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생
- 작성일 201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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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요일이다. 어제 이어서 오늘도 전화벨 한 번 울리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손주들도 오지 않으니, 우리 부부는 완전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좋아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아내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행복에 겨워하며 전전긍긍이다. 토요일엔 우선 마트에 가서 일주일 동안 먹을 식료품이며, 손주들에게 먹일 유제품과 과자류를 샀다. 마트에서 쇼핑이 끝난 다음 아내는 옷가게가 있는 거리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눈요기한 다음, 마음에 드는 옷가지를 골라서 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내를 옷가게가 밀집해 있는 거리에 승용차로 데려다 주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여유의 시간이 감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할까 망설이다가 책을 한 권 보기로 했다. 책장으로 가서 살펴보다가 작은 키와 얇은 몸집으로 다른 책들 사이에 묻히듯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레이몽 라디게의 ‘육체의 악마’였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전체적인 내용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작가가 2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프랑스의 천재 작가라는 것과 16세의 애송이 고등학생이, 약혼자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연상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2, 3년의 짧은 작가 활동 기간에 쓴 네댓 편의 작품으로 어떻게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내가 불어를 안다면 직접 원서를 구해서 읽어 봤으면 좋겠지만, 번역본으로라도 그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내용을 간추려 보는 정도로 설렁설렁 읽어 나가다가, 두 남녀의 운명적 만남 부분에 이르러 속도를 줄이고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소년은, 라 바렌 역에서 그랑지에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오십 세 정도로 나이가 들어, 우아하지 못한 모습과 뭉뚝한 허리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썼다. 그래서 모자를 쓰고 있는 운명의 여인 마르트와 같이 걷게 되었을 때 “어머니를 거의 닮지 않으셨네요.” 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아부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대답했다. “사람들도 종종 그렇게들 말해요. 하지만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가 젊었을 적 사진들을 보여 드리죠. 그걸 보면 전 엄마를 많이 닮았어요.” 그런데 그 대답에 소년은 서글퍼져서, 마르트가 자기 어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부디 그녀를 만나게 되지 않기를 신에게 빌었다고 썼다. 그리고 결국 소년은 마르트와 치명적 사랑에 빠져들었다.
나는 라디게가 아직 소년의 나이였기에 기성세대의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글을 쓸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시인 콕토와 출판인 크라세는 라디게의 첫 소설을 만났을 때 천재성과 함께 서투른 점들도 발견하고, 예술적이면서도 상업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호텔 방에 라디게를 들이밀어 놓고 탐탁하지 않은 초고 부분을 다시 고쳐 쓰게 했다고 한다. 함께 달려들어 직접 뜯어고치지 않고 라디게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힘으로 고쳐 쓰도록 기다려 준 것은 그나마 고마운 배려라고 생각됐다.
당시는 세계 대전으로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불려 나가고 온 국가가 거국적으로 동원된 전시 상황에서 이제 열여섯 풋내기 소년과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젊은 유부녀의 불륜 이야기라면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육체의 악마’라는 작품을 통해서, 긴박한 전시 상황에서도 인간의 기본적 감정을 존중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국민의 개인적 삶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프랑스 국가의 의지를 주변 국가들에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체의 악마’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영원한 세월 속에 세계 문학사에서 주목받는 명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 문물의 마지막 도착점인 전쟁과 그 전쟁에 저항하는 또 다른 모습의 프티부르주아적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라는 상호 모순적 서사 구조를 통하여, 본성에만 충실한 인간의 삶과 그 무상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나는 나이 든 부인의 늙고 뚱뚱한 모습을 보며 실망한 소년 라디게에게 꼭 한 마디 들려주고 싶다. 나무가 연두색 새순과 무성한 푸른 잎도 아름답지만, 곱게 단풍 든 잎사귀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라고. 나무는 고목이 되고 썩어서 흙이 될 때까지 아름답지 않을 때가 없고, 모든 생명체에게는 더욱 필요한 존재가 된다. 나는 요새 할머니가 된 아내의 얼굴을 보며, 처녀 적 모습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흉허물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벗으로, 공기처럼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아내의 그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젊어서 요절한 라디게로서는, 세상을 끝까지 살아 보지 않았으니, 자신의 창으로 보이는 한계 내에서만 세상을 보고 느끼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이 들어, 사랑하는 여인을 벗으로 만나게 되는 때가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시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은 일요일 오후다. 내일이면 또 바쁘고 빡빡한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말이 있고, 인생의 아름다운 황혼기가 있다. 살아보니 인생은 즐겁고, 될 수 있으면 끝까지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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