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울자 (문태준, '가재미'를 읽고)
- 작성일 201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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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나는 할 수 있는 힘껏 쓰지 않으려고, 마음 풀어질 때면 주먹을 쥐곤 했다. 그럼에도 아픈 오늘이 오고야 말았고
나는 오늘을 설명하기 위해 그간의 나, 요즈음의 나로 운을 뗀다.
더 멀리, 저즈음까지 가보자.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나는 시를 피해 다녔다. 시의 얼굴만 눈에 띄어도, 난 쟤 싫어하는 게 분명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알지를 못했다. 알 수가 없지. 그 민낯을.
근본 없는 생활의 이점은 단점과 같다. 뿌리 없다는 거. 이유 없이도 움직임 가능하다는 거.
사정이야 누구나 있다. 얼토당토않은 이유, 핑계 나불댈 것 없이 이미 근본 없다 낙인 찍었으니, 무시하는 거지. 내가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유 막론하고,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잔뿌리까지 탈탈 털어 꼭 끌어안고, 여기가 내 살 집이요, 막 들이대게 되었다.
귀찮았던지 님답게 너그러웠던지 방 한 칸 내어준다 할 때 냉큼, 어두침침 습한 셋방을 달라 했다. 어딜 가나 꼭 달고 다니는 시의 그 다락방에 내가 반했으니까.
좋은 시편은 낯뜨거울 정도는 아니어도 드문드문 소개되지만, 좋은 시간은 늘 감추어져 있다. 둘이서 애틋하라고.
다들 시의 얼굴을 보듬을 때 나는 불을 끄고 시의 어둠과 숨바꼭질을 한다. 늘 술래지만 그래서 좋다. 못 찾겠다 꾀꼬리 내가 항복하면, 그가 나타나니까.
보이지 않는 것들 보기가 가장 쉽다. 눈, 감으면 된다. 가시광선 벗어나는 빛 보지 못하는 우리, 닮았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가장 닮는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읽기를 포기하는 비정형의 글들, 그들은 빛 닿지 않아 눈이 퇴화한 심해어와 닮은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 볼 때 우리도 눈, 감으면 된다.
밤하늘에 대해 쓰래. 그나마 눈에 띄는 저 달과 별들은 이미 누군가들의 오랜 식민지, 나까지 그들 붙잡아 그림자 족쇄 채울 수는 없지 하나씩 포기하다,
밤하늘 쓸 것이, 어둠 하나 남는다.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은 어둠, 저 어둠, 이 어둠과 같고, 눈 감은 내 안의 어둠도, 밤하늘과 동족이다.
어둠을 보는 자들, 가장 먼저 뭐가 보이니 물으면 그 대답 하나같이, 눈이다. 내 앞이 캄캄하니, 볼 수 있다 보인다 말할 적에, 눈부터 달고 나온다.
눈 달고 다음은 손인데, 오늘은 눈만 쓸란다, 어둠에 틔운 눈, 분명 감은 내 눈은 아니니 저마다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사람, 괴물, 눈 트고 버린 식물, 심해어 할 것 없이.
시인은 시어 쓰는 자들 아니라 시간詩間 쓰는 자들이다. 어둠 부리는 자들, 어둠에 눈 부라리는 자들이다. 말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말, 죽이는 자들이다.
시 한 편을 보면 말 참 다채롭지만, 시집 하나를 보면 시어는 그리도 많이 반복된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이다. 가리가리 다져 그 반죽 어둠 속 성운 돼라,
내던진다. 새 별로 새로 살라고.
그래서 나는 쥐뿔도 없이 눈 감고 밤하늘을 본다. 죽지도 못하는 백색왜성이, 그의 몸을 빌려 죽음의 고리 끊어내고, 반짝반짝 생을 충전 받아, 내 컴컴한 마음에 별출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1쪽부터 끝쪽까지, 끝쪽부터 다시 1쪽까지 헤며, 술래가 끝나기를.
오늘 나 참 많이 틀렸다. 더 틀릴 거 없지 않겠어, 자문하는 마음 도끼로 쪼개 아궁이 군불로 때고 남은 재까지 싹싹 쓸어 비운 어떤 마음이, 용용 죽겠지 하지 않고,
이리 와 네 자국도 저 재처럼 훌훌 털어 줄 테니 울다 가라고, 빈 가슴 내어줘서. 거기 기대어 밤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밤이 훌쩍 떠나 그만큼 깊어져 버렸다. 그 재 버리지 말고, 내가 쓸어 갈게요, 받아다 여기 박아둔다. 어제까지의 울음들 묻은 그 묵뫼 찾아가는 이정표 되라고,
누군들 울음 묻고 싶을 때 휑한 그 공동의 묘 찾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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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이지 않은 4부를 연다
조금이라도 덜 쓰인 어둠을 차곡차곡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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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도 마음이 있어 하늘을 서성거린다, 고 그녀는 말한다
하늘 끝을 날다 다시 돌아서고 마는 그 그리움의 곡면,
그녀가 기러기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기러기가 웃는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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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는 '그녀'가 여러 번 등장한다. 그녀는 동일 인물일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허나 시어는 반복해서 쓰였다. 앞서 말했듯 생소한 시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시어가 거듭 말해질 때, 시인이 비장한 것이다. 무엇이 그녀들을 오직 /그녀/로 쓰게 했냐면, 그것 역시 그녀들 울음일 테지.
그녀들 울고 난 울음의 재들이 하나같이 닮았던 것이다. 그 이름은 시집의 가장 끝에, 단 한 번 울대를 타고 올라와, 텅, 텅, 텅, 불릴 테니,
그러니 일단은 시로 돌아가 보자, /기러기/, 러, 까지 갔다 떠나지 못하고 도돌이질 하는 마음, 말 하나까지 그 마음 울다 가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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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갈피 사이에
앉은 새는
짧게
운다
작은 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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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생각이 변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생각을 유기적인 것이라 여긴다. 생각 품은 오직 하나뿐인 내 몸뚱이 분해할 수 없으니, 변화무쌍한 생각 속수무책이라 당연시할 때, 시인은 그 생각마저 갈가리 쪼개어 보인다. 그 사이를 벌려 그 틈에 새 앉아 울고 가라, 한다. 어찌 /심지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나. 시인의 각오는 벌써 극한에 있다.
시와 시도 맞붙어 어쩔 수 없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종이 한 장 앞뒤로 쓰인 그 얇디얇은 사이에도 어떤 새들 앉아 울다 간 밤들이 그 시간들이 맞붙어 있다. 당신이 눈 뜨고 있어, 보이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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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빈집의 약속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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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빈집이, 이 빈집 같은 마음이 너무 싫다. 좋은 것들 떠나 보내는, 게워지는 마음이 너무 싫다. 어쩔 수 없이 잊히고야 마는 이 망각의 계약 파기하고 싶은데, 마음 가난한 누구 만난다면 그냥 내 집 한 채 평생 내어 드리고 싶은데,
시인은 그것도 모자라 계약 하나를 더 하고야 만다. 그냥 두면 잊히는 게 사람 가진 마음의 한계인데, 그걸로도 부족해, 누구라도 오면 찍어 드리리, 사진사가 되겠다 한다.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고, 따지러 간 마음 손에 사진 하나 쥐여 보낸다. 그런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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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 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속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일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小天이라니! 한 동이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 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
아, 24일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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삯바느질로 끼니를 이어가던 貧女의 집인데
가시로만 이루어진 육체인데
나지막한 처마에 등불을 내걸었다
...
오, 가시등불!
푸른 가시를 구부려 구부려서 만든
빛 덩어리
가슴속은
텅 비고
마른 가시들로 새들새들하고
바깥을 밝히려
조랑조랑 매달린 노오란 탱자들, 빛들
오, 가시등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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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 계약을 맺은 다음 이어지는 두 시, 제목을 눈여겨보자. 시인은 지난 시 후에 발병한 뒤늦은 심정을 제목으로 토로한다. 찍어 현상한 필름은 그저 새 필름 끼우면 되지만, 저 같지 않은 사람 마음, 무언가 품에 안으면 감정 남기 마련인 그 마음 위에, 어떤 이별도 공식화되지 않음을 그도 우리만큼이나 안다. 다만 그는 약속을 했으므로, 마지막으로 그 이름들 애타게 불러보는 것이다.
가능하면 시 全文을 싣지 않겠다는 다짐 하나를 방금 깼다. 내가 쓰려는 것 시간이므로, 가능한 한 많이 비워둘 생각이지만, 제목만 둘 수가 없어 그냥 내가 틀리고 말았다 고백한다. 그러니 전문 실은 대신, 내 덧붙일 말은 없다. 허나 '오, 가시등불!'의 발췌에는 핑계가 있다. 그 핑계는 이어지는 시에서 밝히고,
/아/와 /오..!/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인은 느낌표를 시어로 삼키는 자들이다. 그런 그가 느낌표 못다 삼키고 뱉었을 적엔 이유, 있고말고.
'아, 24일'을 통과하며 실재인 삼나무의 24일은, 아이의 시간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시인이 떠나보내야 하는 나무 대신 몰래 새겨 품어버린 말이다. 시인은 남몰래 비유를 익혔지만, 착한 시인은 시 하나도 못 건너뛰고, 실토하고 만다. 탱자가 울고 간 자리 비워내지 않고, 가시등불로 품었음을. 어미가 아이 품듯, 자식들 품자고 뼈 바라지게 일하듯, 소중한 것 품을 삯 벌자고 내건 재주까지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나, 시인은 퉤 하고 정직하게, 비유를 뱉어낸다. 척추에 붙었을 느낌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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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 신갈나무에 빈 들 미루나무에 새들의 집이 아직 얹혀 있다
여름에는 무성한 잎에 가리워져 있지만 겨울에는 저 곳이 새들의 둥지라는 걸 안다
언젠가 다시 가본 나의 외갓집 같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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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기시감이 든다. 이미 탱자나무는 가고 없는데, 생각의 갈피에, /새들/ 잠시 앉았다 간 것처럼. '오, 가시등불!'로 돌아가 보자.
지시대명사가 시어이듯, 의태어도 시어다. /조랑조랑/은 열매 붙은 모양을 말함과 동시에 자식 많이 딸린 모양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말이 단칼에 죽지 않는다는 것 아는 시인은 조랑조랑 읊으며 천연덕스럽게 칼춤을 췄던 것이다. 그렇다면 /새들새들/ 역시 그러할 터. 장막 덮어 억지로 가려뒀지만 사실, 저 앞에 '어떡하나요'란 시에서 /꼬들꼬들/로 벌써 리듬 익힌 바 있다. 어쨌든, 시인은 뜻만 가르는 게 아니라 말의 음절도 토막 낸다. 꼬들꼬들이 새들새들이 되는가 하면, /새들새들/ 도 쪼개져 /새들/이 되고,
'아, 24일'의 /산골 아이/가 '오, 가시등불!'의 /빈녀/의 자식이 되듯, 시간 하나 더 건너, /빈녀/의 집이 외갓집, 떠나온 고향 되지 못할 이유 없다. '오, 가시등불!'이 끝난 사이, 그 생각 갈피를 열어 젖혀 /작은 새/ 불러 앉히고, '언젠가 다시 가본..'의 시상이 떠오르기 전까지 계속되는 그 시간으로 인해, 탱자나무 가시들은, 누가 물어다 놓은 가지가 되고, 가지가 모여 둥지가 되고, 새들의 집 둥지가, 어느새 /새들/의 외갓집이 되고 만 것이다. 그 단절된 생각의 오랜 접촉 과정이, 단 두 줄로 압축될 뿐이니, 시인의 생각은 유기적이기보다 차라리 기형적이다. 저런 말 끌고 나는 못 살지 쯧쯧, 혀 차는 이유는 혀 차는 찰라 간 내가 그 삼킨 혀를 내 혀처럼 물었기 때문인데, 시인의 압축된 생각이 내게 와 벌어질 때, 시어가 다시 생각이 난장이 될 때, 나는 그 생각의 허물들, 시어를 앓는다. 그 허물 벗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아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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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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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들도 기대어 울고 싶을 거라고, 빈집처럼 빈 가슴 없어 곤란했을 거라고, 시인은 대통竹처럼 빈 가슴으로 곧추서서 풍경을 끌어안는다.
그리하여 풍경 하나 여기 서 운다. /괄괄/하게
/괄괄하다/ 는 매미 소리 거침을 말하기도 하지만, 풀의 억셈을 뜻하기도 한다. 매미가 나무 심재(검푸른 감나무는, 앞선 '까마귀와 개' 시에서 /먹감나무/로 등장한 감나무의 심재, 중심을 가리킨다)에 안겨 우는 울음 하나와 그 풍경이 시인에게 안겨 우는 울음이 포개어도 지는 것이다, 시인 품에서는. 나는 또 그게, 차곡차곡 개켜져 있는 그 울음들이 서러워서 단정한 그 위에 엉망인 울음을 뭉텅이 뭉텅이 내던졌다. 그래서 이 시는 개고 싶지 않다. 그대로 전문으로 울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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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이 구멍을 밀고 가는 걸 보여주는 한 마리 게
내 눈 속의 개펄을 질퍽질퍽하게 건너간다
진흙 수렁을 벗어나도 바깥에 진흙 수렁이 있고
門을 벗어나도 門 바깥에 門이 또 있다
돌집 하나 없이 우리는 門의 안과 밖에서 살아갈 것이다
門 바깥에 또 門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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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문' door의 모양은, 문을 둘러싼 수많은 환상 중에 현실로 돌출해 있는 하나의 실재일 뿐이다. 열어젖히는 '문'은 현상된 한 장의 사진이지, '열어젖히다'의 유일한 주어가 아닌 것처럼, '울다'의 수많은 풍경들처럼, 시인이 현상의 주어들을 바꾸는 이유도 저와 평행한 어디에 있을 것이다.
다시 門을 바라보자. 한글 '문'이 아니고 /門/이어야 하는 이유, 사이를 벌리기 위함이다.
안과 밖이 있는데, 사이는 없질 않은가. 구멍이 구멍을 밀고 갈 때 구멍 사이에 한 마리 게가 있듯, 문이 열리고 닫히고, 문밖과 안이 계속되는 사이, 그 잠깐 사이, 우리, 있을 수 있다. 문 사이에 낑겨 살 수는 없어도, 아무도 살지 못하는 빈 곳이라서, 우리 숨어 울 수 있다.
울 수 있는 門의 공동空에서 우는 사람의 입 모양, 問일 것이다. 빈집 떠나거나 가지지 못한 이들, 엉엉 우는 대신 펑펑 묻는 것이다. 지치는 이 글 역시 그 물음 자국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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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의 평상에 누워 먼 길 가는 별을 보고 있다
검게 옻칠한 관 속을 한 빛이 흐른다
빛에도 客愁가 있다
움직이는 빛 사이를 흐르며 나는
목숨이 다하면 가 머무르는 中陰을 생각하느니
이생과 내생 그 사이를 왜 습한 그늘이라 했을까
..
죽은 이의 검고 굳은 혀 위에 손톱만 한
옥매미를 올려주는 풍습이 저 고대에 있었다
슬픈 상징이 있었다
옥매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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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벌린 '사이' 계속 등장하는데 이 '계속'은 역행하는 '계속'이다. 한낱 빛이 향수를 앓듯, /이생/과 /내생/의 사이도 고향 같은 말 있었다, 시 앓는 시인이 발병했던 곳, 작은 말 하나였고 그 말, /中陰/ 이었던 것. 거의 알지 못하는, 없는 말처럼, 비어 있는 곳이니까, 몰래 울다들 간 곳이니까, 울음 묻은 비밀 장소니까 습한 것을, 그렇다 맺지 않고 /했을까/ 물으며 울으며 시인은 습함을 더한다.
상징, 비유의 쓸모를 묻는 이들 얼마나 많은지. 실존 없는 허울이라 욕하는 이들 또 얼마나 많은지.
누구는 글 다 짓고 나면 상징은 비계飛階처럼 걷어내야 한다 말한다. 글 짓는 데 필요한 것이지 글 완성되고도 흉물처럼 둘 것 아니라고.
시인은 이것들을 /무연한 대낮의 비계/라 말한 바 있다. 연고 없이 홀로 서 있는 비계, 건물 없는 가설물, 실존 없는 비유, 속 비어 흉측하다 찾지 않을 그것이 시인이 짓는 빈집이다. 당신 울음 묻으라, 관 놓을 자리 비워둔 묘터다.
나는 시인들 비계를 캄캄한 시간 밝히는 최소한의 가로등이라 여겼다. 시간의 암흑에 압도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설비, 뼈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드러난 뼈다귀들로 정글짐 엮어 노는 것 즐길 줄만 알았지, 그 시간 이리 변할 줄 또 몰랐다. 캄캄하던 것이 더 캄캄하게, 울음소리까지 다 캄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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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나무는
명치가 없어서
텅,텅,텅
헐겁게 운다
木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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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는 왜 급소인가, 가슴뼈 사이에 자리한 공동, 우리 울 수 있는 그 비밀장소이기 때문이지. 그것 없다면 어찌 울 것인가.
명치 없는 나무는, 괄괄하게 울지 못하고, 텅, 텅, 텅 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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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가을꽃처럼 早白하고
기러기는 찬 북쪽을 날아가네
찬비가 내 창에 겨처럼 우수수 지네
보아라,
너는 어찌해 얼굴이 그리 거칠거칠한가
겨울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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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붙은 봄보다 겨울 붙은 가을꽃 생명이 짧고, 기러기처럼 그녀도 가버리고, 시인이 썼던 비계, 그 상징의 껍질들도 비에 씻겨버렸다. 그리하여 속엣 얼굴 드러나니 /보아라/ 말한다. 겉만 일찍 늙어(早白) 자랐지 속은 아직 울 것 많다고, 울 동안 가릴 거칠거칠한 겨 필요한 아이이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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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든 찰라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찰라 속으로 들어가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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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계속 움이 맞다. '찰나'가 아니라 그 울음, 발음인 /찰라/가, 움을 안은 시인에게는 그 말이 맞다. 풍경들 내 품에 울고 가면 그 움에 비석 세워, 스스로 무덤 되겠다는 시인. 사진사도 모자라서 우리 움들의 공동묘지 되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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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숨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재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바람이 나에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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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죽음 물고 가는 것 보아하니 /땅/과 /하늘/사이에 /십 리/가 있다. 바람 가진 재주라면 찰라일 /십 리/일 텐데 어쩐 일인지 바람은 재주 포기하고 땅엣 것들 품으랴 땅엣 것들 울음 들으랴 그 울음 들리는 귀가 생겼다. 하늘 대신 땅엣 것들 보듬으며 땅의 비계 자처한 바람처럼, 이생 떠나신 어머니, 저생으로 넘어가기 전, 그 사이 중음에 /다급한 목숨/ 남아 있다면, 하늘 가는 대신 땅 선택한 그 바람처럼, 노래 불지 않을까. 내 우는 모습 들킬까 찬비에 마음놓고 떨어지지도 못한 거친 겨처럼, 바람 저 /거칠/음으로 내 울음소리 재우시던 어머니,
수많은 그녀들을 /그녀/로 묶은 것, 그것은 늙어 명치가 없어, 울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텅, 텅, 텅 우는 울음이었을 테지. 젊은 시인은 그래서 더 젊은 명치 가진 시인은, 더더욱 빈 곳이고자 한다. 어미 손톱만큼이라도 저생 바깥에 남았다면, 그리 비어 내 울음 숨겨줬을 것이니, 자식 어미 닮고자 하는 일 뭐 대수롭나, 시인은 그 말 대신 그 말뿌리까지 뽑아 비계 넝쿨을 올려 버렸다. 그러니 우리 어떤 대답 없이, 가서 울자, 울어 버리자, 그러라고 저리 아픔 참고 서 있는 것일 테니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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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울음 소용없다는 것 안다. 이 긴 물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이 글은 당신 도착하면 사라지는 이정표면 족하다. 나 역시 가고 없도록, 노력할 것이니.
열었던 것, 지워 무방하다. 저 門처럼 닫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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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산문도, 그렇다고 서평도 아닌 듯하지만 문학 사랑방 같은 곳이라 생각하고 낯두껍게 놓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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