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영산홍

  • 작성일 2015-01-30
  • 조회수 926

영산홍

 하얀 김이 가득한 대중탕은 가뜩이나 좋지 못한 남자의 시각을 기어이 박탈한다. 안경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듯,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다. 탕을 찾는 눈길이다. 눈앞을 가로막는 부연 수증기는 미처 하늘로 올라갈 겨를이 없다. 천장에서 어슴푸레하게 구름이 된다. 눈도 비도 내릴 수 없는 죽은 구름. 응결의 덩어리는 오래지 않는다. 잠시 후면 천장에서 축축하게 결로되어 힘없이 바닥으로 머리통을 내리꽂는다. 터져버린 물방울로 바닥은 더욱 미끄러워진다. 수증기의 피칠갑이다. 축 처진 불알을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는 노인은 타일 하나를 건너는 데에 수십 초를 허비하고 있다. 희끄무레한 음모가 안쓰럽다. 평지를 걷는 나무늘보의 우스꽝스러움이 생각날 지경이다. 하지만 노인에겐 분명 생사가 걸린 이족보행일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노인을 철저히 외면한다. 늙고 쭈그러진 이들의 몇 안 되는 도전을 존중하자는 차원에서.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물 냄새. 남자는 목욕탕에 올 적마다 물에도 분명한 냄새가 있음을 느낀다. 색과 향과 맛이 없다고 알려진 투명의 경쾌한 액체. 하지만 이곳에서의 부글거리는 물들은 분명한 냄새를 가진다. 소독약일까. 흥건히 젖은, 탕과 바닥을 이루는 석재의 냄새일 지도 모르겠다. 냄새는 탕의 체취이다. 붉은 글씨로 43도를 가리키는 열탕은 약간 달착한 냄새가 난다. 그보다는 낮은 일반 온탕은 코 점막을 지그시 누르는 냄새가 난다. 반투명문으로 가리워진 습식사우나에서는 젖은 나무의 냄새가 난다. 간혹 온천에서 보이는 미적지근한 황토탕에서는 비릿하고 고소한 흙냄새가 진하다.

 그는 온탕에 들어앉아 뭉근하게 몸을 불렸다. 더운물이 목 언저리에서 넘실거리자 숨이 턱 막힌다. 걷느라 한참을 움찔거리던 늙은이는 어느새 들어앉아 눈을 감고 있다. 남자는 그의 덜렁거리던 불알을 생각했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제법 왕성한 생식력을 자랑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민을 느꼈다. 노인은 어쩌다가 걸음을 도와줄 이 하나 없이 혼자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곳에 오기까지 그 얼마나 힘겨운 여정이었을까. 길 여기저기 얼어붙은 눈과 칼바람과 피부를 터뜨릴 것 같은 건조함을 모두 이겨내고, 저렇게 온탕 속에서 승자의 도취를 만끽하고 있다. 물론 돌아가는 길은 또 다른 여정이다.

 십 분이나 지났을까. 갑갑해서 참을 수가 없다고 느낀 남자는 황급히 빠져나와 샤워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몸이 발갛다. 손끝은 쪼글쪼글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샤워기를 틀자 세찬 물이 뿜어져 나온다. 그는 우선 거울에 낀 김을 닦아내었다. 안경을 벗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으레 습관처럼 하는 일이다. 눈썹을 끌어내리고 코끝을 힘주어 당긴다. 인상을 쓰면 그나마 조금은 잘 보인다. 얼굴을 최대한 찌푸리고는 거울에 비친 왼쪽 어깨를 바라본다. 보인다. 손바닥만 한 붉은 영산홍. 이름조차 생소한 꽃. 이 년 간 어깨를 짓누르던 꽃잎.

 그는 바가지에 채워놓은 물에 이태리타올을 담갔다 빼었다. 오른손에 얌전히 끼고선 왼 허벅다리 안쪽을 슬슬 문지르기 시작한다. 시계방향으로 사악-사악. 그러다가 조금 더 힘을 주어 앞뒤로 벅벅. 하지만 때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문질러도 아스라한 작은 각질의 결정들만 피부 위로 돋아날 뿐이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 새 거울에는 부옇게 김이 껴 있다. 샤워기를 틀어 한 번 더 거울을 닦았다. 맑아진 찰나의 표면에 다시금 붉은 영산홍이 보인다. 철쭉을 닮은 꽃이다. 거울은 곧바로 엷어진다. 타올을 낀 손을 어깻죽지에 얹었다. 그리곤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대패로 나무를 깎듯 힘주어서 균일하게. 흑단나무에 이름을 새기듯 끈기 있게. 좀 전에 문지르던 허벅다리는 이것에 비하면 애무라고도 할 법하다. 어깨는 곧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얼굴에 고통의 일그러짐이 엇비친다. 콧망울을 일그러뜨리고 윗입술을 한껏 당겨 올리며 입꼬리를 지척으로 떨군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다. 지워져라. 지워져라. 꽃받침도 남기지 말고 모두 없어져라. 먼지 같은 꽃가루마저 남기지 말아다오.

 여자는 손으로 서로의 얼개를 맞추고선, 그대로 내려앉았다. 몸 위에서 힘차게 몸뚱이를 놀렸다. 그녀의 성기는 헐거웠다. 남자는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남자 자신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자는 하이톤의 신음을 몸의 움직임에 따라 규칙적으로 내뱉었다. 남자의 발기를 그나마 유지시키는 것은 여자의 관능적인 신음이었다. 아- 아-.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꿈틀거리며 달뜬 표정을 지었다. 입에서는 오빠- 오빠- 하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튀어나온다. 진짜일까. 남자는 ‘여자의 오르가즘은 삼분지 이가 연기’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는 그저 천장만을 바라본다. 차라리 젤을 듬뿍 바른 손으로 자위를 할 걸 하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하면서. 형광등 빛이 정면으로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시리다. 눈을 깜빡이자 청록빛과 자줏빛 잔상이 어른거린다. 그 이물감이 거슬려 눈을 감아버리고 눈을 쉬게 했다. 남자는 습관적으로 코를 몇 번 찡긋거렸는데, 그게 여자에게는 흥분의 지표로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신음은 점점 피치를 높이더니, 마침내 몇 초간의 격렬한 떨림이 끝나자 들썩거리던 몸을 고꾸라뜨리고 그에게 엎어진다.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만져보니 땀이 흥건했다. 진짜였을까. 그는 아직 사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질 속에서 그의 성기는 물렁해진다. 공허한 탓이었다.

 바가지를 들고 목욕탕을 종횡무진 누비던 꼬마가 남자의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피가 맺히도록 어깨를 문대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꽃을 지우려는 모습이 흥미로웠을까. 아니면 무서웠을까. 그가 때밀이질을 잠시 멈추자, 샤워기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던 왼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샤워기는 맥없이 떨어지고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날숨마저도 덩달아 떨렸다. 오른손이 어깨를 문대는 동안 온 몸에, 특히 왼팔에 있는 힘을 모두 끌어 모은 것이었다. 배에 온갖 힘을 꽉 주고 숨도 참으며. 고개를 젖혀 바라본 왼쪽 어깨는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피도 맺힌 듯 했다. 습기 가득한 날숨이 벗겨진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는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마찰로 붉어진 피부보다도 더 빨간 영산홍은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은 채 얌전히 붙어 있었다. 오히려 탱탱 부어오른 어깨에서 더욱 입체적으로 피어올랐다. 격렬했던 때질로 거죽 표면에 울긋하게 맺힌 피는 철쭉 꽃잎에 오른 반점이다. 꽃 문신은 그를 조롱하듯, 더욱 화사했다. 분명히 그를 향한 조소이자 경멸이었다.

 구경하던 꼬마의 아빠가 때를 밀자며 아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피가 맺히도록 벅벅 문대던 남자를 구경하던 아이는, 자기도 아빠에게 가죽이 홀랑 벗겨질까 무서웠는지 탕이 떠나가라 울어제끼기 시작했다. 아빠는 당황하여 살살 민다니깐- 약속할게 약속- 을 반복하며 쩔쩔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얘가 왜 이럴까, 하며 억지로 아이를 끌어 앉힌 아빠가 가느다란 팔위에 더부룩한 퍼런 손을 척 올리자, 아이는 게거품을 물 기세로 맹렬히 저항했다. 그는 나체 부자의 사투를 뒤로 하고 샤워를 마친 뒤 탕에서 벗어났다. 축축한 욕탕의 문을 열고 나서자 시원한 공기가 몸 구석구석에 달라붙었다. 삽시간에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추위에 몸이 떨렸고, 쓰라림에 팔이 떨렸다. 남자는 옷을 마저 입은 뒤에 집으로 향했다.

 “몇 살이야?”

 “스물셋.”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좁다란 원룸 쪽방은 삽시간에 매운 연기로 들어찼다. 평소 그가 담배를 피우던 습관대로 침대 위에 조그맣게 난 창문을 열어주었다. 틈새로 따뜻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발가벗은 채로 홑이불을 덮고 있었다. 남자는 한 손을 뻗어 여자의 배꼽과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여자의 가슴은 크지는 않았지만 제법 말랑거렸다.

 “얼마랬지?”

 “십만 원.”

 그녀의 대답은 그녀의 몸만큼이나 헐거웠다. 단 세 자의 맥없는 대답에 남자는 다시 물렁해졌다. 물렁하다 못해 흐물거렸다.

 “집은?”

 “없어.”

 남자는 지갑에서 십오만 원을 꺼내었다. 연회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먹다 남긴 음식들을 치우며 타낸 이틀 반 치 일당이었다. 그녀는 흠칫했지만, 이내 군말 없이 돈을 받았다. 왼손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타들어가는 담배가, 오른 손에는 오만 원 권 세 장에 팔아치운 그녀의 관능이 쥐어져 있었다. 순결 따위는 애초에 관심사가 아니라는 듯이.

 그가 그녀를 만나기 전, 채팅창에선 흥정이 오가고 있었다. 청색의 남자와 흑색의 여자가 내뱉는 말들로 하얗고 밋밋했던 창은 어지러워졌다. 남자는 그녀의 나이를, 지역을, 키를, 값을 꼼꼼하게 물어보았고, 그녀는 예의 기계적인 말투로 짤막한 대답을 이었다. 25, 서울, 160, 10만 원. 서울 어느 동네인지를 묻자 그녀는 ‘지금은’ 용산이라 답했다. ‘지금은’이라는 말의 뜻을 남자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갈 데 없으면 며칠 있다 갈래?”

 그녀는 남자의 물음에 대답 대신 창밖으로 꽁초를 던져버리고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허리가 제법 홀쭉했다. 남자의 몸 위에서 열심히 찧어대던 엉덩이가 발그레했다. 앳되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뒷모습과 헐거웠던 몸 안을 대조적으로 느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도시 곳곳을 부유하며 몇 명을 거쳐 간 것일까 하며. 길바닥을 팔랑이며 날아다니는 전단지. 그녀는 구멍 나고 구겨진 전단지 같은 존재였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의 단칸방은 아늑했다. 자그마한 창이 딱 하나 있는 퀴퀴한 고시원. 월세가 십팔만 원인, 침대와 책상 때문에 짐을 풀 수도 없는 공간. 그녀와 뒹굴던 원룸이 넓기는 갑절이나 더 넓었지만, 그에게 있어 이 좁다란 고시원은 진정한 ‘바다’였다. 신림동의 개미소굴 같은 고시촌에서 이곳은 유독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고시원이 환한 서울대의 광명을 등으로 받아내며 자신의 빛을 찾아 어둠으로 파고드는, 표면에서 일렁이는 빛을 찾아 유영하는 오징어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인데 비해, 그가 머물게 된 곳은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이를테면 젖가슴이 바닥에 닿을 듯 늘어진 할머니, 매일 밤마다 야한 화장을 하고 문을 나서는 젊은 아가씨, 얇은 런닝 위로 검은색 젖꼭지가 비치는 뚱뚱한 중년의 대머리 남자 같은 사람들이 ‘태평양 고시원’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공간의 주민이었다. 고시공부라는 건물 본연의 목적은 그를 포함한 태평양의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저 월세가 싸고 보증금이 없는 4m²의 독립된 공간에 불과했다. ‘패스’라는 저마다의 단일한 목적을 지닌 진짜배기 고시원에 비해 제법 ‘인간적인’ 모습도 엇보였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태평양 고시원에는 자신들이 설정할 수 있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입주민들의 삶은 보다 ‘연명’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에서 도망쳐 나온 그는 한참이나 남은 삶을 연명하기 위해 태평양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호흡을 천천히 늘어뜨리면서 부유했다. 그녀의 헐거운 몸이 생각났다.

 “오빠, 문신 하나 새겨보는 게 어때?”

 “갑자기 웬 문신?”

 그녀의 질문은 뜬금없었다. 그보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오빠’라고 칭한 것에 놀라 했다. 여자가 그의 집에 머물게 된 지 이 주 쯤 되는 날의 일이었다.

 약 보름간의 시간동안 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그동안 남자는 열흘이 넘도록 연회장에서 음식물찌꺼기와 사투를 벌였고, 여자는 닷새정도 생리를 했다. 함께 끼니를 때운 적은 없었고, 남자가 일을 마치고 나서 열한시 쯤 집에 들어오면 여자는 거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생리 때문에 섹스는 네 번 정도에 국한되었으며, 그마저도 두 번은 남자가 사정에 실패했다. 헐거운 탓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의 몸 위에서 자지러지면 그것으로 섹스는 끝이었다. 사정은 어떠한 척도도 되지 못했다.

 아침에 나가서 여자가 잠들 무렵에 들어오는 남자의 생활 패턴 때문에 둘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간혹 그녀가 깨어 있을 경우에만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한 짤막한 문장들이 오갔다. 여자의 대답은 원체 간단했던 지라 대화가 길게 늘어질 리는 없었다. 서로를 탐색할 시간조차 충분치 못했다. 보름간 그들은 말 그대로 ‘동거’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자신을 오빠라고 하며 살갑게 질문하는 것에 남자는 적잖이 당황했다.

 “꽃이 좋을 것 같아!”

 “꽃? 꽃 문신을 하라고?”

 “영산홍이라는 꽃이 있어. 철쭉같이 생긴 꽃이야. 빨간색도 있고 하얀색도 있고. 오빠는 몸이 하야니깐 빨간색이 잘 어울리겠다.”

 남자가 여태껏 들었던 여자의 말 중에서 가장 길었다.

 “아니 근데, 갑자기 왜 꽃을 하라는 거야?”

 “강해지라고.”

 남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강해지려는데 꽃을 새기라고 하는 이유가. 그리고 갑자기 살가워진 그녀가. 아무튼 그는 이튿날 바로 왼쪽 어깻죽지에 붉은 영산홍을 새겼고, 여자는 기뻐했다. 그 날 둘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했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들은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정 씨는 딸린 식구 없는가?”

 월세를 독촉하러 남자의 방문을 두드린 고시원장이 으레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그는 꼭 ‘원장’으로 불리기를 희망했다. 열댓 개 방을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몹시도 중요시했다. 낡아빠진 정장과 코안경, 머리에 살짝 얹은 재향군인회 모자는 원장으로서의 지위와 정체성을 넌지시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월세 십팔만 원이라는 명백한 갑을관계가 그의 정장을 명품으로 만들어 내었다.

 “아뇨, 아직은요.”

 “월세 있잖여? 내일까지는 줬으면 좋겠구먼. 나가 그렇게 빡빡한 사람은 아니여. 안부도 물어볼 겸 들렀으니께 신경 쓸 건 없구.”

 볼이 훅 꺼진 원장은 ‘거 젊은 사람이 이런데서 있으면 얼마나 더 있을라고-’로 시작하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남자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렇다고 새겨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말끝마다 ‘예 원장님’을 붙여주면 끝이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내일까지 월세 십팔만 원을 내 달라는 결론을 다시 한 번 주지한 원장은 방문을 닫았다. 잠시 후 옆방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고, ‘박 씨 거 있는가?’ 하는 원장의 목소리가 얇은 벽을 타고 울렸다. 박 씨 역시 남자 또래의 삼십 줄 청년이었기 때문에 딸린 식구니 돈을 모아야 한다느니 하는 연설을 경청했을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전화기를 집었다. 어깨가 옷깃을 스칠 때마다 욱신거렸다. 피부가 벗겨진 듯 했다. 영산홍은 여전히 어깨에서 붉었다. 통증을 어거지로 참아내고 김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예, 정 대리님’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래 김 군아. 먼젓번에 말했던 니가 아는 누나 있잖아. 지금도 소개해줄 수 있냐? 그래그래 고맙다. 내일 피로연 다섯 건 잡혀 있으니깐 늦지 말고 인마. 알았어. 내가 실장님한테 말해서 회식비 받아 볼게. 그래, 내일 보자.”

 여자는 침대에 누워 남자의 어깨를 만지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그녀에게 왜 많고 많은 꽃 중에 영산홍을 그리라 했냐고 물었다. 여자가 생리를 세 번쯤 더 한 뒤의 일이었다. 남자는

 “말했잖아, 강해지라고.”

 “강해질 거면 용이나 호랑이라도 하나 새기는 게 더 낫지 않아?”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 알아?”

 “알지.”

 “호랑이보다 강한 게 꽃이야.”

 “차라리 곶감을 새기라고 하지 그랬냐.”

 여자는 ‘그게 뭐야-’ 하며 피식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본 적이 있던가.

 “진달래나 철쭉은 겨울 되면 잎이 다 떨어져서 가지만 남는데, 영산홍은 이파리가 남아있거든.”

 “질기네.”

 남자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강한거야.”

 여자가 반박했다. 남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적은 자연스러웠다. 그는 여자가 말한 ‘강함’의 의미를 한참이나 생각했다. 호랑이보다 강한 꽃. 칼보다 강한 펜, 그리고 그보다 강한 영산홍. 하지만 여전히 난항이었다. 그의 생각은 표류했다. 갈피를 전혀 잡지 못한 채 부유했다. 남자는 도저히 모르겠다며 기지개를 켰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조막만한 창문을 열고는 담배를 피웠다. 둘은 주말을 나체로 보냈다. 둘의 몸은 모두 하얀 색이었다. 둘이 뒤엉켜 있노라면 남자의 어깨에 그려진 영산홍에서 붉은 꽃잎이 흩날렸다. 여자의 달뜬 몸에서 배어나온 땀방울이 꽃잎에 닿으면, 꽃은 더욱 생기를 가졌다. 물기를 한아름 머금은 듯 생생해졌다. 남자는 여자의 헐거운 몸에 적응해 가는 듯 점차 사정하는 횟수를 늘려갔다. 그리고 여자는 그 다음 생리를 하지 않았다. 남자는 알지 못했다.

 오늘 예정된 결혼식은 모두 다섯 건이었다. 이 추운 날에 누군가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 운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천오백 명일 수도 있었다. 축하는 일시적이었고, 신랑과 신부가 박수를 받으며 길쭉한 런웨이를 빠져나가는 동시에 무자비한 피로연은 시작되었다. 하객들은 응당 자신들이 낸 축의금의 값어치를 이곳 연회장에서 보상받으려는 듯 했다. 연회장의 직원들은 왼팔로 보울을 감싸 안고 오른 손으로 빈 접시를 차곡차곡 쌓았다. 웬만큼 남은 음식을 치울 때엔 반드시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의 오른 쪽으로 가 넌지시 ‘치워드리겠습니다’를 말해야 했다. 손에 묻은 음식물들은 불쾌할 겨를조차 없었고, 널찍한 원탁 사이를 물고기처럼 빠져나갔다. 식기가 접시에 부딪히며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그동안의 해후와 격조를 푸는 왁자한 말소리가 낭자했다. 직원들은 자신들의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큼직한 무전기를 들고 연회장을 누볐다.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잔반들을 손으로 훔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리가 되어 말쑥한 정장을 빼 입고서는 하객들에게 생글거리는 미소로 피로연장의 위치를 설명한다거나, 빈 테이블에 시체처럼 널브러진 소 갈비 뼈들을 발견하고는 직원들에게 윽박을 질러대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왼쪽 가슴에 달린 ‘대리 정OO’이라는 금빛 명찰은 양념이 잔뜩 묻은 접시와, 남은 음식과 함께 보낸 삼 년의 결실이었다.

 밤 아홉 시 쯤에야 마지막으로 뜨거운 물에 데쳐낸 기물들을 물기 하나 없이 닦아 통에 착착 쌓고서는, 내일 예정된 세 건의 연회를 치르는 홀에 비치했다. 정말로 모든 업무가 끝난 것이었다. 남자의 검정 양복은 어느새 소매와 팔꿈치가 축축했다.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격전의 상흔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이른바 ‘전쟁터’에 비유했다. 잔반을 주물럭거리던 시절, 남자는 결혼이라는 예식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곳을 전쟁에 비유하는 것이 조금 억울했다. 그러나 일이 거듭될수록 연회장은 전쟁터가 맞았다. 전쟁에서는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아다닌다지만, 이곳은 머리카락 깊숙이 음식물의 냄새가 배었고, 옷 여기저기에는 오향장육이나 갈비찜의 국물이 튀었다. 지하 조리부에서는 끊임없이 음식의 보급이 올라왔으며, 마지막 한 명의 하객을 물리침으로써 상처뿐인 몸뚱이만 남는 것이었다.

 “고생들 많았다. 오늘은 전쟁이었지?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어, 너무 질리지 마. 내일은 세 건이니깐 조금 여유로울 거야. 다 나올 필요도 없어. 알바 애들은 알바들은 집에서 하루 쉬어도 될 것 같다. 첫 예식 시작이 오후니깐 직원들도 잠 좀 더 자고 열한 시까지 모이도록 한다. 오늘 처음 나온 애들은 다음 주 쯤 입금 될 거니깐 재촉하는 전화 하지 말고.”

 얼굴에 애써 근엄함을 유지하려는 중년의 실장이 얼굴에 깊은 팔자 주름을 새기며 ‘자 그럼 내일도 승리하자-’를 말하는 순간에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래, 정 대리. 말 해.”

 “저, 실장님. 오늘 다섯 건이나 격전을 치르느라 다들 고생도 했고, 이대로 내일을 맞이한다면 전의도 많이 꺾여있을 것 같습니다.”

 융통성 없어 보이는 실장은 빨간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그래서?’라고 물었고, 남자는 능글맞게 이죽거렸다. 눈치 챈 서른 남짓의 직원들은 회식을 입 모아 외쳤다. 눈을 몇 번 굴리던 실장은 품 안에서 카드를 꺼내어 남자에게 전했다.

 “적당히들 먹고 일찍 들어가.”

 일동은 환호를 질렀다. 마침내 산 정상에 자랑스러운 깃발을 꽂아낸 듯. 최후의 잔병의 목숨을 두 손으로 직접 끊어낸 듯. 무조건 항복하는 적장을 무릎 꿇린 듯. 저 편에서 김 군이 남자를 향해 눈을 찡긋 했다. 남자는 주먹 쥔 손에서 새끼손가락만을 펴 김 군에게 보였다. 김 군이 엄지를 내밀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남자는 씨익 웃고서는 트로피를 들어 올리듯, 실장에게서 받아든 카드를 번쩍 들었다. 어깨가 시큰거렸다.

 “가야 해. 비켜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남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었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현관을 대(大)자로 틀어막고 서 있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원룸에서 머물며 산 티셔츠 몇 장, 책 두어 권, 속옷 따위였다. 그녀의 눈은 남자를 꿰뚫었다. 손에 쥔 옷가지 몇 벌이 그들의 얄팍한 관계를 보여주는 듯 했다. 남자는 종말을 거부했고, 그런 남자를 눈앞에 둔 채 여자는 원룸에 내린 뿌리를 거두고 있었다.

 “갈 데는 있어? 가족은 있어? 이렇게 갑자기 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도대체가?”

 남자는 당혹과 격앙이 혼재된 말투로 물었다. 애초에 구름처럼 머물렀던 여자였다. 흘러가는 대로 왔던 것처럼 흘러서 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현관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누구도 몸을 쓰진 않았다. 둘 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단지 여자는 비키라고, 남자는 왜 그러는 지를 물어보고 있었다. 둘의 대화에 접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느 누군가가 분명한 양보를 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여자의 보따리는 너무나도 가벼웠으며, 남자의 팔다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결국 양보한 것은 여자였다. 그녀는 보따리를 손에서 내려놓고는 그대로 현관에 쪼그려 앉았다. 당장은 나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협정을 제시한 셈이었다. 남자는 사방으로 뻗었던 팔과 다리를 거두고선 힘을 뺀 채 서 있었다. 대화의 시간이었다.

 “나는 떠돌이야. 지금까지 이렇게 서울을 부유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야. 여기 오기 전에는 하루하루 몸을 주고 잠시 눈 붙일 곳을 찾는 생활을 전전하고 있었어. 가끔은 모르는 아저씨들 집에서 일주일간 묵기도 했고, 그게 아니면 섹스 한 번에 돈을 십만 원씩 받아서 여관에서 자기도 했지. 당신도 그렇잖아? 나를 십오만 원에 산 것 뿐이잖아.”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남자는 채팅에서 그녀와 흥정을 했고, 하룻밤의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얼마간 지내라는 제안을 했고 여자는 편안하게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들의 관계는 그저 그 뿐이었다. 남자는 ‘그렇지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뒤에 붙일 마땅한 말들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당신이 여기서 머무르라고 했고, 나는 그렇게 했을 뿐이야. 단지 좀 오래 있었을 뿐이지. 있을 만큼 있었기 때문에 떠난다는 거야. 알겠어?”

 남자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못했다. 여전히 ‘그렇지만’ 뿐이었다. 현관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한 아름 밖에 되지 않는 현관은 미심쩍은 것들로 가득했다. 여자는 당혹스러워 지는 그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건데? 당신, 나를 사랑하기라도 해?”

 여자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날카롭게 본질을 파고들었다. 남자는 침묵했다.

 “말해봐. 나를 사랑해?”

 남자는 현기증을 느꼈다. 십오만 원. 담배. 헐렁한 섹스. 영산홍. 전단지. 음식물 찌꺼기. 떠돌이 여자. 조건 만남. 이런 것들 따위가 일렁거리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천장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손에 보따리를 쥐고 일어섰다. 남자는 막지 않았다. 부유하는 찌꺼기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동안에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그의 어깨에 꽃을 심어준 여자는 떠났다. 그는 여전히 덩그러니 서 있었다. 꽃과 함께.

 남녀는 마주보고 있었다. 김 군은 둘의 가운데서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며 부산을 떨었다. 그들이 모인 카페는 느릿한 현악기의 선율이 흐르는 곳이었다. TV에서 들어봄직한 노래였지만 아는 곡은 아니었다. 남자는 곡조 따위에 취약했다. 그는 거침없이 폭발하는 영화 같은 것을 보다 편해했다.

 “자, 이쪽은 우리 정 대리님이고, 여기 이 분은 내 고등학교 선배. 그러면 얘기 나누시고, 저는 이쯤에서 물러날게요. 둘이 잘되면 나한테 한 턱 내는 겁니다!”

 김 군은 어색해 하는 둘을 남기고는 거침없이 떠났다. 자신이 오래 머물러 봐야 오히려 불편함만이 깊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남자는 근무할 때 입던 너절한 정장과 두터운 코트를, 여자도 흰색과 검정이 고루 섞인 멋스러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색함은 남자를 옥죄었다. 단칸의 고시원 방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렸으며 눈은 상대의 후두쯤에서 머물러 있었다. 여자의 턱 끝을, 양 어깨를 보았다. 후두를 기준으로, 열십자로 시선을 뻗쳤지만, 정작 얼굴을 바라보지는 못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단 둘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늘상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음식을 담기 위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 사람들, 그들에게서 불평을 듣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만을 봐온 탓이었다. 고요함은 그에게 먼 것이었다.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싶었지만, 앞에 누군가를 앉혀 놓고선 널찍한 액정을 홀로 두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봐도 최악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김미선 이라고 합니다.”

 정적을 깬 것은 여자였다. 갑작스러운 음성에 남자는 얼른 시선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자신에 비해 한결 여유로운 표정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상대의 이목구비를 그제서야 본 것이다. 남자는 ‘아, 예’ 하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상대는 영민한 여자였다.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또한 궁금한 것은 참지 않았다. 그것이 남자에겐 배려로 느껴졌다. 그는 여자의 질문에 맞춰 대화를 이었으며 간간이 웃음도 지을 수 있었다. 실로 무겁지 않은, 가볍고 유쾌한 순간이었다. 주제는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처럼 자유롭게 떠돌았고, 켜켜이 쌓이는 눈처럼 두터워졌다. 어느새 둘은 ‘문신’이라는 주제에 정착했다. 잠시 앉 날개를 접고 대화를 하며 머물렀다.

 “문신이 해 보고 싶은데 겁이 나서 못하겠어요.”

 “아 정말요? 사실 저는 어깨에 문신이 있어요. 꽃이에요.”

 여자는 흥미로워했다. 남자는 자신의 문신 이야기를 하며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집에서 머물렀던 ‘그 여자’를 생각해내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조건 만남 따위 과오에 불과하고, 감추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문신은 그저 내가 그 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으며, 나는

 “무슨 무늬로 새겼어요? 용? 호랑이?”

 “꽃이요. 빨간 꽃이에요. 제가 몸이 하얘서.”

 “와, 정말요? 무슨 꽃인데요?”

 “영산홍이라고 아세요? 철쭉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여자는 영산홍을 안다고 했다. 오늘 남자와 대화를 나눈 그녀는 아는 것이 많았다. 카페의 선율도 알고 있었고, 웨딩홀의 생리도 알고 있었다. 신림동의 고시촌도 알았으며, 이렇게 영산홍마저 알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고마웠다.

 “알죠! 혹시 영산홍의 꽃말 아세요?”

 “아뇨, 그렇게 자세히는 몰라요. 그냥 예뻐서 그린 거거든요, 하하.”

 “그러시구나. 영산홍 꽃말은 첫사랑이에요.”

 남자는 눈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밖은 지극히도 건조했다.

 그는 좁다란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축축한 런닝과 속옷 차림이었다. 손거울을 가져다 어깨를 비추었다. 격한 때질로 벌겋게 부었던 어깨는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창문을 뚫고 달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단 한 조각에 불과했지만 방이 어찌나 작은지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바닥에는 짧은 머리카락과 구불거리는 음모가 뒹굴고 있었다.

 남자는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며 잠들다가 깨어났다. 왼쪽 어깨였다. 어깨를 끊어내는 듯 극심한 고통이었다. 무엇인가가 어깨를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영산홍 꽃말은 첫사랑이에요.”

 미선의 말이 남자의 귓가에 맴돌았다. 첫사랑. 처음 하는 사랑. 남자의 첫 섹스는 중학교 삼학년 때였다. 그녀는 첫사랑이 아니다. 제대로 된 첫 교제는 고등학교 이학년 때였다. 그녀는 첫사랑이 아니다. 군대에서 외박을 나와 묵었던 여관의 주인과 질펀한 섹스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첫사랑이 아니다. 웨딩홀에 아르바이트를 나오던 스무살 여자애가 고백을 해 사귄 적도 있다. 그녀는 첫사랑이 아니다.

 “당신, 나를 사랑하기라도 해?”

 여자의 마지막 목소리. 알 수가 없다.

 “꽃이 좋을 것 같아!”

 “강해지라고.”

 “영산홍은 이파리가 남아 있거든.”

 남아 있는 것.

 남자는 가까스로 이불을 끌어 올렸다. 통증이 약간 가셔서 얼른 잠들고자 함이었다. 그녀의 전단지 같은 몸이 불현듯 떠올랐다. 담배를 피우던 원룸의 작은 창문이 떠올랐다. 십오만 원을 쥔 왼손이 떠올랐다. 그 기억의 사금파리들은 헐거웠다. 전단지 같은 그녀의 몸뚱이가 떠올랐다. 시원하게 사정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떠올랐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는 현관 앞에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꽃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