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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

  • 작성일 2015-10-10
  • 조회수 273

삼인

아주 어릴 적,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에 자는 척하며 슬며시 실눈으로 보았던 산타 할아버지의 정체가 ‘우리 아빠’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한 이후, 오늘처럼 기운 빠지는 경우는 처음이다. 동네 전봇대에 붙어있던 광고를 보고, 꽤 규모가 큰 회사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는 것으로 기대하고 찾아왔는데, 이건 뭐야? 깡마른 노인네 한 명 뿐이잖아! 그럼 그 거창한 광고 내용은 도대체…이런, 사기꾼 노인네 같으니라고.

아르바이트생 모집

수능 치른 신체 건강한 수험생 대환영

6시간, 이브(PM11) ~ 성탄절(AM5)

만족스런 일당 보장

그 ‘만족스런’이란 어휘를 대충 보아 넘긴 것이 실수다. 이런 비쩍 마르고, 게다가 뒷산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거지도 근처에 가지 않을 만큼 낡은 집을 지어 사는 노인이 어떻게 고액의 일당을 지급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난 이 허름한 집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뛰쳐나가려 했었다. 그런데 왜 계속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까. 그 의문 때문에라도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노인의, 집안을 꽉 채운 이상하고 묘한 분위의 정체는 무엇일까. 노인은 낡은 책상 위에서 무언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온 학생인가?”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외모완 달리 의외로 포근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학생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네.”

난 일단 대답했다. 밖에서 바람이 날카롭게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것 같다. 바람에 밀려 삐거덕거리는 문 앞에 나는 어정쩡하게 서있다.

“바깥바람이 거칠군. 좀 앉게. 올해 수능 쳤지?”

“네, 음…….”

노인이 앉으라고 권했지만, 난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다가 누렇게 색이 변질된 흰색 이불 위에 철퍼덕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쥐꼬리만큼의 보수라도 받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집에 있어봐야 이득 되는 일은 없다. 수능이 끝나면 휴대폰 100개라도 사줄 것 같던 부모님의 태도가 12월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친구들과 놀러갈 곳도 많고, 게다가 연말에 돈 쓸 일도 많은데, 어머니는 오히려 내 용돈을 더 줄여버렸다. 이제 참고서를 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밖에서 놀자니 돈이 부족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 컴퓨터 키보드나 두드리고 있으려니 이번엔 또 동생이 울면서 자리를 비켜달란다. 어휴! 참 더러워서 내가 벌어 쓴다, 하며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뭐 아무리 적은 일당이라도 성탄절 날 하루 신나게 놀 만큼은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저 노인은 아까부터 무엇을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나?”

“넷, 네?”

난 깜짝 놀랐다. 설마…에이, 그럴 리가 없다.

“자네가 아까부터 내가 작업하는 걸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같아서 그런다네.”

내가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나의 시선은 아까부터 줄곧 노인이 작업하고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주위 환경에 꽤 예민한 성격인가보다. 내 시선까지 의식하고 있었다니!

“에헴! 음, 수능이 끝나도 세상은 그대로지?”

노인은 헛기침을 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꿔 뚱딴지같은 질문을 해왔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천장에 홀로 매달려 초라한 방 안을 비추는 백열전등이 잠시 깜빡인다. 하나밖에 없는 문은 여전히 덜컥거린다. 집에 돌아갈 길이 벌써 막막하다. 휙휙, 칼바람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너무 그렇게 불편해하지 말아. 그냥 친할아버지처럼 편하게 이야기 해. 그리고 바람이 너무 차고 시간도 꽤 늦었으니, 집에 갈 길이 걱정되면 하룻밤 자고 가도 되네. 벌써 아홉 시야.”

“와하하하! 말 같잖은 소리 하지도 마세요. 불편해서 어떻게 자고 갑니…흡!”

난 무심코 이야기를 하다가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젠장! 내가 미쳤나? 무심코 생각을 그대로 말해버렸다. 이제 아르바이트는 물 건너갔다. 흑흑, 어디에 가서 돈을 번담.

“헛헛헛! 솔직해서 좋구만. 그래, 그렇게 말을 하면 되지 뭘 그리 불편하게 앉아있나? 집이 좀 허술하긴 하지. 내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집 관리를 못 했다네. 좀 오래됐지. 헛헛!”

나, 참, 웃음소리 한번 독특한 노인네다. 원래 저런 건지, 다른 사람을 흉내내려는 어설픈 노력인지. 아무튼 내가 한 말엔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다시 보니 꽤 괜찮은 할아버지다. 같은 또래였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노인네가 저러니 어째 어울리지 않는다. 하는 일이란 건 도대체 뭘까. 알아야 일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할아버지 하시는 일이 뭔데요?”

나는 다리를 쭉 펴고 스트레칭을 하며 물었다. 아주 불편했었는데, 잠깐 사이에 이곳이 아주 편해졌다. 신기한 일이다.

“뭐,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일을 ‘노가다’라고 부를 수도 있겠군!”

노인은 여전히 이번엔 뒤로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미소는 환했지만 얼굴 전체가 주름투성이다. 원인도 모른 채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타인의 감정에 꽤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이상한 힘을 가진 미소였다. 아니, 누구라도 저 얼굴을 보면 한 마디 할 것이다. 밥 좀 많이 드세요, 이 노인네야! 그나저나 ‘노가다’라니, 얼마나 힘들기에 ‘노가다’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 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요.”

나는 아예 이불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오래 되서 색은 좀 누렇지만 상당히 깨끗한 이불이다. 게다가 굉장히 부드럽고 푹신하다. 비싼 건가.

“글쎄, 설명하기가 꽤 까다롭군. 난 성탄절에만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거든. 평소에도 다른 어떤 곳에서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지. 예전엔 그 일을 하며 넉넉한 벌이를 한 덕에 뚱뚱한 몸매였는데, 언제부턴가 통 안 되더군. 해서 계속 살이 빠지다가 이렇게 온 몸이 주름으로 덮였지 뭔가. …어험! 자네, 거기 누워있지 말고 여기 와서 내 작업하는 것 좀 보는 게 어떤가?”

아무래도 이 노인네는 뒤통수에 눈이 달린 모양이다. 잘도 내가 누워있다는 걸 알았다. 그나저나 이 이불 위가 너무 편하다. 더 누워있고 싶은데, 그래도 일은 해야지. 나는 일어나서 노인에게 다가갔다.

책상 위엔 상자와 포장지들이 잔뜩 널려있다. 책상 밑에는 크고 붉은 주머니가 하나 있다. 난 또 뭐 대단한 일 하는 줄 알았더니 결국 ‘산타놀이’잖아. 요즘 세상엔 ‘산타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의 목적은 돈이다. 이유도 없이 자선사업 하는 미친 산타 아니, 장사꾼은 신문에 날 것이다.

“할아버지도 산타로 분장하시겠네요.”

난 산타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손에도 주름이 가득하다. 이런 손으로 어떻게 포장을 이렇게나 빨리 하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이 상자들은 모두 비어있는데 왜 벌써 포장을 하는 것일까?

“‘분장’이라고? 허허, ‘빨간 옷’ 말인가. 미안하지만 난 코카콜라 회사 직원이 아니거든. 이 일을 하려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하니 검은 옷을 주로 입는다네. 올해는 주머니도 검은 가죽 재질로 바꿀 거야. 저기 있는 붉은 주머니는 버려야지. 자네가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아. 아르바이트 기념으로.”

와하하! 이거 정말 심각한 ‘산타병’인 것 같다. 이 노인은 지금 자신을 진짜 산타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자들은 비었는데 왜 벌써 포장을 하죠?”

“내용은 저절로 채워질 거야.”

“네? 무슨…….”

아아, 단순히 산타놀이를 좋아하는 노인네가 아닌가보다. 치매인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 저절로 찬다고? 웃기네. 말이 되냐고 그게.

“에이, 농담하시는 거죠?”

나는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니, 왜? 농담으로 들리나보지?”

노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저음으로 변했다.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든다. 도대체 이 묘한 분위기의 정체가 뭐야? 무섭다고요. 이상한 목소리 내지 마세요. 노인은 아무래도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소, 솔직히 그렇잖아요. 하하, 내용물이 저절로 찬다니 그건 마술이 아니라 마법이죠. 과학적으로 근거도 없고요.”

나는 말을 더듬었다. 지금 분위기로는 말실수라도 했다간 한 대 맞을 것만 같다.

“호, 그래. 과학적 근거? 그럼 말 나온 김에 내가 하나 묻지. 자네 꿈이 뭐가?”

난 이 노인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아무 상관도 없는 화제는 왜 끌어들이는 건지.

“제 꿈이요?”

갑자기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하려니 당황스러워서 질문을 제 확인했다. 노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무서워서 대답 하겠나 이거.

“음! 그러니까, 그게, 좀 쑥스럽지만 세계의…에이, 세계적인 소설가요! 됐습니까?

이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건데, 아! 쪽팔려. 그런데 어째 머릿속이 시원한 것 같다. 가슴이 후련한 게 기분이 좋다. 이렇게 당당하게 꿈을 말한 경우는 이번이 정말 처음이다.

“그거 농담인가?”

노인이 다시 작업을 시작하며 물었다.

“장난합니까? 농담일 리가 없잖아요. 나중에 어떻게 되든 지금 되고 싶은 거니까 농담은 아니지요.”

난 화가 나서 책상을 손바닥으로 치며 대답했다.

“나도 농담 아냐. 이 상자 안을 채울 내용이 바로 그런 거야. 아주 소중한 거지.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치부해버린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야윈 거라네.”

뭐야? 무슨 말이야? 도대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리고 그거랑 당신이 야윈 것과는 또 무슨 상관이냐고! 나는 큰 소리로 한 마디 해주려 했다. 할아버지 제정신에요? 그러나 튀어나올 뻔했던 그 말은 다시 삼켜야했다. 노인의 눈에 이슬이 한 방울 맺혔다. 그 모습을 본니 왠지 속이 답답해졌다. 젠장! 짜증이 난다. 이 노인은 미친 사람이 분명한데 내가 왜 대화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집에 가야겠다. 이곳에 더 있다간 나까지 미쳐버릴 지경이다.

“저 집에 갈래요.”

난 결국 노인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내일이 이브지. 내일 밤에 일을 할 텐가?”

노인이 작업을 멈추었다. 순간 집 안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세게 불던 바람도 이젠 좀 잠잠해졌나보다. 문이 덜컥거리지 않는다.

“그 상자, 집집마다 나눠주는 거죠? 몇 가구에 넣어야 하는데요?”

미친 노인과 일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이렇게 보낸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전 세계.”

돌았군, 완전. 난 내일 나올 것인지 안 나올 것인지 대답도 않은 채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뭐 저런 빌어먹을 노인네가 다 있담. 아니, 내 잘못이다. 이상한 광고에 현혹된 내가 바보지. 난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계속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또 아려왔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지난밤에 늦게 잠자리에 든 탓에 늦잠을 자버렸다. 시계의 시침은 벌써 오전 열 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느릿느릿 부엌으로 걸어갔다. 집 안이 조용하다. 아버지는 출근 했을 거고, 동생은 성당에 간다고 했다. 어머니도 외출하셨나보다. 식탁 위엔 쪽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반찬 없으면 라면 끓여 먹어라. 냉장고에 계란, 김치 있다. 엄마는 고등학교 동창회 간다.

크리스마스이브라…어째 내 신세가 처량하다.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있어야 한다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렇지. 잡히는 건 500원 짜리 동전 하나다. 정말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다.

난 익지 않은 사리를 손으로 잘게 부숴 와삭와삭 씹어 먹었다. 크리스마스 특집 영화를 보면서. 영화는 작년에도 보았던 거다. 지겹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진동이 울린다. 한 번 울리고 마는 것을 보니 문자 메시지인가보다. 라면 봉지를 소파에 던져놓고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민철아, 나 지금 네 집 앞에 있어. 팔 빠질 것 같아. 도와주면 사례는 꼭 할게

-하은희-

이럴 수가! 은희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난 거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 정말이다. 은희가 대문 앞에 이상한 종이를 잔뜩 쌓아놓고 그 위에 앉아있다. 추리닝 차림의 모습이 의외다. 은희가 치마를 입지 않는 날도 있다니. 뭐, 저런 차림도 나름대로 귀여운데.

난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답신을 보내고 재빨리 욕실에 들어가 씻었다. 그리고 추리닝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남들이 보면 연인인줄 알 것이다. 하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다지 나쁜 크리스마스이브는 아닌 것 같다. 내가 평소에 짝사랑하는 은희와 이브를 함께 보낼 수 있다. 은희는 분명 저 종이뭉치를 들어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 대가로 같이 놀러가자고 협박해야지. 좀 야비한 수단이지만 좀처럼 오지 않는 기회다. 게다가 은희는 학교에서 인기도 많다. 나처럼 평범한 남학생은 근처에도 가기 힘들 만큼 어려운 존재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500원으로 제대로 된 데이트나 할 수 있을까. 하늘에 먹구름도 짙게 깔렸다. 비나 눈이라도 잔뜩 내릴 것 같은데. 뭐,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야지.

“어, 민철아, 미안해. 너무 무거워서 친구들한테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오지 않으려고 해서…너희 반 선화가 근처에 네 집이 있다고 가르쳐주더라. 나와 줘서 고마워.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이야기 하는 건 처음이지?”

은희는 내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쩜 저렇게 예쁠까. 게다가 용케도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사실 그 때도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었다. 지금은 적극적다 못해 공격적인 수준이지만, 그때만 해도 난 정말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교실 구석에서 미친 듯이 책만 읽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읽은 책의 대부분이 그때 읽은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

“아니, 뭐, 나도 굉장히 심심했었거든. 도와달라는 건 이 종이뭉치 나르는 거지?”

난 종이뭉치를 번쩍 들어올렸다. 생각보다 꽤 무겁다. 하지만 은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활짝 웃었다. 허리에서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느껴진다.

“응, 사실 이거 아르바이튼데, 일당 받으면 꼭 너도 나눠줄게. 그리고 나도 일은 해야 하니까 혼자 다 들지 마. 그거 아주 무겁단 말이야.”

은희는 나에게서 종이뭉치를 약간 덜어갔다. 다행이다. 가볍게 드는 척했지만 혼자 들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나저나 아르바이트 하니까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어제의 그 정신 나간 노인. 아직도 산타놀이 준비 중일까.

“그럼 이제 가볼까? 여기서 가까운 곳이야. 바로 뒷산 근처야.”

뒷산이라고? 아르바이트에 뒷산. 난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 얼굴이 떠올랐다. 주름진 얼굴. 그 할아버지의, 보고 있으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그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노인은 푹신한 이불 위에 쓰러져있었다. 코 밑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있고, 집 안 곳곳에 빈 상자들이 널려있었다. 이런 미친 노인네! 정신 나간 짓도 정도껏 해야지. 은희와 나는 구급차를 부르려 했지만, 빌어먹을 노인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렸다. 난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이번엔 은희가 말렸다. 은희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너무 절실했다. 제길! 뭘 어쩌라는 거야?

은희는 노인의 옆에 앉아서 두 시간째 간호하고 있다. 노인은 우리에게 두 배의 일당을 주겠다고 말했다. 은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난 크게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해요! 그런 돈 줘도 안 받아.

난 은희가 하는 아르바이트도 그 노인의 산타놀이를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랄 겨를조차 없었다. 노인은 밤새도록 작업을 했던 모양이다. 저 나이에 도대체 왜 그리도 힘든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노인의 정체 자체가 궁금했다. 뭔가 대단한 기인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평범한 아니, 약간 정신 나간 늙은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후 세 시가 되자 노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은희가 손수건을 노인의 이마에 대며 일어나지 말라고 했지만, 노인은 고집을 부렸다. 저 꼴을 보고 있자니 정말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노인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고 있는 나를 불렀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리고 오늘 일도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나는 가까이 가서 은희 옆에 앉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둘이 아는 사이였다니 정말 뜻밖이군. 우연은 아니야. 헛헛!”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노인의 목소리는 매우 힘겹게 들렸다. 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고, 은희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눈에 눈물이 약간 맺혀있었다.

“할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 지경까지 되면서 왜 굳이 이 일을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런 나의 말에 은희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노인은 말이 없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빛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얼굴의 주름. 저 주름만큼이나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나에겐 아들이 있었다. 큰 꿈을 가진 녀석이었지. 녀석의 꿈도 자네와 같았다네. 소설가였지. 그래, 그냥 소설가 말고 세계적인 소설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다네. 그 날이 크리스마스였어. 갓난아기 때부터 어미도 없이 내 손으로 키운 아들이었다. 녀석이 죽고 나서 생각나더군. 내가 크리스마스에 제대로 된 선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말이야.”

역시! 이런 슬픈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은희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 훌쩍거리고 있다. 그래, 정말 슬픈 사연이긴 하다. 하지만 난 뭔가 꺼림칙한 부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분명 눈물 나는 이야기이긴 한데, 너무 진부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 번쯤은 본 듯한, 눈 감고도 외우는 스토리. 뭐 아무튼 이 노인은 평범한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산타 옷은 원래 흑색이다, 내가 야윈 것은 요즘 사람들이 무엇을 농담으로 치부해서 그렇다, 그런 이야기들은 다 헛소리였던 것이다. 그래, 저 주름은 원래 늙은 몸에 제대로 먹지 못해서 심해진 것이었다. 난 노인에게 몇 년 동안 산타노릇을 해왔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그때였다.

“계십니까?”

구두에 정장을 입은 아저씨 한 명이 문을 열고 불쑥 들어왔다. 아저씨는 잠시 놀란 눈빛으로 우리를 보더니 노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말은 은희와 나의 머릿속을 띵 하게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아버지, 오늘은 진짜 집에 같이 돌아가요. 도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시는데요?”

아버지라니! 자식은 죽었다고 방금 전에 이 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난 댁 같은 사람 모르는데.”

노인은 토라진 어린이처럼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아버지!”

정장 차림의 아저씨는 급기야 무릎을 꿇으며 호소했다.

“…내 아들은 10년 전에 죽었다. 출판사가 잘 돼서 돈 좀 벌더니 갑자기 죽어버렸어!”

“또 그 소립니까?”

아저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포기한 듯 다시 일어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다시 노인이 불러 세웠다.

“기다려! 같이 간다. 어디 그놈의 돈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구경이나 하자.”

“차에 시동 걸고 있겠습니다.”

아저씨는 나갔다.

노인이 잘 일어나지 못하자, 내가 부축해주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내 신세가 이렇다네. 돈 많은 아들 둔 건 좋은 일이 아냐. 저 불효자식은 돈 때문에 꿈을 버렸어. 돈 좀 벌더니 글은 쓸 생각도 안 하더군. 난 저놈 글을 읽는 것이 삶의 낙이었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문 앞에 서있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은희 양과 민철 군은 부디 꿈을 버리지 말게. 수고했는데 급여를 못 줘서 미안하군. 하지만 이것만은 믿어주게. 내 ‘산타놀이’는 진지했다네. 세상의 어린이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꿈을 선물하고 싶었어. 아기예수의 탄생처럼 말이야…이 집은 자네들이 써도 좋아. 아르바이트 급여 대신으로 받아주면 고맙겠군. 그럼 난 가네. 아! 이건 좀 무리한 부탁인지 모르겠다만, 은희양에게 부탁했던 폐품으로 상자는 마저 완성해줬으면 하네. 상자만이라도 다 완성해야……."

노인은 말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나갔다. 은희와 나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바람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어쩔 거야, 민철아?”

은희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쩌긴, 일단 나가야지. 데이트 신청해도 되냐? 참고로 나 돈은 없다.”

그리고 결국 속마음을 말해버렸다.

“데이트 신청이라…민철이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중학교 3학년 때 넌 항상 책만 읽고 있었지. 내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호호, 이제 보니 너 꿈이 소설가였구나. 근데 말이야. 내 꿈도 소설가야. 깔깔깔! 우리 같이 소재나 찾으러 가볼까?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이면 꽤 멋진 소재가 많을 거야. 아! 그리고 돈 없는 입장은 나도 마찬가지지롱.”

한 방 먹었다.

은희는 멍청하게 서있는 나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는 함께 문을 나섰다. 언제부터 눈이 내렸는지 온 세상에 하얀 나비가 날아다닌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 노인은 돈보다 값진 것을 선물해주었다. 더없이 ‘만족스런’ 일당이다.

난 이번 크리스마스이브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인생 최대의 선물을 받은 날이기도 하고, 인생 최초로 사귄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노인인과는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다. 못 다한 아르바이트는 해야지. 오늘 밤 꿈에 난 검은 옷을 입고 전 세계 모든 집들의 굴뚝을 타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 노인, 루돌프는 키우고 있는지 몰라.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현재. 아이들이 나를 놀리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은 셀로판지를 눈에 붙이고 있다. 왼쪽 눈은 빨간색, 오른쪽 눈은 초록색.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시 삼십 분 현재. 신체검사를 했다. 몸무게, 키, 구강검사, 건강검사, 그리고 시력검사. 나는 적록색맹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오늘만이 아니었다. 1997년에도 1998년에도 1999년……2003년에도 나는 적록색맹이라는 판정을 받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내 손을 놀렸다. 내 손에는 빨간색 색연필과 초록색 색연필이 들려있다. 나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들은 알면서도 나를 놀렸다. 적록색맹이라고 해서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통사람보다 분별능력이 떨어질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면서도 놀렸다.

나는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 지금도 만화를 그리고 있다. 나는 양 눈에 색로판지를 붙이고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그 녀석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녀석을 그리려고 의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리다가 보니 양 눈이 각각 적록색인 괴물이 그려졌고, 나는 이 그림을 지우려다가 알았다.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캐릭터는 좀처럼 그려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녀석의 이름은 플러스다. 녀석은 지금 빨간색 셀로판지만 눈에 붙이고 있다. 초록색 셀로판지는 어딘가 떨어뜨렸나보다. 교실바닥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다. 누군가가 초록색 셀로판지를 찾아서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에 대어본다. 녀석의 눈의 흰자위가 녹색으로 보인다. 녀석의 이름은 마이너스다.

플러스의 마이너스는 나의 친구들이다. 녀석들은 종종 나에게 말못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사이가 나쁘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부러워하는 듯 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한 시 오십 분 현재. 담임 선생님께서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신 후, 우리를 한번 부드럽게 훑어보신다. 그리곤 물으셨다.

"선생님 좀 볼까?"

"네."

그들의 부탁과 긍정의 대답은 상당히 익숙했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플러스는 선생님을 따라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 올 것이다.

선생님께서 플러스의 어깨를 보듬으며 교실을 나서가사 멈칫 하신다.

"오늘 주번 누구야?"

"저요."

"그리고 또."

둘 중 한 명은 마이너스였다. 선생님은 마이너스를 노려보며 말씀하셨다.

"똑바로 못해? 칠판 꼴이 이게 뭐야? 그리고 교실 바닥은 왜이래? 청소 빨리 해놓고 밥 먹도록 해."

마이너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빗자루를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과 플러스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 시 십 분 현재. 야간자습이 끝난지 10분이 지났다. 나는 지금 마이너스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운동장에 엎인 어둠이 커피의 향기 만큼이나 진하다. 후루룩. 마이너스가 한 모금 들이켰다. 녀석은 마치 쓰디쓴 소주를 마신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곤 '크' 하는 소리 대신 주절주절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나를 싫어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물었다.

"플러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G그룹의 회상이잖아. 나는 소방관의 아들이고. 선생님은 녀석의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은 거야. 그래서 녀석은 매일같이 점심을 공짜로 얻어먹잖아."

녀석은 빈 종이컵 속에서 커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한달째 집에 들어오지 않으였어. 어머니는 회사에 다니셔."

나는 그때 위쪽에 있는 화단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녀석의 아버지 회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에잇! 가자."

마이너스는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도 엉덩이를 털며 느릿느릿 뒤를 따르는데, 다시 화단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가 운동장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그 날 나는 밤늦게까지 마이너스와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녀석과 헤어진 후, 집에 가는 길에 작은 포장마차를 지나다가 담임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 옆에는 낯선 아저씨가 소주를 들이키며 뭐라고 주절대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다. 어두운 밤에는 정말이지 색깔 구분이 어렵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여섯 시 삼십 분 현재.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다가 잠깐 TV를 틀어보았다. TV에는 플러스의 아버지가 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번쩍번쩍. 1초에도 수십 번씩 번갯불 같은 플래시가 벗겨진 머리에서 번득였다. 플러스의 아버지는 보통사람보다 두 배는 뚱뚱했다. 뉴스를 틀어보니 이번에 신상품을 개발한 것이 크게 히트를 쳤단다. 외국에 수출도 할 것이며 국내시장에서도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TV를 껐다. 그리고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플러스가 일찍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일곱 시 삼십 분 현재.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0교시가 폐지되면서 등교시간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뒷문에 플러스가 서있었다.

"나랑 이야기 좀 해."

플러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주었다. 커피의 첫 잔은 언제나 쓰다. 하지만, 마지막 한 모금은 달콤하다.

"어제 밤에 화단에 있었던 게 너였니?"

내가 물었다.

"난 어제 집에 있었어."

나는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시 십오 분에 본 그림자가 분명히 플러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럼 누구였을까?

"어제 집에서 파티를 했어. 아버지와 아버지 비서와 삼촌, 그 밖의 회사고 위직원들과."

플러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는 내 생일이기도 했어. 그런데 모두들 회사이야기만 했어. 아버지는 나에게 곁눈들도 하지 않았어. 언제나 그랬지. 선생님이 나한테 잘 해주시는 것도 부담스러워. 아니, 싫어. 가증스러워. 분명히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았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마이너스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나를 꾸짓지 않아. 나는 마이너스가 부러워. 차라리 녀석처럼 구박받는 게 편해. 아이들 시선도 이상해. 어머니가 보고싶어."

녀석은 울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흑흑' 진득하게도 울었다. 문득, 어젯밤 포장마차 속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까닭은 왜인지 모르겠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현재. 아이들이 나를 놀리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은 셀로판지를 눈에 붙이고 있다. 왼쪽 눈은 빨간색, 오른쪽 눈은 초록색.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시 삼십 분 현재. 신체검사를 했다. 몸무게, 키, 구강검사, 건강검사, 그리고 시력검사. 나는 적록색맹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오늘만이 아니었다. 1997년에도 1998년에도 1999년……2003년에도 나는 적록색맹이라는 판정을 받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내 손을 놀렸다. 내 손에는 빨간색 색연필과 초록색 색연필이 들려있다. 나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들은 알면서도 나를 놀렸다. 적록색맹이라고 해서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통사람보다 분별능력이 떨어질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면서도 놀렸다.

나는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 지금도 만화를 그리고 있다. 나는 양 눈에 색로판지를 붙이고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그 녀석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녀석을 그리려고 의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리다가 보니 양 눈이 각각 적록색인 괴물이 그려졌고, 나는 이 그림을 지우려다가 알았다.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캐릭터는 좀처럼 그려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녀석의 이름은 플러스다. 녀석은 지금 빨간색 셀로판지만 눈에 붙이고 있다. 초록색 셀로판지는 어딘가 떨어뜨렸나보다. 교실바닥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다. 누군가가 초록색 셀로판지를 찾아서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에 대어본다. 녀석의 눈의 흰자위가 녹색으로 보인다. 녀석의 이름은 마이너스다.

플러스의 마이너스는 나의 친구들이다. 녀석들은 종종 나에게 말못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사이가 나쁘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부러워하는 듯 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한 시 오십 분 현재. 담임 선생님께서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신 후, 우리를 한번 부드럽게 훑어보신다. 그리곤 물으셨다.

"선생님 좀 볼까?"

"네."

그들의 부탁과 긍정의 대답은 상당히 익숙했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플러스는 선생님을 따라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 올 것이다.

선생님께서 플러스의 어깨를 보듬으며 교실을 나서가사 멈칫 하신다.

"오늘 주번 누구야?"

"저요."

"그리고 또."

둘 중 한 명은 마이너스였다. 선생님은 마이너스를 노려보며 말씀하셨다.

"똑바로 못해? 칠판 꼴이 이게 뭐야? 그리고 교실 바닥은 왜이래? 청소 빨리 해놓고 밥 먹도록 해."

마이너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빗자루를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과 플러스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 시 십 분 현재. 야간자습이 끝난지 10분이 지났다. 나는 지금 마이너스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운동장에 엎인 어둠이 커피의 향기 만큼이나 진하다. 후루룩. 마이너스가 한 모금 들이켰다. 녀석은 마치 쓰디쓴 소주를 마신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곤 '크' 하는 소리 대신 주절주절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나를 싫어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물었다.

"플러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G그룹의 회상이잖아. 나는 소방관의 아들이고. 선생님은 녀석의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은 거야. 그래서 녀석은 매일같이 점심을 공짜로 얻어먹잖아."

녀석은 빈 종이컵 속에서 커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한달째 집에 들어오지 않으였어. 어머니는 회사에 다니셔."

나는 그때 위쪽에 있는 화단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녀석의 아버지 회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에잇! 가자."

마이너스는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도 엉덩이를 털며 느릿느릿 뒤를 따르는데, 다시 화단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가 운동장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그 날 나는 밤늦게까지 마이너스와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녀석과 헤어진 후, 집에 가는 길에 작은 포장마차를 지나다가 담임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 옆에는 낯선 아저씨가 소주를 들이키며 뭐라고 주절대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다. 어두운 밤에는 정말이지 색깔 구분이 어렵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여섯 시 삼십 분 현재.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다가 잠깐 TV를 틀어보았다. TV에는 플러스의 아버지가 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번쩍번쩍. 1초에도 수십 번씩 번갯불 같은 플래시가 벗겨진 머리에서 번득였다. 플러스의 아버지는 보통사람보다 두 배는 뚱뚱했다. 뉴스를 틀어보니 이번에 신상품을 개발한 것이 크게 히트를 쳤단다. 외국에 수출도 할 것이며 국내시장에서도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TV를 껐다. 그리고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플러스가 일찍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일곱 시 삼십 분 현재.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0교시가 폐지되면서 등교시간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뒷문에 플러스가 서있었다.

"나랑 이야기 좀 해."

플러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주었다. 커피의 첫 잔은 언제나 쓰다. 하지만, 마지막 한 모금은 달콤하다.

"어제 밤에 화단에 있었던 게 너였니?"

내가 물었다.

"난 어제 집에 있었어."

나는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시 십오 분에 본 그림자가 분명히 플러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럼 누구였을까?

"어제 집에서 파티를 했어. 아버지와 아버지 비서와 삼촌, 그 밖의 회사고 위직원들과."

플러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는 내 생일이기도 했어. 그런데 모두들 회사이야기만 했어. 아버지는 나에게 곁눈들도 하지 않았어. 언제나 그랬지. 선생님이 나한테 잘 해주시는 것도 부담스러워. 아니, 싫어. 가증스러워. 분명히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았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마이너스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나를 꾸짓지 않아. 나는 마이너스가 부러워. 차라리 녀석처럼 구박받는 게 편해. 아이들 시선도 이상해. 어머니가 보고싶어."

녀석은 울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흑흑' 진득하게도 울었다. 문득, 어젯밤 포장마차 속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까닭은 왜인지 모르겠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열한 시 오전 오십 분 현재. 담임선생님꼐서 들어오셨다. 역시 하시던 그 말씀을 하셨다. 물론 플러스에게만.

"선생님 좀 볼까?"

"선생님, 오늘은 그냥 혼자 먹을게요."

"뭐야?"

플러스는 성생님을 거절했다. 선생님은 한숨을 쉬었다.

"누구야?"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플러스보고 뭐라고 그런 놈이 누구야?"

"선생님, 아무도 저보고 뭐라 그러지 않았어요. 전 그냥……."

플러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제가요. 이건 정당하지 못해요. 선생 님은 교권을 교묘하게 이용했어요. 플러스의 아버지에게서 얼마를 받았죠?"

마이너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선생님을 노려보며 기어코 그것을 말하고 만 것이었다.

"그래, 너일 줄 알았다. 교무실로 따라와. 그리고 플러스는 선생님 차 옆에 가서 서있어."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열 두 시 이십 분 현재. 마이너스가 들어왔다. 녀석은 다리를 절뚝거렸다. 그리고 시뻘건 손바닥을 힘없이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마이너스는 그 날 밤에도 나에게 커피를 사주었다. 녀석은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말했다.

"복수 할 꺼야."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전 여덟 시 이십 분 현재. 조례시간에 선생님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인터넷에 '폭력교사' '교권악용'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전 열한 시 오십 분 현재. 선생님은 또 들어오지 않으셨다. 플러스는 점심을 굶었다. 마이너스는 그런 플러스를 보며 의외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눈빛에서 회의감이 회색 느껴졌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후 아홉 시 십오 분 이십 현재. 마이너스는 또 울었다.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한 것인지 모르겠어? 원하는 대로 됐는데 왜 이런 거지?"

녀석은 그렇게 5분을 더 목놓아 울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후 아홉 시 이십칠일 오후 아홉 시 이십 분현재. '띠리리링' 하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마이너스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자그마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앗! 어머니, 웬일이세요."

툭. 녀석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왜 그래?"

"아버지가. 아버지가……나 먼저 가 볼게"

마이너스는 갑자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쳤는가 싶던 울음을 녀석은 다시 터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울었던 중에 가장 서럽게 절규하고 있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십일월 이십팔일 오전 여섯 시 삼십분 현재.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TV를 틀었다. 그리고 놀랐다. G그룹 회장 즉, 플러스의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화면에서 소방차들이 여럿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고, 수많은 소방관들이 불을 끄고 있었다.

"P회장은 목숨을 잃기 직전에 N구조대원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현재 같은 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며……."

화면에는 한 구조대원이 빨간 옷을 입고 플러스의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들은 곧 구급차에 태워졌고, TV화면이 바뀌며 방송 아나운서들의 얼굴만 나왔다. 나는 TV를 껐다.

나는 분명히 N구조대원을 본적이 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열한 시쯤, 울고 있던 담임선생님 옆에서 술을 마시던 아저씨였다. 나는 이천 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후 아홉 시 이십 분에 울면서 급하게 달려가던 마이너스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팔일. 그날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담임선생님. 3명이 신선경 학교에 오지 않았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구일 오전 여섯 시 삽십 분 현재. 일요일이다. 이른시간인데 웬일인지 전화벨소리가 집안을 크게 울렸다.

"여보세요. 응? 어떻게 된 거죠?"

전화가 걸려온 곳은 플러스의 아버지와 마이너스의 아버지가 나란히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왠지 밝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주말에는 늘 아침과 점심의 중간쯤 되는 시간에 라면과 신김치로 끼니를 때웠었는데, 오늘은 외식하게 될 듯하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구일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현재. S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제법 컸다. 병원 전체에 칠해진 흰 페인트는 티끌하나 없이 깨끗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202호실에 들어가니 뜻밖의 광경이 눈에 펼쳐졌다. 담임선생님, 플러스, 마이너스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누워있는 두 환자는 떨어져 있는 침대 위에서 애써 손을 뻗어, 맞잡고 있었다. 그들 중 아마 한 명은 플러스의 아버지, 한 명은 마이너스의 아버지일 것이다.

괴테는 명쾌하다.

“남을 아주 잘 설득하는 사람이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 좌절감에 자살한다. …어떻게 생각해? 좀 웃기지 않아?”

“……”

갑작스런 은경이의 질문에 하마터면 라면을 코로 먹을 뻔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저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던지는 질문은 매번 나를 당황하게 한다. 질문에 대해 고민을 해보면 꽤 흥미롭긴 하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외계인의 언어처럼 아주 막연하게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이번 건도 그렇다. 방학이라 집 안에 혼자 있기 심심하다고 날 불러내선 기껏 찾은 곳이 분식집인 것도 모자라, 자신의 엉뚱한 생각을 함께 고민하길 권하고 있는 것이다. 라면이나 계속 먹자고 말하고 싶지만, 가뜩이나 귀여운 외모에, 생각에 열중하고 있는 은경이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그런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덕분에 난 입 속으로 줄줄이 들어오던 면발을 아쉽게 끊어야했다. 그래도 이번 질문은 그리 막연하지만은 않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어두길 잘 했지. 은경이와 친구사이를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독서량을 더 늘려야 할 것 같다.

“별로. 흥미롭긴 한데, 웃기진 않아. 남의 일 같지 않거든. 우리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어. 예컨대, 수능 시험 날 첫 교시 언어영역 시험을 치른 후 창문 밖으로 직접 몸을 날려 자유낙하 실험을 하는 녀석들.”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은경이는 나의 대답이 무척 흥미로운 모양이다. 얼굴을 나에게 가까이 들이밀며 무척 호기심 충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럴 땐 정말 기분이 좋다니까.

“자신을 합리화하지 못한 거지. 나는 이거 밖에 안 된다.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내 인생은 불행하다. …등등의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거야. 목표도 상실해버리고, 삶의 의미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거지. 결국…그렇게 되는 거고.”

나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라면에 젓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퉁퉁 불어버린 면은 젓가락이 닿기만 해도 끊어졌다.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할 판이다. 국물도, 아직 따뜻하긴 하지만, 뜨겁고 얼큰한 맛을 즐기는 나의 미각을 만족시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갑자기 신경질이 났다. 저 계집애 때문에…….

“너 꽤 그럴싸하게 말한다. 아무튼,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

“그런데, 뭐?”

“넌,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아주 태연하게 하네.”

은경이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난감한데.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라면 식은 일로 짜증낼 수도 없고.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지. 난 나를 잘 알아. 내 수명이 만약에 500년을 넘어가도, 살아있는 동안 자살 따윈 꿈도 꾸지 않을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난 자기합리화에 익숙하거든. 사람이라면 보통은 누구나 그래.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지. 은경이 넌 꽤 신기한 유형이라서 잘 모르겠는데.”

난 소리죽여 웃었다. 은경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무슨…….”

은경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수로 아쉬운 입맛을 헹구고, 역시 거의 먹지 않아 퉁퉁 불은 은경이의 라면까지 계산했다. 은경이는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내가 계산하는 게 당연하다 이거지. 얄밉다.

“서점으로 자리 옮기자. 보여줄 책이 있어.”

내가 말했다.

은경이는 그때서야 일어났다.

분식집을 나서며 난 은경이에게 어째서 그런 의문을 품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요즘 들어 인터넷 뉴스에 자주 뜨는 소식이 있잖아. 대기업 회장 자살, 가족 집단 자살, 또 여고생…….”

은경이는 말끝을 흐렸다.

“여고생 뭐?”

“아무것도 아냐.”

말끝을 흐리는 은경이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당황한 나는 은경이이게, 의문을 품게 된 원인들이 그 질문과 다소 거리가 있지 않느냐고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게다가 우린 어느새 서점 근처까지 와있었다.

“나에게 보여줄 책이 뭔데?”

서점 문을 열며 은경이가 물었다. 어서오세요. 서점에 들어서자 인상이 좋은 서점 주인이 우릴 반긴다. 큰 안경 속의 눈웃음이 정말 보기 좋은 아저씨다.

“그리 재밌는 책은 아니야. 나도 다 읽어본 건 아니고…사회심리학의 이해.”

“정말 재미없는 책이네. 근데 다 읽어보지도 않았다면서 나에게 권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읽은 그 한 부분이 너에게 도움이 될 것 같거든.”

나는 은경이를 ‘사회심리학의 이해’가 있는 인문사회과학 코너로 안내했다. 인문사회과학 코너는 소설 코너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커다란 벽거울이 하나 걸려있다. 그리고 인문사회과학 코너 옆에는 육아에 관한 서적이 모여 있다. 육아서적 코너에는 젊은 임산부 한 명이 책을 고르고 있다. 난 책을 먼저 뽑아놓기 위해 앞장섰다. 그런데 갑자기 은경이가 벽거울이 걸려있는 앞에서 멈추었다.

“저게 뭐지?”

은경이가 손가락으로 벽거울의 위쪽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작은 글씨로 무언가 적혀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괴테는 언제나 명쾌하다.”

난 글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괴테.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안 읽어봤냐?”

“응.”

“독서 좀 해라.”

“너 잘 났다. 그래서, 괴테가 누군데?”

“독일 출신 문학가야. 시, 소설, 희곡,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 일곱 가지 문체를 소화한 천재라고 불리기도 해.”

“천재는 언제나 명쾌하다, 이렇게 바꿔 읽어도 되겠네?”

“글쎄, 그거야 네 마음이지. 그나저나 저 글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난 팔짱을 끼고 기억을 되살리려 끙끙거렸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에서 홈즈가 한 말이다. 적어도 ‘괴테는 언제나 명쾌하다’는 홈즈가 직접 한 말이지. 앞에 것은 작가가 인용한 것일 게야.”

서점 아저씨였다.

“난 코난 도일 아니, 셜록 홈즈 광팬이야. 홈즈도 천재지. 천재 탐정.”

아저씨는 껄껄 웃으셨다. 첫 인상만큼이나 기분 좋은 웃음이다.

“그나저나 정말 공감이 가는데요. 자신이 모르는 것을 경멸하는 버릇. 저도 그런 적이 많거든요.”

내가 말했다.

“누구나 그래. 경험하지 못한 것은 자기에 맞춰 합리화하기가 불가능하거든.”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기합리화.”

“그렇지.”

난 아저씨를 향해 웃어보였다.

은경이는 나와 서점주인 아저씨가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다. 빨리 책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할게요.”

“그래, 천천히 골라봐.”

아저씨는 다시 계산대로 갔고, 난 은경이를 이끌고 인문사회과학 코너로 갔다.

‘사회심리학의 이해’는 잘 보이는 장소에 있어서 쉽게 찾았다. 난 97페이지 ‘자기합리화’를 펼쳤다. 그리고 은경이에게 보여줬다. 은경이는 약 5분 동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니까, ‘합리화’라는 건 ‘내적귀인’보다 ‘외적귀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

은경이가 말했다.

“귀인이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를 의미하지. ‘내적귀인’은 원인을 자신에게 두는 거고, ‘외적귀인’은 외부의 요소에 두는 거야. 네 말처럼 자기합리화는 외적귀인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지. 부정적인 사건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면 좋지 않은 현상으로 보는 것이 우리의 시각이라고, 거기 써있지?”

“응.”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자기합리화라는 건 애초에 ‘귀인’이란 의미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해.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지만, ‘안 되면 내 탓, 잘 되면 조상 탓’이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무튼, 그런 건 모두 집어치우고, 난 ‘자기합리화’라는 것을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을 자기에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 좋을 대로’라 이거지 뭐. 어쩌다 읽긴 했지만, 난 그렇게 딱딱한 책이 싫어.”

난 그 책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나도 이 책보단 네 설명이 더 알아듣기 쉬운걸.”

은경이가 책을 다시 꽂으며 말했다.

“설명이 아냐. 생각이지.”

“말꼬투리 잡지 마.”

"네가 잘못 말했잖아."

“시끄러, 책 좀 읽었다고 잘난 척하지마 공부는 나보다 못하는 주제에. 흥!”

은경이는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성적이야기를 꺼내다니. 은경이와 나는 한동안 티격태격 말싸움을 했다. 그 덕에 옆 코너에서 책을 고르던 임산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걸 눈치체지 못했다.

“저기…혹시 은경이니?”

내 뒤에서 그 임산부가 말했다. 은경이를 아는 사람 같았다. 친척인가.

“엇! 지연아. 여긴 웬일이야?”

은경이가 그 임산부를 알아보곤 굉장히 반가워했다. 그런데 지연아, 라니. 존댓말이 아니잖아. 무슨 사이지.

“인사해 이쪽은 내 친구 동혁이. 동혁아, 너도 인사해. 우리 학교에서 나랑 가장 친한 친구 지연이야.”

“치, 친구?”

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버렸다. 세상에! 임산부가 친구라니. 그럼……. 난 당황해서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나름대로 상황파악을 한 후, 다시 둘의 얼굴을 보고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은경이는 무척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지연이라는 친구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 이거 미안한데. 나도 모르게 당황해버렸어.”

난 정말 미안해서 뒤통수를 긁적이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자기합리화 어쩌고 하며 잘난 척하더니, 너야 말로 무의식중에 네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멸하고 있었잖아.”

“미안해…….”

난 은경이에게 할 말이 없었다.

“됐어. 그만해 은경아. 네 친구는 아주 착한 거야. 날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손가락질에 욕을 해대거든. 사과도 안 해.”

지연이는 눈물을 훔치며 애써 웃어보였다.

“지연아…….”

은경이도 눈물을 글썽였다. 유치원 다닐 때도 은경이의 눈물을 본 적이 거의 없는데…오늘은 은경이의 낯선 모습을 너무 많이 접한다.

“은경아, 나 엄마가 되기로 했어. 물론, 대학은 포기해야지. 일단 애부터 낳고…….”

“네 남편은?”

“덕환이도 찬성했어. 시어머니는 반대했지만, 덕환이가 대학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자 승낙하셨어. 환이가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양육비는 친정과 시댁에서 공평하게 부담하기로 했고.”

“휴, 다행이다. 그런데 지연이 너 여검사가 되고 싶다고 공부 열심히 했잖아. 수능 점수도 그런대로 잘 나왔다며?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어. 참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가진 아인데, 이 아이가 이젠 내 꿈이 되었어. 그렇다고 얘를 검사로 키우겠다는 건 아냐. 깔깔, 내 새로운 꿈은 좋은 엄마가 되는 거야.”

지연이는 불룩하게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은경이는 뭔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지연이의 배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은경아, 난 이만 가볼게. 육아 책도 골랐고. 그럼, 데이트 잘 해!”

지연이는 은경이에게 귓속말로 – 다 들렸다. – ‘힘내!’라고 외치고 나에게도 손을 흔들어주곤 계산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은경이의 볼은 빨갛게 변해있었다. 아마 내 볼도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연이가 서점을 나간 후, 나와 은경이도 딱히 살 책은 없었기에 주인아저씨께 인사를 하고 서점을 나왔다.

“지연이는 사흘 전에 나에게 전화해서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어. 아니, 그땐 정말 자살할 것만 같았지. 난 무서웠어. 그리고 오늘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어. 불안한 마음에 어쩌다 너한테 연락을 하게 된 거야. 착각은 하지 마. 연락이 된 친구가 너 밖에 없었던 것뿐이니까.”

말을 마친 은경이가 내 반대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했던 거구나. 그런데 지연이라는 친구가 남을 잘 설득했나보지?”

내가 물었다.

“설득…그건 그냥 예를 든 거야. 지연이는, 아까도 들었다시피 꿈이 컸고 또 노력도 많이 하는 녀석이었어. 나에게도 자주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지. 지연이는 의도한 게 아니었겠지만, 난 나도 모르게 지연이에게 ‘설득’당하고 있었던 거야. 지연이를 보고 자극을 받아 열심히 공부했거든. 그런데 그 지연이가 자살을 하겠다는 거야. 자신을 설득하지 못해서. 그런데 내가 볼 땐 지금도 지연이는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 거 같아. 그 큰 꿈을 버리고 ‘좋은 엄마’라니.”

은경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은경이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란 표정은 다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글쎄, 내가 보기엔 잘 ‘설득’한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어째서?”

은경이가 따지듯 물었다.

“자살하겠다고 했다며? 그렇게 극한 상황까지 몰린 상태를 벗어났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지. 어차피 애를 낳아 기르려면 고시공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 게다가 그 ‘남편’도 대학을 다니겠다고 했고. 부부가 모두 대학에 진학해버리면 애는 어떻게 되겠냐? 엄마 젖이냐 제대로 마셔보겠냐 말이야. 그 애는 자신의 상황에서 나름대로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한 게 아닐까?”

내가 대답했다.

“자기합리화?”

“그렇지”

“흠…지연이의 경우엔 ‘외적귀인’이겠네? 원인이 밖에 있으니까.”

은경이가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리는 듯 눈알을 굴렸다.

“아니. 내적귀인도 외적귀인도 아냐. 그냥 자기가 끌리는 대로 한 거야. ‘귀인’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야,”

“시끄러. 난 외적귀인이라고 생각할 거야. 난 지금의 지연이가 못마땅하다구.”

은경이와 난 또 한바탕 크게 말싸움을 벌였다. 길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지나갔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나중엔 목이 쉴 지경이었다. 은경이도 체력이 다 됐나보다.

“우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번엔 라면 먹지 말고 김밥 먹자. 아까 네가 샀으니 이번엔 내가 살게.”

은경이가 다시 분식집에 갈 것을 제안했다. 점심을 시원찮게 먹어, 나도 배가 고팠기에 찬성했다.

우리는 아까 그 분식집에 다시 들렀다. 그리고 김밥과 떡볶이를 배불리 먹고 나왔다.

“치, 내가 돈이 더 많이 나왔어. 점심 땐 라면 한 그릇씩 밖에 안 먹었는데. 김밥 4인분, 떡볶이 4인분이라니.”

은경이는 지갑에 거스름돈을 넣으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네가 먼저 사겠다고 약속했으니까. 하하하!”

난 통쾌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웃다가 보니 도로 건너편에 낯익은 얼굴의 주인공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거…지연이 아냐?”

내 말에 은경이도 급히 도로 건너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정말이네. 저 옆에 있는 남자애가 그 덕환이라는 애구나. 그나저나 행복해 보인다.”

은경이는 감상에 빠진 듯했다. 지연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주 부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큰 꿈을 버렸다고 안타까워하더니, 그래도 친구가 행복한 모습에 안심이 되나보다. 성격이 거칠어서 그렇지 은경이는 역시 착하다. 멍한 표정으로 지연이의 행복한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은영이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오른손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로 향했다. 그리고 손을 어깨에 올리는 순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현재. 아이들이 나를 놀리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은 셀로판지를 눈에 붙이고 있다. 왼쪽 눈은 빨간색, 오른쪽 눈은 초록색.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시 삼십 분 현재. 신체검사를 했다. 몸무게, 키, 구강검사, 건강검사, 그리고 시력검사. 나는 적록색맹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오늘만이 아니었다. 1997년에도 1998년에도 1999년……2003년에도 나는 적록색맹이라는 판정을 받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내 손을 놀렸다. 내 손에는 빨간색 색연필과 초록색 색연필이 들려있다. 나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들은 알면서도 나를 놀렸다. 적록색맹이라고 해서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통사람보다 분별능력이 떨어질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면서도 놀렸다.

나는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 지금도 만화를 그리고 있다. 나는 양 눈에 색로판지를 붙이고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그 녀석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녀석을 그리려고 의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리다가 보니 양 눈이 각각 적록색인 괴물이 그려졌고, 나는 이 그림을 지우려다가 알았다.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캐릭터는 좀처럼 그려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녀석의 이름은 플러스다. 녀석은 지금 빨간색 셀로판지만 눈에 붙이고 있다. 초록색 셀로판지는 어딘가 떨어뜨렸나보다. 교실바닥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다. 누군가가 초록색 셀로판지를 찾아서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에 대어본다. 녀석의 눈의 흰자위가 녹색으로 보인다. 녀석의 이름은 마이너스다.

플러스의 마이너스는 나의 친구들이다. 녀석들은 종종 나에게 말못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사이가 나쁘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부러워하는 듯 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한 시 오십 분 현재. 담임 선생님께서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신 후, 우리를 한번 부드럽게 훑어보신다. 그리곤 물으셨다.

"선생님 좀 볼까?"

"네."

그들의 부탁과 긍정의 대답은 상당히 익숙했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플러스는 선생님을 따라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 올 것이다.

선생님께서 플러스의 어깨를 보듬으며 교실을 나서가사 멈칫 하신다.

"오늘 주번 누구야?"

"저요."

"그리고 또."

둘 중 한 명은 마이너스였다. 선생님은 마이너스를 노려보며 말씀하셨다.

"똑바로 못해? 칠판 꼴이 이게 뭐야? 그리고 교실 바닥은 왜이래? 청소 빨리 해놓고 밥 먹도록 해."

마이너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빗자루를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과 플러스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 시 십 분 현재. 야간자습이 끝난지 10분이 지났다. 나는 지금 마이너스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운동장에 엎인 어둠이 커피의 향기 만큼이나 진하다. 후루룩. 마이너스가 한 모금 들이켰다. 녀석은 마치 쓰디쓴 소주를 마신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곤 '크' 하는 소리 대신 주절주절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나를 싫어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물었다.

"플러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G그룹의 회상이잖아. 나는 소방관의 아들이고. 선생님은 녀석의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은 거야. 그래서 녀석은 매일같이 점심을 공짜로 얻어먹잖아."

녀석은 빈 종이컵 속에서 커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한달째 집에 들어오지 않으였어. 어머니는 회사에 다니셔."

나는 그때 위쪽에 있는 화단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녀석의 아버지 회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에잇! 가자."

마이너스는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도 엉덩이를 털며 느릿느릿 뒤를 따르는데, 다시 화단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가 운동장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그 날 나는 밤늦게까지 마이너스와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녀석과 헤어진 후, 집에 가는 길에 작은 포장마차를 지나다가 담임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 옆에는 낯선 아저씨가 소주를 들이키며 뭐라고 주절대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다. 어두운 밤에는 정말이지 색깔 구분이 어렵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여섯 시 삼십 분 현재.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다가 잠깐 TV를 틀어보았다. TV에는 플러스의 아버지가 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번쩍번쩍. 1초에도 수십 번씩 번갯불 같은 플래시가 벗겨진 머리에서 번득였다. 플러스의 아버지는 보통사람보다 두 배는 뚱뚱했다. 뉴스를 틀어보니 이번에 신상품을 개발한 것이 크게 히트를 쳤단다. 외국에 수출도 할 것이며 국내시장에서도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TV를 껐다. 그리고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플러스가 일찍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일곱 시 삼십 분 현재.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0교시가 폐지되면서 등교시간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뒷문에 플러스가 서있었다.

"나랑 이야기 좀 해."

플러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주었다. 커피의 첫 잔은 언제나 쓰다. 하지만, 마지막 한 모금은 달콤하다.

"어제 밤에 화단에 있었던 게 너였니?"

내가 물었다.

"난 어제 집에 있었어."

나는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시 십오 분에 본 그림자가 분명히 플러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럼 누구였을까?

"어제 집에서 파티를 했어. 아버지와 아버지 비서와 삼촌, 그 밖의 회사고 위직원들과."

플러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는 내 생일이기도 했어. 그런데 모두들 회사이야기만 했어. 아버지는 나에게 곁눈들도 하지 않았어. 언제나 그랬지. 선생님이 나한테 잘 해주시는 것도 부담스러워. 아니, 싫어. 가증스러워. 분명히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았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마이너스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나를 꾸짓지 않아. 나는 마이너스가 부러워. 차라리 녀석처럼 구박받는 게 편해. 아이들 시선도 이상해. 어머니가 보고싶어."

녀석은 울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흑흑' 진득하게도 울었다. 문득, 어젯밤 포장마차 속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까닭은 왜인지 모르겠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현재. 아이들이 나를 놀리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은 셀로판지를 눈에 붙이고 있다. 왼쪽 눈은 빨간색, 오른쪽 눈은 초록색.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시 삼십 분 현재. 신체검사를 했다. 몸무게, 키, 구강검사, 건강검사, 그리고 시력검사. 나는 적록색맹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오늘만이 아니었다. 1997년에도 1998년에도 1999년……2003년에도 나는 적록색맹이라는 판정을 받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내 손을 놀렸다. 내 손에는 빨간색 색연필과 초록색 색연필이 들려있다. 나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들은 알면서도 나를 놀렸다. 적록색맹이라고 해서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통사람보다 분별능력이 떨어질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면서도 놀렸다.

나는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 지금도 만화를 그리고 있다. 나는 양 눈에 색로판지를 붙이고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그 녀석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녀석을 그리려고 의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리다가 보니 양 눈이 각각 적록색인 괴물이 그려졌고, 나는 이 그림을 지우려다가 알았다.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캐릭터는 좀처럼 그려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녀석의 이름은 플러스다. 녀석은 지금 빨간색 셀로판지만 눈에 붙이고 있다. 초록색 셀로판지는 어딘가 떨어뜨렸나보다. 교실바닥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다. 누군가가 초록색 셀로판지를 찾아서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에 대어본다. 녀석의 눈의 흰자위가 녹색으로 보인다. 녀석의 이름은 마이너스다.

플러스의 마이너스는 나의 친구들이다. 녀석들은 종종 나에게 말못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사이가 나쁘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부러워하는 듯 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전 열한 시 오십 분 현재. 담임 선생님께서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신 후, 우리를 한번 부드럽게 훑어보신다. 그리곤 물으셨다.

"선생님 좀 볼까?"

"네."

그들의 부탁과 긍정의 대답은 상당히 익숙했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플러스는 선생님을 따라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 올 것이다.

선생님께서 플러스의 어깨를 보듬으며 교실을 나서가사 멈칫 하신다.

"오늘 주번 누구야?"

"저요."

"그리고 또."

둘 중 한 명은 마이너스였다. 선생님은 마이너스를 노려보며 말씀하셨다.

"똑바로 못해? 칠판 꼴이 이게 뭐야? 그리고 교실 바닥은 왜이래? 청소 빨리 해놓고 밥 먹도록 해."

마이너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빗자루를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과 플러스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 시 십 분 현재. 야간자습이 끝난지 10분이 지났다. 나는 지금 마이너스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운동장에 엎인 어둠이 커피의 향기 만큼이나 진하다. 후루룩. 마이너스가 한 모금 들이켰다. 녀석은 마치 쓰디쓴 소주를 마신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곤 '크' 하는 소리 대신 주절주절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나를 싫어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물었다.

"플러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G그룹의 회상이잖아. 나는 소방관의 아들이고. 선생님은 녀석의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은 거야. 그래서 녀석은 매일같이 점심을 공짜로 얻어먹잖아."

녀석은 빈 종이컵 속에서 커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한달째 집에 들어오지 않으였어. 어머니는 회사에 다니셔."

나는 그때 위쪽에 있는 화단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녀석의 아버지 회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에잇! 가자."

마이너스는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도 엉덩이를 털며 느릿느릿 뒤를 따르는데, 다시 화단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가 운동장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그 날 나는 밤늦게까지 마이너스와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녀석과 헤어진 후, 집에 가는 길에 작은 포장마차를 지나다가 담임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 옆에는 낯선 아저씨가 소주를 들이키며 뭐라고 주절대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다. 어두운 밤에는 정말이지 색깔 구분이 어렵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여섯 시 삼십 분 현재.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다가 잠깐 TV를 틀어보았다. TV에는 플러스의 아버지가 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번쩍번쩍. 1초에도 수십 번씩 번갯불 같은 플래시가 벗겨진 머리에서 번득였다. 플러스의 아버지는 보통사람보다 두 배는 뚱뚱했다. 뉴스를 틀어보니 이번에 신상품을 개발한 것이 크게 히트를 쳤단다. 외국에 수출도 할 것이며 국내시장에서도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TV를 껐다. 그리고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플러스가 일찍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일곱 시 삼십 분 현재.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0교시가 폐지되면서 등교시간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뒷문에 플러스가 서있었다.

"나랑 이야기 좀 해."

플러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주었다. 커피의 첫 잔은 언제나 쓰다. 하지만, 마지막 한 모금은 달콤하다.

"어제 밤에 화단에 있었던 게 너였니?"

내가 물었다.

"난 어제 집에 있었어."

나는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시 십오 분에 본 그림자가 분명히 플러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럼 누구였을까?

"어제 집에서 파티를 했어. 아버지와 아버지 비서와 삼촌, 그 밖의 회사고 위직원들과."

플러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는 내 생일이기도 했어. 그런데 모두들 회사이야기만 했어. 아버지는 나에게 곁눈들도 하지 않았어. 언제나 그랬지. 선생님이 나한테 잘 해주시는 것도 부담스러워. 아니, 싫어. 가증스러워. 분명히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았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마이너스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나를 꾸짓지 않아. 나는 마이너스가 부러워. 차라리 녀석처럼 구박받는 게 편해. 아이들 시선도 이상해. 어머니가 보고싶어."

녀석은 울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흑흑' 진득하게도 울었다. 문득, 어젯밤 포장마차 속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까닭은 왜인지 모르겠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열한 시 오전 오십 분 현재. 담임선생님꼐서 들어오셨다. 역시 하시던 그 말씀을 하셨다. 물론 플러스에게만.

"선생님 좀 볼까?"

"선생님, 오늘은 그냥 혼자 먹을게요."

"뭐야?"

플러스는 성생님을 거절했다. 선생님은 한숨을 쉬었다.

"누구야?"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플러스보고 뭐라고 그런 놈이 누구야?"

"선생님, 아무도 저보고 뭐라 그러지 않았어요. 전 그냥……."

플러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제가요. 이건 정당하지 못해요. 선생 님은 교권을 교묘하게 이용했어요. 플러스의 아버지에게서 얼마를 받았죠?"

마이너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선생님을 노려보며 기어코 그것을 말하고 만 것이었다.

"그래, 너일 줄 알았다. 교무실로 따라와. 그리고 플러스는 선생님 차 옆에 가서 서있어."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육일 오전 열 두 시 이십 분 현재. 마이너스가 들어왔다. 녀석은 다리를 절뚝거렸다. 그리고 시뻘건 손바닥을 힘없이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마이너스는 그 날 밤에도 나에게 커피를 사주었다. 녀석은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말했다.

"복수 할 꺼야."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전 여덟 시 이십 분 현재. 조례시간에 선생님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인터넷에 '폭력교사' '교권악용'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전 열한 시 오십 분 현재. 선생님은 또 들어오지 않으셨다. 플러스는 점심을 굶었다. 마이너스는 그런 플러스를 보며 의외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눈빛에서 회의감이 회색 느껴졌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후 아홉 시 십오 분 이십 현재. 마이너스는 또 울었다.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한 것인지 모르겠어? 원하는 대로 됐는데 왜 이런 거지?"

녀석은 그렇게 5분을 더 목놓아 울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후 아홉 시 이십칠일 오후 아홉 시 이십 분현재. '띠리리링' 하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마이너스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자그마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앗! 어머니, 웬일이세요."

툭. 녀석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왜 그래?"

"아버지가. 아버지가……나 먼저 가 볼게"

마이너스는 갑자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쳤는가 싶던 울음을 녀석은 다시 터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울었던 중에 가장 서럽게 절규하고 있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십일월 이십팔일 오전 여섯 시 삼십분 현재.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TV를 틀었다. 그리고 놀랐다. G그룹 회장 즉, 플러스의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화면에서 소방차들이 여럿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고, 수많은 소방관들이 불을 끄고 있었다.

"P회장은 목숨을 잃기 직전에 N구조대원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현재 같은 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며……."

화면에는 한 구조대원이 빨간 옷을 입고 플러스의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들은 곧 구급차에 태워졌고, TV화면이 바뀌며 방송 아나운서들의 얼굴만 나왔다. 나는 TV를 껐다.

나는 분명히 N구조대원을 본적이 있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오일 오후 열한 시쯤, 울고 있던 담임선생님 옆에서 술을 마시던 아저씨였다. 나는 이천 사 년 십일월 이십칠일 오후 아홉 시 이십 분에 울면서 급하게 달려가던 마이너스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팔일. 그날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담임선생님. 3명이 신선경 학교에 오지 않았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구일 오전 여섯 시 삽십 분 현재. 일요일이다. 이른시간인데 웬일인지 전화벨소리가 집안을 크게 울렸다.

"여보세요. 응? 어떻게 된 거죠?"

전화가 걸려온 곳은 플러스의 아버지와 마이너스의 아버지가 나란히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왠지 밝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주말에는 늘 아침과 점심의 중간쯤 되는 시간에 라면과 신김치로 끼니를 때웠었는데, 오늘은 외식하게 될 듯하다.

이천사 년 십일월 이십구일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현재. S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제법 컸다. 병원 전체에 칠해진 흰 페인트는 티끌하나 없이 깨끗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202호실에 들어가니 뜻밖의 광경이 눈에 펼쳐졌다. 담임선생님, 플러스, 마이너스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누워있는 두 환자는 떨어져 있는 침대 위에서 애써 손을 뻗어, 맞잡고 있었다. 그들 중 아마 한 명은 플러스의 아버지, 한 명은 마이너스의 아버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