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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소설 이선진 - 밤의 반만이라도
밤의 반만이라도 이선진 그 겨울, 우리는 어두워지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빛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전맹인 네 엄마 덕택에 너희 집 불은 대개 꺼져 있었고, 나는 활동보조사로 일했던 새엄마를 따라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갈 때마다 몸이 훅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언덕 경사로에 위치해 입구만 지하에 나 있을 뿐 반대쪽에서 보면 엄연한 지상층이었는데도 동네 사람들은 너희 집을 반지하 집이라고 불렀다. “내가 못 살아. 왜 이렇게 어둡게 하고 있어!” 한번은 불이 켜져 있음에도 새엄마가 이렇게 말했고, 나도, 너를 낳고 기른 미수 씨도, 아무도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바로잡지 않았다. 오직 너만이 작지만 모두에게 충분히 가닿을 법한 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아줌마 얼굴이 제일 어두워 보여요!” 비밀스러움. 네겐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었고 그건 네가 너와 세상 사이에 아무런 비밀을 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비밀이 없는 것이 오히려 너를 비밀스럽게 만들었다. 너는 시각장애인이라는 말을 슈퍼에서 파는 백 원짜리 싸구려 불량식품처럼 스스럼없이 입에 올렸다. “우리 엄마는 시각장애인이고, 얘네 엄마가 일주일에 세 번 우리 집에 활동 보조하러 와!” 하고 속사정을 훤히 내보였다. 그때 이미 너는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나머지 한쪽 눈의 시력도 서서히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너는 마치 네가 잃어버린 게 몽당연필이나 연필 꽁지에 달린 지우개인 듯 굴었다. 그래서 어려운 친구를 도와줘야 한다는 지령을 받은 반 애들은 도움 받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저자세를 취하지 않는 너를 겉돌곤 했다. 그러니까 너로 말할 것 같으면 학교에서 선생님이 둘! 하고 외쳤을 때 언제나 짝 없이 혼자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셋! 하고 외쳤을 때 언제나 짝 없이 혼자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넷! 하고 외쳤을 때 언제나 짝 없이 혼자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너는 둘과 셋과 넷밖에 외칠 줄 모르는 얼빠진 선생에게 “근데 있잖아요, 왜 하나! 하고는 안 해요?”라고 요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아주 잠시, 나로 인해 둘이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만져 봐도 돼?” 아무도 너와 짝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아 우리가 처음으로 짝이 된 날, 너는 한시도 가만두지 않아 빨갛게 부르튼 내 입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무렵 반 애들의 책상에는 기다란 세로선이 그어져 있었고, 누군가 그 선을 넘으려 들 때마다 금, 하고 말했다. 금 넘으면 죽어! 초짜처럼 소리 높이는 대신 최소한의 말만 간추렸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못해 안달 난 아이들. 나는 ‘5쾌’라고 적힌, 칠판 위에 삐뚜름하게 걸려 있는 급훈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쾌, 상쾌, 통쾌, 경쾌. 여기까지는 유추 가능했는데 딱 하나가 빠졌다. 삐뚠 게 내가 아니라 액자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만져 봐
작성일 2023-1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16상세보기 -
소설 김경욱 - 낫과 밤
낫과 밤 김경욱 글이 써지지 않는 밤에는 낫을 들고 나갔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베란다 창고에 낫이 있었다. 지구 반대편부터 끌고 온 캐리어를 집어넣다 발견했다. 열네 시간 훌쩍 넘는 비행으로 내 몸뚱이마저 낯설었지만, 물음표 모양으로 희번덕거리는 그것은 낫이라 불리는 물건이 분명했다. “하진 씨, 이게 뭐예요?” 아내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반말하지 않기. 서로의 이름 부르기. 그게 유일한 결혼 조건이었다. 부부간에 요요, 해서 애가 들어서지 않는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지켜 온 혼인 서약이었달까. “보면서 물어요?” 하진 씨는 베란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웬 거냐고요.” 내가 고쳐 물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빠뜨렸나 봐요. 일부러 연락하기 애매해서 그냥 뒀어요. 가져갈 거면 가지러 오겠죠.” 낫을 맨 안쪽으로 밀어 넣고 창고 문을 닫았다. 주말농장에서 썼는지 산소 벌초에 썼는지 몰라도 낫의 주인이 찾으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 하진 씨가 고르고 계약한 아파트였다. 이사도 하진 씨 혼자 했다. 재건축 얘기가 도는 단지였다. 이미 확정 단계라 했던가. 상관없었다. 내게 있어 집이란 밤을 새워 글 쓰는 곳을 뜻하니까. 나 자신을 코너로 몰아넣을 두 개의 벽만 있으면 되니까. 이곳은 세상의 구석, 나의 북극점, 나의 두벌식 자판, 나의 저장하기. 부동산 계약서에도 대법원 등기소에도 올리지 못할 나만의 주소. 번지수가 어떻게 되든 노트북을 펴는 자리가 바로 나의 집이다. 맞다. 나는 작가다. 지금껏 쓴 책이라야 장편소설 한 권뿐이지만. “집주인이 갑자기 들어와 살겠다네요.” 하진 씨가 이사할 집을 급히 구해야 한다고 전화했을 때 나는 열두 시간 시차 너머에서 노트북 화면만 노려보던 참이었다. 미국 북동부의 한 주립대학에서 운영하는 국제창작프로그램 지원 자격은 오직 책 한 권. 나를 위한 레지던시 같았다. 어느 날 화재 경보에 놀라 잠옷 바람으로 레지던시 숙소를 뛰쳐나가면서도 나는 노트북부터 집어 들었다. 몸만 빠져나온 외국 작가들이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너, 작가 맞구나.” 그런 영어는 못 알아들을 수 없다. 일간지 기자 출신 작가라면. 작가 두 글자 앞에 군더더기처럼 붙곤 하는 수식어가 못내 거슬리던 사람이라면. 중학생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다. 낙엽이 흩날리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버버리 코트 깃을 세운 특파원이 주머니에 한 손을 꽂은 채 보도하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대학도 불문과에 갔다. 방송국에 서너 번 떨어지고 신문사로 방향을 틀었다. 틀어진 건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부부 소리를 들으며 붙어 다니던 여자친구와도 졸업하자마자 헤어졌다. 사귀는 동안에도 왜 사귀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억나는 건 제대하자마자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에서 여자친구가 마실 막걸리
작성일 2023-1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03상세보기 -
소설 윤대녕 - 보리수나무 아래
보리수나무 아래 윤대녕 1 며칠 전 종편방송을 시청하다 나는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략 십 년 만이었다. 〈그때 그 사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다소 긴 제목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봄에서 여름까지 지방 곳곳을 옮겨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다. 봄여름을 그렇게 보낸 뒤 가을에는 고향인 강화도로 돌아가 아버지의 농사를 도우며 지낸다고 했다. 과거 연희동 술집에서 만났을 때 그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으니 지금은 오십대 초반일 거였다. 촬영 당시 그는 충청도 공주의 어느 산자락의 움막에서 지내며 밤꿀을 채취하고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했으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시냇물 속에 이끼를 머금은 채 고요히 잠겨 있는 돌을 떠올렸다. 더불어 강화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화도 고려궁지 아래 있는 한옥 성당을. 한옥 성당 마당에 서 있는 보리수를. 2 당시 나는 서대문구 연희동의 오래된 주택 이층에 세 들어 살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와 만나게 되었다. 영화감독인 매형의 소개로 술자리에서 합석한 적이 있었다. 매형은 옆 동네인 연남동에 독립 프로덕션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희동 단독주택에 방을 구해 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러다 보니 가끔 만나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게 되었고 어떤 날은 낯선 사람들이 중간에 합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매형의 지인들로 대개 영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연희동 음식점 거리에서 연남동으로 넘어가려면 굴다리를 통과해야 하는데, 굴다리로 진입하기 직전 오른쪽 골목 안에 야식포차집이 숨어 있었다. 매형과 나는 거기서 만나곤 했다. 그날은 왜 매형과 만났던 것일까? 늘 그렇듯 특별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는 건 초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정도였다. 3 매형과 누나가 따로 지낸 지 십사 년이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로 만나는 일도 없이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집을 나간 것은 누나였다. 종로에 있는 보습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던 누나는 어느 날 짐을 꾸려 홀연히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후 두 사람은 수수께끼 같은 관계를 지금껏 유지해 오고 있었다. 홍어찜을 앞에 두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터에 밤 열 시쯤 매형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어, 병주냐? 너 그동안 어디 있었길래 통 연락이 없었어? 그래, 조만간 한번 보자. 뭐, 지금? 매형이 잠시 통화를 멈추고 후배가 만나자는데 합석을 해도 되겠냐고 내게 물어 왔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기에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기에 나는 적당히 일어날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로부터 약 삼십 분 뒤에 나타난 사내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언젠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사극에 출연했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방송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나중에 매형한테 들은 바로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
작성일 2023-1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94상세보기 -
소설 박소민 - 우리가 알던 뜨거운 점
우리가 알던 뜨거운 점 박소민 오늘은 제때 오려나. 율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렸다. 태양 흑점을 보고 싶다는데 네 시 넘어서야 시민천문대 중앙관측소 문을 열어젖히고 저 왔어요, 손까지 흔들며 활짝 웃는 조그마한 어린아이. 아마도 나이는 열두 살쯤. 요즘은 초등학생도 수업이 늦게 끝나나. 율은 이 시간에 오면 해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몇 번씩 재차 일러준 적 있었다. 내일은 꼭, 삼십 분만 일찍 오라고. 아이는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났고 저기 해가 떴는데 왜 안 돼요? 아직 쨍쨍한데, 또랑또랑하게 물어 왔다. 율은 정말 미안한데 친구야, 그게 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저기 봐, 구름에 다 가렸잖아?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을 가리켜야 했다. - 별은 싫어? 조금만 기다리면 별이 뜨는데. - 내일 또 올게요. 아이가 오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율에게는 미련 없이 되돌아 나가는 매일의 뒤통수가 켜켜이 쌓였다. 아이가 눌러 쓴 캡 모자의 색, 어느 날은 빨간색이었다가 다른 날은 노란색, 두 개를 섞은 주황이었다가 또 검정이 되는 동안 율의 마음도 덩달아 거뭇거뭇 타들어갔다. 해를 보고 싶어 하는 건 너인데 내가 네 머리에 매일 달리 뜨는 해를 보는구나······ 싶어서. 언젠가 한번 아이를 불러 세워 물었다. - 밤에 오지 않고 낮에 오는 이유가 있어? 보통은 별이 더 인기가 좋은데. 태양은 매일 뜨니까 고개만 들어도 볼 수 있을 텐데. 아이는 눈썹 아래까지 푹 내려쓴 캡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 매일 떠 있으니까요.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거예요.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건 율도 마찬가지였다. 율은 아이가 올 때마다 잊지 않고 꼭 질문을 한 개씩 했다. 사람 한 명 없이 발길이 뜸한 낮, 율은 아이를 떠올렸고 묻고 싶은 것을 입안에서 돌돌 궁굴렸다. 아이의 이름은 가원이었다. 캡 모자 안에 머리카락을 쑤셔 넣고 다녀서 풀어헤쳤을 때의 길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삼촌과 단둘이 살고 있으며 유독 동그란 뒤통수 때문에 본명보다 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이 가, 이름이 원이에요. 실은 정가원이라는 걸 알고도 율은 모른 척해 주었다. 매일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율은 원에 대해 한 줌의 이야기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삼촌. 다섯 시 넘어 땀으로 얼룩진 체크 남방, 허겁지겁 달려 들어와 무릎 높이에서 손바닥을 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 몸짓과는 어울리지 않는 낮고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혹시 요만한 아이 정가원이 오늘도 다녀갔나요, 물어 왔는데 원의 진짜 이름도 이렇게 알게 된 거였다. 네, 집에 간다고 하던데요. 율이 안심시키면 그는 숨을 고르며 실례가 많습니다,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율은 그런 그에게서 풍겨 오는 과장되지 않은 깍듯함이 퍽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 사이에 말을 거는 법이 없다시피 한 율도 왜인지 원과 그의 삼촌에게만큼은 입을 열게 되었다. 삼
작성일 2023-1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08상세보기 -
소설 한은형 - 피서
피서 한은형 1 기온이 낮고 습하지 않은 곳을 찾아 한여름의 홋카이도 시베츠로 떠나는 여자의 이야기를 읽다가 추운 나라에서 계속 살았다면 피서를 가는 일은 없었겠다고 베라는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베라에게 피서란 더운 여름이 배경인 소설에나 존재하는 말이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여름은 일 년 중에 가장 날씨가 좋을 때여서 누리기 바빴고, 추위를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지는 겨울에 ‘쿠르가우스’, 그러니까 피한(避寒)을 떠났다. 피서라는 뜻도 함께 있었지만 베라에게 쿠르가우스는 피한이었다. 베라에게는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떠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공동으로 쓰는 다차에서 피한을 할 때는 몰랐던 몽글몽글한 공기를 한겨울의 피한지에서 느꼈다. 다차가 추웠던 건 아니다. 과한 난방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지만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좀약 냄새가 나는 공용 이불을 덮고 자는 건 피한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석탄을 활활 태우는 게 아니라 시간대가 다른 곳으로, 대기 중의 온도가 다른 곳으로 가야지 피한이라고 베라는 납득할 수 있었다. 집에서 싸온 마르코프차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이나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러시아의 당근 김치. 가 아니라 따뜻한 도시에서 불가리아나 조지아의 음식처럼 이국적인 걸 먹어야 했다. 다차의 개어져 있는 이불에서는 시베리아횡단열차 3등석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던 공용 이불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베라는 피서가 처음이었다. 베라의 여정은 한대앞역에서 당고개행 열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열차는, 그리고 열차 안의 베라는 동작역을 지나 이촌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지점이면 4호선 당고개행 열차가 동작역을 지나 이촌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베라는 여기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생활을 꾸린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자동차와 열차가 의좋게 달리는 느낌을 주는 이 구간이, 한강이 보여 가슴이 트이는 이 구간이, 석양이 질 때 특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 구간이 베라는 좋았다. 하지만 동작대교 위라는 건 알지 못했다. 동작대교 위의 열차가 통과하는 부분이 연속적인 하늘색 아치로 감싸여 있다는 것도. 달팽이집에서 나와 몸을 길게 늘이는 달팽이의 몸처럼 이때 그녀의 표정은 잠시 녹녹해지곤 했다. 서울의 풍경이 신기해서는 아니었다. 그럴 시기는 지났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보이는 간판들을 모두 읽었다. 금정삼성쉐르빌 ··· 한우만 ··· 토끼와 여우 ··· 김밥천국 ··· 장어마을 ··· 마을이나 고을, 집을 접미사로 붙여 만드는 식당 이름에 이제 익숙해졌고, 김밥천국처럼 이름을 보면 가격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하는 건 다른 문제였지만 말이다.
작성일 2023-1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08상세보기 -
소설 최미래 -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최미래 눈꺼풀 위로 햇살이 드리웠다. 나는 감은 눈 안에서 눈동자를 굴렸다. 요즘에는 낮이고 밤이고 쉽게 졸았다. 하지만 막상 작정하고 자려고 하면 깊은 수면에 들어가지도 꿈을 꾸지도 못했다. 얕고 미지근한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아 내가 잠 속으로 향하는 어딘가에 머물고 있구나.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까지의 시간은 참 길고 아득해. 둘러볼 풍경도 없고.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가만히 기다리는 기분이야. 기다린다는 건 무언가 내 앞에 당도할 때까지 버티는 것.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유지하는 것. 나는 나조차도 뭔지 모르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다림이라는 걸 하고 있다는 데서 안도한다. 걱정을 내리누르는 적당한 어둠. 좋다. 영원히 헤매도 괜찮을 만큼. 그런 생각을 멈추지 못하면서 졸음 그 자체를 누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알람이 울리기까지 20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오후 5시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퇴근을 앞둔 직장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은근슬쩍 가방을 챙기거나 퇴근 시간까지 업무를 끝내기 위해 바빠지기도 할 것이다. 몇 개월 전의 나였다면 하루의 두 번째 아침을 맞이한 사람처럼 뭐라도 하기 위해 조급해질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고 또 다른 일을 해치우기 위해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토록 아름답게 늘어지는 저녁 해를 그때는 누리지 못했고, 오후 5시는 이제 내게 서라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이불을 침대에 잘 개어 놓고 방과 거실을 오가면서 간단한 정리 정돈을 했다. 서라가 아침에 벗어 놓은 잠옷은 세탁 바구니에, 머리띠나 인형 같은 건 작은방에 대충 집어넣었다. 방 두 개가 딸린 아담한 집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 정도 평수의 집에서 혼자 살기를 원했다. 오후에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일상. 어떻게 보면 반의반 정도는 이루어진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희망사항에서 더욱 멀어졌다고도 볼 수 있었다. 이 집은 거실, 침실 할 것 없이 아기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가 있는 집 특유의 포근하고 찌뿌둥한 냄새는 이상한 자책감을 일으켰다. 나는 완전히 깨어나기 위해 슬슬 걸으며 차가운 보리차를 꺼내 마시고 머리를 묶었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는 동안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 속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라와 얼굴을 맞댄 이 여자는 아마 서라의 엄마일 것이다. 모녀는 선한 눈매와 작은 입술이 꼭 닮아 있었다. 내가 당신의 아이를 돌보고 있어요. 나는 당신 없는 이 집에서 돈을 개꿀로 벌고 있어요. 당신은 어디 있어요? 여자는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답이 없었다. 서라야. 안녕히 가세요, 소리 내어 말하면서 배꼽 인사 할까? 유치원 선생님은 서라를 가뿐하게 안아 버스에서 내려 주었다. 서라는 두 손을 공손하게 배 위에 얹고 허리를 숙인 뒤 내 옆에 섰다. 이모님 보셨죠? 서라가 아직도 말을
작성일 2023-1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11상세보기 -
소설 정소연 - 현숙, 지은, 두부
현숙, 지은, 두부 정소연 현숙은 구포동을 정착지로 골랐다. 연고지는 아니었다. 애인과 헤어지고 나니 더 이상 서울에 살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현숙과 애인의 관계를 알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큰 도시의 익명성이란 때로 얄팍했다. 현숙은 한 번 더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 비밀이 소문이 되고 소문이 낙인이 되는 경험은 이미 했다. 애인은 실수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들은 때로 자신이 인정하지 않을 잘못을 했다. 구포역은 현숙이 KTX를 타고 하나씩 내려 둘러본 역 중 거의 마지막에 있었다. 작지만 깨끗한 기차역이었다. 역 주위에는 대형 카페 체인, 편의점, 김밥집 따위의 편의시설이 적당히 들어서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조성된 생태공원이 도보거리에 있었다. 현숙은 공원에 가보았다. 보호자가 미는 휠체어를 타거나 보행 보조기를 천천히 밀며 산책하는 노인,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보호자, 모자, 토시, 스카프로 중무장하고 경보를 하는 중년 여성들이 제각기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천천히 느리게 일하고 조금씩 벌면서 자리 잡고 나이 들어 가기에 좋은 동네 같았다. 영업하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오피스텔에 살면서 돈을 모아 바로 옆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집을 마련하고(여기까지가 공인중개사가 그려 준 미래였다), 거기서 최대한 오래 버티다가 근처의 요양병원에 여생을 맡기는 삶(이쪽은 현숙이 지향하는 미래였다)이 가능해 보였다. 딱 적당한 동네였다. 서울에서 충분히 멀었고, 충분히 도시였고, 충분히 느렸다. 현숙은 구포역에서 십 분 거리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보증금 오백만 원에 월세 삼십오만 원이었는데, 주방과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어림없는 금액이었다. 현숙은 근처 신도시 주민을 주 고객으로 하는 프리랜서 펫시터로 정착했다. 다른 사람들이 출장, 여행, 야근, 건강상의 이유로 돌보지 못하는 고양이와 개들을 대신 돌보는 일이었다. 가슴에 액션캠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구형 휴대전화를 달고, 주인 없는 빈집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고양이의 화장실을 치우고 사료를 주었다. 낚싯대를 흔들거나 캣닢이 든 장난감을 던져 주며 고양이들과 놀았다. 현숙은 고양이를 조금 더 좋아했지만, 현숙의 생계를 유지해 준 것은 고양이보다는 개 돌봄이었다. 산책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퇴근이 늦어서, 건강상의 이유로 반려견 산책을 나서기 어려운 보호자들이 산책 돌봄 신청을 하면, 현숙은 개를 데리고 나가 생태공원을 걸었다. 때로는 줄을 쥐고 헉헉대며 개를 따라 뛰었고, 때로는 개를 유모차에 싣고 천천히 걸었다. 발바닥을 닦아 주고 집에 돌아와 물을 마시며 그날 만난 고양이와 개들의 돌봄일지를 썼다. 종일 사람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서울에 남아 있을 옛 애인, 평소 만나지 않음으로써 단체 채팅방에서는 서로 그럭저럭 문명인다운 명절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원가족, 한때는 일주
작성일 2023-1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1124상세보기 -
소설 임순옥 - 나의 다비드
나의 다비드 임순옥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무 꽃이 불 켠 양초처럼 서서 가루를 흩뿌렸다. 노랗고 분분한 것이 보이지 않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책방 곳곳에 악착같이 흔적을 남길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수건에 물을 적셔 책꽂이와 창틀을 닦아냈다. 눈이 따끔거렸다. 각막을 닦아내면 노란 가루가 묻어날 것 같았다. 미닫이문을 열었다가 닫았는데 신경을 끊어 놓을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수꽃이 소스라쳐 송화 가루를 무더기로 날려버렸을지 모르겠다. 근처 씽크대 공장에서 합판을 자르는 전기 톱날이 내는 소리였다. 씽크대 공장에 육십이 넘은 남자와 젊은 인부가 일하는데 이 달부터 오가는 길에 인사를 하고 지낸다. 가루 날리는 수꽃들처럼 이들도 악착같이 톱날을 드는 것이다. 늙은 남자가 이틀 전 어둑해질 무렵, 책방에 와서 손주 녀석이 게임을 좋아하는데 읽을 만한 책이 있냐고 물었다. 한번 같이 오라고 했더니 같은 동네에서 일 년 넘도록 지켜봤는데 오전에 책방 문 여는 걸 못 봤다며 퉁박을 놓았다. 씽크대든 책이든, 손님이 있건 없건, 물건 파는 집은 부지런해야 한다고 연설을 늘어놓았다. 아르바이트 하느라 오후 한 시에 문을 연다 했더니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슬쩍 대답을 피했다. 노인이 넌지시 가게 세를 물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전기 톱날이 내는 소리처럼 카랑했다. 요즘 나는 오전에 의류 쇼핑몰 건물 청소를 하고 있다. 오전 6시 출근해서 1, 2, 3층 매장에 청소기를 돌리고 밀대로 바닥을 닦는다. 계단과 엘리베이터, 화장실 물청소까지 하고 나면 겨울에도 작업복 상의에 땀 얼룩이 졌다. 계단 신주를 닦고, 바닥에 붙은 껌을 벗겨낼 때는 브래지어를 탈의한다. 한 번 벗고 보니 땀 차고 옥죄는 속옷을 고집할 까닭이 없었다. 10시까지 청소 일을 마치면 책방에 와서 샤워를 하고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인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한 시에 책방 문을 연다. 그날 매출은 2만 2천 원, 팔린 책은 노인이 고른 동화책 두 권이 전부였다. 매출 0이 될 뻔한 날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었다. 덕분에 씽크대 공장 노인과 제법 길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은 이 동네 가게 세가 싼 편이라 했다. 그렇죠. 그래서 인수할 수 있었죠. 나는 속엣말을 했다. 노인은 꼿꼿한 자세로 책방을 휘 둘러보더니, 부엌까지 딸린 1층 상가가 보증금 3천만 원에 월 35만 원이면 거저라고 했다. 거저라뇨, 대출금과 월세 때문에 목이 메는데. 나는 그 순간 진짜 목구멍에 찰떡이라도 낀 것 같았다. 딸 같아서 하는 이야기니 고깝게 듣지 말라며, 그래도 책 팔아서 운영비와 월세가 빠지고 생활비가 나와야 장사를 하는 거다, 아니면 빚더미에 앉기 십상이니 큰 손해 안 볼 때 접는 게 상책이라 했다. 생선가게는 생선이 귀한 데서 하고 책장사는 책이 귀한 데서 해야지, 책방 코앞에 도서관이 생겼는데 장사가 되겠냐고 했다.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라고 냉큼 받아쳤다. 도서관에서 책 대출 하는 사람들이 책방에 와서 책을 사더라고 말이다. 사실 길
작성일 2023-1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64상세보기 -
소설 민글로 - 벤치프레스 피플
벤치프레스 피플 민글로 눈을 뜨니 내 옆에는 공중 걷기, 파도타기, 활차 머신, 삼단 철봉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발 지압 보도, 바닥분수가 보였고 뒤로는 회화나무 세 그루와 팔각 기와 정자가 우뚝 솟아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우레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형광 훌라후프와 빈 맥주캔 두 개를 보고 나서야 ‘무송 근린공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벤치 프레스가 되어 있었다. 벤치 프레스는 벤치에 누워 바벨 봉과 원판을 들어올리는 운동기구로 어느 근린공원이든 하나쯤은 있는데, 정작 내 얼굴이 오 킬로의 철제 원판으로 변해버릴 줄은 몰랐다. 이십 킬로짜리 고밀도 강철 막대기인 바벨 봉 한가운데에 매달린 얼굴이라니. 이 긴박한 순간에도 보통은 이점 오 킬로짜리 철제 원판 두 개가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하나 있어야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이미 하늘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누운 자세였다. 십자가 자세로 누운 내 손에는 이백 센티의 긴 쇠막대기 아니 바벨 봉이 들려 있었다. 두껍고 통통한 종아리는 강철 다리 두 개로 변해 공원 바닥에 박혀버렸다. 살짝 튀어나온 배도 지면에서 이십 센티나 뜬 채로 사람이 누워서 운동할 수 있는 평평한 벤치로 변했다. 척추 뼈에서 스테인리스 두 개가 뿔처럼 솟아나 나머지 지면을 단단히 고정했다. 허리를 비틀고 다리를 쿵쿵거려도 바닥에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이쯤 되니 무슨 주문 같은 거라도 외워야 하나 싶어서 입을 마구잡이로 오므렸다 폈다 하는데 내 앞으로 네 명의 여자가 걸어왔다. 그들이 쓴 똑같은 선캡은 오토바이 헬멧처럼 얼굴을 전부 가려 도통 표정이라곤 읽을 수 없었다. 그들은 두 팔을 격렬하게 앞뒤로 흔들었고 다리의 보폭을 넓혀 공원을 반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그때 양팔에 레이스가 달린 토시를 낀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여자가 왼손을 귀 옆으로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나머지 세 명도 모두 걸음을 멈추더니 양팔 돌리기 기구인 활차 머신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자들은 아침마다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모양이었다. 이들의 절도 있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을 본 나는 그들을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 저기요. 여기 좀 보세요. 내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지 여자들은 둘씩 짝을 지어 팔 돌리기 기구 앞에 섰다. 레이스 토시가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열어 물티슈를 꺼내 주었다. 그들은 물티슈를 한 장씩 받아 기구 손잡이를 꼼꼼하게 닦았다. 다 쓴 물티슈를 착착 접어 비닐봉지에 모으고, 손 세정제로 손바닥을 비빈 다음 양손으로 기구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들은 나를 쳐다보기는커녕 이제 막 시작한 팔 돌리기 운동에만 열중했다. 쇠바퀴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던 레이스 토시가 말했다. - 요새 브래지어를 할 때 팔이 등 뒤로 안 돌아가. - 언니는 앞에서 후크 채우는 브라로 진작 바꿨어야지. 오늘은 이거 백 번씩만 돌리고 가자. 이게 오십견에 좋다고 방송에도 나왔잖아. 애들 아침 차려 주기 전에
작성일 2023-10-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1698상세보기 -
소설 신보라 - 어제의 레일
어제의 레일 신보라 나는 편의 팔꿈치를 만진다. 여름이면 습진이 이는 윤과는 다르다. 편은 윤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윤의 얼굴과 목소리 같은 것들. 편이 궁금해 하는 것은 윤의 풀장이다. 윤은 수영장에서 일한다. 편은 윤이 일하는 곳을 풀장이라고 말한다. “수영장이라니까.” “그래. 풀장.” 그게 더 멋있는 말이라고 편은 덧붙여 말한다. “언제 한번 부탁이라도 해봐. 마감 끝났을 때 풀장에 가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편이 제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나는 코를 한 번 훌쩍인다. “그럴게.” 하고 대답하면서 그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윤과 나 사이를 그 정도, 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가 생각한다. 나는 편을 볼 때마다 허기가 몰려온다. 나와 편은 아무것도 할 게 없다. 편이 일을 관둔 후로 그랬다. 편은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물류센터에서 일했었다. “쇼핑이랑 비슷한 거야. 물건에 있는 바코드를 찍고 카트에 담으면 되거든. 내 것이 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지.” 왜 그만두게 됐냐는 내 말에 편이 이죽거리며 덧붙여 말한다. “꼭 가지고 싶은 게 있었거든.” 우리는 걷거나 먹는다. 식빵을 먹거나 묶어서 떨이로 파는 단팥빵을 손에 집히는 대로 먹는다. 우리가 절반이 남은 단팥빵을 다시 절반으로 쪼개어 먹고 있을 때, 편의 핸드폰이 울린다. 편은 애인의 전화를 받을 때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끝내 울어버린다. 수화기 너머 편의 애인도 운다. “그렇게 울기만 할 거면 왜 만나는 거야.” 나는 묻는다. “그런 관계도 있는 거야. 너랑 있으면 이렇게 울지도 않고 막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 너무 좋은데 말이야.” 편이 대답한다. 울기만 하는 관계.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다. 중요한 것은 동시에 우는 것이다. 나는 편의 애인을 상상해 본다. 어떤 날에는 아주 작은 치아를 가진 여자였다가 어떤 날에는 잠을 자다가 몸을 부르르 떠는 습관을 가져 편을 놀라게 하는 여자였다가 편과 똑같은 위치에 점이 있어 우리는 운명이 아닐까, 아이처럼 좋아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보는 편은 언제나 울고 있을 것이다. 편이 울지 않는 시간은 나와 함께인 시간뿐이다. 나와 편은 침대에 나란히 눕는다. 편의 키보다 훨씬 작은 침대다. 편의 두 다리가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다. 나는 싱글 베드가 우리의 무게만큼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창문으로 눅눅한 바람이 들어온다. 편과 살이 닿는 곳마다 끈적거린다. 그때마다 차가운 물속을 헤엄치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언젠가 봤던 청색의 바다를 머릿속에 그린다. 나의 모든 의지는 그곳에 있다. 우리는 걷거나 먹거나, 가만히 있는 것조차 지겨워질 때면 삼육구 게임을 한다. “왜 하필 삼육구에 손뼉을 치지. 나란히 이
작성일 2023-10-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2057상세보기 -
소설 김이숲 - 가볍게, 수련
가볍게, 수련 김이숲 1. 브라운 요가원 며칠 전에 요가원을 그만뒀습니다. 요가를 오랫동안 수련하신 원장님이 운영하는 브라운 요가원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어요. 언제나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아로마 향이 가득했습니다. 수련실에 매트를 깔고 앉으면 창으로 따사로운 햇볕이 들어왔어요. 수련 전에 매트에 누워 있는 시간이 참으로 좋았어요. 오늘은 얼마나 힘들까. 고통의 시간을 앞두고 편히 누워 숨을 깊게 쉬었습니다. 원장님 말씀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저도 디스크였는데 요가로 구원받은 사람이지요. 처음 온 날 그 말을 듣자마자 카드를 내밀어 석 달 회비를 결제했습니다. 그날 수련 끝나고 기어 나왔어요. 한 달쯤 지나면서 허리가 좋아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수련을 하고 나면 벅찼습니다. 함께한 사람들이 애틋했습니다. 수련 내내 신음소리가 들렸어요. 어딘가 조금씩 움직임이 어색한 사람들. 꼴을 보니 모두 환자였습니다. 수련을 마치며 원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너무 바쁜 세상에서 서로 경쟁하며 살고 있죠. 이곳에서만큼은 어, 저 사람은 저 자세가 되는데 나는 안 되네, 하며 비교하지 말고 나를 사랑해 주세요. 과거의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더 잘해야지, 더 착해야지, 하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착하지 않을 때 괴로운 사람이었어요. 저를 가장 괴롭히는 건 저였지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사랑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예요. 여러분도 나만의 것을 찾고 나를 사랑하는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마스떼.’ 나를 사랑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 내리신 원장님이 멋져 보였어요. 수업이 저만 좋았던 건 아니었나 봅니다. 사람이 점점 늘었습니다. 수련실에 매트를 따닥따닥 붙여 깔아야 했습니다. 갈 때마다 초조했어요. 자리가 있을까. 요가원에 들어서면 수련실부터 확인했습니다. 어느 날은 자리가 하나 남은 걸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제가 봐둔 빈자리에 다른 사람의 매트가 깔려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데, 제가 요가원에 들어올 때 제 뒤를 바짝 따라 들어오셨던 분이 수련실 안으로 걸어 들어와 매트에 앉았습니다. 자리를 맡아 놓고 옷을 갈아입은 것이었어요. 그런 일이 늘었습니다. 요가원에 들어서자마자 미리 자신의 매트를 홀랑 깔아버리는 일. 옷을 갈아입은 후에 수련실로 들어가서 매트를 까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는데. 그렇다면 저도 똑같이 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뒤에 누가 따라 들어오는데 쓱 보니 자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면 재빨리 매트를 깔아 놓고 탈의실로 가야 하는 것이지요. 꺼내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다른 사람이 당황스럽든 말든 내 몸 하나 편하고 싶었어요. 내가 사랑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선택을 해야 했어요. 나도 매트를 먼저 깔까? 양심에 따라 규칙을 지키자고 마음을 다
작성일 2023-09-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1592상세보기 -
소설 전지영 - 맹점
맹점 전지영 재복은 한 손으로 코 주위를 더듬으며 대기실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은애는 진료실의 투명 가림막 너머로 재복의 동태를 살폈다. 재복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잡지를 보는 중이었다. 여성 동아, 보그, 한 끼 밥상 같은 월간지 책장을 한 장씩 꼼꼼히 넘겼다. 은애는 재복이 코에 손을 가져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제 팔뚝과 겨드랑이, 쇄골 근처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병원에 떠도는 냄새의 출처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몸의 냄새를 맡는 행동은 2년 전 어시장 내 상가에 개업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바디 로션이나 향수 냄새는 금세 휘발되었다. 오래 남는 건 진짜 냄새, 즉 생물이 풍기는 냄새였다. 은애는 재복을 못 본 척하고 진료를 시작했다. 아침 9시 무렵, 대기 환자 수는 8명이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주일째 폭우가 반복되면서 눈이 충혈 된 채 안과를 찾는 환자가 부쩍 많아졌다. 해전시 어시장에서는 장마철 유행성 결막염이 겨울 독감보다 빠르게 번졌다. 그런 현상은 어시장 주변의 위생이 몹시 불량하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간호사가 턱짓으로 재복이 앉은 자리를 가리켰다. 은애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아직 아니라는 의사를 전했다. 간호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재복은 이 시각에 자주 병원에 들렀고, 그때마다 은애는 언제나 환자보다 재복을 먼저 진료실에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재복의 방문은 영업 탓이 아니라는 걸 은애는 알았다. 재복은 은애에게 할 말이 있을 터였다. 마지막 환자가 병원 문을 나서자, 재복은 간호사의 안내 없이 불쑥 진료실로 들어왔다. 서류 가방을 품에 안고, 등받이 없이 360도 회전하는 환자용 의자에 앉았다. “잘 지내셨어요? 저는 잘 지냈습니다.” 재복은 은애의 안부를 묻고, 묻지도 않은 자신의 안부를 덧붙였다. 재복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은애는 흠칫 겁을 먹었다. 겁을 먹은 나머지, 한 달 전 은애에게 백내장 수술을 받은 재복의 아버지 안부도 묻지 못했다. 은애는 통유리 칸막이로 진료실 내부가 훤히 보인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해야만 했다. 사실, 통유리 설치를 가장 먼저 칭찬한 사람은 재복이었다. 재복은 이렇게 탁 트인 기분이 드는 병원은 해전시 어시장에서 은애의 병원이 유일하다고 했다. 어시장 내 상가는 대부분 지은 지 삼십 년이 넘었다. 어지간한 돈을 들이지 않고서는 개업해도 티가 나지 않았다. 실제 은애는 꽤 큰 비용을 리모델링에 쏟아부었다. 나름의 차별화 전략이었다. 어차피 동네 의원에서 제공하는 의료의 질은 거기서 거기일 확률이 높았다. 은애는 음료수 냉장고와 아메리카노 머신, 최신형 LED 텔레비전, 최고 사양의 안마의자를 대기실에 들였다. 어시장에서 쾌적함만큼 입소문 나기 좋은 장점은 없었다. 어쨌거나 재복의 칭찬은 믿을만했다. 그는 어시장 내 병원 영업을 전담한 지 십오 년째였다. 영업사원치고는 숫기가 없고, 말수도 적은 편이라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작성일 2023-09-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14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