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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5-02-02
  • 조회수 811

       창(窓)

  ◈ INTRO

9시 전이다.

빈 들판 너머로 아파트 불빛이 깜박거린다. 한 마장쯤 트인 시야로 농협 공판장과 무논과 달리는 차들이 보인다. 창밖 공기는 차다. 창틈을 경계로 서로 이질이 부딪힌다. 욕조엔 물이 가득 차 넘치고 티브이 화면에는 벙어리들이 입만 벙긋거린다.
아무도 없다. 사실 그 아무도엔 내가 포함되지 않지만, 나는 5평 남짓 독방에서 며칠째 바퀴벌레처럼 바닥과 모서리를 탐색하고 있다. 좆같은 인생을 차분히 끝내자, 하는 생각은 사실 피곤하게 몰려오는 잠보다도 더 나른한 생각.

9시는 마감이 임박한 시간,
소음은 찬 공기보다 더 벽을 잘 탄다. 벽을 타다가 부서지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자잘한 소음이 창턱에 닿는다. 이 건물엔 몇 개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아무튼, 9시는 쉬었다 가기와 숙박의 경계점이다. 그래서 복도엔 9시 이전이 붐빈다. 그들은 구멍 하나와 좆 하나를 차고와 그 구멍을 메우려 애쓸 것이다.
반 토막 연애를 위해 자동문은 열리고 카운터 안내양의 친절한 멘트를 들을 것이다. 일반실은 4만 5천원, 특실은 5만 5천원, 대실은 2만 5천원, 세면도구는 별도로 천원을,...

엘리베이터는 딱 두 사람의 뒤를 자를 때가 잦다.

거울 속에 들어 있는 각자를 탐색하며 각자의 문으로 스민다. 복도엔 오래전 상영이 끝난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죽은 배우의 얼굴도 걸려 있다. 그녀는 늘 웃고 있다. 이 빌딩이 철거되거나 이 복도가 해체될 때까지 그 웃음을 잃지 않을지 모른다. 복도는 깨금발을 놓지 않아도 좋을 만큼 싸구려 융단이 깔렸고 융단 아래에선 가끔 작은 벌레들이 압사한다.

나는 그들이 사는 지방과 다른 지방 사람이다.
그러나, 비슷한 수도권에서 상주하는 터이므로 그 지방은 유사지방이거나 혹은 지방산과 글리세롤이 결합한 유기 화합물 정도로 착각하길 바라는 정도.

혼자 살림을 하고 또 내일이면 이 살림집에서 방출되겠지만, 나는 이 살림살이들에 익숙하다. 작은 냉장고와 50인치 가까이 되는 텔레비전과 낡은 사양의 컴퓨터와 욕실과 침대와 화장실, 한 놈이 질식사하기에 딱 좋은 공간. 그래도 창은 멀리 내다볼 수 있다. 몇 개월째 나는 나를 죽이는 연습을 하고 있고 약간의 시행착오로 아직 나를 절단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사실 내 죽음에 대한 연민에 우선 치중하다 보니 교살 된 흔적 없이 발굴된 나는 아직 이 방 밖으로 운구되지 못하고 있는 셈.

엘리베이터에서 P를 마주친 건 우연이었다.
수만 갈래 경우의 수 중에서 어처구니없는 경우의 수인지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P와 나 딱 둘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마주친 건 아니다. 승강기 좁은 공간에선 시선을 두기 딱히 어렵고 골똘히 상대를 쳐다볼 수도 없어서,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게 되는데, 어떤 사내의 어깨선 옆으로 끝이 마모된 유리창에 P가 비쳤다. 아주 짧은 순간, 하필 모텔 승강기에서 오래전 찢어낸 장면의 자투리를 잇듯 당혹스러운 순간이 번쩍하다가 잿더미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순간의 판단이었지만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P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아무런 표정이 없다.
쇠줄이 승강기를 들어 올리는 소리, 벽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1층에서 8층까지 오르는 시간은 지루한 5년보다 더 길었다. 도둑질하다가 들킨 기분, 도둑질하는 여자의 뒷덜미에 손을 얹어놓은 느낌. 폐소공포증 같은...갑자기 발이 잘려나간 듯 몸이 무너질 듯...하필... 에이 씨팔...이 목구멍에서 꼼지락거렸다. 사실 몇 초 사이를 이렇게 과장하기는 싫지만, 직사각형의 들것에서 오래전 어떤 순간이 눌어붙은 건 슬픈 일이고 웃기는 상황이었다.

칼등으로 대가리를 쳐서 기절시키는 게 예의 아닐까? 물고기는 퍼덕거릴 뿐이지. 악악대지 않으니 미안하지만, 산채로 저며지는 거지. 더러 아가미에 칼을 넣어 피를 빼는데 피가 가장 먼저 상하니까 피가 빠져나간 몸은 빈혈처럼 물고기는 당혹스러울 거야. 머리통과 몸통이 분리된 물고기가 계속 입을 벌린 채 제 살점을 집어먹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감회란,

봄에는 도다리가 빵이 좋다. 비린 기름기조차 고소한 맛이 난다. 껍데기를 벗기고 도톰하게 저민 살이 기와지붕처럼 켜켜이 누워있다. P는 개불이 징그럽다며 마다한다. 서해 쪽은 주로 갯벌을 보기 십상이다. 만조와 간조 사이는 5시간 59분인가 시차가 생긴다는데, 저물녘까지 바다는 비어 있고 저녁에 으르렁거리며 바닷물이 차는지. 늘 펑퍼짐한 골반을 뉘고 바다는 누워 있다.
노을은 우울증을 증식하고 핏빛에 감염되어 죽고 싶은 충동이 더 쉽게 일어난다는 말은 사실일지 모른다. 하루 평균 12시간 25분 동안의 비우고 참. 간조와 만조 두 번, 새참 먹는 일도 없이 오락가락하다가 저물녘이면 벌겋게 변하는 서쪽. 서쪽은 어쩌면 죽으러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해 쪽보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들이 무슨 점 찍어 놓은 것처럼 다닥다닥한지도, 망망대해는 없다는 듯이. 여기저기 드문드문 공룡이 발자국을 찍어놓은 것인지도.
서해 쪽에서 와서 술을 마시면 취하는 것이 죽는 거 같고,
사실 엄살이지만, (죽고 싶다, 는 엄밀히 아직 살았구나, 아 살아서 다행이구나, 역시 살아 있구나, 와 반어적 동격이다.)
사라지는 빛깔의 마지막은 아릿하게 어둠의 이불자락을 당긴다. 먹어야 사는 것, 싸야 사는 것. 너무 단순한 일엔 숨통을 열어주어야 한다며, P는 철새가 한 지점을 잊지 못하고 돌아오듯 늘 한 자리로 돌아온다. P는 서쪽 해안선 모퉁이를 닮은 표정을 소주잔에 떨군다.

간혹 바닷가엔 파도소리라는 관객이 있다.

P의 손가락에선 늘 진한 니코틴 냄새가 난다.
술을 마실수록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지만, 내가 나가떨어지기 전에 취하는 법이 없다. 오빠, 내가 세상에서 꼭 한번 먹고 싶은 게 있는데...알아맞춰 봐...식물성?, 동물성?, 뭐 그야 당연히 동물성이지, 난 풀 뜯어 먹는 거 싫어. 음, 세상에서 꼭 먹고 싶은 거라면, 무지 희귀한 것이겠는데? 뭐 그렇게 희귀한 것도 아냐. 밭에 가면 주렁주렁 달렸어. 무슨 밭?, 밭에 열리는 동물성?...세상 모든 밭이지 뭐...난 대가릴 굴리는 거 싫으니까, 자뻑 자수해라. 뭔데? 내가 구해줄게. 오빠가 주면 참 좋긴 해. 줄래?...뭔데?...음, 거..머시냐 하면, 난 커다랗고 꺼먼 자지를 작두로 싹둑 잘라서 프라이팬에 다글다글 볶아먹고 싶어. 거 있잖아, 곱창이나 막창처럼 쫄깃할걸.
ㅎㅎ..거참 좆, 까고 굽는 소리네. 니가 적당한 놈 찾아서 잘라 먹든 볶아 먹든 맘대로 해라. 내 건 떫고 맛없다. P는 꽁초를 소주잔에 던져 넣고 검지와 중지에 엄지를 끼워 넣어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귀여운 띱,떼,끼,오,빠,
낮은 소리를 붕어 입처럼 뻐금거린다.

나는 그리고리 피델만이라는 사내가 좋아요. 100만 달러 상금을 거부하고 칩거하는 똥폼이 멋지잖아요. 돈도 거부하고 거지처럼 사는 탁월한 선택, 희귀종이잖아요. 혹시 알아요. 그 사람이 이 우주의 신비를 규명할지. 페르마나, 케플러나, 골드바흐나 다 추측을 남겼지만, 몇백 년 동안 못 풀고 있는 문제. 그런 골칫거리가 매력이 있는데 샘, 제가 골드바흐 추측을 규명해 볼까요? 단순한 내용을 증명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다 바보예요. 눈빛이 선명하고 입술이 야무지지만, 나는 P의 말이 그냥 내지르는 말에 불과하단 걸 잘 안다.
P는 사실 수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머리 좋은 아이의 특징이지만, 풀이과정에 대해서 정확히 꿰뚫고 있으면서 문제를 풀어달라고 내밀며 나를 가지고 놀고 싶어하는 버릇. 설명하는 순간, P의 눈은 창밖으로 달아나고 몽상에 젖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멍해지는, 선생을 쓸데없는 사역에 놓아두고 딴짓하는 영민함. 늘 그런 식이지만 나는 사실 P의 어머니에게서 매달 고액을 상납받고 그 선생질의 부가가치를 누리고 있는 형편이라 이 맹랑한 천재를 무시할 수도 없다.
P는 다분히 정상적인 여고생, SKY대 정도는 떼 놓은 당상인 수재이지만, 엄마가 잠든 시간에 몰래 아파트를 빠져나와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고 새우깡이나 과자부스러기를 안주로 한밤중에 홀짝거리는 버릇을 뺀다면 지극히 평범한 아이다.

[오컬트]

썩션, 3M 강화 도자기 이빨이 빛나는 의사가 외친다. 치조골에서 고름이 한 덩이 뽑혀나간다. 긴 머리칼이 콧등을 간지럽혀 견딜 수가 없다. 이 여자는 지금 도굴꾼처럼 찌르고 쑤시고 파헤친다. 마비된 턱에선 게거품이 흐르고 다시 썩션, 굴착기처럼 오가는 차가운 금속들...입속에 교량을 세우려 이빨을 나사처럼 깎고 있는 중. 의사의 침이 입속으로 튕겨오는 건 아닐까. 낯선 향수 냄새가 지독하다. 숙련공의 손처럼 빠르게, 민첩하게, 부드러운 목소리인 척, 아~~,하고 자꾸 입을 벌리라 하고 벌린 입으로 썩션, 썩션, 썩은 말이 자꾸 넘어온다.
의사는 포효하는 입을 수리 중. 포효하는 사자 목소리를 깎고 브릿지를 설계 중. 오늘도 여러 개의 입속에서 발굴한 벌레들을 박멸 중. 이 의사는 입안의 세계에 집중하는 중. 입안의 부서진 뼈들을 철거하는 중. 다시 단단한 말의 뿌리를 건축하는 중. 수많은 허구를 질겅거린 상한 이빨들을 구제하고 교각을 세우는 중. 이 의사는 입안의 불순한 세력과 항거 중. 썩션, 썩은 물질들이 작은 구멍을 향해 쏜살같이 솟구치는...
졸리다. 통증보다도 무거운 잠이 엄습한다. 냄새가 역하다. 더럽게 아가리를 벌리고 두 시간, 속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은 설탕이 먹어치운, 커피가 끼얹은 삭은 치열이 재건축을 기다리는 폐허처럼 스산하다. 피를 삼키고 뱉지 마세요. 얼음찜질 잘하세요. 또 오세요.
사무적인 간호사의 말을 뒤로하고 치과를 빠져나온다. 이 의사는 늘 친절하다. 그녀가 건네는 봉투도 늘 친절하다. 딸아이의 천재성이 자신의 우수한 유전자를 그대로 수용한 탓이라는 확신한 만큼 다부지고 늘 확신에 차 있는 짱짱한 모습.
그러나 얼마나 괴기스러운가. 평생 입안을 들여다보고 고름이나 핏물을 빼라. 썩션, 썩션, 앵무새처럼 외치는...그래서 지방대 출신이 아닌 명문대 출신 의사를 만들고 싶어하는, 그러나 어쩌죠... 아이는 문과인데...문제 없죠, 그 아이가 지금은 관념적이지만, 나중엔 다시 전과할 수 있는 아이죠. 교양과정 마치고 다시 의대로 진학할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놔두죠. 분명 훌륭한 닥터가 될 아이니, 잘 보아 주세요. 아무렴, 천재지요. (천까지 셀 수 있는) 아이는 많으니까를...썩션, 의사로 살면 되었지, 지방대 출신 치과의사란 것이 핸디가 되나...썩션,
그러나 P에 대한 꿈은 눈부시단 걸 안다. 대물림할 것은 따로 있다. 부와 신분과 눈부시도록 황홀한 삶...혹은 가보지 못한 세계에 가보는 것.

교정한 잇바디처럼 가지런한,

생활은 수리할 수 있다. 거리엔 유령과 빈티지룩이 넘쳐 흘러가고 나는 내가 화장되었을 때 도자기처럼 빛나는 앞니 네 개가 부서진 다리처럼 고화력에도 견디고 남을 것이다. 또 금 쪼가리도 조금, 노랗게 웃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무지근한 아가리를 들고 끙끙거리며 걷는다. 아무래도 나에게 치명적인 경고를 입안에 심어둔 건 아닐까. 터무니없이 강단 있는 여자.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수1까지, 중1 때 수2까지 공부한 아이, 이미 초월함수 미적쯤이야 껌인 아이. 고장 난 테이프 돌아가듯 헛바퀴 도는,...사실, 나보다 더 수학을 잘하는 학생. 분명 천까지 셀 수 있는 천재.

비는 관념, 비는 알코올 냄새, 비는 우울한 상상력,

비가 내린다. 정수리에 주삿바늘을 찌르듯 오는 비. 물컹한 저녁, 집으로 가기 싫다. 뼈째 썬 생선회와 소주가 딱 좋은 시간. 오늘은 소주가 달큼하다. 횟집은 아직도 쪽발이시대 그대로인 듯, 사시미, 스시, 세꼬시, 스끼다시, 와사비, 사라, 오시보리, 오차, 와리바시, 아나고, 우나기, 마구로, 복지리,...
어순이 비슷하니 왜놈들이랑 우리는 비슷한 언어이지만, 왠지 그렇다. 죽창으로 아녀자 성기를 쑤셔대고 그 장면을 어린 아들이 보게 하고 임산부에게 매독균을 주입해서 죽어가는 모습을 관찰하고...우리는 마루타였고 노예였고 그들의 밥이었다. 밥이었는데도 아직 밥그릇조차 그들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식민화한 잔해들을 입에 달고 사는 이 말버릇은 어쩐다? 왜놈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지만, 그들이 싫다. 그 개자슥들은 여전히 우릴 식민지 비렁뱅이로 보고 있다. 좆만 한 새끼들; 좆만 할 왜(倭), 그놈들 놈(者).
비가 온다. 여전히 우울한 시대. 우울은 거추장스러운 옷처럼 남루하지만, 언제든 스멀스멀 기어와 안긴다. 속삭인다. 너 죽고 싶지 않니? 너 이 세상에서 꺼지고 싶지 않니? 너 멸종되고 싶지 않니?
개차반,─개가 먹는 음식, 즉 똥을 먹듯 안주를 질겅거린다.

[다시 포스터]

자살을 선택하는 얼음 물고기, 송어를 보고 있다. 레인보우 트라우트─아, 무지개 송어 붉은 살점들...스틸컷의 그녀는 웃는 듯 마는 듯 표정이 애매하다. 이미 식은 웃음, 식은 표정, 지금은 영화 속으로 들어와 완벽한 내면연기를 소화할까.
그녀의 유작을 본 적이 있지만, 기억이 없다. 하나의 표정이 굳어 있는 포스터를 가만히 눌러 보며, 바랜 사진 같은 자신의 살점을 찍어 보며, 그녀는 지금 기체처럼 공기처럼 이 방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가지런한 이빨이 내비치는 웃음의 물기를 닦아내며, 그래 맞아. 나는 그때 죽고 말았어야 했어. 그래서 죽었어, 라고.
거봐, 별거 아니잖아. 왜 그렇게 살아?, 빙충이...
그녀는 표정을 풀지 않는다. 뭔가를 막연히 보고 있다. 아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냥 멀겋게 뜬 눈. 사실 초점이 없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가끔 눈동자를 돌려보는 건 아닐까. 자살한 배우가 내려다보는 침대에서 말라비틀어진 정액과 분비물. 누군가의 몸이 겹겹이 쌓인, 강력 세제로도 씻겨지지 않는 얼룩을 뒤집어쓰고 잠들어야 한다. 몽정에 끼어들지도 모를, 저 모호한 표정.

프로잭(prozac) 한 알을 입안에 틀어넣는다.

◈ METRO

확신이 없다. 늘 미래는 그렇다. 강요를 수용했고 잔소리를 음악으로 들었다. 엄마는 날 엄마보다 나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그냥 자신의 구겨진 체면, 자존심, 만들다 만 탑, 친구의 친구, 친구의 이웃의 친구, 지나가는 사람에게조차 뭐 하나 선명하게 내세울 명분을 찾는 거. 그런데 정작 엄마는 무엇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자신도 모른다. 그냥 숨을 나눠 가졌기 때문에 서둘러 익히고 서둘러 학습하고 누구보다 빨리─, (설마, 빨리 죽으란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떤 면에서 내 막연한 미래에 몰입해 있고 몰입에 충실하다. 그래서 엄마는 불쌍하다. 부서진 엄마는 짐승처럼 산다. 일과 돈 그리고 허무한 밤.
엄마 곁에는 아무도 없다. 사실 아무도엔 내가 포함되지만, 한밤중에 물끄러미 창밖으로 목을 빠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지도, 몰아낸 습지들을 떠올리는지도, 습지에 발이 빠진 말을 끌어올리고 있는지도, 엄마의 윤곽엔 어둠이 너울거리지만...엄마는 슬프다. 나 때문에 자신 때문에. 걸쇠처럼 'ㄱ'자로 꺾여 침대에 쓰러진 엄마에겐 독한 양주 냄새가 나지만, 엄마는 사랑스럽다.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쌍한 여자, 엄마.

까마귀들이 깍깍대는 수업은 재미없다. 저 고장 난 바퀴들은 교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같은 말, 같은 억양, 같은 농담으로 수업을 땜빵한다. 치마 속을 흘끔거리는 음흉한, 그러나 신사인 척, 고상한 척, 첩자를 떠는 놈들. 물린다.

모퉁이를 자른다, 자른다. 면도칼, 면도칼, 모퉁이가 둥글게 돌아나간다. 모서리를 깎는다, 깎는다. 모서리가 둥글게 돌아나간다.
심장에서 피는 50cm/sec, 내 몸 모세혈관의 길이는 9만 6천km, 심장에서 뛰어나간 피가 되돌아오는 시간 대략 46초..미친 듯이 도는구나. 모세혈관을 돌아다니는 피는 얼마나 꼼꼼하게 나를 누비나. 피를 깎으면 피, 피를 도려내면 피. 푸른 정맥을 흘러가는 빨간 피, 피, 미친 피.
흡혈박쥐는 피에 취할까, 몽롱해질까, 아득해질까. 뱀파이어는 피에 굶주리면 눈동자가 빨갛게 변할까. 눈 깜짝할 사이는 1/40초, 38,300리터 소변을 보고, 127,500번 꿈을 꾸고, 27억 번 심장이 뛰고, 3,000번 울고, 540,000번 웃고, 50톤을 먹고, 3억 3천3백만 번 눈을 깜박거리고, 49톤의 물을 마시고, 563km 자란 머리칼을 잘라내고, 4천억 마리 정자를 생산하는 남자와 연애하며 400개의 난자를 다 소모할 때까지 나는 잘살까, 잘살까. 지겨운 숫자들, 숫자들.

깨진 화병,

같은 아빠를 닮긴 했다. 아니 부서진 화병이 맞을 것이다. 스스로 출구를 버리고 난간을 향했던 아빠는 엄마 뱃속에서 버린 꼬리처럼 흔적 없다. 스스로 바깥을 향해 돌진한 이른 새벽 고가도로를 부수며 자신도 부순 것을 자신도 몰랐을지 모른다. 아빠는 기억에서 한 톨 자라다가 말았다. 어린 나를 과속으로 외면한 나쁜 아빠. 길거리에서 가끔 아빠를 발견하곤 하지만, 우린 서로 모른 척 헤어진다. 아니다, 서로 모른다. 아빠가 종지부를 찍은 것은 기억의 섬모에 관한 것이고 기억하기 싫은 것이고 기억하려 하면 서러운 것이고 폐기 처분된 것이고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빠는 길거리에 넘쳐나지만, 역시 우리는 외면한다. 너무 일찍 엄마를 과부로 만들어 놓은 아빠는 나쁜 사람이고 잠시 선하고 부드러운 남자였을 뿐이고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종적을 감춘 사라진 사람이고 나는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지 말아야 할 사람.
아빠에게선 고상한 냄새만 나고 향기조차 그럴듯하게 오인이 되고 정작은 아무런 표정조차도 말투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가 엄마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려야 한다는 것. 서로 잔인하게 지우며 그리고 다시 지우며 울어야 한다는 것. 아빠란 사라진 추상은 지독하게 되살아난다는 것. 아빠는 엄마와 날 송두리째 왜곡시켰다는 것. 이젠 아무런 기척도 없다는 것. 꿈에서조차...
그 남자가 아빠를 닮긴 했다. 아니 그렇게 갖다 붙이면 그렇다. 그러나 사실 너무 다르다. 그 남자는 아직 숨을 쉰다는 차이 말고 그 남자는 목소리가 낮다는 비슷한 점 말고. 사실 차이를 알 수 없다는 점. 사실 모른다는 점. 나는 몇 살 때까지의 기억이 오롯할까. 그래도 주홍글씨 같은 장면이 날 자꾸 구기면 서럽다. 부재,─는 늘 같이 있음이 아닐까. 그런데 어디 있다는 걸까.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그래, 아빠는 길거리에서 떠돌다, 잠시 집을 잊은 것일 거야. 잠시 착란 때문에 집으로 오는 길을 잃어버린 거야. 그렇게 도대체 몇 년이 흐른 거지...

[귀머거리새(그루하리)와 멍텅구리 의자]

눈을 감고 있다. 천장이 보인다. 안 보인다. 눈을 감을 때 더 또렷이 보이는 게 있다. 몸속의 뼈는 몇 개였더라...그것들도 누우면 편해질까. 양이란 이미지는 머릿속에 없다. 그러면 공룡을 세어볼까. 코엘로피시스, 플라테오사우루스, 헤레라사우루스, 에오랍토르, 브라키오사우루스, 알로사우루스, 세이스모사우루스, 콤프소그나투스, 트리케라톱스, 돌대가리; 파키케팔로사우루스 , 식칼같은 놈; 벨로시랩터, 파라사우롤로푸스, 뿔돌이; 스티라코사우루스, 갈리미무스, 이빨종결자; 아나토티탄, 테리지노사우루스, 힙실로포돈, 카르노타우루스, 긴목덜미; 엘라스모사우루스, 왕눈이; 오프탈모사우루스,...이름들이 다 요따위지..., 사실 아무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둘리 하나, 둘리 둘, 둘리 셋, 둘리, 둘리, 둘리,...

암컷에 홀리면 귀먹는 새.

암컷 꽁무니에 미쳐 오직 그 생각밖에 없는 놈. 민감한 청각이 갑자기 무뎌지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멍청한 놈. 산탄이 온몸에 구멍을 뚫어 놔도 시원찮을 놈. 왜 수컷들은 늘 미쳐 있는 걸까. 물컹한 어둠을 덮어도 춥고 이불을 덮어도 춥다. 오한처럼 떨린다. 나는 왜 밤마다 고문을 당해야 하나. 썩은 나무토막 같은 것이 나를 덮치고 내 발가락을 만지고 내 사타구니에 뱀을 넣고 내 배꼽에 침을 바르고...
나는 왜 몰랐을까.
더러운 냄새가 나는 들개 같은 놈이 컴컴한 어둠처럼 눅눅한 습기로 날 끌어당겼는지 나는 왜 그때 몰랐을까. 트렁크를 입고 덜렁덜렁 거실을 걸어 다니는 코끼리 같은 놈. 썩은 입 냄새, 술 냄새, 담배에 찌든 썩은 땀 냄새...나는 왜 새처럼 떨며 석고처럼 굳어 있었을까. 이 무서운 꿈이 빨리 지나가기를. 소리치고 싶었다. 입을 막은 손바닥을 깨물고, 미친 듯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컥컥 숨이 막혔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 관에 넣고 못을 박는 것처럼 답답했다. 도대체 왜 날 괴롭히나...
슬립만 걸친 엄마가 비틀거리며 내 방에 들어섰다. 취한 상태로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 울다,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거실을 부수고... 술 취한 개 한 마리가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한참─,
나는 멀뚱멀뚱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낭자한 엄마가 불쌍해 보였다. 엄마는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엄마가 말쑥한 사람을 친구라며 집에 데려오고 육 개월 남짓,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단잠을 잃었다. 슬프지 않았다. 그냥 우울했다. 그냥 왜 밤은 공포인가. 밤은 무서운가. 밤은 외로운가. 밤은,

그 후로 몇 년. 고3─,
지긋지긋한 날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우리 집엔 엄마와 나 외의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도 들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집은 고요하고 집은 썰렁하고 집은 아늑했다. 거실엔 뿌리가 뽑힌 나무 두 그루 걸어 다니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또 각자 방으로 사라졌다. 가끔 엄마가 방으로 와서 침대를 다듬고 이불을 토닥거리고 침대 옆에 앉아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도 알았다. 그 순간에도 나는 깊이 잠든 척 깊고 깊은 잠에 빠진 듯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수화를 안 해도 알아들었고 표정이 없어도 집에서 서로 할 일을 알아챘다. 침묵보다 조용한 침묵. 그래도 따뜻한 집. 그러나 그 조용한 방에도 깊은 냉골이 거실을 돌아다녔다.
엄마는 마약처럼 술을 마셔야 잠들고 술이 엄마를 재웠다. 그래도 늘 아침 5시에는 스프링처럼 일어나는 엄마, 스펀지처럼 눅눅하다가 아침이면 잘 마른빨래처럼 걸어 다니는 엄마.

잠이 온다. 잠이 늪속을 걷는다. 발이 빠진다. 허우적거릴수록 잠기는 숨을 내쉬는 만큼 가라앉는다. 잠이 온다. 그래도 머릿속은 하얗고 뿌옇고 눈물이 난다. 안항구에라, 프테라노돈, 케찰코아툴루스, 닉토사우루스, 케아라닥틸루스, 크리오린쿠스, 포베토르, 듕가리프테루스, 타페자라, 오르니토데스무스,...나는 익룡이 좋다, 한때 하늘을 날았고, 그리고 모조리 멸종된,

지금까지 신이 잘 한 것은 사납고 덩치 크고 지축을 쾅쾅 울리며 천방지축인 공룡들을 일시에 쓸어버리고 한순간에 앗아버리고 돌에 화석을 심으니, 참 보기에 좋았더라, 이다. 그리고 다시 인간이라는 쓸쓸한 동물을 경작한 무모한 짓. 그래서 신은 우주 끝으로 끊임없이 불장난을 하고 계시단 것.

  INS.

샘, 낙인법이라고 아세요?
그게 뭔데?
몽골 고원에서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이 가축의 엉덩짝에 도장을 찍는 거.
그건 왜?
난 그런 식으로 외워요. 뇌에 도장을 찍는 거죠.
쓸데없는 걸 자꾸 외우면 머릿속이 편해지는 거.
넌, 암기 달인이라고 봐야지. 근데, 암기력은 수단일 뿐인데.
공부가 다 수단 아닌가요.
머리에 우거지 같은 것들을 쑤셔 넣어두고 하나씩 아는 척하는 거.
시험은 바보가 된 상태를 확인하는 거.
그래도 전공을 만나면 얘기가 달라지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지. 너 관습적 룰 배우잖아.
도덕 잘 배워서. 도덕적으로 살게요. ㅎㅎ,
그런데 도덕적인 놈들이 도덕은 새까맣게 까먹는 건 뭐죠.
룰을 야금야금 어겨야 뭐 잘 사는 거 아니예요?
넌 수학 참고서를 통째로 외우는 건 무슨 심보냐?
그냥 심심해서요. 애들이 나보고 머리만 좋고 공부 안하는 아이로 알아요.
애초부터 은따였어요.
인정해. 니 머릿속 세계는 이미 공항이지.
그런데 샘보다는 오빠라고 부르면 안되나. 난 혼자라 멍청한 오빠 하나 필요한데.
오빠...는 카페 마담이 좋아하는 호칭인데, 더구나 니 오빠 될 생각은 한 톨도 없는데.
선생에서 오빠로 넘어가면, 넌 나를 지금보다 더 얕잡아 볼 거고,
지금 내가 선생인 건 특권이고 당연한 권리야.
그러니까 혼동하지 말도록. 샘...이 말도 틀린 말.
선생님, 이라고 꼬박꼬박 호칭할 것.
그래야 상부상조가 생겨. 뭐든 대충 우려먹지 마.
호칭이 별거야, 멍청한 아저씨라 부르지 뭐.

그래 맞아.

멍텅구리지. 단지 몇 살 더 먹은 것 말고, P보다 나은 건 없다. 대학에서도 역시나 멍텅구리가 멍텅구리 이론을 나른하게 강의할 뿐 새로운 것이 없다. 학부과정이 모조리 교양과정이지. 뭘 달리 배우나. 배워서 틈틈이 익히면 좀더 쓸모 있는 인간이 되려나. 대학은 머릿수대로 수백씩 삼키고 갈갈거리는 공룡일 뿐이다. 교양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휴학하고 입대하고 물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군대시절은 졸병 때와 고참 시절 두 가지다.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TS 훈련에 참가한 고참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내무반은 이상할 정도로 한가했다. 한 달 후 그들이 복귀하고 산적 떼들이 몰려온 듯하다가 차례대로 하나둘 사회로 방출되었고 일 년 남짓 졸병생활은 생트집 얼차려나 얻어터지는 거나 정신적인 고문 그러나 견딜만한 것들, 줄을 잘 선 탓으로 이내 고참이 되었다. 일병인데 내무반에 너덧 명 빼고는 다 졸병이 된 군생활 봉 잡은 군번.
말년에는 특수무기에 있는 차 병장이랑 쓸데없이 노닥거렸는데 그는 제대를 한 달 남겨놓고 갑자기 죽었다. 물론 사인을 나는 모른다. 이 년 동안 동종 역할로 예하부대와 상급부대, 전화선으로 업무를 주고받고 전령을 보내는 사이. 군대행정─가라행정을 열심히 꾸며댔지만, 그가 갑자기 죽은 것은 뭔가 허전하게 귀 하나가 잘려나간 것처럼 허탈하고 이상했다. 전화로는 수없이 말을 나누었지만 몇 번 보지도 못한 그는 군생활을 살아서 마치지 못했다. 한동안 그가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걸어오고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다는 환청에 시달렸다.
의정부 시장에서 팬티부터 갈아입고 민간인이 되었다.

AJ는 그냥 아는 사이였고 그는 말하자면 브로크였다. 유한마담을 요리하고 그 자제들에게 대단한 학습효과를 보장하는 일대일 강사를 수급하고 선납한 한 달 치 수강료를 그가 빼먹는 방식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복학에는 관심이 없던 나에게 그가 한 건 했다고 전화한 건 제대하고 완도에 처박혀 있으면서 여기저기로 출조나 다닐 때였다.
호구지책이라고, 골 빈 건달짓 그만하고 쌈박하게 놀아보자고... 그러려면 쩐이 필요하니, 이번 건은 거의 산삼이다, 뭐 어쩌고 떠벌리는 말을 알았다 해볼게, 하고 상경을 결심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AJ는 나 말고도 몇몇 선수를 더 대고 선납 삼 천, 과목당 수강료 이 백씩, 그리고 연말에 오천을 받기로 구두 약정을 받은 거였다. 과목별 선수들이야 한 달 후부터 발생하는 수강료 이백을 먹는 것이지만, AJ는 팀을 짜고 그 후론 뒷짐 지고 거저먹는 거의 억대 노다지 계약이었던 셈.

사실 우리 아이는 고교과정은 예전에 다 마쳤어요. 노파심이지만 행여 잊어버린 것이 있거나 혹시 혼동하는 것들이 있으면 꼼꼼히 집어주란 것이지, 새론 것 마구 주입하지 마세요. 초등학교부터 짜놓은 플랜에 따라 우리 아인 완벽한 상태이고 전국 최상 명문인 DS고에서도 단연 탑이죠. 다 된 밥, 제발 재 뿌리는 짓 하지 마시고, 아셨죠. 잘 부탁한다가 아니라 거의 경고와 분위기 초 치지 말라는 협박이었지만, 간단하게 상납관계는 성립되었다. 나는 거저 누워서 배 젓는 소리만 들으면 되었다. 배는 곧 저 호수 건너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닿을 것이다.

AJ는 침 바른 말을 척척 잘도 안겨 붙이는 출중한 외모를 가진 건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이미 혀 세 치로 벌써 아우디 신형 재규어 XF R을 끌고 이십 대 후반에 벌써 윤기가 나는 성공한 건달(건달바: 향(香)만 먹고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놀고 먹는 신선)로 보인다. 어떤 면에선 지독하다. 몸은 조각과 같아서 한순간도 방심하면 균형이 깨지고 군살이 붙으니 매일 운동을 하고 수십 종의 약을 보약처럼 먹는다. 닭가슴살이 그의 유일한 주식 기타 음식은 간식일 뿐. 그의 철학은 좆심과 이빨로 세상을 편하게 즐겁게 살자 주의이다.
그는 비상한 머리를 가졌지만 공부에 그 머리를 쓴 적 없다. 고교 시절까진 주먹 꽤나 휘두르며 놀자판이었고 도시개발구역으로 편입된 임야와 몇 수십 마지기 때문에 갑자기 졸부가 된 집의 외아들이다. 그의 미래는 아버지가 사망하면 물려받을 상속분의 재산만큼 확실하다. 그러나 한평생 농부로 살아온 아버지는 한푼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고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돈이 녹아버리니 땅속에 묻어야 한다며 자꾸 토지매입에 재투자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한 번 재미 본 것은 영원한 재미다 그런 식. 그래서 그는 언제가 상속이 되어 고스란히 그 재산이 손아귀에 쥐어질까가 고민이지만, 그가 궁색한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카사노바 뺨치는 위대한 지골로가 되는 것과 최상의 도박사로 거부 반열에 오르겠다는 황당한 돈키호테 같은 성격. 밤에는 하우스를 들락거리거나 짬나면 강원도 태백 카지노 금광의 광부를 자처한다는 것. 낭비벽이 아니라 스스로 한순간도 소중하니 즐기는 것이라는 고무줄 철학. 일찍이 리모델링과 인테리어를 마쳤다는 그의 물건은 이북에서 최근에 개발한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신형 모델이고 미제 하드코어 배우의 그것만큼이나 위협적이고 위력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를 말좆대, 포르노 자키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사실 몇 살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내가 형이야, 그런 정도로 굳어진 것이고 대충 그런가 보다 하는 사이이지만, 간혹 술을 퍼마시고 눈빛이 노릇노릇해지면 어린아이처럼도 보이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 SOLO HAY UNA PARA ME


오직 나만을 위해 있어주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오직 나만을 위해 있어주오

당신 곁에 늘 있고 싶은 욕심
멈춰 세워 두지 못하고 자꾸만
부풀어가게 그냥 둡니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지만 당신을 밖으로 내 보내는 일
쉽지가 않더군요.

잠시라도 비워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사지가 마비가 될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나 봅니다.

그런 당신을 하늘이 부르는 날까지
놓지 않으렵니다.

사랑한다는 것
생의 지독한 작업인 줄 알면서도

칠레 태생의 세미노 로시(Semino Rossi)가 부르는 오직 나만을 위해 있어 주오(Solo Hay Una Para Mi), 아침에 틀어놓는 음악이다. 멜랑콜리 신파조의 유행가가 경쾌한 듯하면서도 특이한 음색이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스페인어는 무슨 새소리 같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애절한 느낌보다는 자, 아침이 되었으니 뛰어나갑시다, 혹은 눈 감아. 이렇게 외치는 듯. 소통하는 것과 내포는 다를 수 있다.

10월 말경,

모든 수업은 종료되었다. 문과에서 이과로 교차지원은 드문 경우이고 불가능한 선택이지만 P는 치대든 약대든 무난히 진학할 것이다. 문과에서 공부한 것은 내신을 위한 편법이었는지 모르지만, P는 그런 편법 아니더라도 탁월하고 비범한 재능을 가진 소수인 건 확실하다. 팀원들이 주로 이과과정에 해당하는 물리2, 화학2, 수학2, 등으로 구성된 이유를 대충 알았지만, 보통의 수재들이 밟는 형식으로 P가 의사가 되든 변호사가 되든 알 바 아니었다.
미래를 기획하는 능력이나 배후나 시행착오조차 이미 배제한 완벽한 플랜에 따라 그녀의 상류 계급 사회로 편입은 이후로 당연한 절차이고 당연한 노선이고 P의 미래 또한 전문직 종사자로 사회적 상층부로 편입해서 살 것이란 것은 내 쓸데없는 추측일 뿐이다.

마지막 봉투는 종전보다 더 두터웠지만 나는 꺼내보지 않고 여수행 열차에 올랐다.
22:50분에 출발, 새벽 4시가 넘으면 도착하는 무궁화호 열차, 옥양목 찢듯 대가리에 불을 켜고 껌껌한 어둠을 걷어내며 둔중하게 쇳덩어리가 구른다. 수많은 바퀴가 엇박자로 발을 맞추고 마차처럼 성난 코뿔소처럼 달린다.

시월의 바다가 소라고둥을 분다.

누군가 파먹고 없는 빈 소라고둥에 바다가 살짝 적시며 와서 울고 가는지도 모른다. 어시장엔 시궁창 냄새와 생선 썩는 냄새, 비릿한 갯내음이 섞여 아릿한 현기증이 인다. 언제였더라, 와 본 적이 있다. 수컷들은 흔히 첫사랑에 사무치고 마음 한 칸에 넣어둔 조약돌처럼 가끔 꺼내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보며 그때를 상기하는 이상한 동물이라는데, 그 아이가 내게 첫사랑일까. 첫사랑은 결정적인 무슨 짓을 한 거. 아니면 소의 엉덩짝에 낙인을 찍듯 화인을 찍은 뭐 그런저런 사연이 있는 관계...누군가와 닮은 점이 있다면 착각인지 착시인지, 묘하게 끌리는 점이 있는 것인지.
이유 없이 P랑 그 아이 얼굴이 겹친다. 그랬었구나. 시니컬하고 칼칼하지만, 깨끗한 웃음을 간직한.

스무 살쯤엔 거부하고 거절하고 반항하고 거역하고 몰아내고 싶은 때 한순간도 지루하고 한순간도 눌러앉아 있고 싶지 않은 부랑아의 시기. 스스로 좌절을 자초하고 절망을 알약처럼 털어내는 시기. 한순간도 답이 없던 시기. 고2 여름에 만나고 입대 후 얼마간 내 여자였던 그 아이. 자존심의 문제였을까. 자학이었을까, 나는 PX 옆에 있는 영내 교회 군종 집무실에서 그녀를 겁탈했다. 그녀는 아무 저항 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짐승 같은 놈을 받아주었다. 전투체육의 날; 수요일 그리고 주말엔 꼬박꼬박 의정부행 전철에 올랐던 그 아이.
어쩌면 자학이었는지 모른다. 얼마 후 나는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있고 그 여자와 잘 되어간다. 그러니 넌 가라. 너에겐 한 톨 마음이 없다. 미안하다. 나 같은 놈 말고 똑바른 놈 만나라.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리고는 미친놈처럼 웃었다. 울었다. 물론 그때 아무도 없었지만, 왜 그런 거짓말로 그 아이를 버렸는지 모른다. 그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아름다운 황후로 대접할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이게 변명이 될까.
논산 훈련소 훈련병 시절부터 그만두자. 그만두자. 뇌었던 마음의 정체를 나는 모른다. 내가 민간인이 아니니까, 너도 떠나라. 인간은 한순간도 기다리는 동물이 아니다. 무슨 자괴 같은...나는 나의 미래를 파기하고 싶었고 나란 모순을 악마적으로 즐겼다.
P는 그저 필요한 시점에 충분한 관계였을 뿐이고 총명한 제자. 어쩌면 그녀가 내 두뇌를 들여다본 그저 그렇고 그런 관계. 사실 관계란 참 피곤한 거. 사람을 하나 아는 건, 공연한 슬픔 하나를 살찌우는 거.

파도가 겨울 조각을 해변으로 간단없이 부려놓는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세상이 하얗게, 훌훌 벗고 알몸뚱이로 희디흰 수의를 걸치는 건 겨울이 와야 할 이유. 겨울은 어떤 것이든 하얗게 지우는 것. 그래서 태초에나 있었던 순백을 보여주는 것.

파도가 소라고둥을 들어 출정 나팔을 분다.

[겨울로 날아간 새]

뭔가 할 일 없이 빈둥거릴 때 시간은 사금파리처럼 쓸모가 없다. 어쩌면 사금파리로 시간의 손목을 긋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홍천에 있는 수타사에 들어가 책 나부랭이나 뒤적거리며 겨울을 보내자 하고 1월이 하순으로 꺾일 때 원룸을 내놓고 방이 빠지길 기다릴 즈음, 늘 고지서 봉투만 있던 우편함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샘,

아니 오빠. 안녕이라고 말해야겠네요. 그간 고마웠어요. 이 편지를 읽을 즈음 전 날아가고 있겠죠. 속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고 엄마를 설득하는 건 힘들었어요. 밴쿠버 UBC 대학은 중학교 때 와 보았는데 고등학교 졸업하면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인류학이나 발달심리학을 배우고 싶은 게 제 소망이에요. 사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아직 막연하지만, 절대 돌아갈 생각이 없는 곳이란 건 그냥 지워버리고 싶다는 것과 비슷한 말일 것 같아요. 결심보다는 운이나 기회겠지만 나는 겨울 길고 눈이 많은 나라가 좋아요. 애국심?... 그런 거 없어요. 나는 슬픈 기억, 답답한 기억, 뭔가 빡빡하게 숨을 조이는 우리나라가 싫어요. 그리고 엄마로부터도 좀 떠나고 싶어요. 엄마의 우울, 외로움, 그런 분위기에 전염되는 거 싫어요.

그래도 오빠가 좋았던 건, 남자가 아니라 친구 같아서. 나같이 예쁜 애에게 관심 없는 거, 여느 남자처럼 끈적댄 적 없다는 거, 그리고 못생겼지만 개성적인 거, 그리고 농담을 잘 못한다는 거, 그런 몇 가지가 기억에 남을 거예요. 사실 외로웠거든요. 아니, 늘 무서웠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늘 보이지 않는 폭력 그런 위협이 느껴졌어요.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더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게 꿈이고 그 꿈을 위해서 내 딴에는 지독하게 공부했어요. 엄마는 내가 없으면 곧 죽을 것처럼 그랬지만 금방 익숙해지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 간혹 안부라도 오빠가 좀 해 주세요. 저도 이따금 오빠에게 눈 내린 세상 한 통은 보내드릴게요. 세상은 모순덩어리지만 혹시 오빠가 보고 싶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나는 이 나라를 잊을 거예요.

오빠, 아니 샘. 전 공부하러 가는 것보다 어쩌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몰라요. 낯선 사람과 낯선 문화와 낯선 곳, 낯선,...
P.S.Y 드림.

  ◈ FINE

[연미복을 입은 가을]

나무는 발끝에서 모은 힘을 끌어올려 손을 만든다. 싱싱한 물관을 타고 올라 하늘로 뻗고 바람을 삿대질하며 컴컴한 지하의 기억을 버린다. 바닥에서 자란 말들을 손아귀에 쥐고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하고 수많은 손바닥을 펴고 뿌리와 둥치를 들어 올리려 날갯짓을 하기도 한다. 온몸에서 진이 빠지는 가을,

기진맥진 한 손들은 최후를 위해 푸른 혈관에 괸 피를 내비친다. 핏물을 물고 컥컥 쓰러진다. 즐겁게 나뒹군다. 서로 작열하는 눈빛 겹겹이 쌓아 다시 땅속의 말에 기울인다. 그때 손들은 귀가 된다. 그때 귀가 된 손들은 바닥보다 낮아지려 파고든다. 나무 한 그루 키만큼의 윤회.

가을엔 발목만 남고 손목만 남고, 갈라 터진 수피에선 쇳내가 난다. 온몸의 팔을 하늘을 향해 뻗고 벌을 받는다. 한때 수많은 손바닥의 축복과 호사를 누렸으므로, 그간 자란 말과 그간 키를 훌쩍 넘은 욕망의 가지를 부러뜨리며 원형의 시간을 안으로 감을 때.

가을이면 발달하는 감각은 분위기를 가장한 쓸쓸함일 것이다. 온몸의 여독이 추위 속에서 다시 고원을 향해 내딛는 꿈을 안으로 오므리며, 춥고 외로운 꿈으로 뻗은 길. 간혹 사계는 뒤바뀌기도 하는 것. 여름, 봄, 겨울, 가을,...

주차장에 낮은 소리로 그르렁거리는 아우디를 세우고 AJ는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이만하면, 백작의 품위다. 왁스가 된 머리칼처럼 번지르르한 웃음이 희디흰 금속 같은 이빨 사이로 샌다. 차 내부는 곧 이륙할 활주로를 향해 숨을 고르고 있다. 아파트 울타리 샛길로 R이 우아한 오월의 신부처럼 사각사각 은밀한 걸음을 옮긴다.

...전지적 시점으로 사방이 외면한다...

차는 이미 갈 곳을 아는 말처럼 고생대 기름진 유물을 시커멓게 산화하고 뿜으며 달린다. 외곽을 향하여, 거침없는 들판을 향하여...

감성돔 머리통이 접시 위 놓여 있다. 감성이 해체된 돔. 날카롭게 발기한 등지느러미는 접시배의 중심을 잡는다. 살들은 켜켜이 무지갯빛을 띠며 잔잔한 파도처럼 누워 있다. 고추냉이처럼 코를 찌르는 알싸한 잔, 잔, 잔이 쓸모없이 구르는 말들을 대신한다. AJ는 쌀쌀한 날씨인데도 반소매다. 견갑골에서 시작된 근육이 팔뚝으로 용암처럼 뻗어 있다.

[달콤한 방백]

인간의 업적은 한순간의 노을 그리고 노을이 머금은 붉은빛, 그리고 미련없이 가감하는 멸의 순간, 그리고 어둠을 덮는 것.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귀를 가진,
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급속하게 통과하는 의식.
필름은 금값이고 현상은 저렴한 시점으로 끼어들기 기술자 혹은 서술자의 특권. 리얼리즘과 콰이어티즘의 충돌.

레디, 앤드 고,

'내 몸은 거의 예술이지'
'뭐, 그렇다는 착각은 나름 숭고한 거'
'내 몸은 거의 환상이지'
'뭐, 그렇다는 착각은 마스터베이션'
'이십 대는 사이다; 뚜껑을 따는 순간 탄산이 미친 듯이 분출하지만 이내 잠잠한 것'
'사람은 분석적일 수도 있지. 그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잠시 엿듣게 됨.'
'삼십 대는 콜라; 뚜껑을 따는 순간 미친 듯이 분출하지만, 다소 검다는 차이'
'비슷한 말을 달리 운영하는 재미, 계속해 봐, 들리지 않는 만큼 흥미가 없군'
'사십 대는 적포도주, 잘 숙성된, 맛이 맛을 가라앉히고 깊숙이 가라앉은 맛, 진국의 맛, 붉은 맛, 깊은 맛, 이때쯤 진미를 알기 시작하는,'
'얼쑤, 철학적이군, 분석적이군, 또한 관념적이군,'

...전지적 혹은 관찰자적 시점
으로의 이행...

'포도주는 관능적이군, 육감적 깊이가 있군'
'오늘은 간만에 화창한 날이었어'
'보기보담 탄력적이군, 아직 탄력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 있군, 뱃살이 개념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나른함.'
'오늘은 몇 시에 노을이 제 모습을 가장 처연하게 보여 줄까...?'
'아직은 여자의 흔적이 있군, 아직은 관능이 살아 있어, 부분적으로, 흠결은 안 보면 그만.'
'이 멍텅구리가 몸이 산맥이란 걸 알까, 성급한 놈.'

개입; 속옷은 해변의 비키니보다 섹시하다. 역시 약간 가려진 맛의 신비적 감흥이 유발하는 착시.
통과의례가 생각보단 헐겁다. 이미 한 장 정도로 도포된 순간.

'너에게선 원숙미가 있어, 노련하고 신비적인.'
'너에게선 풋내가 나. 서두르다가 자지러지는, 그래서 기고만장하지만, 몇 분 못 견디는 성급함.'
'역시 맛은 맛을 관통하고 나서 생기는 것. 원숙미, 완숙미, 쓸쓸한 등골마저 느껴지는군.'
'너는 300초를 3만 초로 과장하고 싶겠지만, 너는 역시 급하군...너에게 충실할 뿐이야.'
'사실 나는 나로 충분한, 내 기분을 위해 너는 활짝 열 필요가 있어. 넌 나를 축복할 거야.'
'넌 동물적인 시점을 어떻게 조절할까 애쓰는군.'
'내 몸은 예술.'
'네 몸은 과장과 억지. 골 빈 상태를 닭가슴살로 메운 상태.'
'나의 분출 욕구는 활화산. 너는 지금 불의 맛을 느낄 너는 필요 이상 흥분하고 있군.'
'쓸쓸한 놈. 넌 모르겠지만, 난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싶어.'
'난 우월한 짐승. 제3차 대전은 내 온몸에서 발산할 거야. 넌 전쟁의 잔혹과 전쟁의 피비린내를 나를 통해 체감할 기회. 넌 복 터졌어.'
'너 쓸쓸하구나. 용기 충천하는구나.'

개입; 샤워기를 틀고 샤워기가 참았던 울분만큼 수조를 채우는 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간 공격한 먼지 기슭과 이면에 쓸쓸하게 끼어든 때.

'역시 아는군. 남자의 거친 손길이 속옷을 툭툭 건드리고 단추를 하나씩 정성스럽게 열고 또 지퍼를 아주 천천히 내리는 미묘한, '
'거참, 개성적인 놈이네. 자기 감각을 중시하는 면은 좀 귀여운데, 넌 그래도 성급한 걸.'
'지금부터 요리는 전적으로 서비스 정신. 말하자면 무한 봉사. 그래서 동작을 섬세히 할 것. 손끝부터 발끝까지 감각을 최대한 업로드할 것. 자 고수의 면밀한 손길 드디어 촉수를 세운다.'
'촛불 끄더니 금방 잔치를 마감할 태세, 역시나 충동적인.'
'나는 전략적이고 노략적이고 공격적인, 그러나 매너도 잠깐 생각하는 전형적인, 그보다 진화한 현대적 카씨, 나머지 노바.'
'이 애송이는 덜 진화된 짐승이군.'
'이 여자는 드디어 수컷의 포효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겠군.'

잠시 커피 브레이크...
저녁 무렵, 노을은 그럴듯한 신비적 착색을 한다. 하늘이 날마다, 어느 빛깔을 상징으로 한다는 건, 늘 무색하게 상징을 코끼리 징표로 오인하게 하는 문제점이 있다.
아무튼 남자는 슬립을 가볍게 벗기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다시 방백,

'아랫배를 근육으로 단련한 수고는 있었군, 귀엽군. 온몸을 근육질로 바꿀 때, 골은 늘 비어 있었군. 현학적인 근육만큼, 서두르는군.'
'잘 익은 여자는 노련하다는 것, 조심해야겠군. 내 단점은 코피부터 쏟고 시작한다는 것. 들키면 김 새고 말겠군.'
'전희를 모르는군, 겨울 다음에 봄. 봄이 그냥 오는 것 아닌데 빙하를 녹일 줄 모르는군.'
'난, 이 거총으로 세상을 평정할 수 있다.'
'이놈은 턱없이 미사일을 겨누고 겁을 주지만, 스스로 겁을 먹고 있군.'
'이 몸은 예술인고로, 예술은 감상하는 눈에 그 묘미를 알도록, 지금은 작전을 짤 때.'
'이놈은 정신을 근육질로 전환했네. 귀엽긴 하지만 결코 근육이 되지 못한 헐렁한 뇌를 가지고 덤비는군. 은근히 귀엽네.'
'이 여자는 나에게 완전히 도취한 거. 나는 완벽한 야성, 내가 자비를 베푸는 것.'
'아, 애송이.'

불필요한 간섭, 혹은 개입, 혹은 침탈.

'나는 내 몸이 비너스의 조각보다 육감적이고 공격적이고 통속적이다. 난 좀 비어 있지만, 언제든 나는 출격한다.'
'너는 몸에다 온 정성을 쏟았지만, 분위기를 모른다, 넌 그냥 과시욕에 헛지랄하고 있고, 내,외과적 시술의 과잉을 착각하고 있다.'

드디어, 사연과 레파토리를 추월하며 서로 산맥을 넘고 있는 찰나,

'나는 짧고 굵직한 노선이다.'
'넌 니 기분만 중시하고 피를 모아 코피를 흘리는 조루다.'
'나는 항공모함을 바다에 눕히고, 수많은 전투기를 띄웠다.'
'넌 포구에서 폐어선 하나 시동을 걸고 어디로 출항할지 몰랐다.'

그래도 창밖은 신비적 착색을 잃지 않고, 수사 밖으로 아름답다.

'나는 전위적 짐승, 아 짐승...!'
'넌, 영혼을 얕잡아 보는 골 빈 놈...!'
'나는 위대한 전사.'
'넌,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고 자기 만족에 빠진 우울한 개구리.'
'난, 친절한 전도사. 쓸쓸한 구멍을 충실하게 메워주는 자선사업가.'
'넌, 죽일 놈.'
'난, 아름다운 노래는 몰라도, 내가 내 몸을 기똥차게 경영하는 로멘티스트.'
'넌, 개같은 놈.'
'난, 역시 대단한 놈.'
'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조차 희롱하고 노리개 취급하고 아프게 한 놈.'
'난 전위예술가.'
'넌, 개같이 가장 소중한 것조차 앗아간 놈, 넌 숭고한 자존심과 존엄을 우롱하고 뭉갠 죽일 놈.'
'난 역시, 현대적 메카니즘의 낭만주의자.'
'넌 개새끼.'
'난 오늘도 편식하지 않고 자비를 배풀었으며, 굶주린 이에게 뜨거운 사랑을 퍼부었음.'
'넌, 인간을 벌레로 만들었을 뿐.'
'난, 역시 아름다운 육체의 소유자.'
'넌, 욕망의 포로,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놈.'

그리하여, 심야 극장의 불빛은 꺼지고

"좋았어?"
"응, 자기 나 사랑해?"
"응, 사랑해."
"정말?, 얼만큼?"
"하늘만큼, (내가 나중에 상속 받아서, 다 팔아치우고 현금화한만큼)'

F.O.

[9층, 멀리]

꼭대기 한 층,

은 없는 공간이고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건물은 분명 8층까지 되어 있고, 지하 2층. 전체 10층 규모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인 표기상 그럴 뿐이고, 9층이 별채처럼, 다른 출입구로 다른 공간으로, 아무도 쉽게 인식하지 못한 공간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건물주의 별장이었던 셈. 건물주는 8층까지와 9층을 철저히 분리하도록 계산된 건축을 한 것이고, 사실 다른 건물이라고 봐야할 정도.
한 층이 한 통이라면, 백 평 규모. 그 속에 가끔 한 점처럼 떠 있다 가는 사람. 9층 이하를 장악했지만, 독채를 아지트로 철저한 성벽을 쌓은 R.

사방이 신기하게도 다 통유리로 되어 있었어요. 마치 벽이 없는 것처럼.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욕조를 만들고 욕조에다 노을을 담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붉고 처연한 노을.

엄마는 붉은 바다에 잠겼단다. 네가 돌아오길 바래. 엄마는 네가 멀리 보도록 길을 터줄게. 너무 보고 싶어. 엄마를 용서해. 널 사랑해.

엄마의 편지는 간단했지만, 전 눈치 채지 못했어요.
엄마는 왜 손목에서 노을을 뿜어냈는지. 전 모르겠어요. 엄마가 왜, 이런 건물을 매입하고 나에게 등기를 마치고, 마지막 선물인 것처럼 왜 이런 이상한 건물을 나에게 남겼을까요?
9층은 지상에서 쌓아진 높이가 아니라 천상의 지하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부터가 천국이야, 하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5년 만에 돌아왔지만, 왜 이런 텅 빈 공간만 저에게 남았을까요?
엄마는 어디로 날아간 거죠?

9시 전이다.

방들이 하나둘 채워지고 있다. P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P는 잠시 엄마의 노을에 붉게 젖어 있었던 거다. 낯선 순간의 점화를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고  빗물에 젖은 지친 한 마리 새처럼 떨며 나를 찾아온 건 P와 마주친 며칠 후였다.

벽시계는 내리막과 오르막을 모른다. 힘겨워하지도 않는다. 차르차르, 초침으로 분할하는 시간이 벽을 돌린다.

사각 유리방에 갇힌 새가 출구를 찾지 못해 자꾸만 창에 부딪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