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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 작성자 韓雪
  • 작성일 2014-12-23
  • 조회수 882

 사막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살인적인 열기의 낮과 극심한 추위의 밤. 인적 하나 없는 광대한 공간 속의 외로움.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메워지지 않는 목마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문득 저 멀리에 호수가 보인다면 누구나 뛰어가기 마련이다. 희망을 가득 품고 허위허위 달려가 보지만 정작 있는 것은 모래밖에 없다.

 신기루. 광학에서는 빛이 실제로 만나서 생기는 상을 실상이라고 하고, 빛이 실제로 만나지 않았음에도 생기는 상을 허상이라고 한다. 허상이 생기는 이유는 빛이 직선으로만 뻗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미묘한 기온 차이에도 빛은 조금씩 꺾인다. 그 조금씩의 차이가 모여 나중에는 뒤집힌 허상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눈은 실상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나무가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호수에 나무가 반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상을 실상처럼 받아들이는 것.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광활한 삶의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 우연히 발견한 이상을 향해 달려가곤 한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자가 호수를 향해 달려가듯이. 마침내 이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쯤 우리는 허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부조리의 작가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 삶에 숨어있는 허상을 들춰내어 폭로해왔다. 앞서 그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왜곡된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보여주며 행복한 가정이라는 허상을 파헤친 바 있었고, 『빛의 제국』에서는 서로를 속이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진실한 관계라는 허상을 파헤친 적도 있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그가 천착하는 것은 바로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이다. 그가 어떻게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을 밝혀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소설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살인의 모든 과정과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서 일지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문장을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시를 공부했고 어쩌다 등단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알츠하이머에 걸린 평범한 일흔 살의 노인일 뿐이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은희. 그녀는 “농대를 나와 지역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그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녀는 그가 마지막으로 죽인 여자의 딸이다. 여자는 자신의 딸만은 살려달라고 빌었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켜주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잇따라 여자 셋이 죽었”고 “세 여자 모두 이십대”인데다가 “밤늦게 귀가하다가 당했다”고 한다. 연쇄살인범으로부터 은희를 보호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늙었고 심지어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은희에게 밤길을 조심하라는 주의상황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우연한 기회로 연쇄살인범의 단서를 찾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정차해 있는 놈의 차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추돌하고 말았다. 사냥용으로 개조한 지프였다. 차 지붕에 서치라이트를 단 것도 모자라 범퍼 위에 안개등을 세 개나 더 매달았다. 이런 차들은 트렁크도 물청소가 가능하도록 개조한다. 배터리도 두 개쯤 더 달고 사냥 시즌이 되면 이런 놈들이 마을 뒷산으로 몰려든다.

 […]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가라고 손짓을 했다. 이상했다. 적어도 뒷범퍼는 한번 봐야 할 것 아닌가. 내가 꼼짝 않고 서 있자 결국 그가 내렸다. 삼십대 초반의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그는 건성으로 뒷범퍼를 살피더니 괜찮다고 했다. 괜찮지 않았다. 범퍼는 움푹 들어가 있었다.

 […] 뱀의 눈이었다. 차갑고 냉혹했다. 나는 확신한다. 그때 우리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는 메모지에 이름과 연락처를 또박또박 적었다. 어린애 글씨 같았다. 이름은 박주태였다. […] 그때 나는 보았다. 트렁크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을. 또한 나는 느꼈다. 뚝뚝 듣는 핏방울을 바라보는 나를 주시하는 그의 시선을.

 문제는 은희가 요새 만나고 있는 남자를 그에게 소개하면서 생긴다. 그는 사륜구동 지프를 몰고 왔는데 사냥용이었으며 “차 지붕에 서치라이트를 단 것도 모자라 범퍼 위에 안개등을 세 개나 더 매달았다.” “트렁크도 물청소가 가능하도록 개조”되어 있고 “차량용 배터리도 두 개쯤 더 달고” 있다.

 스스로를 박주태라고 소개한 남자를 보며 김병수는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인상을 받지만, “기억에 관한 한” “자신을 전혀 신뢰할 수 없”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박주태가 떠난 후 그는 노트를 뒤적이다가 “그놈이 그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쇄살인범은 태연하게 은희의 약혼자로써 그의 집으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그는 은희에게 박주태를 경계하라고 수없이 말해보지만, 은희는 두서 없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112에 박주태를 신고해보기도 하지만, “임의동행 형식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 바로 풀려났다”는 소식만을 듣게 된다.

 결국 그는 “필요에 의한 살인”을 저지르기로 마음먹는다. 은희를 위해 박주태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라는 커다란 장애물 때문에 살인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박주태의 자동차와 얼굴뿐만 아니라 박주태를 살인해야한다는 목표마저도 툭하면 까먹는다.

 그러는 와중에 안형사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과거에 있었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고 있다. 경찰대 학생들을 이끌고 김병수의 집에 들르기도 하고, 은희가 일하는 연구소에 찾아오기도 한다. 김병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안 형사를 대한다. 오히려 살인의 매력을 알고 있는 그에게 호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착실하게 살인을 준비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는 “온몸이 뻐근”함을 느낀다. “따갑고 쓰라려 살펴보니 손과 팔에 가벼운 상처가 나 있”는 것은 물론 “방바닥이 버석석한 것이 모래도 밟혔다.” 그는 전날 밤에 박주태를 살인한 것을 확신한다. 그는 샤워로 “몸을 꼼꼼하게 씻은 후 입고 있던 옷을 불태웠다.” 또한 “방을 진공청소기로 깨끗이 청소한 다음 먼지통에서 나온 것들도 모두 태워버”리고 “먼지통은 락스를 풀어 깨끗이 씻어 말렸다.”

 그런데 은희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그의 집 마당에선 개가 여자의 손을 물고 있었다. 은희는 어떻게 된 것일까. 박주태는 살아 있는 것일까. 그는 갑자기 불안해졌고 안형사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안형사의 명함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그는 112에 걸어 “아무래도 내 딸이 살해당한 것 같다고,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 것 같다고, 되도록 빨리 와달라고” 부탁한다.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대문을 두드렸다. 나는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

 나는 비닐봉지에 든 손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

 “범인이 누군데요? 알고 계십니까?”

 “박주태라는 놈이오. 이 일대에서 사냥을 다니는 부동산업자인데……”

 형사들이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뒤에서 한 남자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저 말씀이십니까?”

 박주태였다. 그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 나는 박주태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놈을 잡으시오.”

 박주태는 웃었다.

 130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매섭게 폭주하던 살인자의 기억은 여기서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에 걸리게 된다. 곧 형사들의 취조에 의해 그의 모든 기억은 파탄난다. 박주태는 사냥용 지프가 아닌 아반떼를 모는 형사이며, 안형사는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대 학생을 이끌고 그의 집을 찾아간 건 박주태였다. 심지어 은희는 그의 딸이 아니었다. 요양보호사였다. 치매 노인을 찾아가서 간병하고 도와주는 요양보호사. 그는 요양보호사를 죽이고 마당에 파묻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언이 전복되는 순간이다. 자신을 구성하는 기억 하나하나가 속절없이 무너진다. 무엇도 믿을 수 없다. 자기 자신마저도.

 데카르트는 근대의 여명기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불후의 문장을 남겼다. 철학이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 초점을 맞추게 된 혁명적인 문장이었다. 누군가에게 이성이 있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신을 빌리지 않고도.

 데카르트는 이성에 굳건한 위상을 부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라는 존재에도 굳건한 위상을 부여했다. ‘나’는 언제나 확실한 존재다. 사실 데카르트가 이성을 중시한 것은 인간에게 이성을 부여한 신을 찬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에 대한 확신이라는 데카르트적 사유는 서양 철학의 밑바탕으로 자리잡아왔다.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나’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한 적 있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들에게서 경멸당하며 무시받다가 버려져 죽는다.

 카프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의 기반은 타인의 인식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한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에게 있어 그레고르 잠자는 여전히 그레고르 잠자였지만, 가족에게 있어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였을 뿐이다. 결국 그레고르 잠자는 소설의 끄트머리에서 자신은 없어져 버려야 하는 벌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줄리언 반스는 카프카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에서 토니는 베로니카와의 교제를 허락해달라는 에이드리언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명시하고자 상찬과 기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네, 벗이여”라는 식의 편지를 에이드리언에게 보낸다.

 얼마 있지 않아 에이드리언은 자살한다. 긴 시간이 흐른 후 베로니카와 연락이 닿으면서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자살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는 “평정을 가장했던” 축복의 편지가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의 “인성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그의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사랑을 파괴하려는 시도”의 편지였다.

 토니의 기억은 왜곡되어 있었다. 에이드리언의 편지도, 토니의 답장도 모두 거짓 기억이었다. 그제서야 토니는 자신이 기억을 되살리면서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소설 초반부에 에이드리언은 라그랑주를 인용하면서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한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후반부에 그의 말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토니의 삶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증거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살인자의 기억법』은 「변신」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소설이다. 김병수의 존재는 김병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형사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들은 그의 “자랑스러운 과거와 철학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김병수가 “은희를 죽였다고 믿고 있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들에게 김병수는 김병수가 아니다. 잔혹한 살인자일 뿐이다.

 김병수의 기억은 불안정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주변 사람들을 혼동한다. 사실 이러한 착각의 징후는 소설 곳곳에서 포착된다.

 (1)

 옆집 개가 자꾸 우리 집을 들락거린다. 마당에 똥도 싸고 오줌도 지린다. 나를 보면 짖어댄다. 여기는 내 집이다, 이 똥개새끼야.

 개는 돌맹이를 던져도 달아나지 않고 주위를 맴돈다. 퇴근한 은희가 그 개는 우리 개라고 한다. 거짓말이다. 은희가 왜 내게 거짓말을 할까.

 (2)

 그래, 그걸 도둑망상이라고들 하지. 나도 그건 알아. 그런데 이건 망상이 아니야. 분명히 뭔가가 없어졌다고. 일지와 녹음기는 몸에 지니고 있으니 무사했지만 다른 무언가가 사라졌다.

 “그래, 개가 없어졌다. 개가 없어졌어.”

 “아빠, 우리 집에 개가 어디 있어요?”

 이상하다. 분명히 개가 있었던 것 같은데.

 (3)

 “우리 집 개가 아닌데…… 대문을 닫아놓든지 해야지 아무 놈이나 막 드나들고.”

 “전에도 있던데요. 이 집 개 아니에요?”

 “못 보던 놈이 요즘 들어 들락거린다니까요. 저리 가.”

 그는 자신의 집에 개가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삶 역시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증거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진 확신에 불과하다. 데카르트에 의해서 구축되었던 ‘나’의 확실성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그의 존재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도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없음도 없느니라.”

 무無. 반야심경의 구절은 ‘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은 김병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선다. 그의 감각이며 느낌이며 의식도 사라진다.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종잡을 수 없으며 “아무리 헤엄을 쳐도” 무無를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지더니, “한없이 작아”지더니,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나’라는 존재가 얼룩 한 점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데카르트가 천명했던 자아의 확실성에 종말을 고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주제가 그닥 새로운 주제는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20세기를 지나오면서 데카르트적 사유는 수많은 비판에 의해서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타격을 입었다. 자아의 확실성 역시 허구에 가깝다는 것은 밝혀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살인자의 기억법』은 유효한 소설이다. 아직도 데카르트라는 이름의 유령이 세상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굳게 믿으며 살아간다. 삶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자신의 기억에 의지해서 결정하곤 한다. 자신만큼은 확실한 존재라는 이상을 가지고 허위허위 살아가지만 그 끝에는 허무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자신이 향한 곳이 고작 신기루였다는 것을 발견한 자가 으레 그렇듯이. 김병수가 그러했듯이.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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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 2014-07-13
나와 너 사이에서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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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 2013-11-17
곡비처럼 - 김애란론

 상갓집에서는 곡소리가 끊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루 종일 울 수는 없는 일. 상가에서는 전문적으로 우는 여자를 불러 대신 울게 했다. 곡비哭婢.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던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라칠 듯 울어 대는 곡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거릴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 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곡비哭婢」, 문정희    옥례 엄마는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을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곡소리는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옥례 엄마의 모습에다가 문정희는 조용히 시인의 모습을 포갠다. 시인이란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이다. 곡비처럼,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을 “전문적으로”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사람인 것이다. 타자의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우는 존재. 문정희는 시인과 곡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두근두근 내 인생』    문정희가 「곡비哭婢」라는 시를 통해서 곡비와 시인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보였다면, 김애란은 이 문장을 통해 곡비와 자신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면서, 그녀는 오히려 그녀에게 주어진 곡비의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타자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녹여내는 곡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있는 언어 습득 모티프는 그녀가 타자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그녀가 “아주 작았던 시절”에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고백한다.(「달려라 아비」) 이 말은 그녀가 “오래전 사라진 말[言]들을 알”게 될 때 어제도 내일도 알게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사랑의 인사」) 즉, 그녀는 언어를 배우면서 어제와 내일이라는 시대의 슬픔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 어릴 때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

  • 韓雪
  • 201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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