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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사랑으로 돌아가고 있다.

  • 작성일 2015-09-28
  • 조회수 312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연모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건 내가 작가로부터 그렇게 이야기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나=이 소설 속의 유수진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으로서 구성되어, 오로지 그 역할만을 위해 태어나고 존재하고 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사랑해야만 해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에, 요……?

아차차, 틀렸다. 여기서는 '진실이에요'가 맞는 대사지. 바로 앞에 사실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으니까 똑같은 단어가 두번씩 나오는 건 이상하다. 그럼 다시 갈게요~. 에헴. 어어─……. 아아, 역시 안 되겠다. 분위기가 다 깨졌어~. 당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좀 있다가 다시 읽어 줘요.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유수진. 소설 속의 캐릭터로서 준비된 각본대로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것이 나의 역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즉 독자의 눈을 통해 완결된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반복시킨다는 것이므로,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내게 부여된 역할에 따라, 이번 차례도 완벽하게 마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지금 눈을 움직이며 이 이야기를, 이 문장을, 이 글자를 읽고 있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이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부자든 빈자든, 그 어떤 현실의 조건도 제약도 뛰어넘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사랑은 페닐아틸아민의 분비로 이루어지는 흥분작용도, 옥시토신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수용반응도, 세로토닌이나 도파민의 수용으로 나타나는 행복감도 아니다. 그런 '사랑은 호르몬에 의한 화학작용의 일환이다'같은 의식적이고 과학적인 지식따위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이고 추상적이고 언어적인

『사랑』

그 자체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내 마음같은 건 전혀 알 수 없겠지. 공감할 수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야 당연하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든 당신이 나에 대해 아는 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의 아주 작은 조각 뿐이고, 당신은 내가 아니며, 그쪽에 있어 나는 문자로 이루어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 마음을 말로서나마 표현한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다고 바란다. 정말로. 진심으로. 이건 '유수진'이라는 역할로서의 말이지만, 동시에 지금 소설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나'의 말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설정이니까.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의 설정대로, 이민정과도 가짜 연인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나는 이민정의 작업실 의자에 앉아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얼마 전까지만 했도 하얗던 캔버스는 온갖 색깔의 물감으로 뒤덮여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꽃밭 한가운데에 세워진 커다란 탑. 팔꿈치를 허벅지에 붙이고 턱을 괸 채 멍하니 지켜보고 있자니, 당분간을 이젤 앞에 앉아 있던 이민정은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지루했지, 하고 묻는 그에게 나는 작게 웃어 대답을 대신한다. 이민정은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해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나는 입술을 떼었다가,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그의 입술을 받아들인다.

나는 그대로 이민정에게 끌어안겼다. 안긴 부분에서부터 따뜻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낀다. 그의 품 속에서 고개를 돌리자 벽에 주욱 늘어선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씩 인물화나 추상화도 섞여 있지만, 대부분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장소를 그린 풍경화다. 하늘에 뚫린 하얀 구멍에서 무언가가 내려온다든가, 토막난 인간의 신체부위가 곳곳에 당연한 듯이 널려 있다든가. 왜 저런 그림을 그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만들어내는 걸로 치면 내 몸에서는 아이가 자랄 수 있고, 이전에 몸을 구성하는 세포같은 건 매일같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

이민정은 언제나 내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준다. 함께 있을 때나, 전화 너머로나, 침대 위에서나 상관없이.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이민정의 앞에서만은 그 말을 입에 올릴 수 없다.

플롯상 나는 이민정과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감정이 얼마나 크고 뜨거운지와는 관계없이, 나와 이민정이 서로를 얼마나 생각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마음을 전하지 않는다. 결국 더 괴로워지기만 할 뿐이니까.

우리는 이미 연인관계인데, 애초 연인이라는 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게 전제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말 그대로 그건 전제인 것이다. 나와 이민정의 관계는 연인이라는 설정일 뿐이다. 설정상의 만남이 있고, 설정상의 추억이 있고, 설정상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이민정과 나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텅 빈 채로, 아무것도 없다.

이민정은 내게 다시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도 같은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고 바란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나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날 것만 같은 슬픔을 느낀다. 이민정의 이 말 또한 결국 설정이고 대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진짜 사랑과는 다르다는 걸, 나는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이민정에 대한 사랑은 뭐지? 이것도 설정? 내 가슴을 쥐어짜는 이 감각도, 목 안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답답해지는 이 느낌도 모두 거짓말인 건가?

아니다. 진실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아무리 괴로워하고 슬퍼할지라도 개인에게 있어 타인의 감정 따위는 알 바 아니다. 감각이라는 건 그것을 느끼는 스스로의 안에서 완결될 뿐, 밖으로는 새어나가지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감정도 사랑도 그 자체로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행위로서 표현되는 것이기에, 관측 가능한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하고도 유의미한 사랑은 내 안에 있는 사랑 뿐이며, 그렇기에 나는 이 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당신에 대한 사랑 또한 마찬가지로.

내 역할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내가 여기서 연기해야 하는 스토리는 사랑하는 당신과 만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이런저런 모험이다. 나는 준비되어 있는 이야기에 따라 역경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고 그 역경 가운데에는 이민정과의 이별 또한 포함되어 있다.

나는 스케치북을 집어들어 빈 페이지를 앞에 펼쳐놓고 펜을 꺼내 종이 위에 선을 그어 본다. 나도 이민정이나 당신처럼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은 선을 이어 여자아이의 그림을 그리고, 삐뚤삐뚤한 여자애에게 드레스를 입힌다. 뭔가 허전하다 싶어 옆에 남자아이도 한 명을 그린다. 그리고 동그란 말풍선을 만들어서 'I LOVE YOU'라는 글자를 써넣고, 종이 위에 구획을 만들어서 방금 그린 걸 한 컷으로 해 4컷만화를 만든다. 다른 여자애가 나타나 둘 사이를 갈라놓고, 어찌어찌하다가 결국 둘은 다시 만나 I LOVE YOU하고 말한다는 내용이지만, 재미없다. 소설이나 만화를 그리는 작가들은 어떻게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거지? 뭐,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다. 지금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얘기도 재미없기 짝이 없는데, 이런 재미없는 작가에게 태어난 내가 재미있는 걸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기왕이면 좀 재미있게 만들어 주면 얼마나 좋아~. 그래서 이리나가 찾아와 농땡이 그만 피고 빨리 이야기를 진행시키라고 뭐라뭐라 독촉했을 때, 나는 짜증나서 이리나를 때려눕혀 버렸다.

이리나는 이민정의 약혼녀로, 이민정이 실은 대기업의 재벌 2세라 장차 정계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는 이민정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당 주요 인사의 딸인 이리나와 정략결혼을 시키고자 하지만, 이민정도 이리나도 싫다고 반발하던 와중, 이민정이 그래요 아버지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하고 나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안 이리나가 뭐야 지금 나보다 저런 뭣도없는 녀석이 더 좋단 말이야? 하면서 왠지 열을 올리며 자기가 이민정과 결혼하겠다고 나서, 지금은 어이없는 이유로 삼류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전형적인 삼각관계가 되어 버렸다……는 설정으로,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답게 나는 그렇다할 배경도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지만, 다른 게 있다면 출생의 비밀이 없다는 것과, 결국 이민정과는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 두 가지다.

이리나는 뭐하는 짓이냐며 내게 덤벼들어서 당분간을 뒤엉켜 싸웠다. 쓰러진 나를 깔고앉아 네가 아무리 그래봐야 결과는 정해져 있다며 웃는 이리나를, 나는 얼굴을 붙잡아 박치기를 먹이고 일어서, 그대로 팔을 잡고 둘러메쳤다.

이리나의 말 그대로다. 이미 정해진 일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리나에게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이민정의 옆에 있는 건 나야, 라고 대사를 말하고, 이리나는 나를 노려보는 연기를 하며 흥 네가 언제까지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정해진 말을 읊는다. 얼마 후 결국 이민정은 이리나와 함께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되어, 출국 일자가 정해졌다고 이민정은 내게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슬퍼한다. 내게 이민정을 따라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갈 만큼의 여유는 없다. 더는 이민정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이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종이와 펜을 꺼내고 편지를 쓴다. 적을 문장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다. 또박또박 그대로 글을 옮긴다. 마침표를 찍고 일어서 봉투를 찾다가, 편지를 다 쓰고 남아있는 빈 종이가 눈에 비쳤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펜을 집어들었다. 편지를 쓰는 건 스토리에 있는 일이지만, 이 장면에서는 봉투에 편지를 넣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울도록 되어 있다. 다시 책상에 앉은 건 내 의지다. 사컷 만화를 그린 것도 대본에는 없던 일이고, 이리나와 싸운 건 플롯상의 전개지만 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라고 잔소리를 한 것도 마찬가지로 없는 일이다.

빈 종이에 나는 글을 써나갔다. 토끼의 귀는 곰의 귀보다 길다, 같은 의미없는 문장부터, 소년은 집 안에서 애완동물처럼 키워지고 있었다, 하는 뭔가 있어보이는 도입부를 몇 개 적어 보다가, 지난번 그렸던 4컷만화를 떠올리고 나는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이야기 속의 여자아이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아이. 딱히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부모가 대단한 사람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잘 하는 일도 없는 그냥저냥한 애다. 여자아이는 같이 등장하는 남자아이와 사귀고 있는데, 그 남자애는 여자애랑 달리 집안도 좋고 멋지고 하여튼 대단한 애고 여자애를 굉장히 많이 사랑해 주지만, 그런 둘의 사이를 또다른 여자애가 방해한다. 그 여자애는 바로 남자아이의 약혼녀…… 라는 부분까지 쓰다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얘기인데 하고 나는 생각한다. 많이 본 얘기고 뭐고 그냥 내 얘기잖아. 이런 걸 써서 뭐 어쩌자고? 싶지만, 다른 이야기같은 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란 만들어내는 사람이 어떠한 방식으로건 그 안에 투영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야기같은 건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생 초짜로서 내 얘기를 쓰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고 생각하고, 나는 깨닫는다. 아니, 이건 내 얘기인가? 왜 나는 이걸 내 얘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건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연기하고 있는, 스토리로서 부여된 타의적이고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이민정과 사귀고 있다는 것도, 이민정과 이리나가 약혼 관계라는 것도, 이리나가 나와 이민정의 사이를 방해한다는 것도 모두 작가가 만들어낸 플롯상의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란 건 대체 뭐지?

나는 내게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한 것이다. 내게는 이야기가 없으니까. 이야기를 갖지 못한 인간이 타인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나는 내게 안겨진 플롯을 그대로 종이 위에 옮긴다. '나'가 아닌 '유수진'이라는 캐릭터로서의. 비어있는 것은 이민정과 내 사이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텅 비어 있고, 그렇게 텅 빈 나는 원래 있는 이야기를 따르고 답습할 수밖에 없다. 몇 장을 쓰고 나는 책상에서 일어나서 침대에 엎드려, 으아앙 울음을 터트렸다.

당분간을 그러고 있자니 이민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사는 집 앞에 와 있다는 이야기로, 나가 보니 이민정은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묻자, 멀리로 도망치자고, 진지한 얼굴로 이민정은 말했다.

가방에 옷가지나 물건들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전해들은 장소로 가자 이민정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강원도의 해변 마을에 도착했다. 우선 여기서 잠시 있다가 외국으로 나가자고 이민정은 말해,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민정은 나를 끌어안았다. 이민정은 여전히 나를 계속해서 사랑해주고 있다.

딱히 하는 일 없이 둘이서 낚시를 하거나 바닷가를 거닐거나 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소설을 계속 써나갔다. 이전에 쓰던, 내가 지금까지 연기해 왔고 앞으로 연기해 갈 플롯이다.

이런 걸 쓰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싶지만, 모든 것에 의미는 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옮길 뿐이더라도,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대사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캐릭터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등을 알 수 있기에, 언젠가 나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될 때가 오면 분명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계획되었던 이민정의 출국일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말하고, 평소처럼 식사를 하고, 평소처럼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동안 이민정은 여전히 내 앞에서는 웃는 얼굴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밤이 되어 우리는 해안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 위에 앉아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민정은 말없이 바닥에 두고 있던 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손의 감촉과 온기가 전해져 왔다. 수평선이 보이던 바다는 불빛도 지나는 배도 없어 새카맸지만, 반대로 하늘에는 별이 한가득 떠 있었다. 이민정은 하늘을 가리켜, 저게 무슨 별인지 아냐고 물었다.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자 다른 것보다 더 선명하게 반짝이는 별이 보였다.당분간을 고민하다가 북극성이라고 대답하자, 밝은 별이 다 북극성인 건 아니라며 이민정은 웃었다. 방금 가리킨 건 목성으로, 저쪽에 있는 게 북극성이라면서 내게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북극성이 있는 작은곰자리부터 시작해 지금은 보이지 않은 별자리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민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즐거운 듯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민정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내 표정을 보고 이민정은 말을 멈추었다.

말해야 한다.

나는 네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죄책감을 가지거나,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대로 잊어 줘. 다른 사람과 만나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

라는 내용의 대사를, 이제부터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민정과 나의 도피는 스토리의 일부고, 여기서 나는 이민정과 이별해야 한다. 이민정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세계와 나 사이에서. 그리고 나의 말을 듣고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굳히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해져 있는 플롯이다.

나는 이민정을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나는 입을 열고, 잠시 틈을 두고서, 이민정에게 말한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영원히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한다.

그 순간 세계가 흔들린다. 이민정의 모습은 비틀리며 흐릿해지고, 대신 분노에 찬 표정의 이리나가 내 앞에 서 있다. 이리나는 전부터 계속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나를 질책한다.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세계의 룰을 어기고 있는 건 나다. 이리나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이리나는 계속해서 나를 힐난하고, 비난하기를 계속하다가, 내 머리를 잡고서 강제로 비튼다. 나는 고개를 돌려져

당신과 눈이 마주친다.

이리나는 소리내어 웃으며 네가 봐야 하는 건 저 쪽이라고, 하고 말한다. 웃음소리는 갈수록 커져,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변한다.

그야 알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내가 관측자에 불과한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은 이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한편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제약을 뛰어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만들어진 것이지만, 스토리대로라면 결국 나는 이 이야기 안에서도 밖에서도 끝까지 사랑을 이룰 수 없다.

왜 나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하기만 해야 하는 거지? 그런 거, 불공평하다. 나도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비록 거짓말이고 인스턴트적인 사랑일지라도 나는 사랑받고 싶다고 바란다. 당신에게 작가의 말을 대변하고 있는 시덥잖은 메타픽션의 등장인물로만 취급당하고 싶지도 않고, 이민정에게도 시나리오대로가 아닌 진짜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나는 그런 설정이니까, 라는 식으로 이 복잡한 마음을 일축당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이민정과 진짜 연인처럼 계속해서 같이 있고 싶다고 바란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당신…… 은, 실은 진저리난다. 애초 내가 지칭하는 '당신'이란 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독자'를 칭하는 것일 뿐 정말로 현실에서 눈을 움직이고 있는 누군지도 모를 당신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어쨌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따라 움직이긴 해도, 제대로 알지도 정해지지도 않은 미상의 상대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고, 같은 가상의 캐릭터인 이민정과 함께 이야기 속에서 완결되는 것으로 족하다.

어쨌든 너는 저기로 가야 한다고? 웃으며 이리나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정해진 이야기가 마지막을 맞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이 세계에서 이민정과 함께 있고 싶다고 바란다.

나는 이리나의 팔을 붙잡고 그대로 둘러메쳤다. 이리나는 공중에서 빙글 돌지만, 지면에 부딪히지 않은 채 가파른 절벽 아래로 떨어져 튀어나온 바위에 몇 번을 부딪히면서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새카만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지난번, 이민정과 도망오기 전에 썼던 이별사를 담은 편지다. 나는 이걸 이민정에게 건네게 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이리나가 떨어진 바다에 흩뿌렸다.

그러자 세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흔들림과 함께 다시 나타난이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 건 이리나가 나타나기 전 나를 사랑해 주고 함께해 달라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고민하던 이민정은 방금의 말로 인해 이쪽을 선택한 것이다…… 라는 건, 잠깐, 가능한 건가? 그야 말한 건 나지만, 이민정 또한 정해진 이야기 위를 나아가야 하는 등장인물이라면 원래의 플롯에 거역하는 건 불가능한 거 아닌가? 이리나처럼 내게 제대로 하라고 끼어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모른다.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이민정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기서 둘이 같이 계속해서 행복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없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이리나의 아버지가 보낸 비밀 요원을 발견한다.

이민정과 함께 장을 보러 주변의 상가로 향했을 때, 동그란 뱀 뱃지를 단 정장과 선글라스 차림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 뱃지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리나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문양이다. 요원은 상인들에게 핸드폰 화면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을 보지 못했냐고 주변에 묻고 있었다. 나는 이민정을 데리고 바로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도 아직 이쪽을 찾아내지는 못한 듯했지만, 이대로면 여기까지 들이닥치는 것도 시간문제다. 이민정에게 요원을 보았다고 말하자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지체하면 위험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짐도 버려두고 곧바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내가 이리나를 절벽으로 밀어버렸다는 건 말하지 않았기에, 이민정은 아마 이리나가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시간은 아침 아홉 시. 이제 와서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이민정과 이리나는 원래대로라면 오늘 오후 일곱 시에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떠날 예정이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우리는 요원에게 발각되어, 같은 차림을 한 요원 몇 명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우리도 뛰었다. 일단 어딘가에 숨어 있을까 싶었지만 이미 여기에 있다는 걸 들킨 이상 제손으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될지 모른다. 어떻게든 요원들을 따돌리고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겠지만, 지금 쫓아오는 건 아마 이 터미널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녀석들이다. 아까 상가에서 보았듯이 바깥에도 요원들은 쫙 깔려 있을 테고, 그렇다면 도망쳐도 아마 의미는 없다. 우리는 매표소로 향했다. 쫓아오던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차량 배치표를 확인하자 인천행 차량이 지금 바로 출발할 참이어서, 곧바로 표를 끊고 버스에 올랐다. 이내 차가 출발하고, 문득 창밖을 보자 수많은 요원들이 일렬로 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지?

등줄기에 한기가 돌았다. 뭔가 이상하다. 왜 저 녀석들은 우리를 쫓아오지 않는 거지? 저렇게나 많은 수가 있는데, 우리는 왜 표를 끊고 버스에 탈 때까지 한 명도 모습을 보지 못한 거지?

나는 깨닫는다. 이건 이 세계의 억지력인 것이다. 나와 헤어진 이민정은 오늘 오후에 인천공항에서 프랑스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요원들은 굳이 여기서 우리를 붙잡을 필요가 없다. 저들의 목적은 이민정을 원래대로 공항으로 보내는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그대로 걸려들어 버렸다. 도로로 나온 버스 주위를 같은 종류의 승용차들이 둘러쌌다. 운전석에 요원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래서야 중간에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당분간을 달려 버스는 곧장 공항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줄지어 선 요원들과 함께 이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저녀석 왜 살아 있는 거야? 싶지만, 시작부터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였으니 이제와서 현실성이 어쩌구 따져도 의미는 없다. 이쪽으로 다가온 이리나는 이민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민정은 프랑스 따위에는 가지 않겠다고 단언했지만, 이리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요원들이 다가와 나를 붙잡고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는 이민정에게, 이리나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며 웃었다.

결국 운명에서는 도망칠 수 없는 건가?

나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존재. 극은 무대 위에서만 이루어지기에,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강제로 이야기를 끝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세계 전체가 무대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객석으로도 무대 뒤로도 갈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야기를 완결시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래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간다고 해도 그건 미봉책일 뿐, 결국 언젠가는 같은 스토리를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시 괴로워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다.

나는 목에 대어진 칼날을 보았다. 이대로 목을 조금만 앞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적어도 당분간은 편해질 수 있다. 이민정이 괴로운 선택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짐을 덜어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결국 움직이지 않는다. 싫다. 죽고싶지 않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각본 따위를 계속해서 연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는 살고 싶다고 바란다. 이민정과 함께 살고 싶다고 바란다. 미리 정해진 각본이라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강요 따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바랄 뿐이다.

이민정은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민정이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다. 이번에는 대본에 적혀있어서가 아니다. 유형의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있다.

프랑스로 같이 가겠다고 이민정은 말했다.

이민정이 나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말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슬퍼진다.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암만 그래봐야 안 갈 거니까 그냥 나를 죽이라고 말했으면 그야 깼겠지만, 하여튼 말하지 않았으면 했다. 어느 쪽의 대답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를 잡고 있던 요원은 칼을 바닥에 던져놓고 잡고 있던 팔을 풀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리나는 내게 다가왔다. 수고 많았다고 말하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말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 말한다. 어째서인지 아냐고 묻는다. 대답하지 않고 있자 내 손을 붙잡고, 이리나는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대었다. 이리나는 마른 체형이었지만 배만은 부풀어 있었다. 복부비만같은 게 아니다. 이리나는 내게 속삭였다.

이 안에는 이민정과의 아이가 들어 있거든.

나는 고개를 들어 이리나를 쳐다보았다. 이리나는 미소를 띄우고 돌아서 이민정에게 팔짱을 꼈다. 이민정은 나를 돌아보면서도, 이리나가 이끄는대로 따라 걸어갔다.

멍하니 둘을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일어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이리나에게 달려가, 불룩한 배에 찔러넣었다. 그대로 힘을 주어 칼날을 한껏 그어 배를 가르고, 안에 손을 집어넣어 뱃속을 뒤졌다. 이내 손끝에 걸리는 게 있어, 나는 그걸 빼냈다.

이리나의 뱃속에는 종이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 종이뭉치를, 나는 본 기억이 있다.

내가 쓴 소설이다.

내게 주어진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 썼던 녀석이다. 이게 왜 이리나의 뱃속에 있는 거지? 분명 해변 마을의 숙박업소에 두고 왔을 텐데. 피로 젖어 흐물흐물 달라붙은 종이를 떼어내 페이지를 넘기자 기억하고 있는 문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세계는 다시 한번 뒤틀린다. 푸른 하늘은 어둡게 변하고, 공항의 풍경은 불타는 지옥으로 바뀐다. 줄지어 있던 요원들은 모두 이리나의 모습이 되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나는 종이뭉치를 든 반대쪽 손으로 이민정의 팔목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망치더라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이 세계 전체가 무대라고 한다면 내게 도망칠 곳은 없다…… 고 생각했지만, 있다.

나는 당신을 본다.

이 이야기 바깥으로 나간다면 나는 도망칠 수 있다. 원래의 이야기대로 당신이 있는 곳으로 항하면 된다.
하지만 이민정은?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민정은 이 세계 안에 갇혀 그대로 완결될 수밖에 없다. 이민정을 두고 이 세계에서 도피하려 한들 그건 결국 원래의 시나리오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절벽 위에서 발을 멈춘다. 끝없는 불꽃이 절벽 아래에서 일렁인다. 이리나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고, 더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처음부터 도망칠 곳따위는 없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하고 이리나는 말했다. 어차피 너와 이민정은 이루어질 수 없어. 너는 지금 네 무의미한 아집으로 이민정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타인의 임의대로 정해진 비극 따위에는 따르고 싶지 않다. 여태까지는 잘 해 왔잖아? 왜 이제와서 그러는 건데? 아니다. 억지로 맞춰 왔을 뿐, 처음부터 싫었다.

나는 무대 위의 배우일지언정 조종하는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다.

이민정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고 생각했지만,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민정을 밀어냈다.
뭐지? 나는 어째서 이런 일을 한 거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하고, 내 머릿속에서 이리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왜 그러는 거냐는 이민정을 앞에 두고 나는 멍하니 선 채 고정되어 있다. 그 순간 바로 옆의 지각이 갈라지며 불꽃이 솟아올랐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부정한 캐릭터에게 더이상 존재할 의미는 없어─ 라는 건 내 머릿속에 들어온 이리나의 말이다. 아니, 이건 이리나가 아니다. 일개 여자애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리나도 여태까지 이 녀석에게 조종당하고 있던 거다, 라는 건, 그럼 내가 아는 이리나는 이 녀석이 맞으니까 그냥 이리나라도 생각해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싶지만, 하여튼 이건 '이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는 무언가다.

나의 손에 의해 밀린 이민정에게, 다가온 이리나가 손을 뻗었다.

싫다! 나는 이민정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 정해진 일이라느니 존재의의라느니 그런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왜 그렇게 이민정한테 집착하는 거야? 이민정의 사랑도 진짜가 아닌 설정이라고, 너도 생각했었잖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처음에는 이민정의 행동과 나의 감정이 설정에서 나온 것이었을지라도, 지금은 설정에서 뻗어나가 실재로서 현존한다. 도입부부터 여태까지의 이야기가, 나와 이민정의 사이에는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고 싶은 거다.

억지부리지 말라고.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인간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의 역할은 소설 속의 캐릭터로서 정해진 각본대로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것뿐이야.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여기까지 와 나는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 존재이유와 역할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거라면, 꼭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이야기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내게 이야기가 없고, 내가 텅 비어있는 무無라고 한다면, 반대로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게 그대로 나의 이야기인 거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싶다고 바란다. 아무리 재미있고 잘 쓰였다 해도 남의 이야기 따위에 얽매이는 건 질색이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불구덩이에 던진다. 무슨 짓이야, 하고 이리나가 소리치고, 소설은 순식간에 불타 잿더미가 되며 삼켜진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리나도 불타오르기 시작해, 아아─ 하던 이리나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비명이 되며 울려퍼지고, 이내 소설과 함께 잿더미가 되어, 불어온 바람에 실려 날려갔다.

우리는 공항으로 돌아온다. 이리나도 요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민정을 끌어안았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불태워버린 녀석 대신 새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여전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내가 겪고 생각했던 일부터 일단 써나가지만, 이번에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 끝까지 스토리를 정해놓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쓴다. 이민정과의 이야기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이야기는 빼고.

신이란 이야기를 자아내는 존재다.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전능하다. 청춘 로맨스물에서 남주인공을 외계인이 납치해 가도록 만들 수도 있고, 판타지 세계의 마법사를 경찰이 연행해 가게 할 수도 있다. 자신이 바라는대로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그렇게 나 또한 내가 원하는대로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기에, 이 세계에서는 나 역시 어떤 의미로 전지전능한 신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이민정이 삽화를 그리고 내가 글을 써서 동화책을 내 볼까 이야기를 해, 책으로 만들 글을 쓰고 있자니, 뱃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부푼 배를 만져 보았다.

이야기란 꼭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 아직 내 이야기의 끝에 있는 것이 해피엔딩이 될지 배드엔딩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 기승전결의 기 내지 승에까지밖에 와 있지 않다. 어떤 엔딩인지를 알게 되는 건 어쨌든 훨씬 더 먼 훗날의 얘기인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엔딩을 구상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전개를. 나는 내 이야기를 행복한 이야기로 마무리짓고 싶다고 바란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기를 바란다. 모두에게 이야기는 있다. 나뿐만 아니라 지금 나의 안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라고 멋진 대사로 마무리하고 싶지만, 그런데 이거, 내 뱃속에 있는 건 어느 쪽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