져 있는데.”
그가 발견한 것은 검고 작은 조각들이었다. 그가 집어 들자, 다른 조각들이 차례로 붙어서 가락처럼 딸려 올라왔다.
“어릴 적 숨을 빠뜨린 우물로 다시 찾아가는 듯한…”
거기까지 읽었을 때, 갑자기 그 조각들이 부서져서 떨어져 내렸다. 레미의 손엔 ‘어릴’이란 한 글자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쟝이 옆에 있는 책들 중 하나를 꺼내어 펼쳐보았다. 그러자 미처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있던 마지막 문장도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페이지를 휙휙 넘겼는데, 모두 빈 종이였다. 바닥을 보니 까맸다. 어째서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레미가 말했다. 쟝은 책을 덮었다. 코니는 신발에 묻은 글자들을 털어내었다. 피에르가 “벌레다!” 하고 소리쳤다. 나는 피에르를 등에 업었다.
우리는 곧이어 커다란 방에 도착했다. 옴니스가 새로 쓴 세계문학들이 꽂혀있는 방이었다. 홍수를 이룰 것처럼 발목까지 올라온 글자들을 헤치며, 우리는 우리가 처음에 갇혔던 그 문에 다다랐다. 레미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돌리자, 문이 열렸다. 레미가 말했다.
“들어갈까?”
“들어가야죠.” 쟝이 답했다.
7 작아지는 방
우리가 그 방에 들어가서 처음 본 것은 커다란 나무였다. 그 나무의 꼭대기까지 시선을 보냈을 때, 우리는 방의 천장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무에는 붉은 열매가 달려있었다. 쟝이 무심코 어깨 높이에 있던 하나를 따서 껍질을 벗겼다. 노란 과육이 보였다. 그는 냄새를 맡아보더니 덥석 물었는데, 다음 순간 “아!” 소리를 내며 황급히 입을 떼었다. 그는 손가락을 입에 대어 보았는데, 피가 나지 않는 것을 보고 안심하는 것 같았다.
나도 열매 하나를 떼어 안을 조사해 보았다. 그 안에 뭔가 날카로운 게 있었다. 조심스럽게 과육을 떨어내고 그것을 꺼내보았는데, 그것은 레미가 옴니스한테 받은 열쇠와 매우 닮아있었다. 사실 그건 예전에 옴니스의 방에 있던 나무와 같은 종류였는데, 지금은 훨씬 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의 모든 것이 커져 있었다. 양탄자. 조각상. 벽장.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앉아있는 거대한 의자를 보았다. 내가 물었다. “누구시죠?”
곧이어 의자 밑으로 보이는 두 발이 바닥을 짚어 의자를 돌렸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옴니스였다. 마찬가지로 거대해진 그녀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옴니스, 당신이 맞나요?”
“물론이죠.” 옴니스가 답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대해졌나요?”
그 말을 듣고, 옴니스는 웃었다. “거대해지긴요, 여러분이 작아진 거죠.”
앞의 옴니스가 현실의 그녀가 아니라는 건 당연했지만, 나는 마치 옴니스가 죽음으로부터 돌아와 있는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은 여전했다. 그녀가 가장 건강했을 때의 그 모습이었다.
“여러분들을 이렇게 보니 반갑군요.”
“저희도 반가워요.” 레미가 말했다. “굳이 이런 곳에 방을 차린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요.”
“죄송해요. 만약 무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리지요. 일단 앉으셔도 좋을 것 같군요.”
옆을 보니 우리의 몸에 맞는 테이블과 찻잔이 있었다. 옴니스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들어 우리의 앞으로 옮겨주었는데, 그 사이에 그녀는 더욱 거대해진 것 같았다. 아니면 우리가 더욱 작아진 것일까?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일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뒤로는, 옴니스가 살아있었고 건강했던 1년 전쯤 당시에 우리가 늘 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펼쳐졌다. 잠깐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잊은 것처럼.
거의 몇 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우리가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느꼈던 이상한 향기 때문일까? 옴니스와 그녀의 죽음. 침착한 향기.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 속에 등장시킨 자기 자신의 환영과 오랫동안 대화했다. 그녀를 앞에 두자, 우리는 절박해지지 못했다. 우리가 그녀의 세 번째 소설을 찾으려 온 것은 그녀를 부활시키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앉아서 그녀와의 마지막 ‘일상’을 소비해버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가 소설 속에서 빌렸던 모습이 녹아내리고, 현실에서의 모습이 드러났다. 방이 따뜻해서였을까?
레미는 사라진 가슴이 못내 아쉬운 듯 떨떠름해보였고, 피에르는 다시 키가 커지고 자글자글한 손을 지니게 된 자신을 보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청년으로 돌아온 코니는 무표정이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쟝은 옴니스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비록 옷은 다시 예의 낡은 정장으로 돌아왔지만, 이 중에서 가장 자신을 잃지 않은 사람은 쟝 같았다.
갑자기 옴니스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헛구역질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걱정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우리를 내려다보았는데, 순간 나는 그녀의 눈길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계속 헛구역질을 하며, 그녀는 더욱 거대해지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굉장히 즐거웠는데.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깨져버린 것 같았다.
옴니스가 여전히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말했다.
“여러분을 만난 건 기쁘지만… 아무래도 여기에 더 이상 오래 있지 못할 것 같군요.”
“왜죠? 소설이 끝나가나요?”
“소설은… 진작 끝났겠죠. 저는 이미 죽었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위에서 들려왔다. 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리도록 하려면 크게 소리를 쳐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거대해지는 동시에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밀도’가 줄어든 탓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살아 있잖아요! 그리고 이곳에선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
그녀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들었는데 대답하지 못한 건지, 대답이 없었다. 그때 옴니스가 더더욱 부풀어 올랐다. 레미가 소리쳤다.
“조심해!”
레미는 한쪽 팔로는 조각상을 붙잡고, 다른 팔로는 쟝을 잡았다. 피에르와 코니는 서로를 붙잡았고, 나는 당황해서 한 손으론 찻잔, 다른 손은 테이블이나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옴니스의 몸이 폭발했다.
8 현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태양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시는 폐허가 되어있었다. 제대로 서 있는 건물 하나 없었고, 일어서서 돌아다니는 사람 하나 없었다. 신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온통 희뿌옇고, 지평선은 온통 이글거리는 아지랑이에 뒤틀려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시멘트 조각 위에 누워있었고, 바지가 찢겨져 그 사이로 상처가 보였다. 고통은 내가 그 상처를 제대로 인식하고부터 일어났다. 피는 멎은 상태였지만, 바닥을 뒤덮은 면적을 보니 정신을 잃은 동안 흘린 양이 꽤 되어 보였다.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나는 일행을 찾아 나섰다. 도시의 광장이었던 곳에 시체들이 수두룩했다. 모두 폭사(暴死)한 것처럼 여기저기 터져있었다. 옴니스는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 어째서 자신에 소설에 나오는 모두를 죽여 버린 걸까? 그렇다면 이제 소설 속의 옴니스마저 죽어버린 걸까?
아무리 찾아도 레미와 쟝, 피에르, 코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옴니스의 방이 기억났다. 그곳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기억을 더듬어 ‘…의 길’ 표지판을 찾아내고, 다시 그 길을 따라서 갔다. 골목을 이룬 건물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서로를 덮친 채 쓰러져 있었다. 담장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우리가 들어갔던 문도 이제 나뭇조각에 지나지 않는 문짝만 남아서, 저쪽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옴니스의 방은 평범한 방의 크기로 돌아와 있었는데,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이 보였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일행의 흔적은 없었는데, 그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상태에서 남길 수 있는 흔적은 죽음의 흔적뿐이었다. 나는 넘어진 조각상을 일으켜 세우고, 열려져 텅 빈 속을 드러낸 옷장의 문을 닫았다.
나는 그녀의 의자에 앉아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그 순간 어째서 그녀가 터져버렸는지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리가 아파 더 이상 움직이기 싫었고, 그때 햇볕이 너무 밝고 뜨거워서 나는 그녀의 의자에 푹 잠긴 채 눈을 감았다.
몹시 지쳐있었고, 조금은 안도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
눈을 떴다. 그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의자를 돌리자 옴니스의 깨진 거울이 보였다.
그 안에서 희미한 형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안에 뭔가 거칠게 썬 고기를 반죽해놓은 것 같은 덩어리가 비쳤다. 그 덩어리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눈 한쪽과 귀 한쪽이 없었다. 이목구비를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아.”
“그라벨?”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모든 것을 서서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나를 꺼내줘.”
나는 거울에 손을 대었다. 점막처럼 변한 유리가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빛나는 알갱이들이 내 손을 감싸며 일렁거렸다. 찐득찐득했다. 피에 가까웠다. 내장을 만지는 것 같았다. 거울이 은색 물을 왈칵 쏟아냈다. 거울 속 깊은 곳에 여기저기 박혀있는 날카로운 파편들을 헤치며 그 고깃덩어리를 붙잡았다.
그것이 “으으…” 하고 신음을 뱉었다.
나는 그제야 나의 일행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애초에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 살고 있던 그들이 그동안 나와 동행하여 준 것이다.
나는 그 표지판에서 지워진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였다.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레미가 나를 찾아와 쟝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일. 피에르에게 그런 동성 간의 짝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득시켜달라고 요청해 온 쟝. 죽음에 가까워져가는 피에르의 끊임없는 하소연. 이따금 무시무시한 얼굴로 찾아와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고마워요.”라고 말한 뒤 떠나버린 젊은 코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방을 모두 떠난 뒤에 끊임없이 뭔가를 써내려가는 옴니스. 그리고 옴니스의 죽음충동을 전부 먹어버린 채 그녀가 쓴 소설의 가장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거울 속에 갇힌 그라벨.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옴니스도 그라벨도 아닌 나는 누구일까? ‘옴니스 그라벨’에서 ‘옴니스’와 ‘그라벨’을 빼고 남은 무언가? 그것은 내가 10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나에게 예쁜 열쇠를 만들어주었던 그일 수도 있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옴니스와 그라벨 사이에 있었고, 그 두 사람을 붙잡는 여백이었다.
“…아.”
그라벨이 말했다.
“나를 데려가.”
그것은 나의 팔에 꼭 붙어있었다. 마치 내 팔이 될 것처럼. 그러나 이제 곧 내가 그것의 팔이 될 차례였다.
아까부터 덥지 않다 싶었더니 태양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추위가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런 심심한 하얀색은 너무나 쉽게 종이를 연상시켜버리곤 하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소설 속의 하늘이 저러하다면,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그 하늘에 뭔가를 채워 넣고 싶지 않겠느냐고.
모든 것이 얼어붙으면, 그녀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세 번째 소설이 인기를 받은 바람에 갑작스레 유명세를 얻은 옴니스는, 2013년 10월 24일에 손목을 긋고 병실에 누워있었다.
그녀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포기한 뒤에, 그녀는 자신의 예전 소설에서처럼 의문들이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고, 결국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아내었다. 그건 그녀가 자신의 친구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답의 내부로부터 피어오르는 질문들은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가 받아들인 친구들의 비밀들이 사람의 형태로 그녀의 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손목을 그은 이유였다.
모든 것에 강렬한 물음표를 달고 살아왔지만 가까스로 그것을 숨겨온 자에게 적절한 최후였다. 최후일 뻔 했다.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죽지 않을 만큼’의 깊이로 손목을 그은 것이었다.
옴니스가 깨어난 뒤,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친구들에게 돌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마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쉽지 않은 일을 결국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삶이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2013년 10월 24일이었고, 아마 조금 있으면 25일이 되거나, 이미 되었을 것이다.
그라벨이 천천히 나의 안으로 들어왔다. 옴니스는 이 도시 자체였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눈이 내린다. 그건 작위적이었는데, 하늘이 뜯겨져서 내리는 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리게 둘 것이다.
“…아.”
그라벨이 마지막으로 나를 불렀다.
소리가 들린다. 심박수 그래프의 소리다. 나를 결국 돌아가게 하는 소리다. 친구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내가 돌아가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집을 팔아치우는 일이다.
맨날 시만 쓰다가, 소설게시판엔 처음 올려보는군요. 여태껏 그다지 소설을 써온 적이 없어서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네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