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 작성일 201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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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고 나아질 건 없었지만 그래도 걷고 싶은 밤이었다. 나는 새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가 안경을 가지러 도로 들어왔다 다시 현관으로 나갈 때는 결국 헌 운동화를 신었다. 1층 마당으로 내려가자마자 비 한 방울을 맞았다. 나는 들고 있던 안경을 꼈다. 바닥에 한두 송이씩 피어나는 비꽃이 보였다. 우산을 가지러 집으로 올라갈 때 계단 위에 씌어놓은 비닐에서 타닥타닥 빗방울 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비 오는 저녁이 되어 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신발장 옆 잡동사니를 뒤적였다. 만 원을 주고 샀던 3단 우산은 다 녹슬어 있었고 오히려 어디서 주워 온 비닐우산이 가장 멀쩡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왼쪽으로 조금 걸으면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이는 내리막이었다. 내리막을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사거리를 건너면 이번에는 가파른 언덕 골목이 있는데, 그 골목을 올라가면 동산이 나왔다. 그 동산 꼭대기에는 널찍한 체육공원이 있었다. 나는 그 체육공원으로 가끔 밤 산책하러 나갔다.
체육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비도 금세 부슬비로 바뀌어 조용히 산책하기 좋았다. 나는 안개가 자욱한 공원 둘레의 가로등 빛을 따라 걸었다. 가운데 있는 배드민턴 코트를 가로질러 반대쪽에서 다시 걸었다. 글이 잘 안 써지면 자주 오던 곳이었지만, 늦가을부터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러다 웬일로 밤이 포근해서 나왔는데, 아마도 비가 오려고 포근했나 하고 생각했다.
농구 골대와 여러 생활체육기구 둘레를 빙 돌다가 트윈 트위스트 위에 올라섰다. 나는 아무것도 잡지 않고 바닥이 도는 대로 빙빙 돌았다. 그러다 눈을 감고 축축한 공기를 느끼는데, 반대쪽 계단에서 누군가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검은색 운동복 바지와 폴햄 후드 재킷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일정한 속도로 공원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그곳은 반대쪽 아래로 가는 길, 내가 올라온 길이었다. 나는 트위스트에서 내려와 비에 젖은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뜻 스친 그 얼굴이 낯익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착하게 내려온 눈썹, 작은 눈에 웃는 상이지만 체격 때문에 조금은 무서운 분위기. 가까운 사람 가운데는 없는 얼굴이었는데, 그러다 어릴 적이 떠올랐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동창 동훈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동훈이가 다니던 학교로 전학을 갔다. 무려 네 번째 전학이었다. 전학을 가면 으레 그 반에서 제일 까부는 무리가 시비를 걸곤 했는데, 마지막 전학에서는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그 반에서 제일 힘이 센 동훈이 덕이 아닌가 생각했다. 씨름부였던 녀석이 워낙 남을 괴롭히거나 담임 말을 안 듣는 아이가 아니라 정말 조용했기 때문에, 반 분위기 자체가 한 아이를 괴롭히는 식으로 흘러가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어린아이답게 몇 번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본 일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무섭게 굴고 나머지가 당하면서 웃는 식이 아니라 교실 뒤에서 딱지를 치거나 식판 치우기를 걸고 내기를 하는 식이었다.
동훈이의 뒷모습은 금세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쫓아가 부르지는 않았다. 씨름 연습으로 자주 교실을 비우는 녀석과는 가까워질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잠깐 나눈 대화나 눈빛에서는 좋은 느낌이 있었고, 어찌 됐건 힘센 아이들이 으레 저지르는 짓을 하지 않았던 녀석 덕분에 나는 늘 당하던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으니 좋은 녀석이라고 여겼다. 13년 전, 지금 내 삶의 절반일 때 만난 녀석이었다. 다시 본 동훈이는 여전히 체격이 좋았다. 정말 운동이 몸에 붙었구나. 나는 한동안 13년 전을 떠올리며 서성댔다.
체육공원에 다녀온 날부터 동훈이를 가끔 떠올리곤 했다. 나는 건강한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뭘 해도 잘하고 있을 사람이라고 느끼며 선망하고는 했다. 내가 튼튼하지 못한 까닭도 있었고, 사실은 무엇 하나 잘 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쓰고 있던 글이 나 자신과 멀어서 힘든 상태였다. 이야기를 지어내자니 너무 작위성이 강해서, 내 이야기만 써야 하나 아니면 아예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답답해서 공원에 간 저녁 비를 맞으며 달리는 동훈을 본 것이다.
선망을 그치지 못하는 밤이면 끝에는 원망이 생겼다. 나는 딱히 원망할 대상을 찾지 못해서 스스로 비관했다. 내 처지, 공학계열로 대학에 입학해서 시키는 대로 하면 취직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는데, 이상한 기질 때문에 소설을 쓴다고 휴학을 하고서는 그 소설마저도 잘 쓰지를 못해서 끙끙대다 겨우 작은 상 하나 받은 내 처지를 말이다. 그러다가 다시, 어릴 때부터 괜찮았던 동훈이 녀석은 지금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일까, 나는 동훈이가 정말 잘 사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일단 찾아보고 싶었다.
나는 그가 평범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아니다. 짐작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동병상련할 만큼 녀석이 근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웃기지도 않았다. 추적은 너무나 쉽게 끝났다. 나는 류동훈이라는 이름을 구글로 찾아서 나오는 수십 명을 뒤질 생각이었는데, 떡 하니 눈에 띄는 기사가 나왔다. 'RoadFC 영건스 류동훈, 류동훈 선수의 10년 뒤는?' 나는 바로 기사를 눌렀다. 격투기 선수라는 느낌과 빗속을 뛰던 동훈의 모습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역시나 기사 맨 위 사진 속에는 내가 아는 류동훈이, 볼살만 좀 빠졌을 뿐 어릴 적과 똑같은 얼굴을 한 동훈이가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UFC는 종종 봤지만 RoadFC는 몇 년 전에 생긴 한국 종합격투기 단체였다. 처음엔 아마추어 대회 같다가 이제야 좋은 실력을 갖춘 선수가 하나둘 나오고 있었고 그런 만큼 기회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발이 시려서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찬찬히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서 동훈은 인상적인 첫 경기로 자신을 각인한 선수라고 쓰여 있었다. 동훈이 신인전을 치른 뒤 바로 나온 기사 같았다. 다음 상대는 어땠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동훈은 누구라도 상대해주면 감사하겠다고 대답했다. 전도유망한 선수가 되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사진 속 동훈은 철조망에 기대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체격도 좋았고 운동을 했으니까, 자기 재능을 수월하게 지켜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릴 때 뭘 잘했지. 동훈이 운동을 할 때 나는 뭘 했나. 나는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고 딱히 놀지도 않았다.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학교 연못에서 얼음을 깨곤 했다. 컴퓨터 게임이나 연못에서 놀던 일 모두 지금 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분명 같이 놀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다. 사실 궁금하지 않았고 이름도 가물가물했다. 굳이 졸업 앨범을 뒤져 찾아볼 만큼 궁금한 친구는 없었다.
정말 친구를 사귀기에 1년은 짧았다. 그러니 오히려 동훈이 같은 아이가 기억나는 게 아니겠나. 내 친한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 때부터 여태까지 한 번씩은 같은 학교가 된 일곱이 뭉친 무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녀석들은 어린 시절 무엇을 잘했을까 생각하는 참에, 이번에 취업이 확정된 엉뚱한 녀석 하나가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 이렇게 말했다. 슬슬 천렵을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지. 몇몇이 그 말에 웃었다. 이 겨울에 낚시라고. 겨울 천렵이라고는 다 같이 스무 살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말을 던진 녀석은 거듭 말했다. 갑자기 진지해졌다. 우리 이번이 마지막이다. 정말로. 언제 또 모일지 모른다. 어린 시절은 다 갔다.
작년에도 누군가 했던 말이었다. 올해는 더 확실했다. 작년에 두 녀석이 취업했고, 올해는 나와 다른 한 놈을 빼고는 모두 취업했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이니 뭐니 해도 다들 전공공부만 잘 따라가면 어렵지 않은 대학과 전공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게 된 놈이나 딴생각이 특기인 나를 빼고는 모두 취업을 해냈다. 해냈다기보다는, 그래 고생했으니 해낸 것도 맞긴 맞겠다만, 해버렸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새도 없이, 축하를 받으며 저질러버린 일처럼 다들 당혹스러워했다. 이 얼어붙은 한겨울에 무슨 생각이냐 싶다가도, 그래서 더욱 놓치지 않고 붙잡으려는 겨울 천렵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내게 전화를 걸어서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계획을 다 짰다고 했다. 올해 여름에 못 가고 내년 여름에도 못 갈 테니 이번에 몰아서, 겨울이지만 꼭 가야 하고 바람도 꼭 쏘여야 한다며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장소는 몇 번 갔던 곳이었다. 친구 중 외삼촌이 스님이 된 녀석이 있었는데(출가한 뒤로도 외삼촌이라고 부르다니), 거창에 있는 외삼촌 집이 계속 비니까 집안에서 휴가지로 쓰고 있었다. 집은 거창 수승대를 따라 쭉 올라가면 나오는 월성계곡 옆 작은 마을에 있었다.
녀석들은 나 없이 여행 준비로 분주했다. 나는 갈아입을 옷만 가져가면 되었고, 글도 잘 안 써지는 참이어서 가기로 했다. 아니다. 글이 잘 써져도 이번에 안 가면 서운할 듯도 했다. 잠시 쓰던 글을 접어두고 여행 전날 밤 녀석들을 만났다. 출발하는 아침에 차를 빌릴 테니까 나에게 면허증을 가져오라고 했다. 운전은 군대에서 운전병이었던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취직했다는 놈들 모두 장롱 면허였다.
다 같이 한 친구의 집에서 새벽까지 떠든 탓에 차에서도 금방 잠들어버렸다. 나는 혼자 음악을 듣고 88고속도로 풍경을 바라보며 대구에서 거창으로 달렸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어릴 때 무얼 잘했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러다 잠깐 깨서 부스럭대는 녀석이 UFC 애청자인 게 생각나서, 야 너 로드FC도 좀 보나? 하고 물었더니, 가끔. 하고 녀석이 대답했다. 거기 수준 어떤데? 녀석은 예전에는 별로였는데 요즘은 괜찮다고 들었고, 사실 요즘은 UFC도 바빠서 못 봤다고 했다. 그러다 녀석은, 아씨, 다시 태어나면 격투기나 해버릴까, 하며 주먹을 짤막하게 휘둘렀다. 운동을 잘하고 재바른 편인 놈이었다. 하지만 운동선수를 할만큼은 아니었다.
거창에 진입했을 때는 오전 열 시가 넘었는데도 너무 추웠다. 우리는 어느 낚시전문점에서 낚싯줄과 찌를 샀다. 스무 살 겨울에 들렀던 낚시전문점이었다. 서둘러 살만큼만 사고 다시 출발했다. 야 이것도 추억이다. 내가 다시 운전하는데 낚시 도구를 보던 녀석 중 하나가 말했다. 벌써 6년 전이야. 그 소리에 내 뒷목이 뻑적지근해왔다. 뒷목으로 스무 살 겨울에서 이번 겨울까지 엮인 기억이 꾸역꾸역 지나는 것 같았다. 모두 한 방향으로. 계곡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리는 바로 얼어붙은 계곡으로 갔다. 운전을 마친 나는 계곡으로 내려가는 내내 뒷목을 주물렀다. 겨우 스물여섯 몸속에서 혈전처럼 뻑뻑하게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스무 살 기억을 계곡에서 다시 꺼냈다.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계곡에 있는 적당한 나뭇가지에다 낚싯줄을 묶어 물이 얼지 않은 바위틈으로 던져만 보는 일, 아무 고기를 잡지 못하지만 던지고 빼내며 발이 미끄러지는 일만으로도 넉넉히 좋았던 스무 살 겨울이었다. 우리는 6년 전을 재현하기 위해 낚싯줄을 산 건 아니었는데, 6년 전에 했던 일을 지금 한대도 똑같이 재밌을 것 같지 않았고, 우리가 이제 그렇게 쉽게 작은 일에 웃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분위기도 괜히 가지고 싶었고, 아니다. 사실은 기운이 없었다. 기운이 없으므로 힘차게 웃기가 조금 어색했고, 어서 해가 떨어져 들어가기를 바랐다.
집에 들어와서도 대충 놀다 보니 저녁이 되었다. 저녁에는 고기를 구워 먹으며 카드 게임을 했다. 매년 방법을 잊는 훌라를 다시 배워보고 라이어나 원카를 하며 서로 팔뚝을 때리다 소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셨다. 끝에는 소맥을 마셨다. 마시는 때만큼은 스무 살 원숭이 새끼 같았던 때로 돌아갔다. 아,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다 바랬어도 취하는 일만은 늘 같으니까. 그러나 술을 마시다 보면 또 생각이 몽롱했다. 언제는 우리가 노는 방법에 발전이 없다 싶다가도 술자리까지 자기계발 목록에 끼운다 생각하면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똑같이 소맥을 속으로 넘기고 열심히 토라도 해야지 하다가, 이 또한 겨울 낚시처럼 어디서 본 젊음의 재현이 아닌가 싶어서 적잖이 취하면 오히려 취기가 아니라 그런 기분 탓에 머쓱하고 몸이 찌뿌둥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냥 켜두었던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검은 케이지와 관중들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로드FC 방송이었다. 동훈이, 동훈이가 떠올랐다. 야,야! 야! 내가 술김에 호들갑스럽게 녀석들을 불렀다. 녀석들은 모두 내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으므로 동훈을 알 리가 없었다. 류동훈 아나 류동훈? 초등학교서 대장이었는데 금마 격투기 저거 하드라 찾아보니까. 녀석들은 몇 판 째 인지 모를 훌라 패를 들고 화면을 흘끗 보았다. 그때도 덩치가 크고 힘이 셌거든. 한 녀석이 먼저 카드를 먹고 내 앞에 깔아 둔 카드에 두 장을 붙였다. 잘하는 갑드라, 뭐 수퍼루키로도 뽑혀서 인터뷰도 하고 그러던데, 하고 내가 말했고 놈들은 조용히, 아 그래,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선수 입장 음악이 흘렀다. 다시 훌라 패가 돌았다. 케이지 안의 진행자가 경기 체급을 말한 뒤 선수의 이름을 외쳤다. 누구라꼬? 내가 혼잣말을 했다. 화면 아래에 선수 이름이 뜨고 선수가 나왔다. 류동훈이었다. 어어! 점마다 점마! 내가 소리쳤다. 다른 놈들도 전부 고개를 돌려보았다. 괜히 신이 났다. 녀석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내 동창 류동훈이었다.
곧바로 상대방 선수까지 케이지 안으로 들어섰다. 신인전 경기라고 했다. 류동훈은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모습보다 덩치가 작고 머리가 커 보였다. 몸도 근육질이라기보다는 그냥 힘 좀 쓰겠다 싶어 보였다. 백칠십칠이면, 별로 안 큰데? 선수 프로필이 화면에 뜨자 한 놈이 뚱한 소리로 말했다. 나랑 같은 키였다. 어릴 때 다 커버렸나? 그래도 몸무게가 팔십이 킬로그램이나 나갔다.
아이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와 그래, 잘하는 게 있으면 복 받은 거지. 하며 계속 지켜보았다. 숫자를 들고 몸을 꼬며 걷던 라운드 걸이 허공에 입을 맞추고 내려갔다. 우리는 헤벌쭉거렸다. 상대는 서른 살이었다. 나이 때문인지 상대 쪽 좀 더 노련한 눈빛이었다. 야 서른에 신인이면 늦지 않나? 내가 말했다. 뭐, UFC에서는 서른 중반도 챔피언 해먹는데. UFC를 즐겨보는 녀석이 말했다. 척 리델이나 앤더슨 실바 같은 노장 선수들이 떠올랐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둘은 오픈핑거글러브를 여유롭게 툭 맞댄 뒤 발을 놀렸다. 화끈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이기는 사람에게만 다음 경기가 보장되는 토너먼트 경기였기 때문에 쇼맨십 보다는 이기는 일이 먼저였다. 케이지 중앙은 동훈이 차지했다. 상대방은 울타리 가까이서 빙글빙글 돌았다. 둘은 일 분 동안 잽과 로우킥만 내며 간을 보았다. 동훈이는 자세나 빠르기 모두 내가 느끼던 주먹대장의 존재감은 아니었다. 그저 신인, 그것도 메이저 UFC가 아닌 로드FC 신인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지켜보던 친구 가운데 하나가, 잘 모르겠는데?, 하고 말했다. 그래도, 그럴 리가 없었다.
동훈이 먼저 주먹을 휘두른 뒤 자세를 낮추며 들어갔다. 나는 같이 주먹을 쥐었다. 상대편이 반격을 하며 동훈의 목을 잡았다. 동훈은 힘으로 남자를 케이지까지 밀어붙였다. 그 상태에서 둘은 니킥을 몇 번 주고받았다. 동훈이 남자의 옆구리를 강하게 찍었다. 그러다 상대편 무릎이 동훈이의 급소로 어색하게 들어갔다. 심판이 뛰어들었다. 동훈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케이지에 기대어 선 동훈은 함부로 주저앉거나 마우스피스를 빼지 않았다. 야, 근성있네. 분명히 로우블로 맞는데. 한 녀석이 말했다. 나는 다시 우쭐했다.
상대편은 경고를 하나 받았고 동훈은 물을 좀 마셨다. 그 뒤 경기가 다시 진행됐다. 통상 경고를 받은 쪽이 위축되어 불리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종합격투기는 그 반대였다. 먼저 고통을 느껴버린 쪽이 심하게 위축되는 게 상식이었다. 동훈은 그런 면에서 보아도 훌륭했다. 초반부에 워낙 보여준 승부가 없었기에 후반이 빛났다. 동훈은 더 거세게 몰아붙였고 상대방은 피하면서 반격으로 맞받았다.
볼만한 아마추어 경기 정도는 된다 싶었다. 다음 라운드도 첫 라운드처럼 둘은 케이지 안을 돌고 돌았다. 경기 삼십 초가 남았을 때, 동훈이 태클을 시도했다. 몸을 완벽하게 낮추지 못한 상태였다. 파고드는 힘을 거꾸로 이용한 상대편이 오히려 동훈을 넘어뜨렸다. 엎어진 동훈은 빠져나오려 했다. 상대방은 동훈의 다리와 한쪽 팔을 감고 등으로 올라탔다. 백마운트였다. 우리는 모두 술기운 가득한 숨만 쉬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유효한 공격도 없고 그라운드 탈출도 없는 상태로 긴 십초가 흘렀다. 상대방이 동훈의 머리통을 쳤다. 동훈이 강하게 어깨를 돌렸다. 위에 탄 남자는 그 힘을 또다시 잘 이용했다. 처음 눈빛에서 느낀 노련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동훈의 겨드랑이 안으로 한쪽 팔을 집어넣고 반대 팔로 들린 목을 둘렀다. 반격도 못하는 자세로 걸린 백마운트 초크였다. 남자는 그대로 동훈을 뒤로 뒤집었다. 오 초가 지났다. 아주 긴 오 초였다. 동훈이 목에 감긴 남자의 팔뚝을 두드렸다. 경기가 끝났고, 동훈의 기권패였다.
나는 종이컵에 남은 술을 마셨다. 보는 우리가 무안할 만큼 쉽게 졌다는 느낌이 강했다. 학교에서나 강했지 별로네, 하고 한 녀석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동훈이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한 번도 없었다. 야 일단 프로로 갔으면 장난은 아니지. 아무 대꾸도 않고 채널을 돌리는 녀석들 뒤에서 내가 말했다. 동훈이 일어나서 코너로 걸어갔다. 녀석은 경기 시작 때나 로우블로를 맞았을 때나, 서브미션 패를 당한 지금이나 표정이 엇비슷했다.
그 뒤로도 우리는 몇 병을 더 비웠다. 경기 전처럼 카드놀이를 하면서 떠들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재밌는 장면이 나오면 보기도 했다. 나는 뜨문뜨문 아무도 안 들어주는 말 몇 마디를 더 했다. 기사를 보니까 유망주가 맞던데 말이야. 나도 잘해야 하는데. 여기서 지면 안 되는데. 뭐 이런 말들이었다.
그리고 1월이 됐다. 녀석들은 이제 직장으로 돌아가거나 6주짜리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러 갔다. 고시 공부를 하는 친구는 노량진으로 들어가고 나는 혼자 동네에 남았다. 나는 쓰다 만 글을 다듬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내 것이 될 수 없는 감수성을 붙들거나 내 것이 되지 않을 인문학 지식을 따라잡으려 끙끙댔다. 아무 성과 없이 시간만 흘러서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 싶었는데 마땅한 자리도 없었다. 이러다 학교로 돌아가고 졸업을 하면, 부끄러운 말이지만 백수가 될 걱정마저 없었다. 취업을 잘하는 과에 나도 속해 있었고, 대기업에 취업하면 되었고, 하다못해 그마저도 귀찮으면 동네 학원 선생이라도 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더라도 글은 계속 써야 하나. 계속 쓸 수 있을까. 그 겨울 나는 많이 게을렀지만 진지하게 고민했다. 비록 약하고 흐릿했지만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나만의 고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밖을 보았는데 가벼운 눈발이 날렸고, 나는 다시 우산을 챙겼다. 나아질 건 역시나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걷고 싶었다. 겨울인데 날이 푸근했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눈은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그 날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우산을 챙긴 일이라도 되게 만들려는 듯 많이 내렸다. 무슨 눈이 이렇게 내리나 싶을 만큼 퍽퍽 내렸는데, 자칫 맞았다가는 멍이 들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만큼 내 정신은 약해져 있었다. 눈송이는 정말로 굵었고 바로 녹지도 않았다. 비가 오던 날처럼 서둘러 내려가는 사람 몇몇을 마주친 끝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억센 눈이 무서워 지붕 덮인 쉼터로 얼른 들어갔다.
나올 때 푸르스름하던 하늘은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그날따라 공원이 무척 어두웠다. 불도 다 들어오지 않았다. 올라오는 길의 전등 하나와 내가 있는 쉼터 지붕에만 불이 들어오고 전부 꺼져 있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좀 하다가 데미안 라이스의 아무 노래를 작게 틀었다. 숲 속에서는 슥, 슥, 하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계속 듣다 보니 눈 쌓인 나뭇가지가 조금씩 쳐지는 소리 같았다. 쉼터 불빛은 몇 발짝 바깥밖에 밝히지 못해서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모습을 직접 볼 순 없었다. 한 동안 그렇게 서서 담배를 한 대 굽고 너무 조용히 틀어둔 음악은 아예 꺼버린 채 그냥 눈 쌓이는 소리만 들었다. 담배 연기와 함께 눈 냄새 섞인 쨍쨍한 겨울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후 하고 한숨을 내뱉는 사이사이 슥, 슥, 하는 소리는 자주 들렸다. 동물들이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나는 낯선 소리가 나는 어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한 남자가 플래시를 비추며 뛰어 오고 있었다. 지난번 왔던 비와 이번 함박눈처럼 예고 없는 만남이었다. 또다시 동훈이었다.
동훈은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모자와 어깨에는 눈이 소복했다. 나는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저기, 동훈이? 함박눈이 도시 소음을 막고 있었다. 내 목소리는 의도보다 훨씬 선명하게 울렸다. 아-. 녀석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그리고 한쪽 발을 다른 발로 툭툭 치며 신발에 묻은 눈을 털었다.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 누구더라? 나는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덩치는 확실히 동훈이가 컸다. 내가, 나 선민이다. 육 학년 때 같은 반, 하고 말하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나 어떻게 알아봤어? 그러면서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의 기억과 요 사이 알게 된 소식까지 직접 말했다. 읽은 인터뷰며 거창에서 본 경기까지 말이다. 그는 쑥스러워하기도 좋아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아, 그 경기- 하고 아쉬운 소리도 냈다. 그런데 어쩌다가 찾아본 거야? 녀석이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 체육공원에서 마주친 밤을 떠올렸다. 너 한달 전쯤 여기 뛰어 가지 않았나? 내가 말했다. 그때 본 것 같아서 찾아봤어.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시합 없는 날은 거의 늘 뛰어서 언제인지 잘 몰라.
비 오던 날 말이야. 비 온 날이 하루 있었잖아.
아, 맞아. 비 오던 날. 녀석이 말했다.
그게 그 경기 진 뒤였나, 그래, 하루 쉬고 다시 뛰기 시작한 날이었는데, 까지 말하고 녀석은 멈췄다. 말끝이 씁쓸했다. 내가 담배를 권했는데, 피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계산해보면 경기는 꽤 최근이었다. 마지막 경기인지도 몰랐다. 그럼 인터뷰는 언제 거야? 녀석은 웃으며 대답했다. 작년 봄인가, 자신만만했지. 나는 혼자 라이터에 불을 댕겼다. 슈퍼 루키는 무슨, 아마추어 때랑 똑같아. 대전료도 없어. 대전료 같은 건 내가 생각도 못 하던 부분이었다. 들어보니 아직은 단체가 작았다. 동훈은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국어 교육 전공이라고 했다. 그 길로 먹고살 생각이야. 녀석이 말했다. 그렇구나. 먹고살 생각을 하는구나. 나는 이따금 담배를 털어야 했다.
문득 녀석이 나는 무얼 하냐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그냥 학교에 다닌다고만 말했다. 공대에 다닌다고 했다. 잘 다니고 있다고 덧붙이려다가, 녀석의 본 모습을 아는 내가 그저 전공으로만 이야기하면 스스로 서운할 듯싶었다. 나 있지, 글 써, 소설 같은 것 말이야. 이 말을 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이제야 처음만 같았다. 내 입에서 나온 입김이 왠지 더 뽀얗게 느껴졌다. 동훈이는 눈썹을 올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더 놀라운 건 그 뒤에 녀석이 한 말이었다. 지금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뭐라고? 지금도 쓰냐고, 글. 반 밖에 이해 못 하는 외국어를 듣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래, 지금 쓰는 거지 그러니까, 하고 말했다. 녀석이 웃었다. 너 어릴 때도 썼잖아. 내가? 나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들어 보니 이랬다. 나는 전학생이라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동훈이 바로 옆 분단이었다. 어느 날 독후감 쓰기 시간이었는데, 녀석은 한참동안 첫 장을 썼다 지웠다 하고 있었다. 문득 옆 분단 나를 보았는데 내가 벌써 독후감을 끝낸 뒤 새 책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녀석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독후감 한 편을 부탁했는데, 나는 녀석에게 다섯 장짜리 독후감 한 편을 손쉽게 써 주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만화방에서 나와 마주쳤다. 녀석은 만화책을 빌리러 왔는데, 나는 스무 권짜리 판타지 소설을 반납하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된 소설도 아니었겠으나, 어릴 때 읽은 동화책이 독서 경험의 전부인 녀석에게는 그조차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다 학기가 바뀌고, 학급문고에 내가 짧은 이야기를 실었는데 유치하지 않아서 신기했단다. 언젠가 돌이켜보니, 그것이 소설이었고 그래서 너 상도 받고 했는데, 기억 안 나? 하면서 녀석은 말을 마쳤다.
나는 다 듣고 나서야 겨우 기억이 났다. 그 밖에 나만 간직한 내밀한 추억도 뒤이어 떠올랐다. 날이 새도록 손 떼지 못했던 로빈슨 크루소,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리고 이원수 아동문학 전집. 여태 그걸 잊고 살았어. 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을 잊게 만든 일들은 말하지 않았다. 녀석 덕분에 모르고 지내다가 중학교에서 다시 만난 일진 무리의 악랄함, 부모님의 이혼, 어머니 직업의 변천사, 몇 번의 이사, 왜 자꾸 작은 집으로 옮기는 까닭이 내 학군 때문이었는지, 내가 하락의 이유가 되었는지. 또 성적에 맞춰 들어온 대학교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런 더께 같은 순간들은 묻어두기로 했다.
자신도 모르게 내 유년시절 일 년의 평화로움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구구절절해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도 자라서 이제 신인 격투기 선수가 되었고, 얼마 전에 져 버렸다. 그래도 비를 맞으며, 오늘은 눈을 맞으며 묵묵히 달리고 있지 않은가.
글은 잘 써지나? 동훈이 물었다. 나 또한 얼마 전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는데, 그건 무슨 문예지 추천 등단은 아니고 아주 작은 공모전이라 정식 작가라 부르기에는 좀 모자라다고 말했다. 녀석은 자신과 내가 처지가 비슷하다며 웃었다. 등에 비치는 얼굴을 자세히 보니 광대와 눈 밑 살이 싯누렜다. 어디서 새로운 멍이 들었다가 낫는 것 같았다. 웃는 얼굴은 초등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인터넷에서 읽은 기사가 떠올랐다. 10년 뒤 류동훈은? 그 대답에 그는 무어라고 답했던가. 잘 모른다고 했었지. 야, 너 진짜 10년 뒤엔 뭐 하려고? 계속 격투기 할 거야? 내가 물었다. 동훈은 한참 만에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격투기는 할 수 있어. 돈벌이가 되지 못해도 말이야. 그것이 동훈의 대답이었다. 케이지 안에서 승패와 상관없이 덤덤하던 녀석의 얼굴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격투기를 계속 하고 싶어. 잘 못 한다고, 그래도 계속 한다고 해서 누가 잡아가고 죽는 일은 아니잖아. 설마 내가 굶어 죽지는 않겠지? 그러며 하하하고 웃었다. 웃는 얼굴은 초등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참 이상했다. 어릴 땐 가장 덩치 크고 힘이 세서 아무도 덤비지 못하던 아이가, 지금 보고 있자면, 나보다도, 어쩌면 이제야 그 시절 학교의 어떤 아이들보다도 어린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을 나누는 동안 눈발은 더 굵어지고 바람은 거세졌다. 동훈이 이제 내려가자며 일어났다. 불이 들어온 조명은 멀리 공원 들머리에 하나뿐이었고, 눈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많이 쌓인 듯했다. 우리는 휴대폰 불을 켜고 걷기로 했는데, 동훈의 휴대폰은 베터리가 다 되어 곧바로 꺼졌다. 처음 몇 십 미터를 내 휴대폰 플래시로 겨우 걸었다. 그러나 가파른 돌계단이 나왔을 때는 불빛 하나로 모두의 발 앞을 밝힐 수 없었다.
우리는 넘어질세라 한 뼘 불빛에 의지해 슬금슬금 발을 내디뎠다. 그때 불빛에 반사된 은빛 물체가 가까이서 번쩍거렸다. 우리는 몇 계단을 더 내려가 그 앞에 붙어 섰다.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알루미늄 상자에, 가로등 수동 점멸기라고 쓰여 있었다. 뭐야, 이거 열어서 어떻게 만지면 불 들어오는 거 아냐? 동훈이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연단 말인가. 나는 이 속엣말을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그저 비닐우산으로 그와 나를 눈으로부터 막으며 가만 서 있었다.
나와 봐, 하고 동훈이 팔을 저으며 우산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우산을 든 채 뒤로 물러났다. 앞뒤로 자리를 둘러본 녀석은 깜짝 놀랄 만큼 빠르게 팔꿈치로 점멸기 덮개를 찍었다. 쾅 소리가 났다. 녀석은 으윽, 하고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나는 녀석을 비췄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거기서 잘 비춰 줘. 나는 얼른 다시 점멸기를 비췄다. 점멸기도 조금 들어갔지만 어림없어 보였다. 그는 내게 모든 걸 맡긴 채 한 손으로 점멸기 옆을 잡고,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그리고 왼 주먹으로 점멸기를 강하게 쳤다. 한 번 더 쾅하고 소리가 났다. 그는 이번에 뒤로 돌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거기에 한 번 더, 한 달 전 맞섰던 남자를 생각하는 듯 그는 거칠게 주먹 옆면으로 연달아 점멸기를 내리쳤다. 한 일 분은 쳤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무슨 철인지 모르는 점멸기 덮게는 정말 흔들리다가 결국 경첩 부분이 떨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우산을 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동훈을 다시 비추었다. 뻘건 얼굴로 입김을 푹푹 뿜는 동훈이 몇 발 뒤로 물러나더니 쭈그려 앉았다. 한쪽 어깨에는 벌써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안쪽, 안쪽 한 번 봐줘, 아, 숨넘어가겠다. 그는 눈 쌓인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우산을 접고 다가가서 속이 드러난 점멸기를 들여다보았다. 마땅히 볼 것이 없었다. 그냥 스위치가, 일반 전류 차단기에 달린 커다란 손잡이 스위치가 삼 분의 일 지점에 있었다. 나는 스위치를 아래로 확 내렸다. 그러자 길 끝에 있는 불이 꺼졌다. 다시 스위치를 세게 위로 올리자 모든 등의 불이 들어왔다. 맨 아래서 위까지, 길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불이 들어온 체육공원의 밤은 예뻤다. 비가 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공원 위를 돌아봤다. 나란히 내려온 우리 둘의 발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가로등 불빛을 반사한 눈은 모든 것들 위에 내리며 공간의 색채를 바꿔놓고 있었다. 휴게실 지붕 위에서, 마른 나뭇가지 위에서, 우리의 어깨 위에서, 그리고 길 위에서. 눈송이 자체가 빛의 입자 덩어리가 되어 공간 속을 번쩍이며 노니는 듯했다. 찬란했다. 흩날리는 입자들이 귀를 간질였다. 찬란의 웃음소리였다. 나는 눈을 감고 코와 입으로 그 찬란을 한껏 들이켰다.
언제인지 동훈이 내 옆에 서 있었다. 야, 거기 말고 저기도 좀 봐. 그가 보라고 손짓한 곳은 내가 보는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 그냥 길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걸어 갈 길이었다. 길 위에 두껍게 쌓인 빛의 입자들이 길을 내고 있었다. 위험해 보였다. 가파른 길이었기 때문에 넘어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보고 있자니, 좋았다. 하얗게 빛나는 눈길. 발자국 하나 없는, 아직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 가로등 불빛 너머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보기에 아득했는데, 아득해 보이는 까닭은 단순히 발자국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걸 알라고 눈이 이렇게 내렸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괜찮은데?
길을 본 내가 처음 입 밖으로 꺼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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