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의 힘
- 작성일 201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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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의 힘
1. 변명
부과자료 변동으로 지난주부터 어제까지 된 민원들을 치르느라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제법 된 상황들에 맞닥뜨려 마음의 여유를 찾기 어렵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편지를 받은 뒤로 내내 벗께 빚을 진 기분으로 지내다가 이제야 답장 쓸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빚을 진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건 벗의 외로움/기다림에 이렇게 소홀히 해도 되느냐는 자책 때문이었지요. 그러니 제가 느꼈던 기분에는 부디 마음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여자의 언어, 남자의 언어
‘상대방에게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말을 많이 한’ 것으로 치자면 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여자예요. 제가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에게 좀 더 친숙하다보니 그런 게 아닌가 싶네요. 근본적으로는 성별에 따른 언어의 분화와 상관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여자가 하는 오해라는 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게는 거의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글프게도 여자와는 결코 우정으로 맺어질 수가 없어요. 저번에 <우정과 연정 사이>에서 오래된 부부들의 우정에 관해서 언급하긴 했어도, 그것은 하나의 기대일 뿐이지 저를 포함해서 모든 부부가 현실에서 딱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여겨서 한 얘기는 아니랍니다.
여자들이 구사하는 언어에서 속에 품은 생각을 읽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에요. 저의 경우 곧잘 한계에 부닥치곤 하거든요. 일반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아마도 대부분의 여자의 언어가 지극히 주관적인 언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은 주관적이기만 한 게 아니지요. 다중(多重)의 구조로 짜여있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해요. 행간에 담긴 의중이 드러난 의중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지요. 결국 단일 구조에 비교적으로 객관적인/사실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남자로서는 여자와의 대화에서 매우 커다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언어를 모국어라고 하잖아요. 말씨를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체득하기에 그리 부르는 것이겠지요. 재미있는 건 우리에게 말문을 열어준 어머니들이 죄다 여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사춘기를 지나면서 몸에 2차 성징이 나타날 때까지는 여자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남녀 구분 없이 어린아이들이 수다스러운 건 이 때문일 거예요.
그런데 여자아이들과 달리 남자아이들은 대개 어느 순간 말수가 적어지면서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도 말을 섞으려하지 않습니다. 이게 단순히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통과의례 같은 현상만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주된 대화 상대였던 어머니와의 소통에 커다란 장벽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반사적 반응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그러니까 남자아이들은 대화란 해독하는 데 높은 피로감을 주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 피로감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게 되겠지요. 상대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일 터이지만 이미 호르몬 작용에 의해서 사실에 주목해서 말하도록 분화되기 시작한 남자아이에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거예요. 게다가 부모라는 게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선점한 상대들이기에 제멋대로 제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결국 그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방편으로써 남자아이들에게서는 대화를 회피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사춘기 아이들 사이에서 언어가 빈번하게 축약되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른이 되면서 언어의 시원인 여자의 주관적인 언어와 그 갈래로써 다소 객관적인 남자의 언어 사이에는 독해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점이 곧 벗께서 말씀하신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말’을 생산하게 되는 근원 중에 하나일 터인데, 그래서 남녀 사이에서는 ‘입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몸짓으로 하는 말만이 진실한 언어라는 믿음이 새삼 확고해지네요. 몸짓으로 하는 말이야말로 화자의 단독성에 바탕을 둔 언어이며, 그 진실성으로 해서 보편성/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일 터이니까요.
그것은 그렇다 치고, 동성 간에는 우정, 이성간에는 연정만이 성립된다고 우긴다면 사람의 관계를 너무 일반화하는 것일 테지요?^^
3. 철새는 날아오는데
'철새' 하면 어릴 적 추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우리 마을이 뒤로는 산 너머 지척에 금강을 두고 앞으로는 호남평야가 시작되는 곳에 자리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가을걷이를 마친 뒤로는 아침저녁으로 강과 들녘을 오가는 겨울철새들의 군무며 대오를 흔히 목격하곤 했어요. 그 시절에는 마을을 지나치는 철새들이 기러기인지 청둥오리인지 가창오리인지 구분 없이 우리는 놈들을 기러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놈들이 평야지대에서 먹이활동을 마치고 강으로 돌아가는 저녁 무렵 뒷산 마루에는 장정들 여럿이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기다란 장대 두 개에 마주 맨 그물을 펼쳐서 뉘어놓고 녀석들의 대오가 산을 넘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녀석들이 나는 습성을 보면 산을 넘는다고 특별히 고도를 높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평지에서부터 넘을 산의 높이를 가늠해서 산꼭대기에 걸리지 않을 만큼의 고도를 잡아 나는 것이지요. 또한 그 시절엔 대개가 민둥산이었기에 산마루에는 펼친 그물을 세우더라도 걸리적거릴 나무 한 그루 없었습니다.
남녘 하늘에서 눈을 거두지 않은 채 담배를 태우며 잡담을 늘어놓던 장정들이 마침내 기러기 대오가 산을 넘는 순간 그물을 맨 장대를 양쪽에서 잽싸게 세웁니다. 그러면 길잡이새를 중심으로 꺽쇠 모양을 이루며 날던 놈들 중에 장대 사이를 지나는 녀석들 몇이 영락없이 그물에 걸리고 마는 거예요. 이렇게 사냥한 기러기 고기는 먹을 것 없는 마을 사람들의 보양식이 되곤 했었습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 고요한 밤 잠 안 오는 밤
기러기 울음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이태선이 가사를 쓰고 박태준이 곡을 붙인 <가을 밤>이란 노래입니다. 가락이 구슬퍼서 듣거나 부르면 청승맞아 보이기는 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을 꽉 채워주는 감흥을 주기에 제가 좋아하는 노래이지요. 노랫말이 지닌 보편성, 적어도 우리 이전 세대라면 누구나 느낄만한 보편성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이면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마루 끝에 걸터앉아 두려움과 불안감과 외로움을 떨치려고 하늘에 하나 둘 불을 켜기 시작하는 별을 세던 기억들을 대개는 가지고 있을 터이니까요.
철새의 군무라면 역시나 수만 마리가 어우러져 날개짓 소리도 요란하게 이리저리 선회하는 가창오리 떼가 최고가 아닌가 싶은데, 지금도 산등성이를 넘기 전 마을 상공을 돌며 한바탕 멋진 군무를 펼치는 놈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흔하게 접하던 철새 무리도 도시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맘먹고 때맞춰 찾아가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 지 오래입니다. 우리의 삶을 고무하고 고양하던 것들로부터 일찍이 스스로 멀어진 게 아닌가 싶은 나이가 되고 보니, 저녁이 되어도 철새들 날지 않고 밤이 되어도 별 뜨지 않는 도시의 하늘 아래 자꾸만 구차해지는 인생에서 그나마 운문마저 사라진다면 과연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남겠는지요!
어스름이 내리면서 기러기 떼 줄지어 북으로 날아가고, 어느새 하늘 가득 별빛 총총해지는 모양을 바라보던 그 시절은 깊디깊은 세월 속에 묻혔으나, 그때 즐겨 부르던 노래는 아직 가슴에 남아 잔잔하게 추억을 불러오니 그나마 다행이지 싶습니다.
4. 동지섣달
양력 12월! 동지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해가 한없이 길기만 하다면 동물이고 식물이고 그 삶이 어디 온전하겠는지요. 그래서 겨울은 하늘이 만물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름 내내 쌓인 피로를 풀라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주신 게 아닌가 싶은 거지요. 밤을 낮처럼 쓰기를 강권하는 자본주의 아래서 현대인에게 밤이란 이미 어머니의 자궁일 수는 없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삶이 취약한 게 어디 벗뿐이겠습니까? 누구에게나 도시에서의 삶이란 게 본디 취약하기 마련이 아니던가요? 자본에 의하여 업무분장을 당하고 자본이 지운 빚에 허덕일 뿐 자기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벗께서 비록 pursed-lip 호흡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건강이 나쁘다고는 해도, 그렇게 일상에서 운문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비하면 딱히 벗의 삶이 취약하달 수는 없다고 봅니다.
운문은 사랑에서 나오는 가락이고 사랑은 우리를 자유로 이끄는 몸짓이기에 운문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에 다름이 아닐지니, 시가 비록 여성의 언어로 쓰이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시로부터 멀어질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5. 무감각에 관하여
아까는 다음 주 화요일에 있을 부 회식을 횟집에서 하기로 해서 제가 뼈있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후쿠시마산 방사선을 먹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그렇게 따지자면 이 세상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모두들 입을 모으는 거예요. 말인즉슨 옳은 듯싶으나 제가 여성의 언어를 쓰고 있다는 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그런 반응들을 보인 걸 겁니다.
그 바람에 제 말이 길어졌어요. '바람이 불면 통장수가 돈을 번다’는 일본 속담을 소개한 뒤에 그 뜻을 풀어서 들려주고, 미국산 쇠고기며 후쿠시마산 물고기며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까지 설교 아닌 설교를 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그것들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야 개개인의 운에 달린 것일 터이나, 소비자 하나하나가 그것들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저 괴물과 같은 자본과 그것을 옹위(擁衛)하는 권력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작은 저항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미한 저항들이 확대되고 증폭되어서 나비효과를 거두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라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을 완화함으로써 국민의 건강과 자존심까지 짓밟은 짓이며 방사선 유출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물고기를 여전히 별 제약 없이 수입하는 짓 따위를 멈추게 하려면 우리 모두가 소비자로서 그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노라고 했더니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모처럼 잡은 회식은 횟집에서 하고 마는 것. 전 또 ‘상대방에게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말’을 한 꼴이 되었습니다.^^
* 추신
중국 발 미세먼지로 해를 볼 수 없을 만큼 하늘이 어둡습니다. 이 또한 미국산 쇠고기며 일본산 생선과 마찬가지로 자본이 우리에게 강권하는 부채의 일종이라고 해서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이제는 혁명은 고사하고 저항할 힘조차 잃어버린 우리지만 pursed-lip 호흡연습이나마 가려서 해야 되겠습니다. 벗께서 부디 몸도 마음도 강건하고 자유롭게 이 겨울을 나시기를 앙망합니다.
( 와병 중인 벗과 주고받은 편지 중 / 201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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