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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리에 각인되는 대담한 조합, <젖과 알>

  • 작성자 Duellona
  • 작성일 2012-01-25
  • 조회수 449

포유류의 양육 기관인 젖. 조류나 어류 등이 낳는 알. 전혀 무관한 듯 싶어 보이는 두 단어를 조사로 이어놓았다. 생각없이 홀깃 보아도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다. 아쿠가타와 수상작이기도 한 이 소설집의 표제작 <젖과 알>은 유방 확대 수술을 받기 위해 상경한 모녀라는 다소 생경한 소재를 다룬다. 유방 확대 수술에 대해 열성으로 알아본 듯한 어머니 마키코. 말도 하지 않고 수첩에 쓴 글로 필담을 나누는 조숙한 딸 미도리코. 그런 모녀를 바라보는 이모. 소설은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공평한 시선으로 세 여성을 그려낸다.

호스티스로 일하는 마키코에 대한 묘사는, 실제로 남동생의 학비를 위해 호스티스로 일했던 작가의 경험이 배어 있다. 마키코는 아이의 아버지조차 진즉 도망가 버린데다 퇴물이 다 되어가는 처지다. 뜬금없어 보이는 유방 확대 수술은 여자로서 자부심을 세우고 싶은 당연한 욕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심리는 도쿄까지 와서 여동생과 간 목욕탕에서 젊은 여성들의 신체를 품평하는 데서 드러나는데, 투기와 선망 같은 것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그 직후 본인의 가슴에 대해 푸념하는 건 또 어떤가. 목욕탕의 자욱한 김 속에서 환영처럼 지나다니는 싱그러운 육체와 납작하고 볼품없는 가슴의 대조는 눈여겨볼만하다.

어머니 마키코가 제목의 '젖'을 상징한다면, 딸인 미도리코는 '알'이다. 어려운 형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이보다 성숙한 그녀는 월경에 대해 알고 나서 깊은 생각을 한다. 사실 첫 페이지 자체가 난자에 대한 미도리코의 독백이나 다름없고, 이런 고찰이 곳곳에 등장하는만큼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월경은 난자(말할 것도 없이 '알'의 이미지다.) 와 연관이 있으며, 생명을 잉태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 미도리코는 자기 몸 속에 생명의 씨앗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어머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월경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자신을 낳고 뼈빠지게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듯하다. 더 나아가서 '부채감'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엿볼 수 있다. 엄마의 직업. 수유로 인해 모양이 망가진 가슴 등. '나를 낳지 않았으면 되잖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원해서 태어난 건 아니였다.'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미도리코는 '알'의 상징인 동시에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과도기'에 선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모녀는 '젖'과 '알'로서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키코는 딸이 말도 하지 않고 수첩에 뭔가를 끼적거리나 어쩌나 유방 확대 수술을 감행할 눈치고, 바로 그 미도리코는 수첩에 수술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을 감추지 않고 쓰고 있다. 어머니의 수술에 대해 반대하는 까닭은 어머니로서 자신을 키웠던 가슴이 '젖을 먹이기 전' 아니면 그보다도 더 성적 코드로서 매력적인 상태가 된다는 걸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출산을 하지 않은 젊은 여성의 육체를 동경하고, 더 나아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욕구라고 볼 수 있기에. 실제로 미도리코는 '그럴 거면 왜 나를 낳았느냐.'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가진다.

소설은 어머니가 딸의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늦은 시각에 돌아오는 부분에서 절정부에 이른다. 달걀을 몇 개씩이나 머리에 대고 깨뜨리면서 사실을 말해달라고 울부짖는 미도리코의 충격적인 행동.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끌어안았던 고뇌를 단숨에 털어놓는 다. 나중엔 모녀가 나란히 달걀을 깨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무튼, 이쯤에 이르러서는 내내 지겨울만큼 눈앞을 떠나지 않았던 '유방 확대 수술'과 '원하지 않는 월경'은 어찌되어도 좋을 것처럼, 갈등이 해소된다. 전반적으로 별다른 사건없이 이어지다가 사건이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게 당혹스러운 감도 없잖아 있다. 그렇지만 계란을 깨뜨림으로서 이루어지는 '화해' 등 때때로 상징적이기도 하면서, 목욕탕에서 나누는 자매의 대화처럼 현실적이고 상세한 묘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게 대단했다. 여성 작가만이 그릴 수 있는 디테일과 깊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기억해야 할 좋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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