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무게
- 작성일 201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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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녀는 분실 USB를 2호관 조교 사무실에 두고 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1호관 실습실의 마감이 늦어져버린 것은 불길한 일의 전초였을 뿐이다. 밤 9시만 되어버려도 세콤이 문을 자동으로 잠가버리기 때문에, 그녀는 2호관 실습실 문 앞에서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손에 들려 있던 보안카드를 실습실 문아래 틈으로 밀어 넣은 뒤에 발길을 돌렸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파란색 USB가 그녀의 손에 들어온 것은 1호관 마감을 하던 8시 55분, 1호관 실습실 4번째 줄 33번 자리에서였다. 파란색 USB는 안의 용량이 얼마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그녀의 손 위에선 가벼웠다. 그녀는 USB가 자신이 손을 조금만 세게 쥔다면 아마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의 USB라서 그럴까, 분실된 USB라서 그럴까.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USB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이 USB의 용량은 몇 이고, 얼마나 용량이 차있을까. 혹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USB는 굉장히 무거운 것이 아닐까. 그녀는 파란 USB를 백팩의 앞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조교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1호관, 2호관 마감 했습니다~ 1호관 실습실 33번 자리에서 USB 습득했는데 2호관 실습실이 닫혀버려서 내일 1교시 수업 전에 1호관으로 가져갈게요!
조교에게 보낸 메시지는 금세 숫자 1이 사라졌다. 그러나 답장은 다음 날 아침 6시까지도 와있지 않았다.
백팩을 매서 그런지 등에 땀이 찼다. 계절을 잊은 날씨의 변덕 때문에 그녀는 매일 같이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건져서 가디건에 입은 날은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하루 종일 긴장해야 했고, 아침에 날씨가 쌀쌀해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한 번 입어볼까라는 생각으로 새로 산 꽈배기 니트를 입었던 날엔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름도 아닌 이 이상한 간절기는 무엇인가. 그녀는 간절기에 입을 수 있는 옷을 사고 싶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얇은 니트라던가―그런 옷들은 사실 그 두께라는 것이 여름 가디건 수준 밖에는 되지 않고, 질도 조잡하기 그지없었지만―가디건이라던가 하는 것들, 혹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루즈핏의 트렌치코트를 사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월급도 들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옷들을 산다고 해서 당장 내일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워질 수도 있는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지하상가 보세집 앞에 진열된 옷들을 들춰보다가도 이내 발길을 돌려왔다. 오늘은 다행히도 마감 근로였기 때문에 지하상가의 옷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급행이 전역을 출발했다는 전광판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그녀는 등과 가방이 맞닿는 부분까지 축축이 젖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채로 달려야 했다.
물론 그녀가 땀이 많은 체질인 것은 아니다. 다만 요번 학기의 변화된 삶이 그녀의 체질까지 바꿔버리는 것이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다. 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근로 시간표는 그녀가 짠 것이 아니었다. 강의 시간표는 그녀 자의적으로 짤 수 있는 영역이었지만, 정보처 소속 2호관 실습실에 속해있는 총 12명의 근로학생들의 시간표는 그녀의, 그리고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12명의 시간과 이해관계가 모두 고려되어야 하는 시간표였다. 누군가는 금요일에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기 때문에 근로를 해서는 안 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금요일이 공강이기에, 누군가는 집이 멀기 때문에 근로를 나오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대외활동을 해야 해서, 또 누군가는…. 여기에 12명의 각기 다른 시간표 역시 근로 시간표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데 한몫 했다. 결국 그녀는 학교와 집까지의 거리가 약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오픈을 두 번이나 해야 했고, 마감 역시 두 번이나 해야 했다. 오늘, 그러니까 화요일은 오픈을 하는 날이었다. 또 마감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전공 수업들은 대부분 1교시 수업을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번 학기는 정말이지 지옥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아침 6시에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래서 침대에서 당장 일어나 욕실로 향하지 못한다면 그녀의 하루는 크게 잘못 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뛰어야 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향하는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3분 뒤에 도착한다는 급행열차를 타러 플랫폼까지 정처 없이 뛰어야 했고, 지하철을 내린 뒤에도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야 했다. 셔틀버스의 줄이라도 길어지게 되면 그녀는 항상 그 비좁은 셔틀버스에서 서서 가야 했고, 잠시라도 쉬지 못한 몸에선 결국 땀이 흘렀다. 셔틀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2호관을 향해서 혹은 그녀의 전공이 있는 4호관을 향해서 뛰어야만 하는 것이, 그녀의 이번 학기의 삶이었다.
수업 이후에 있는 근로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은 언제나 제시간을 넘겨서 끝났다. 꽉 찬 수업이라는 느낌보다는 교수님의 재담 이후 그것을 주워 담는 과정에 학생들이 피해를 보는 느낌이었다. 56분쯤에 수업이 끝나버리면 그녀는 4호관에서 2호관까지 뛰어가야 했는데 이 거리는 제 아무리 세계 신기록을 가지고 있는 육상 선수가 뛴다 하더라도 못해도 4분은 걸릴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로서는 아무리 뛰어도 9분은 걸린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2호관 실습실은 5층에 위치하고 있고 엘리베이터는 전무하기에 계단을 올라가야 하니, 그녀는 결국 12시 15분쯤에 2호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럼 항상 조교는 그녀를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지금 시간이…. 변명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교는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서른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조교는 기가 센 여자였다. 여자 대 여자로써 통하는 촉이 있었다. 그녀가 처음 근로장학생에 선정 되어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조교가 자신을 훑는 시선에서 그녀는 이미 피로함을 느꼈으니까. 안경 렌즈 뒤에 가려진 시선에선 언제나 히스테리가 느껴졌다. 조교는 젊지 않았고, 예쁘지도 않았다―사실 이 평가는 그녀가 당한 불쾌한 시선에 대한 복수 심리에서 나온 가혹한 평가였다. 그녀 역시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교에겐 없는 젊음이 있었다. 어쩌면 조교는 그것을 시기할 지도 모른다, 고 그녀는 첫 면접이 끝난 날 밤 이불을 덮으며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 학기에 펼쳐질 고난에 대해 생각하며 답답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복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2개월 동안이나 하지 않던 생리가 시작될 조짐이었다. 이렇게 그녀의 학기는 불길하게 시작되었다.
그래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형식적으로 행하던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는 조정이 되어서, 조금 숨을 돌릴 수는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첫 출근과 마지막 퇴근 시에는 2호관 조교 사무실을 들려야 했지만, 매시간 들리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 얼마나 괜찮은 변화인가. 그러나 여전히 전공 교수님은 수업을 56분 혹은 55분에 끝내주었고, 근무지인 1호관과 2호관은 4호관과는 멀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이 퇴근길, 아니 하굣길에도 그녀의 니트와 백팩 사이는 흐르고 있는 땀으로, 그리고 하루 종일 흘렀던 땀으로 불쾌한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애매한 시간이어서 지하철엔 자리가 있었다. 용케 자리를 찾아 앉은 그녀는 문득 가방 속의 파란 USB가 떠올랐다. 누가 놓고 간 걸까. 회색 맨투맨을 입은 그 남자? 비니를 쓴 그 남자였을까, 아니면 체크 셔츠를 입은 남자였을까―그 남자 나갈 때 보니 꽤 괜찮던데. 남자를 생각하니 그녀의 아랫배가 아파왔다. 생리통일까. 이렇게 아파만 온 것이 지난주부터 벌써 일주일 째였다. 생리불순, 이런 고통의 사이클은 어쩌면 몇 달을 갈지도 모른다. 겪어본 일이었기에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랫배가 아팠지만 아랫배를 부여잡기엔 지하철엔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한편 아랫배보다 더 아래에 있는 곳이 가려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체크셔츠를 입은 남자를 떠올려서일까. 그녀가 파란 USB가 체크셔츠를 입은 남자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의 복통은 절정에 달했다. 팬티는 천천히 젖어갔으며, 지하철에선 그녀가 내려야 할 역의 이름을 2개 국어로 외치고 있었다.
방에 들어온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니트를 벗어던졌다. 그녀는 브라자마저 벗어던진 뒤 검은 나시만 걸친 채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녀는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옥죄고 있던 것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누웠다. 그녀는 자신의 팬티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백팩과 그녀의 등 사이의 영역처럼, 지금 그녀의 아래의 영역과 팬티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팬티를 벗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팬티를 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불쾌한 상태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만약에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10분쯤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을까, 갑자기 다시 찾아온 복통 때문에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 했고 책상 서랍에 넣어둔 진통제를 찾았다. 진통제는 다 떨어져 없었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가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머니의 약들이 들어 있는 작은 서랍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어머니는 11시가 넘어서야 들어오실 것이다. 어머니는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쯤 마지막 손님을 받고 계실 터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근처 아파트의 경비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들어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렇게 음란한 복장으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베란다에 커튼이 살짝 열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약을 입에 머금고 물을 마시면서 그녀는 유심히 커튼이 살짝 열려있는 틈새를 노려보았다. 앞 동의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는 듯했다. 그녀는 커튼을 치러 향하다 멈칫 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을까. 상식적으로 뭐가 구체적으로 보일 거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주 조그만 틈새였으니까. 그러니 만약 정말 앞 동에 변태가 살아서 망원경으로 그녀를 확대해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그녀의 음란한 차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젖었다. 이 착각이란 일종의 자기환각이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으면 좋겠다에서 발로한…. 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변태가 된 것만 같았기에.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의 통증을 느꼈고, 그보다 더 아래의 긴장을 느껴야 했다.
그녀는 커튼을 마저 치고 팬티를 벗었다. 그리고 나시까지 벗어던졌다. 완전한 나체가 된 그녀는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아래는 끈적거렸고, 아까의 긴장은 불쾌함으로 변해있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호스를 틀어 발을 적셨다. 물이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며, 그 물로 아래를 씻어내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그녀는 전라의 상태로 방에 돌아왔다. 등에는 미처 닦지 못한 물기가 방울로 맺혀 있었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방의 전신거울 앞에 서보았다. 약간 튀어나온 옆구리나 조금 흘러나온 뱃살, 그리고 맨발인지라 조금 짧아 보이는 다리를 뺀다면 그리 나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보았다. 뱃살은 접혔고, 허벅지의 셀룰라이트가 조금 드러났다. 그 순간 그녀는 추함으로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추한 허벅지 사이로 그녀의 음부가 얼핏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간 자신의 몸을 응시하던 그녀는 자신의 뱃살을 잡아 보았다. 뱃살이 잡혔다. 조교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년 뒤, 나는 그렇게 될까, 그렇게 지친 듯한 모습이, 죽어가는 모습이….
정말로 싫다.
그녀는 생각을 내뱉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사실에 놀라 입을 막았다. 그녀가 무슨 힘이 있다고 세월의 힘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조교는 무슨 죄가 있어 추함의 대명사로 그려져야 하는가, 마찬가지로 신입생들이 내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녀는 입을 막고 있는 자신의 전라를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 이정도면 괜찮다고, 관리를 하면 나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다시금 샤워기 앞으로 가야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어머니였다. 혜진아, 밥은 먹었니. 그녀는 먹었다고 대답하면서 부랴부랴 잠옷을 입었다.
어머니는 지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오늘 장사는 잘 됐냐고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단 한 번 매출에 대해 물어봤을 때가 있었다. 그녀가 고3 때였을 때, 그러니까 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하신지 3년이 넘었던 해의 겨울이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한숨이었고, 그녀가 붙은 대학에 대한 불만으로 그대로 이어져 돌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는 어머니에게 장사에 대해 물어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장사에 대해 물어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녀는 항상 물어보려다가도 그때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입을 다물었고, 어머니는 그녀와 대화를 하기에는 너무 피로했기 때문에 둘의 대화는 없어졌다. 단지 그녀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장사가 잘 되지 않음을 지레짐작하고 있었을 뿐이다. 만약 장사가 잘 된다면 피곤하더라도 어머니는 그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정말로 좋을까?
방에서 나온 그녀를 발견한 어머니는 그녀에게 몇 가지 간단한 물음을 던졌다. 저녁은 뭐 먹었니, 오늘 하루는 어땠니와 같은. 어쩌면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지만 그녀는 길게 대답할 때의 피로감이 먼저 떠올라 지레 질려버렸다. 그래서 나온 답은, 돈까스와 괜찮았어, 였다. 어머니 역시 그 대답에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형식적인 질문이었으니까. 내일은 몇 시에 나가니. 아침에. 그 날 처음으로 있었던 모녀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녀는 닫히는 안방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힘들까. 엄마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걸까. 그러다 문득, 내가 먼저 피한 것은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불쾌하리만큼 머리가 아파왔다. 이내 곧 복통도 함께 몰려 왔다. 생리가 확실했다. 그녀는 내일 아침잠에서 깼을 때 느낄 불쾌함에 몸서리쳤다. 그녀가 처음 생리를 시작한 12살 때 이후로 지난 10년 동안 누적되어 온 데이터의 결과로 그녀는 이러한 느낌의 고통은 곧 생리를 수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상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은 사실, 항상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얘기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왔다. 닥친 시험기간에 해야 할 것도 많은데 하필 이 시기에 생리라니. 생리불순은 그녀가 달고 사는 것이었기에 조금만 스트레스 받아도 생리를 몇 달 동안이나 안 하기도 했고―그녀는 6개월 정도 생리를 안 해본 적도 있었다―혹은 그 사이클이 완전히 한 번 돌기도 전에 다시 생리가 터지기도 했다. 혹은 생리를 할 것처럼 복통이 찾아와도 생리가 아니라 냉만 나올 때도 있었다. 그렇게 불규칙한 그녀였지만, 확실한 것은 이러한 복통이 찾아왔을 때는 생리가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똑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상당히 불쾌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생리가 다가올 때 항상, 성욕도 같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변화는 불과 1년 전에 생긴 것이었다. 1년 전, 처음이자 현재까지는 그녀의 마지막 연인인 그와의 첫 경험 이후부터 시작된 변화였다. 22년의 인생 중에 고작 1년 사이에 생긴 변화였던 것이다. 성욕은 불쾌했다. 채울 방도가 없기 때문에 불쾌한 것이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억지로 앉았다. 수업 필기를 옮겨 적을 것이 있어 컴퓨터를 부팅하면서, 그녀는 문득 자신의 가방에 잠들어 있을 파란 USB를 떠올렸다. 파란 USB 안에는 어떤 파일들이 잠들어있을까. 정말 체크 남방을 입은 그 남자의 것이었을까. 그녀는 가방에서 파란 USB를 꺼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녀는 USB를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 조그만 USB의 무게는 얼마일까. 몇 기가 일까. 8기가? 16기가? 아니면….
그러나 그녀는 파란 USB를 컴퓨터에 꽂아 넣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저 몇 분 정도 파란 USB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녀는 차마 파란 USB를 열어보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파란 USB를 바라볼 때마다 아랫도리가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복통 역시 함께였다. 그녀는 팬티에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보았다. 이내 그녀는 자신의 검지를 조심스럽게 안으로 밀어 넣어 보았다. 검지로 인한 고통은 그녀를 한 순간에 깨어나게 했다.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검지가 진입하는 순간 그곳은 화상을 입은 것 같이 아파왔다. 고통은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은 그녀의 안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했을 때를 기억하려 노력했다. 작년의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섹스를 구체적으로 기억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장소는 그가 살던 동네에 새로 생긴 모텔에서였다. 이미 그에게 충분히 실망해있었지만,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했던 데이트였고 데이트의 끝에 오게 된 모텔이었다. 몇 번을 했었지. 어떤 체위로 했었지. 그녀는 기억과 음부를 더듬었다. 기억은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 그와의 정사의 절정 무렵을 떠올리며 그녀는 흥건히 젖었지만, 정사가 끝난 뒤 그가 차갑게 등을 돌렸을 때를 떠올리는 순간, 그녀에게 남은 것은 불쾌한 축축함뿐이었다.
마지막 정사가 있은 뒤 일주일 뒤에 결국 그녀는 그와 이별했다. 그는 변했고, 그녀는 식었기 때문에, 둘은 이별했다. 그녀가 그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그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CC였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학교를 다녀야 하나, 라는 표정의 동요는 있었다.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의미 없는 빈말이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그녀든 그든, 결국 한 쪽은 나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녀는 헤픈 여자가 되어 있었고 그는 그녀를 버린 사람이 되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다. 먼저 그가 자신의 동기들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에―그의 동기는 곧 그녀의 동기이기도 했기에―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가 퍼트린 이야기들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처음 그 이야기가 뒤에서 돌던 것을 듣고 분노했을 때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 분노가 가신 뒤에―물론 분노는 결국 그가 학기가 끝나자마자 쫓기듯 군대에 입대한 후에야 풀렸지만―생각해보니, 그저 그는 그녀와 잤다는 얘기만을 하고 다녔을 뿐이었다. 그런 이야기가 와전되어 들리다보니, 사람들이 그녀를 헤프게 바라봤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런 시선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분노는 이젠 그가 아닌 타인에게로 향했다. 어쩔 수 없었다, 분노의 대상이었던 그가 군대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헤픈 여자라 말하고 다녔던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함부로 몸을 내준 것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했고, 그래서 첫 경험을 그에게 허락했다. 물론 그 이후부터 이어진 섹스는 그를 사랑해서라기 보단 그의 육체가, 그의 육체가 자신의 몸에 들어올 때의 쾌감이 좋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나 몸을 준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의 몸에만 자신을 허락했고, 그리고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쾌락을 얻어 갔으며 공평하게 그에게도 사정의 쾌락을 주었었다. 공평한 사랑의 거래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위대한 모험가가 되어 있고, 그녀는 모험가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수치심에 눈물을 흘렸고, 억울함에 분노 했으며, 결국 조치를 취했다. 그녀의 친한 동기들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버렸던 것이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그에겐 부당한 이야기였다. 그가 딱 한 번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말 하지 않고 전 여자 친구를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만남은 저녁 식사 한 번으로 끝났었을 뿐이다. 그는 전 여자친구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이 일을 그녀에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녀는 그가 연락이 두절되었던 그 7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한창 애정이 불타던 시기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질투와 의심 역시 가장 활활 타오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충분히 설명했고 그녀 역시 충분히 납득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사건을 납득한 적이 없고 용서한 적이 없게 되었다. 아니,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그 사건에 대해 용서를 구한 적도 없었을 뿐더러 진실을 말한 적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빠르게 동기들에게, 그리고 후배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는 졸지에 바람을 핀 사람이 되었다. 파급효과는 컸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너무나 차가웠으니까. 특히 여자 후배들 사이에서의 소문은 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매너 좋은 선배에서 추악한 바람둥이로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외에도 몇 가지 그와의 연애시절에 있었던 사소한 트러블들이 왜곡되어 퍼져나갔다. 과에서 영향력이 더 강했던 것은 그녀였기 때문에―과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학생회 총무부장인 후배, 공부 잘 하는 선배였기에―그는 결국 그녀와의 알력 다툼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쫓기 듯이 군대로 떠나야 했다. 그가 훈련소에서 찍은 단체사진이 그의 여동생을 통해 페이스북에 올라왔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울기도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는 파란 USB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파란 USB는 누구의 것일까. 회색 맨투맨을 입은 그 남자? 비니를 쓴 그 남자였을까, 아니면 체크 셔츠를 입은 남자였을까. 아니, 혹시 여자일 수도 있잖아. 그러나 그 자리에 여자가 앉은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근무할 시간에는 말이다. 회색 맨투맨을 입은 남자는 피부도 까맣고 키도 작았기 때문에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비니를 쓴 그 남자는 멋은 부렸지만 촌스러웠다. 빨간 체크 셔츠를 입은 남자는 그녀의 스타일이었다. 큰 키, 깔끔한 차림, 넓은 어깨…. 그녀는 파란 USB를 열어보고 싶었다. 파란 USB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USB는 그 주인의 삶의 일부일 것이다. 물론 아주 작은 일부일 테지만. 주인의 삶에 있어서 그 USB가 차지하는 비중은 4기가일 수도, 8기가 일 수도, 심지어는 16기가, 32기가 일 수도 있다. 32기가라 해도 그것은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를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그리고 밑에서 들끓었다. 그녀의 음부는 마치 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는 것처럼 간지러웠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그리고 복통은 진통제를 무시한 채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의 신체는 파란 USB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USB를 열지 않았다.
다음 날도 1교시였다. 그래서 6시에 눈을 떠야 했지만 알람 소리는 그녀의 귀에 너무나 익숙해져있었기에 그녀를 깨우지는 못했다. 알람으로써는 애석할 일이다. 그녀를 잠에서 깨운 것은 그녀의 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현관문의 비밀번호 소리였다. 6시 22분 32초, 33초, 34초.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이질적인 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고 곧바로 침대에서 뛰쳐나갔다. 욕실로 가기 위해선 거실을 거쳐야 했다. 아버지는 구두를 벗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녀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었고, 그녀는 그저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지쳐있었고, 그녀는 바빴다. 아버지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다시 구두를 벗었다. 그녀 역시 아버지가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잠시 멈칫했지만, 아버지가 다시 구두를 벗는 걸 보자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 들어가 배설 욕구 때문에 급하게 변기에 앉았다. 어젯밤 찜찜한 마음에 부착한 팬티라이너에는 소량의 갈색피가 묻어 있었다. 양은 적지만 생리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찝찝한 마음으로 변기에 앉아 그녀의 아버지가 부엌으로 가는 소리를 들었다. 점점 멀어지는 소리 속에서도 아버지가 물을 다 마셨는지 컵을 탁, 내려놓는 소리만큼은 고막을 찌르는 듯이 들려왔다. 아니 고막이 아니라 심장을 찌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찔끔 하고 소변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소변이 아닌 것들이 왈칵 쏟아져 나왔기에, 그녀는 메슥거림을 느껴야 했다.
아버지가 방문을 닫는 소리는 화장실 문에 가려져 그녀의 귀까지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분명 지금 방에 들어갔을 것이고, 아마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끼며 한숨을 쉬실 것이다. 한 번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일찍 일어난 날이었다. 그래서 학교 갈 준비도 여유롭게 마친 그 날, 그녀는 집을 나서기 위해 안방 앞을 지나다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아버지의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자신이 아버지의 한숨을 외면한 것만 같아 심장이 가려웠었다.
그녀는 변기에서 일어났고 호스를 틀어 아래를 씻었다. 갑작스레 틀은 물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찬 물은 그녀의 오금을 깨웠다. 부들부들 떨면서, 그리고 갑작스레 추위를 느끼면서.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이 욕실로 들어온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히 물이 점점 따뜻해졌기 때문에 그녀는 호스를 호스걸이에 걸어두고 머리띠로 머리를 묶어 올렸다. 머리가 젖어선 안 된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머리를 감을 시간은 없으니까. 그녀는 물로 몸을 적셨고 바디워시로 몸을 닦았다. 바디워시의 거품이 그녀의 가슴을, 추위 때문에 바짝 서있던 유두를 훑어 내려갔다. 곧 그녀는 따뜻한 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바디워시를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녀는 수건으로 몸을 닦았고, 입고 들어왔던 나시를 다시 입었다. 다만 팬티라이너도 채 다 보호하지 못해 흘러나온 피가 묻어버린 팬티를 입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얼른 욕실에서 나와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안방에 계셨다. 안방 문이 굳게 닫혀 있었으니까.
그녀는 알이 없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꼈다. 화장을 안 한 날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마련한 안경이었다. 물론 오전이 지나면 그녀의 얼굴에서 안경은 사라질 거고, 화장을 한 새로운 얼굴이 등장할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 세상을 향해 드러나 있을 오전 내내 그녀의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검은 브라자 위에 검은 나시를 입고 그 위에 회색 맨투맨을 입었다. 생리대를 하고 팬티를 입었다. 그리고 블랙 진을 입었고, 머리를 감지 않았음을 감추기 위해 잘 쓰지 않던 스냅백을 뒤집어썼다. 이 스냅백은 그와 맞췄던 첫 커플아이템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집밖에 나와 전철을 타고 있었을 때였으니, 오늘 하루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머리를 감지 않는 희생을 감수하긴 했지만 그만큼의 가치는 있었다. 그녀는 전신 거울 앞에 한 번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본 뒤에 어제 챙겨놓았던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아져 있는 파란 USB를 발견했다. 그녀는 파란 USB를 보며 망설였다. 왜 망설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파란 USB를 챙겼다. 돌려줘야지, 돌려줘야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리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그 파란 USB의 무게를 가늠해보고 싶었다. 그녀의 손안에 있는 파란 USB는 어제와는 다르게 무거웠다.
그녀는 안방 문 앞에서 서성였다. 어머니는 아침 영업을 위해 5시에는 나가셨을 것이다. 아니, 아마 어머니도 그녀처럼 20분 정도 늦게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녀를 위해 아침을 해놓을 겨를이 없었으리라. 남편을 위해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힘들었으리라. 그렇게 어머니는 바쁘게 나가셨을 것이고, 타인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조기 구이와 된장찌개가 있는 백반으로.
그녀는 아버지가 늦은 점심에 일어나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먹을 수 있는 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공허했다. 그녀는 그녀의 집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고, 아버지가 무엇을 드실 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어쩌면 배달을 시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짜장면 한 그릇은 배달해주기 어렵다는, 혹은 국밥 한 그릇은 배달해주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화를 낼 지도 모른다. 어쩌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갈 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머니가 하는 가게로 찾아가 점심을 때우려다가는, 어머니와 한바탕 붙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밥을 드시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가 점심에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아버지가 저녁에 무엇을 하는지, 일터로 나가서는 무엇을 하는지, 혹은 어떤 대우를 받는지….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헤어졌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미 첫 경험을 했다는 사실조차 아버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어머니의 가게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가보려 했으나 언제나 일이 생겼다, 고 생각해왔었다. 그렇게 외면해왔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딸과 남편에게 가게로 찾아오라고 했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직장을 잃어 잠시 기가 죽어 있을 때에는, 남편의 손에 돈을 쥐어주며 중학생이었던 그녀와 함께 꼭 저녁은 자신의 가게에 와서 먹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그녀의 눈안에 상으로 맺혀 남았다. 그 말에 분노해 씩씩 거리며 어머니를 내팽개치고 돈을 내팽개친 채로, 안방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아버지의 모습도, 그녀의 눈 안에 사라지지 않을 상으로 남아 맺혔다. 서럽게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그리고 어머니가 가게로 출근한 뒤 조용히 나와 땅에 떨어져있던 돈을 주워 가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그 날 밤, 술에 거하게 취해 집에 들어온 아버지의 쓸쓸한 얼굴도 모두 그녀의 눈 안에 상으로 맺혀 남아 있었다. 그녀의 그런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는 상으로 맺혀서, 그녀의 삶의 일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런 상들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매일 밤 침대에서 뒤척이며 그런 상들을 떼어내려 했지만, 결국 그 상들은 그녀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눈물을 빨아먹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떼어낼 수 없는 상을 떼어내고자 몸부림치는 것처럼 옷을 벗어 던졌다. 다행히도 아버지가 2년 뒤 아파트 경비로 취직에 성공하면서부터 그녀는 옷을 벗어 던지지도, 그리고 상에게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게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의 집은 조용해졌다. 과음을 한 아버지의 폭언, 어머니의 흐느낌, 그녀가 벗어던진 옷가지가 내는 아주 미세한 소리조차 이젠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젠 더 이상 아주 미세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침 바람은 찼다.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는 종종 걸음으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고, 제때 도착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지각은 안 할 터였다. 전철에서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스냅백이 그 녀석과 커플로 맞췄던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무척이나 기분이 상하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이 빌어먹을 스냅백을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는 떡 진 머리를 드러내야 하고, 그럴 경우엔 자존감이 그 바닥마저 뚫고 내려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결국 스냅백을 벗어던지고자 하는 충동은 충동으로 멈췄다. 그렇게 그녀는 학교에 도착했다. 8시 53분, 걸어서 올라가도 늦지 않을 시간이었다.
조교 사무실에 들렀을 때, 그녀의 손에는 파란 USB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파란 USB를 조교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러나 조교는 그녀에게 그저 수고하란 말 한 마디만 했을 뿐, 분실 USB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조교의 그런 태도에 그녀는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 그 손에는 파란 USB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조교가 잊어버린 것일까? 어쩌면 카톡을 확인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읽긴 했으나 평상시에 항상 있는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됐든 확실한 건 조교의 머릿속에 파란 USB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녀가 파란 USB를 건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었다. 언제나 분실물이 있었을 때에는 그 분실물을 조교에게 건네었고 그래왔고, 그래야만 하고….
그러나 결국 그녀는 파란 USB를 쥔 채로 조교실에서, 2호관 건물에서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도 무거웠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파란 USB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파란 USB는 어디에도 꽂히지 않았으나, 그녀의 손 안에서 웅웅거리고 있는 듯 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그녀는 연신 주위를 살폈다. 파란 USB는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듯이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실습실에 들어설 때까지도 파란 USB는 울리고 있었다. 실습실 뒤쪽의 근로학생의 부스에 들어갈 때까지도, 들어가서도, 파란 USB는 울리고 있었다. 단자에 꽂지 않았음에도 파란 USB는 파랗게 불이 들어왔고, 울리고 있었으며, 무거웠다. 누군가의 삶의 일부분이, 자신도 살아 숨 쉰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처럼, 그렇게 격정적으로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 울음에 답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 삶의 일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젠 파란 USB의 주인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체크셔츠의 남자이든, 회색 맨투맨을 입은 그 남자든, 비니를 쓴 남자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USB의 가치는 더 커지는 듯 했다. 그녀는 파란 USB를 쥐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타인의 삶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타인의 삶의 일부분의 무게를 재볼 수 있었다. 타인을 엿 볼 수 있다….
그때였다. 부스 안의 PC에 관리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CCTV로 보니까 자리 정리가 잘 안 되어 있네요. 나가서 한 번 자리 정리 좀 해주세요.’ 조교가 보낸 메시지였다. 조교는 CCTV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당장 일어나서 의자를 치우러 가지 않는다면, 곧 전화벨이 울릴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어 그녀는 한 남자가 부스로 다가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어제 체크 셔츠를 입었던 그 남자―오늘은 깔끔한 흰 셔츠에 니트 차림이었다―가 부스 문을 노크했고, 그리고 이내 문을 열어 고개를 들이 밀었다. 부스 안으로 그는 머리만이 들어왔다. 그의 머리가 말했다. 혹시 어제 분실물 중에 파란 USB 못 보셨나요? 당황한 그녀는 파란 USB를 쥔 손을 의자 밑으로 내렸다. 아뇨…어제 분실물 없었는데요. 아…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 남자의 머리는 부스에서 떠났다. 그녀는 실습실에서 그가 나갈 때까지의 뒷모습을 부스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부스 밖의 그는 뒷모습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흰 셔츠에 니트를 입은 그 남자. 그 남자의 뒷모습은 실습실을 나갔다. 그 남자가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 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그녀의 아래에서 파란 USB는 울리고 있었다.
웅웅, 파란 USB의 미세한 소리가, 전화벨의 시끄러운 소리가 실습실을 울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소리조차, 그렇게 실습실 안을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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