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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구멍가게—중독자를 위로함」

  • 작성일 2014-08-12


이영광, 「구멍가게 - 중독자를 위로함」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곳,
토해도 나오지 않는 빈 것들과
끝장을 봐버리자고
간밤엔 구멍이 되어 사방으로 끓어넘쳤다


이 동네 아침엔 아직 막히지 않은 샘이 하나 있지
목말라 지폐 몇장 묻은 손을 집어넣으면
생수와 생약과 반짝이는 동전들을 게워주지
차고 시원한 구멍들을 팔지
작은 나뭇잎을 식혀주는 큰 나뭇잎처럼


저녁이 오면, 피가 마른다
구멍가게는 또 몸을 덜덜 떠는 기쁨들에게 병을,
끝장을 팔려고 불을 켠다
작은 나무들을 말려 죽이는 큰 나무처럼




▶ 시·낭송_ 이영광 - 이영광(1965~ )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하며 등단했다.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나무는 간다』 등이 있다.



배달하며

달동네에는 중독자들이 있고, 또 구멍가게도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죠. 제 안에 ‘구멍’들을 가진 사람들이 간밤에 구멍이 되어 사방으로 끓어 넘치다가 아침녘에 구멍가게로 들이닥치죠. 구멍가게는 이미 볼 장 다 본 사람들이 하루를 연명할 수 있도록 “생수와 생약”을 게워주고, “차고 시원한 구멍들”을 파니까요. 구멍가게는 끝장을 보지 못하고 다만 끓어 넘치기만 하는 중독자들의 신전(神殿)이예요. 서른 몇 해 전 부모님들이 원서동 골목에서 작은 동네 슈퍼를 하며 채송화 씨방 같은 가난한 살림을 꾸리던 시절이 있었지요.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그 생업의 터전! 그 구멍가게를 작파한 뒤에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꽤 오래 고단한 삶을 꾸리느라 고생하셨죠. 저녁이 오면 피가 마른다는 느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아요. 피가 마르는 그 시각, 사방에 어둠이 내리면 세상의 모든 구멍가게들은 “몸을 덜덜 떠는 기쁨들”에게 병을 팔고 끝장을 팔려고, 불을 켭니다.



문학집배원 장석주


▶ 출전_『나무는 간다』(창비)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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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좋은 시 감사합니다

    • 2014-09-14 17:15:1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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