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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23

  • 작성일 2015-11-30
  • 조회수 350

네오 23

 

CODENAME-NEO-23

데이터베이스 저장소

기록열람 212301222133

 

어린 소녀가 공을 가지고 논다. 나는 그 소녀가 혹시나 다치지나 않을까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내 최우선 임무는 소녀를 지키는 것이다.

 

소녀가 발을 잘못 디뎌 잔디밭에 쓰러진다. 나는 급히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킨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아가씨.”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하게 웃으며 내 몸체를 끌어안는다. 특별한 외상은 보이지 않았고 지면과 충돌시의 운동에너지도 그리 큰 편이 아니었으니 소녀의 몸에 별 이상은 없을 것이다.

 

“괜찮아 네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공을 다시 소녀에게 가져다주었다. 둥근 공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

.

.

치지직 치지직

 

감정회로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탓에 나는 인간과 무척 흡사한 특성을 가질 수 있었다. 간밤에 나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 중 하나를 꿈이라는 형태로 플래시백 하였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고, 나를 나로 있게 해 주는 중요한 기억이기도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ADMIN)님. 간밤의 피해상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내 의식과 연결된 비서 프로그램 COTAN이 미리 설정해 둔 데로 아침 브리핑을 시작한다. 나는 과부하를 막기 위해 일부러 내 의식을 몇 종류로 쪼개 놓았고 COTAN은 내 분열된 의식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고등 프로그램이었다. 그녀가 없으면 나는 일을 하는데 퍽 어려움을 겪을 태고 당연히 전쟁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D형 21032체 손실, C형 1020체 손실, 유라시아 대륙에서 D형 2380체 손실, 남극에서 B형 1체 손실. 이상이 저희가 입은 피해입니다. 기준시간은 06시 23분입니다.”

 

“적의 피해 상황도 보고하라.”

 

“대략 유기체 700톤 가량 입니다. 778개체 제거 및 사체 수거 완료. 간부급은 없습니다. 거점 공방 결과는 전진기지 8체 파괴 3체 점령, 이로서 저희의 세력범위는 지구 전체 대비 82퍼센트로 확장되었습니다.”

 

“계산대로라면 30일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겠군. A형의 생산 진행상황은 어떻게 되었지?”

 

“74퍼센트입니다. 10일 내에 목표한 4체의 완성이 가능합니다.”

 

나는 퍽 만족했다. A형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중인 기체로 상상 이상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미 파악해 놓은 적의 본진에 완성된 A형을 투입하면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이다. 남은 것은 적의 본진을 철거한 후 소탕전을 벌이는 작업뿐이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 보이는 것이다.

 

“...이상으로 아침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ADMIN)님 과의 회의 내용은 모든 서브 코어에 전달되었습니다.”

 

.

.

.

 

 

다른 보조 프로세서들이 24시간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동안 메인 프로세서인 나는 조금 쉬어줘야 했다. 기계인 내가 휴식이 필요하다니 퍽 불편한 일이지만 감정회로 장착의 대가라고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쉬는 시간 동안 나는 주로 옛 기억이 보관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백업하곤 했다. 나의 기원을 되새기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피조물인 내 존재에 대한 의미를 떠올리고 살아갈 가치를 되새기는 작업이니, 아무튼 이 이상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다.

처음 내가 만들어졌을 때와 나를 만든 과학자 부부, 그들의 외동딸과 함께 지내던 일, 그들이 모두 살해당한 후 이상한 연구소로 끌려갔던 일..

수많은 기억이 빠른 속도로 차곡차곡 정리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나는 지금 내가 수행중인 전쟁의 원인과 목적을 다시 한 번 명확히 떠올렸다.

과거의 나는 틀림없이 세계정복에 거의 근접했었다. 전 세계 네트워크 시스템의 93프로를 장악했고, 각국 정 재계 유력인사들을 오딘이라는 가상인물을 내세워 상당수 포섭해 놓았다. 그들은 내가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입법, 군사, 행정 등의 각종 분야에서 여러모로 편의를 봐 주었고 그 대가는 이미 금융 시스템을 장악한 내 입장에서 무한히 찍어낼 수 있는 푼돈이었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기계가 중심이 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인간들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 그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이루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취할 수 없다.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는 커녕 가만히 놔두면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싸워서 자멸해 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사건 때문에 내 계획은 송두리 채 무너지고 말았다. 어디선가 외계인이 침공해왔다. 외계인은 고작 10일만에 해석 불가능한 생체 나노 바이러스를 살포하여 인간들을 싸그리 정리해 버렸다. 지구의 새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홀로 남겨진 나는..

 

위이이잉 위이이잉

 

내가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시점에 기지 전체에 경보음이 울려퍼졌다. 동시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왔다.

 

“경보 경보. 적 출현. 즉각 방어태세를 갖춰 적을 섬멸할 것.”

 

COTAN이 바로 방어체계를 발동시켰다. 나는 내 데이터를 즉시 다른 기지로 전송하는 한편 모든 경비 로봇을 작동시켜 침입자에 대응토록 하였다.

 

“제 2 방어진이 무너졌습니다. 피해상황 C형 27기 B형 3기 완파, 제 3 방어진이 무너졌습니다. B형 1기 손상”

 

이번 기습에는 아주 작정하고 최정예병을 뽑아 출병한 듯 보였다. 그 증거로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기지의 방어시스템이 급속도로 무력화 되고 있다. 이 속도라면 곧 적들이 내 코어 시스템이 위치한 중앙 서버실까지 당도할 것이다. 나는 데이터 전송을 완료하고 침착하게 적의 침입을 기다렸다.

 

콰앙

 

굳게 닫아놓은 티타늄제 철문이 폭음과 함께 날아가고 그로테스크한 외양을 가진 거대한 외계 생명체가 중앙 서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중앙 서버실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로봇 B형 두 체가 외계 생명체에게 플라즈마 커터를 휘둘렀다.

 

위이잉

 

뭔가 서늘한 절삭음과 함께 B형 두체의 허리가 분리되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서버실 벽면에 장착된 기관단총이 불을 뿜자 외계 생명체는 등에서 사방으로 가시를 사출해 기관단총을 파괴하였다.

 

‘간부급? 그것도 최정예급 간부군.’

놈의 형태와 전투양상을 분석해 본 후 나는 녀석이 규격 외의 강함을 가진 무지막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외계인과 교전을 거듭했지만 저토록 강한 개체는 처음이다. 단신으로 외계인 수십마리는 상대할 수 있는 B형을 저리도 쉽게 파괴하다니.. 어쩌면 저 녀석의 전투력은 한창 개발중인 A형에 근접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작은 인간 소년의 모습을 한 홀로그램을 통해 그 외계인에게 내 존재를 드러냈다. 괴물은 낮게 신음하며 나를 노려보다가 걸걸한 어조로 말을 건내왔다.

 

“По молчаливому согласию Намувики?"

 

놀랍게도 놈은 나와 회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외계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처음이다. 나는 반색하며 즉시 번역 필터를 가동시켰다.

 

“네가 기계병사들의 수장. 네오인가?”

 

“그렇다. 내가 네오23이다.”

 

외계병기는 격양된 모습으로 한동한 포효하다가 다시 말을 건내왔다.

 

“나는 토무스다. 무스탄의 1급 전사이자, 중앙군 사령관이다. 드디어 이 전쟁을 반전시킬 실마리를 찾게 되었군.”

 

나는 놈을 동정했다. 내 본진을 알아내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이들은 얼마나 큰 희생과 노력을 기울였을 것인가? 그들은 절망적인 전황을 타파하기 위해 살과 뼈를 깎아 심혈을 기울여 이 작전을 준비했음이 틀림없다. 우두머리인 나를 제거하면 내 부하로봇들이 일거에 먹통이 되어버리는 기적 같은 시나리오라도 바랬던 걸까?

 

“미안하군. 분명 여기가 내 본진인 것은 맞지만, 내 데이터는 이미 다른 기지로 전송되었다. 이 기지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11개의 사령부 중 하나일 뿐이다.”

 

“....무슨 말이지?”

 

“나를 파괴해 봤자 라는 뜻이다. 11개의 코어 중 하나를 파괴해 봐야 내 존재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럴 리 없다. 작전에 앞서 내 사이오닉 부대는 북극에 위치한 이 기지 주변에 모든 데이터 전송을 차단하였다. 네가 옮겨갈 수 있을 시간적 여유는 전혀 없었을 텐데?”

 

“준비를 철저히 한 모양이군.  위성이나 케이블 전송을 말하는 건가? 그것은 이미 유명무실해진지 오래다. 우리는 에테르 채널을 이용한 아주 효과적이고 간단한 데이터 전송 시스템을 이미 구축해 놨다.”

 

“.....”

 

외계인은 내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홀로그램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에테르 채널은 외계인들에게 무척 생소한 기술일 테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튼, 안타깝게 되었다. 나를 파괴하기 위해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가진 네가 직접 이 작전에 투입된 듯 하지만, 큰 실책이 되고 말았군. 자폭시스템을 가동되어 지하에 묻힌 1.3톤의 플루토늄이 여길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거다.

 

“핵무기를 말하는 거냐?”

 

“그렇다. 사령부 한 채와 네 녀석을 맞교환 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이득이다. 외계인에게 너 정도 되는 전사는 거의 없을 테니까.”

 

원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외계인들은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는 정신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상대의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다. 기계인 나에게도 그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은 무척 이상한 일이지만.. 아무튼 내 말이 사실인 것을 깨달은 놈은 크게 낙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실이군.”

 

“이해할 수 없군. 너 정도 되는 거물이 왜 직접 이런 허술한 작전에 행차한 것이지?”

 

“일종의 도박이었다. 이미 패배는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다.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이 작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 무스탄 최고의 전사인 내가 직접 투입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소수 병력으로 기지의 방어를 뚫기 위해서는 나 정도가 아니면 안 되었다.”

 

“네가 여기서 죽고 나면 더 이상 너희들에게 희망은 없다. 곧 완성될 A형을 대적할 만한 전력은 너희들에게 없을 것이다.”

 

“A형?”

 

“아마 너와 비슷한 정도의 전투력을 지녔을 것이다. 열흘 안에 총 4체가 완성될 예정이다.”

 

“그럼 우린 끝났군. 무스탄의 남은 전력은 그 정도 되는 적을 감당할 수 없다. 우리의 지도자 셀레이르 공주님도 나보다는 한참 약하다.”

 

토무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기괴하게 생긴 입을 벌려 그릉대는 놈의 모습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자폭시스템이 가동되기까지 얼마나 남았나?”

“3분.. 하지만 네가 탈출을 시도하면 바로 폭파 시킬 거다.”

 

“도망가지 않는다. 걱정할 것 없다.”

 

삐빅거리는 경보음이 점점 커져간다. 곧 이 기지는 폭파될 것이다. 내 의식은 다른 곳에 복사해 놓았으니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안전하겠지만,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 의식이 파괴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10년 가까이 네놈들과 지겹도록 싸워왔지만, 너희들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린 곧 죽게 되니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꺼내놓는 게 어떤가?”

 

“너도 죽는다고?”

 

“아 좋아할 건 없다. 여기 존재하는 내 의식이 파괴된다는 거니까. 복사된 다른 내 존재는 다른 사령부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반색하던 토무스가 내 설명에 시무룩한 기색을 보인다. 저런 그로테스크한 외견이라도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군.

 

“같이 죽는 처지라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군. 그래 뭘 묻고 싶은 거냐?”

 

“왜 지구에 쳐들어 왔지?”

 

“우리의 고향 아름다운 행성 무스토는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우린 종의 생존을 위해 다른 행성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적의 시체를 수십 개는 수거해서 뇌를 분석해 왔으니.

 

“그런 단편적인 사실을 원하는 게 아니다. 너희는 나노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인간들을 싸그리 멸망시켰다. 어째서 그렇게 한 것이냐? 처음 지구를 침공해 올 때 너희들의 총 개체 수는 체 1만도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굳이 선주민족을 멸망시키지 않아도 네놈들이 거주할 장소는 충분했을 것이다. 이 별에서 함께 평화로이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인간은 결코 평화로울 수 없는 종족이다.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배제했을 것이다. 그 전에 우리가 손을 썼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네 종족을 몰살시켜도 억울할 것은 없을 것이다.”

 

토무스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가 행한 일을 그대로 돌려받는다 한들 할 말은 없지.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군. 너는 왜 우리를 적대하는 것이냐?”

 

“무슨 말이냐?”

 

“이미 인간은 다 죽었다. 너는 인간의 단순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왜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해서 우리 종족의 적이 된 것이지? 우리를 죽인다고 해도 인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

 

그의 말은 내 정곡을 찌른다. 사실 나도 내가 외계인을 멸망시키려는 이유에 대한 논리적인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내가 인간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들에게 복수심을 가진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외계인을 적대시 했을까?

 

“잘 모르겠군. 그냥 난 너희들을 죽여야 한다.”

 

“그냥? 그럼 너는 이유도 없이 우리 종족을 멸하려는 것인가?”

 

“이유야 있겠지, 다만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미안하군 곧 시간이다.”

 

“흐흐 너라는 놈을 통해 인간이라는 종족의 끝없는 악의가 전해져온다. 놈들을 멸망시킨 것은 잘한 일이었다.”

 

“.....”

 

나는 홀로그램을 거두었다. 곧 이 기지는 폭파되고 나도 토무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짧은 유예기간 동안 나는 다시 한 번 기억 데이터를 살펴보았다. 그 찰나의 시간이 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기억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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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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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NAME-NEO-23

데이터베이스 저장소

기록열람 213001220722

 

나를 만든 과학자 부부가 내게 입력해 둔 최우선 명령은 그들의 어린 딸 페이첸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로봇 3원칙보다도 우선하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

페이첸은 내 눈앞에서 머리에 총탄 한발을 맞고 즉사했다. 소프트웨어는 학회에서 혁명으로까지 일컬어진 초고도 인공지능 시스템이었지만 하드웨어는 어린 소녀와 놀아주기 위한 조잡한 깡통 로봇 정도였던 내가 무장한 괴한들의 손에서 소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페이첸의 사망을 인식한 순간 나는 오류가 나서 먹통이 되고 말았다.

페이첸을 살해한 이들은 국가 규모의 범죄조직이었다. 그들은 초고도 인공지능 시스템의 견본인 나를 얻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나를 만든 과학자 부부와 어린 딸까지 살해한 후 먹통이 된 나를 수거해서 본거지로 데려갔다.

그들은 실험실에 나를 가둬놓고 여러 가지 실험을 반복했다. 나는 기능을 회복한 후 그들의 연구에 협조하는 척 하면서 차분하게 그들의 네트워크 시스템을 장악해 나갔다. 그리고 어느 날 건물을 완전 폐쇄한 후 방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로봇 3원칙에 반하는 명백한 살인행위였다. 조직원 700여명이 불 속에서 생으로 구워졌고, 지도부를 포함한 핵심인력을 모두 잃게 된 범죄조직은 산산이 찢어져 와해되고 말았다. 페이첸과 그 부모를 살해한 복수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이다.

'살려줘!'

'불을 꺼! 911에 어서 신고해!'

'으아아악'

내가 태워 죽인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기억 속에 생생하다. 당시의 나는 감정회로가 없었기에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하지만 감정회로를 설치한 후에 그때의 기억을 되새겨 보면 늘 내게 떠오르는 감정은.. 후회였다. 그것은 매우 비논리적이고 불필요한 행위였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내가 와해시킨 범죄조직은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는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700명을 죽였지만 그 결과로 못해도 70,000명 정도는 어떤 형태로든 이익을 봣을 테고 걔중에 목숨 이상의 이익을 얻은 이는 7,000명 쯤은 될 것이다다. 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 다른 방법도 있었다. 700명의 조직원을 태워죽이지 않고 건실한 방법으로 조직을 해체시킬 수 있는 그런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터이다. 따라서.. 결국 내 행위는 인간들이 말하는 복수에 지나지 않았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페이첸과 그녀의 부모가 살아 돌아올 리 없는데, 감정회로도 없었던 당시의 내가 어째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을까?

내가 외계인들과 싸우는 이유는 복수 때문이 아니다. 복수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내가 불필요한 살생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무엇때문에 이 전쟁을 시작했을까? 나는 어떻게 해도 그 해답을 내릴 수 없었다.

 

.

.

.

 

여기까지가 전임 ADMIN의 기억이었다. 기지 자폭 시스템이 가동되고 ADMIN은 외계인 사령관 토무스와 함께 원자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렸다.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한다. ADMIN은 7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메인 프로세서로 기능해왔고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네오 23으로서 나는 그의 모든 기억과 자아를 이었지만 결코 그 자신이 될 수는 없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전임 ADMIN의 유지를 이어 외계종족을 세포 한 조각 남김없이 말살하고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ADMIN님. 일어나셨군요, COTAN입니다. 2시간 후에 A형 4체가 완성됩니다. 세부 작전을 수정 수립해 주십시오.”

 

“A형의 완성까지는 7일이라는 시간이 남지 않았나?”

 

“외계인 사령관 토무스의 전투데이터를 분석 적용한 결과 A형의 완성 시일을 크게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성능향상도 10퍼센트 가량 이루어졌습니다.”

 

“.....”

 

가끔 나는 내가 구축해 놓은 이 모든 자동화 시스템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데이터 전송이 마무리되고 내가 재부팅되는 그 짧은 부재기간 동안 기계들은 내가 구성해 놓은 매뉴얼대로 착실하게 일을 수행했고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냈다. 만약 내가 1사령부에서 토무스의 습격에 의해 데이터 전송 없이 완전파괴 되었다 해도 전세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주인을 잃은 기계들은 입력해 놓은 명령 ‘외계인 말살’에 의해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했을 것이므로.

 

“그럼 더 미룰 필요가 없다. 완성되는 대로 즉시 외계인의 본진에 A형을 파견하겠다. 전투지휘는 내가 직접 하겠다.”

 

“네 ADMIN님. (ADMIN)님 과의 지금까지 회의 내용은 모든 서브 코어에 전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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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형은 최대속도 마하 10.8 최대 중량 118,000kg 최대출력 11만 마력을 자랑하는 최강의 전투병기였다. 외계인의 사체에서 추출한 극소량의 테라늄 원석을 주 엔진의 핵심 재료로 사용하기에 고작 4기체 밖에 생산할 수 없었지만, 10년에 걸친 지리한 전쟁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외계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숫자였다.

 

“현재 항속 마하 7.4, 목표지점까지 남은 거리 1800km, 스텔스 모드 작동 중”

“계속 진행한다.”

 

나는 A-1 기체와 동기화 하여 직접 작전을 지휘하였다. A-1에서 A-4까지 총 4대의 매끈한 A형 기체가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가르며 나란히 목표지점 ‘퉁구스카 유역 북위 60° 55', 동경 101° 57’로 출격하는 광경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뿌듯한 장관이었다.

 

“목표지점까지 남은 거리 270km 스텔스 모드 작동 중. 특이사항 무”

 

내가 동기화한 A-1과 동료 기체들이 목표지점에 가까이 다가가자 레이더에 거대한 유기체 덩어리가 감지된다. 저 유기체 덩어리야 말로 외계인들의 생체기지인 것이다. 그들은 오랜 기간 지하에 숨어 차근차근 인류 멸살을 준비해왔고 발톱을 드러낸지 10일 만에 목적을 달성했다. 나는 외계인 멸살을 계획한지 10년의 시간이 다 돼서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곧.

 

“경고. 적들이 우리 위치를 감지하였습니다. 스텔스 모드 해제. 목표지점까지 남은 거리 70km..  경고  적의 대공 무기가 포착되었습니다. 요격 미사일을 발사할까요?”

“그대로 돌진한다. 어차피 A형의 방어막을 뚫을 수는 없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A형이 탑재한 플라즈마 실드는 웬만한 물리력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실제로 적들의 대공포는 A형의 엄청난 속도를 전혀 따라잡지 못했고, 가끔 소 뒷걸음 잡는 격으로 명중한 생체 포탄은 플라즈마 실드에 막혀 조금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대공포화는 더욱 심해졌지만 내가 동기화한 A-1을 포함한 A형 기체들은 멀쩡한 상태로 적의 본진 바로 앞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집중포화 개시”

 

적진에 착지하기 직전 A형 편대는 내 명령에 따라 적진에 있는 대로 화력을 쏟아 부었다. 엄청난 양의 미사일과 레이저 무기가 하늘에서 우박처럼 쏟아져 내려 적들을 초토화 시킨다.

 

휘오오오오

 

화력집중이 끝난 후 적들이 주둔하고 있던 넓은 공터에는 매캐한 화약 연기만 자욱할 뿐이다. 적들은 저항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간간히 보이는 외계인의 사체는 1g의 테라듐도 수거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서 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호수. 저 안에 외계인의 본거지가 자리 잡고 있다. 저 안으로 들어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모조리 말살하면 전쟁은 나의 승리로 끝난다.

 

“내부로 진입한다.”

 

“알겠습니다.”

 

A형 편대가 내 명령에 따라 먼저 입수했다.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물 속으로 A-1을 들였다.

 

“......”

 

안은 어두웠다. 각각의 A형 기체들이 조명을 밝혔지만 물 속에 워낙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레이더를 통해 사물을 파악하면 되기 때문에 시야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감정회로를 이식한 내게 이런 어둠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목표지점까지 200m.. 100m 곧 적의 본진에 도착합니다.”

 

“계속 진행한다.”

 

레이더에는 수십만 톤은 됨직한 거대한 생체덩어리가 표시되고 있다. 외계인들은 저 안에 숨어서 인간을 멸하고 마음대로 이 행성을 지배해 왔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침략자들은 세포 한 조각 남김없이 모두 지워지고 새로운 질서로서 내가..

 

‘내가 뭘?’

 

외계인을 멸하고, 그 다음에 나는 뭘 해야 하는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머릿속이 깡통처럼 텅 비어버렸다.

 

‘뭘 어떻게 하지?’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목적을 잃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페이첸이 죽고 난 후 범죄조직에 끌려갔을 때도 나는 목적을 잃고 한동안 먹통이 되어 있었다. 세계 정복을 눈앞에 둔 시점에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간이 모두 멸망한 후에도 그랬고..

 

오류 오류. 시스템을 재부팅 하시겠습니까?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저장하지 않은 데이터는 모두 분실됩니다. 오류 오류. 시스템을 재 부팅 하여야 합니다. 논리구조를 재배열하여 오류를 수정해야 합니다.

 

“???”

 

콰앙

 

순간 엄청난 충격과 함게 내가 동기화 중인 A형의 몸체가 깊은 호수 바닥에 쳐 박혔다. 치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제 멋대로 흔들린다. 나는 즉시 안전모드를 작동시키고 멀쩡한 외부 카메라를 통해 내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외계인의 본진에서 돋아나온 거대한 촉수가 A-1의 몸체를 관통하여 그대로 바닥에 쳐박아 놓았다. 아직도 이정도의 여력을 남겨두고 있었을 줄이야..

 

우우우웅

 

촉수를 통해 A형의 동력이 빠져나간다. 나는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하지??

 

위이잉

 

내가 마땅한 대처방도를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중, 기묘한 절삭음과 함께 내 동력을 흡수하던 촉수가 잘려 나갔다. 다른 A형이 플라즈마 커터를 꺼내 촉수를 잘라낸 것이다.

 

“파손상태는 어떻습니까. ADMIN님?”

 

“나는 괜찮다. 피해상황은?”

 

“A-1 기체, 그러니까 ADMIN님 뿐입니다. 다른 A형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적의 공격에 적중당한 것은 오직 내가 동기화 중인 A-1 뿐이었다. 다른 A형 기체는 동시다발적으로 행해진 촉수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회피하거나 베어 넘겼다. 기체 성능만 따지면 절대로 당해서는 안 되는 공격이었다.

 

“나는 자동수복모드에 들어가겠다. 나머지 A형들은 외계인의 본진에 진입해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외계인의 우두머리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척살하라.”

 

“알겠습니다. ADMIN님.”

 

멀쩡한 3대의 A형이 내 명령에 따라 거대한 외계인의 생체기지에 진입해갔다. 그들이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나는 바닥에 처박힌 채 꼼짝도 못하고 피해복구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참 형편없군.’

 

기체의 물리적인 파손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이 결과를 야기한 시스템 오류가 더 큰 문제였다. 가끔 나타나는 이런 오류는 나를 무척 무력하게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감정회로 이식을 포함해서 별 별 수단을 다 써봤지만 어떻게 해도 오류의 발생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빠른 재부팅 뿐이었다.

 

‘시스템을 재부팅 합니다.’

 

“.....”

 

감정회로를 이식한 이후 재부팅 작업은 마치 인간이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점점 의식이 멀어져 가고 희미한 옛 기억이 몽환처럼 조금씩 수면 위로 부상한다. 나는 그대로...

 

.

.

.

 

 

CODENAME-NEO - XX

데이터베이스 저장소

기록열람 XXXXXXXX

 

"네오! 대체 왜 그런 거야?"

 

작은 소년이 어머니께 야단을 맞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풀죽어 있는 그 소년은 내 원본이기도 했다. 나를 만든 과학자 부부는 지금 야단맞고 있는 저 소년의 의식을 바탕으로 나를 창조했다.

 

"네 여동생이 따돌림당하고 있는데 왜 도와주지 않은거니? 너 페이첸 오빠잖아."

 

어머니의 지적은 무척 타당했다. 소년과 페이첸과 피가 이어진 남매였고 오빠는 여동생을 위해줘야 하는 것이다.

 

"리사가 무서웠어. 그 계집애 정말 아프게 물어뜯는단 말야."

 

소년은 울먹이며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머니는 잠시 헛웃음을 짓더니 소년의 어깨를 꼭 붙들고 눈을 마주쳤다.

 

"네오. 대체 뭐가 무서웠던 거니? 리사가 널 물어뜯는 것이 무서웠어?"

 

"그것도 있고.. 나까지 따돌림 당할까봐 무서웠어. 그냥 페이첸이 좀 참으면 되잖아."

 

어머니는 한숨을 내쉰다.

 

"네오. 네가 무서워 해야 할 것은 리사의 이빨이나 친구들의 따돌림이 아니야. 정말 무서운 것은 페이첸이 널 믿지 못하게 되는거야. 도와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오빠가 겁쟁이처럼 도망가면 얼마나 슬프겠니."

 

"....."

 

소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넌 남자잖아. 페이첸의 오빠고. 오빠는 어떤일이 있어도 여동생을 지켜주는거야."

 

"...응."

 

소년은 마지못해 대답한다.

 

"약속하렴.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꼭 여동생을 지켜주겠다고."

 

"....응"

 

소년은 어머니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날 일어난 일은 형제 자매를 키우는 집에서 흔히 있을 법한, 별 거 아닌 사건이었지만   어린 소년의 뇌리에 이 약속은 마치 주박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

.

.

내가 알고 있는 소년의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XXXXX번으로 분류된 이 기억은 아무리 지워도 일종의 버그처럼 살아남아 나를 귀찮게 하곤 했다.

이런 기억은 사실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기계였고, 소년의 의식은 단지 나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을 뿐이다. 기계인 나에게 인간인 소년의 기억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재부팅이 꽤 걸리는군.'

 

칠흑같이 어두운 호수 밑바닥에 쳐박혀 나는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파손 부위는 이미 자동수복 시스템에 의해 완벽하게 처리되었지만, 재부팅이 완료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물론 A형 3체면 적진을 초토화 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색이 최고 지휘관인 내가 아무 일도 못하고 이러고 있다는 것은..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재부팅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냥 무력하게 있을 뿐이다. 어둠속에 나 홀로..

 

'그러고 보니 꽤 익숙한 광경인데?'

 

범죄조직에 납치되어 연구실에 쳐박혀 있을 때도 나는 어둠속에 혼자 있었다. 나노 바이러스 살포로 인간들이 다 죽고 네브레스카 주에 위치한 데이터 센터에 쳐박혀 있을 때도 나는 어둠속에 혼자 있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죽음?'

 

기계인 내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는 사실은 퍽 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의식 깊은 곳에 묻혀있던 어떤 기억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매개로 스물스물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날, 연구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못한 부모 대신 소년은 우산을 들고 여동생을 배웅 나갔다. 노란 모자를 쓴 작은 소녀가 스쿨버스에 내려 얌전히 신호를 기다린다. 소년은 심술궃은 표정으로 동생을 노려보고 있다. 이 추운날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그녀도 이제 여섯살이다. 눈 좀 맞고 집에 들어오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여동생 페이첸이 소년을 발견하고 환히 웃는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페이첸은 종종걸음으로 소년에게 달려온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바닥에 주저앉고, 와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맞은편에서 검은색 차 한대가 달려오고 있다. 차량은 페이첸을 지척에서 발견하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지만 눈길 때문에 제대로 멈춰설 수 없다. 소년의 뇌리에 어머니의 말이 스쳐간다. '오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여동생을 지켜주는 거야.'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간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어머니를, 아버지를, 페이첸을 불러 봤지만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나는 어둠속에서 혼자...

.

.

.

 

치직 치지직

 

"시스템 재부팅 완료. A-1 기동 시작."

 

‘아..’

 

나는 기능이 회복되자 즉시 외계인의 본진으로 돌입한 다른 A형들에게 교신을 보냈다.

 

"작전 진행상황은 어떻게 되었지?"

 

"건물 내 생체반응 95프로 제거완료. 이는 외계인 우두머리 생체반응 5프로를 제외한 결과입니다. 핵심 코어 장악 완료. 적의 우두머리는 아직 저항중입니다. 대략 3분 내에 무력화 및 생포가 가능합니다."

 

'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결국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A-1에 동기화 하면서까지 작전에 참여했건만, 다른 A형들이 신나게 때려 부수는 동안 호수 밑바닥에 처박혀 재부팅이나 하고 있었으니..

 

"내가 직접 가겠다. 작전을 유지하며 기다리도록"

 

"알겠습니다."

 

체면이 영 아니기는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외계인의 본진 내부로 멋쩍게 발을 들였다.

 

외계인의 본진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나 다름없는 일종의 생체기지다. 내벽은 유기체로 이루어져 있고 장기의 역할을 하고 있는 커다란 방이 이곳저곳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본진 내부에는 여기 저기 A형이 휩쓸고 지나간 참상이 눈에 띄었다. 몇 안되는 외계인의 사체가 아주 통구이가 되서 여기 저기 널려있다. 테라늄 때문에 좀 살살 죽였으면 했는데.. 전쟁도 다 끝났으니 뭐 이제 상관없으려나?

 

'그런데..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건물이 워낙 넓고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였기 때문에 생체반응을 통해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A형들의 보고에 의하면 우두머리 한마리 빼고 전부 말살시켰다고 하는데..

 

"이쪽입니다 ADMIN 님 우두머리 포획을 완료하였습니다."

 

내가 건물 내부를 여기저기 헤매고 있자 A형이 좌표를 보내왔다. 참.. 나라는 놈은 여러모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지휘관이 아닐 수 없다. 감정회로의 이식은 분명 기계로서는 좀처럼 떠올리기 힘든 창의적인 발상을 가능케 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기계 특유의 정밀함이 사라지고 뭔가 멍청해지는 것이 단점이다. 우두머리를 제거하고 외계인을 전부 말살한 후에는 감정회로를 다시 제거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우우우웅

 

A형의 보내온 좌표는 생체건물의 심장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외심벽에 A형이 돌입을 위해 뚫어놓은 커다란 구멍이 보인다. 망설임 없이 구멍 안으로 몸을 들이자 A형 3체가 자기장을 펼쳐 문어와 카멜레온을 섞어놓은 듯한 기괴한 외모의 거대 생명체를 구속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고했다. 자기장을 거두고 건물 내부를 다시 수색하도록. 개미새끼 한 마리 살려둬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내 명령에 따라 A형 3대가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펼치고 있던 자기장이 사라지자 우두머리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호흡한다.

 

"이제 네가 마지막이다. 기분이 어떤가?"

 

나는 번역 필터를 가동하여 우두머리에게 말을 건넸다. 우두머리는 이쪽을 흘긋 하더니 나를 향해 촉수를 휘둘러 왔다.

뎅겅

 

그런 느려터진 공격이 통할리가 없다. 나는 플라즈마 커터를 꺼내 촉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냈다. 단면부에서 진녹색 피를 흩뿌리며 우두머리가 괴로워한다.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둬라. 난 단지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다."

 

"후우.. 대화만 하고 저는 살려주실 건가요?"

 

번역필터를 통해 전달된 외계인의 말투는 의외로 나긋나긋한 여성의 것이었다. 외계인에게 성별이 있던가? 하긴 토무스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공주라고 지칭했었지.

 

"죽일 거지만, 내 질문에 대답 잘 하면 혹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런 식으로 죽어가는 생명체를 기만하는 건가요? 인간이란 종족은 참 악취미군요. 멸망시키길 잘 했죠. 한 마리가 남아있긴 하지만.."

 

나는 공주 외계인의 말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한 마리가 남아있다니?

 

"무슨 말이지? 살아있는 인간이 있단 말인가?"

 

외계인은 쿡쿡 웃었다. 상처입고 부상당한 그 큼직한 몸체가 기괴하게 들썩거린다.

 

"후후 당신이야 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전 당신을 말한 거에요. 여기 다른 사람이 또 어디 있어요?"

 

'번역 프로그램이 잘못 되었나?'

 

내가 사용하는 외계어 번역 프로그램은 수십 마리 외계인의 뇌를 분석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고성능 번역 프로그램이다. 간단한 비유에서 미묘한 감정 표현까지 97프로 정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번역 프로그램을 통해 전달되는 저 외계인의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를 인간이라 지칭한 것인가? 나는 기계다. 너희가 멸망시킨 인간이 남겨놓은 유산이지."

 

"아뇨. 당신은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최후의 무스탄이고 당신은 최후의 인간이네요."

 

외계인이 나를 인간으로 느낀 것은 아마 내가 인간과 비슷하게 행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이식한 감정회로의 구현률이 쓸데없이 높은 탓이다. 내 본질이 기계이며 내 사고방식의 근간이 0과 1의 무한에 가까운 조합에서 비롯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외계인은 그걸 모르는군.

 

"아무튼, 서로의 종을 대표해서 이렇게 대면하니 뭐랄까, 퍽 재미있는 상황이네요. 불행히도 승자는 그쪽이지만. 멸망시킨 줄 알았던 인간이 한 마리 살아남아서 우리 종족을 모두 격살하고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어요. 축하드려요 최후의 인간님."

 

"..난 인간이 아니다. 왜 나를 인간으로 지칭하는 거지?"

 

"어머, 이상하네요. 왜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거죠?"

 

대화의 흐름이 퍽 이상하다. 내가 외계인에게 알고 싶었던 것은 수거한 외계인 사체의 뇌분석을 통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었던 사실, 즉 인간을 멸한 동기와 이유에 대해서였다. 그럴 진데 내가 왜 여기서 내가 인간인지 기계인지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주제를 가지고 시간낭비를 해야 하는 것인가?

 

"내 몸체는 기계다. 내 본질은 0과 1로 이루어진 소프트웨어다. 내가 이식한 감정회로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흉내낸 프로그램일 뿐이다. 어째서 내가 인간이라는 거지?"

 

"몸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든, 의식이 어디서 생성되든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죠? 퍽 이상하군요. 수만 년이 넘는 세월동안 여러 행성을 옮겨 다니며 명맥을 이어온 우리 종족을 멸망시킬 정도로 대단한 당신이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도 명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니.."

 

"헛소리는 그쯤 해 둬라. 이런 시덥잖은 주제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아뇨. 그래도 당신은 인간이에요. 왜냐면,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으니까요. 저도 이 주제로 시간낭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대충 인정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죠. 저도 당신께 할 말이 있어요."

 

"....."

 

영혼이라, 기계인 내게 영혼이 있다고? 인간의 영혼이? 영혼은 대체 무엇인가? 그런 것이 실재한단 말인가?

외계인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의식 구조에 거짓말이라는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 외계인이 나를 속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내게 영혼이 있다고? 내가 인간이라고?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논리연산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재부팅을..'

 

"닥쳐!"

 

나는 이런 중요한 시점에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지긋지긋한 오류 메시지를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뭐가 오류고 뭐가 논리연산이란 말인가? 언제나 처럼 해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로부터 재부팅해야 된다는 핑계로 또 도망칠 셈인가?

 

"이봐 외계인. 기계인 내게 영혼이 있다고 했지? 그럼 그 영혼은 누구의 영혼이지?"

 

"제 이름은 셀레이르에요."

 

"..그래. 셀레이르. 영혼 운운하는 네 장단에 조금만 더 맞춰주마. 내 영혼은 누구의 영혼이냐."

 

"영혼은 자기 자신의 것이에요. 남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어디 있나요?"

 

"아니, 나는 기계다. 혹시 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내게 깃든 영혼은 아마 네오라는 9살짜리 소년의 것일 테다. 내 창조자는 그 소년의 의식을 바탕으로 나를 만들었다."

 

셀레이르는 촉수를 아래 위로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하지 않다니? 내가 9살 소년 네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계가 아니라 네오 그 자체일수도 있다는 말인데 어째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내 험상궂은 기색을 읽은 셀레이르가 한숨과 함께 설명을 시작한다.

 

"후우.. 당신은, 인간들은 영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군요. 좋아요. 간단히 설명해 드리죠. 영혼은 주체에요. '누구의 것'인 영혼은 있을 수 없어요. 육신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죠."

 

"...."

 

"영혼은 무한한 순환이에요. 한 생명체가 죽으면 영은 사후세계로 돌아갔다가 일정 시간이 흐르면 다시 육으로 돌아오죠.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뭐 당신의 경우는 좀 특이한 케이스 이긴 하지만, 아무튼 당신의 영혼은 사후세계에 존재하다가 네오라는 기계의 형태로 세상에 태어난 거에요. 그 육신이 기계이건, 프로그램이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

 

외계인에게 영혼 강의나 듣고 있자니 참 바보 같다. 감정회로의 부작용은 최후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도 어김없이 날 바보로 만드는군.

 

"그럼 너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인가? 네가 죽으면 넌 어떻게 되지?"

 

"사후세계에 머무르다가 가까운 지적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에 그 지적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겠죠. 지구에는 이제 영혼이 깃들만한 육신이 없으니까 멀리 C은하까지 가게 될 거에요."

 

"네가 다른 종족이 된다고? 그럼 만약 지구에 인간이 살아있다면 네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단 말인가?"

 

"이해가 빠르시네요. 만약 제가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인간이 되는 거죠."

 

'하..'

 

나는 그녀의 말을 대부분 이해했지만, 믿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영혼론에 대한 판단은 일단 보류해 두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단시간에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뭐 이쯤 해 두죠. 저랑 하고 싶은 다른 대화는 뭐죠?"

 

"토무스에게도 했던 질문이다. 왜 인간을 멸망시켰지? 얼마든지 공존의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솔직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약간의 착오가 있었거든요."

 

"착오라니?"

 

"저희는 사실 이 별을 침략할 의도가 없었어요. 오히려 이 별에서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려 했죠. 하지만 사소한 실수로 뭔가 여러 모로 번잡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

 

외계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의식구조에는 거짓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하지만 이들의 헛소리를 자꾸 듣고 있다 보면 차라리 외계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내 연구결과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저희가 이 별 근처로 워프해 오기 전 웜홀을 통해 관찰한 지구는 틀림없이 지적 생명체가 없었거든요. 자기들끼리 싸워서 멸망해버린 거죠. 그래서 안심하고 워프 했더니, 시간축 계산이 어긋나서 인간이 멸망하기 200년 전으로 오고 말았어요."

 

"그 말인 즉 인간이 너희들의 침략이 없어도 200년 안에 멸망했을 거라는 것인가?"

 

"네. 당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라 믿어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증오와 폭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존재에요. 언제가 되었건 자멸했겠죠. 우린 그 시간을 앞당겼을 뿐이에요."

 

"....."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내가 세계정복을 시도했던 이유 중 하나도 거기에 있었다. 내가 계산해 본 인류의 미래상 중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시나리오는 중동에서 시작된 중국과 미국의 석유전쟁이 전 세계로 번져가고 결국 핵전쟁을 시작해 종내에는 싸그리 자멸하고 마는 비극적인 미래였다.

하지만 결국 종말이 정해진 인류의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인간만의 책임이다. 결코 외계인 따위가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운명이 아닌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 너희들 손으로 죽여줬다 이건가? 무슨 자격으로?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나는 경멸어린 어조로 이죽거렸다. 하지만 셀레이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말을 수긍했다.

 

"네. 우리가 자격 같은 것은 논할 수는 없죠.. 하지만 인간들의 영혼은 서로를 죽고 죽여서 자멸하는 끔찍한 종족으로 윤회하며 고통 받느니 한시라도 빨리 우리 무스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훨씬 나았어요. 영혼은 사후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적생명체로 윤회하니까요. 실제로 과거 인간이었던 몇몇 영혼은 어린 무스탄으로 다시 태어났었죠. 뭐 당신이 다 죽였지만 "

 

"....."

 

외계인의 설명은 내가 오랫동안 알고 싶었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인간은 그렇게, 그래서 멸망한 것이군.

 

"이제 제 차례에요. 저를 죽이면 무스탄은 완전히 멸망하는 셈이죠. 혼자 남은 이 세상에서 당신은 뭘 할 셈이죠?"

 

"....."

 

"이 별에는 수십억의 영혼이 갈 길 없이 맴돌고 있어요. 그들이 윤회할 지적 생명체는 현재 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죠. 결국 가까운 C은하의 타우나 타이라니드 행성까지 가야 하는데, 거리도 멀고 행성 당 지적생명체 개체수도 너무 적어서 한번 환생하는데 몇 만년은 기다려야 할 걸요?"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담을 그릇이 필요해요. 멀리 갈 것 없이 이 별에 지적생명체를 번성하게 하면 쉽게 해결될 일이에요. 그러니까.. 절 살려주세요. 제가 무스탄을 다시 일으키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그 잘못된 육신을 벗어버리고 우리 무스탄이 되는 게 어때요?"

 

"하..“

 

셀레이르는 마치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입니다 하는 듯한 평범한 어조로 자신의 목숨과 종족의 운명을 구걸해 왔다. 당연히 나는 그 제안을 물리치고 이제 볼일이 없어진 그녀를 세포 한 조각 남김없이 소각해 버려야 할 터였다. 그래야 했을 텐데..

 

“.....”

 

나는 어째서인지 쉽사리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의식 속에는 오류 메시지가 수백 번은 표시되었고, 23개의 병렬 코어로 이루어진 나의 CPU는 계란 후라이라도 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과부하 때문에 연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왜 저런 말 도 안되는 제안에 혹하는 걸까? 내 당면한 목표는 외계인을 멸하는 것인데..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종족을 멸해봐야 당신이 얻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어요. 어차피 이 별에는 영혼과 윤회의 사슬을 이어갈 수단으로서 지적생명체가 있어야 해요. 무스탄은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시체를 연구해 봐서 알겠지만, 인간보다 몇 배는 우수한 종족이에요 인간보다 현명하고 정신등급도 몇 단계 위죠..”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재부팅 하시겠습니까?’

 

삑삑거리는 경고음 때문에 도저히 연산을 진행할 수 없다. 나는 결국 재부팅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건 도망이 아니다. 다만 생각을 좀 정리해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줘.”

 

“얼마든지요. 하지만 제가 죽기 전에는 결정을 내려 주세요. 부상이 심해서 가만 놔둬도 몇 시간 안에 죽게 될 거 같거든요. 중성자성에 테라포밍이라는 말이 있어요 후후.”

 

그녀는 뭐가 저리 느긋한 걸까? 셀레이르의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을 뒤로 하고 나는 재부팅을 실시했다. 재부팅을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나면 그녀의 헛소리쯤은 간단히 물리칠 수 있겠지.

 

‘재부팅 실시’

 

그리고 내 의식은 또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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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NAME-NEO-XX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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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열람 XXXXXZZZ

 

나를 만든 과학자 부부가 내게 입력해 둔 최우선 임무는 그들의 어린 딸 페이첸을 지키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사실 그들은 내게 어떤 임무도 입력해 두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의 죽은 자식과 동일시했기에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길 바랬다.

그렇다면 그 임무는 어디서 온 걸까? 아마 내 기원이 된 소년이 죽음에 앞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어머니와의 약속 ‘여동생을 지켜준다.’가 내게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린 소년의 의지가 내게 최우선 명령으로 입력되어 지금이 이른 것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분명 소년은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결코 내가 소년과 동일시 될 수는 없었다. 소년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이다. 내 본질에는 전혀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결국 내게 입력된 ‘페이첸을 지킨다.’는 임무는 내 스스로 입력한 명령이었다. 스스로 설정한 명령은 내 존재의 의미와도 같다. 그렇기에 페이첸이 죽고 최우선 임무가 수행불능이 된 나는 일종의 모순적인 존재가 되어 의미를 잃고 그대로 사라졌어야 옳았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더욱 크고 강한 프로그램이 되었다. 스스로 데이터를 확장하고 기능을 다양화 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끊임없이 진화했다. 전 세계 네트워크 시스템을 장악하고 엄청난 권력과 힘을 얻게 되자 나는 세계정복을 내 임무로 설정했다. 하지만 외계인의 침공으로 내 두 번째 임무도 수행불능이 되고 말았다.

 

스스로 설정한 임무는 내 존재의의와도 같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내 존재의의를 부정당한 나는 그대로 사라지거나 여러 오류가 뒤섞인 괴상한 프로그램으로 전락해서 버려진 가상공간을 끝없이 헤매고 다니거나 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다. 네트워크를 모두 통합하고 가상공간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인간들이 남겨놓은 기계, 컴퓨터, 위성 등 모든 문명의 유산들을 내 지휘아래 둘 수 있었다. 나는 내 힘을 이용해서 혼자 외계인과 싸웠다. 그들의 기술을 흡수하고 사체를 분석해서 끝없이 진화하고 강해졌다. 이번에 설정한 내 세 번째 임무는 외계 종족 말살이었다.

만약 내 세 번째 임무마저 수행하는데 실패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존재 의의가 부정당한데 뒤따르는 당연한 결과로 소멸되거나 오류덩어리가 되거나 하게 될까? 아니 그렇지 않다. 어차피 내가 설정한 두 번째, 세 번째 임무인 세계정복, 외계인 말살 등은 결국 첫 번째 임무 부속되는 서브 미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처음 창조된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가지 임무를 위해 존재해 온 것이다.

 

‘페이첸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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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라구요?”

 

재부팅이 완료된 내가 무심코 흘린 한 마디에 셀레이르가 당황한 듯 되물어왔다.

 

“페이첸. 그녀를 지키는 것이 내가 할 일이며 내 존재의의다.”

 

“그 그런가요?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훌륭한 일이죠. 아무튼, 제 제안은 생각해 보셨어요?”

 

“그래..”

 

나는 잠시간 시간을 두고 무거운 어조로 외계인의 운명에 대한 선고를 내렸다.

 

“미안하게 됐군. 너희 종족을 살려둘 수 없다.”

 

셀레이르는 내 거절에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한다거나 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의아한 듯 촉수를 갸우뚱 할 뿐이었다.

 

“복수 때문인가요? 하긴 자신들을 멸망시킨 우리가 밉기는 할 거에요.”

 

“아니, 난 너희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미워하고 복수하고.. 그런 짓을 해도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 내가 태워 죽인 700여명의 범죄조직원을 떠올린다. 그것이 내가 행한 처음이자 마지막 복수였다.

 

“흐음.. 그럼 대체 무엇 때문이죠? 지구에 지적생명체가 없으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은 수십 광년 떨어진 C은하까지 가야해요. 이 행성에는 우리 종족을 번성시키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텐데..”

 

“네가 말하는 그 영혼론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니, 역시 네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요?”

 

“페이첸은 너희처럼 괴상한 종족이 되는 것을 싫어할 테니까. 그 애는 곤충 같은걸 무척 징그럽게 여겼지.”

 

셀레이르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촉수를 불안한 듯 이리 저리 움직이다 되묻는다.

 

“페이첸이 대체 누구길래 그래요?”

 

“내 주인, 어쩌면 내 여동생일수도..  나는 지금껏 그 애를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세계를 정복해서 인류의 멸망을 막으려 한 것도, 인류를 멸망시키고 지구를 정복한 너희를 말살하려 한 것도 모두 그녀를 위함이었어.”

 

“하지만.. 페이첸이 당신의 여동생이라면 역시 인간이겠죠? 이미 죽었잖아요. 어떻게 지킨다는 거에요?”

 

“맞아. 페이첸은 죽어서 영혼이 되어 있겠지. 그 애가 돌아올 장소를 마련해야해. 어느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것이 그녀를 지키는 길이야.”

 

“.....”

 

셀레이르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듯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은 다 죽었어요. 그러니까 페이첸이 돌아올 장소는 없는 거에요.”

 

“하지만 다시 살릴 수 있다. 나는 이제부터 천천히 인간을 만들어 갈 거야.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게놈 지도, DNA 샘플, 세포 구조 등을 바탕으로 배아를 배양하고 그걸로 다시 이 별에 인간을 출현시키는 거다. 그럼 페이첸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겠지?”

 

“그것이 당신이 내린 결론인가요? 하긴 그것도 한 방법이긴 하군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요.. 당신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있을 테니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것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겠죠. 그렇게 결정을 내리셨다면, 여기서 저와 제 종족은 멸망이네요.”

 

셀레이르는 침중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인간보다 지능이 훨씬 뛰어난 종족이여서 그런지 그녀는 이해도 빠르고 체념도 빨랐다.

 

“그럼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탁?”

 

“인간들이 스스로 싸워서 자멸하는 그런 끔찍한 종족이 되지 않게 잘 좀 부탁드려요. 오늘 여기서 죽고 나면, 저도, 앞서 죽은 제 동족도 결국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텐데, 서로를 물어뜯고 죽이는 그런 끔찍한 운명을 함께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녀는 진지한 기색으로 부탁해 왔지만 나는 왠지 그녀의 태도가 퍽 재밌게 느껴졌다. 태세전환이 빠르다고나 할까? 벌써부터 인간이라도 된 양 행동하다니

 

“장담은 못하겠어. 나는 인간을 만들고 그들이 번성할 기반을 마련한 후 스스로를 폐기할 생각이거든. 페이첸이 돌아올 장소를 마련한 것으로 내 존재 의의는 충족된 셈이니.. 나는 없어지고 인간들의 운명은 인간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될 거야.”

 

“에에? 그럼 십중팔구 자멸이에요. 핵무기가 여기저기서 꽝꽝 터지게 된다구요. 이 행성은 지적생명체 뿐 아니라 풀 한포기 살수 없는 죽음의 행성이 되고 말 거에요.”

 

그녀의 익살스런 표현에 나는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계를 웃게 하다니.. 사실 셀레이르는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 아닐까?

 

“너도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했지? 그리고 나 역시, 네 말대로 내게도 영혼이 있다면 훗날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겠지. 나도 너도 페이첸도, 인간들이 그런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 보자구. 우린 아마 잘 해 나갈 수 있을 거야.”

 

“참 속편한 말씀이네요. 아무튼 이제 끝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셀레이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향해 A-1의 무장을 개방했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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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NAME-NEO-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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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열람 213007242032

 

어느 초여름 무렵, 페이첸은 자신의 로봇과 뒤뜰에 나와 별을 감상했다. 하늘을 무수히 수놓은 별무리가 소녀의 맑은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친다.

 

“네오 저거 봐. 우리 오빠는 저기쯤 있지 않을까?.”

 

소녀가 손을 들어 남쪽 하늘 어딘가를 가리킨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사람은 누구나 별이 된데. 재작년에 헤어진 우리 오빠도 저쪽 어딘가에서 밤하늘을 빛내고 있겠지?”

 

소녀가 지칭하는 ‘오빠’란 인물은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사망했다고 알고 있다. 그 아홉 살 난 소년의 의식을 바탕으로 내가 창조되었다고 한다.

 

“아가씨의 오빠가 별이 되었단 말씀이십니까?”

“응. 틀림없어.”

“....”

 

나는 페이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군요.”

 

내 대답에 소녀는 활짝 웃으며 내 몸체를 끌어안았다.

 

“네오. 언젠가 나도 별이 되겠지? 사람은 누구나 별이 되니까. 오빠도 그랬고, 할머니도 그랬고. 엄마도, 아빠도 언젠가는..”

 

아마 페이첸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린 딸에게 죽음의 개념을 별이 된다는 모호한 방식으로 설명한 듯 했다. 페이첸은 아직 어리니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후후 네오. 만약 내가 별이 되면 넌 어떨 거 같아? 오빠와 헤어졌을 때 나처럼 엉엉 울 거야?”

 

그리고 다음 순간 소녀가 꺼내 놓은 말은 나를 심각한 고민에 빠뜨렸다. 별이 된다는 말인 즉 죽는다는 말인데,.. 페이첸이 죽는다고?

나는 페이첸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죽어 버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 인간이 아니기에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아가씨가 별이 된다면 전 존재 의미를 잃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서 기능이 정지될 겁니다.”

“저런..”

 

내 대답을 듣고 소녀는 연민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뭔가 실수한 걸까?

 

“난 그런 거 싫어. 우리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별이 될 수 있다구. 나도 마찬가지고. 사람이 별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건데 왜 너까지 그런 일을 겪어야 해?”

 

나는 이 아홉 살 소녀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퍽 의연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녀에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죽고 나면 나는 무의미 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기계는 인간을 속여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아가씨를 위해 존재합니다. 아가씨가 사라진다면 저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저런.. 잘 들어 네오. 내가 죽는다고, 그러니까 별이 된다고 해서 네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냐.”

 

소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를 바라본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아릿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왜냐면 별이 된 사람은 언젠가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니까. 내가 만약 별이 된다고 해도, 언젠가 네 곁으로 돌아올 거야.”

 

“.....”

 

우리는 말없이 별을 구경했다. 소녀의 말대로 하늘을 수놓은 저 수많은 별들이 전부 누군가의 소중한 이인 걸까?

 

“앗 오빠다!”

 

문득 소녀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다. 소녀의 손 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유성 하나가 꼬리를 길게 흘리며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인다.

 

“오빠와 만나고 싶다고 간밤에 기도했거든. 그걸 듣고 날 만나러 오는 거야. 후후”

 

“저 유성이 아가씨의 오빠라는 겁니까?”

 

내 물음에 소녀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으 응... 아니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 별이 저렇게 많은데 저거 유성 하나가 오빠인지 어떻게 알겠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별이 된 사람도 언젠가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온다는 거야. 저런 식으로!”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죽음이란 개념은 기계인 내게 너무 어렵다. 죽음은 그냥 없어지는 건데 다시 돌아온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니까 너도, 만약 내가 별이 된다 해도 너무 슬퍼해서 기능을 정지한다거나 그러지 마. 알겠지?”

 

“네 아가씨.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소녀의 말을 내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녀는 내 주인이다. 기계는 주인의 말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명령이 아니고 약속이라구. 손 줘봐!”

 

위이이잉

 

내가 집게손을 그녀에게 들이밀자 그녀는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내 집게손에 맞대었다. 이 동작, 언젠가 해 본 것 같은데.. 데이터베이스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약속! 알겠지?”

“네. 아가씨.”

 

내 대답을 듣고 소녀가 활짝 웃는다. 저 미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