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장례식
- 작성일 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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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장례식
검은 한복과 정장. 장례식장은 그렇듯 이질적인 두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조문객이 없는 점심이 지나고 나른한 오후 3시. 늘 나는 이맘때 출근하여 같은 풍경을 본다. 식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한쪽에 둘러앉아 자식들의 대학 이야기부터 시작해 얼마 전에 받은 성형 수술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고 있다. 편한 신발로 바꿔 신은 후, 화장실로 가 이름 모를 망자를 위해 상복을 입는다. 상주가 내게 와 반가운 인사를 전하고, 잘 부탁드린다며 웃음을 짓는다.
벌써부터 집 나갈 생각을 하는 아들 민석은 늘 내게 직업란에 엄마 직업을 무어라 적어야하는지 묻곤 했다. 난 그럴 때마다 웃으며 가정주부라고 적으라 말하지만, 사실 내 직업은 사공이다. 누군가 사공이라 이름을 붙여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일을 시작한지 언 십년이 지난 시점에서 난 이 직업의 이름을 사공이라고 부르는 게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사공, 삶의 종착지는 검은 강물이 흐르는 강가의 선착장이다. 나는 뿌연 안개로 가득하고 텁텁한 공기에 먹물보다도 까만 강을 건너는 나룻배의 사공이다. 예전 이 강의 사공들은 망자들이 가져온 노잣돈을 뱃삯으로 받고 노를 저으며 그곳으로 망자를 인도했다. 지금 나룻배를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울음이다. 그것은 망자가 자신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하며 떠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삶의 끝자락에 선 그들을 먼 곳으로 인도하는 사공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울어야한다.
처음부터 이 일을 하지는 않았다. 대행업체에서 일을 하며 누군가의 하객이 되기도 하였고, 부모가 되기도 하였다. 우연한 계기로 사공을 하던 사람에게 부탁받아 처음 노를 잡던 날 난 내가 왜 태어났으며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난 울기 위해 태어났고, 망자들이 자신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들을 저 먼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태어났다. 한 달에 쉬는 날을 손에 꼽을 만큼 바빴다. 노가다를 뛰는 남편과 철부지 아들. 그리고 요양병원에 있는 엄마. 바깥일이며 집안일이며 바쁘긴 더없이 바빴지만 노잣돈은 턱없이 적었다. 내 삶은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8시. 날이 어둑해짐에 따라 조문객이 늘었고, 그것은 곧 일의 시작이었다. 나는 가볍게 목을 축였다. 이제, 울어야한다.
처음 곡소리는 나룻배의 도움닫기이다.
그 다음은 서글픈 울음소리 여정의 시작이다.
고로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정하는 법이다. 물론 그들은 울지 않았지만,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식장을 원했다. 나는 망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함께 울음 지으며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사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나는 장례식장을 울음소리로 가득 채운다.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고민하다 내가 터뜨리는 울음소리에 함께 흐느낀다. 슬퍼보이지도 않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지만, 내가 서글피 울기에 따라 흐느낀다. 흑, 흑, 왜 벌써…….
나는 늘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산다. 내 삶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흘러갈지 알지 못한다. 때로는 순류에, 때로는 역류에 몸을 맡기며 흘러가는 대로 흘러간다. 그것은 내 삶을 찾는 방법도, 행복을 찾는 길도 아니었다. 내가 내 길을 알았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난 진정 무엇을 원했던 걸까. 엄마의 삶이 희미하게 번뜩였다. 한 달 전, 엄마는 요양병원에 들어가며 사망보험이라도 들어놓을 걸 그랬다며 미안해했고, 자신과 다른 삶을 주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내가 진정 무얼 원해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은 안다. 민석만큼은 엄마와 나 같지 않기를.
나는 때론 망자의 막내딸이 되고, 유학에 가있어 오랫동안 한국에 있지 않았던 자식이 된다. 방금 조문객이 상주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었고, 상주는 막내딸이며 미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 오늘 망자의 막내딸이고,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됐다.
조문객들은 영정의 앞에 서서 절을 하고, 상주와 맞절을 한 후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그러고서는 내게 와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둥,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는 둥, 위로의 말을 전한다. 훌쩍대며 고개를 간신히 끄덕이는 척하다가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곡소리를 낸다. 조문객은 고개를 숙연히 숙이고 돌아간다. 울음소리란 사람이 느끼든 느끼지 않든 간에 그들의 슬픔을 상기시킨다.
다만, 그들이 상기하는 슬픔은 망자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언젠가는 저 영정의 주인이 되리라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무의미한 고민. 자신이 죽으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걱정. 또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는 슬픔. 조문객들은 장례식장에서 스스로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직장이 되어버린 이 곳에서 늘 나의 최후를 생각하곤 한다. 민석이는 날 그리워해줄까. 혼자서 밥도 못 차려 먹는 그 이는 어떻게 살까.
엄마는 죽음에 필요한 준비는 자신을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준비라고 말했다. 매일 요양병원을 찾아갈 때마다 엄마와 나는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 엄마가 살면서 깨달은 삶에 대한 조언,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 이야기들. 엄마는 그것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방법이라 했다. 결국 돌아보니 남는 것은 자식뿐이라며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내가 요양병원에 가는 그 시간까지 이야기들을 생각해놓았다.
난 가끔 망자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리했을지 생각해보곤 한다. 얼마 전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시던 일본 여행을 시켜드린 것이 다행이다, 보고 싶어 하시던 손자를 보고 가시게 돼서 다행이다……. 죽음에 다행이라는 말이 있을까. 가보고 싶던 일본. 보고 싶던 손자. 검은 사람들은 그것들로 자신들은 망자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의 다행은 말년에 성공한 자식들 덕보고 살았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으리라는 것.
검은 사람들과 조문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망자는 5남매를 혼자 키웠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고, 밤에는 바느질을 했다. 억척스럽게 아끼고 아껴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이름 난 대학에 보냈다. 몇몇은 나랏돈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현재 망자의 장남은 중견기업체의 오너이고, 장녀는 미술관 관장이며, 둘째 아들은 로펌을 운영한다. 다른 두 명중 한명은 교수이고, 정치인이다. 성공한 자식들이 있으니 여한이 없을 것이다. 우리 덕보고 말년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았으니 여한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다행일까.
나는 문득 내 장례식은 치르지 않아도 좋으니 민석만큼은 저들처럼 성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와 나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랐다. 먼 훗날 나의 고생으로 자신이 있었음을 알아주기만을 바랐다. 내가 너를 정말 사랑했다는 걸,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다는 걸, 내가 온몸이 부서질 듯 노질을 하는 이유가 너라는 걸, 알아주길 바랐다. 아니, 몰라도 되니 제발 너만큼은 성공하길 바랐다.
그런데 민석은 자꾸 겉돌았다. 학교에서 말썽을 부려 전화가 걸려오기 일쑤였고, 몸에 상처가 난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호되게 야단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민석의 그런 행동이 부모가 모자라기 때문인 것을,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인 것을, 어릴 때부터 가난의 눈치만 보기 바빴기 때문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나는 단지 민석을 잘 타이르고, 언젠간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13살,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고 나는 마음먹기로 했다. 곧 민석이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19시. 퉁퉁 불은 눈은 감았다 뜨기가 힘들었다. 목이 칼칼했고, 몸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조문객이 없는 틈을 타 500ml 생수를 들이켰고, 목 운동을 했다. 이 일을 시작한지 언 10년, 나도 벌써 40대의 가운데를 걸어가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몸이 쉽게 지쳤고, 피곤해했다. 조금만 더 쉬면 좋으련만 성공한 자식들의 조문객들은 그치지 않았다. 검은 사람들은 영정의 저 편에서 사업 이야기를, 미술품 이야기를, 소송중인 사건 이야기를, 논문 이야기를, 정치 여담을 주고받으며 망자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지우고 있었다. 상주는 딱히 정해져있지 않았고, 남자형제들끼리 돌아가며 자리를 지켰다. 조금만 더 쉬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다시 노질을 시작했다. 그곳까지의 여정은 멀고도 멀었다.
맞이할 손님이 없는 검은 사람들은 한 쪽에서 장례식이 끝나고 갈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도에 있는 장남의 별장부터 시작해 일본 여행, 유럽 여행, 티브이에 나왔다는 대만 여행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맞이할 손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울상을 지으며 위로를 받는다. 나는 장례식을 떠도는 이야기를 지우고 노질에 집중하기로 했다. 갈 길은 멀고 험했다.
20시. 울려대는 전화에 잠시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로 갔다. 요양병원이었다.
“장경순 씨 딸 맞으시죠?”
“네. 엄마한테 무슨 일 있나요?”
“한 시간 전부터 전화를 드렸는데 안 받으셔서…….”
“일 때문에 바빠서요. 엄마가 저 찾아요?”
“그게…… 갑자기 안 좋아지시더니 방금 돌아가셨어요.”
엄마의 죽음.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고 생각했고, 준비됐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죽음.
지금 엄마는 대학병원에 있다고 했다. 엄만 오래 전부터 장례식을 치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디에 매장하든 납골당에 보내든 상관없으니 네 알아서하고, 장례식에 사람 부르는 일은 없도록 하라 했다. 나 죽는데 올 사람도 없으니 돈쓰지 말라는 거였을까. 병원에 전화를 걸어 그곳에서 추천해주는 상조업체와 연락을 했다. 장례식은 치르고 싶지 않다는 것. 납골당에 안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회사와 이야기를 한 후 바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10분 이상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데……. 이 와중에 노질을 걱정하는 내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부장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서너 번쯤 걸었을까, 부장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대타 좀 구해주세요.”
“안 돼. VIP야.”
“그래도…….”
전화가 끊겼다. 부장이 원망스럽기 보다는 이름도 모르는 영정의 주인 앞에서 울어야 하는, 부장에게 오늘 일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죽은 엄마의 곁으로 뛰어가지 못하는 초라한 내가 싫었다. 마음 같아선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정말 엄마를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시 상조업체에 전화 해 당장 갈 수 없다는 것을 전하자 담당자가 대신 인수하여 정리하고 있겠다는 뜻을 전했다. 언제 어디로 찾아가면 되냐는 질문에 담당자는 내일 아침에 오면 된다고 말해주었고, 장소는 문자로 보내주었다.
애 아빠를 보내면 되겠지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을 게 뻔했다. 공사판에서 일을 하다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러 갔을 게 뻔했다. 그곳에서 작은 화투판이 벌어지고, 오늘 벌어온 돈을 다 잃거나 두 배로 벌어오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말이다.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자신의 취미생활을 존중해달라는 말 뿐이었다. 결혼 할 생각은 아니었다. 실수로 민석을 임신하게 됐고, 부랴부랴 결혼식을 치렀다. 엄마는 너도 네 인생을 구속시킨다며 안쓰럽게 쳐다봤다. 난 그때까지 엄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애 키우면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애 아빠가 내게 잘 대해주던 연애시절만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집에서 살림을 했다면 엄마를 보러 갈 수도 있고, 민석이 겉돌지도 않았을 것이고, 부부 사이도 더 좋았을 텐데. 모두 다 내 탓이다.
이제 노질을 하러 돌아가야 한다.
다시 기나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상주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며 눈치를 주었고, 나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노질을 시작했다. 엄마의 죽음에도 이름 모를 영정의 주인 앞에서 노질을 하는 나. 난 지금 누구를 위해 노질을 하는 걸까.
얼마 전 민석이는 내게 사람이 죽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당연 없다고 대답했지만, 그때 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번뜩임에 한동안 멍해야했다. 아빠. 아빠는 그 누구보다 가부장적이었고, 술에 미쳐 사는 사람이었다. 농사를 지어 수확해놓은 쌀들을 동네사람끼리 비닐하우스에 앉아 노름으로 다 날려버리기 일쑤였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잡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노름에서 한 몫 챙기던 날에는 다방 여자와 여관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 집엔 자식이 나뿐이었고, 엄마는 아빠의 그런 모습을 20년 동안 참아왔다. 그래도 아빠니까, 남편이니까, 엄마의 허무맹랑한 이유였다.
집에 있는 게 싫어 서울의 공장에 취직했다. 명절에만 집에 내려갔고, 엄마와 간간히 통화를 나눌 뿐이었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간 지 2년이 되던 해, 오랜만에 내려온 집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빠는 아직까지 비닐하우스를 들락거렸고, 마침 그 날 아빠는 한 해 수확한 모든 쌀을 잃어버렸다. 씩씩거리며 집에 온 아빠는 엄마를 호되게 꾸짖었고, 집안의 살림거리를 하나둘 내던졌다. 엄마는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는 듯 요령껏 아빠의 화를 받아주고 있었고, 나는 늘 그랬듯이 아빠의 이런 모습이 싫었다. 아빠 지금 뭐하는 거냐고, 그만 좀 하라고, 악을 질렀을 때 나를 보는 아빠에게서 알 수 없는 살기가 보였다. 한쪽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초점을 잃은 눈으로 내게 다가와 뺨을 한 대 내리쳤고, 내 옷을 찢었다. 최대한 좋은 말로 나를 겁탈하기 일보 직전에 엄만 아빠가 사랑해마지않던 소주병으로 아빠의 머리를 내리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초록의 조각들이 낱낱이 울음을 터뜨렸고, 아빠가 비틀거리며 엄마를 돌아봤을 때 엄마는 다른 소주병으로 한 번 더 아빠를 내리쳤고, 또 다른 소주병으로 한 번 더 내리쳤고, 또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빠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단말마의 비명은 없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엄마의 울음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20년간 아빠의 모습을 알던 고향 사람들은 엄마를 위해 증언을 해주었고, 엄마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 때 끔찍했던 그 모습. 살기를 띤 눈에서 허망한 눈으로 바뀌어가는 아빠. 인생을 관망하는 듯한 눈에서 살기를 띤 눈으로 바뀌어가는 엄마. 엄마는 훗날 내게 말했다. 난 괜찮은데 나는 맞아도 괜찮았고 고생해가며 거둬 놓은 쌀 다 잃어도 괜찮았는데, 너는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랐고 이 가난에서 벗어나길 바랐고,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기를 바랐다고. 그런데, 네 애비가 그러니까 정신이 나가더라고. 애비라는 사람이 그럴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딸한테, 하나밖에 없는 금쪽같은 딸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 사건 이후로 엄마는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했고, 소주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엄마는 내게 자신의 삶의 그 어떤 부분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당신의 소원은 내가 당신처럼 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요양병원에 들어간 후 나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엄만 내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결국 너도 나랑 똑같은 삶을 산다고. 막노동판에서 일하며 일이만원으로 시작한 노름이 점점 커지며 하루 일당이 되어가고, 그런 아빠를 싫어하는 민석. 부모가 다 있는 가정이 그래도 더 낫다는 생각에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나.
난 지금 누구를 위해 노질을 하는 걸까.
21시. 아직 늦지 않았다. 엄마에게 가봐야 하는데……. 몇 만원 더 벌자고 여기서 이럴 필욘 없는데……. 그냥 엄마에게 가도 회사에서는 나를 쓰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앉아 노질을 하고 있는 건지, 사람들의 의미 없는 위로를 받으며 있어야 하고 있는 걸까. 민석이 가지고 싶다고 한 최신형 스마트폰 때문일까. 밀려있는 월세 때문일까. 마음으로는 수십 번 생각했다. 그 무엇보다도 엄마가 소중하다고. 내 자식보다도 밀린 월세보다도 엄마가 소중하다고. 나와 아무 상관없는 망자를 내팽개치고 나가 엄마에게 갈 수 있다고. 그런데 왜 난 여기에서 노질을 하고 있는 걸까…….
22시. 잠깐 화장실을 간다고 말한 후 부장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빨리 대타 좀 구해줘요.”
“안 돼.”
“안 돼도 상관없어요. 저 갈게요. 회사에서도 저를 안 쓸 수는 없지 않나요? 안 쓴다고해도 상관없어요. 다른 곳 구하면 돼요.”
“그래? 회사 규모는 생각 안하나보지? 일이 원하는 만큼 들어오지 않을 텐데. 알아서 해봐 한번.”
전화가 끊겼다. 인력 대행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세 군데 업체에 이름을 올려놓는다. 나 역시 그랬지만 일이 들어오는 것의 70%가 A업체일 정도로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하필이면 오늘 일을 받은 곳이 A업체였다. 다른 일을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식당에서 접시를 닦거나 청소를 하는 일보다 보수도 좀 더 좋을 뿐만 아니라 오전에 집안일을 할 시간도 있었다. 난 을이었다. 내가 노질을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꼭 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A업체에는 많은 사람이 등록되어있었다.
난 다시 노질을 하기로 했다. 3시간만 더 가면 끝나는 여정이었다.
운다. 노를 젓는다. 장례식장을 가득 채우는 이야기소리 위로 울음소리를 띄운다.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며 노를 젓는다. 물을 마셔 목을 축인다. 흐트러진 머리핀을 다시 꼽는다. 나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뒤로한다. 무의미한 위로를 받는다.
상조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의 시신을 인수해 회사에서 입관절차를 앞두고 있으니 내일 와서 보면 된다는 것. 화장장은 예약을 해두었다는 것. 내일 엄마는 내 앞에 있는 이 이름 모를 망자와 같은 시간에 입관을 한다. 같은 시간에, 화장을 한다.
난 지금 누구를 위해 노질을 하는 걸까.
난 지금 누구를 위한 위로를 받는 걸까.
22시. 조문객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사람들마다 모두가 망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처럼 우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슬픈 표정과 흐느낌만으로도 나룻배가 가는 방향에 작은 바람을 불어주었다. 배의 작은 닻은 그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속도를 올렸고, 나는 거기에 맞추어 노질을 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얼마 남지 않았다. 두시간정도 지나면 나는 다시 강가에서 새로운 망자를 기다린다. 그런데, 엄마의 여정은 언제 시작하는 걸까.
엄마의 삶도 아름다울 수 있도록, 엄마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그 여정은 언제 시작하는 걸까. 저 이름 모를 망자의 삶과 엄마의 삶이 다를 게 무엇인데 엄마의 죽음에도 난 저 망자의 죽음에 노질을 하는 걸까. 흔들리는 나룻배.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사공의 직분에 충실하기로 했다.
노를 젓는다.
저 먼 곳 희미하게 보이는 목적지를 향해 노를 젓는다.
뿌연 안개와 까만 강물을 가로지르며 노를 젓는다.
23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노질에 박차를 가한다.
24시. 퇴근이다. 상주가 내게 수고했다며 인사를 한 후, 택시비라도 하라며 이만 원을 손에 쥐어준다. 버스가 끊긴 시간이었고,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었다. 이만 원을 지갑에 넣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간다. 찬바람이 스며든다. 도로에 택시가 보이지 않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더 아껴야겠다는 생각에 걸어가기로 했다.
뉘엿거리는 가로등. 거리를 밝히는 헤드라이트. 거리엔 빛으로 가득 찼다. 민석의 삶에도 빛으로 가득 차길 바랐다. 다른 집처럼 피아노학원, 한문학원, 영어학원, 수학학원…… 남들이 다니는 학원은 다 보내주고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았다. 정말 필요할 것 같은 몇 개만 고르고 골라서 보냈다. 어느 집은 과외 시키려고 엄마가 몸을 팔더라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수입이 꽤 괜찮더라는 뒷말에 순간적으로 그 일을 시작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텁텁해진 피부에 제대로 자지 못해 빠지기 시작한 머리칼. 누가 나를, 이라는 생각과 함께 민석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내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민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주지 못하는 건 너무 많아서 미안한데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등바등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게 너무 미안했다. 작고 소소한 행복이라도 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조차도 욕심이라서 미안했다. 자식만큼은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자기보다 풍요롭게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꼭 그렇게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민석에게 그런 삶을 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억척스럽게 아꼈고, 돈을 벌었다. 학원 하나라도 더 보내서 좋은 대학에 보내고 좋은 직업을 갖게 해 성공시키는 것. 그것이 엄마와 나,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니까.
일주일 전쯤 엄마는 내게 그 이의 지독한 습관을 고치게 하라고 말했다. 일이 끝나면 시작되는 화투판. 그러면서 엄마는 조심스레 아빠의 이야기를 꺼냈다. 반쯤 죽여서라도 습관을 고쳐놨어야 해. 한두 번으로 끝날 줄 알았어. 경찰에 신고를 하든, 손발을 분질러서 비닐하우스에 못가든 그 짓을 못하게 했어야 해. 그랬다면 너와 나 모두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겠니. 나중에 후회하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못된 습관 고쳐놔. 그게 민석이를 위한 일이고, 너를 위한 일이다. 엄마와 똑같은 삶을 살고 싶니? 똑같은 후회를 하고 싶니? 엄마는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우리 엄마…….”
“오늘 세배로 땄어. 세배!”
“그거 또 했어? 하지 마라니까.”
“땄으면 됐지 무슨 말이 많아. 세배라니까. 세배? 나 오늘 늦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안 돼. 할 말도 있고 빨리 들어와.”
전화는 이미 끊겨있었다.
남편이 아빠처럼 되는 건 아닐지 두려웠다. 아빠처럼 그 이가 외간여자와 여관에서 발견되는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루 일당을 넘어서 화투판에 집까지 들이붓는 그 날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민석이와 나에게 손찌검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수많은 고민이 내 앞을 스쳐지나갔다. 내가 지금 그 이의 습관을 고치지 못하면 훗날 민석이에게 손찌검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엄마처럼 소주병으로……. 아찔했다. 난 엄마가 좋았지만, 엄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엄마의 삶을 닮아가는 걸까.
엄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화투판에 그만 끼라는 말을 꼭 오늘 해야 할 것만 같아 그 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몇 차례 반복했지만 받지 않았다.
오늘 꼭 할 이야기가 있어. 나 집 거의 왔으니까 빨리 들어와, 라고 문자를 보냈다. 바로 답장이 왔다. 문자를 읽을 줄은 알아도 할 줄은 모르는 사람인데…… 그 이가 아니었다. 민석이었다.
엄마 나 친구 집에서 자고 가.
민석은 집에 있는 걸 싫어했다. 친구 집에서 잠을 잔다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한 번은 민석에게 왜 집에 있는 게 싫으냐고 물어봤다. 민석은 내게 냄새와 소리가 싫다고 말했다. 그 이의 땀에 절인 술 냄새와 내 파스 냄새. 그리고 늘 열리는 그 이의 화투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잔소리에 오가는 큰 소리. 부모가 못난 탓에 민석이 겉돌고 있다.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민석과 속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번뜩였다. 꼭 오늘이어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세 번 가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오늘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빨리 들어오면 안 될까?”
“집 근처 아니야. 버스 끊겨서 못가.”
“택시타고와. 엄마가 택시비 들고 기다리고 있을게.”
“됐어. 그냥 내일 말하면 안 돼?”
“엄마가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아 그리고 할머니…….”
“아. 내일 갈게 그냥. 엄마 잘 자.”
전화가 끊겼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엄마가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래. 택시 탄 다음에 집 앞에 오기 전에 전화 주고. 기다릴게, 라고 문자를 보냈다.
“오늘 다들 정말 왜 이러는 건데…….”
집 앞 골목에 도착했다. 색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네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집들을 넘어, 넘어,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집들은 더 초라해져만 갔다. 가로등 불빛은 뉘엿거렸고 폭 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랐다. 오르고 또 올랐다. 삶의 행복이 저 끝에 있는 건 아닐까. 오르고 올랐다. 계단은 끊겼다. 행복은 보이지 않았고 집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집 안이나 밖이나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신발을 벗으며 누구 없냐고 물어 인기척을 내보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곧 오겠지……. 밥통은 비어있었고, 냉장고도 허전했다. 그 이와 민석이 들어오면 늦은 시간이지만 밥이라도 먹으며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쌀을 씻어 압력밥솥을 안친다. 냉장고 한 구석에 있는 멸치를 꺼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후 간장과 물엿을 넣어 달달 볶는다. 냄비에 올려 둔 물이 끓으면 된장을 풀고 애호박과 양파를 썰어 넣은 후 간을 맞춘다. 냉장고 야채실에 있는 감자 세 개를 꺼내 채를 썰고, 된장국을 하기 위해 썰어 두었다가 남은 양파와 함께 프라이팬에 볶는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후추를 살짝 뿌린다. 그리고, 그리고……. 더 하고 싶었지만 재료가 없었다. 두 개있는 계란으로 계란말이를 만든다. 밥을 푸고, 국을 푼다. 만든 반찬과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정갈히 담아 식탁에 올려둔다. 한 시간이 좀 덜 지나있다.
새벽 3시.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문자를 한 번 더 보내보지만, 답장은 없다. 꼭 오늘이어만 할 것 같았는데 이대로 나도 똑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아니, 내일 이야기하면 되지.
혼자 밥을 우걱우걱 떠먹는다. 그 이의 밥과 민석의 밥까지 다 먹는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사라지지 않아 밥 솥 채로 가져와 있는 반찬을 다 들이 붓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비빈 후 떠먹는다. 먹고, 먹는다. 순간 먹었던 음식들이 역류하는 느낌에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는다.
흰 쌀밥, 된장국, 멸치볶음, 감자볶음, 계란말이, 김치. 모든 음식이 쏟아져 나온다. 그것들을 멍하니 쳐다보다 물을 내린다. 그 이와 민석은 왜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걸까. 너무나도 잘 아는 이유 때문에 다시금 속이 매스꺼워졌다. 속을 한 번 더 게운다. 입을 몇 번 행군 후 안방으로 가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본다. 평생 제대로 된 화장 한 번 해보지 못한 엄마가 내일, 어여쁜 새색시가 된다. 일을 내팽개치고 가지 못해 미안한 마음, 좀 더 챙기지 못해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난 엄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 이의 못된 습관을 고치고, 민석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전에 내일 엄마를 보러가야겠지만. 엄마는 죽는 날까지 내 행복을 바랐다. 그런데 끝내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난 엄마의 죽음에 위안할 수 있는 요소가 없었다. 좀 더 쉬운 걸 바랐다면…… 그랬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
울음이 솟구친다.
엄마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나룻배를 띄운다.
닻을 올린다.
노를 젓는다.
아침 햇빛이 시멘트를 비집고 들어올 때까지 노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장례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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