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에케 호모
- 작성일 201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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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일어난 건 지난 해 3월 중순, 피토라카의 꽃씨가 훈풍을 타고 안착해 싹틔울 준비를 막 마친 그런 시기였다. 스페인 북동부 사라고사 근처 보르하 시의 산투아리오 미제리코르디아 성당의 마테오 사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이 사는 곳이기도 한 이 성당의 이백년도 더 된 두터운 적송문의 육중한 손잡이를 힘겹게 잡아 열고 기지개를 켰다. 식 전이기도 했지만 하루 이틀 전부터 일어설 때 약간 어지럽고 가볍게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 걱정 돼 다음 달, 조카인 알레한드로가 그의 어머니를 보러 오는 날, 차를 얻어 타고 시내로 나가 진료를 받아 볼까 하는 참이었다.
성당 입구를 정돈하기 위해 문 옆 안쪽으로 안보이게 숨겨둔 싸리비를 집어 들었다. 성당 내부로 들어오는 입구의 첫 번째 기둥의 옆 벽부분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사제는 두어 번 쓸던 빗자루를 들고 벽화 앞으로 향하였다. 사제는 여든을 앞두고 있었기에 일찌감치 노안이 왔지만 워낙 신성한 벽화였으므로, 멀리 있어 그림이 뭉개져 보일지라도 늘 보아왔던 그런 느낌의 뭉개짐이 아니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사제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트리고, 늘어진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그날 꺼내 입은 진솔 사제복의 단추를 쥐어뜯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그 그림 앞에서는 그런 행동이 오히려 그의 믿음을 증명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제는 자신의 기립성 저혈압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감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증상은 깨끗이 없어졌다고 덧붙이면서.
산투아리오 미제리코르디아 성당에는 프레스코 기법의 벽화가 입구의 첫 기둥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벽화는 19세기 화가 엘리아스 가르시아 마르티네스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에케 호모'. 자주색 망토를 입고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가 슬픈 눈으로 시야 각 이상, 즉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전신을 담은 그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그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벽화이기에 액자나 고정 틀이 없는 이 그림의 바탕은 두루마리의 모양이었다. 물론 이것도 그려 넣은 것이었다.
가시면류관을 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본디오 빌라도와 유대인들에게 심판 받을 때를 화가가 상상하여 그려 넣은 것이었다. 이 심판 전에 예수는 채찍 형을 얻도받았다. 채찍 형은 긴 가죽 조각 끝에 방울 모양의 납덩이나 금속 조각, 뼈 등이 달려 있는 플라겔룸으로 병사가 반복해서 죄수의 등을 난타하도록 하는 극형이었다. 때로는 죄수의 등뼈가 드러나면서 심한 출혈과 탈진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수는 이 채찍 형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에서 병사들에 둘러 싸여 있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19장 1절부터 7절에 따르면, 본디오 빌라도는 휘장 뒤의 이 청년예수를 처형할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했다고 몰려온 유대인들에게 공표하였다. 그러면서 예수를 끌고 나와, -내가 말한 사람이- '자, 이 사람이오.'라고 이야기하였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 이 사람이오.' 라는 해석과 '이 사람을 보라.'라는 해석이었다. 앞서의 해석이 '내가 말한 사람이 바로 이이요', 라는 지시의 의미가 담긴 문장이라면, 뒤의 문장은 '그는 신이 아닌, 한낱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다'는, 예수를 인격화함으로 죄의 근거가 없음을 뒷받침하려는 빌라도의 께름칙한 면피용 발언일 수 있었다. 앞의 문장은 '이'에 강조가, 뒤의 문장은 '인간'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었다. 원문에 따르면, 이 말은 첫 번 째의 지시적 의미가 강한데, 어찌된 일인지 '에케 호모'하면 '이 사람을 보라'는 의미들로 받아들이고 원 뜻보다 더한 해석을 덧붙이고들 했다. 그러나 두 번 째 뜻이 되려면 빌라도가 '보라,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한 뒤 휴지기가 있어야 한다. 그 말에 울림이 있으려면, 그 울림을 느낄 잠시 멈춤의 동작이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끌고 나오자마자, 빌라도의 이 말을 듣자마자 저들의 율법에 어긋난 행동, 즉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예수는 끌려가게 된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에케 호모’가 두 번째의 뜻으로 쓰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만약 두 번째 해석으로 쓰인 것이 맞다면, 이 문장은 기독인들에게 더한 울림을 주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잠도 자지 않고 온 몸에 땀을 흘리며 기도하매 ‘주여, 이 잔을 제게서 돌리시옵소서. 그러나 저의 뜻대로 마시고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는 말을 함으로 인간 육체에 대한 연약함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성경 구절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한낱 인간의 육신으로 이 땅에 내려와 사람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거룩함과 죄책감, 숭고함을 기독인들에게 불어 넣어 주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을 보라'는 문장도 이와 비슷한 정서를 기독인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런 일화가 있었다. 독일 헤른후트(하나님의 피난처)에서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진젠도르프 백작의 이야기다. 진첸도르프는 당시 젊은 귀족들의 '통과의례' 격이던 그랜드 투어를 한 지 약 1주째인 1719년 5월 20일, 뒤셀도르프의 한 미술관에 들렀다. 투어 중 5번째로 방문한 미술관이었다. 문지기가 깊숙이 절을 하자 친첸도르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는 자신의 새 가정교사 리더러 및 이복형 프레데릭과 함께였다. 그곳에는 진젠도르프의 시선을 잡아끄는 그림이 있었다.
일부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프레데릭이 진젠도르프에게 다가와 "나머지도 보지 않을래?, 넌 여기서 15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어."라고 일러 주자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고 읊조리며 비로소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그 순간은 바로 그가 평생 십자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한 순간이었다. 그림에는 아래와 같은 라틴어도 덧 붙여 있었다.
Ego pro te haec passus sum
Tu vero quid fecisti pro me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
고결한 영혼과 양심을 지닌 크리스천이라면 평생을 헌신하게 만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도발적인 문장이었다.
그는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지만, 당신을 위해 행한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당신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겠습니다."
진젠도르프가 본 그림의 제목은 신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지상으로 내려와 고통 받는 모습을 그린, 앞서의 의미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도메니코 페티의 '에케 호모'였던 것이다.
다시 성당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팔순의 사제는 그 벽화를 바라보며 짓무른 두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벽화는 이백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 벽면과 더불어 칠했던 부분이 조금씩 벗겨져나가는 통에, 그림의 테두리와 상반신은 점점이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복원가도 복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지만, 성당 자체가 워낙 오래 된 건물이라 곳곳에서 비가 조금씩 새고 있었고, 복원되어야 할 그림들, 수리되어야 할 기구들로 수리 목록은 수십 년 전부터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에케 호모는 그 리스트 중 스물 두 번 째에 해당하는 사안이었다.
사제가 본 '에케 호모'라는 제목을 가진 벽화의 그림은 '훼손'되어 있었다. 한 사람의 예수가 아닌, 원숭이의 형상으로. 에케 호모가 아닌, 에케 모노(Ecce Mon,이 원숭이를 보라)의 모습으로. 연약함과 슬픔이 뒤 섞인 눈빛은 공허한 눈빛으로, 얼굴색은 까무잡잡하였으며 콧대도 없는 코에 콧구멍은 들려 있고, 가시면류관이 아닌, 새둥우리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제는 생각했다. 이것은 반가톨릭교 단체에서 저지른 만행임에 틀림없다고. 다윈의 인류 진화론을 믿는 자들이 이런 행태를 저지른 것이라고. 자주색 망토에, 가시면류관을 쓴 원숭이의 얼굴. 원숭이의 동공은 까만 바탕에 텅 빈 것 같은 하얀 점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사제는 털썩 주저앉았고, 식은땀을 닦아 내었으며 기둥을 잡고 일어나 성당의 종을 치러 가려다 사제복의 기다란 앞섶을 밟고 굴러 넘어졌다. 통증은 느끼지 못했다. 사제는 노구를 이끌고 뛰어가 미친 듯이 종을 울렸다. 성당의 종탑위에 앉아 잠시 쉼을 청하던 비둘기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성직자들과 종지기, 성당에 딸린 부속 식구들, 마을 유지들이 불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사람들은 대성전에 들어올 때마다 벽화를 한번 보고 성모상 앞에 두 번의 성호를 통한 기도 후, 미사를 드릴 때처럼 늘 앉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마을 제 2유지인 안토니오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 곳에는 종지기 마리오가 이미 앉아 있었는데, 안토니오가 콧수염을 한번 씰룩거리자 마리오는 마지못해 일어나 오늘은 성스런 주일이 아니라고 구시렁거리며 뒷자리로 향했다.
마테오 사제는 '이것은 우리 성당에 대한 모욕이고 가톨릭에 대한 도전'이라고 일갈하며 덥수룩한 털로 덮인 오른손을 들어 원숭이 벽화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웅성댔다. 집집마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될 것들 까지 서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누가 저런 짓을 했단 말인가. 이 순박한 시골 마을 사람들은 용의자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안토니오가 모자를 들어 발언권을 청했다.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일어나 헛기침을 한번 하고 무엇인가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한 여인이 성당에 들어선 것은. 초대받지 않은 평신도 히메네스였다. 히메네스는 조용히 걸어 들어와 성모상 앞에 성호를 그은 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묵주를 잡은 두 손으로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벽화를 망친 것은 바로 저여요'라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제는 목 뒷덜미에 난 땀을 가제수건으로 닦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뭐라고 했나요, 히메네스?"
"오 주여, 벽화를 망친 것은 바로 세실리아 히메네스 저입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성호를 그었다.
주일 미사를 앞두고, 백여 명의 신도가 성당으로 모여 들었다. 평소의 장엄한 파이프오르간 연주대신 피아노가 연주되고 있었다. 벽화를 보면 웃지 않을 수 없기에 신도들은 입술을 앙 다물어야 했다. 히메네스는 제대 바로 앞 장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지난 며칠간은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했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공개사과를 하겠다고 사제에게 요청했다. 벽화를 훼손한 행동에 대해서는 상위 교구에 심사가 의뢰된 상태였다.
미사 시작 전 사제는 작은 종을 쳐서 신도들의 집중을 구했다.
" 우리 성당의 벽화가 훼손되어 신도들의 심려가 큰 줄로 압니다. 안타깝게도 이 훼손은 어느 신도의 무지에서 비롯된 단순한 실수입니다. 그 분이 조용히 저에게만 이 사실을 고했다면 이렇게 일파만파 소문이 나지 않았을 텐데, 일부 신도들에게 먼저 말씀을 하셨고, 순전한 믿음에서 비롯한 어처구니없는 실수이나, 마을의 귀한 벽화를 훼손한 것에 대해 공개사과를 하고 싶다고 이렇게 요청하셨습니다. " 사제는 이렇게 말을 맺은 뒤 히메네스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앞으로 쏠렸다. 히메네스는 이때에, 벽화에 그려진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제가 히메네스를 바라보는 눈길은 '에케 호모'라는 말의 첫 번 째 의미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성당 청소 봉사를 하면서 벽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어요. 제가 처음 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때가 육십년 전인데, 그 때만 해도 벽화는 괜찮았었답니다. 언제고 마을에 한 달 넘게 비가 내린 적이 있었는데, 아, 그때 제 아들 아드리안이 말을 못하게 되던 해여서 기억이 나요. 아마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이었을 거예요. 그 습한 장마기간에 이 벽화가 급격하게 훼손되는 것이 보였었어요. 그 뒤 한 해 한 해 점점 더 지워져가는 그림을 보며 마음이 참 아팠지요. 제 잘못입니다. 그래도 그림은 이제 어느 정도 그릴 수 있다고 자만한 제 탓이어요. 여러분들에게 정말 죄송하다는 말 밖에 더 드릴 것이 없네요……." 히메네스는 더듬더듬 사과를 하였고, 눈물을 흘렸고, 깊이 그리고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액체호모의 두 번째 의미로써 히메네스를 동정했다.
히메네스는 루게릭병에 걸린 아들 아드리안의 병간호를 반평생에 걸쳐 하고 있었고, 이런 그녀의 가정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누구보다 믿음이 깊다고 평가받는 이들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취미로 그림을 그렸는데, 아마추어 중에서도 꽤 실력이 있는 편에 속했다. 문제는 그림의 종류였다. 벽화는 프레스코 화였는데 이 프레스코 화는 벽 위의 석고가 마르기전에 수정도 없이 빠르게 그려나가야 하는 그림이었다. 이런 이해 없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이 채색을 해 넣었기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그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히메네스의 어깨에 동무를 하고 그녀를 자리로 이끌어 앉힌 것은 이웃의 가브리엘라였다. 미사는 시작되었지만 히메네스는 예배시간 내내 눈물을 훔쳐 내었다.
마르티네스의 손녀 가르시아가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사순절 마지막 날, 자신의 저택에서 열릴 이번 부활절 만찬회에 전시할 작품의 목록을 집사와 상의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집사의 아내이면서 자신의 제 1비서이기도 한 올리비아로부터 이 사건을 전해 들었다. 가르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집사에게 당장 산투아리오 미제리코르디 성당 사제에게 전화할 것을 명령하였다.
불쌍한 팔순의 사제가 가르시아로부터 어떠한 수모를 당했는지는 종지기 마리오가 마을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는데, 가르시아는 당장 복원해 놓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벽화가 그려진 성당의 기둥 부분을 떼어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이었다. 사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림이 훼손의 차원이 아닌,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되었다고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가르시아는 비행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에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고자 하나 가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사제가 시원스럽게 복원약속을 하지 않는 것도 미심쩍었다.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몇 시간 뒤, 이 복원 시도 작을 자신의 서재에서 확인하고 반백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히스테리 컬했던 젊은 날의 모습을 재연하게 된다. 실로 오랜만의 모습이라 집사는 당황하며 한숨을 쉬었다. 가르시아 입장에서는 복원전문가가 실수 했다고 해도 화가 날 판에, 평신도가 작품 자체를 복원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던 차였는데 올리비아가 노트북을 들고 와 이번에는 원작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에케 호모를 가르시아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히메네스의 공개사과 이후, 사건은 마을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도시로 알려 지게 되었다. 명백한 반달리즘이었지만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 믿음에서 비롯된 행동이 예상하지 못한 훼손을 가져온 것, 그 결과물이 우스꽝스럽다는 점이 사람들의 관심과 실소, 뒷 담화를 양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지역신문에 이 사건이 기사로 실리게 되었고, 지역신문의 웹페이지에, 그 웹페이지에서 이웃 국가의 방송국 웹페이지, 바다 건너 여러 국가의 해외 토픽란 순으로 규모를 키워가며 보도되기 시작했다. 히메네스에 대한 징계의 수위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훼손 도를 알아보기 위해 성당 자체적으로 복원 가를 물색 중이었다.
에케 호모와 에케 모노, 그리고 히메네스의 얼굴이 사진에 실려 인터넷을 떠돌았고, 성당에는 이 그림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경꾼들은 많아져 성당 측에서는 소액의 입장료를 받아 관람을 통제하고자 했다. 종지기 마리오는 성당 입구 주위로 통행을 제한 할 수 있는 가드라인을 만들고, 오래된 테이블을 가져와 성당 입구 옆에 놓았다. 부엌에서 냅킨 담는 용도로 쓰이던 물푸레 바구니도 함께 들고 왔다.
성당으로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웹상에서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다른 나라의 네티즌들이 이 에케 모노를 패러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뭉크의 ‘절규’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대신 히메네스가 그린 얼굴을 집어넣었다. 패러디 물은 그림으로 사건을 알렸고, 이를 접한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히메네스의 안타까운 사연도 알려지며 그녀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일었다.
스페인의 항공사인 라이언 에어 사는 이 패러디 물을 단순히 지나치지 않았다. 마케팅적 관점으로 보아 이용가치를 계산해 보았다. 히메네스에게 연락하여 자사의 광고에 이 그림을 쓰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히메네스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케팅 이사의 언변에 넘어가 그만 승낙하고 말았다. 이사는 소정의 저작권료를 지급하겠다고도 약속했다.
그리하여 광고는 탄생하였다. '사라고사의 작은 마을 보르하, 쉼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지금 라이언 에어를 이용해 그 곳에 다녀오세요!' 라는 평범한 문구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둘 사이에 작은 아이 셋이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있었고, 아이의 작은 키 위로 에케 모노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사진이 지면광고와 인터넷 배너 광고를 장식하였다.
그리고 보름 뒤 라이언 에어 사는 후속광고를 만들었다. '아직 안 가보셨다고요? 이만명이 라이언에어를 이용하여 이곳에 다녀왔습니다.' 라는 문구로, 첫 번째 광고의 사진 속 가족 외에 다른 가족들이 추가되어 그림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담긴 광고를 게재하였다.
항공사의 광고대로 보르하 시는 나날이 관람객이 늘어 일평균 천여 명이 다녀가는 관광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소액의 입장료가 보름 사이 수천유로에 달했다. 보르하 시 근처의 와이너리 주인이었던 곤쌀로의 아들 또한 이 대목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와인 병에 히메네스의 에케 모노 그림을 라벨로 제작해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처 도자기 공방에서는 머그컵으로 에케 모노를 인화하여 기획 상품으로 내놓았다. 곧이어 웰컴 보르하라고 새겨진 티셔츠에 에케 모노의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도 판매되었다. 성당 근처 상점들도, 식당도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벽화의 훼손을 두고 마을의 회관에서 위원회가 열렸다. 사실 마르티네스의 '에케 호모'는 스페인 정부의 관리를 받는 문화재이기도 하였기에 사후 처리 책임문제가 확대되어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정부의 문화재 관리직원 두 명과 지역 미술작품 복원가, 성당의 사제와 교구장, 피해자인 가르시아와 그 비서 등이 참석한 ‘에케 호모 사후 대책 임시 위원회’였다.
사제 마테오가 말문을 열었다.
“제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답니다. 솔직히 에케 호모는 지워져가고 있는 그림이었어요, 이곳의 성당과 이 마을이 그렇듯이. 사람들은 점차 도시로 떠나갔거든요. 그런데 히메네스의 실수가 많은 것을 돌이켰습니다. 에케 호모는 에케 모노와 더불어 유명해졌어요. 마르티네스의 삶과 작품도 재조명을 받고 있고요. 신도들은 이 그림을 보고 원작을 찾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이 그림을 통해 -진젠도르프가 그랬던 것처럼- 에케 호모의 다른 그림들을 보고 깊은 은혜를 받은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 작품이 있음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죠. 더욱이 이 작품은 벽화입니다. 뜯어서 옮길 수도 없는 박제된 예술품이었죠. 그런데 이 그림이 날개를 달고 전 세게 곳곳으로 퍼져 나갔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에케 모노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한 마르티네스의 에케 호모는 영구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원작을 궁금해 하니까요. 예술작품이 기능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를 되짚어 보게 된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감히 두 그림을 같이 전시하길 제안 드립니다.” 사제의 제안에 장내가 술렁였다.
복원가 호르헤도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가 하는 복원이라는 작업도 어차피 '허가받은 훼손' 아닙니까. 200년 전 물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모든 화가들이 물감을 만들어 썼어요. 광석이나 원석 등 천연재료도 많았지요. 여러 가지 물감을 섞어 쓰기도 하구요, 그런 재료들은 수천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만이 낼 수 있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가 무슨 수로 그것을 완벽히 재현할 수 있겠소. 뿐만 아니라 작품이 오래될수록 안료가 퇴색되거나 균열이 발생하고, 캔버스의 탄력이 약해져 늘어지는 등 자연적인 노화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작품을 최초의 상태로 돌려놓는 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귀신같이 복원한다고 해도 원작자의 의도나 그림을 그리는 마음에 영원히 수렴하려 할 뿐이오. 단지 육안으로 그것을 판단 못한다 뿐이지요. 현대의 작품들은 최상의 보존을 위해 온도, 습도까지 맞추고 정기검진을 하는 등 관리를 위해 애쓰는데 이 벽화는 어떻소. 외부환경에 그대로 노출되고 점점 지워져가고 있었어요. 이 작품이 과연 몇 십 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짐짓 폼을 잡고 말했으나 호르헤는 사촌 하비에르에게 몇 달 전 거금을 빌렸다. 하비에르는 성당 근처에서 빠에야 식당을 하고 있으며 지금 그 식당은 성업 중이었다. 호르헤는 갑자기 머릿속으로 하비에르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관리직원 가브리엘이 복원가의 말을 이어 받았다.
“호르헤씨가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가받은 훼손이 복원이라고요. 지금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허가’에 있습니다. 문화유산은 나라의 재산이에요. 여러분들이 세금을 내어 우리에게 관리를 부탁한 여러분과 국가의 소중한 자산이요. 이 자산이 자연적으로 뭉개지건 지워지건 망가지건 간에, 선의로라도 손을 보기 위해서는 바로 이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히메네스 씨는 범법행위를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정식적으로 조사를 하여 이에 맞는 처벌을 행할 것입니다. 일벌백계의 의미로 중한 처벌이 행해질 수 도 있고, 선량한 양심과 시민의식을 존중해 경한 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자리는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 꼭 거쳐야할 중요한 과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가브리엘은 이 시골구석 보르하에 내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관인 페르난도가 다음 진급에 목매고 있는 가브리엘에게 제법 까다로울 수도 있는 이번 사안을 잘 처리하면 다음 승진시험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고 언질을 줬던 것이다. ‘잘 처리하면’의 의미는 바로 원주인인 가르시아도 만족시키고 에케 모노로부터 벌어들이는 수익을 자연감소시까지 유지하게끔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에는 반백의 머리를 급하게 염색하느라 정수리부분의 머리 뿌리는 하얗게 그대로 남은 가르시아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빨간 시폰 재질의 기하학도형이 검정색으로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가르시아는, 좌중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앞서 발언한 이들을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이태리어로 그들을 힐난했다. 그녀는 모두가 미쳤다며, -이번에는 스페인어로-고개를 위로 올린 채 가슴을 치고 탄식했으며 어떻게 저 원숭이 그림을 한시라도 그대로 놔 둘 수가 있냐고 울부짖었다. 그녀는 가브리엘이 한 ‘자산’이라는 말을 꼬집으며 특히 그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집사는 그녀가 머리카락을 또 쥐어뜯지는 않을까 걱정하여 재빨리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가르시아는 아이라이너로 번진 눈가를 닦아내고, 흘린 콧물도 풀었다. 한숨과 탄식 속에서 위원들은 침묵을 보탤 뿐 누구하나 선뜻 그녀의 울분을 수습하러 나서지 않았다. 가브리엘의 언변에도 불구하고 가르시아는 소송을 걸겠다며 분개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증조부의 뜻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머릿속으로는 제 각각 다른 계산들을 하며 주판알을 튕기느라 분주했지만, 에케 모노가 현존함으로 불이익을 당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가르시아 한명 뿐이었으므로 복원결정이 당장 이루어질 리 없었다.
히메네스는 변호사의 발 빠른 처리 덕택에 에케 모노가 들어간 모든 상품으로부터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에케 호모'라는 제목으로 그린 다른 그림 30여점(사실 그녀는 '에케 호모'를 주제로 이렇게나 연습을 한 것이었다! )도 옥션에서 꽤 고가에 판매되었다. (에케 모노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캔버스', 꼭 캔버스여야 할 것!)그녀는 자기가 받은 수익의 거의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아직 나지 않았지만, 히메네스의 그림 대신 에케 호모가 복원 될 때까지는-복원의 의미가 무참해졌으나 물감의 성분이 달라서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한다― 에케 모노는 그 위상을 떨칠 것이었다.
시간이 다소 지난 어느 시점에서, 히메네스는 다시 한 번 구설수에 올랐다. 워낙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서인지는 모르나 어느 기사에 이 반달리즘에 대해 히메네스의 본의를 의심할 수 있는 기사를 내보낸 것이었다. 그 기사는 이러했다.
히메네스가 복원한 그 그림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보르하시와 산투아리오 미제리코르디 성당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런 모든 사실을 혹시 예측한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세실리아 히메네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사에는 히메네스가 의도하여 에케 모노를 그렸다는 대목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알고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수 있게끔 충분히 중립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뉘앙스를 풍겨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고 있는 듯 한 히메네스의 사진은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었으니까.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애초부터 히메네스는 의도하지 않았다. 삼십여 점이 넘는 '에케 호모'의 습작이 나타내주는 것처럼 그녀는 충분히 연습하고 또 연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사가 나가자 진실은 점차 변질되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히메네스의 대답은 다른 신문사의 같은 질문에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로 바뀌었고, 그 다음의 기사에는 '이제는 모두가 기뻐하게 됐다'로 그녀가 말을 끝맺었다고 보도되었다.
히메네스의 예상과는 달리 끝까지 분개의 눈물을 멈추지 않는 이가 한명 있었다.
자신의 집에서 가르시아 마르티네스는, 울적한 얼굴로 창 밖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무엇을 놓쳤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소동의 뒤에는 ‘돈’이 있었다. 사제를 비롯한 여타의 인간들은 돈을 벌어들이고, 성당과 마을이 유명해지니 과정이야 어떻든 모두 용서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가르시아는 그래서 이 소동이 더 혐오스러웠다.
조부는 자신의 작품이 시장의 원숭이가 되느니, 아무도 찾지 않는 산골 깊숙한 성당의 그림으로 호젓이 남기를 더 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원숭이 그림은 자신의조부가 떠올렸을 이미지, 그 이미지를 모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모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본질이 호도되고 흐려진 것이었다. 인류의 숭고한 구원과정을 재현하기 위해 탄생한 걸작을 그렇게 멋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불성한 행위임에 틀림 없었다. '에케 호모'의 뜻이 무엇이냐 말이다. 그 뜻을 되새기며 그림을 복구하고 보존하는 의무는 오직 자신에게 있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원래 그림의 영성을 덮어 쓴 저 원숭이 그림의 광대놀음이 언제까지고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소를 제기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림의 실추된 이미지가 회복되고 문화재를 훼손한 범인이 처벌받는 그날까지 굳건해지겠다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애통함을 금치 못했다. 이 지난할 것으로 예상되는 싸움에 안타깝게도 올해 여든인 그녀에게는 후손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르시아는 꼭 쥔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흘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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