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광경의 눈이었던 시점을 빌자면
- 작성일 201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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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민서란 여인, 우빈 역시 좋아한다. 우리는 같은 학원에 다닌다. 10개가 넘는 지점을 보유한 피아노 학원이다. 개인 연습실이 독방처럼 마련된 곳이다. 1:1 개인 레슨 4회, 연습실 무제한 이용이 월 19만원인 곳이다. 자체 교재가 있어 치고 싶은 곡을 치고 그랜드 피아노에서 자신이 친 연주를 녹음할 수 있는 곳이다. 소모임, 정기연주회, 엠티 등이 개최되고 가끔 프러포즈나 이벤트가 처음 본 남자에 의해 주최되고 우리는 일제 강점기 징용된 군인처럼 타인의 결혼을 돕는 곳이다. 독서를 위한 공간, 보드 게임 하는 공간, 카페까지 겸비한 곳이다. 이미 몇몇 연인은 청첩장을 피아노 위에 올린 적이 있다. 민서의 팔짱을 낀 채 식장에 들어선 우빈은 나를 아는 체 만 체 하곤 했다. 낮 12시에 연 학원은 밤 11시에 닫는다.
학원에 등록 한 뒤 처음 간 날,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치는 개인 방에 들어와 우빈은 내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우빈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입던 낡은 청바지에 갈색 조끼를 걸친 더벅머리의 청년이었다. 우빈은 다짜고짜 자기는 80년생이라며 나이를 물어왔다. 나는 78년생이었다. 내가 선뜻 허락하지 않자 우빈은 살갑게 내가 앉은 의자 옆에 앉아 강습비를 내겠다고 말했다.
“더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저는 이 곡, 이 곡을 치고 싶어요, 형님한테 배우면 좋을 텐데.”
“언제 봤다고 초면에 형님 소리를?”
내가 우빈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된 건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우빈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바깥에서 유리창 안을 유심히 지켜보는 여인, 민서가 있었다. 민서는 넉넉히 잡아 스무 살이 갓 넘은 것 같았다. 피부가 색이 고운 비단처럼 부드러워보였다. 이마는 태평양처럼 넓었고 웃으면 입이 초승달처럼 귀에 걸리는 여인이었다. 위로 뻗어나지 못한 몸은 엉성한 가슴과 넓은 골반이 대신 메워주었다. 왼쪽 눈 밑 작게 찍힌 점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점頂點이 되기 마땅한 것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민서는 반 접힌 교재를 가리키며 무어라 입을 놀리는 것이었다. 내 우둔한 눈치에 지친 나머지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버린 민서였다.
“강습비 같은 건 필요 없어.”
“정말요?”
“다 잘 쳐보자고 연습 하는 거 아냐, 그리고 나도 도움이 될 거 같고.”
“그럼요, 형님 방해 안 되게 할게요.”
“방해는 무슨.”
“예, 형님.”
“그리고 형님이란 그거 하지마, 불편해.”
“형님이 뭐 다른 건가요, 형님이지.”
“영, 어색한데.”
“감사합니다, 형님, 제가 언제 술 한 잔 살게요.”
금요일이 우리의 집합 날짜였다. 주말 전날이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인, 한 달의 네 번이나 있는 날이었다. 네 번 만날 동안 나는 몇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우빈과 민서는 이곳 학원에 온 지 한 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민서가 처음 온 날 카페에서 잃어버린 지갑을 우빈이 주워준 연이 닿아 연락하는 사이란 것이었다. 셋째는 민서는 아직 대학생이란 것이었다. 덧붙이자면 민서는 이 근방 미대가 유명한 대학교의 국문과 학생이었다. 내가 민서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우빈 때문이었다. 민서는 꿀 먹는 벙어리보다 더 말이 없었다. 민서가 하는 말은 의사가 분명하고 짧은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우빈은 단어들, 걔 중에서 민서가 그날 할 수 있는 가장 긴 말을 끄집어내는 자석 같았다. 그러니 강습이란 것이 실은 허울에 불과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 의자에 바짝 붙어 바닥에 앉은 민서가 그냥 들을 때, 우빈은 치는 둥 마는 둥 손가락을 놀릴 때, 나는 희미한 신열에 휩싸인 채 기분이 좋았다. 그때까지 우빈은 고사하고 나조차 민서에게 반한 상태는 아니었다. 호감이 있는 생물체, 내 기준에 있어서는 털이 엉킨 길고양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민서가 수많은 타인 앞에 나서서 말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내가 민서에게 반한 그 순간에 아마 우빈 역시 민서에게 반했을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오르간에 손 얹어본 것이 전부인 우빈에게 쇼팽을 가르치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날 역시 나는 설렁설렁 건반 몇 개를 누르는 우빈 옆에서 최근 본 환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밤이 깊었다. 간부 한 명이 찾아와 느닷없이 우리를 불렀다. 일정에 없는 자기소개가 시작된 건 젊은 남자 간부 말에 따르면 갑부 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행사였다. 아홉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전부 합해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 명씩 카페에 들어왔다. 주인이 돌린 과일 주스를 손에 쥔 사람들은 관객처럼 자리에 앉아 저마다의 빨대에 든 것을 빨아댈 뿐이었다. 처음 주인의 소개가 짤막하게 지나갔다. 그 다음에 한 명씩 나가 자신에 대해 더듬더듬 말하게 되었다. 우빈은 아마 세 번째쯤에 나갔던 것 같다.
“저는 회계사이고요, 80년생이고요, 아직 총각입니다. 얘기하시다 보면 친해지기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꼭 쳐보고 싶단 생각이 있었는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라잖아요. 그래서 여기 왔습니다. 온 김에 여러 가지 배우고 사귀고 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서는 왜 하필 제일 마지막에 나갔던 것일까?
장식처럼 말없이 있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친다는 지나친 착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자기소개 같은 걸 할 일이 없다는 걸 민서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폭풍의 눈에 있는 사람은 주변의 폭풍이 칼바람인지 따뜻한 온풍인지 알 수 없다. 그냥, 거기서 벗어날 수 없고 발을 맞춰 따라 걸어갈 뿐이다. 우리는 그냥 폭풍이 아니라 저마다의 띠를 가진 폭풍이었고 민서는 그 띠의 색깔을 구분하기에 아직 색맹에 가까운 소녀에 불과했으며 관계란 그런 지점에서 박살난다. 나는 머뭇거리는 민서에 앞서 나갔다. 핀 조명이 떨어진 단상 위에 서자 세계 지도가 떠올랐다. 예전, 세계 지도에서 이름조차 깨알처럼 적힌 나라에 손가락을 들이밀며 이민과 결혼에 대해 주절거리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아마, 지난해쯤 죽었을 것이다.
“저는 심리치료사이고요, 피아노 치러 왔습니다.”
감동 없는 박수가 쏟아지고, 나는 내려오면서 사색이 된 민서의 얼굴을 보았다. 탄광에 벽을 뚫기 위해 매일 다이너마이트를 달고 다는 사람에게 폭탄이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사람이 가득하다 못해 넘치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교정에서 삼천 원짜리 식사를 하며, 가끔은 사랑은 때론 공부를 하는 대학생에게 폭탄이란 생명을 앗아가는 위협일 것이다. 민서가 딱 그 꼴이었다. 나는 민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민서는 이내, 핀 조명 위에 섰다.
아주 오랜 시간 말없이 선 민서를 다 같이 기다린 건 물론 우연이었을 것이다. 우연이어야만 했다. 공유한 것이 없지만 우리가 아는 것이 있었다. 기다림이라는 건 누군가를 기다리게 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것이다. 타인뿐이고 접점 없는 곳에선 승강기마저 하릴없이 내려가기 일쑤이고 몇 초 차이에 없었던 것이 되어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붉어진 민서의 입에선 좀처럼 소개랄 것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쯤, 중단했어야 맞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열 명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빨대조차 빨지 않으며 눈조차 허투루 깜빡이지 않고 하품 한 번 하지 않고 민서의 입이 열리길 무작정 기다린 것이다. 그건 아마 민서가 가진 어떤 분위기일 것이다. 우리가 마지못해 기다려왔거나 열렬히 기다려왔던 물체가 아주 어려진 채 핀 조명 앞에서 떨고 있었다. 물체라는 건 품절되었다가 다시 채워지고 없는 것 때문이 다시 만들어지는가 하면 팔리지 않으면 떨이가 되었다. 그런 것 하나쯤 품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속이 새까맣게 탈 때까지 불을 지폈던 숯은 재가 되었다. 재는 연기조차 피울 수 없다. 재가 가루가 되고 땅에 녹아들어 애벌레의 알이 되고 알이 부화하고 애벌레가 고치가 된 것, 나비가 되기 전에 나무 위에 숨어있는 것, 그게 마치 민서 같았다. 민서의 입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예, 저는 대학생이고, 대학생이고, 예, 그래요, 뭘 배우기 위해서 온 건 아니고요, 소리가 좋아서요, 그냥 소리가 좋아서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민서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조명에서 멀어지는 민서에게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우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쟤 상기된 얼굴을 주시하는 우리 사이에 얌전히 앉고 나서야 우는 것처럼 작게 웃어 보인 민서였다. 누군가에게 반해야 한다면 그때만큼 적확한 순간이란 없을 것이었다.
상상이란 그렇다. 밑 빠진 독에 물이 그득 채워지는 것이다. 한 방울마저 흘리지 않는다. 젤리처럼 굳어버린 수면 위에 입을 들이미는 건 여러 개의 입을 가진 남자이다. 이목구비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 입뿐이었다. 남자의 여러 개의 입은 각기 다른 역할이 있다. 좋은 말을 하는 입, 나쁜 말을 하는 입, 깨무는 입, 핥는 입, 아픈 입, 충치를 보관하는 입, 휘파람 부는 입, 노래하는 입, 상상할 수 없는 입들이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먹는 것은 걔 중 모두의 입이 가진 기본적 속성이다. 남자의 입이 부산스럽게 움직일 때마다 젤리가 된 물이 조금씩 사라진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책임진 최종 연출가이다. 그리하여 내 상상 속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 뒤섞인 다음, 철없이 움직인다. 젤리를 다 먹은 남자는 독 안에 들어가 색을 뱉어내는 입을 놀린다. 나체인 남자의 몸이 녹색이 된다. 녹색 젤리가 된다. 녹색 젤리가 된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걷는다. 부동산이 몇 블록에 걸쳐 수십 개 포진한 이 도시는 땅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전쟁 중이다. 종전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무엇 때문에 시작된 다툼인지 알기 전에 손을 때는 것은 양쪽에게 있어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전부터 땅은 있어왔고 사람 역시 있었다. 그 땅 위에 젤리 남자가 벤치에 앉았다.
우빈의 손을 꽉 잡은 민서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 아주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다정한 미소는 고층 아파트가 채 가리지 못한 석양에 가려진다. 건물들의 지상은 밤이 가장 먼저 찾아간다.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는 밤의 모습은 썩 나쁘지 않다. 발을 땅에 붙이고 나서야 하늘까지 기어 올라간 밤은 잠시 땀을 닦는다. 발에 쥐가 온 밤은 서서히 앉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지렁이만한 밤은 아예 몸 전체를 앉아야 발을 만질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침대를 향해 서서히 걸어가 뒤척이며 잠을 청할 것이다. 민서는 낮이 머리를 긁적이며 등을 돌릴 때 횡단보도에 나타났다. 같은 영어가 써진 분홍색 티셔츠를 반쪽씩 나눠 입은 둘은 명백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횡단보도 앞의 벤치에 앉은 녹색 젤리는 조경 사업을 위해 옮겨 심은 나무의 잎 같았다. 우빈이 민서를 이끌고 간 곳은 횡단보도를 마주 본 분식점이었다. 둘은 걸었다. 둘이 걸을 때마다 두 개의 다리만이 움직였다. 그들의 다리가 겹쳐진 것이 아니라 그냥 민서와 우빈이 한 짝씩 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떼어놓을 수 없는 신체들 같았다. 나는 젤리가 있는 벤치 옆에 앉아 젤리의 배를 만졌다. 그러다 조금씩 젤리를 떼어내어 먹었다. 내 몸은 서서히 젤리가 되었다. 다만 녹색이 되지 못한 건 있었다. 내 입은 색을 뱉어내지 못하고 그저 먹거나 말하거나 다물 때 사용하는 입이었다. 눈이 침침해지는 것이 싫어 나는 젤리의 눈만 남기고 다 먹어치웠다. 젤리의 눈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민서와 우빈이 나온 건 금방이었다.
두 개의 다리는 갑자기 벤치에 앉았다. 나는 정말 민서와 우빈의 다리가 합쳐서 두 개뿐인지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시선을 두었지만 분간이 되지 않았다. 민서는 우빈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고 우빈은 민서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에 민서의 고개를 제 어깨에 당겼다. 민서가 삐뚤어진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순간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이건 뭘까?”
“뭐?”
“옆에 인형 같은 거.”
“탈 쓴 거 아냐?”
“아니잖아, 봐.”
민서의 손이 내 머리 위에 살포시 올라왔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대번 뜰 수밖에 없었다. 뽀얗고 보드라운 목화씨 같은 손이 내 머리 안에 심어진 것만 같았다. 민서의 손을 낚아챈 건 우빈이었다.
“눈 봐, 예쁘다.”
“그러게, 마치 별 같아.”
“따다줄까?”
“뭘.”
우빈의 손이 내 눈에 닿은 것, 내 눈이 송두리 채 뽑힌 건 순식간이었다. 내 눈 두 짝을 훔쳐가면서 흘린 웃음들만이 귀에 선하게 남았다. 나는 둘의 다리가 합쳐서 두 개인지 영원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내 고향이며 동네이고 고유한 공간 안에서 그들은 내 눈을 마치 기념품처럼 훔쳐갔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어쩔 수 없이 젤리의 눈을 먹었다. 눈이 다시 생겨났을 때, 그들은 이미 점처럼 작아져 세계 지도에 찍혀나갔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우빈이 좀처럼 오질 않았다. 그런데 민서가 왔다. 언제나처럼 쇼팽 에튀드 나비를 먼저 몇 번 치고 있을 무렵이었다. 손가락이 건반에 닿을 때 나는 항상 따끈따끈한 두부의 표면을 떠올린다. 쑥 들어갔다가 다시 원형을 찾아 돌아오는 두부는 누구의 입에 들어가도 맛있는 음식이 될 것이었다.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치기 위해 연주를 잠깐 멈추었을 때, 뒤편에서 무언가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너무 열중하시는 거 같아서…….”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오빠가 피아노 옆에 우산을 뉘어두었을 때부터요.”
우산을 뉘어둔 것은 방에 들어선 뒤 바로였으니 민서는 바로 나를 뒤따라 들어온 셈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쇼팽의 즉흥환상곡를 치기 위해 허리를 곧게 폈다. 허리를 피는 건 일종의 준비 과정이었다. 몸이 굳으면 피아노를 칠 수 없다고 훈수를 둔 건 고등학교 시절의 누나였다. 작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누나는 피아노를 치기 전에 꼭 요가에서 하는 고양이 자세를 몇 번 하곤 했다. 뻣뻣한 내가 투덜거리면 누나는 낮은 어조로 분명하게 대답해줬다.
“사람들은 피아노를 손으로 치는 거라고 착각해, 그건 아니거든, 피아노는 온 몸을 이용해서 두드리는 거야, 그래야 열리는 거야.”
나는 피아노에 몸을 실었다. 민서의 시선이 등에 닿을 때, 마치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등이 흥건하게 젖은 내가 즉흥환상곡을 계속 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습관 때문이었다. 음이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하고 눈이 침침하고 몸이 떨려왔다. 다만 몇 백 번이나 쳤던 그대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중간에 몇 번 실수를 했다. 그래봤자 건반 하나를 잘못 누르는 일에 불과했고 피아노를 치던 사람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수많은 관객 앞의 대회에서 연주를 하는 것처럼 심장이 발기되었다. 실은 연주 도중에 몇 번이나 내가 우스웠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떤단 말인가. 나는 피아노 전공이 아니었고 누구 앞에서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를 치는 던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아주 어린 여자 한 명이 뒤에서 듣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떨 만큼 나는 순진한 남자가 아니었다. 길고 길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연주가 간신히 끝났다.
“좋았어요, 오빠.”
“그냥, 이 정돈 다 쳐.”
“아뇨, 저는 엄두가 안 나는 걸요.”
“넌 어릴 때 학원 안 다녔니?”
“예, 전 뛰어놀았어요.”
“그런 것치곤 숫기가 없구나.”
“그렇던가요?”
“흠, 우빈이는?”
“제가 어떻게 아나요.”
“매일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
“우빈 오빠가 차로 태워주긴 했어요, 오늘은 아니구요.”
“오늘은 걸어서 왔니?”
“그럼 어떻게 왔게요?”
“근데 나는 네 오빠뻘이 아니라 삼촌뻘이잖아.”
“에이, 오빠는 오빠인 거죠.”
“넌 안 치니?”
“전 들으러 온 거예요.”
“돈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왜요, 이렇게 좋은 연주를 듣는 걸요.”
“과장은.”
“오빠는 언제부터 피아노 쳤어요?”
“열 살 때.”
“왜요?”
“궁금한 게 많구나.”
“알려주세요.”
“누나 때문에.”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
“누나가 원래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어. 난 옆에서 누나가 몇 번 가르쳐주면 따라 치길 좋아했어. 누나 역시 어린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걸 좋아했어. 봐, 건반은 이렇게 애인의 살결처럼 눌러야 한단다, 하고 말해주면 나는 내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고 누나는 내 손가락 위에 자기 손가락을 올린 뒤에 살포시 눌렀어. 그건 내가 치는 동시에 누나가 치는 거였고.”
“와, 부럽다.”
“넌 외동이니?”
“심리치료사란 건 뭐예요?”
“타인의 마음을 매만지는 사람이지.”
“고쳐도 줘요?”
“난 고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럼요?”
“애무하는 거지, 마음을. 그럼 좀 더 포근해지거든.”
“언제 한 번 찾아가도 되요?”
“돈만 있다면야.”
“치, 전 할인 해주실 거죠?”
말문이 막혀왔다. 나는 다시 즉흥환상곡을 치기 위해 집중했다. 민서가 언제 내 방에서 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피아노 건반을 펀치 머신처럼 흠씬 두들겨 팬 뒤에 기분이 몹시 나빠졌을 때, 이미 민서는 없었다. 내 공간에 민서가 찾아오는 상상이 다가왔다. 내가 만질 수 없는 유일한 마음이 당장 봉합해야만 하는 찢어진 장기처럼 텅 빈 눈앞에 떨어졌다. 나는 우산을 집어 들었다. 비가 그치지 않아 바짓단이 흠뻑 젖었다. 나는 학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교회의 차양에 선 민서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사막이다. 밤의 사막은 춥다. 모래가 빗은 사람 형상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나는 매시의 정각이 되면 가운을 두른다. 작은 선반을 손에 들고 사막을 돌며 사람 형상의 모래가 지닌 질병들을 확인한다. 대게 결핵이다. 기침 속에 섞여 나오는 건 모래뿐이다. 가끔 메스를 쥐고 등이 가려운 사람 형상들의 등을 긁어주면 피부 대신 알갱이가 떨어진다. 그것들은 사람 형상이란 말이 적확하지 않은, 사람이다. 기후에 맞게 진화한 동물들처럼, 사막에 맞게 변한 사람이다. 단지 죽음이 없고 삶이 없을 뿐이다. 나는 어제 사막의 동쪽 부근에서 잊어버린 마지막 메스를 찾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났을 뿐이다.
민서와 우빈을 발견한 건 사막의 동쪽 끝자락에서였다. 상대방의 체온에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걷는 모습에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코웃음을 친다. 우빈이 사람을 향해 눈길을 준다. 사람은 우쭐해서 고함을 지른다.
“여기에서 그런 잔재주는 소용없어.”
“제 부인이 많이 아파요, 어쩌죠?”
“저기 유일한 의사가 오는군!”
손이 없는 사람은 방향을 알려주지 못하고 나는 다른 사람 뒤에 숨는다. 우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걸어간다. 민서는 아마 많이 아픈 모양인지 우빈에 거의 기대어 있다.
“아니, 거기 말고, 아니, 왼쪽, 왼쪽, 그래, 거기 뒤, 찾았다, 의사!”
훈수를 둔 사람 때문에 나는 우빈에게 발견되었다. 다행히 우빈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막에 오래 지낸 탓에 아마 내 얼굴은 벗겨지고 뒤집어졌을 것이었다.
“의사님, 제 부인을 좀 보세요.”
“바닥에 눕혀보죠.”
“잠시만, 의사님.”
우빈은 겉에 걸친 담요보다 훨씬 큰 천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민서를 눕혔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민서의 얼굴을 보았다. 퍼렇게 질린 얼굴, 새까맣게 까진 발바닥, 여기 저기 헤지고 찢어진 옷, 악취가 나는 머리카락, 민서는 내가 알던 민서가 아니었다. 단지 당장 배를 갈라서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태였다. 그러나 내게는 메스가 없었다.
“의사님, 제 상태가 심각한가요?”
민서가 숨을 헐떡이면서 간신히 물었다.
“아뇨, 제 메스가 있으면 단박에 나을 수 있습니다.”
“다행이다, 그치?”
“그런데 제가 메스가 없어요, 어제 잊어버렸어요.”
“그럼 어떻게 하죠?”
“이렇게 하죠, 의사인 저는 부인 옆에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남편 분이 사막에서 제 메스를 찾아와주세요.”
우빈과 민서는 눈빛을 교환한 뒤 우빈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민서의 손을 잡아주었다. 민서는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불안한 눈빛을 서쪽에 보냈고 정신이 빠져나갔을 때에는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뱉어냈다. 나는 민서가 깨어났을 때 재빨리 물었다.
“서쪽은 왜요?”
“제가 거기 가야만 하거든요.”
“거긴 아무 것도 없어요.”
“아녜요, 제가 가 본 적이 있어요.”
“달리 뭐가 있나요?”
“고아원이 있어요, 제 아이가 거기 있어요.”
우빈이 온 건 새벽이 다 지난 뒤였다. 낮의 사막은 다시 달아올랐다. 사막에는 아침이 없었다. 낮과 밤이 전부인 곳이었다. 나는 우빈이 가져온 낡은 메스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틀림없이 내 메스였다. 내 손가락을 찔러보았다. 깜짝 놀란 우빈이 내 손에서 메스를 빼앗아갔다.
“이게 맞나요?”
“아뇨, 제 메스가 아니에요, 다시 찾아오세요.”
우빈은 민서를 업었다. 그들은 그 뒤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사막의 서쪽, 고아원에 갔을 것이다. 나는 선반 위에 메스를 올려놓고 사막의 동쪽에 갔다. 동쪽부터 차례대로 사람들의 질병에 대해 검사한 뒤에는, 집에 돌아와 잠에 들었다.
10월이 되었다. 가을이었다. 계절이 달라지면 피아노 소리 역시 바뀐다. 그것 역시 누나가 알려준 것이었다. 낡은 집 앞 오랫동안 지키던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줍던 누나는 앳된 비밀처럼 내게 일러주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주머니 속의 먼지 때문에 바뀌기도 하니까, 계절 역시 소리를 바꾸어놔.”
그달의 마지막 금요일이 내가 그곳에 가는 마지막 날이었다. 우빈이나 민서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날따라 건반에 일절 손대지 않던 민서까지 어슬렁거리며 젓가락 행진곡 따위를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즉흥환상곡을 딱 한 번 친 뒤, 우빈과 민서가 반씩 나누어 건반을 치는 걸 지켜보았다. 둘은 의외로 잘 어울렀다. 무병의 시기를 거쳐 이제야 빛을 보는 중년 배우와 이제 막 입사한 신입 작가 같았다. 초등학생 아이에게 체르니를 가르친다며 건반 치는 법보다 담배 피우는 법을 먼저 알려주는 아저씨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우빈의 청에 못 이겨 한 번 더 즉흥환상곡을 친 뒤에서야 바닥에 앉을 수 있었다. 민서가 내 옆에 앉아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대었을 때, 우빈의 투박한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제 피아노는 안 쳐요?”
눈을 따라 감은 건 예삿일이었다. 민서의 목소리가 정오의 그늘 같았다.
“가끔씩 치겠지.”
“아까워요, 그 실력.”
“어디 안 가고 내가 평생 품고 살 거니까.”
“하긴, 오빠는 이제 뭐해요?”
“뭐하긴, 일하지.”
“할인 생각해봤어요?”
“그거 말이야, 네가 오면 공짜야.”
“어머, 정말요, 꼭 갈게요.”
우빈이 건반을 막 치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우리는 앉아서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민서가 우빈 옆에 앉아 한몫 거들었다. 옆 개인 방에서 중년 남자 한 명이 찾아와서 불만 몇 마디를 늘어놓고 간 이후에는 셋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민서가 서툴게 싸온 도시락 안에는 문어 모양의 비엔나소시지와 반숙 계란이 들어 있었다. 민서가 화장실 간 사이에 우빈이 대뜸,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님, 다 못 배워서 아쉬워요.”
“그래도 잘했어, 이제 음계 정돈 알지?”
“아직 알쏭달쏭해요.”
“넌 안 되겠다.”
“알아요, 저 억지 부린 거.”
“뭘, 새삼스럽게.”
“형님, 다시 볼 수 없겠죠?”
“아직 술 안 샀잖아.”
우빈이 어색하게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서가 겉에 걸쳤던 셔츠 자락이 의자 위에 있었는데 우빈은 그 옷을 제 무릎에 올려놓고선 의자 위에 앉았다.
“우리 그런 사이 될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민서가 오기 전에 우빈이 나갔다. 마지막다웠다. 나는 우빈이 회계사일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객이라면 우빈처럼 촌티 나는 회계사에게 자산을 맡길 것 같지 않았다. 민서는 들어오자마자 우빈의 행적을 물을 것이란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깬 뒤 의자에 앉았다.
“우빈이 어디 갔는지 안 묻니?”
“오빠야 돌아갔겠죠, 맞죠?”
“그래.”
“이리 옆에 앉아요, 오빠, 한 번만 더 들려주세요.”
나는 민서 옆에 앉아 불편하게 즉흥환상곡을 한 번 쳤다. 건반의 촉감이 좋았다. 그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내가 늘 치던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상당히 어려운 곡이었다. 완곡을 조금이나마 틀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 손의 지문들은 앞선 연주자들의 자취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틀리기 전에 음계가 불쑥 튀어나와 빈자리를 메우는 것만 같았다. 그때만큼 나는 연주에서 실수 한 번 할 수 없는 연주자인 것이었다. 민서는 내가 피아노를 치는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아노 소리의 공백 틈새에 민서의 음성이 이끼처럼 끼어들었다.
“죄송해요, 오빠, 제가 나쁜 여자에요.”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간부 한 명이 다가와 이미 닫을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려주었다.
길은 움직이지 않는다. 자동차가 날아다니지 않는다. 빌딩이 무너진 건 오래 전 일이다. 작은 주택만이 간신히 지붕을 유지하고 있다. 별반 달라진 건 없다. 공기가 좀 더 희박해지고 길이 좁아지고 하늘이 낮아지고 별이 가까워졌을 뿐, 달이 멀어졌을 뿐, 그런 것들뿐이다. 10년 전, 공상과학 영화는 10년 후의 미래를 허풍처럼 그려놓았다. 나는 하수관 속에 들어간 작은 인형이 된다. 하수관은 모든 건물과 길에 연결되어 있다. 민서는 대학 병원에서 지금 막 수술을 끝낸 뒤에 가운을 걸치고 지하철역에 들어갔다. 지하철의 수요가 부족한 탓에 민서는 선 채로 30분이나 있어야 했다. 나는 그 시간이 특히 좋았다. 민서는 서서 휴대 전화를 꺼내 연락을 하고 멀뚱히 철로를 바라보고 가방에서 커피 우유를 꺼내 마시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만지기도 하고 머리를 쓸어 올리기도 했다. 민서가 탄 지하철은 도시락에 반찬 가득히 넣고 뚜껑을 억지로 닫은 것처럼 꽉꽉 들어찬다. 나는 민서와 어깨를 맞대는 모든 사람이 부럽다. 그 온기가 잠깐이나마 옷의 위에 붙는 것이 부럽다. 민서에게 나는 지우개똥처럼 보일 것이다. 민서는 시의 외곽, 작은 아파트에 살았다. 불빛이 밝히지 못한 턱없이 어두운 건물이었다. 건물 복도에 들어서면 중앙 계단은 까맣게 멀어진다. 오른쪽 벽에는 죽은 화분들이 두서없이 올라가있다. 왼쪽에는 한 층에 네 가구가 산다. 중앙 계단 왼쪽 두 가구, 오른쪽 두 가구, 이층 네 번째 집이 민서의 집이다.
민서에게는 남편이 있다. 딸도 있다. 민서를 닮아 어여쁜 딸이다. 남편은 무역회사에 다니는 남자이다. 해외 출장 때문인지 집을 비우는 일이 많지만 민서를 위해 늘 해외에서 기념품을 사다주는 자상한 남자이다. 민서는 집에 불이 켜져 있으면 무조건 초인종을 누른다. 열쇠가 주머니 안에 있는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남편이 나온다. 딸이 따라 나온다. 지진처럼 말이 내 발 밑에 떨어진다. 나는 그 주파수들을 몸 안에 흡수하기에 너무 작은 존재이다. 말들이 많아질수록 내 곁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느라 바쁜 존재일 뿐이다. 특히 민서가 집에 들어선 뒤 30분 간, 나는 민서를 쳐다볼 겨를 없이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한다. 민서의 가족은 접이식 상을 편 뒤 민서가 하나, 남편이 하나, 딸이 하나씩 반찬을 옮긴다. 절대 한 사람이 두 개의 반찬을 드는 법이 없다. 상 앞에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식사가 끝나면 텔레비전이 꺼진다. 남편은 목욕을 위해 화장실에 들어간다. 민서는 작은 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책을 읽어준다. 그것이 동화인지 소설인지 시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 읽기 전에 딸은 잠든다. 민서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때, 남편이 나온다. 불이 꺼질 때, 민서가 씻고 나온다.
그 부부는 가끔씩 섹스를 한다. 딸이 깊이 잠든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민서가 침대 위로 올라간다. 체위는 번복 없이 비슷하다. 신음 소리인 탓인지 내 옆에 떨어지는 소리들은 깨지거나 부서진다. 가끔, 가끔이지만 엄청나게 커다랗고 파동이 큰 소리가 떨어지면 나는 발에 화상을 입는다. 그것이 마치 민서의 체온 같아서 나는 그것을 피할 수가 없다. 섹스가 끝나면 민서는 얼굴에 몇 가지 수분을 바른다. 남편은 칼같이 잠에 든다. 일정하게 떨어지고 흔들거리는 소리가 그 증거이다. 민서는 남편이 잠든 뒤,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채, 허리를 벽에 기대고 한동안 말없이 가만 있는다. 민서가 보는 것을 나 역시 바라본다. 뭣도 없다. 나는 민서가 가끔, 과거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10년 전, 그때의 일들 말이다.
아침에 일어난 민서는 딸의 옷을 입힌다. 노란 유치원 옷이다. 물론 그 전에 아침 식사를 차리고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한다. 남편이 어기적어기적 일어날 때, 민서는 발을 구두에 넣는다. 부부가 항상 거르지 않는 건 아침 마중이다. 좀 독특한 방식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두 뺨 정도의 거리에서 아주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하는 것이다. 민서는 다시 지하철을 30분쯤 기다린다. 기다린 다음에 병원에 도착한다. 가운을 입는다. 가운은 민서의 몸에 딱 맞는다. 나는 오래전에 민서가 의사가 될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언젠가 누군가를 치료하게 된다. 나는 민서가 병동을 돌며 환자의 얼굴을 볼 때쯤, 병원을 나선다.
그제야 나는 집에 돌아가 쪽잠을 잔다.
길은 움직이지 않는다. 자동차가 날아다니지 않는다. 빌딩이 무너진 건 오래 전 일이다. 작은 주택만이 간신히 지붕을 유지하고 있다. 별반 달라진 건 없다. 공기가 좀 더 희박해지고 길이 좁아지고 하늘이 낮아지고 별이 가까워졌을 뿐, 달이 멀어졌을 뿐, 그런 것들뿐이다.
우빈의 전화번호를 찾게 된 건 우연이었다. 최근에 산 전화기가 망가진 탓에 오래전 서랍에 넣어둔 옛 전화기를 잠시 꺼내 쓰게 되었을 때, 주소록에서 우빈의 번호가 튀어나왔다. 그 광경의 눈이 돌연 닫았던 문을 열자 걷잡을 수 없는 시점들이 섞여 다가왔다. 나는 오후 한나절을 침대 위에 누워 그때의 시점들을 몰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밤이 되었다. 커튼을 치고 불빛을 꺼도 완전히 어두워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예를 들어 문어발식 콘센트의 불빛, 옆집 창문에서 떨어진 불빛, 보온을 유지한 밥솥의 불빛 따위가 있었다. 민서가 떠오른 건 좀 비열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출장 간 아내가 곁에 있었다면 아주 예전 사랑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감정을 배달음식처럼 시켜 먹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망설인 뒤에야 우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번이었다.
나는 왜 그날 밤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일까? 바깥에 나갈 일 없는 밤이었다. 차에 탄 뒤,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명확해져가면서 점점 나는 내가 치졸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먼 곳이었다. 아마 대중교통이었다면 더 먼 거리였을 것이다. 계단이 이어지는 곳의 옆에 커다란 운동장이 있었다. 운동장은 고대의 콜로세움처럼 움푹 파져 있었고 계단이 쭉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계단의 중간쯤에 앉아 대학생들이 커다란 불빛 아래에서 불나방처럼 뛰는 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민서는 아마 여기에 앉아 같은 과의 남학생들 응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가 민서가 다니는 학교였던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오래된 기억이라 어쩌면 완전 틀리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운동장에 앉아 있다가 문득 교실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문이 아직 닫히지 않았다. 이층 교실에 들어가서 불을 켰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사람이 깜짝 놀랄 만큼 환한 불빛이었다. 하릴없이 불빛을 켰다 껐다 반복했다. 마치 우리끼리만 공유했던 신호 같았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알 수 없는 신호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니 그곳은 어두운 곳이 아니었고 밝은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빈에게 팔짱을 낀 민서가 반대편 강의실에 쓱, 들어갔다. 나는 불빛을 껐다. 옆 강의실은 내가 차에 올라타 교정을 빠져나갈 때까지 불빛이 켜지지 않았다. 분실물 및 파기 혹은 훼손된 물건의 유무를 확인하는 간부의 옆에 붙어 불빛을 껐던 날은 두 날이었다. 하루의 머리카락과 발이 부여잡고 당기는 통에 근육들이 버텨낼 수가 없었다. 직업을 잃었다. 그날 밤, 심리치료사를 그만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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