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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천사는 여기 머문다」

  • 작성일 2015-08-29
  • 조회수 1,033





“불타는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지옥도 천벌도 마다하지 않았던 열정, 그것은 그토록 허망한 신기루였을까.’”



전경린, 「천사는 여기 머문다」






「집이 어디예요?」
「인희네 근처.」
「당신 그동안 내내 나 따라다녔어요? 그래서 그날 고궁에 나타났던 거예요? 」
「.... 」
모경은 대답하지 않고 내 손을 꽉 그러잡았다.
「우린 끝나지 않아. 」
「우린 끝났어요. 」
「난 늘 네 주위를 떠돌 거야.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를 봐. 유령 같지 않아? 」
「놔요. 」
나는 손을 뿌리치려 하고 그는 놓지 않으려 하고 길에서 옥신각신하다가 내 손이 그의 얼굴을 쳤다. 그가 손을 놓고 얼굴을 내밀었다.
「때려줘. 내 뺨을 때려줘. 제발 , 때려! 」
모경은 자신의 셔츠를 잡아 뜯다가 길바닥에 드러누워 고개를 쳐들고 외쳤다.
「나를 밟아. 내 얼굴을 밟고 지나가, 구둣발로 내 눈을 밟아!」
행인들이 우리를 구경했다. 모경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혀를 땅바닥에 꽂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중략)
네 얼굴에 천사가 떠오르고 있어.. 열락의 한가운데서 모경은 속삭였다. 오직 둘만 바라보는 생활이 삼 년 동안 계속되자 두셋밖에 없던 친구도 멀어지고 가족과도 소원해졌으며 세상도 아득해졌다. 둘 다 수면 장애에 시달렸고 하루 세끼를 다 먹고 밤참까지 먹어도 야위어갔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수록, 어긋나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더욱더 섹스에 기댔다. 그는 내가 더 자주 더 강한 섹스를 원한다고 착각했다. 그는 검게 말라갔고 밤마다 술을 마셨고 잠을 못 이뤘고 말이 없어졌다. 네 개의 눈동자만 끓는 콜타르처럼 번들거렸다.
모경은 틈을 보이면 장난처럼, 순수한 호기심처럼 가장해서 나의 지나간 이성사를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서 캐묻고 또 캐물었다. 섹스가 끝난 뒤나 전에, 잠들기 전에, 잠에서 깨어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맥주를 마시다가.. 장난 같은 말은 사소한 실마리를 잡히면서 어느 순간 잘못 밟은 지뢰처럼 폭발해 집을 날렸다. 유리창들이 깨어지고, 액자들이 부서지고 의자 다리가 부러지고 칼이 날아가 문에 꽂히고 내 몸에 멍이 들었다. 마침내 나는 아무런 생각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절벽 끝에서 안개에 떠밀리듯 엄청난 피로감이 나를 끝으로 내밀었다. 절벽 끝에서 뛰어내리듯이, 오직 잠만 자고 싶었다. 그가 없는 곳에서,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생을 지내도 그 피로를 나의 바깥으로 다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삼 년을 산 후에 친정으로 돌아와 이혼하는 데 걸린 시간이 다시 이 년이었다. 이혼 사유는 피로였다. 산더미만 한 피로, 무덤 같은 피로, 증오 같고, 원한 같고, 뼈저린 후회 같고 타버린 재 같은 피로..




▶ 작가_ 전경린 - 1963년 경남 함안 출생. 경남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 전공.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사막의 달」이 당선. 누구는 그녀를 귀기의 작가라 하고, 또 누구는 ‘섬세함의 안쪽에 위태롭고 불안정한 뇌관을 감춘 폭발물’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느 날 한 시인의 손에 이끌려 난데없이 내 앞에 나타난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천사는 여기 머문다」로 이상문학상,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아주 현명한 교수가 되어 지방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 낭독_ 미경 - 배우. 연극 '깨끗한 집', '나긋나긋 나른한 산책', '퍼디미어스', '왕과나' 등에 출연
유병훈 - 배우. 연극 '홍도', '푸르른 날에', '알리바이 연대기' 등에 출연


배달하며

사랑하는 관계는 때로 투사와 소의 싸움인 투우와 흡사하다. 서로가 서로의 절대영역 안으로 침범하여 목숨을 빼앗아야만 끝나는.. 투사가 소의 절대영역 안으로 침범할 때는 더 이상 자기 목숨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열광하는 관중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쭉 뻗은 칼 끝, 모든 것을 건 그 찰나에 집중하는 생명의 비상이 전부이다. 그 순수의 싸움에서 소는 아직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요즘의 투사는 아무것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돈에 팔려 관중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 투우를 할 뿐이다. 절대영역은 서로가 진정으로 대결할 때만 만들어지는 극(極)의 존(ZONE)이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천사는 여기 머문다』(문학사상사. 2007년)

▶ 음악_ sound ideas/romantic-pastoral8 중에서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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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마음으로 인정하고는 있지만 실체를 대하기는 두려운 개념인 '절대영역'. 그것이 '사랑'이란 명제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그 무슨 '생의 신비'인가요!

    • 2015-09-02 23:33: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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