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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죽게는 말아야지요』중에서

  • 작성일 2014-03-14
  • 조회수 1,692


“의사 판검사 교사 교수 직업의 공통점은 유난히 약한 사람들을 접하기 때문에 우월적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해질 수밖에 없는 고약한 속성을 갖고 있다.”


-이관식 (강남세브란스병원 내과 의사)-



김민정,『죽게는 말아야지요』중에서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사촌 동생이 고3일 적 내게 자신의 진로를 놓고 물어본 적이 있다. 외동으로 자란 녀석이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의 추렴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열두 번 죽었다 깨도 못 갈 학과들이 친척 어른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동안 정작 그 어떤 이름에도 녀석의 의지는 담기지 않은 듯 했다. “언어학과 어때? 얼마 전에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란 책을 읽었는데 전 세계의 90퍼센트가 가장 많이 쓰이는 100개의 상위 언어를 사용하는 거라더라. 최소한 6천 개 정도의 언어를 나머지 10퍼센트가 쓴다는 애기인데 언어의 사멸은 곧 생태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거잖아? 이런 거 한번 공부해볼 만하지 않아?” 녀석은 이게 무슨 입으로 물방귀 뀌는 소리냐 싶은 표정으로 빤히 날 쳐다보았다. “그렇게 좋으면 누나가 가든가.” 철학과는 어떠냐는 권유에 철학관 차려 뭐하냐는 귀먹은 할머니 말씀은 또 뭐라니. 부모님 말씀 잘 듣는 효자답게 녀석은 법대에 갔고 졸업도 하기 전에 고시 패스를 해서 지금은 대형 로펌에 다니며 잘 먹고 잘 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고소 사건이 난무하는 나라인데다 제 적성에도 딱 들어맞는다니 나날이 계 탄 것처럼 사는 녀석. 연이은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 소식에 미음이 돌 매단 것처럼 묵직해서 놓아보는 어깃장이다. 유서 속 미안하다는 말 대신 연서 속 행복하다는 말 나오게끔 이 천재들, 살릴 방안은 없는 걸까.

▶ 작가_김민정 – 시인. 출판편집자. 1976년 인천 출생. 1999년《문예중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지은 책으로 시집『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등이 있음.

▶ 낭독_ 문형주 – 배우. 연극 '당통의 죽음', '부활', '꿈속의 꿈' 등에 출연.

배달하며

집안에 똑똑한 애가 없다하더라도 이거 익숙한 풍경입니다. 실력은 찬양되고 매력은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죠. 실력이 효율과 부유함을 추구한다면 매력은 존재의 가치와 인성의 성숙, 재미있는 삶의 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 친척 중에 변호사가 있으면 아주 다행으로 여기지만 남의 집 변호사는 욕하면서 삽니다. 좋다는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죠. 뭔가 이상하죠. 그나저나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 자신의 영달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압박과 부담 때문에 참담한 결정 쪽으로 가는 것, 모두 비극입니다. 가장 좋은 인생은 평범한 삶을 노련하게 사는 것 아니겠어요? .

문학집배원 한창훈

▶ 출전_ 『각설하고』(한겨레출판사)

▶ 음악_ THE MIX SIGNATURE COLLECTION / EZ LISTENING MIX4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양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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