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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우수작(2014.8.1~8.31) 4편 및 월간 우수작

  • 작성일 2014-10-31
  • 조회수 363

 

주간 우수작(2014.8.1~8.31) 4편 및 월간 우수작

 

주간 우수작

박완서, 「사람의 향기」

배수진, 「고양이가……」

벨., 「시골 영감 5인방 만세사건」

둠벙에빠진달, 「도로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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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스님의 「가시」는 말 한 마디가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린 가슴에 그렇게 비수를 꽂지만 않았어도 엄마에 대한 원한을 이렇게 긴 세월 끌고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자책감”이 ‘가시’가 되어 자신을 찌르고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함께 그 고통을 나눌 때만 가능하겠지요.

 

릴리스님의 또 다른 글 「땍빼가…!」는 재밌는 글입니다. 일상의 한순간, 예기치 않은 아이의 대답이 웃음을 짓게 하네요. 우리 집도 그랬습니다. 한동안 택배 아저씨만 오면 아이들이 난리도 아니었지요. 오늘은 뭐가 왔을까. 어떤 선물일까. 아이들은 택배가 오는 것을 좋아했어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쯤은 아니겠지만, 고된 일에 지친 택배 아저씨를 아이들이 반기는 장면을 생각하니 다시 또 미소가 지어집니다. 한 편으로는 직접 옷을 고르지 못하고, 배달된 옷을 받아 입는 근래의 일상이 그리 반갑지만도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선택하는 경험도 중요할 것 같네요. 그런 우려까지는 이 글이 담아낸 미소를 지워버리지는 않습니다.

 

허재은님의 「말벌, 이 못된 놈」을 읽다 보니 말벌에 쏘였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여름에 라다크를 여행할 때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사진을 찍으러 올라갔다가 말벌에 쏘였지요. 어찌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꿀벌도 아니고 말벌에 쏘였으니 어디선가 들은 소문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더군요. 벌에 쏘여 혼절해서 죽었다는 이도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다시 옥상에 올라갔을 때 벌집을 부스거나 할 수는 없었지요. 조심해서 피하는 정도였습니다. 모든 생명이 다 고귀하지요. 말벌 한 마리가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박완서님의 「사람의 향기」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외모를 고친다 해도 내면의 아름다움이 없으면 인간다운 정을 나눌 수가 없지요. 약국에서 마주친 손님과 좌판을 벌린 할머니의 예를 통해서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성장과 소유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향기를 잃어가고 있지요. 그런 점을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케르겔렌군도님의 「관료주의의 그늘」은 권력와 관료주의의 내적 모순이 빚어낸 실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국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지요. 제도의 개선이 중요하겠지만, 그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는 이는 결국 사람이겠지요. 그래서 스미스 같은 바른 정치인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윤리나 도덕성에 희망을 건다는 것은 어쩌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사회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지요. 한 사회의 몰락이 사회 구조의 파행을 증명하지 않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차별과 불평등이 어디까지 이르러야 사회의 올바른 변화를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스미스 같은 바른 정치인 한 사람에게 기대기에는 현대 사회는 너무나 거대합니다. 패러다임은 모두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문화가 중요한가 봅니다. 현실에 적응하는 데 모든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의 시간을 갖게 될 수만 있다면, 그런 문화 안에서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생각을 하기 시작할 것이니까요. 베블런의 지적처럼.

 

케르겔렌군도님의 또 다른 글 「행운의 섬」에서 찾은 행운은 여행의 끝에서 되돌아와 여전히 다시 시작하는 현실을 의미합니다. 장 그르니에가 말한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하는 그런 감각들”을 되찾는 것보다 “항구적인 어떤 상태”, 그 “계속성”을 여행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길도 여행이 다소 평범한 일정이었지만, 그 깨달음은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퇴임을 앞둔 지사장님 때문일까요. 다시 돌아와서 지속해야 하는 일상이 더욱 소중했을지도 모릅니다. 현실이 지속되는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은 행운입니다. 이 글에서 찾을 수 있는 행운은 바로 삶을 지속하려는 희망입니다. 여행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느끼게 되네요.

 

벨.님의 「시골 영감 5인방 만세사건」은 삶의 흥겨움이 무르익어 있습니다.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주의를 하면 되겠지요. 순박한 영감님들의 어린 아이 같은 품성이 살아가는 일이 곡 저처럼 흥겨워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노동이 고되도 고되지 않을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즐거움을 다시 떠올려보게 하는 글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흥취가 문장에 딱 들러붙어 있습니다.

 

나무 물님의 「놋그릇을 닦으며」는 뛰어난 글입니다. 놋그릇을 닦는 것과 식당 종업원의 삶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네요. 게다가 사이사이마다 빛나는 문장들로 가득합니다. “가끔씩 그릇에 뿌려보는 물처럼 웃음이 쏟아지고”처럼 비유가 시원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저 멍하니 담아주는 음식을 담고 밥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사람과 교감을 하며, 음식에게도 사람에게도 이롭지 않은 것들에 시퍼런 노기를 발하기에 그가 그릇 노릇하려고 당하는 수난은 눅눅치가 않은 것이다”라는 생각은 새로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대상에 대한 깊은 시선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들을 찾아내서 새삼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있네요. 놋그릇을 닦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일일 것입니다. 놋그릇이 빛나는 것은 상처 때문이라고 보는 시선은 탁월합니다. 그 놋그릇을 닦는 이의 고된 삶을 함께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지요. 문단을 나누어서 구성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깊은 글이었습니다.

 

배수님의 「고양이가……」를 읽다가 무릎을 치게 됩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고양이 똥과 땅을 파서 그 똥을 묻는 행동을 어찌 그리 절묘하게 동화로 상상해내셨을까요. 고양이 사체를 치우다가 떠오른 동화는 말놀이의 진수라고나 할까요. 꼬마둥이들 모아놓고 들려주면 엉덩이가 들썩거리겠는데요. 찻집 ‘달콤한 향기’의 여사장님께도 들려줘 보세요. 아놔메리카노나 아모라카노 한 잔쯤 공짜로 내오실지 모르겠네요. 재밌습니다.

 

둠벙에빠진달님의 「변호인을 만났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화를 그린 영화를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아직도 억울한 꼴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나 기본적 생계유지마저 어려운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관심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니 몹시 부끄러웠다”고 하지만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삶은 빛나고도 남습니다. 영화를 보며 많은 이들이 각자 어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왔으니 그 또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 사회에 기여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지금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러블리아님의 「포석정으로 흘러간 주령구」는 주사위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나와야 할 텐데, 주사위는 늘 다른 것만 보여주는군요. 우연과 운명의 미묘한 만남이 이 글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문이 남다르게 다가오네요. 다만 사랑과 선택의 문제가 주사위와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둠벙에빠진달님의 「도로 아미타불」을 읽어봅니다. 소설인가요? 아니면 실화? 실화라 하더라도 중간에 소설이 들어서 있으니 산문과 소설을 아울러 읽는 기분입니다. 이 글에 등장한 소년은 자신의 공부를 위해서 꽤 대단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년을 방해하는 이들이 계속 나타나는군요. 모두가 소년의 공부를 방해만 할 뿐, 소년의 눈과 귀를 밝게 하지는 못하고 있네요. 소년이 쓴 소설은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 스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일까요. 아마도 이 세상에 대한 풍자겠지요.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 가만히 지켜보게 만듭니다. 소년이 닭볶음탕을 엎지르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제목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도로 아미타불. 우쭐거리던 소년이 결국 실수나 하는 어린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런 제목을 단 것은 아니겠지요. 스님도 교수도 대학원생도 고시생도 장군도 장군의 부인도 모두 다 도로 아미타불일 뿐이라고 소년이 일갈하는 것만 같습니다. 실수란 그저 실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의식이 자기도 모르게 겉으로 들어난 사건이라고 하지요. 소년이 닭볶음탕을 엎지른 것은 우연만은 아닌 듯합니다. 소년은 절간에서 닭볶음탕을 먹으려던 가짜 인간들을 향해 도로 아미타불이라고 일갈하는 듯하네요. 소년의 실수를 그러나 절간에 모인 이들은 은근히 눈치 채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 말도 못하고 문이나 걸어 잠그는 것이겠지요. 이야기의 전개도 흥미롭고, 풍자와 비판을 에둘러 하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멋진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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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우수작

나무 물, 「놋그릇을 닦으며」

이번에도 월간 우수작을 별도로 선정했습니다. 둠벙에빠진달님의 글은 소설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해서 고심하게 되네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무 물님의 글도 출중했습니다. 나무 물님께 이런 부탁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문단을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요.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