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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 작성자 셀린저
  • 작성일 2015-07-15
  • 조회수 345

저벅 저벅, 오늘도 언덕을 오른다. 허리를 굽히고 언덕 끝의 지평선이 접어 놓은 것 같은 바다를 향해 걷는다. 걸음을 멈추고 바다 앞에 선다. 이른 새벽, 낮과 밤의 사이를 가장 잘 머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바다일 것이다. 제 몸을 출렁이며 밤의 색과 낮의 색으로 번갈아 움직인다. 또한 별을 머금고 있다. 온 세상의 모든 별들이 심해어처럼 바다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번쩍인다. 구름은 별들이 헤엄친 후에 인 포말같다.

아버지의 사촌인 김씨 아저씨를 만나러 왔을 때 보았던 바다와는 다르다. 그때 바다는 겨울을 머금고 있었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바다로 왔다. 어릴적부터 농사 때문에 바빴던 우리 가족에겐 가족여행이란 건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 들떴던 것 같다. 버스를 몇 번이고 갈아타 도착한 그곳은 이름 없는 어촌이었다. 김씨 아저씨는 오징어잡이를 생업으로 하고 계셨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농사를 지었듯이, 그는 평생 동해 바다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겨울 바다는 신기했다. 아무도 없는 부두 위에서 눈과 같은 색으로 철벅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바닷물이 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추운 날씨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달달한 비린내가 코를 가득 채웠다. 바다는 거대한 저수지 같기도 했고, 하늘이 베껴 놓은 스케치북 같기도 했다. 멀리 수평선을 쳐다보았을 땐, 신이 하늘을 반으로 접어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수평선 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부둣가를 힘껏 내질렀다.

바다에 눈이 팔린 나를 김씨 아저씨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다가와 말씀하셨다.

바다 신기하지?

네! 그, 엄청 커요

바다는 많은 걸 품고 있어. 그걸 끌어 올리는 게 어부야

 

아저씨 말을 들으며 내 모습이 비췄다, 부서지는 바다를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이 비췄다 부서졌다. 태양이 부서졌다, 꽃처럼 핀다. 겨울바다는 쓸쓸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웅장했다. 언젠가 어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물으셨다. 바다 굉장하지 ?

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 저도 바다를 끌어올리는 사람이 됄래요!

아버지는  허허, 웃으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달을 향해 절을 한다. 하늘 위에 뜬 달이 아니라, 바다 위에 피어난 달을 향해 절을 한다.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두 번 절을 마친다. 기력이 빠져 자리에 앉아버린다.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바다는 어머니도 품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평생을 농사로 보내신 분들이다. 나또한 그랬다. 평생을 농삿일을 돕는 데에 써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부다. 배에 타고 바다를 끌어 올린다. 남들보다 이른 시각에 일어나 배를 탄다. 나를 보조로 써주시는 김씨 아저씨의 배에서 그물을 가지런히 하고 잡일 거리를 도와드린다.

오징어잡이를 하는 김씨 아저씨의 배는 바다 위에서도 유난히 번쩍인다. 그것마저도 바다는 삼켜버린다. 그 불빛 때문에 오징어들은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열심히 그물을 내리고 그물을 당긴다. 그물을 내리다 자칫 잘못하면 그물에 빨려 가는 경우도 있다. 바다에 삼켜지는 것이다.

어-가! 어-가!

잔뜩 독이 올라 검붉어진 오징어가 올라온다. 그것들 중에 몇 마리를 김씨 아저씨가 골라낸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손질을 해 회를 뜨기도 하고 라면에 넣기도 한다. 나는 허여멀건 그것들의 속살이 싫다. 논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하얀 고무신이 떠올랐다. 진흙이 잔뜩 묻는 고무신은 오히려 더 창백해 보였다.  어머니는 물이 고인 논 위에 코를 박고 죽어 있었다. 평생을 땡볕에서 보낸 당신의 피부색은 진흙과 별다를 게 없었다. 아버지와 평생을 보낸 논 위에서. 옥가락지를 낀 투박한 손과 함께 사라졌다.

경찰은 과로로 인해 쓰러진 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죽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무리해서 일하신 것은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스스로 아버지를 따라 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딱 일 년 되는 때였다. 모내기철이 지나고 어머니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논두렁을 산책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엔 두 분이서 거니시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며칠만에 논에 나가셨지만, 삼일을 아무것도 안 드시고 눈물을 훔치셨던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뒤로 논을 증오했던 것도 안다. 평생을 보낸 논에서 배신 당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걷던 그 길을 걷다가 아버지 생각이나 논 위로 뛰어 내리신 거다. 논에게서 아버지를 빼내기 위해서 달려든 것이다. 그러다 패배하고 진흙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처음 어머니의 시체를 보았을 때, 아버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일사병에 걸려 논두렁에서 굴러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어머니는 자살한 것이다. 이 논에 삼켜진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논 위에 섰을 때, 어머니가 저 진흙 속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버지 또한 저 곳에 있을 것이라고. 큰 보름달이 떠 있는 밝은 밤이었다. 풀벌레들이 속닥거리고 따뜻한 바람이 어린 벼들의 살을 간지럽혔다.

달빛이 논 위에서 출렁 거리고 논 위의 모든 것이 몸을 비볐다.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파도 속에서 어머니가 점점 더 진흙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미 먹혀버린 아버지 옆에 눕는 것 같았다. 어머니를 끌어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씨 아저씨가 주신 오징어회를 초장도 찍지 않고 씹는다. 계속해서 입에 처넣는다. 라면 속에 데쳐진 놈은 더욱 하얗다. 뜨겁지만 창백한 그것은 역시 어머니의 고무신 같다. 나는 계속해서 그걸 씹어 삼킨다.

 

천천히 좀 먹어라. 체할라.

 

김씨 아저씨가 등짝을 치며 말했다.

 

예.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어머니의 고무신을 입에 때려 넣는다. 어머니를 건져내야한다. 익사한 어머니의 몸을 껴안고 울었을 때, 진흙과 물로써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안고 울었을 때, 그렇게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울지 못하더니 죽고 나서야 어머니는 한 없이 울고 계셨다.

어머니를 건져 내야한다. 바다로부터 건져 내 나도 그 옆에 누우리라.

어-가! 어-가!

그물을 끌어 올린다. 모든 걸 삼킨 바다로부터 어머니를 끌어올린다. 어-가! 검붉은 오징어들이 진흙으로 변한다. 어-가! 진흙 사이로 어머니가 보이는 듯하다. 어-가! 바다 위에 핀 보름달을 건져 올릴 듯이 당긴다. 어-가! 어머니가 올라오는 듯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없다 다시 그물을 내린다. 순간 바다 위에 어머니가 비췄다가 부서졌다 삼켜진다. 그물을 따라 한 없이 내려간다. 그물을 잡으려하다 손목이 걸린다. 바다에 손에 맞닿는다. 그리고 몸이 풍덩- 빠져버린다. 어머니의 옆자리로 삼켜진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가 누워 있다. 그곳에 아버지도 함께 있다. 나는 가만히 그들 옆에 앉지만 그들은 더욱 깊이 내려간다. 그리고 손을 흔든다. 바다를 건져 올리는 사람이 된다고 했을 때 지었던 미소를 아버지가 짓는다. 지금 보니 씁쓸함보다 기특함이 더 커 보인다. 계속해서 건져 올려라. 어떻게든 너 스스로 살아가라.

눈을 떴을 때, 누워 있는 곳은 오징어의 옆자리다. 퍼덕이는 오징어 옆에서 그물 위에 누워 있다. 김씨 아저씨가 기척을 느끼고 달려왔다. 다행이라는 듯이 나를 부둥켜안는다.

 

그물이 내려가는데 손을 뻗으면 어뜩하냐!

 

추위에 부들부들 떤다. 잔뜩 삼킨 물을 기침해내다가 배가 고파온다. 김씨 아저씨가 아까 먹던 라면을 데워온다. 라면 국물을 종이컵에 따라 내 입에 내민다. 그것을 받아들고 벌컥 벌컥 들이킨다. 속이 차오른다.

다시 일어나 그물을 든다. 그물을 내리고 바다를 건져 올린다. 어-가! 어-가!

셀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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