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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하, 「바보아재」

  • 작성일 2015-09-19
  • 조회수 796





“죄 짓지 않고 바보로 살까, 아니면 죄 속에 뒹굴며 똑똑하게 살까.”



유순하, 「바보아재」






아버지 형제들 가운데 막내가 되는 아재는 달랐다. 천진난만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이 싱글거렸다. 아버지와 대구 작은 아버지, 그리고 아재는 외탁하여 얼굴이 닮았는데도 그 얼굴에 대한 느낌은 딴판으로 달랐다. 바로 그 웃음 때문이었다. 웃음기로 말미암아 아예 얼굴이 달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할머니의 사려 깊은 묵인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투는 물론, 걸음걸이나 몸짓, 심지어는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새까지, 이제는 송순당의 다른 구성원들과는 눈에 띄게 달랐다. 송순당에서 유일한 자유인이었다고 할까. 예닐곱 살짜리 순둥이 같은 아재는 언제나 웃고 거의 쉴 새 없이 겅정겅정 움직였으며, 그 입이 가만히 닫혀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혀 천장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는 금세라도 벙글어 피어날 듯한 웃음이 버무려져 있었기에 아재 이야기는 그 울림만으로도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랬기에 아재는 우리와 쉽사리 어울릴 수 있어서, 어른들 시야만 벗어나면 우리 사이에 존댓말은 없었다. 아재라는 호칭을 젖혀두고 보기로 하자면 거의 너나들이 투였다.
아재의 지능은 예닐곱 살짜리 정도로, 어린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더러 엉뚱한 일을 저지르거나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임기응변 능력이 달리기는 했으나 한계를 명확하게 지시받은 일이나 일상적으로 늘 하는 일은 오히려 꼼꼼하게 잘 처리하는 편이었다.
거기다 아재는 부지런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했으며, 그 언행이 상스럽지 않았고, 정직하여, 사람이 좀 모자라기는 해도 피는 못 속인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선명한 기억력을 간직하고 있어서, 이를테면 집안의 대소사라든가, 심지어는 그 많은 가족들 생일 같은 것을 모두 기억하여 어떤 형태로든 꼭 챙겨 주었다. 그리고 예순 다섯 칸이나 되는 송순당 관리와 거기 딸린 논밭 농사만으로도 아주 바쁜데도, ‘온 동네 살림 다 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일손을 필요로 하는 다른 집일도 일부러 찾아가 거들어주었다.
샘골에서의 지체분별은 옛날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아재가 거들어주는 기준은 지체가 아니라 필요였다. 이를 테면 노동 능력이 없는 노인들만 있는 집이면 지체와 관계없이 찾아가 일을 해주었다. 어쨌거나 정승, 판서가 여섯이나 나왔다는 송순당 자손이었기에 문중 의견이 분분했지만, 아재는 개의치 않았다. 그 대목에 할머니 묵인이 있었던가는 알 수 없으나, 뒷날에 할머니가 아재를 재사로 내보낸 것으로 보아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아재는 샘골에서 평등을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 작가_ 유순하 - 소설가 1943년 일본 교또 출생. 1968년 사상계에 희곡 당선 후 창작집 6권, 장편소설 12권, 장편동화 2권 문화비평서 6권을 펴냈다. 84년 1월에 쓰러져 12월에는 의학적으로 포기된 상태에 이르러 혼수상태를 되풀이하던 어느 날 가족에게 유언까지 하고나서,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간신히 앉아있을 만 하자 곧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의 모든 소설에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본 사람만이 감지한 우주적 이향(異香)이 담겨있다.

▶ 낭독_ 유성주 - 배우. 연극 「그게 아닌데」, 「싸움꾼들」,「동토유케」등에 출연


배달하며

바보는 선함과 무소유적 삶의 다른 표현이다. 자기 유익을 추구할만한 지능이 미달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경쟁과 눈속임과 과시와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비켜나있다. 놀림받고, 멸시받고, 빼앗기고, 보호받지 못하는 그 존재적 양식 자체가, 지능적이고 심술궂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악의 거울이 된다. 악한 심성의 사람들에게 천진한 웃음을 되돌려주는 그의 거울됨이야말로 자존하는 자유인의 유쾌한 초상이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바보아재』 (실천문학사. 2014)

▶ 음악_Soundidea/solo instrument 중에서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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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바보 아재 라는 소설을 찾아서 모두 읽어보고 싶네요! 유토피아에서 살아야 할 분, 그에 대한 더 없이 아름다운 찬사가 느껴집니다! 이젠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분이기에 더 애틋하군요!

    • 2015-09-24 23:46: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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