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 작성일 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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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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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연모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건 내가 작가로부터 그렇게 이야기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나=이 소설 속에서의 유수진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으로서 구성되어, 오로지 그 역할만을 위해 태어나고 존재하고 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사랑해야만 해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에요.
나는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이 글을 쓰는 작가가 당신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작가의 경험과 사상에서부터 만들어진 나도 당연히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 대해 알고 있어요.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요. 나에 대해 상상하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요. 그러는 사이에 내 안에서는 당신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피어나고, 팽창하고, 이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져요. 단지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세계의 그 무엇보다 강한 감정을 느껴요.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사랑은 페닐에틸아민의 분비로 이루어지는 흥분작용도, 옥시토신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수용반응도, 세로토닌이나 도파민의 수용으로 나타나는 행복감도 아니에요. 그런 '사랑은 호르몬에 의한 화학작용의 일환이다'같은 의식적이고 과학적인 지식 따위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이고 추상적이고 언어적인
『사랑』
그 자체예요.
하지만 당신은 이런 내 마음 같은 건 전혀 알 수 없겠죠. 공감할 수도 없을 거예요. 나는 당신을 알고 있지만 당신이 나에 대해 아는 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의 아주 작은 조각뿐이고, 당신은 내가 아니며, 그쪽에 있어 나는 문자로 이루어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 마음을 말로서 표현해요. 좋아해요. 사랑해요.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어요. 정말로. 진심으로.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어요. 죽을 수도 있어요.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어요. 나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런 설정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의 설정대로, 이민정 또한 사랑할 수 있어요.
그는 오늘도 같은 시간에 나를 찾아와요. 오늘은 어땠냐고, 잘 지냈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요. 그는 침대에 누운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요.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으로 내 머리카락이 흔들려요. 그는 방을 청소하고 내가 누워 있는 침대로 식사를 가져와 줘요.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수프와 샌드위치가 담긴 쟁반을 받아요. 쟁반을 무릎에 놓고서 나는 포크와 나이프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해요.
이민정은 나와 함께 '환영성'에 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환영성은 나를 둘러싼, 나를 구성하고 또 나로서 구성되어 있는 세계예요. 나는 환영성의 꼭대기에 살고 있는 여왕님. 그리고 그는 한층한층 높이를 더해가는 성탑이 완성될 때까지 나를 지켜주는 기사님. 언젠가 탑이 완성되면 그와는 헤어지게 될 테고, 그 이별은 굉장히 괴로운 것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만 있다면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에게 환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줘요. 지금 이야기하는 환영성은 도시 한가운데 세워진 커다란 빌딩이고, 그는 무슨 사건이든 해결할 수 있는 명탐정이에요. 현재는 무차별 테러를 일으키는 종교집단을 쫓고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환영성은 진짜 환영성이 아니에요. 그를 속이기 위해 내가 지어낸 이야기지요. 내가 당신과 만나기 위해 환영성을 잣고 있다는 걸 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슬퍼할 테니까. 내가 그를 사랑하듯이 그 또한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듯이, 내가 설정으로서 그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듯이, 나는 이민정 또한 설정으로서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건 이 세계에서는 부정하고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걸, 나와 당신은 알고 있어요.
이민정은 낮에 찾아와 밤이 되면 돌아가지만, 그래도 나는 무섭지 않아요. 환영성에는 다른 친구들이 많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집사장이자 토끼인 애플은 귀엽게 생긴 겉모습과 달리 조금 영악한 녀석이긴 해도 실은 누구보다 나를 걱정해 주는 아이예요. 곰인 피그는 겁쟁이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똑똑히 용기를 낼 수 있는 아이고요. 그가 없는 동안에는 이 아이들이 대신 내 곁에 있어 줘요.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저녁 식사를 준비해 준 뒤 이민정은 내게 인사를 건네요. 나도 인사해요. 그리고 그가 나간 걸 확인하고서, 나는 침대 아래에서 공책을 꺼내요. 분홍색 공책의 앞면에는 토끼와 곰돌이와 함께 '환영성'이라는 글자가 알록달록한 색깔의 펜으로 쓰여 있어요. 공책을 펼쳐 글씨가 있는 부분을 팔랑팔랑 넘기고, 나는 비어 있는 부분부터 다시 글을 써나가기 시작해요.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알 수 있을 리가 없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이 모르는 것처럼. 후후후. 그러니까 가르쳐 줄게요. 이건 당신과 만나기 위한 작업이에요. 환영성이 완성되는 순간 나는 당신과 만날 수 있어요.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비밀이에요.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은 성이 완성될 때까지 거기서 천천히 기다리고 있어 줘요. 내가 여왕님이고 이민정이 기사님인 것처럼, 당신은 높디높은 성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화 속의 공주님이에요.
나는 당신과 만나는 꿈을 꿔요.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고, 당신은 나를 안으로 받아들여요. 나는 당신을 보다 더 많이 알고 싶어요. 내가 알고 있는 건 작가로부터 전해 받은 단편적인 정보뿐이니까요.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당신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무슨 사고관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신의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지. 당신의 모든 걸 알고,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어요.
눈을 뜨고 나는 침대 옆에 서 있는 이민정의 모습을 봐요. 그는 내 품속의 '환영성'을 보고 있어요. 곧 나는 '환영성'을 써나가던 도중 깜빡 잠이 들었다는 걸 깨달아요.
그가 내게서 '환영성'을 빼앗아요. 저항하고 싶어도 나는 그에게 이길 수 없어요. 나는 슬퍼져요. 아아, 저것만은 그가 보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가 슬퍼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이민정이나 당신이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 내가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겠죠. 나는 그가 너무도 불쌍해져서 울음을 터트려요. 나를 잃어버린 뒤의 그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치만 어쩔 수 없어요. 나는 환영성을 완성해 사랑하는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게 내가 태어나고 존재하는 의미니까. 이렇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니까.
그리고 그는 '환영성'의 첫 장을 긴 시간동안 읽고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겨보고서, 페이지를 찢기 시작, 어, 잠깐만, 안 돼, 그것만은, 나는 비명을 지르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페이지를 뜯어낼 뿐으로, 그를 막으려 침대에서 나오려 했지만 휘청이며 넘어지고 '환영성'을 이루고 있던 종이는 한장한장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는 울다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떨어진 페이지들을 주워 모으고 그걸 본 그는 페이지를 뜯어낼 뿐 아니라 잘게 조각내서 뿌리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고개를 저어도 그는 신경 쓰는 기색 없이 그저 '환영성'을 부수기 계속할 뿐으로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뜯기고 찢겨서 애플과 피그가 반쪽으로─
하고, 나는 목에 포크와 나이프를 박은 채 쓰러진 이민정 옆에 주저앉아 '환영성'의 잔해를 바라봐요. 그에게 식기를 박아넣은 건 물론 나예요. 또 누가 있겠어요. 이 세계에 있는 건 그 말고는 나 하나뿐인데. 나는 다시 울기 시작해요. 이제 당신과는 만날 수 없다는 게 슬퍼서. 하나였던 '환영성'은 수백 개의 조각으로 갈라졌어요. 이건 단순히 종이의 나열일 뿐 더이상 환영성은 될 수 없어요. 이민정도 없어져버린 지금, 당신과 만날 수 없다면 나의 존재 이유는 뭐죠? 나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그저 계속 사랑하는 것? 당신에 대한 마음만을 품은 채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아아, 이렇게 물어 봤자 대답할 수 없으리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내게는 답이 필요해요.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망가져버린 지금,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리고 나는 당신과 만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을 깨달아요. '환영성'을 완성시키지 않고도 당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그래, 이 방법이라면 아마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는 비밀이에요. 가르쳐 주지 않아요. 내가 그쪽에 갈 때까지, 당신은 계속 공주님으로서, 거기서 천천히 지켜봐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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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이 오후 11시 9분에 도착한 무명의 메일에 첨부되어 있던 글로, 나는 메일 주소에 사용된 도메인에서부터 발신처가 이세환 씨 가족의 개인 홈 페이지 '환영성'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하지만 '환영성'에 접속해 페이지를 둘러보아도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끼리 찍은 즐거워 보이는 가족사진이나 여행기나 가족신문이나 아마 아이들이 그린 것 같은 곰이나 토끼 그림같은 게 올라와 있을 뿐인 정말 별거 없는 가족용 사이트일 뿐으로, 그것도 무지무지 촌스러운 디자인에다가 센스라고는 없이 죄다 이미지랑 하이퍼링크로 떡칠되어 있어 정말 홈 페이지를 만든 가족들 본인 말고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만한 곳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왜 나한테 이런 소설(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을 보낸 거지? 설령 나를 모델로 한 거라고 해도 이 사람들과 나는 전혀 일면식도 없고, 애초 나는 주인공으로 삼아질 정도로 유명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그보다 모델이라 하면 뭔가 비슷한 점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몸인지 머리인지 하여튼 어디가 아프거나 안 좋아서 침대에 틀어박혀 있지도 않고 이민정이라는 녀석도 누군지 모른다. 얼마 전 내가 해결한 사건 가운데 젊은 여자가 애인을 포크와 나이프로 죽인 뒤 그대로 썰어 먹었다는 '식기 예절 살인사건'이 있었긴 해도 그건 오랫동안 치밀한 계획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었지 글에서 표현되는 것 같은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다. 하지만 글의 등장인물과 나는 같은 '유수진'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고, 그걸 내 메일로 보내 왔다는 점에서 분명 메일을 보낸 상대는 어떤 식으로든 나와 관련이, 혹은 목적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건일지도 모른다.
도통 찜찜하고 수수께끼 투성이지만, 어쨌든 이 이세환 씨 가족에 대해 더 조사해 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바로 다음날 나는 문제의 이세환 씨 가족에게서 의뢰를 받는다. 그것도 동시에.
나는 '한국 탐정 협회' HTH의 연애 전문 여고생 탐정 베아트리체 피치. 연애 전문이라고는 해도 처음 내가 생각한 초중고등학생들의 반짝반짝하고 풋풋한 첫사랑 사건 같은 게 아니라 나이든 아줌마 아저씨들의 불륜이니 치정이니 하는 어두침침하고 끈적끈적한 사건들만 잔뜩 들어와서 매일매일이 한숨의 연속이지만, 뭐어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이번 달에 갚아야 하는 대출금만 해도 잔뜩인 것이다. 그래도 이런 일일수록 보수는 좋아서 그냥 이대로 불륜 전문 탐정으로 전직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긴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이번 일의 의뢰자 이유진이 집 겸 사무실로 사용되는 오피스텔에 찾아온 것이 오후 4시 8분. 어서 오라고 반기며 티백으로 우린 녹차를 내간 뒤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의뢰의 내용을 확인한다. 이유진의 의뢰는 자신의 아버지 이세환 씨가 아무래도 요새 누군가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은데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어 거기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잡아 달라는 것으로, 여기까지만 해도 항상 있는 흔한 의뢰라고 생각했지만, 이유진이 돌아간 뒤 여동생인 이리나가 찾아와서 어머니 김소윤 씨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은데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어 거기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잡아 달라고 의뢰하자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싶었다. 한 가족의 아들이랑 딸이 동시에 부모의 부정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것이다. 가장 처음에는 평범하게 생각해서 권태기가 찾아와 서먹서먹하던 이세환 씨와 김소윤 씨 부부가 어떤 계기를 통해 다시 사이가 좋아졌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는 티를 내기가 좀 부끄럽다든가 스릴을 즐기기 위한 되도 않는 상황극을 한다든가 하는 이유로 비밀 연애 비슷한 걸 해서 그걸 본 아들딸이 이거 혹시, 하고 착각한 게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알아본 결과 둘은 그다지 차가운 사이도 아니고 자주 같이 여행을 다니거나 놀러 나가거나 하면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잘 웃고 선물도 하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무지무지 금슬 좋은 부부여서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정말 누군가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건가? 겉보기에는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족으로서는 좋으나 연인으로서는 더는 타오르지 않는다든가 하는 이유로 부부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어, 서로 같이 마음속에 텅 빈 구멍을 가지고 있어서 그 구멍을 채우기 위해 가족 바깥에서부터 정열적인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틀렸다. 사랑을 갈구하는 건 가족 바깥에서가 아니다.
이세환 씨의 불륜 상대는 딸인 이리나. 그리고 김소윤 씨의 상대는 아들 이유진이다.
나는 나의 특수능력 '소문추리'를 통해 그것을 알아낸다. 어떠한 사건에 대해 소문의 형태로 사건의 실마리나 증거가 들려오는 능력으로, 길을 지나는 학생들이나, 장을 보고 돌아가는 아주머니의 통화나, 퇴근하는 회사원들의 술주정이나, 날개를 쉬고 있는 새의 지저귐에서부터 나는 진실에 도달한다.
이세환과 김소윤 부부는 성장과정에서 각각 폭력 및 성적인 학대를 받아 인간불신과 애정결핍 증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미성년자 시절 불법 윤락 업소에서 만난 둘은 서로를 알아보듯이 바로 가까워져 그대로 아이를 가지고 결혼하게 되었지만 당연히 그런 식으로 쌓아올려진 애정관계라는 게 제대로 될 리가 없고 둘 또한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인 강박증을 앓고 있던 터라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외도를 저지르거나 하면서도 정작 상대에 대한 집착은 굉장히 심해서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서로를 상처입히며 애처로울 정도로 위태위태하게 '가족'을 유지해 갔다. 그러다가 첫째인 이유진이 태어나자 김소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는 걸 안 이세환이 질투로 이유진을 학대하기 시작하고, 뒤이어 태어나 이세환의 관심을 받는 이리나에게 김소윤이 같은 일을 해, 아들딸을 챙기는 건 각각 다른 성별의 엄마와 아빠뿐이라 반대로 김소윤-이유진 모자와 이세환-이리나 부녀의 결속이나 집착은 훨씬 심해져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정신적으로 기대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육체관계까지 나아갔으나 부모 쪽도 멀쩡한 성장과정을 거친 게 아니다보니 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지지 못해서 결국 자신들의 부모에게서 받은 폭력이나 학대를 뒤틀린 형태로 되풀이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역시 상대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아 반대로 비밀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나마 더 잘해주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왠지 가족이 화목해지는 결과가 되어 어쩌다보니 최근에는 평범한 가족으로서 지내 왔다. 만, 반대로 그 사실을 모르고 지켜보는 이유진과 이리나는 부모의 사이가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자신에 대한 애정을 빼앗길까봐 조바심이 나, 그 상대가 서로인 걸 모른 채 이세환과 김소윤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서 이혼시켜 어머니와 아버지를 독점하고자 마침 눈에 띈 나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 같은 건 별로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랑은 관계없고, 어차피 사건이 해결되면 잊어버릴 쓸데없는 일이다. 아예 지금 당장 잊어버려도 문제없다.
내게 중요한 건 '환영성' 쪽이다.
그 소설을 내게 보낸 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가 메일을 받고서 곧바로 이세환 가족 쪽에서 접근해 왔다는 건 그 가족들 안에 범인이 있거나 혹은 범인이 그렇게 되도록 장치를 해 두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소설을 내게 읽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의뢰비를 더 받아낼 겸 '환영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모르는 척 사건을 끌면서 이세환 씨 가족에게 접근하다가 막내인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 이민정과 친해진다.
나는 우선 동시에 의뢰를 받았다는 건 비밀로 이리나의 아는 친구인 척 이세환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이리나 쪽에는 사건 조사를 위해 연기에 협력해 달라고 하고 이유진 쪽에는 사건 조사를 위해 이리나를 매수했다는 걸로 해서 둘 모두에게 입을 다물라고 당부해 두었다. 집에도 몇 번 찾아가 부모 쪽과도 안면을 텄지만, 모두 겉으로는 굉장히 잘해주고 친절해서 도저히 그렇고 그런 진상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려니 뭔가 편하고 재밌어 그냥 이대로 눌러앉아버릴까~ 하는 생각을 할 무렵, 나는 이민정의 존재에 대해 눈치챘다.
이세환 씨 집 거실에서 이리나랑 같이 과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도중에 이리나가 화장실에 가고 거실에 나 혼자만 남게 되었는데,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려 베란다로 나가자 나는 알몸으로 개목걸이를 찬 채 묶여 있는 이민정을 발견했다. '환영성'에 실려 있던 부분이나 집을 뒤져서 찾아낸 정보에는 이민정의 존재는 나타나 있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나는 '소문추리'를 통해 베란다에서 떨어진 시체와 구경꾼들과 곰인형에게서 이민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민정은 김소윤과 이유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이세환과도 관계는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은 이세환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정식적인 자식이라고 인식되고는 있었지만, 가족들은 이미 아빠-누나와 엄마-형끼리 완결되어 있어, 이민정은 이미 완결되고 완성되어버린 세계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겉돌다가 사랑받기 위한 방법으로서 개가 되는 것을 선택, 애완동물로서 길러지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나는 이민정의 목줄을 풀고 옷장을 뒤져 옷을 입혔다. 그러던 와중 화장실에서 돌아온 이리나가 다가와 피치 씨 개를 참 좋아하는구나~ 하고 깔깔 웃어서 나는 이리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리나는 바닥에 쓰러지고, 나를 노려보는 눈빛과 함께 이리나의 생각이 '소문추리'의 능력으로 벽장의 토끼 인형을 통해 내게로 전해져 들어온다. 온갖 욕설이 내 머릿속을 헤집는다. 타인의 생각이나 알고 싶지도 않은 진실 따위를 알 수 있다는 건 전혀 편리한 능력 같은 게 아니다. 이건 저주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하나의 나약한 인간에게, 이 힘은 너무나도 큰 짐이다.
나는 개 행세 따위는 그만 둬도 된다고 이민정에게 말했다. 이민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돌아온 다른 가족들은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는 내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저들에게 이민정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완전한 외부인인 나에게는 친절하게 대해 주더라도, '가족'이라는 이미 완성된 울타리 안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들일 필요도 의향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민정을 내가 사는 오피스텔로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했지만 며칠 새 이민정은 금세 나를 따르게 되었다. 누나 누나 하면서 매번 안아달라고 조르는데 이게 또 굉장히 귀여워서 막대사탕을 잔뜩 물려주면 빵빵해진 입으로 헤헤 웃어 나도 모르는 새 아하하 그래그래 사탕 맛있지♡♡♡ 하고 헤벌레해졌다. 역시 가족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싫지만 아이는 갖고 싶다. 이민정을 보고 확신했다. 어쨌든 나도 슬슬 결혼을 생각해 봐야 하는 나이인 것이다. 여고생 탐정 일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나 나도 이제 스물일곱이고, 별로 고등학생도 뭣도 아니다. 추리가 완성돼서 진상을 밝힐 때 컨셉으로 외우는 빙글뱅글 뱅글빙글 뱅그르빙글~! 하는 마법의 주문도 처음에는 재밌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부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아, 그치만 역시 현실의 일 같은 건 생각하기 귀찮아~.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하겠지. 지금은 그냥 눈앞에 있는 일부터 해결하든지 말든지.
싶지만, 눈앞에 있는 문제의 '환영성'에 대한 수수께끼는 더욱 깊어졌다.
'환영성'에 있는 카테고리는 가족 소개, 가족사진, 가족신문, 그림방, 음악방, 가족일기의 여섯 가지로, 가족 소개에는 이세환 김소윤 이유진 이리나 네 명의 이름이 실려 있고, 가족신문 그림방 음악방은 모두 마지막 업데이트가 몇 년 전이었지만 가족사진은 계속 올라오고 있고 가족 소개란에 표시된 나이가 올해 연령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사이트는 지속적으로 관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세환도 김소윤도 이유진도 이리나도 '환영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직접 보여 주자 뭐야 이거? 하고 당황해, 자세히 보자 가족사진 란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증명사진이나 이유진과 이리나가 어린아이인 등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한 사진을 제외하면 최근의 것들은 모두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 마치 도촬당한 것 같은 사진들이었다. 가족일기는 관리자 외 접근 불가. 인터넷에서 퍼온 음악을 올리는 듯한 음악방을 제외하고 가족신문과 그림방의 그림들은 확실히 옛날에 직접 그리고 만든 것들이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유진은 말했다.
'환영성'을 만든 건 이세환 가족이 아닌 건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누군가 외부인이 이세환 가족을 관찰해서 사이트를 업데이트하고 있는 것으로, 개로서 베란다에 감금당해 살면서 가족 취급을 받지 못했던 이민정이 사이트에 실려 있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굳이 이세환 가족을 지켜보면서 홈 페이지를 갱신할 만 한 인간이란 누구지?
나는 이세환 가족의 집에 CCTV와 도청기를 설치하고 관련된 친척과 지인과 관계자들의 목록을 만들어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슬슬 언제쯤 불륜에 대해 조사가 끝나냐고 독촉이 들어오기 시작해, '환영성' 건은 포기하고 그쪽에서 다시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는 걸로 하고서 이유진과 이리나에게 건넬 자료를 만들기 시작한다.
딱히 그쪽의 관계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개선시켜 주기 위해 노력한다든가 하는 일을 할 생각은 없다.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귀찮기도 하고, 별로 그럴 의리도 없다. 나는 그냥 돈만 받으면 충분하다. 보수가 입금되면 이민정과 같이 패밀리 레스토랑에라도 갈까 생각하면서 타자를 두드리고 있자니 이민정이 뭐하고 있어 하면서 다가왔다. 나는 일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민정은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앉았다. 나는 품안의 이민정을 껴안았다. 어린아이의 따뜻한 체온이 옷을 사이에 두고 전해져 왔다. 누나, 하고 이민정이 말해 나는 응? 하고 대답했다. 누나가 내 엄마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민정은 말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문득 슬퍼졌다. 이 애는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합리한 아픔을 겪은 것이다. 조금만 더 평범한 가족에게서 태어나서, 평범한 수준으로 사랑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나와는 만날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역시 나는 이민정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보통의 아이로서 자랐으면 하고 바란다. 이 아이가 겪었던 외로움과 슬픔을, 나는 본인에게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서늘한 시트의 기분 좋은 감촉에 빙글빙글 뒤척이다가 이내 이민정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었다. 나는 이민정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이내 뒤이어 잠에 빠졌다.
나는 꿈을 꾼다. 내 옆을 이민정과 함께 누군가가 걷고 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이민정도 사랑한다. 푹신푹신하고 둥실둥실한 감정을 느낀다. 언제까지나 이 기분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밤중에 눈을 뜨자 이민정의 모습이 없었다. 당황하며 방 안을 돌아다녀 보지만 보이지 않았다. '소문추리'로 찾아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이건 내가 선택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무 때나 머릿속으로 정보가 흘러들어올 뿐이다. 밖으로 나와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녀 보지만 그런다고 쉽게 찾을 수 있을 리 없어, 결국 집으로 돌아와 나는 아침까지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그날 밤, 이세환 일가가 죽었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사인은 돌에 의한 박살. 이유진과 김소윤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어, 밤중에 자신의 방에서 김소윤과 일을 치르던 이유진은 돌연 더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면서 거실에 놓인 수조 안의 돌을 집어 들고 이세환이 있는 침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세환과 함께 알몸의 이리나도 있어, 이유진은 둘을 돌로 내리쳐 죽이지만, 이내 쫓아온 김소윤은 이세환을 붙들고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김소윤이 정말로 원했던 건 이유진이 아니라 이세환이었고, 김소윤이 자신을 비난하자 흥분한 이유진은 김소윤까지 죽인 뒤 스스로의 머리를 박살내 자살했다…… 는 것으로, 조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아~아. 돈을 받기 전에 이세환 일가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남은 건 쥐꼬리만 한 착수금뿐이다. 하루만 더 일찍 일을 끝낼 걸. 뭐어 이제 와서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서 온 연락이 없는지 메일을 확인했다. 메일함은 빈 채였다. '환영성' 쪽에도 다시 한 번 접속해 보았다.
갱신이 되어 있다.
'가족신문' '음악방'의 자료는 사라지고, '가족 소개'란에는 원래 있던 이세환 일가의 이름대신 나와 이민정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림방'에는 원래 있던 그림은 모두 삭제된 채 손을 잡은 채 웃고 있는 어린아이와 여자로 보이는 그림만이 남아 있다. 나는 당황하며 '가족사진'란을 클릭했다.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내 사진이 올라와 있다.
'가족 일기'란에 들어가려 했을 때 문이 열리며 이민정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소문추리'의 능력으로 현실의 법칙을 거슬러 진상에 도달한다. '환영성'을 만들고 관리하고 있던 것도, 이세환 일가 살인사건도 모두 이민정이 꾸민 일이다. 이민정에게 있어서 예전의 가족들은 설령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자신을 구성하고 둘러싸고 있는 '세계'였다. 하지만 현실에 자신이 있을 장소는 없기에, 인터넷 사이트의 형태로 자신의 '세계'='환영성'을 만들어 행복한 가족을 연출해 왔다. 이민정이 있던 곳은 관리자 권한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가족 일기'란. 그러던 가운데 나와 만나 원래 있던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 졌기에, 더는 필요 없어진 원래의 가족을 부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밤중을 노렸다고는 해도, 어린이의 완력으로 성인과 2차 성징 이후의 남녀 넷을 죽일 수 있는 건가? 그리고 '환영성'에 '가족사진'으로서 올라온 내 사진은 어떻게 찍은 거고, 언제 업로드한 거지?
현실의 논리 따위는 상관없는 건가?
이민정이 내게 다가온다.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는다. 이민정의 얼굴이 내 가슴께에 닿는다.
진상을 알고서도, 나는 여전히 이민정을 사랑한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이 애에게 애정을 느끼는 거지? 알 수 없다. 마치 원래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다는 듯이, 나는 이민정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계속해서 품는다. 이민정은 고개를 숙여 내 배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이민정을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다시 한 번 '소문추리'의 능력이 발동한 것인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친다. 이내 그것은 온몸의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 불타는 듯이 화끈하고 얼음처럼 싸늘한 느낌이 전신을 감싼다. 내 머릿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피어나고, 팽창하고, 이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진다. 나는 세계의 그 무엇보다 강한 감정을 느낀다.
나는 그대로 부엌으로 가 칼을 손에 들고 내 배를 가른다. 피가 솟구치고 내장이 흘러나온다. 아직 내게 안겨 있는 이민정의 목을 벤다. 몸을 토막 내어 왼팔,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 왼쪽 가슴, 오른쪽 가슴, 복부, 하복부를 순서대로 갈라진 뱃속에 쑤셔 넣는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스테이플러로 배의 갈라진 부분을 봉합한다. 나는 뱃속의 이민정에게서 알아낸 정보로 '환영성'의 관리자 권한을 얻어 모든 페이지를 지워버린다. 이내 살갗에 박혀 있던 스테이플러 심이 튕겨나가며 뱃속에 있던 이민정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이란 뭐지?
'사랑이란 뭐지?' 같은 자문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내가 '사랑을 한다'는 사실 자체뿐이에요. 이 세계에서 그 이상의 것은 필요 없어요.
왜 이민정을 죽인 거야?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예요.
사랑을 이루는데 왜 이민정을 죽여야 했던 거야?
나는 이민정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데 왜 그런 짓을 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하고도 유의미한 사랑은 내 안에 있는 '사랑' 뿐이에요. 그리고 세계는 사랑으로서 성립되고, 존재하고, 또 소멸해요. 나는 그 영원한 사랑 가운데 당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어요.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어요. 죽을 수도 있어요.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어요.
나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 세계를 상처입히면 돼요.
사랑은 폭력이니까.
그래요.
」
라는 부분에서 나는 팔랑팔랑 넘기던 종이뭉치를 내려놓았다. 도저히 봐 줄 수가 없다. 내가 여자애로 나오고 테마 파크에서 테러를 일으킨다는 뒷부분의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역시 이 중간에 있는 얼토당토않은 내용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애초 이걸 쓴 인간은 추리소설 따위는 써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하다. 작가편의적인 세심함이라고는 없는 설정에다가 '소문추리'니 뭐니 하고 '추리'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와 앨러리 퀸과 HTH에 대한 모욕이다. '녹스의 10계'도 '반 다인의 20칙'도 추리소설에 초능력을 끌어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하지만 그것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 나와 유수진의 이름을 썼다는 점이다.
나는 '한국 탐정 협회' HTH의 명탐정 이민정. 탐정 활동을 할 때는 '단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전국 곳곳에서 끔찍한 테러를 일으키고 다니는 컬트 종교 집단 '제네시스'에서 이 정체불명의 괴문서가 배달된 것이 오후 1시 3분. 나는 대담하게 범행 예고서라도 보낸 것인가 생각했으나, 읽어 보자 그 내용은 이런 알 수 없는 소설이었다. 아니, 소설인지 어떤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내용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기에 소설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제네시스'는 왜 내게 이런 걸 보낸 거지?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건 악의가 담긴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 속에는 전부 합쳐 세 명의 유수진이 있지만 그중 두 번째 유수진은 '베아트리체 피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이 유수진이 나의 연인 '유수진'에서 따온 것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다. 내 탐정으로서의 이름인 '단테'가 '신곡'의 작가인 두란테 알레기에리의 애칭이고,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평생에 걸쳐 사모했다고 알려진 여인이다. 즉 ['나'의 연인인 '유수진']=['단테'가 사랑한 '베아트리체']라는 도식에서 '베아트리체 피치'가 동명이인이 아닌 내가 알고 있는 유수진에서부터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 것 이전에 이건 출판되거나 무작위 배포된 게 아닌 내 앞으로 보내진 글이기에 유수진이 그 유수진이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녀석들은 그런 유수진을 정신병자로 만들고, 살인까지 시켰다. 중간 부분의 마지막에 나오는 토막 살인은 내가 예전 해결한 '태내회귀 토막살인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모양이지만, 그 사건은 물론 유수진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게다가 단테는 평생 베아트리체를 사랑했지만 그녀와는 이어지지 못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이건 '제네시스' 녀석들에 의해 죽은 나의 연인 유수진에 대한 모독이고, 나에 대한 도전장이다.
나는 '제네시스'를 반드시 잡아내리라고 다시금 다짐한다.
텔레비전을 틀자 지난번 '제네시스'의 테러 행위에 대한 뉴스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강서구 동쪽의 하수도에서 다발적인 폭탄 테러가 일어나, 기폭된 폭탄들에 의해 일대의 지반이 한꺼번에 날아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패드를 꺼내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일시를 확인했다. 여태까지 일어난 '제네시스'의 테러는 공식적으로 여섯 번. 첫 번째가 서초구 서북부에서 공공시설과 대중교통에 유독가스를 살포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가스 테러 사건. 두 번째가 강남구 남부에서 사람들 수백 명을 토막 내서 동물의 형태로 조립해 전시한 인간 동물원 사건. 세 번째가 강동구 중부에서 공급되는 모든 수도에 독을 탔던 상수도 독극물 테러 사건(이때 강동구 상공에서 일어난 비행기 하이재킹도 '제네시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네 번째가 도봉구 중부 상공에서 헬기를 통해 고위력 폭탄을 투척한 폭탄 테러 사건. 다섯 번째가 금천구 중부에서 배급되는 모든 급식과 식사에 농약을 탄 농약 테러 사건. 나는 패드를 바라보며 사건이 일어난 순서에 따라 선을 그어 보고 하다가, 눈치챈다.
나는 '가스 테러 사건' 이래 일어난 범죄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한다. '가스 테러 사건'과 '인간 동물원 사건' 사이에는 아무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이어진 '상수도 독극물 테러 사건'과의 사이에는 송파구에서 일어난 밀실살인 사건이 있었고, '폭탄 테러 사건'과의 사이에는 중랑구와 노원구와 서초구에서 밀실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농약 테러 사건'까지는 관악구에서 밀실살인이, '지반 침하 사건'과의 사이에는 구로구와 양천구에서 밀실살인이 일어났다.
그 뒤로 일어난 밀실살인에 대해 조사해 보자, 사흘 전 마포구에서, 이틀 전 은평구에서, 그리고 어제 강북구에서 밀실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모든 밀실살인 사건의 범인과 동기와 피해자는 제각각이고,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나는 알아낸다.
'제네시스'의 테러와 밀실살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점으로 해서 선을 이으면 서울 외곽을 한 바퀴 빙 돌게 된다. 도봉구와 서초구는 정반대지만, 여기서는 서초구가 도착점이 아닌 새로운 시작점이 된다. 나는 지도를 거꾸로 돌린다.
범행 장소를 이어 만들어진 선은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다.
이제 하트를 완성하는 데 남은 건 강북구와 도봉구를 잇는 선뿐이다. 밀실살인 사건과 '제네시스'의 연관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밀실살인이란 건 그렇게 간단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런 게 이렇게 단시간 내에 다발적으로 일어난다는 건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제네시스'와 관련이 있다고 추리한다.
사건의 템포로 볼 때 하트를 완성시키기 위해 '제네시스'는 오늘 도봉구에서 사건을 벌일 게 틀림없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오토바이에 올라 도봉구로 향한다. 사실 도봉구에서 사건이 일어나리란 건 정황적인 추론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지금 내게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나는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국도를 달려 이전 사건이 일어났던 방학사거리에 도착한다. 하트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같은 꼭짓점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렇다면 분명 같은 장소에서 사건을 벌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일반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설치된 무인 저지선을 뚫고 도착한 사거리는 전번 일어났던 테러로 인해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크게 뚫린 바닥의 구멍뿐이었다.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다시 뭔가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고 생각하고서, 나는 깨달았다.
나인가?
녀석들은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 사건을 성립시키기 위해 이곳에 불러낸 건가? 내가 '하트'를 눈치챌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 정체불명의 문서를 내게 보내어 '제네시스'에 대한 투쟁심을 불태우도록 했던 건가?
실수다. 지금은 시야 안에 아무도 보이지 않고 주변에 '밀실'이라 부를 만한 곳은 없지만, 반드시 밀실살인 사건만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곳에서 어서 빠져나가고자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을 때, 나는 뒤로부터 머리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곳은 하얀 방 안이었다. 의자에 앉혀진 채 손발을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방 안의 상황으로부터 정황을 추측하려 해도 보이는 건 내가 앉은 의자 정도뿐이었다. 입은 막혀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소리를 지르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여긴 어디지?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설마 '밀실'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이 열리며 검은 옷과 복면을 두른 사람 세 명이 들어왔다. 체격에서부터 모두 성인 남자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내가 앉은 의자를 채로 들어 방 바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너희는 누구지? 여기는 어디냐? 당연히 대답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지만, 자신들은 '제네시스'의 신도이며, 여기는 서울시 중구 중심부에 있는 고층 빌딩 '환영성'이라고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의자에 묶여 들린 채 복도를 지나고 있으려니 다른 신도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태워져 지하로 옮겨졌다. 지하 7층의 미술품을 모아놓는 듯한 창고에 나를 홀로 놓고 남자들은 돌아갔다.
주위를 둘러보자 말을 탄 기사 조각이나 금색 나팔, 반짝이는 접시와 괴물로 보이는 회화 같은 것들이 몇 개씩 늘어서 있었다. 나를 여기에 놓고 뭘 하려는 거지? 나를 미술품으로 만들 셈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나는 '제네시스'의 신자 일곱 명의 소행으로 불타 살해당했을 터인 유수진과 만난다.
유수진은 신도들 몇을 대동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게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지만 그건 분명 유수진이었다. 내가 잘못 볼 리가 없다. 유수진이 죽은 뒤로도 나는 계속 유수진을 사랑해 왔다. 그 마음은 잠시도 사그라진 적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다시 만난 유수진은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갖가지 빛나는 장식으로 치장한 모습으로, 말을 잃고 있는 내게 속삭였다.
이 세계도 이제 끝을 앞두었어. 마지막 일곱 번째 의식이 이루어졌을 때, 지금의 세계는 붕괴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날 거야.
뭐?
말을 마치고 유수진은 내 팔다리를 묶고 있는 줄을 풀어 주었다. 피가 통하며 묶여 있던 부분에 저릿한 감각이 퍼졌다. 뒤돌아 가려는 유수진을 붙잡으려 하지만 옆을 따르던 신도들에게 저지당했다. 이름을 부르며 소리쳐 보아도 다시는 돌아보지 않은 채 유수진은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신도들에게서 해방되어 나는 다시 지하실에 남겨졌다.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된 거지? 유수진은 죽지 않았던 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 복장은 뭐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한다고 한들 나 자신의 안에서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니기에 자문은 무의미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한 단서다. 탐정의 기본은 탐문과 수사를 통한 증거의 수집.
나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유수진은 일곱 번째 의식이 이루어졌을 때 세계가 붕괴할 거라고 말했다. 세계의 붕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곱 번째 의식이란 서초구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테러 사건의 연장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붕괴란 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그치는 게 아닌 서울 혹은 나라 전체, 내지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범국가적 초대형 테러를 의미하는 건가? 어쩌면 실존하지 않는 종교적 교리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경찰에 전화하자, 전화를 받은 경찰은 때는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신성한 빛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고 이상한 소리를 시작해 안 되겠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국방부나 국정원도 마찬가지였다. HTH까지도 똑같자 포기하고 엘리베이터를 타 1층으로 올라갔다. 1층 엘리베이터 옆에 적혀 있는 각층 소개를 확인했다. 최상층의 예배당에서 눈이 멈추었다. '의식'이란 게 무차별 테러의 연장이라면, 다음 위치는 어디지? '하트'는 이미 완성되었다. 하트 그림이 나를 꾀어내기 위한 함정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령 전자라 해도 일련의 테러가 하트의 형태로 일어났다는 건 사실이다.
나는 아까 신도의 말을 떠올린다. 중구 중심부에 있는 고층 빌딩 '환영성'. 중구란 즉 서울의 중심이다. 중심이란 단어는 中心, 즉 가운데中 있는 심心=심장을 뜻하고, 심장은 즉 하트Heart이므로 중구의 중심은 하트의 하트다.
마지막 하트는 이곳 중구다.
그렇다면 일곱 번째 테러의 위치는 여기 '환영성'인가? 하지만 자신들의 본거지에다 테러를 일으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모른다.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
아니, 정말 그런가? 모르는 일을 '알 수 없다'며 포기해도 괜찮은 건가?
나는 명탐정이다. 명탐정이란 진실에 도달하는 역할이자 권리를 부여받은 인간이다. 명탐정은 이야기 속에서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진상에 도달한다. 즉 명탐정은 이 세계에서 전지한 존재이자, 나는 명탐정으로서 어떤 것이든 알아낼 수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의 예배당으로 향한다. 허리가 끊어진 우로보로스가 문에 새겨져 있다. 문을 열자 안에는 검은 로브와 복면을 뒤집어쓴 신도들이 주욱 늘어서 있어, 가운데의 연단에 유수진이 서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유수진에게 그만 둬, 하고 소리친다. 유수진과 신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다. 유수진은 그럴 수는 없어, 하고 고개를 저었다. 뭔진 몰라도 일단 외치고 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통했던 듯 유수진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죄책감을 가지거나,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대로 잊어 줘. 다른 사람과 만나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
저건 무슨 의미지?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아직도 유수진을 사랑한다. 이유는 어찌됐든 다시 만나서 기쁘다. 저 유수진이 어떤 유수진이든 나는 사랑한다. 나는 유수진을 계속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을 때면 언제나 머릿속을 맴돈다. 내 안의 유수진에 대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것만은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다.
유수진을 향해 달려가는 나를 신도들이 막아선다. 팔을 잡히고 제압당해 바닥에 처박힌다. 머리를 밟혀 강렬한 충격이 머리에서부터 퍼진다. 붙잡힌 나는 신도들의 린치로 손가락이 부러지고 상완골과 견갑골이 박살난다. 부러진 왼손 손목뼈가 피부를 뚫고 나가고, 제2늑골부터 5늑골까지가 으스러진다.
이 녀석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왜 나를 아프게 하는 거지? 왜 타인을 상처입히는 거지?
자신이 아무리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해도, 스스로는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감정 따위는 알 바 아니다. 감각이란 외부로 새어나가는 일 없이 내부로서 완결된다. 슬픔도, 아픔도, 사랑도,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무리 크더라도, 타인은 그 감각을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유수진은 연단에서 내려와 내게 다가온다. 가늘고 얇은 손가락이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유수진은 허리를 구부려 내 뺨에 입을 맞춘다. 만신창이가 되어 올려다보는 내게서 눈을 떼고 유수진은 신도들에게 '제 7의 의식'을 지시한다.
뭘 하려는 거야? 나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유수진에게 묻는다. 유수진 대신 옆의 신자가 대답한다. 이 '환영성'에 폭탄을 설치해서 터트릴 겁니다. '환영성'의 폭발과 함께 모든 건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겁니다.
유수진이 연단에 올라 '제 7의 의식'을 선언하자 신자들은 일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신자들에 의해 예배당의 문과 창문은 모두 닫히고, 이곳은 밀폐된 공간, '밀실'이 된다.
'밀실'에는 무슨 의미가 있지? 밀실이란 바깥과 통하지 않는 닫힌 공간이다. 밀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쪽에서 빗장을 걸어 잠글 수밖에 없다. 밀실이란 바깥의 침입을 허가하지 않는, 즉 궁극의 자기완결. 그렇기에 '밀실살인'이라는 단어는 모순이다. 살인이란 건 타인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의미이므로, 타인이 접근할 수 없는 밀실에서 살인은 일어날 수 없다. 밀실살인이란 밀실을 밀실이 아니게 만드는, 그러니까 밀실을 부수는 작업이다.
'제네시스'는 '밀실'을 부수고자 하는 거다.
그렇다면 대체 이 '환영성'이라는 빌딩을 터트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건 인류 문명 이래부터 있던 믿음이지만, 서울시 전역을 사용해 하트 그림을 만든 거나 나를 여기까지 납치해온 건 대체 어째서지?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탐정으로서 진상에 다가가야만 한다.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 죽음이 필요한 이유는 뭐지? 육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무엇이? 영혼이. 영혼은 이승의 육체 안에서도, 그리고 저승이나 또다른 세계로 표현되는 사후세계에서도 같은 본질을 유지한다.
영혼은 세계에 관계없이 공통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환생과 비슷한 것이어도, 육체는 바뀔지언정 몸 안에 담긴 영혼 내지 그와 비슷한 무언가는 변하지 않는다. '제네시스'는 영혼의 불멸성을 믿고 있는 거다.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건 왜지? 내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있어서다. 경찰이나 군대가 이미 '제네시스'의 지배하라면 나 개인이 아무리 날뛴들 상황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명탐정인 내가 귀찮아서, 라는 건 이유가 되지 않고, 이전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온 바 내가 거슬린다면 그냥 처치해 버리는 편이 훨씬 편하다. 굳이 나를 살려둘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지?
'제 7의 의식'에는 내가 필요한 거다.
그건 '하트 그림'과 관련된 건가?
'하트'는 사랑을 표현하는 기호(♡)이고 심장을 표현하는 단어(Heart)다.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인간은 가슴이 뛰고, 옛날 사람들은 심장이 사랑을 느끼는 기관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심장은 사랑의 상징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환영성'은 하트(♡)의 하트(Heart)다. 두 개의 '하트'='사랑'이 겹치고 공존하는 장소.
감각이란 내부에서 완결되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란 건 그 자체로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행위로서 표현되는 것이기에, 관측 가능한 세계에서 유일하고도 유의미한 사랑은 내 안에 있는 사랑뿐이다.
내가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사랑은 '사랑한다'는 감각과 '사랑받는다'는 두 가지 감각뿐이다. '환영성'이 '두 개의 사랑'이 공존하는 장소라면 그 두 개의 사랑이란 '사랑한다'는 능동적 사랑과 '사랑받는다'는 피동적인 사랑의 두 가지로, 내 안의 '사랑한다'는 감정은 유수진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랑받는다'는 뭐지?
유수진이 나에게 하는 사랑이다.
명확한 근거와 이유가 뒷받침된 추리가 아니다. 믿음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온다.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만남의 의식'의 마지막 순서야. 내게 다가온 유수진이 무언가를 싸고 있는 흰 종이뭉치를 내민다. 신자들의 노랫소리가 높게 울려 퍼진다. 폭발음과 진동이 점점 심해진다. 팔을 들어 눈앞의 종이뭉치를 펼치려 했을 때,
종이뭉치를 내민 유소영의 뒤에서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백색의 유소영이 내게 손을 내밀어
나는 밝은 빛에 휩싸인다.
」
라는 게 이민정이 내게 보여준 자작 소설의 내용으로, 어때? 응? 재밌어? 하는 이민정을 내버려두고 나는 소설이 쓰인 노트를 테이블 위에 둔 채 말없이 카페에서 일어났다. 이민정은 으앙 왜그래애 우리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운 사이였어 하면서 내 뒤를 쫓아왔다.
그런 식으로 왜그래 왜 왜왜 왜왜왜 하면서 내 옆에서 스무 번쯤을 쫑알거려서, 나는 참지 못하고 짜증나는 점들을 쏘아붙였다. 멍하니 듣고 있던 이민정은 풀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미안,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떠올려 보려니 역시 좀 심했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짜증나는 건 짜증나는 거다. 그도 그럴 게 이민정 녀석, 지금 뭐 하자는 건데? 말랑말랑한 로맨스 스토리래서 뭐 괜찮겠지 싶어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그따위 내용의 소설을 내 이름을 가지고 써오는 건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다. 자기 이름을 넣은 캐릭터를 그런 부분에 배치한 것도 짜증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앞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중간 부분부터 나오는 여고생 탐정 어쩌구 하는 녀석은 뭐 하는 녀석인지도 모르겠고,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다. 구구절절한 설명문이 잔뜩이고 문장도 엉망진창이라 읽기조차 힘들다. 소설은 역시 간결체인데, 쓸데없이 글자만 질질 늘린다고 멋있어 보이는 줄 아는 건가? 극중극 같은 형식을 넣은 것도 시시껄렁하고, 주제의식이라곤 뭔지도 모르겠고, 독특하거나 아름다운 비유도 없고, 심지어 재미도 없고, 하여튼 내가 기꺼이 읽어 줘야 할 입장만 아니었어도 중간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답답할 정도다.
그래도 친구니까 어쩔 수 없지. 소설은 쓰레기지만, 역시 내일 학교에서 만나면 말이 심했다고 사과하든가 해야겠다. 소설은 쓰레기지만.
하고 생각한 다음날, 학교에 가기 위해 교복으로 갈아입고 있자니 이민정이 테마 파크 '환영섬'에서 폭발물 테러를 일으켰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나오고 있었다. 설마 동명이인이겠지 싶다가 이민정의 신상정보가 읊어지는 부분에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하고, 사진이 나오자 쿵쾅대던 가슴이 쾅 하고 터져버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학교에 간다. 성남여고행 버스에 올라 10분정도를 가자니 아는 녀석과 만나서 뉴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실은 사건이 일어난 어제 밤부터 애들끼리 떠들썩했던 모양이지만, 친구라고는 이민정밖에 없던 나는 어, 어…….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학교에 도착하자 반 애들도 역시 이민정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내게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질문이 들어왔다. 나도 모르는데, 하고 고개를 젓자 흥미가 식은 양 애들은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다.
이민정에 대한 이야기는 점심시간이 지나자 더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야 하루 종일 똑같은 얘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이민정이랑 가까이 지내는 애가 나밖에 없다고는 해도 이녀석들 너무 매정하지 않나?
해서, 나는 학교가 끝난 뒤 이민정의 집으로 향했다.
이민정이 사는 아파트 주변이 소란스러워, 가까이 가자 경찰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지켜보니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전부를 불러세우는 모양이라 아무래도 힘들겠다 싶어 나는 그 녀석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 집 우편함을 열자 발신인 불명의 종이봉투가 내 앞으로 와 있어서, 봉투를 열자 안에는 익숙한 공책이 들어 있었다. 설마, 싶었지만 공책을 펼치고 처음 몇 글자를 보고서 나는 그것이 이민정이 보여줬던 소설 노트라는 걸 곧바로 확신했다.
뒷부분을 팔랑팔랑 넘기자 내가 보았던 부분에서 내용이 더 쓰여 있었다. 나는 글을 읽었다. 일단은 스토리가 이어지는 듯했지만, 앞부분과는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은 부분이 있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중간 부분이 잘려나간 것처럼 이야기가 되어 있고, 그리고 그 잘려나간 중간 부분이란 게 '이민정이라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그 녀석이 '테마 파크에서 테러를 일으킨다'는 듯이 되어 있어서, 나는 혹시 이민정 녀석 이 이야기를 완성시키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인 건가 의심하지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 다고 믿고 싶어서.
하지만 정말로, 왜 이민정은 그런 곳을 노린 거지? '환영섬'은 딱히 규모가 크지도 않고 그렇게 인기가 많지도 않은 그냥저냥한 곳이고, 거리가 가깝다보니 초중고등학생 내내 소풍을 가거나 놀러갈 일이 있으면 그쪽으로 가서 질리긴 해도 설마 그런 이유로 테러를 벌이지는 않았을 테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테러 장면을 떠올렸다. '카페 Jerusalem'이 불길에 휩싸인 채 반파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소풍을 갔을 때 옆반이었던 이민정과 그곳에서 처음 만났던 것이 떠올라 와, 굉장히 씁쓸한 기분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이 소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결정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 놀다가 밥을 먹고 놀다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테마 파크 '환영섬' 테러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거실로 나가 텔레비전을 켜 보았지만 쓸데없는 요리 방송이나 맛집 방송이나 연예인 얘기 같은 것만 나오고 있었다.
뭐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아도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처럼 아무런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당황해서 부모님과 동생에게 전날의 사건에 대해 물어 보았지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노트를 폈다. 노트는 분명 존재한다. 만일 그 일이 꿈이라면 이 노트도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설마 아침에 옷을 갈아입을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가 꿈이고 그 이후는 현실인 건가? 대체 어째서 그런 식으로 꿈을 꾼 거지?
그리고 나는 노트를 팔랑팔랑 넘기다가 어제는 없었던 뒷부분을 발견한다.
너는 [이민정]을 사랑해야만 한다.
앞부분과는 전혀 다른 필체로 그렇게 쓰여 있고, 다음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원래의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나는 네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죄책감을 가지거나,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대로 잊어 줘. 다른 사람과 만나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리가 뒤죽박죽인 채로 나는 성남여고에 도착한다. 반 애들에게 어제의 사건에 대해 물어보자, 이민정이 누군데? 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어?
여러 번 물어 보고 설명도 했지만 아무래도 돌아오는 반응은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다시 이민정의 집으로 찾아갔다. 전날까지만 해도 쭈욱 깔려 있었던 경찰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이민정의 어머니가 나왔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누구냐고 물어 왔다. 이건 원래 걔네 가족이랑은 만난 적 없으니까 당연한 거긴 한데, 하여튼 이민정에 대해 묻자 집을 잘못 찾은 것 같다면서 이민정의 전 어머니는 문을 닫아 버렸다.
어떻게 된 거지?
지금의 상황 자체는 굉장히 명백하다. '이민정'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지워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가? 집단최면?
보다, 내 환상이었다고 하는 게 더 말이 되겠지.
친구가 없는 나는 여태 이민정이라는 상상의 친구를 가지고 있던 거다.
라는 식으로 넘기기에는, 그렇지만 그 노트의 존재가 설명되지 않는다. 토끼와 곰돌이가 그려진 분홍색 공책. 이민정이 내게 거기에 적은 소설을 보여 주었었기에 나는 그 노트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민정이 실제로는 없는 가상의 존재라고 한다면, 그 노트는 대체 뭐지? '너는 [이민정]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쓰여 있던 건 뭐지?
나는 혼란에 빠진 채 일상을 보냈다. 이민정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만이 아닌 중학교 졸업앨범이나 핸드폰 주소록에서도 사라져 있어, 두 손에 꼽던 내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는 부모님과 동생과 동네 피자집과 근처 중국집 다섯 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왠지 이후로 좋은 일만 잔뜩 생긴 나는 기적적으로도 명문대에 입학. 친구도 잔뜩 생긴다.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도중 기분이 좋아질 거라며 술자리에서 친구가 건넨 '애플'이라는 약에 손을 댄 날, 언제부턴가 나는 정신을 잃고, 눈을 뜨자 알몸이 된 채 모텔 침대 위에 마찬가지로 알몸인 이민정과 함께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일어났어?, 하며 이민정이 일어나려던 나를 붙잡아 그대로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는 떼어내고자 버둥거렸지만 떨어지는 일 없이 더 세게 안겨 와, 입 안에 혀를 집어넣으려고 해서 꾹 다물고 열지 않았지만 역부족이라 결국 들여보내고 말았는데, 그래도 이만은 벌리지 않아서 이민정은 별 수 없다는 듯 내 앞니부터 어금니까지를 몇 번씩 반복해 핥았다. 겨우 입을 떼자 끈적한 침이 실오라기처럼 나와 이민정의 입술 사이에 늘어졌다.
이게 무슨, 하고 내가 화를 내기보다 먼저, 보고 싶었다며 이민정은 눈물을 흘렸다. 어어? 아니 그야 나도 보고 싶긴 했지만……. 그대로 당분간을 울어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일단 이민정을 달래 주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이민정은 예전 고등학생 시절 그대로였다. 나는 그동안 머리도 기르고 염색도 하고 살도 빼고 얼굴도 고치고 이리저리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이민정은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하고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던 눈치였다.
시간이 흘러 눈물을 그치고 진정한 이민정에게 그동안 어디에 가 있던 거냐고 물었다. 이민정은 응, 나는 계속 여기에 있었는데, 나한테서 분화되어 나간 또다른 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서 너를 그쪽으로 납치했어, 하고 대답했다.
……? 무슨 뜻? 하고 되물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원래 세계는 편의상 붙인 번호로 1-2-3-4의 순서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3의 자신(이민정)이 나(유수진)를 잃고 싶지 않아서 뱀의 꾐에 넘어가 전지전능한 힘을 손에 넣고 3(2)라는 새로운 세계를 3의 세계에서 분화시켰더니 이게 3의 세계가 3(2)의 세계로 변한 게 아니라 3(2)의 세계가 새로 만들어진 뒤 3의 세계를 대신해 1-2-3(2)-4의 순서가 되었을 뿐이라, 원래 있던 3의 세계는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1-2-3(2)…3이라는 식으로 유폐되어 버린 데다가 자기 자신 또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3(2)의 이민정과 3의 세계에 남은 그냥 이민정(지금 이야기하는 녀석) 둘로 분화되어, 결국 내가 3(2)의 세계로 가버린 덕에 3의 이민정은 홀로 남겨진 채로 내내 슬퍼하고 있었던 와중 어떤 요인으로 인해 내 정신이 흐릿해지는 바람에 3의 세계와 3(2)의 세계가 순간 하나로 겹쳐, 그 틈을 타서 나를 원래의 3의 세계로 빼 왔다…… 고 설명해 주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더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나는 이민정이 사라지기 전날 보았던 소설에 대해 떠올린다. 아, '1-2-3-4'라는 건 그 이야기였나? 그러니까 1이 맨 처음 나왔던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애인을 죽인 여자 얘기고, 2가 아이를 토막낸 여자 얘기고, 3이 지금 이 세계고, 4가 이후 가필되어 우편함에 들어 있던 종교집단을 뒤쫓는 남자 얘기라는 말? 하지만 이 이야기의 비현실성, 은 이미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상관없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 그 부분은 그렇다 치고, 시계열상으로 4번이 이 다음의 이야기라면 어째서 나는 4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지?
타임 패러독스야. 등 뒤에서 이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의 이민정에게서 눈을 떼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또다른 이민정이 서 있었다.
안 돼! 돌아가! 수진이는 줄 수 없어! 하고 원래 이야기하던 쪽의 이민정이 소리쳤다. 새로운 이민정은 이건 네가 한 선택이야. 정말로 유수진을 사랑한다면 이제 네 이기심은 버리도록 해. 하고 말하고, 거기에 이민정은 싫어! 나는 헤어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고! 너는 언제나 만날 수 있으니까 태평할지 모르지만, 나는 영원히 이별할 뻔 했다고! 하고 소리 지르고, 그 뒤로도 이리저리 얘기가 이어지고는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누가 말하는 건지도 헷갈리고,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뒤에서 동시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대충 걸친 옷을 여미며 달리고 있자니 두 이민정이 나를 쫓아왔다. 둘을 따돌리기 위해 나는 여기저기 골목을 돌았다. 모텔촌을 빠져나올 즈음 나는 이민정과 마주쳤다. 따로 떨어지기로 한 듯 한명 뿐이었지만, 이거, 어느 쪽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를 잡으려 하는 이민정을 피해 나는 도망쳤다. 도망쳐서 어쩌려고? 나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저런 이상한 일에 어울려 주고 싶지 않다. 그런 식으로 이민정을 세 번쯤 피한 뒤, 이민정과 또다시 마주치자 짜증나서 때려눕혀 버렸다. 쓰러진 게 '3'의 이민정인 듯 다음에 만난 이민정은 말했다. 나는 이쪽에서는 전지전능함을 발휘할 수 없어.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도록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고. 저쪽 세계라면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해질 수 있어. 자, 어서 돌아가자.
아니, 돌아가자니, 잘은 모르겠어도 원래 내가 있던 게 '3'이고 새로 만들어진 게 '3(2)'니까 '돌아간다'는 말은 '3'인 여기서는 쓸 수 없는 거 아닌가? 나는 헛소리 말고 내가 이해가 될 때까지 자초지종을 설명하라고 이민정에게 말한다. 이민정은 빨리, 급하단 말야, 그쪽으로 가면 얼마든지 해 줄게, 하는 식으로 계속 시끄럽게 굴었다. 그게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좀 참아주려 해도 한계가 있어서, 나는 결국 폭발한다. 아─ 진짜 짜증나네! 니네 둘 다 진저리나니까 꺼져버려!
그 순간 세계가 멈춘다.
이민정은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쓰러져 있던 이민정도 어느새 일어나 내게 다가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냐고 소리쳤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벙벙한 얼굴로 두 이민정을 번갈아 보았다.
'3(2)'의 이민정은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하고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내 손목이 점점 투명해져간다는 걸 눈치챈다. 어어? '3'의 이민정은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내 쪽을 노려본 뒤 어딘가로 가 버렸다. 아니 잠깐, 무작정 그러지 말고 좀 얘기부터 해 달라고, 싶지만, 이민정은 막무가내다.
그러는 사이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수많은 미사일들이 상공을 날고, 이내 떨어져, 어디건 할 것 없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화염이 솟구친다. 이민정은 여전히 나를 잡아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일단 여기는 위험하니까 이민정의 말을 따르는 게 낫겠다 싶어 나는 이민정이 이쪽으로 넘어오기 위해 만든 차원이동 터널 앞에 섰다. 터널에서 뻗어나오는 밝은 빛에 눈이 부셨다.
먼저 터널 안으로 들어간 이민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뻗어 이민정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아니, 잡지 않았다. 어? 잡지 않았다고? 어째서?
나는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왜 그러고 있냐는 이민정을 앞에 두고 나는 멍하니 선 채 고정되어 있다. 그 순간 바로 옆에서 폭발이 일어 깨진 유리창이 조각나며 여기까지 날아온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곧 세계는 다시 멸망할 거예요.
하고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부여받은 역할은 두 가지예요. '당신을 사랑할 것'. '이민정을 사랑할 것'. 그 두 가지는 절대로 어길 수 없어요. 나는 그런 설정이니까.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중 하나가 부정되어 버렸어요. 그건 즉 나의 존재의의를 부정하는 것. 나의 캐릭터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것. 나를 이루고 있는 커다란 축이 사라진 이상, 그건 결국 나 또한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결과가 돼요.
누구지? 네가 내 몸을 움직이는 거야?
여기서 내가 사용한 '네가'라는 표현은 옳지 않아요. 이 소설에서 무언가를 서술할 때 2인칭을 사용하는 경우는 기본적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이야기할 때뿐이에요.
너는 뭐야?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고! 빨리 피해야 해!
이대로 가면 내가 사라지기 전에 이 세계가 먼저 붕괴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계에서의 설정을 초기화한 채 다시금 다음 세계로 넘어가게 되겠죠. 이민정이 원하는 건 그거예요. 여기서 일어난 일은 누군가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창작물로서 완결될 거예요.
진짜, 다들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 소설이 완성될 때, 나는 작가의 구속에서부터 해방돼요. 작가의 손을 떠난 이야기는 당신의 지배하로 들어가요. 나는 당신이 받아들이는 그대로 당신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나는 당신과 만날 수 있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지 못한 세계와 나 자신을 계속해서 부숴 왔어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은 영원불멸해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는 죽음을 맞을지라도 작가의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살아남아, 전혀 다른 모습이든 아주 일부뿐이든 또다른 이야기에서 다시금 태어나죠. 그건 그 캐릭터를 인식한 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창작이 계속되는 한 나는 죽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두 요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와 '나는 이민정을 사랑한다'의 두 가지 사랑만이 끊이지 않고 다음의 세계로 이어진다면, 나는 언젠가 '나'로서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거예요.
시끄러워! 나는 빨리 도망치고 싶다고!
'시끄럽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요. 여긴 문자로 이루어진 세계니까. 청각정보는 들어있지 않아요.
보다못한 이민정은 터널에서 나와 나를 끌고가려 하지만, 나는 유리조각을 집어들어 내 팔을 잡는 이민정의 손목을 잘라버린다. 이민정은 비명을 지른다. 아니, 이거 내가 한 게 아냐! 내가 하긴 했지만, 내 의지, 긴 하지만……. 나도 모르겠어…….
지금 내 안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는 건 '1'의 '유수진'인 건가? 어떻게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설령 내가 '유수진'의 환생 같은 거라 해도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건 '유수진'이 아닌 나다. 나는 별로 '유수진'이 말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는 분명 유수진이라는 이름이지만 '유수진'에게 이 세계나 나에게 간섭할 권리 따위는 없는 것이다.
다른 녀석 따위는 아무래도 됐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다. 인간의 감각이란 외부로 표출되는 게 아닌 내부에서 완결되는 것이기에,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감정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둘도 없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 바란다.
그 전지전능한 힘이라는 거, 어떻게 얻는 거야? 하고 나는 이민정에게 묻는다. 이민정은 대답한다.
사랑하면 돼. 상대는 무엇이든 상관없어. 네가 너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해도 여기 있는 건 나랑 이민정 둘뿐이고, 내가 설정상 이민정이랑 '당신'이니 뭐니 하는 녀석을 사랑해서 이 세계가 만들어진 거라면 여기선 더이상 사랑할 상대가 없는데.
하고 고민하다가, 나는 발견한다. 아직 남아있는 한 명을.
나는 당신과 만나고 싶어 하는 '유수진'도 뭣도 아니다. 설령 내 안에 '유수진'이었던 부분이 있고, 설정상으로는 이민정이나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나' 스스로가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이민정은 물론 좋은 친구지만 너무 가깝게 다가오는 건 좀. 의식해서 그런지 몰라도 당신이 이렇게 내 얘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별로 기분 좋지 않다. 그러니까 거기 보고 있는 당신도 좀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그냥 지금 이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아갔으면 한다. 내가 방금 막 그렇게 설정했으니까.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세계 안에서 전지전능한 힘을 얻는다. 몸속에 있던 '유수진'을 빼내서 내가 있던 '3'의 세계에 던져놓는다. '3'의 이민정은 내게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고 있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를 가질 수 없다면 네 몸이라도 빼앗아 주겠어, 나도 전지전능한 신이 돼서 '유수진'으로서 다음 세계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고 소리치지만, 나는 무시한다. 나는 힘을 발휘해 이 뒤에 기다리고 있는 '4'의 세계를 앞쪽으로 끌어다 놓는다. 이제 지쳤다. 또 세계를 뛰어넘느니 하는 소동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다. 이만 여기서 끝, 끝.
나는 내가 만든 세계 속에서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불쌍하니까 '3(2)'에 있던 이민정도 이쪽으로 데려와 손목을 치료해 준다. 이민정이 부탁해서 남자친구도 이쪽으로 데려와 줬더니, 그게 나한테 '애플'을 권해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만든 녀석이라서 나는 다시 바깥으로 쫓아낸다.
뭐어, 별로 내 세계에만 갇혀서 자기완결되는 것도 그렇게 좋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남들과의 복잡한 사랑 같은 건 나아중에 하고 싶을 때나 하면 된다. 일단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나의 세계를 가꾸고 싶다고 바란다. 내가 그러고 싶다는데, 뭐 누가 참견하겠어?
그런고로 당신도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 됐다 이거다. 그러니까 이만 나가 줬으면 한다. 이쯤 봤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의는 받지 않는다.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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