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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포비아

  • 작성일 2014-06-30
  • 조회수 1,428

 

벌레포비아

 

 

이사 온 지 정확히 석 달 하고도 2주 쯤 지난날이었던가? 습관처럼 뒤척, 자세를 바꾸고 침대가 한 번 삐걱. 이왕 살 거 돈을 좀 더 주더라도 좋은 매트리스를 샀어야 했어.

기침을 내뱉는 침대 스프링의 파동에 덩달아 나도 기침 한 번. 잔뜩 짜증이 난 채로 아주 잠깐 눈을 떴는데, 새카만 어둠 속에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지구가 멸종 되어도 홀로 굳건히 살아남아 이 행성을 책임질 것이라는 미래의 어벤져스 바퀴벌레.

 

어벤져스와의 거리 30cm. 이게 어떻게 침대, 그것도 머리맡까지 침범한걸까. 사람이 바퀴벌레를 더러워 하는 것 이상으로, 바퀴벌레 역시 사람을 더러워 해 닿는 것조차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방이 어두워 내가 사람인 것을 몰랐나, 아니면 나란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나.

거리 20cm. 혹시 내 얼굴에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먹지는 않을까. 주식량이 탄수화물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니, 사람의 각질을 먹는다고 들었던 것도 같고. 아 그러니까 바퀴벌레가 채식이던가, 육식이던가?

거리 10cm. 비명을 지를까? 이 시간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원룸에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면 안 될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바퀴벌레라면 더욱.

거리 5cm. 이제 정말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섣불리 일어섰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당할지 모른다. 거대한 움직임에 놀란 바퀴벌레가 윤기가 흐르는 날개라도 펼치는 날엔 모든 것이 끝이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신속하게, 그러나 39,000원 세일 특가로 구매한 매트리스 스프링의 울림에 신경 쓰며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눈치 빠른 어벤져스는 아주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침대와 벽 틈새, 완벽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침대에서 바퀴벌레와 조우한 이후의 3일은 대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그러나 더디게 흘러갔다. 그즈음의 나는 소머즈가 된 듯 했다. 인간의 청력이 어디까지 발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고, 12평 남짓한 원룸에서 이렇게나 많은 소리가 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으며,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을 얼마나 원망할 수 있는지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깨기를 반복, 3일 째 불면증에 시달리던 나는 일단 침대와 벽 틈새를 테이프로 꼼꼼히 발랐다. 그래봤자 어디로든 나타날 구멍은 넘쳐나겠지만, 그 날 I'll be back을 외치고 사라진 어벤져스의 뒷모습은 그만큼 강렬했다.

 

예상했지만, 그것의 등장은 온전히 내 탓이 되었다. ‘네가 그만큼 지저분하게 살았다는 거야’라는 말에 대응할 수 십 가지의 핑계가 있었지만, 핑계가 핑계가 되는 순간, 그야말로 ‘핑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수긍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건 또 귀찮다. 지저분하게 살지 않았음에도 지저분하게 산 것이 맞다는 인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냥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수식어일 뿐.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통해, 나는 ‘지저분한 사람’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 잡아줄 남자도 없는 ’매력 없는 여자’로 한 단계 등급을 더 낮춰야 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남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6년 동안 연애를 이어온 백수 남자친구의 존재를 엄마는 모른 척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문제로 엄마와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결혼을 조급해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무기한 휴전상태 쯤 될까.

그렇다고 바퀴벌레 한 마리 잡아줄 내 남자친구에게 ‘어벤져스 사태’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얼마 전부터 은근슬쩍 흘리는 ‘결혼 이야기’를 ‘바퀴벌레 한 마리 퇴치권’으로 교환하기엔, 내가 너무 손해다.

어쨌든 ‘성혼률 99.9%’를 자랑하는 결혼정보회사에 올라있는 내 이름 석 자엔, 이제 ‘지저분한 여자’ 스펙이 추가될 판이다. 어쩌다보니 0.1%의 노블레스로 결혼정보회사의 계륵이 되어버린 나는, 때때로 가입비를 내 주는 적금통장 혹는 성혼률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어 지는 듯 했다. 아무래도 성혼률 100%는 너무 과대광고 같잖아. 99.9% 쪽이 훨씬 현실적이지.

그러니까 내 말은, 고정 수입이 없는 30대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5등급 판정을 받은 나는 결코 지저분한 사람도 아니고 매력 없는 여자도 아니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땅땅 큰소리를 쳤지만 나는 ‘벌레 포비아’였다. 나는 새끼손톱만도 못한 크기의 벌레에도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는데, 그 이유를 묻는다면 딱히 뭐라 할 말은 없다. 단순히 징그럽다고 하기에는 어제 먹은 소 곱창과 돼지 막창이 마음에 걸린다.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싫어서’라고 해두는 편이 차라리 그럴싸하다. 아니 그렇다고 내가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건 아니고.

 

종적을 감춰버린, 아니, 어딘가에서 쥐죽은 듯 어둠을 기다리는 그것들을 위해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일단 인터넷에 바퀴벌레를 검색했다. 교대 없는 불침번을 서게 된 내게 시간은 아주 많았다. 1년이면 2만 마리로 불어난다는 바퀴벌레의 번식력만큼이나.

- 일단 집에서 성충의 바퀴벌레를 발견했다면, 집 안 보이지 않는 곳엔 이미 약 800마리의 바퀴벌레들이 존재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날 내 눈 앞에 등장한 어벤져스에겐 약 799마리의 아군이 존재, 이 좁은 방 안 구석구석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 선풍기를 껐다.

- 대체로 집 안에 서식하는 바퀴벌레의 종은 미국바퀴, 독일바퀴, 먹바퀴 세 종류. 각각의 특징이 있으며, 내 집에 어떤 종이 서식하는지를 알아야 퇴치 방법도 효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지만 3초 만에 사라지는 바퀴벌레의 특징을 캐치해 낼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싶다. 미국, 독일. 나는 가 본적도 없는 먼 나라에서 내 방은 꾸역꾸역 참 잘도 찾아왔다.

- 암컷의 경우, 죽음과 동시에 알집을 떨어트려 종족을 보존하며, 알집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을 시, 최대 40-50마리의 새끼 바퀴벌레가 부화하게 되므로 주의.

죽어가면서까지 자식을 부화시키는 모성애에 있어서는 사람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 그래서 결론적으로, 약 2만 마리로 불어날 바퀴벌레를 혼자서 박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해충퇴치업체를 불러 견적 상담을 받아보세요. 전 세XX를 통해 박멸에 성공했어요! 방문하신 기사님이 어찌나 친절하시던지... ...

어쩐지 사진까지 하나하나 올려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싶더라니 업체광고였다. 돈 주고 할 거였으면 지금 내가 뭣 하러 열을 올리고 있겠냐는 말이야.

 

 

‘이게 제 방 하나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니까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런 얘기한 적이 없는데, 요 앞에 마트 가면 바퀴벌레 잡는 약 있으니까 그거 사다가 하세요.’

관리실에 도움을 청해보았다. 바퀴벌레는 하수구를 타고 옆집에서 옆집으로 옮겨 다니기 때문에, 분명 누군가는 나처럼 도움을 청하거나 불만을 표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길래 바퀴벌레가 다 나온단 말이야?!’하는 눈빛이었다.

미국과 독일에서 출발해 하필 이 곳 305호 침대에 도착, 하필 그 때 잠에서 깬 나와 눈이 마주쳤다는게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모든 죄를 ‘지저분한 나’에게 덮어씌우기 위한 일종의 연기일까. 아니 어쩌면 총 45세대가 살고 있는 이 빌라 전체가 나를 속이기 위한 세트, 그러니까 사실 나는 트루먼쇼의 주인공이었던가.

이 대형 세트장에 이사 온 지 석 달이 넘어가는 동안, 나는 같은 층 사람을 겨우 두 번 마주쳤다. 한 명은 얼마 전에 새로 이사 온 ‘개 키우는’ 여자. 밤새도록 개 짖는 소리에 잠을 설쳤던 어느 날, 내게 컴플레인을 받은 관리 아저씨는 나보다도 화가 난 표정으로, ‘새로 이사 온 여자가 몰래 개를 데려와 키우는 모양인데, 내가 전화해서 정리할게요!’ 라고 슈퍼맨처럼 소리 쳤지만, 개 짖는 소리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들리고 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옆집 남자. 남자는 간혹 담배를 피우러 복도로 나오는데, 혼자 사는 것 같으면서도 담배는 꼭 나와서 피우는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했다. 언젠가 또 한 번 마주친다면 물어봐야겠다. 담배는 왜 밖에서 피우는 건지. 그리고, 혹시 집에 바퀴벌레 없어요?

 

한동안 보이지 않던 바퀴벌레는 정확히 일주일 후 여기저기에서 지뢰 터지듯 나타나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엄청난 번식을 통해 일주일 사이 군락을 이룬 것이 분명했다. 찬장을 열면, 그릇을 뒤집으면, 화장실 불을 켜면, 하다못해 빈 밥솥 뚜껑을 열어도 나타났다. 그것들이 나타날 때마다 나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고, 밝은 빛에 놀라 머뭇거리던 바퀴벌레는 내 괴성과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 작은 방에 그 큰 바퀴벌레가 사라질 틈새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더 이상 이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는 정말 2만 마리로 번식, 한 마리뿐인 나를 몰아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모 방역업체에서 사용한다는 ‘효과 짱짱이에요!’의 약을 4만원에 주문하고, 바퀴벌레들이 싫어한다는 ‘계피스프레이’를 위한 재료도 이것저것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돈 쓰지 마세요. 붕산 카스텔라면 박멸할 수 있습니다’의 포스팅을 보고 각종 준비물까지 주문하고 나니 총 7만원이라는 돈이 들었다.

나는 6만원이면 되는 방역업체를 부르지 않고 돈을 아껴, 덫을 손수 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샀다.

 

 

7만원어치의 번거로움은 하루 만에 도착했다. 그 하루 사이에도 나는 다섯 마리의 바퀴벌레와 조우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번거로움은 차라리 반가울 지경이었다.

계피 끓인 물을 스프레이 통에 담아 ‘계피 스프레이’를 제작했고, 바닥이 축축할 정도로 여기저기에 뿌렸다. 바퀴벌레는 계피 향을 싫어하고, 나도 계피 향을 싫어한다. 그렇지만 이정도의 불편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다음, 붕산 카스텔라 제작. 붕산을 먹은 바퀴벌레는 몸속의 수분이 점차 말라 결국 죽는다고 한다. 내가 뿌리는 살충제에 의한 질식사 혹은 던지는 책에 의한 압사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먹고 죽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저들도 이왕이면 맛있는 카스텔라를 먹고 죽는 편이 낫겠지.

그러나 2,200원이나 하는 ‘나가사끼 카스텔라’를 잘게 으깰 땐 조금 억울했다. 첫 째, 나는 내 밥을 만드는 것조차 귀찮아하는데, 왜 바퀴벌레 밥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귀찮은 일을 하고 있는가. 둘 째, 나는 500원짜리 카스텔라도 사 먹지 않는데, 바퀴벌레에게 먹일 카스텔라는 왜 2,200원이나 할까. 셋 째, made in korea가 박힌 ‘나가사끼 카스텔라’는 대체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바퀴벌레 체내의 수분을 바짝 마르게 할 붕산가루와 잘게 부서진 카스텔라, 그리고 설탕을 1:1:1 비율로 잘 섞은 후, 틈새 구석구석에 뿌려 두었다. 번거롭긴 해도 생각보다 수월한 작업이었다. 걸 그룹 댄스를 흉내 내며 만들다가 붕산 섞인 카스텔라를 집어먹을 뻔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웠다. 나는 남겨둔 카스텔라를 먹으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나저나 이 카스텔라 참 맛있는데, 조만간 더 주문해야겠다.

 

 

기적적인 박멸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것들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등장 이벤트를 멈추지 않았다. 10일이라는 시간을 둔 것 치고 영 차도를 보이지 않아 나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제 나는 (아직까지 육안으로 효과가 증명된 바 없는) 계피 스프레이를 습관처럼 뿌려댔다. 간혹 계피 향에 머리가 아플 지경에 이르면, 바퀴벌레보다 내가 먼저 이 집을 나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퀴벌레 체내의 수분이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최대 한 달까지는 두고 보아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앞으로 20일을 더 어떻게 버텨야 하는가’ 하는 좌절감마저 들었다.

월세도 내지 않는 불청객을 위해 나의 모든 시간을 할애, 그 덕에 얻은 것은 밀린 일과 화가 난 남자친구였다. 어느 쪽을 먼저 해결하는게 더 빠를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화를 풀어주는게 더 빠를 것 같지는 않지만, 이왕 밀린 일은 좀 더 미뤄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남자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왠지 마음이 편해진 나는 밀린 일을 시작했다. 원치 않는 800마리의 군식구가 늘었으니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지.

 

두어 시간 쯤 지났을까, 모니터 속 오자와 탈자가 정자와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한 그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택배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거의 늘 안에 계시는 5등급의 프리랜서는 어젯밤 추가로 주문한 나가사끼 카스텔라 한 상자를 바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던 옆집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물어볼까.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남자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혹시 집에 바퀴벌레 없어요?’

남자의 어정쩡한 목례와 동시에 나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두 번 만난 이웃사촌 사이에 할 질문은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피를 나눈 사촌 간에도 딱히 해야 할 질문 순서는 없었던 것 같다. 남자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였다. 나는 비흡연자임에도 문득 저 남자의 담배가 맛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글쎄요. 자주는 아니고 얼마 전에 한 두 마리 본 적은 있어요.’

나는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바퀴벌레, 그리고 관리 아저씨에 함께 대항해줄 지원군을 얻은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지저분한 여자가 아님을 증명해줄 증인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품 안에는 나가사끼 카스텔라도 있겠다, 바퀴벌레 대항군도 얻었겠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남자와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최근에 바퀴벌레가 나타났는데 관리 아저씨가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 하더라는 이야기, 얼마 전 남자의 집에 나타났다는 그 바퀴벌레가 사실은 그 날 내 침대에 찾아왔던 ‘어벤져스’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남자는, 담배 한 가치를 다 피울 때 즈음에야 미소를 띠고 내 이야기에 동참해 주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내가 이렇게나 말이 많은 여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6년이나 사귄 남자친구와는 사실상 말이 없어도 모든 것이 통하는 사이니까.

별 말이 없이도 통하는 내 남자친구는 그 순간 말도 없이 나를 찾아왔고, 딱히 뭐라고 변명하기도 우스운 복도의 두 남녀와 만났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친구 덕에 옆집 남자와의 이야기는 어정쩡하게 끝을 내야 했다. 나는 못내 아쉬웠고, 옆집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 담배는 왜 밖에서 피우는지 못 물어봤네.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상현이는 자연스럽게 내 방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내가 한 살이라도 더 어렸거나 우리가 1년이라도 덜 사귄 사이였다면 나는 아마 지금쯤 변명을 하고 있었겠지만, 우리 사이에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연 일이야 연라도 어이’

카스텔라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던 터라 발음이 심하게 뭉개졌다.

‘계피로 뭐 했어? 너 계피 싫어하잖아’

나는 상현이의 질문에 그제야 계피 향을 느꼈다. 계피향이 지독하다고 해놓고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요 며칠 좀 바빴어 미안. 아까 전화 안 받던데?’

나는 ‘아까 전화 했었다’는 말을 꺼내 면죄부를 만들었고, 상현이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용서를 구하기엔 너무 별 것 아닌 일이고, 화를 내기엔 더욱 별 것 아닌 일이니까.

‘옆집 남자랑은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진 거야?’

평소 질투랑은 거리가 먼 남자가 오늘따라 왜 이런 질문을 할까 귀엽기도 하고, 저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려면 어벤져스와의 만남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귀찮기도 해서, ‘친해보였어?’ 하고 장난스럽게 반문했다.

상현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카스텔라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맛있네.

카스텔라를 집는 상현이의 긴 손가락과 카스텔라 조각을 묻힌 입술을 망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맞췄다. 그리고 상현이는 그런 나를 당연한 듯 받아주었다. 우리는 6년의 시간만큼이나 당연하고 익숙한 키스를 했다. 키스를 끝낸 상현이는 내가 숨을 고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나는 프러포즈를 받은 여자들이 어떤 기분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프러포즈를 마친 남자가 바라는 여자의 반응은 결국 눈물이겠지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그리고 분명한 건, 프러포즈에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 건 결국 완벽한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 이미 아이까지 있는 친구들의 경험에 의하면 그랬다.

‘어차피 결혼할 거 서로 뻔히 아는 사이에 프러포즈 받았다고 우는 애들이 오히려 가식적인거 아냐?’

가식적이지 못한 나는 당연히 울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할 거 뻔히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상현이와의 결혼을 생각한 적 없는 것도 아니어서. 다만 대답을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상현이에게 이렇다 할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것이 미안했다.

‘상현이랑은 아직도 만나니? 엄마 분명히 말했어, 둘이 결혼은 안 된다고! 걔 멀쩡한 회사 그만두고 지금 하는 게 대체 뭐니. 그 나이가 되도록 모아 놓은 돈도 없고, 아직도 백수라는게 말이나 되니?! 막말로 월급 언제 끊길지 모르는 프리랜서가 백수랑 결혼해서 둘이 어떻게 먹고 살래? 다 널 위해서 하는 얘기니까 말 들어, 결혼은 현실이야. ’

나는 이따금씩 엄마가 저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 딸은 반드시 5등급으로 판정해주십시오’ 하고 결혼업체에 따로 신청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엄마의 이야기가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나 역시 서른이라는 나이를 괜히 먹은 것은 아니었다. 결혼은 현실! 명언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저 문장 속에, ‘현실’이란건 대체 뭘까 생각했다.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이라면 지금은 현실이 아니고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지만 그러한 이유들을 상현이에게 말하자니 속물이 된 것 같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속물인데 속물로 보이기는 싫어서, 속물인 엄마를 속물이라고 욕하며 뒤로 숨는 아이러니한 아이러니.

나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핑계를 대며 말을 돌려 볼 요량이었지만 상현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오늘은 반드시 Yes라는 대답을 듣고 가겠다’는 다짐을 눈썹에 그려 넣은 듯 했다. 가벼운 농담이나 어제 본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로는 화제를 돌릴 수 없을 것 같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벤져스 이야기를 꺼냈다.

 

‘말 돌리지 말고.’

‘말 돌리는게 아니라...’

‘결혼이야기에 바퀴벌레로 답하는게 말 돌리는게 아니고 뭐야?!’

‘그런게 아니라, 요즘 내가 그거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데.’

‘결혼 얘기만 나오면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야. 너 나랑 결혼할 생각은 있는 거야?’

 

정말 타이밍도 기막히게, 옷장 틈새로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정말 말을 돌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자란 바퀴벌레가 너무 놀라워서, 번식력만 좋은게 아니라 성장 속도도 어마어마하구나 싶어서.

상현이의 화난 표정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나는 잠시 바퀴벌레를 원망했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길고 지루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이제는 차라리 공격에 가까워진 상현이의 추궁에, 나는 ‘솔’음의 짜증에 가까운 변명으로 대응했다. 어차피 결론도 해결책도 없는 이 시간 낭비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제발 이제 그만하자’고 말했다. 상현이는 나의 말에 더욱 화를 냈고, 나는 결국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나라고 이러고 싶겠어? 나도 안정된 직장 가진 남자랑 결혼해서 편하게 살고 싶어! 넌 날 책임질 수 없어!’

 

 

설치해 둔 붕산 카스텔라의 양은 조금도 줄지 않고 있었다. 비율을 잘못 섞었거나, 녀석들이 다니는 길목을 잘못 캐치한 탓일까. 그리고 녀석들은 이제 계피 스프레이에도 익숙해진 것 같았다. 내가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계피 향에 익숙해진 바퀴벌레들은, 이제 자연스럽게 계피 가루 위를 넘나들 정도가 되었다. 그 사이 상현이에게는 ‘시간을 좀 갖자’는 연락이 왔고, 그동안 잘 숨겨온 ‘속물’을 들켜버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현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엄마는 기뻐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쓰레기 봉지를 묶었다. 일주일동안 모아둔 쓰레기 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강아지 한 마리가 다가왔다. 혹시 밤새 짖어 내 잠을 방해하던 강아지가 너였니? 좀 더 큰 ‘개’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반 강아지보다도 작은 토이종인지 생각보다 작은 크기가 당혹스러웠다. 뒤이어 나타난 여자는 제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강아지를 능숙하게 안아들었다. 강아지는 여자의 품 안에서 ‘앙앙!’하고 짖었고, 여자는 ‘쉿’이라고 강아지를 타일렀다.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는, 계속해서 짖어대는 강아지에 무안했는지 ‘죄송해요.’하고 내게 사과했다. 나는 분명 저 작은 강아지 덕에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먼저 사과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표할만큼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새하얀 강아지가 생각보다 귀엽기도 했고.

‘강아지 귀엽네요.’

제 강아지에 대한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자는 내가 분리수거를 하는 내내 곁에서 쉴 새 없이 재잘댔다. 주변에 대형 마트는 어디에 있는지, 아메리카노가 맛있는 카페는 어디에 있는지. 서울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친구가 없다던 여자는, 강아지가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하며 복슬복슬한 강아지 털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처음 서울로 올라왔던 게 10년 전이던가? 어쩐지 마음이 풀어진 나는 여자의 질문에 이것저것 대답해주며 긴 대화를 나눴다. 무엇보다 여자가 마음에 들었던 점은, 그녀 역시 나처럼 바퀴벌레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바퀴벌레 이야기에 우리는 한 사람처럼 열을 냈고, 당연한 수순처럼 관리실로 찾아갔다.

‘우리는 매달 50만원의 월세와 7만원이라는 관리비를 내는데, 당연히 바퀴벌레 문제 해결에 대해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두 여자가 당당히 ‘바퀴벌레 퇴치’를 요구하자 벙찐 표정이 된 관리 아저씨는, ‘내일 주인이랑 통화해보겠다’며 말을 얼버무렸다.

 

여자와 나는 전쟁에서 승리한 전사처럼 위풍당당하게 웃었다.

‘저 아저씨 좀 재수 없었는데, 언니 진짜 짱이였어요!’

인테리어를 참고하겠다며 그대로 내 방으로 따라 들어온 여자는, ‘재수 없는 관리 아저씨’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글쎄 저번에는 강아지를 왜 몰래 키우느냐고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거예요! 아니 이 작은 강아지가 시끄러워봐야 얼마나 시끄럽겠어요. 안 그래요?’

나는 그 ‘얼마나 시끄러움’에 대한 신고자가 나라는 것을 차마 밝히지 못한 채, 그녀의 말에 ‘그러게’하고 웃었다.

지나치게 생기가 넘치는 20대의 여자는 두 시간을 쉬지 않고 재잘댔다. ‘뭉키’라고 부르는 강아지는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의 생일 선물이었다고 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강아지는 차마 보낼 수 없어 혼자 기르게 되었다고.

그녀는 그녀의 전 남자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남자의 전 여자 친구는 누구였고 어떤 일을 했었는지, 그 둘이 잠자리가 맞지 않아 헤어지게 되었다는 은밀한 이야기까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나는 오늘 처음 인사한 그녀로부터,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이건 확실히 현실은 아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생기가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30대가 되어버린 나 역시 지난 시간 저렇게 생기 있었겠지. 결혼에 다가설수록, 그러니까 ‘현실’에 한 발 가까워질수록 결국 생기를 잃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몰라요, 앞으로 종종 놀러올게요. 언니’

혼자서 한참을 재잘대던 여자는 ‘강아지 밥 먹일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섰다. 그녀가 마신 음료수 잔을 치우는 동안, 그녀는 ‘뭉키~’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강아지를 찾았다.

뒤이어 화장실로부터 들린 그녀의 비명소리에, ‘바퀴벌레가 나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은 생각을 했고, 바퀴벌레가 대수롭지 않아진 내 스스로에 대견해했다. 눈물범벅이 되어 축 쳐진 뭉키를 안고 나오는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녀가 떠난 내 방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뭉키는 화장실에 설치했던 붕산 카스텔라를 먹었다. 정확히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나가사끼 카스텔라를 먹었겠지만... ‘붕산이 동물에 치명적이기는 하나, 신속하게 처치한다면 죽지는 않는다’는 글을 읽었지만, 토이종인 뭉키에게도 괜찮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나는 화장실 여기저기에 뱉어 놓은 뭉키의 토사물을 닦으며, ‘언니, 이 카스텔라 진짜 맛있어요.’하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나뿐인 가족을 방치한 그녀의 잘못인지, 붕산 카스텔라를 설치했다고 미리 말하지 않은 내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카스텔라를 진작 다 먹어치우지 않은 바퀴벌레들의 탓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누구에게도 분을 표하지 못하고 내 방을 나서던 그녀는, 울음이 범벅된 목소리로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나서는 것이 맞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남자친구와의 재회를 방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결국 그만 두었다.

그 즈음 나는 상현이가 생각났지만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 사실 모든 결정권은 나에게 있었고, 망설임 없이 ‘네 손을 잡고 현실로 뛰어들게!’라고 결정할 자신은 없었기에.

화장실 청소를 마친 나는, 내 핸드폰에 일방적으로 저장된 그녀의 번호에 문자를 적어 내려갔다. 뭉키는 괜찮은지... 분명 사과를 해야겠는데, 나는 대체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 걸까 하고 고민했다. 어벤져스의 등장에 대해? 붕산의 효능 효과에 대해?

한창 문자를 적고 있는데, 상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방적인 이별 통보였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프러포즈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기다렸다는 듯 흘렀다. 나는 남자들이 여자의 눈물을 원한다면, 프러포즈가 아닌 이별을 선택하는게 빠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적어 놓은 글을 줄줄 읽어 내려가는 듯한 상현이의 일방적인 통보에, 대체 내가 뭐라고 해야 했을까. 제 할 말을 마친 상현이는 내게 ‘최후의 변론’을 하라 말했고, 나는 그저 ‘잘 지내’라고 말했다. 그 뿐이었다. 우리의 6년의 시간은 ‘잘 지내’는 걸로 끝이 났다.

 

울고, 울고, 몸속의 모든 수분이 마를 것처럼 울다가, 문득 이 공허한 울음소리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눈물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배가 고팠다. 봐, 이게 현실이지.

먹다 남은 카스텔라를 꺼내오는데, 벽을 기어가는 바퀴벌레 한 마리. 익숙해진 건지 지쳐버린 건지 나는 전처럼 괴성을 지르지도, 살충제를 찾지도 않았다. 그저 녀석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잡지 않을 테니까 어디, 가고 싶은 대로 가 봐.

언제나처럼 틈새 속으로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빗나갔다. 한참을 기어가던 녀석은 움직이는 속도가 크게 줄어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배를 보인 채 한참을 발버둥 치던 녀석은 점차 그 움직임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체내의 수분이 모두 마른 것이다.

 

성공했네.

 

바짝 마른 바퀴벌레 시체를 보며 카스텔라 한 조각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데, 죽은 바퀴벌레 곁으로 또 한 마리의 어벤져스가 지나간다. 동료를 지나, 설치해 둔 붕산 카스텔라로 용감하게. 녀석이 맛있게 붕산 카스텔라를 먹는 동안, 나는 조용히 마지막 카스텔라 한 조각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