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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소설 김엄지 - 입생로랑 낭떠러지
입생로랑 낭떠러지 김엄지 1 E는 걸으면서 여자 친구를 떠올린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지갑을 선물하리라. 메탈릭 컬러의. E는 결정했다. 메탈릭 컬러가 여자 친구의 취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거리에 눈발이 날리고, 때늦게 웬 눈인가. 인도로 걸어야 하는데 보도블록을 까뒤집어 놓은 날이다. 찬바람에 흙먼지가, 눈보라가 휘날린다. 이런 날씨에 무슨 공사를. 보도블록과 공원 터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중장비 두 대가 덩그러니 멈춰 있다. E는 카페로 가는 또 다른 길, 크게 우회하여 걷는 경로를 떠올린다. E는 천변으로 내려가 물을 따라 걷기로 한다. 2 축복이라는 건 그저 그런 상황에서 주시는 게 아니야. 핑크빛, 막 그런, 좋고, 그런 게 아니라. 코너로 몰아. 사람을 몰고 몰아서. 상황 중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 보증된 건 천국이라는 자리뿐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거. 여기서의 생활이 너무 괴로우니까. 갈등이, 사람을 끝까지 몰아가는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얼마 전에 급식 봉사하는 분 간증을 들었어. 오늘 밥 열심히 나눠 주고, 내일 밥할 돈을 또 구해야 하는 게 너무 큰 고난인 거야. 밤새 기도를 한대. 내일 밥값이 없습니다. 내일 밥값이 없습니다. 그럼 신기하게 다음날 딱 급식할 밥값만 입금되어 있대. 넉넉하게 편안하게 안 해 주는 거야. 하루만 딱. 항상 하시는 일이 그거인 거야. 딱 그거. 하루치. 너무 신기한 거야. 신기한 가운데 이틀치 주시면 안 되나요, 싶은 거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실 때는 사용할 그만큼만 하시는 거야.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행복하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내가 열성분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아. 내가 교회를 못 갈 일이 생기면, 오늘은 교회에 오지 말고 모임에 나가라, 하신다고. 내가 하나님 모를 때는 팝송도 듣고, 이거저거 다 들었는데, 하나님 알고 나서는 찬송가만 들었어. 그랬더니 어느 날 하나님이 네가 듣고 싶은 것 들어라, 하시는 거야. 그래서 알게 됐지. 아 하나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구나. 하나님이 너무 응답해 주시니까 신학대학에 가려고 했거든. 신학대학 가기 전에 히브리어 띠고 가는 게 좋다고 해서, 히브리어 시작하려는데 그때 또 들렸어. 그 길은 네 길이 아니다, 음성이 들리더라고. 그래서 신학대학원은 안 가기로 했어. 하나님 왜 그러시냐고 물을 때는 답이 없으셔. 사람은 모르는 거야. 하나님만 아시는 정확한 때에. 정확한 방법으로 딱 그만큼만 알려 주시는 거야. 내가 구한다고 해서 그때마다 알려 주시고, 들려주시는 게 아니야. 성령이 임한다고 마냥 핑크빛이 아닌 거야.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내 몸으로 보여 주셔. 물집이 똑 떨어지고 그 자리에 반점이 생기는 거야. 나 심장도 멈춰 봤어.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멈추면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 나를 그렇게 움켜쥐고 있던 게 내 숨이었던 거야. E는 카페에 앉아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5상세보기 -
소설 이현석 - 성한 입
성한 입 이현석 아기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박명이었고 아직 분유 먹일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잠귀를 이유로 밤 당번을 자처한 것은 나였으나 의지와 달리 본성은 강했다. 아내가 자리끼 컵을 산산조각 냈을 때도 세상모르고 코만 곯았다는데 율이와 둘이 잔 뒤로는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눈이 금방 뜨였다. 바닥에 깔아 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아기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율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가 또 속았네.’ 잠은 설쳤어도 흐뭇했다. 이 작은 목숨이 간밤을 또 무사히 넘겼구나. 그 마음을 얹고 도로 몸을 뉘었는데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아기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거슬렸다. 창문은 밤새 돌린 가열식 가습기 탓에 부러 흩뿌린 것처럼 흥건했다. 문득 재건축 조합 단톡방에서 보았던 잡담이 떠올랐다. 유명 로펌을 다니느라 바쁜 딸과 얼마 전 개원한 의사 사위를 대신해 손주 둘을 보느라 겨우내 가습기를 틀었더니 옷장 안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곰팡이가 벽면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시황 따라 일이 억은 우습게 에누리하는 아파트에서 곰팡이 걱정이라니. 직면한 현실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치른 비현실적인 가격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현실만 따지면 놀랍지 않았다. 아파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삼화토건 회장 도예종, 매일신문 기자 서도원,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 등 여덟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형을 집행했던 바로 그해에, 여의도의 다른 구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명령으로 완공됐다. 반세기가 넘은 건물이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곰팡이는 당연했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아도 놀랄 것이 없었고, 개수대에서 썩은 내가 올라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밤에는 통통하니 살이 오른 쥐가 아파트 복도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기함할 듯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견뎌. 이게 실거주 투자의 현실이야.” 아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묵직이 받아들였는데 싱글일 때부터 정석대로 자산을 늘려 온 아내의 투자 이력을 알아서였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은 나는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충성”이라고 촐싹댔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벌레나 쥐가 부르는 본능적인 혐오도 자산 증식이라는 대명제 앞에선 한낱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곰팡이조차 농담일 수 없었다. 집에는 율이가 있었다. 가습기를 끈 나는 전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율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창문에 다가갔다. 물기를 닦고서 창문을 미세하게 열었다. 서늘한 외풍이 실낱처럼 들어왔다. 재건축 단톡방에 상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침에 잠깐씩 이렇게 해 두면 곰팡이도 예방하고 아이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2상세보기 -
소설 안담 - 흰옷 빨래의 날
흰옷 빨래의 날 안담 오늘은 마지의 기일이니까 흰옷을 모아 빨래를 한다. 마지가 유니폼처럼 자주 입던 크림색 티셔츠도 잊지 않고 꺼내서 빤다. 아마도 처음 살 때는 흰옷이었을 거다. 내가 애용하는 독일 브랜드의 캡슐 세제는 성능이 뛰어나다. 이 티셔츠에서는 마지의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나도 마지의 냄새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꽤 강한 냄새였는데, 그런 냄새가 잊히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가끔 그 냄새를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4년 전 마지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모둠 전집에 간다. 전을 굽는 작업대가 가게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포장 손님도 많은,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 튀는 기름을 막기 위해 조리대 틈새와 철판 모서리에 은색 호일이 덧대어져 있고, 그럼에도 철판 가장자리나 작업대 위 처마에 쌓이는 기름때를 막을 수는 없다. 조용히 질색하며 지나치는 행인들, 저 시커먼 데서 맛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하는 손님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와 비슷했던 것 같아. 열과 기름과 사람이 합쳐서 내는 냄새.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 동거인의 냄새, 홍제천 스리룸의 주방 맞은 편 작은 방의 냄새, 마지의 냄새. 앞으로는 누구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 윤석열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2021년 겨울,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홍제역 인근 스리룸의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마지는 그 글을 보고 연락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좋은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련산과 홍제천이 코앞이고 인왕산이나 북한산도 비교적 멀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프라랄 게 없는 집. 인적 드문 가파른 언덕에 있고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는 않으며 어떤 역에서든 멀었다. 낡은 건물인데 월세는 70만 원으로 센 편이었다. 월세를 제외하면 그 집의 여러 요소는 내게는 장점이었다. 크고 힘 좋은 내 개와 오를 산이 있고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는 게. 스리룸에 방들이 크고, 연식이 오래된 집의 컨디션을 의식한 집주인이 못 박기를 포함해 여러 변화를 허용해 준다는 점도 좋았다. 나부터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흡연자도 좋았다. 내가 대형견과 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장점이고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단점이었을 테다. 내 개는 순하다 못해 맹한 편이었지만, 글에는 남자나 키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인다고 적었다. SNS로 하메를 구하는 여자에게 피곤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는 줄 아냐고 으름장을 놓은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인 소개가 낫지 않냐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지만, 지인의 지인이 길거리에 다니는 아무개보다 더 좋은 사람일 거라는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되었거니와, 하우스메이트가 맘에 안 들었을 때 소개해 준 지인의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구인 글은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런 형태가 되었다. ‘홍제역 인근 스리룸 하메 구합니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8상세보기 -
소설 이승우 - 너희가 신처럼
너희가 신처럼 이승우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창세기」 3장 1-6절, 새번역성경) 1.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신이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게 정말이냐?” 지나치게 기다랗고 몸에 털이 없는 뱀은 동산의 어떤 생물과도 같지 않았다. 여자는 그렇게 느꼈다. 하기야 동산의 모든 생물은 다 달랐다. 모습과 소리와 걸음걸이와 습성이 제각각이었다. 모든 생물은 그렇게 지어졌다. 다른 이와 다르다는 것, 고유하다는 것, 그것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있음’을 담보하는 것이 고유함이다. ‘나’는 ‘나’ 외에 누구도 아니고 ‘나’만 ‘나’이다. 있음은 선언이 아니라 상태다. 모든 있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남다르다. 나는 남과 다르고 남은 나와 다르다. 남다르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말과 뜻이 같다. 그러니까 있음의 상태는 다른 있음, 즉 다른 남다름에 의해 보장된다. 한 고유함/있음은 다른 고유함/있음에 의존한다. 한 고유함/있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고유함/있음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있는 것들은 홀로 있지 않고 더불어 있다. 그러나 뭉쳐 있지 않고 따로, 다르게, 고유하게 있다. 뱀은 동산의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길고 매끈하고 또 은밀했다. 그것이 뱀의 남다름, 뱀의 고유함이었다. 뱀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소리 내지 않는 것처럼 소리 냈다. 그래서 뱀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기까지, 심지어는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래서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듣기까지 여자는 뱀이 곁에 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뱀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였고 소리 내지 않는 것처럼 소리 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동산 안에는 나무들이 많았다. 나무들은 줄기가 가늘거나 굵고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4상세보기 -
소설 구소현 - 오토매틱 블루베리
오토매틱 블루베리 구소현 1 치와와를 닮은 거대한 구름이 서서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움직이는지 모를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지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귀에 꽂혀 있던 에어팟을 뺐다. 빠른 비트로 귓가를 울리던 테크노풍의 음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차단됐던 주변 소음이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철근 골조와 청록색 유리,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진 초대형 백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는 뼈대와 같은 구조물을 외부에 노출한 하이테크 스타일의 건축물이었다. 그녀는 콘택트렌즈나 안경을 끼지 않았는데도, 시야가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백화점 정문 앞은 붐볐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6월 15일 토요일, 오후 1시 20분. 택시 앱이 켜져 있어 확인해 보니 택시를 이미 부른 상황이었다. 지한은 어깨에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크기가 다양한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있었다. 택시는 6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그녀는 잠시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구글을 켜 도착지로 설정된 장소를 검색했다. ‘다이버’라는 가게였는데, 검색해 보니 마포구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그녀는 최근 주고받은 문자와 메신저 대화창을 훑어보며 ‘다이버’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상대를 찾았다. 남자 친구였다.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택시가 그녀 앞에 도착했다. 차가 오래 정차할 수 없는 장소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바로 탑승했다. 그녀는 택시에 타자마자 창문부터 내렸다. 내부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도착 예정 시간을 보니 15분 뒤였다. 택시 기사는 핸드폰에 사이버 렉카 유튜버가 악의적으로 편집한 가짜 뉴스 영상을 틀어 놓고 운전을 했다. 지한은 에어팟을 다시 끼려다 말고 잠시 바라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뒤졌는데, 일회용 알코올 솜을 발견했다. 그녀는 일회용 알코올 솜 포장지를 뜯어 곧장 에어팟과 자신의 귀를 닦기 시작했다. 에어팟에서 더러운 게 묻어 나온다거나,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가방 안에 있던 알코올 솜을 모두 사용했다. 2 지한이 도착한 곳은 벽면이 거대한 수족관처럼 물로 채워져 있어, 마치 수중에서 식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블루베리가 가득 올려진 피자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이 가게의 주메뉴라며 남자 친구가 미리 주문해 둔 음식이었다. 하얀 모차렐라 치즈에 콕콕 박혀 있는 보라색 과일을 보자마자 그녀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음에도 입맛이 뚝뚝 떨어졌다. “지한아. 무슨
작성일 2025-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3 댓글수 2 조회수 1892상세보기 -
소설 정이현 - 빛의 한가운데
빛의 한가운데 정이현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낳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안희는 몇 해 전 이토록 모순적인 마음을 미령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은 미령에게만 할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미령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진심, 나도. 어깨에 얹힌 타인의 무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안희와 미령은 경쟁하듯 토로했다. 그들은 한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안희의 아들과 미령의 딸은 동갑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그와 상관없이 가까워졌다. 비슷한 일들이 어디서나 일어난다. 아이들이 진급할 때마다 안희와 미령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제 몇 년째, 라고 헤아리곤 했다. 10년이 되던 해에 내년엔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겠다고 안희가 말하자 미령이 그럼 발가락으로 세면 된다고 말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올해 초, 안희의 집에 놀러 온 미령이 귤을 까려다 말고 갑자기 한쪽 양말을 벗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부터 카운트를 시작하자면서 맨발을 꼼지락댔다. 그녀만큼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희를 웃겨 준 사람은 없었다. 또 없을 것이다. 언니가 늘 귀엽게 봐 주니까. 미령은 안희를 언니라고 불렀고, 안희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령과의 관계에서 안희는 어떤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나이가 몇 살 어린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미령이 상대방에게 지금 친구랑 노는 중이라고 말했던 때부터인 것도 같았다. 그런 말들은 연장자가 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이가 어린 쪽에서 하면 꽤 근사하게 들린다. 안희가 보기에 미령은 근사한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같이 노는 사이가 친구가 아니면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 안희는 미령을 처음 본 순간을 기억했다. 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학교에서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가 열렸다. 3월 초, 아직 스웨터 아래 히트텍을 벗기 힘든 날씨였다. 안희는 두꺼운 머플러를 동여매고 그 속에 얼굴 절반을 파묻은 채 강당으로 갔다. 교장과 교감, 교무부장으로 이어지는 긴 인사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학생부장이 연사로 나와 학교 폭력의 사례에 대해 설명했다. 휘말리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그가 열변을 토했다. 행사가 끝나자 안에 있던 학부모들이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참석자는 전원 여자였다. 그런 곳엔 언제나 엄마들뿐이었다. 교정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느슨한 원들이 여럿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희는 곤혹스러웠다. 동네에서 유치원에 보내는 동안 알게 된 얼굴들도 꽤 눈에 띄었지만, 그들과 자신이 정말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막 형성되고 있는 그 원에 쓱 끼어들 만한 숫기도 의지도 없었다. 아무도 눈여겨보
작성일 2025-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3 댓글수 0 조회수 2157상세보기 -
소설 문지혁 - 이름 쓰기
이름 쓰기 문지혁 1 1994년 봄에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방배중학교는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로, 작고 아담한 운동장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아마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업 중에 갑자기 앞문이 열렸습니다. 평상시에는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을 때 생기는 일이지요. 문지혁, 나와. 저를 호명한 사람은 학생주임 선생님이었습니다. 머리가 꽤 많이 벗겨진 데다 웃을 때마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치열 때문에 〈개구쟁이 스머프〉에 등장하는 ‘가가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분이었지요. 본업은 음악 교사였습니다. 주무기는 끝을 다듬은 하키채였고요. 당시 선생님들에게는 저마다 그런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과거형과 과거 완료형의 차이를 가르치던 영어 선생님이 말을 멈췄습니다. 졸던 아이들이 눈을 떴습니다.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를 손으로 지목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 쏠렸지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앞문으로 곧장 나가야 할지, 아니면 뒷문으로 돌아 나가야 할지를 두고 아주 잠깐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수업 중인 영어 선생님께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복도로 나가 뒷문을 닫자 학생주임 선생님도 앞문을 닫고 먼저 걷기 시작했습니다. 설명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계단 쪽으로 걸어갔고 저는 우리가 교무실로 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직감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교무실은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교무실에 가는 것을 지옥문을 여는 것처럼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반장 혹은 부반장이었고 전교 학생회의 임원이었으며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으니까요. 심부름을 비롯한 다양한 용건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에 드나들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저를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네가 문지혁이구나. 용무를 마치고 나면 몰랐던 선생님도 제 초록색 명찰에 새겨진 하얀 이름을 눈여겨보며 말했습니다. 마치 도감 속에 나오는 동물을 실제로 본 어린아이처럼요. 이번엔 무슨 일일까? 교실이 있던 3층에서 교무실이 있는 1층까지 내려가는 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부름이라면 매우 중대한 일이거나 아주 급박한 이유일 거라고 짐작했죠. 이를테면 상을 받는다거나, 학교 대표가 되었다거나, 당장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거나··· 그것이 나쁜 일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 계단을 다 내려가면 제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만으로 겨우 열넷인 소년에게 세계란 그토록 단순하고 안온하며 순진한 것이기 마련이니까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작성일 2025-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5 댓글수 3 조회수 2326상세보기 -
소설 강지원 - 파 프롬 홈
파 프롬 홈 강지원 데이팅 어플에서 매칭된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재이는 가장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 주고받는 대화의 간격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게,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적절한 간격을 터득한 것 같았고 민주와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머리 길이나 성향을 묻는 등 소상한 신변잡기에 심취하지도 않았다. 이따금 주고받은 일상 사진으로 추측건대 취향도 대강 비슷한 것 같았다. 민주는 취향을 가늠하기에 가장 보편적인 질문으로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다. 각자의 별 다섯 개짜리 영화와 이런저런 퀴어 영화를 나열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아가씨〉와 〈캐롤〉에 대해서는 서로 비슷한 감상이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적에는 감명 깊었고 언젠가 그런 영화처럼 대단한 인연을 만나길 바란 적도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실감과는 다소 동떨어진··· 여느 판타지 영화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재이가 덧붙였다. 그런 건 이제 〈아이언맨〉 시리즈처럼 보는 거죠. 여러모로 호기심이 동하는 사람이었다. 화면 속 인력이 민주를 자꾸만 끌어당겼다. 얼마 전, 전 여자 친구인 보영을 만난 참이기도 했다. 헤어지고 한 달 만에 연락을 하더니 이사할 적 챙기지 못한 짐을 가져다주겠다며 대뜸 선언한 것이다. 이제 와서 대체 뭘? 뾰족한 말이 불거졌으나 그것을 부러 꺼내어 겨누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버려 달라며 부탁해도 보영이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탓에 속수무책이었다. 얼굴 보고 대화도 할 겸. 보영의 연락에 마지못해 응하고서는 근처 역 이름을 말했다. 간만에 본 보영의 얼굴은 어딘가 누추하고도 조촐한 몰골이었다. 두고 왔다던 짐만 챙길 심산이었는데··· 정작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뭔가 헛헛하네. 간소한 세간을 보자마자 보영이 중얼거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으면 그럴 수도 있지. 곧 눈치를 살피며 수습했다. 기껏해야 다섯 평일 방은 냉전을 치르는 동안 급하게 구한 곳이라는 걸, 함께 살던 집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형편에 맞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는 것을··· 전 여자 친구 앞에서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현관 앞에 짐을 둔 보영이 머뭇거렸다. 돌이키기에는 지나치게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거운 찬장을 뒤적거리는 시늉을 하다 냉장고에 처박아 두었던 맥주캔을 대접했다. 1인용 좌식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선 안부와 근황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듬성듬성 이어 갔다. 내밀한 공간은 마음가짐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싸구려 가벽 너머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앞집 커플이 주고받는 욕설 따위가 들렸다. 밤만 되면 불거지는 것들이었다. 씨발! 한 번 더 욕설이 떨어지자, 보영은 놀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앞에 커플이 사는데, 자주 저래. 민주는 별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다. 너는 저게 괜찮아? 보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동
작성일 2025-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1563상세보기 -
소설 강보라 - 빙점을 만지다
빙점을 만지다 강보라 직선으로 뻗은 도로 양편으로 수확을 막 끝낸 포도밭 풍경이 길게 이어졌다. 열매는 없으나 여전히 무성한 포도나무들이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며 잎에 묻은 햇살을 털어 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그 아래 연필로 그은 밑줄처럼 도드라진 도로의 색 대비가 너무 강렬해서 현기증이 났다. 속도를 높이자, 열린 창틈으로 캘리포니아의 온기가 밴 가을바람이 스몄다. 알맞게 식은 목욕물처럼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지금 이 바람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저 단조로운 풍경에 잠겨 익사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가라앉았던 마음에 가벼운 상승감이 일었다. 같은 풍경이 지루하게 반복되어 졸음에 빠진 운전자들이 자주 사고를 일으킨다는 29번 고속도로에서 그처럼 시적인 문장으로 생각을 간추린 스스로가 뿌듯했다. ‘익사’라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있잖아. 나 여기서 사고 낸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으응, 신음한 양미가 잠결에 몸을 뒤치며 웅얼거렸다. “···뭔 마음.” “경치가 너무 단조롭잖아.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멎을 정도로. 이대로 계속 달리면 저 풍경 속에 익사할 것 같지 않아?” “···오빠 취한 거 아니지.” 조수석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양미가 “춥다, 최 기사 창문 좀.”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를 향해 돌아누운 양미의 입술 안쪽에 검붉게 말라붙은 와인 얼룩이 보였다. 취해? 내가? 어이없어 내쉰 한숨에 눈앞의 앞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렌터카로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세 곳을 연이어 방문한 오늘, 취해 가는 양미 옆에서 묵묵히 최 기사의 본분을 다한 사람은 나였다. 내가 양미의 가르침대로 ‘오로로로’와 ‘퉤’를 반복하며 맥주잔만 한 타구통을 가득 채우는 동안 양미는 그 많은 시음용 와인을 뱉지도 않고 족족 받아 마셨다. 입술을 조붓하게 오므리고, 입에 머금은 와인을 혀끝으로 ‘오로로로’ 굴리며 그간 부지런히 익힌 지식을 뽐냈다. 2019년에는 작황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2020년산 샤르도네랑 비교하니 미네랄의 질감이 확실히 다르네요. 와인 메이커의 선택이 달라서만은 아니겠고, 역시 수확 직전의 기후의 차이가 가장 크겠죠? 의례적인 미소로 와인을 따라 주던 에듀케이터들이 양미의 남다른 질문에 “굿 퀘스천”, “이그젝틀리” 감탄하며 이전보다 한층 깊이 있는 설명을 이어 갔다. 양미의 열정에 감동해, 시음 프로그램에 없는 귀한 와인을 서비스로 내어준 에듀케이터도 있었다. 뭐 한편으로 신기하기는 했다. 에듀케이터가 와인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하면 내 혀끝에서도 두엄처럼 비옥한 땅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양미가 정향과 육두구 향이 난다고 하면 정말로 와인에서 정향과 육두
작성일 2025-02-01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4 댓글수 1 조회수 2107상세보기 -
소설 김혜진 - 관종들
관종들 김혜진 정해는 남편 영기에게 가져다줄 전복죽을 포장해 오는 길에 그 애를 봤다. 추운 날이었다. 한겨울은 아니지만 제법 겨울이라고 할 만한 공기가 아파트 단지 내의 풍경을 빠르게 바꿔 놓는 중이었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는 여름내 노인들이 점거하다시피 애용하던 팔각 정자에 누군가 두고 간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찌그러진 음료 캔, 지저분한 돗자리, 마른 낙엽 같은 것들과 나란히 놓인 아이의 모습이 이상한 방식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건 날씨에 비해 얇은 아이의 옷차림 탓인지도, 어쩐지 울적해 보이는 표정 탓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정해의 성격 탓이 컸다. 그녀는 그런 사람을,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해는 아이에게 다가갔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 뭐 하니, 여기서? 아이의 자그마한 코가 빨갰다. 동생 기다려요. 동생이 어디 있는데? 집에요. 집에? 그럼 집에 있지 왜 나와서 기다리니?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그녀는 알아보았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단속하듯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아이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어렸다. 그건 그녀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완강하게 입을 다문 아이를 간신히 관리사무소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전복죽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정해는 냄비에 죽을 데우며 (남편 영기는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것을 싫어했다) 그 아이 생각을 계속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냄비를 태울 뻔했다. 애가 혼자 정자에 있었다고? 이 날씨에? 며칠 전, 대장의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영기는 숟가락으로 죽을 맥없이 휘젓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평생 설비업자로 일한 그는 재주에 비해 늘 아쉬운 대우를 받았지만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정해는 바로 그 점(소박함이라고 해야 할지, 아둔함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이 그의 삶을 고만고만하게 만들었다고, 더 높이 도약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여겼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뭔가를 수리하고 복구하고 바로잡는 것에서 그가 큰 희열을 느낀다는 걸 알았으니까.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가 그런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맞다. 그에겐 뭐든 고칠 수 있다는 자신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죽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앉은 그에게선 이제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해는 그가 잃어 가고 있는 것이 다만 자신감 하나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정해는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은 저물어 있었다. 정해는 아이가 입고 있던 얇은 바지와 바지 아래로 드러난 발목, 구멍이 숭숭 뚫린 슬리퍼 같은 것들을 떠올렸고 미안함을 느꼈다. 아이를 떠넘기듯 관리사무소에 맡기고 돌아올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뭔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어서였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봐. 누가 와서 애를 데려갔는지. 영기가 재촉했고 정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곧바로 연락하지
작성일 2025-02-01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565상세보기 -
소설 구병모 - 쌍두몽(雙頭夢)
쌍두몽(雙頭夢) 구병모 굴속에 두고 온 겨울잠이 나를 엄습한다. 한순간 새의 노랫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채는데, 그것이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건지 내 몸속에서 흘러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바람과 모래와 나무 사이에서 닳아 가는 의식이 육(肉)의 허물을 벗겨 낸다. 소리만이 텅 빈 몸속에서 진동한다. 한 마리의 새는 광막한 하늘에서 탈각된 가피(痂皮)일 뿐이다. 정처 없던 사고는 짓이겨져 새의 몸을 살찌우고 그 날개 아래 영원히 유폐된다. 나는 내 존재에 그어진 선명한 취소선 두어 줄을 느낄 수 있다. * 시간의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살갗마다 앉은 흉터 아래를 탐침하고자 하는 이들이 기억 집담회에 모인다. 이는 기억의 회의라고도 하고, 기억 세미나 혹은 기억의 제의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기억이 열리는 나무 밑에 둘러앉아 나무 열매를 따서 나눠 먹고—그 씨앗은 다시 땅속에 묻는다, 그것이 무엇으로 열리든지, 그대로 흙의 일부가 되더라도—손을 잡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몸짓을 유지한 채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는데, 이는 체온을 전달하기 위한 행위로, 축축한 땀이 차오르는 타인의 손바닥을 신경 쓰는 이는 참석이 불가하다.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혹은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한. 어쩌면 이미 휘발되어 떠나간 지 오래여서 창궐하는 유령처럼 사방을 배회하며 약탈할 몸을 찾는 기억을, 원래의 소유자에게로 다시 데려오기 위한. 그러므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단순 건망증이 있는 이들, 빈지 워치 시대의 보편적인 디지털 중독자들, 인지증 진단을 받은 이들. 최초의 기억 집담회가 자생적으로 싹텄을 때는 인지증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위한 나눔과 위로의 성격이 강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약간의 포즈, 실제로 기억 증진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행위들. 누군가는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암송하고 (틀리거나 일부 구절을 건너뛰어도 좋다), 누군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영화 속의 인상적인 한 장면을 묘사하고, 누군가는 40년 전 자기가 입었다던 삭기 일보 직전의 배냇저고리를 공개하면서 여밈 부분에 묻은 얼룩의 기원을 상상하여 들려준다. 상상은 기억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까. 좌우로 기우뚱하는 고개들. 기억은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변형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상상과 크게 다른 범주라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간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라면, 상상은 웬만큼 도움이 되리라고, 사람들은 수긍한다. 처음 문턱을 넘을 때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흔히 있는 최면 센터일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마음 다스림을 빌미로 삼은 장삿속. 유쾌한 기억,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 잊고 싶은 기억, 왜곡된 기억 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번드러운 말로 시선을 끌고 기억전시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림과 소조(塑造)와 글로 기억 구조물이라는 것을 세워다가 춤, 노래, 연주, 꽃 무엇으
작성일 2025-02-01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3 댓글수 1 조회수 6780상세보기 -
소설 김인숙 -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김인숙 그즈음 유자는 자주 암벽 공원을 찾았다.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다. 넓은 공원 한 곳에 높은 암벽을 세우고, 예쁜 색깔의 조약돌 같은 돌들을 색색이 박아 놓았다. 사람들이 그 돌을 손으로 잡고 발로 짚으며 올라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몇 달 가까이 그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즈음에는 거의 매일 공원을 산책했음에도 암벽은 늘 아무 방해 없이, 아무 매달리는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멈춰 서서 고개를 쳐들어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도 대체로는 그녀뿐이었다.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안전 요원 없이 등반을 금지한다는. 아마도 특정한 날에만 운영을 하는 시설인 것 같았다. 그녀가 그곳을 산책하는 시간은 그 특정한 때의 밖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시간이 특정했을지도. 그녀는 ‘특정’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즈음에는 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험한 말을 많이 듣게 된 탓일 수도 있었고, 그 말들을 그릇 씻듯이 좀 씻어 버리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암벽 접근을 막는 펜스 바깥에는 벤치가 있었다. 잔디밭 바깥에 있는 벤치가 아니라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평생 ‘밟지 마세요’라는 표지판만 보고 살아온 유자는 걱정 없이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그 벤치가 좋았다. 그게 실은 들어가 앉으라는 것이 아니라 조경용이라는 걸 몰랐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 후에도 가끔씩 잔디밭 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처럼 생각 없이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암벽 앞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암벽을 등지고 앉아 잔디밭 한가운데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잔디를 밟을 때의 폭신하고, 미끌하고, 심지어는 바삭하기까지 한 감촉이 그리움처럼 남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기억인지 금지된 것을 안 후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때때로 발밑이 아찔한 것을 보면. 가끔씩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암벽 앞을 지나갔다. 개도 사람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암벽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암벽 사진을 찍으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올렸던 사람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녀가 앉아 있는 벤치는 지나치게 좋은 자리, 혹은 지나치게 나쁜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녀가 그런 사람이거나. 그렇다고 해서 일어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일어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딱 그곳에 앉았을 때만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소박하고 희미한 저항. 낯간지럽고 귀여운 의지‧‧‧. 그렇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나 징그러운 사람이면, 아직도. 유자는 그 벤치에 앉아 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생각하다 보면 타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장기 말도 생각하게 됐다. 그녀는 말을 타 본 적이 없었다. 달리는 말을 본 적은 있었다. 제주 어디 해안에서였는데, 곧 폭풍이라도 몰아칠 듯 어둑한 해변을 말 한 마리가 달려왔다. 유자는
작성일 2025-02-01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3 댓글수 1 조회수 1432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