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왜성의 언어
- 작성일 2014-02-05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361
잠에서 깬 것은 새벽 네 시였다. 그는 사각거리는 얇은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빛바랜, 언젠가는 새하얀 빛을 내비쳤을 침대 시트 아래로 두 발을 내리자 방바닥의 싸늘함이 느껴졌다. 춥다. 잠시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방에 들어차 있는 수많은 물건들은 희미한 푸른 빛 속에서 색채를 빼앗기고 있는 듯 보였다. 방문은 한 뼘 정도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푸른빛에 잠긴 채 커다란 창문을 마주하고 서 있는 그녀가 보였다. 커튼자락 같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창밖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테지.
바다, 그는 문득 바다를 떠올렸고 이내 눈을 흐리게 감았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파도처럼 다시 잠이 밀려오는가. 눈을 감은 채로, 그는 다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파도가 그를 덮치며 한숨을 흘렸다.
10월의 공기를 맞으며 그녀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주말 오후 시간대임에도 공원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고개를 들었다. 분명 해가 떠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하늘에는 태양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은 태양은 세상을 어둡지 않을 만큼만 밝히고 있었다. 이봐요, 그녀는 옆에 앉아 자신의 콧수염만 매만지고 있는 j에게 말을 걸었다.
“평생에 걸쳐 단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 건가요.”
졸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j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j의 시선은 해파리처럼 허공을 부유하다가 텅 빈 하늘의 어딘가에 닿았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식상한 거라도 괜찮아요. 어차피 당신한테 대단한 대답 같은 건 기대도 안 해요. 그녀가 혼잣말을 한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말을 멈췄을 때 j는 침묵 속에서 입을 열었다.
“그건 모르겠고, 그냥 나는 별을 보러 가고 싶은데.”
j는 계속 이어서 중얼거렸다. 별들은 조용하니까요. 각자 버려진 듯이 동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말을 할 필요가 없고, 해봐야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
j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처음 만났을 때 j는 그녀와 같이 살고 있는 남자의 친구라고 했다. 그녀의 집에서 그녀, 그, j, 이렇게 세 명이서 탁자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j는 숟가락을 허공에 들어 올린 채로 한참을 있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벙어리가 되고 싶다고. 그와 그녀 중에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불분명했다.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건네는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다만 그녀는 j의 그 말이 불편했다. 벙어리가 되고 싶다며 이런저런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는 j를 그녀는 날선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는 벙어리였으니까. 반면 정작 벙어리인 그는 담담했다. 그는 야채를 소리 없이 씹으며 j를 구경하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j의 말을 들으면서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이봐요.”
그녀는 쓴웃음 묻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그녀와 j가 앉아 있는 벤치 근처로 먼지 섞인 찬바람이 머물고 있었다.
“괜한 얘기를 꺼냈네요. 당신 핸드폰도 없이 사는 사람이라 내가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빨리 용건만 말할게요. 우리 아저씨랑 친구라고 했죠? 언제부터 말을 못하게 된 건지 알아요?”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공상에 빠져 있는지, j는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그게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대학을 다니던 중이었던 거 같은데. 아닌가. 그 전이었나. 뭐 어쨌든 이십대 초반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도 원인은 몰랐고. 그게 왜 궁금하지.”
하늘이 흐렸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떠도 여전히 하늘은 흐렸고 j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구름은 안개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만난 건 삼 년 전이었다. 그는 이제 막 서른 살이 되고 그녀는 스물둘이 되던 해였다. 선망하던 작가와 사랑을 나누게 된 건 환상적인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환상적인 일이었기에 그가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라는 것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듯 느껴졌다. 그가 말은 못하지만 들을 수는 있다는 사실에, 대화는 못하더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는 것에 그녀는 감사했다. 그가 쓴 글을 되짚어보며 상상하는 그의 목소리는 작지만 또렷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생활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만큼 더 많은 글을 썼다. 언어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인 모습 같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퀭한 눈을 한 채로 글씨를 적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강박증인지도 모르겠다고. 목적조차도 잊은 채로,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활자들이 파도칠 때까지 글을 쓴다고. 강박증인지 무엇인지는 그도 그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들의 생활은 위태롭게나마 유지되었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에게서 수화를 배웠다. 그녀는 이상할 만큼 수화를 잘 익히지 못했지만, 필담으로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함께 산 지 일 년쯤에는 필담으로 대화하는 일도 충분히 적응돼서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가 말을 하면 그는 종이에 대답을 적어서 보여주었다. 어쨌든 이제 열심히만 살면 걱정할 일은 더 없다고 그녀는 낙관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가 글도 쓰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는.
“결국 언제부턴지도 확실히는 생각이 안 나고 그 원인도 모른다는 거군요.”
그녀는 j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가 벙어리가 된 그때처럼,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지금도 이유는 뚜렷하지 않았고 막을 방법도 없었다. 최초의 증상은 어휘를 근본적으로 혼동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언어에 대한 기억 자체가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가령 커피를 녹차라고 부른다거나 나뭇잎을 종이라고 말하는 것. 물론 그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이 증상은 그가 쓴 글을 통해서 처음 드러났다. 그는, ‘하늘에 떠 있는 혀를 볼 때 그가 생각났다’로 시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처음 그 글을 읽었을 때 그녀는 그게 일종의 전체적인 은유라고 생각했다. 별이라든가 달이라든가 그런 걸 혀로 은유한 것이겠지, 하고. 하지만 어느 날 그가 밤하늘을 보면서 오늘은 하늘에 혀가 많이 보이네, 공기가 맑은가봐, 라고 종이에 적어 보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섬뜩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별’과 ‘혀’, 이 두 단어를 뒤바꿔서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게 잘못되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증상은 심해졌다. 단순히 어휘를 혼동하는 걸 떠나서 아예 망각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틀 동안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온종일 비가 내리는 걸 보고도 그는 비가 내린다, 라는 문장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지금 하늘로부터 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저 물줄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는 점점 더 많은 단어들을 잃어버렸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생기자 그는 자신이 실어증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점점 써지지 않는 글을 어떻게든 써내려가기 위해서 그는 몇몇 단어들을 자신의 몸에 문신처럼 적어두기까지 했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봐도 그는 그 단어들이 무엇인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언어를 빼앗긴 작가란 어떤 모습일까. 상아가 뽑힌 거대한 코끼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이 문득 그녀의 눈앞에 스쳤다. 상아가 뽑혀나간 자리, 깊은 어둠이 자리한 코끼리의 상처를 그녀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하늘은 흐렸다.
무슨 꿈이었던가. 잠깐 스치듯 잠에 들었던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새벽 다섯 시. 약속한 시간이다. 한 시간 정도 다시 잠에 빠졌던 것 같은데 꿈속의 장면들이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애매한 실루엣과 색채뿐. 온통 푸른색으로 물든 꿈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희미한 꿈의 흔적은 매순간 증발하는 중이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꿈속의 장면을 떠올리려하면 할수록 기억은 더 빠른 속도로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언제나처럼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방안은 어두웠다. 잠들기 전에 조금 열어뒀던 방문은 닫혀 있었다. 문득 그는 잠들기 전에 보았던 장면, 그녀가 창문 앞에서 온몸으로 새벽을 마주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의 눈가에 닿은 것은 한 뭉치의 푸른빛이었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모습처럼 커다란 창문을 통해서 새벽빛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만 잠들기 전의 장면과 다른 점은 그녀가 창문 앞에 없다는 것. 그는 곧 거실의 낡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얇은 이불로 몸을 덮고 웅크린 채로 누워 있는 그녀를 그는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자 건조함이 느껴졌다. 처음 만날 때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그는 잠들 때조차도 피곤함이 가시지 않은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도 바다에 잠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 손으로 이불을 잡고 몇 번 흔들자 그녀는 부스스 눈을 떴다. 그녀는 어딘지 어두운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왜. 무슨 일이야?”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무언가 잊었던 것을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누워 있는 채로 집안을 둘러본 그녀는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악몽을 꾼 걸까. 그는 손을 뻗어 세심하게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미리 메모해둔 종이를 보여주었다. 우리 오늘 새벽에 산책 가기로 했잖아. 종이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은 그녀는 졸음 속에서도 허탈하게 웃었다.
“하여간 아저씨 집요하기는.”
그녀는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창문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는 그녀를 한번 껴안았다가 종이에 펜으로 몇 마디 적어 보여주었다.
빨리 옷 입고 나와.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어. 내가 힘들 때 자주 가는 데야.
그렇게 그가 그녀를 이끌고 간 곳은, 그녀가 가본 적 없는 길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더 사람이 없는 곳을 향했다. 골목길 사이사이를 걸어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집들이 드문드문 줄어들기 시작했다. 종류가 무질서하게 뒤섞인 잡초들이 길게 자라나 있었고 얼마 더 가자 들판이 나타났다. 이런 곳이 있었나.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늘고 긴 풀잎들이 불규칙한 방향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낯선 장면이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한데도 그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목적지도 모른 채로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어쩌면 늘 같은 모습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말도 못하는 벙어리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목적지가 없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목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입모양만 봐도 그가 사랑해, 라고 소리 없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 그는 그녀에게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전날 밤에 어색한 수화로 그와 이야기하다가 지나치게 여러 번 대화가 끊기자 그녀는 답답해서 홧김에 짜증을 내버렸다. 그는 짜증내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방에 들어가 노트에 묵묵히 한참 글만 쓰다가는 잠에 들었다. 그녀는 그가 잠든 사이에 노트를 훔쳐봤다. 그의 노트에는 백색왜성에 대한 글이 적혀 있었다. 빛을 내지 못한 채로 서서히 열을 빼앗기며 식어버리는 별. 그건 아마 일종의 작가로서의 직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아저씨, 그래서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건데.”
그녀가 결국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앞서 걸어가는 그는 여전히 뒷모습뿐이었다. 싸늘한 습기 배어 있는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이따금씩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들판. 눈동자에 파란 렌즈를 끼운 듯 세상의 색채는 차가워 보였다. 문득 그녀는 몸을 떨었고 영원히 아침을 내주지 않을 것 같은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에게 그녀는 외쳤다.
“어디 가는 거냐고. 대답을 해봐 좀.”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의 발은 멈출지 말지를 고민하는 듯이 허공에 떠 있다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는 천천히 뒤돌아봤다. 그가 수화로 무엇인가를 말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짓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수화를 잘 배우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는 종이뭉치랑 펜 한 자루를 꺼내들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몇 걸음 그녀에게 다가오며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검은 잉크 펜을 꺼내들었다. 그는 자신의 왼손 손바닥을 펼쳐 그 위에 글씨를 적었다.
괜찮아. 미안. 깜짝 선물처럼 보여주고 싶었어.
그는 손바닥을 펴서 그녀에게 보여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또 무언가를 적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펜은 한참동안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허공에 멈춰 있었다. 이맛살 찌푸려진 그의 표정을 보며, 그녀는 그가 어떤 단어를 떠올리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최근 며칠 들어서 여러 번 본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가 실어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어이없을 만큼 단순한 문장을 손바닥에 적어 보여주었다.
바다를 보러 가자.
잠시 대답이 없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지어보이는 데는 조금 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래. 바다 보러 가자. 그녀가 수화로 바다, 라는 낱말을 손짓하자 그는 천진하게 미소지어보이고는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따라 걸어가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건, 뭘까. 그들의 집 근처에 바다는 없었다. 그는 마치 수백 수천 번을 지나다닌 길이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혹시 그가 눈치 챈 건 아닐까, 그녀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
“사람들이 우주 탐사에 열을 올리는 건 신기한 일입니다.”
그의 집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날, j는 그녀를 보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의 대학시절 친구라기에 그녀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띄워 올리며 일일이 듣고 있었지만 사실 일부러 표정을 밝게 할 필요도 없었다. j는 상대방의 표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사람들은 외계에 대한 선망이 있지요. 웃긴 일이지. 전혀 근거도 없는데. 근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미확인 비행물체니 뭐니 하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별 사이의 소통인 건데, 그러니까 모든 별들은 서로 끔찍하게도 멀리 떨어져 있지만 모두 각자 빛을 낸다는 거지. 그래서 지구인들이 다른 별에 관심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인 건데. 이 빛을 낸다는 사실이 별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신호, 소통인 거지. 근데 여기서 슬픈 건 빛을 못 내고 식어가는 별이 있다는 건데…….
순환하는 듯한, 거슬리는 j의 말투에 그녀는 더 이상 웃음을 억지로 지어내기가 힘들었다. j는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줄줄이 늘어놨다. 십 년 정도는 말을 못 했던 사람 같았다. 그녀는 옆에서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그를 홱 쏘아보았다. j를 초대했다는 것에 대해, 아니 그 이전에 저런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그녀는 그에게 불만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녀가 그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그는 그 시선을 모른 척하는 와중에도 j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j는 별이 태어나고 죽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태양계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에 대한 말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억누른 목소리로 j의 말을 끊었다.
“저기요, 좋아하는 영화 있어요?”
“영화요? 글쎄요. 그보다 태양은 심장 같은 것이죠.”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하시는군요. 우리 아저씨는 영화를 꽤 좋아하는데. 신기하네요. 두 분이 오랜 친구라면서도 성향이 많이 다른 게.”
그녀는 모조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j씨는 말도 좀 많으신 거 같고.”
그녀의 말에 이어지던 j의 말이 뚝 끊어졌다. j는 휘어지게 자라난 콧수염을 매만지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j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이 공중에서 어긋났고, 옆에서 잠자코 있던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j를 마주보았다. j는 침묵을 음미하는 듯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말이 많은가요. 글쎄, 저는 가끔 차라리 벙어리가 되고 싶습니다.”
그녀의 입가에서 비웃음마저도 사라졌다. 그녀는 굳은 표정을 지은 채로 j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j는 여전히 태연하게 콧수염만 만지고 있었다. 조금 거칠어진 그녀의 호흡 소리는 j와 그와 그녀 자신, 모두의 귀에 들렸다. 잠시 후에 억지로 잡아 뜯듯이 j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펜을 집어 들어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적어 보여주었다. 기분 안 나빠? 내가 말 많은 걸로 뭐라고 했다고 저거 지금 아저씨 비꼬는 거 아냐? 하고 싶은 말을 다 적고도 그녀는 무언가 더 분풀이를 하고 싶은 듯이 펜을 꽉 쥔 손을 허공에서 멈추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부드럽게 펜을 빼내서 대답을 적었다.
그런 거 아니야. 저건 저 친구랑 나랑 옛날부터 자주 하던 얘기야. 그리고 날 비꼬거나 할 친구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그는 오히려 괜히 흥분하지 말라는 듯 핀잔주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 답답한 마음이 되어 입술을 한 번 핥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친구라고 해서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밖에 나가서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녀는 j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그를 보았다. 그는 어쩌면 친구가 자신을 비꼬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런 건 아니었을까. 그녀는 대학생이었던 그들의 관계를 어림잡아보며 생각했지만, 사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의중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접시에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미 식어버린 고기는 거칠게 씹혔다. j가 떠난 뒤에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질 집안을 기도하듯이 생각하며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곁눈질로 보았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하면서도 이미 자기 앞에 놓인 음식을 죄다 먹어치운 j는 아직도 천천히 식사하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그가 고개를 들자 j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듯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여자 분의 별자리는 뭐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수화로 대답했다. 꽤 긴 대답이었다. 단순히 별자리 이름만 얘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수화를 잘 배우지 못해서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불현 듯 j에게 화가 났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그와의 비밀을 j가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질투가 났다. j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임에도, 그녀는 닿을 수 없는 그의 어떤 내밀한 영역에 j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쾌했다.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건데?”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종이에 대답을 적었다. 저 친구가 너에 대해서 물어봤잖아. 그래서 말해줬어. 네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앞으로 뭘 하려고 하는지.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들여다보다가 j에게 말했다.
“그러는 j씨는 지금 어떻게 살고 계세요?”
“별을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별을 보면서 돈을 버신다고요? 우리 아저씨랑 같이 철학과 나오신 걸로 아는데.”
그녀의 목소리에 비꼬는 말투가 섞이자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하지만 정작 j는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휘어진 콧수염에 중첩된 묘한 웃음이었다.
“돈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겨우 벌고요.”
“덕분에 가족 분들은 힘드시겠네요.”
“저는 가족이 없습니다.”
혼자 감상에 빠진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j는 이번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역시나 불분명한 말들이었다. 단편적인 장면들. 각각의 장면들은 정말 사실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극적이었고, j는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지극히 건조하고 조금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여덟 살에 낯선 동네로 이사, 꿈속에서 다른 세상을 여행하다가 잠에서 깬 j가 집 천장에 뚫려 있던 구멍 틈으로 바라보던 별. 친구는 없었고 하루 종일 동네의 수많은 계단만 오르내리던 기억.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없던 달동네의 계단과 이렇게 한없이 걷다보면 저 위에 펼쳐진 별의 세상에 한 발짝은 들여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날. 그날의 밤하늘은 짙은 푸른색이었고 별들은 분명히 춤을 추고 있었다고 j는 거듭 말했다.
“알겠죠? 별은 춤을 출 수 있어요. 그걸 잊으면 안 되는 건데.”
그렇지? 라며 j는 이제야 식사를 다 마친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바람이 새어나가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끝까지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j는 대체 뭐가 재밌는지 혼자서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크게 웃다가 말을 이었다.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한 줌씩 풀어놓는 이야기꾼처럼 입술을 적시면서.
“이상하게 그 동네에는 애들이 별로 없었단 말이지. 내 또래 애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저는 그때는 아직 학교도 다니지 않았어요. 같이 살던 엄마는 귀머거리셨고, 그래서 저는 여기저기 다 말을 하면서 지냈어요. 엄마에게도 말을 했고 벽에 대고도 말을 했고 천장에 뚫린 구멍에도, 늘 그 구멍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던 작은 별에게도 말을 했는데. 길에 널브러져 있던 하얀 강아지의 시체에게도 말을 했고. 내가 사랑한 건 늘 그 모양이었던 건가. 내 말에 대답할 수 없는 대상에게만 저는 애정을 쏟았던 거죠. 불가피한 일이었겠지만.”
초등학교에 다닐 때가 되어서야 j는 수화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가 어떤 사람들하고 인형놀이를 하듯이 손을 움직이던 게, 말을 안 듣는 j에게 엄마가 가르치려고 애쓰던 손짓들이 수화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말에 의존하지 않고 손짓으로 전달하는 의미들. 학교 도서관에서 수화에 대한 두꺼운 책을 읽은 적도 있었다. 어렸을 때 j는 학교 도서관에 자주 있었다고 했다. 책들은 많은 말을 쏟아냈다. 어린 시절 j의 말에 결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하던 별, 강아지, 엄마와는 정반대였다. j는 가끔씩 수업마저도 빼먹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읽다가 지치면 눈을 감고, 소리 없이 허공을 떠가는 수화의 손짓을 상상했다. 그건 별과 닮아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배워 필담으로라도 엄마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고 나서, j는 그 소통의 감각에 전율하며 어린 나이에도 혼자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소통할 수 있다면 늘 궁금했던 것들도 엄마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엄마는 귀머거리인데 누가 나에게 말을 가르쳤는지, 아빠는 어디 있는지, 다른 형제는 없는지 등. 다 배우기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j는 계속 틈틈이 수화를 공부했다. 가끔은 별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소리쳐도 높이 떠 있는 별에까지 목소리가 닿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j는 손짓했다. 수화로 말한다면 별과도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습관이 되었고 돈을 벌기 시작한 고등학생 때에도 j는 별을 보며 수화를 했다. 점점 더 나이를 먹어도 j는 여전히 별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평생을 통틀어 배운 건 세상은 나 같은 사람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소통이 불가한 세상에서 계속 소통하려는 사람은, 필요 없는 거죠. 차라리 인간에게 입이라는 게 없었다면 어땠을까. 마찬가지인 건데. 글을 쓰든지 별을 보든지, 사실 세상은 필요하지 않은 거죠 그런 것쯤은. 그런 사람쯤은. 저기 그런데요.”
j는 그녀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왜 저 친구를 사랑하는 거죠?”
스물두 살이었다. 그녀가 처음 그를 만난 날은 봄이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급격하게 따뜻하진 날씨에 꽃들이 피어났지만 곧 연이어 비가 내렸다. 비는 며칠간 끊임없이 내렸고 그를 만난 건 그 비가 그친 날이었다. 봄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쌀쌀한 저녁이었다. 며칠간 내린 비에 흠뻑 젖은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며 그는 서 있었다. 저기, 저예요. 어쩐지 크게 말하지는 못하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혼잣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 목소리였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보았다.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노트와 펜을 꺼낸 그는 미리 한 페이지에 미리 적어두었던 글씨를 보여주었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저는 벙어리입니다. 인터뷰도 기껏해야 글로 적어 보여드리는 게 전부일 텐데요.
그의 눈빛이, 지금 만난 것 자체가 별로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애초에 이메일로 하는 게 좋다는 그에게 만나서 인터뷰하자고 억지를 부린 건 그녀였다. 새로 책이 나오셨는데 인터뷰하고 싶다고. 어떤 신문의 어떤 기자라고. 가명까지 지어가면서 그녀는 거짓말했다. 단지 그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소속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어진 선,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경계에서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늘 자신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잘 섞이지 못한다고 느꼈다. 친근하게 다가가려해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희미하고도 분명하게 그어진 경계선이 눈에 들어왔다. 반면 책을 읽을 때는 달랐다. 책 속의 세상에는 경계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대로 언제든 덮을 수 있고 다시 펼칠 수도 있었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길. 그녀는 평생 그 길에 서 있고 싶었다.
그는 그녀가 그 길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그녀는 늦은 오후 수업 중에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웠다. 모든 조명이 꺼진 교실은 마치 졸업식 이후의 순간인 듯 적막했고 그녀는 맨 뒤의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부끄러웠다. 천천히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여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그녀의 걸음소리만이 기다란 통로에 울렸다. 단 한 명도 나를 깨우지 않았구나.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겠구나. 속으로 되뇌면서 어딘가를 향했는데,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어가서 바로 잡히는 책을 읽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듯이 혼잣말했고, 그녀는 그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다. 대학에 가고,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하며 인터뷰를 요청하는 거짓 메일을 보내서 결국 만나기까지. 그 전에는 만난 적조차 없었지만 그녀는 그의 글이 마치 그녀 자신을 위해서 쓴 것 같다는 생각에 빠지기까지 했었다.
날이 춥네요. 일단 어디 안으로 들어가죠. 계속 공원에 서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는 우물쭈물 서 있기만 하는 그녀에게 근처 카페를 가리켜 보였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그는 창밖으로 벚꽃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노트와 펜을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되지? 상상 속에서는 인터뷰가 어려울 게 없었는데 현실로 들어오니 세세한 것조차 거대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아, 그러니까, 이번에 내신 책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는 얼굴은 여전히 창밖을 향한 채로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문득 가느다랗게 조여들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보여주었다.
어떤 말씀을 부탁하시는 건데요.
“아, 예에, 그러니까 음… 이번 소설은 처음 쓰신 장편이신데 언제부터 집필하셨던 건가요?”
그런데 녹음 같은 거 안 해도 돼요?
“예?”
녹음 같은 거 안 해놔도 괜찮냐고요. 인터뷰잖아요.
그녀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서 녹음 기능을 찾아냈다.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서 펜을 들었는데 손이 떨렸다. 그는 그녀의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긴장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뭐부터 말씀해드리면 될까요?
그의 글씨체는 단단했다. 한 획 한 획이 종이 위에 굳게 새겨지는 듯이 견고해보였다. 그녀는 그날 오히려 그에게서 더 많은 도움을 받아가며 삼십분 정도 인터뷰를 했고, 그 이후에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시간 정도. 좋아하는 건 무엇이고 싫어하는 건 무엇인지,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어떤 것이 그르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어떤 것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필담으로 나누던 이야기가 멎어들 때쯤 창밖을 보니 깜깜한 밤이었다. 벚꽃나무는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서 있었다. 그녀는 벚꽃나무에 대해서 물었다. 벚꽃 좋아하세요? 처음 뵈었을 때도 한참동안 보고 계셨잖아요. 그녀의 질문을 듣고 그는 어둠으로 가득 찬 창밖을 다시 한 번 내다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창밖의 벚꽃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혹시 자신이 그에게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건네야할지를 복잡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그는 펜을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종이에 글씨를 적었다.
지금 이건 인터뷰인가요.
“……네?”
벚꽃을 좋아하냐는 질문, 인터뷰의 일부분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인쇄한 듯이 반듯한 그의 글씨체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종이와 검은 글씨. 그 사이에서 어떤 장면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 듯했는데 그게 미래에 대한 예감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그가 줄곧 쓰고 있던 펜을 집어 들고, 말이 아닌 글씨로 대답했다. 그가 하듯이. 아니요.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로부터 일 년쯤 지나서 그들이 같이 살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처음 만난 날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당연히 알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진짜 기자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있느냐고. 거짓말인 건 처음 벚꽃나무 아래에서부터 알았다고. 그러자 일 년이 지난 일인데도 괜히 뒤늦게 부끄러워진 그녀는, 그러면 왜 그때 계속 되지도 않는 인터뷰를 계속 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참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처럼. 그러다가 그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어설픈 학생을 위한 동정도 아니었고 독자를 위한 배려도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왜 계속 같이 있었는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을 느낀 건 전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 이후로 계속 만났는지. 그는 끝내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었다.
j를 집에 초대했던 날로부터 몇 달이 지난 때쯤, 그의 언어 장애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집에 단 하나뿐인 방에 그가 틀어박혀서 글을 쓰는 시간이면 작은 집 전체에 타자소리가 희미하게 퍼졌다. 원래 그는 한번 앉았다 하면 꽤 많은 글을 쓰는 편이었다. 타자 소리가 침묵처럼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하지만 그때쯤부터 그의 타자치는 소리는 자주 멈추었고 꽤 오랫동안 집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그녀는 침묵의 무게를 매순간 실감했다. 단어를 혼동하고 잊어버리기 시작한 그는 갈수록 글을 쓰는 일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실 누구든 판단할 수 있을 상황이었다. 병원에도 갈 만큼 많이 갔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방면에 뛰어나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별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별로 많지도 않은 돈을 쪼개가면서 병원을 다니며 들은 대답이라고는 뇌의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짐작된다는 것뿐. 말끔히 해결할 수 있는 약 같은 건 없다고, 의사들의 말은 그녀의 희망을 찢었다. 결국 그의 상황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어증에 걸린 그는 결국 글조차 쓰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작가일 수 없으리라. 명백했다. 그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다음 날 새벽 다섯 시에 같이 산책가기로 약속했던 날, 수화를 배우다가 여러 번 틀리자 그녀가 짜증냈던 날, 짜증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가 혼자 방으로 들어갔던 날, 그가 빛을 내지 못한 채로 서서히 열을 빼앗기며 식어버리는 백색왜성에 대한 글을 쓴 날, 그 글이 완전히 엉망이라는 것을 그녀가 본 날, 그녀는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 없이 그로부터 도망쳐야겠다고.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할 것임이 분명한 곳에 더 있을 수는 없다고.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벙어리인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한 뼘 정도 열려 있는 그의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며칠 전부터 미리 조금씩 꾸려두었던 가방을 소파 밑에서 꺼내들었다. 새벽이었고 그는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옷장도 없이 구석에 놓여 있는 옷가지들을 그녀는 바라보았다. 대체 왜 벙어리를 사랑했는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단순한 동경이라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그녀는 도망치기 위해 꾸려두었던 짐을 다시 풀어놓으며 천천히 결론을 내렸다. 그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그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글을 쓰는 그에게서, 백색왜성처럼 식어가기 시작한 그에게서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봤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역시.
고개를 드니 커다란 창문으로 새벽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결국 그의 곁에 남은 그녀는 창밖의 세상을 한참동안 내다보았다. 새벽빛이 커튼처럼 하늘하늘한 그녀의 원피스를 투과했다. 푸른빛에 잠겨 있던 그녀는 어느 순간 소파에서 잠에 들었다. 꿈결에서였는지 어디선가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
아무 말도 없이 콧수염만 매만지고 있는 j를 보며 그녀는 불쑥 말했다.
“그래서 대답 안 할 거예요?”
으음, 하면서 j는 살며시 눈을 떴다. 얇은 눈꺼풀 사이로 j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벤치에는 여전히 쌀쌀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인적 드문 공원. 고개를 들면 펼쳐져 있는 10월의 하늘도 여전히 흐렸다. 한참동안 목각 인형처럼 고개만 까딱거리던 j가 입을 열었다.
“뭘?”
“평생에 걸쳐 단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 거냐고요.”
“흐음.”
“저는 알아야 돼요. 곧 우리 아저씨랑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손짓밖에 없게 될 테니까.”
“보잘 것 없군.”
그녀는 j의 말에 이전처럼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웃어버렸다.
“보잘 것 없죠. 어차피 별이랑 대화하는 당신이나 평생 문학만 공부하겠다는 나나 실어증에 걸린 우리 글쟁이 아저씨나, 이 세상에선 사실 다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잖아요. 그래도 똑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라 내버릴 수가 없네요.”
문득 j의 동공이 조금 커지는 것을, 그녀는 본 듯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던 j는 어느 순간 고개를 푹 숙였다. 우물 속에서부터 울리는 듯 먹먹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별들이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저만큼의 별들이 매달려 있을 정도로 하늘이 넓었던가 싶을 만큼 많은 별이 가려져 있다고. 그 별들은 아무도 자신의 빛을 보지 못한다 해도 열심히 스스로를 태우고 있다고. 빛나고 있다고.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j의 목소리에 그녀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어두워질 시간이었다.
그가 새벽부터 그녀를 데리고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던 날, 있지도 않은 바다를 향해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그가 너무 당당하게 앞장서서 걸어가기에 그녀는 따라가면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끝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떤 신비로운 비밀의 장소도 아니었고, 동네를 오며가며 그녀도 멀리서 몇 번 본 적 있었던 동네의 너른 들판이었다. 유별난 점이 있다면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라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것뿐. 새벽안개가 잠긴 지평선에 파란 하늘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 바다는 없었다. 그녀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고 어떤 손짓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가만히 지평선에 닿은 안개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면서 수화로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화였다.
바다.
그는 환한 미소를 얼굴에 편 채로 그녀를 뒤돌아봤다. 그녀는 힘들게 웃었다. 어색함을 어떻게든 티내지 않으려고 그녀는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다야. 그녀는 바다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 그와 함께 하늘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보다 몇 발자국 앞에 서서 평야보다 더 넓게 드리워진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바다’와 ‘하늘’, 이 두 단어의 의미조차 혼동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어느 순간 그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고개를 들자 그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그는 수화로 어떤 말인가를 했지만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 번 힘없이 저었다. 그가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왜, 왜 그래, 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 희미했지만 그녀는 미소 지었다. 새벽안개를 거둬내면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