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IN THE COCKPIT
- 작성일 201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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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이잉-
청소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온 집 안을 울렸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널어 말리고, 밀린 설거지도 마무리 했을 즈음.
"엄마!"
모든 소음들이 한 순에 잦아들만큼 사랑스런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 오늘은 공주님 머리 해줘!"
"왠일이야 머리 묶는 거 그렇게 싫어하더니?"
"으응..가람이가 동화책 보고 신데렐라가 예쁘댔어"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에도 잠시, 나도 출근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괜히 어색해져버린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틀어올리고, 단정한 메이크업까지 마쳤다.
"엄마! 설이 좀 잘 부탁해!"
"설아 엄마 잘 다녀올게 네 밤 있다가 가람이 얘기 꼭 해주는 거야!"
LOVE IN THE COCKPIT
인천 발 뉴욕 행 아시아나 항공기에 손님들의 탑승이 한창이었다. 탑승하는 승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안내하며 스튜어디스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저번 스케줄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하필 퍼스트 클래스를 맡게되어 잔뜩 짜증이 난 나는, 평소와 같이 갤리에서 웰컴드링크를 준비중이었다.
마지막 글라스에 오렌지쥬스를 다 따라내서 트레이를 받쳐들자 오늘 나와 함께 퍼스트 클래스를 맡은 예원이 갤리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배님 착석 다 완료되었어요."
"응, 지금 나가"
나는 어릴 적부터 비행기를 동경했다.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행 비행기를 처음 탑승하던 7살 때부터, 커서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은 나의 고정 레퍼토리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내가 진심으로 스튜어디스를 지망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내가 고3 때였다.
그저 '스튜어디스들 예뻐' '여행 많이 다녀서 좋을 것 같아' 등의 말만 반복했지 진지하게 말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제 딸이 항공운항과에 지원한다는 통보 아닌 통보를 한 순간 비로소 나의 부모님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딸이 계속 스튜어디스에 대한 얘기를 하긴 했었구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낙방없이 단 한번만에 항공운항과에 합격하였고 졸업도 하기 전에 그 어렵다는 아시아나 객실 스튜어디스직에 합격했다.
그리고 올해로 입사 3년차, 이젠 비행시간을 세는 것도 힘들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음료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나는 트레이에 있는 음료들을 바쁘게 서빙했다. 물론 비행 중에는 항상 바쁘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륙 직전이 스튜어디스들에게는 가장 바쁜 시간이었다.
특히나 할게 많은 퍼스트와 비즈니스 클래스에서는 더더욱.
이코노미는 대신 손님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힘들다면 비즈니스나 퍼스트에서는 까다로운 승객들의 입맛을 맞추는 것이 힘들었다.
갤리에 들어선 내가 서빙을 마친 빈 트레이를 쭉 내밀어 스트레칭을 짧게하며 선반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옆에 꽂혀져있던 승객배치표와 펜을 집어들었다.
메뉴 받아와야지.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데 갤리를 벗어나던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순간 미간을 찌푸릴 뻔했다.
나 잘 참았어! 속으로 외친 내가 스튜어디스 특유의 미소를 장착했다.
"하하, 부기장님 안녕하세요?"
"네, 민주씨도 안녕한가보네요."
여기가 민주씨네 안방인줄 알고 기내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면. 언제 무표정이었냐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띄운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고 이를 갈려다 마침 저번주 토요일에 신경치료를 한 이를 떠올리며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참은 내가 심호흡을 3초간 한 후 메뉴를 받아적을 종이를 품에 안고 갤리를 나왔다.
마침 앞에는 방금 전 그 재수없는 부기장이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 한명, 한명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 비행을 맡은 부기장 김재현 입니다."
부기장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나의 등을 쿡 찌른 예원이 물었다.
선배님, 주문 제가 받을까요? 그러자 난데없이 화들짝 놀란 내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1A에 착석한 승객 앞에 쪼그려앉아 시선을 맞췄다.
"손님, 이번 비행에서 제공될 기내식 확인 다 하셨나요? 원활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서 먼저 정하신 메뉴를 알려주시겠어요?"
긴 비행의 시작이었다.
비행기가 막 이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순항 궤도에 이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벨트 싸인이 꺼졌다. 나 또한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 음료 서비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달간 뉴욕 노선 비행을 주로 맡아서 서비스 스케줄이 훤한 내가 손목에 찬 시계를 한번 내려다보고 음료를 꺼냈다.
퍼스트 클래스 손님들은 대체로 까다롭기 때문에 하나라도 실수하면 바로 컴플레인이라 신경을 세 배로 더 써야한다.
이코노미는 너무 바쁘고 퍼스트는 너무 예민하고 비즈니스가 딱인데, 쩝. 하품을 하며 서비스 준비를 하던 나의 옆구리를 예원이 꾹 찔러왔다.
"선배 그건 세번째 서비스용인데요?"
"헐, 그렇네. 실수!"
"오늘 자리 널널하니까 저 혼자 준비할게요. 선배님은 칵핏 다녀오세요"
선배님 그저께 런던 비행도 하셨잖아요. 예원이 예쁘게 웃으며 카트를 끌고 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갤리를 빠져나가자 나가 육성으로 헐. 소리를 냈다.
신경써주는 것은 고마운데 칵핏가는게 더 피곤하다는 걸 왜 모르니 예쁜 후배야. 눈썹을 뉘인 나는 콜라와 오렌지쥬스 그리고 얼음을 담은 잔을 챙긴 후 한숨을 쉬며 칵핏의 문을 열었다.
막 자동 비행모드로 변경해놓은 모양인지 기장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고 있었고 부기장은 마지막으로 상태판을 체크하고 있었다.
"음료 가져왔어요. 기장님은 오렌지쥬스. 그리고 부기장님은 콜라 맞죠?"
"오. 오늘 퍼스트가 민주씨라 편하겠네. 식사랑 음료 취향 다 기억해주니까"
다른 승무원들은 줄 때 마다 물어보거든. 기장이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쥬스를 원샷하고 바로 트레이위에 올려놨다.
부기장님은 안드세요? 기장 옆에서서 부기장에게 말을 걸자 그런 나를 잠깐 올려다보더니 다시 계기판에 집중했다.
"체킹하는거 안보입니까. 민주씨는?"
"그럼 여기 두고 갈게요"
정말 말이라도 한번 곱게하는 법이 없다니까. 하고 속으로만 생각한 나는 벽에 붙어있는 간이 테이블을 탁 소리나게 내리고 콜라와 유리잔을 올렸다가 그냥 나가기엔 아까워서 살짝 기장과 부기장을 살폈다.
다시 체킹인지 뭔지를 하느라 집중했는지 자신을 신경도 안쓰는 걸 확인한 내가 콜라캔을 살짝 다섯 번 정도 흔든 후에 조심히 내려놓고 씩 웃었다.
세게 흔들려다가 참았다. 비행기 조종석에 콜라 스며들면 안되니까. 빈 트레이를 들고 칵핏을 나오는 나의 표정을 어느 때보다 밝아보였다.
재현은 어린 나이에 입사해 착실히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입사 1년차였다.
남들은 재현을 보고 어렸을 적부터 파일럿이 되는 것을 동경해 열심히 공부한 엘리트 이미지를 자신들 마음대로 상상했지만 사실 재현이 파일럿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유니폼이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 학기를 마치고 바로 군대를 다녀온 이후 미친듯이 공부만 해서 3년만에 졸업학점을 모두 취득하고 조기졸업을 따낸 후 2년간의 비행 연수를 마치고
바로 아시아나에 입사한 케이스였다. 재현이 이렇게 죽자살자 기를 쓰고 공부해서 최대한 빨리 입사한 것은 조금이라도 젊을 때 입는 유니폼이 '더' 멋있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입사하고 유니폼을 맞췄을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잠 잘 때도 입고 잤었다는 사실은 재현의 부모님만이 알고 있는 탑시크릿이었다.
그만큼 유니폼을 아끼고 사랑하는 재현은 지금 자신이 집에서 나오기 바로 직전 직접 다려입은 자신의 옷이 콜라로 물들어가는 것을 절망적으로 보고 있었다.
"괜찮아? 화장실가서 좀 닦고와"
아오. 차마 나이 지극한 기장 앞이라 소리내서 욕도 못하고 속으로만 삼켜낸 재현이 조종석에서 일어나 여분의 셔츠를 챙겨 칵핏을 나왔다.
이륙한지 한 시간도 안됐는데 12시간 정도를 이 찝찝함과 함께 비행할 수 없었다.
"물티슈나 행주 있습니까?"
"아 깜짝이야!!"
부기장이 갤리안으로 고개만 넣고 묻자 피곤에 취해 졸고 있던 내가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기댔다.
뭐 저렇게 리액션이 커.
역시 입 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던 재현이 콜라로 물든 자신의 셔츠와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이내 살짝-정말 찰나의 순간이라 부기장 조차도 자신이 본 것이 웃음이 맞았나 의아할 정도- 웃고는 선반에
놓여져있던 물수건을 건내는 나를 보고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해! 콜라 쏟으신거예요? 그새 난기류라도 있었나? 왜 난 몰랐지? 여기 닦으세요!"
그러니까 비행기 안에서 항상 콜라만 마시는 부기장님의 취향이 이상한 것이다, 원래 탄산은 좀만 흔들면 그렇게 터지는 거 모르는거 아니지 않느냐,
앞으로는 기장님처럼 깔끔하게 오렌지쥬스로 갖다주겠다, 등등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기장은 확신했다. 민주가 자신의 콜라를 흔든게 맞다고.
"커텐 좀 쳐줘요"
"왜요?"
셔츠 좀 갈아입게요. 부기장이 자신이 있던 입구쪽의 커텐을 치면서 갤리안으로 아예 들어서자 나가 그런 부기장에게 거절의 뜻으로 손을 저었다. 여기가 무슨 탈의실인줄 아나.
앞에 화장실놔두고 왜 청결해야하는 갤리에서 옷을 갈아입는다고 난리래. 자신의 뜻이 제대로 전달됐다고 생각한 나는 다시 눈을 붙히려고 몸을 기댔다.
잠에 집중하려던 나는 셔츠를 탈탈 터는 소리에 고개를 들다 이미 단추를 풀고 있는 부기장을 보고 하마터면 비행기 안에서 다 울리게 소리지를 뻔 했다.
아 저게 미쳤나! 나는 급하게 일어나서 자신이 앉아있던 쪽의 커텐을 착 소리나게 닫고는 물었다.
"부기장님 미쳤어요? 오늘 퍼스트 저만 담당 아니거든요? 지금 밖에서 면세품 팔고 있는 스튜어디스도 있거든요?"
"그럼 화장실엔 승객이 계시는데 어떡합니까. 통로에서 갈아입을까요?"
"빨리 갈아입고 나가세요!"
잠깐이나마 눈 좀 붙이려 했던 내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갤리 밖이었다.
옷을 다 갈아입은건지 다시 갤리 안으로 나를 불러들인 부기장은 다짜고짜 콜라로 물들은 셔츠를 내밀었다.
"왜 이걸 저한테 주세요?"
"민주씨가 흔들어서 쏟은거니까 착륙 전까지 빨아서 건조까지 시켜놓으세요."
"제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요?"
라고 말은 자신만만하게 했지만 사실은 속으로 매우 놀라버렸다. 제가 그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아까 살짝 비웃은게 티가 났나? 그렇긴 하지만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블랙박스에 콜라 살짝 흔든 소리가 녹음 됐을리가 없으며, 설사 그랬다고 해도 이 비행은 안전하게 끝날 것이기 때문에 블랙박스가 공개될 일이 없.. 까지 생각한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제가 그랬다는 증거있냐구요. 부기장님.
"착륙전까지 셔츠 세탁 안 해놓으면"
"안 해놓으면 뭐요!"
"일 안하고 갤리에서 자고 있었다고 다 이를겁니다."
당황해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부기장이 셔츠를 선반위에 올려놓고 옷 매무새를 정리한 후 갤리를 빠져나갔다.
아. 안되는데. 원래 이정도 짬빱 생기면 짬나는 시간에 잠깐 휴식도 하고 그러는건데. 진짜 재수없는 사람. 내가 머리를 헝크리려다 스프레이로 고정해서 딱딱한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기억해내고 씩씩 거렸다.
선배님. 무슨 일 있으세요? 마침 기내 면세품 판매를 마치고 카트를 갤리안으로 들이던 예원에게 길을 터주던 내가 울상을 지으면서 물었다.
"예원이 너 셔츠에 콜라자국 지우는 법 알아?"
비행 시작한지 3시간 반 째, 첫번째 기내식 서비스까지 다 나갔고 이제 한숨 돌릴 시간이 돌아왔지만 다른 승무원들이 쉴 시간에 나는 간이 싱크대에 서서 부기장의 셔츠를 비눗물에 푹푹 담그고 있었다.
콜라자국을 지우는 법을 물었을 때 예원은 너무나 간단하게 대답했다. 지식인에 물어보세요! 그리고 나는 통탄을 금치 못했다. 초록색 지식인의 노예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라니.
왜 우리는 지식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가! 그럼 내가 지금 35,000 피트 상공에서 와이파이 핫스팟이라도 찾아야하는거니, 예원아?
그러자 예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비즈니스 클래스 갤리로 기내식 준비를 하러-라고 쓰고 도망이라고 읽는다-가버리자, 나는 싱크대에 물을 받고 셔츠를 담근 후 예원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2시간이 지난 지금 열심히 나는 셔츠를 빨고 있었다.
"음. 약간 누렇긴 하지만 이정도면 괜찮을거야. 마음이 까만사람 아니면 못 알아볼 정도야"
근데 부기장은 마음이 까만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물비누를 더 풀어서 팍팍 소리나게 셔츠를 쳐대기 시작했다.
꾸릉. 꼬르륵도 아닌 꾸릉이라니.
뱃 속에서 울리는 신호에 혼자 있었는데도 괜히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배고픔에 배를 움켜쥐려다가 손을 뗐다.
"아, 유니폼 젖을 뻔"
남껀 되도 내껀 안된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는 내가 물에 젖은 손을 탈탈 털며 오늘 서빙 후 남은 비빔밥과 안심 스테이크중에 어떤 것을 먹을까하고 행복한 고민을 하던 나는 결국 둘 다 먹으면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음식을 데우기 시작했다.
이번 식사시간에 쓰고 치운 퍼스트 클래스 셋팅용 식탁보를 간이 식탁대에 셋팅한 나는 포크를 집어들었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조리가 완료됐고 맛있는 냄새에 절로 콧소리가 났다.
그릇에 고추장을 푹 짜넣었고 크게 떠서 한입 떠먹으려는 순간 갤리의 커텐이 확 하고 열렸다.
"깜짝이야!"
"식사"
"네?"
우리 식사 안갖다줍니까? 부기장이 인상을 쓰면서 갤리를 한번 훑고는 나를 쳐다봤다. 마치 그 눈빛이 너 혼자 먹으니까 좋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나빠진 내가 수저를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여분의 기내식을 꺼내 조리를 시작했다. 예원씨가 안 갖다 줬어요? 나가 능숙하게 트레이에 2인분의 기내식을 척척 셋팅하자 부기장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면서 대답했다.
"갖다줬으면 제가 지금 여기 왔겠습니까?"
"그렇네요."
기내식 준비 후 머릿속으로 앞으로 해야할 일을 쫙 정리하고 있었는데 나를 쳐다보는 부기장의 시선을 느끼고는 이름 모를 항공 기술자를 속으로 욕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자동 항해 장치 시스템 같은 것은 어떤 할 일 없는 인간이 만든건지. 정말 비행기 조종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태평해도 되는거야?
내가 속으로 부기장을 저격했지만 괜히 왼쪽 귀가 간지러운 건 칵핏에서 식사를 마치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부른 배를 툭툭하고 두들기던 기장이었다.
"박민주씨는 비행가도 관광같은 거 안하고 호텔에서 잠만 자죠?"
"어떻게 아셨어요?"
"그럴 것 같이 생겼습니다"
부기장이 하는 말이라서 재수없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새삼스레 나는 처음 장거리 비행에 올랐던 날을 떠올렸다.
인천-시애틀 간의 비행이었는데 나에게는 드디어 처음 실전 장거리 비행에 투입된다는 기대보다는 처음 시애틀에 간다는 설렘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 인천 행 비행기 스케줄로 돌아와야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시애틀에서 머물 수 있던 시간은 15시간 정도 밖에 없었지만 입국 심사를 받자마자 미리 신청해놨던 렌트카를 가지고 혼자 10시간 동안 시애틀 여행을 하고
결국 3시간 취침 후 비행, 결국 갤리에서 서서 졸다가 갑작스런 난기류 때문에 선반에서 떨어진 트레이를 이마에 정면으로 맞고 부어올라 혹이 생긴 얼굴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승객들에게 안녕히가시라는 인사를 하던 패기의 신입 스튜어디스는 죽고 없었다.
스케줄에 지쳐 그저 회사에서 지정해준 호텔에서 온 버스를 타고 동료들과 쪼르르 가서 식사를 하고 죽은 듯이 지쳐 잠만 자다가 다음 날 호텔 버스를 타고 또 다시 쪼르르 공항으로 바로 와서 비행을 준비하고 인천으로 돌아가는 업무에 찌들어든 4년차 스튜어디스 박민주만이 있을 뿐이었다.
쩝. 뭐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지. 겨우 28살 주제에 82살 같은 생각을 한 나는 예쁘게 깎여져 있는 사과를 입안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뭐 처음에야 신나서 여기저기 다녔지만 이젠 피곤하기만 하고 재미도 없어요."
"그래도 처음에 자주 다녔으면 박민주씨는 맨하탄 잘 알겠네요?"
"맨하탄은 이미 파악 끝난 지 오래죠."
부기장이 쌀 한톨도 남기지 않고 비운 비빔밥 그릇을 내가 다 먹은 그릇위에 포개두고 일어섰다. 드디어 부기장이 월급값을 하러 떠나는구나. 하고 기뻐했지만 생각해보니 5분 후 부터는 나도 일을 해야한다.
소중한 휴식시간이 부기장과의 기싸움으로 다 소진된 것을 생각하니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쪽잠도 못자고! 앞으로 세 시간은 더 버텨야 다시 쉴 수 있는데.
조종석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뭔가 할말이 있는 것 처럼 음. 음 하고 헛기침 아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고르고 있는 부기장을 의아한 듯이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뭐 할 말 있으신가요?"
"맨하탄 그렇게 잘 아시면 제 가이드 좀 해주시죠"
"네?"
"저 맨하탄 한 번도 구경 해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박민주씨는 저한테 갚을 일도 있으실텐데"
라고 말하며 자신의 셔츠를 가리키는 부기장은 마치 악마와 같았다.
비행이 끝난 후 꿀맛같은 휴식시간 마저 부기장에게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눈 앞이 아찔했지만 콜라사건이 맘에 걸려 어쩔 수 없었다.
"박민주씨 내일 아침 7시에 호텔로비에서 만나요"
"네 부기장님 내일 뵈요"
다음 날 아침
"부기장님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죠?"
"네. 오늘 어디가나요?"
"부기장님이 가고싶은데 정하셔야죠"
"가이드 해주시기로 하셨으면 해주셔야죠"
"타임스퀘어 아니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야경, 소호나오번가에서 쇼핑?"
"저보다 박민주씨가 더 신나신거 같네요. 뭐 먹고 돌아다닙시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생전 처음 오는 관광객 마냥 우리는 쉴틈없이 맨하튼을 돌아다녔다.
해가 저물고 우리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야경을 보러갔다.
누군가와 같이 여행을 하게 되서 인지, 아니면 야경에 취한 분위기 탓인지, 평소라면 하지도 않았을 얘기들을 늘어 놓다가 일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박민주씨, 이제껏 해본 여행중에 박민주씨와 한 여행이 가장 재밌었어요. 저..그러니까 앞으로도 같이 나와 여행다녀줄래요?"
이 때 내 머리는 둔기에 맞은 것 처럼 멍해 있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여행 다니자구요 저랑.같이."
그 후 우연인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비행 일정이 자주 겹치는 탓에 여행을 자주 하게되었다.
파리에서는 온갖 디저트를 먹으러 다닌 우리.
일본에서는 오코노미야키,우동,다코야키 등 길거리를 수 없이 돌아다니며 먹어댔던 우리. '
유럽에서는 열기구를 타며 어린아이 같았던 우리.
처음의 그때처럼 또 뉴욕행 비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
즐겁게 여행을 하며 돌아다니다 전처럼 일정의 마지막으로는 야경을 보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향했다.
첫 만남보다는 많이 편해진 분위기로 얘기를 늘어 놓다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민주씨 저와 평생 함께 여행할래요?"
순간 나는 그 때와 같이 멍해 있었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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