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소설 백가흠 - 그 해 겨울은 내게그해 겨울은 내게 백가흠 방안에 어둠이 번지며 축축한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찬 공기가 몸 안에 가득 차며 퍼진다. 가스가 끊긴 지 두 달 전이다. 조금만 견디면 겨울은 가고 봄이 올 것이다. 나는 차가운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중이다. 내게는 겨울이 ‘가혹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겨울을 내 생에서 다시 맞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나는 혹독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매일 나는 마음의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마흔다섯 번째 겨울을 나는 강원도의 한 작은 도시에서 버티고 있다. 하루하루가 힘겹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원룸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 웬만한 추위를 견디는 데 불편이 없었지만, 며칠 전부터 엄청난 한파가 시작된 뒤로는 소름 끼치는 한기가 등에 붙어 나를 괴롭힌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갖은 애를 써도 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도서관은 따뜻하고 읽는다는 일거리가 있어서 좋다. 나는 휴대용 버너에 물을 올린다. 텐트 안에 습기가 차며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텐트 안에 누워 밤이 시작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지루한 삶의 권태와 살이 갈라지는 듯한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 사이 내 밤이 놓여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와 생의 존속을 위한 고통 사이 내 하루가 있다.1) 핸드폰은 정지된 지 몇 주가 지났다. 내게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 친구에게 안부를 전해야 하는 일 빼면 전화기는 내게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평생 내가 맺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나만 외롭고 쓸쓸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한동안은 그간 살아온 내 삶의 방향에 대해 곰곰 해질 수밖에 없었다. 금세 주전자가 울기 시작한다. 고요함이 물러간다. 가끔 이는 소란스러움이 내게는 퍽 소중하다. 나는 따뜻한 물을 한 잔 천천히 마신다. 추위가 잠시 녹는다. 뜨거운 물을 물통에 담아 꼭 껴안는다. 다른 하나는 침낭 안에 넣어 둔다. 얼어붙었던 하루의 고뇌가 녹는 것 같다. 온종일 먹은 것이 없으니 배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이런 허기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처한 어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 그제는 한 끼라도 먹었으니, 어제, 오늘은 굶을 수도 있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고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굶었다. 끼니를 때우는 대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지막 남은 돈으로 소주 두 병과 담배를 샀다. 마지막까지 나는 무얼 먹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배고픔을 견디기로 했다. 소주와 담배만큼은 쉬이 참을 수 없었다. 술이 없으면 한잠도 잘 수가 없고 담배가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다. 담배는 허기를 채워 주는 묘약이다. 소주는 내 안에서 끓고 있는
작성일 2026-03-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안종성 - 서브리미널서브리미널 안종성 여러 대의 카트가 교차 레일 지점을 충돌 없이 지나갔다. 높은 위치를 누비면서도 질서 정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출로에 다다를 때쯤 천천히 감속하더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눈동자는 천장 주행 장치의 행렬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슬픈 기분을 느끼고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가? 그러나 기록할 도구를 찾지 못한 윤무는 걷기로 했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벽과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흰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소리와 냄새, 온도, 어떤 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 윤무는 이곳을 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필경사와 무한한 흰 공간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권면에 들기 전 미리 가서 둘러볼 것을 권했다. 깨어날 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테지만 영원히 망각한 게 아니라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권면 전의 삶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필경사는 뇌의 저장 용량을 컴퓨터 저장 단위로 환산하면 2.5페타바이트에 달함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쉼 없이 활동하므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인간의 신체가 권면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기억 편람의 업로드가 끝나면 직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십 년 뒤에나 조회할 수 있다고 했다. 필경사는···. 구축 아파트에서 볼 법한 편복도를 지날 때 윤무는 재건축 직전의 폐허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마다 잡동사니가 나뒹굴거나 무가지가 쑤셔 박혀 있었다. 앞바퀴 없는 자전거도 복도를 비좁게 만들었다. 윤무는 그중 현관문이 열린 곳에 서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곳에는 회색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있었다. 그 역시 깨어난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윤무에게 여러 번이나 같은 내용을 물었고─여기 당신의 집인가요? 다른 누가 또 살고 있습니까? 식사했습니까?─결국 이들은 임장하러 온 일행처럼 나란히 집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내부는 따로 특별한 게 없는 가정집이었다. 통유리에 붙은 주먹만 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휠을 돌려 보거나 싱크대 위에 널브러진 여러 가재도구를 들춰 보던 윤무는 커피믹스를 발견하고 남성을 향해 들어 보였다. 포장 비닐이 아침의 배경 앞에서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스스로 마토메라 밝힌 남성은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를 다니고 있지만, 서울 출장 경험이 잦아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윤무는 소파에 앉은 마토메의 다부진 체격,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외형만큼이나 독특한 건 마토메의 상태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는데 호흡이 불규칙했으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윤무와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업무차 여기에 온 건가요? 윤무는 낯에 익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무대를 오며 가며 보았을 조
작성일 2026-03-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임수지 - 우주의 영향 아래우주의 영향 아래 임수지 언젠가 우주에게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함께 가 보자고 말한 적 있다. 거기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방을 보게 될 거야. 팅커벨은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화장실에 다녀오면 문 앞에서 두꺼비가 널 지키고 있을 거야. 두꺼비들은 착하다. 두꺼비들은 두껍두껍 울지 않아. 걔들이 울면 동그란 구슬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정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우주는 그곳은 꿈과 환상의 나라네, 하며 웃기도 했었는데. * 기사는 나를 미림슈퍼 앞에 내려 주었다. 멀어지는 택시의 후미등을 잠시 바라보다 미림슈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을 두 번 꺾어 집 앞에 서서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바다 냄새가 몸속 깊이 들어왔다. 버스터미널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분명 전화를 했는데도 할머니는 정말 내가 곧장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문을 열어 준 할머니의 짧은 파마머리가 멋대로 눌려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짜증을 조금 부리다가 곧 이불을 내어주었다. 날 밝을 때 오지, 뭐 하러 이 늦은 시간에 와.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았다. 보일러를 안 틀었나? 얼굴과 손발을 대충 씻고 작은방에 깔아 둔 이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불이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안방에서 자는 할머니를 깨워 물어볼까 고민하는 동안 내 체온에 맞춰 이불이 천천히 데워졌다. 이불을 코까지 덮은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데운 이불이 다시 나를 데우며 조금씩 따뜻해졌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가 지나 있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늘은 우주의 기일. 오늘 나는 우주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잠들 것이다. * 우주가 내 방에 머물 때 입던 품이 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는 잘 개켜 종이 가방에 넣고 옷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두었다. 나는 그걸 다시 꺼내 본 적 없다. 우주가 쓰던 면도기나 낡은 양말 같은 것들도 진작 정리했다. 이제 내 방에 우주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용 기한이 지난 음식점 할인 쿠폰 같은, 우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쓸고 닦아도 계속 생겨나는 먼지처럼 어딘가에서 자꾸만 하나씩 발견되었다. 청소를 하다 그런 것들을 찾아낸 날이면 나는 자꾸만 골똘해졌다.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있다니. 그런데 2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 2년이라는 시간은 하루이틀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사실은 하루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2년이 흘렀다고 누군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서 영화 티켓을 발견했다. 어쩌다 여기에 티켓이. 영화 제목을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그날 관객은 다섯 명뿐이었다. 재미가 없는 영화인가. 영화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므로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옆에 앉은 우주에게 작게 말했다. 전세 낸 것 같고 좋은데
작성일 2026-03-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이종산 - 길 위에 사는 개길 위에 사는 개 이종산 섬에는 버려진 개들이 많다. 휴가철에는 그런 개들이 특히 많이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섬은 일 년 내내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곳이기 때문에 계절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자신이 키우던 개를 버리고 간다. 개나 고양이, 혹은 사람이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개나 고양이를 버리는 것은 자신이 키우던 아이를 버리는 것만큼이나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섬에는 버려진 개들이 많은 만큼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개의 주인을 찾는 글도 동네 커뮤니티에 자주 올라온다. 이 섬에는 걷기 좋은 길이 많고, 그런 길을 걷다 보면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를 만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항상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길에서 그런 개를 마주치면 나는 매번 아주 당황한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주인이 있는 개는 괜찮지만, 목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개는 무섭다. 그 개가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개는 미지의 존재다. 이빨이 달리고, 나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야생성이 남아 있는 동물. * 지난주 월요일에 나는 새로운 산책길을 걸었다. 내가 지내는 집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아주 맛있는 브런치 식당이 있는데, 그 집이 몇 달이나 문을 닫았다가 이번에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메뉴는 그대로라고 했다. 나름대로 애정이 있던 식당이라 꼭 다시 가 보고 싶었다. 맛이 그대로일지 어떨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그곳에 갔다. 그곳은 버스로 십 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버스를 타고 가면 아주 가깝지만, 걸으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브런치 식당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식당이 올린 공지에서 봤던 대로 메뉴는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도 맛도 달랐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같은 메뉴 같았는데 직접 먹어 보니 원래 팔던 음식이 아니었다. 내가 그 브런치 식당의 음식을 좋아했던 이유는 맛이 과하지 않고 신선해서였다. 그러나 주인이 바뀐 그 식당의 음식은 다른 평범한 식당들에서 파는 음식과 비슷한 맛이 났다. 특히 소스가 너무 많고 기름졌다. 전반적으로 짠맛이 강해져서 신선하고 산뜻한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전에 팔던 메뉴와 아예 다른 음식이 된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슬픔을 느꼈다. 식당에서 나올 때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지만, 사실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사랑하던 그 식당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주인이 바뀌면 맛도 아예 바뀌어 버리는 것이구나. 나는 그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이전의 주인은 그가 만드는 음식처럼 산뜻하고 세련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뀐 주인에게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바뀐 주인의 응대는 무척이나 투박하고 무뚝뚝했다. 이제 막 식당을 열었는데도 활기가 없고 망한 식당을 몇 년째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인상이 어두웠다. 그렇게 어두운 얼굴로 식당을 할 거라면 왜 저곳을 인수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는 마치 바뀐 주인이
작성일 2026-03-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양선형 - 기계와 황새기계와 황새 양선형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네가 저질렀던 끔찍한 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쩌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초과할 만큼 오랫동안 작동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원통형의 한계 속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너였다. 배터리와 부품이 망가지면 너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너는 네 작동을 중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음은 물론 작동을 중지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형벌이 단호하게 집행되었고, 너는 눈을 감았으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너는 이후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줄곧 반복해야만 하는 한 줄의 기억 타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작은 파편으로서 오토마타로 개조된 네 머리통 안에 각인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드러누운 네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나른한 의식은 감은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박쥐 모양의 환영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기억 타래는 네가 과거에 살과 피를, 얼굴과 자의식을 가졌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인 너와 오토마타인 너를 잇는 개체로서의 동일성을, 속죄를 끝마치고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네가 감당해야만 하는 과오와 책임의 연속성을 말이다. 따라서 기억 타래는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극형에 처해진 바로 그 범인임을 증명하는 전자 신분증이자 영혼의 낙인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네가 죄수임을 공인하는 사법 기관의 서명, 특수한 일련번호, 기계의 머리통 안쪽에 새겨진 자아의 조각, 네 유한하며 어리석었던 시절의 잔류 데이터. 그러나 너는 네가 다른 기억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기억 타래를 골랐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각별했기 때문인지, 각별했던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무의미했기 때문인지. 너는 카메라처럼 무감하게 눈을 떴으며,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딸깍거리는, 앵앵거리고 번쩍거리는 전자 신호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네 머리통 안에는 한 줄의 기억 타래만이 남아 있었다.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효율적인 무력함이었고, 그 무력함 속을 공회전하는 짤막한 분량의 이미지 찌꺼기였다. 너는 스크린을 향해 강제로 조향된 인형의 냉담하며 거짓된 눈알처럼 기억의 이미지를 주시했고…… 주시하지 않았으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윳빛으로 들이닥치는 심신상실이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주위를 에워쌌다. 네 머리통 안의 암실에서는 언제나 한 줄의 기억 타래가 상영되었다. 너는 기억 타래를 출력하는 영사기이자 영사막이자 영사기사였으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세 가지 작동인 사이를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자율적인 엔진에 가담하고 예속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네 기억의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네 기억의 관객일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ON이었다. 너는 네 신경망에 폭포처럼 흐르는 전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수 없
작성일 2026-02-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최정나 - 도래의 얼굴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작성일 2026-02-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박하신 - 아직 이른 마음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
작성일 2026-02-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장은진 - 불태울 시간불태울 시간 장은진 고모 집 마당에는 나무가 많았다. 3년 전 돌아가신 고모부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었다. 고모부는 멀리까지 산책 나갈 필요 없이 마당에 한 발만 내디뎌도 숲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좋다고 말했다. 은퇴 전까지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던 고모부는 힐링을 위해 그 ‘착각’이 몹시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닌 게 고모 집 마당은 진짜 숲 같아서, 누구라도 바라보면 숲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고, 숲이라 말하고 생각할수록 진짜 숲이 되어 갔다. 그러니까 고모부는 마당이 진짜 자신의 숲이 되어 주지 않아서, 그 착각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해서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넘어섰다면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었을 거라고. 나 또한 숲의 놀라운 힘을 어느 정도는 믿으니까. 숲 때문인지, 고모 집으로 내려온 지 나흘 만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맑아졌다. 내 발로 문을 박차고 나온 망할 회사도, 말싸움 끝에 토라진 여자 친구도 숲을 보고 있으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재취업을 준비 중인 내게 고모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침울한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고모는 나한테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고 했다. 자기 집으로 내려와 머리도 식히면서 취업 준비를 천천히 하라는 것이었다. 공기도 좋고 조용해서 몸과 마음이 금방 건강하고 편안해질 거라는데, 통화가 길어질수록 힐링을 누리고 싶은 사람은 정작 고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마칠 즈음 나는 고모가 집 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전화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모는 스페인 코스타 블랑카에 사는 여고 동창생을 만나러 일주일 후 출국한다고 했다. 동창생도 사별 후 혼자 지내고 있어서 며칠 쉬다 올 거라고 했지만, 뉘앙스는 겨울이 끝날 때까지 푹 눌러앉을 계획인 것 같았다. 고모는 벌써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 흥분된 목소리였다. 나는 재취업을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데다, 마침 월셋집 계약 기간도 끝나 가서 그러겠다고 했다. 살고 있는 원룸이 풀 빌트인이라 짐 때문에 번거로울 일도 없었고, 월세를 몇 달분이라도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결정은 쉬웠다. 고모 말대로 조용한 곳에서 지내며 힐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고모는 전화를 끊으며 마당으로 들락거리는 독수리 5형제 밥도 좀 챙겨 주고, 라고 말했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지금처럼 마당을 마주 보고 서서 숲이라 말하고 숲이라고 생각하는 것. 진짜 숲이 되어 가게 입속에서 바람을 불며 숲, 하고 발음한 뒤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며 숲이다, 하고 여기는 것. 이어서 그 기운을 받아 가슴에 덕지덕지 묻은 답답함을 빡빡 지워 내는 것. 얼마간 투명해졌다 싶으면 빽빽한 나무 사이를 지나 돌담 밑에 독수리 5형제가 하루 동안 먹을 물과 사료를 세 개의 그릇에 나누어 부어주는 것. 그러고 돌아서면 숲은 마루에서 보던 것과 다른 모습과 빛깔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늘 보던 곳도 등을 지고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면 새로
작성일 2026-02-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박현옥 - 겨울 산을 오르고겨울 산을 오르고 박현옥 기제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한 일은 산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에 기제의 아버지가 살았다. 거기서 차로 삼십 분을 더 가면 기제의 아버지가 소유한 선산이 나왔다. 12월 중순, 눈이 내리기 전에 다녀오자며 기제의 아버지가 기제에게 말했고, 이어 기제가 내게 주말에 같이 아버지 댁에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따로 챙길 건 없으나 다만 밑창이 튼튼한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신발장엔 바닥이 얇고 발목이 드러나는 단화나 굽이 높은 구두뿐이었으므로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트래킹화를 하나 주문했다. 이튿날 저녁에 택배로 받아 본 신발은 정말로 단단했다. 뒤축이 특히 단단해서 기제가 차를 세워 둔 집 앞의 큰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벌써 뒤꿈치가 쓸렸다. 선산엔 산주였던 기제 고모의 산소가 있었다. 기제를 몇 년 동안 만났는데 고모 이야기는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해도 뜨기 전인 새벽에 뻥 뚫린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며 기제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십수 년 전에 남의 집 선산이었던 걸 고모가 7억을 주고 샀다고. 시장에서 방앗간을 하던 고모는 인근 광역시의 국제공항이 그 산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평생 모은 목돈을 죄다 털었다. 산주의 처가 쪽 친척이 도시개발과 과장으로 일한다는 말에 홀린 듯 산을 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뜬소문이 으레 그렇듯 이전이 거의 확정이라던 공항은 여러 번의 공청회 끝에 무산됐으며, 선산 역시 원래의 값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원래는 얼마였는데?” “6천만 원.” “세상에.” 누군가는 기제의 고모에게 선산에서 송이라도 나면 일 년에 한 달만 일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기제의 고모는 혹시나 하나는 마음에 몇 날 며칠 산을 헤집고 돌아다녔으나 산에는 소나무는커녕 상수리나무만 잔뜩 심겨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와 달리 속이 물러 목재로도 쓸 수 없고 숯으로도 못 만든다고, 기제가 말했다. 고모가 그 산에서 발견한 건 송이도 아니고 산삼도 아니라 지천에 떨어진 도토리뿐이었다. “근데 고모도 방앗간에서 도토리 가루를 팔았거든.” 앙금을 말려 가루 낸 것으로 킬로에 만 원을 받았다. 묵으로도 쒀 먹고 전으로도 부쳐 먹고, 효능도 모르는 채 매일 티스푼으로 한 숟갈씩 퍼먹는 사람도 있었다. 기제는 그러니까 고모가 도토리를 8억 원어치 산 것이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난 다음엔 그 이듬해 고모가 산 중턱에서 제초제를 먹었다고 말했고 그때는 웃지 않았다. 히터를 세게 틀어 놓아 겨드랑이와 등과 발가락에서 땀이 났다. 뒤꿈치가 쓸린 곳에 땀이 닿아 한층 더 따가웠다. 내가 자꾸 발을 꿈질거리자 기제가 발이 시리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기제는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며 히터를 더 올려 버렸다. 나중에는 엉덩이와 오금에도 땀이 났다. 짧게 깎은 기제의 옆머리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작성일 2026-01-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2상세보기 -
소설 진연주 - 잊고 있고 잇는잊고 있고 잇는 진연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지냈다. 한 칸짜리 방.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책장과··· 새 둥지가 있는. 2년 전의 새는 죽었다. 좁은 방범창 안에서. 이틀을 울다가.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면서. 약해지면서. 나는 소리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안전해질 때까지. 며칠 더 기다렸다가. 숨이 죽을 때까지. 숨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당황하면 안 되니까. 당황이 수습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곤란한 일이니까. 며칠 더 기다렸다가. 딱딱해진 새를 치우고.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를 거둬 내고. 방범창의 패널을 깨고. 다시는 새가 갇혀 죽는 일이 없도록. 패널을 깨고. 새는 왜 나가지 못했을까. 들어왔는데 왜 나가지는 못한 것일까. 날개를 펴서 도움닫기를 할 만큼. 공간이 충분히 넓지 않았기 때문일까. 창문의 반을 가릴 만큼. 충분히 높았기 때문일까. 방범창이. 폴리카보네이트 방범창.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카. 나는 꿈을 꾸고 새가 죽고. 꿈에서 매번 새가 죽고.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고. 약해지고. 꿈을 꾸고 새가 죽고. 매번. 나는 그 새가 알을 밴 상태였고 새가 죽으면서 알도 함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슬퍼졌지만 그러한 조금 더의 슬픔이 죽은 새에게는 약간의 좋은 일이겠거니 했다. 그렇더라도 내게 그 새의 죽음은 시간의 궤도 바깥에서부터 시작된 파열음처럼 당혹스럽고 얼떨떨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마주한 삶의 필연적 결말.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였을까. 처음부터 죽음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새가 마침내 남은 삶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라고, 구구 쿼쿼 우는 소리가 그러한 안간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켜보거나 지켜보지 않는 일만이 나의 것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그 새의 삶에 또는 죽음에 개입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어야 하나. 나는 한동안 가장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허둥대고 우물쭈물하고 두려워하고. 새로운 새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여름이었다.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반쯤은 정신이 나간 듯 갈팡질팡하며. 나는 새가 나뭇가지와 나뭇잎과 비닐 같은 것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새는 한동안 가만히 앉았다가 황급히 목을 빼 주변을 둘러봤고 부리로 털을 고르거나 몸을 움직여 자리를 고르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떠나지 않다가 돌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멈추고 날아오르는 일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곳에서 작은 알 두 개를 발견했다. 덧문 밖의 햇살처럼 뽀얗고 눈부신 데다 아주 정교하게 빚어진 도자기처럼 매끈한 것, 완벽한 형태의 생명이 그야말로 덜컥, 거기 있었던 것이다. 철골조와 앙상한 밑바닥만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방범창의 한구석에 말이다. 하나의 존재와 하나의 장소, 그 둘의 대비가 너무도 강렬해서 섬뜩하게 느껴질
작성일 2026-01-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김채원 - 태양에서 멀리태양에서 멀리 김채원 지금부터 아침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질 것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솔지에게도 주어질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어떠한 저항도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름의 궤적을 그리며 부지런히 그 시간을 사는 일. 솔지에게 그것은 꽤나 쉬운 일이었다. 그치만 어려운 일인데? 솔지는 생각했다. 꽤나 쉽고, 그치만 어려운 일이라고. 알겠습니다, 솔지는 늦저녁에 창문을 열어 두고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선과 악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잘못 걸렸다, 하면서도 끝까지 읽기는 다 읽었다. 치워 없애야만 하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됐다. 누가 보아도 선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야기.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것들. 에구, 눈부셔라. 에구, 싫어라. 솔지는 이 모든 것에 필요 이상의 적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지의 약점을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솔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거였다. 솔지는 배신하기를 잘했다. 그러니까 배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정도의 배신을 참 잘했다. 최근에 솔지는 세 사람의 친구를 배신했다. 세 사람의 친구에게 차례차례 합성 마약을 권하였다. 세 사람의 친구 민지, 차은이, 가영이가 고등학교 건물 5층 화장실 맨 끝 칸에 모여 차례차례 그것을 받아 보았다. 처음이니까 그냥 줄게. 이게 뭔데? 알지만 한번 물어볼래. 그럼 알려 줄게. 몸에 좋은 약이야. 약의 이름은 해마야. 네가 지었어? 응, 내가. 이름이 영 징그럽고 별로다. 거절해도 돼? 왜? 귀여운데···. 원래 이름은 뭔데? 나도 몰라. 요즘 입시 준비하느라 머리가 아프다며. 생리통도 심하다며. 그런데 나 지금 진짜 돈이 없어···. 괜찮아, 내가 돈이 많아! 내 지갑을 보여 줄게! 솔지의 암호 화폐 지갑은 영단어로 된 열두 개의 암호를 입력해야만 열어 볼 수 있었다. 지갑의 암호는 솔지가 좋아하는 영단어의 단순한 나열이었다. 첫 번째 단어는 window였고 두 번째 단어는 forest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mountain, 산이었다. 겨울 산을 잘게 부순 듯한 흰 알갱이들을 솔지는 차분하게 소분해 가지고 다녔다. 합성이라는 게 둘 이상의 것을 합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인데··· 정확히 무엇과 무엇과 무엇이 기타 등등 합쳐져 마침내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인지는 제조하는 역할이 아니라서 몰랐다. 예전에는 약의 성분이 비교적 단순했는데 이제는 좀 복잡해졌다고들 했다.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면 약의 성분이 계속해서 복잡해져야만 한다고들 했다··· ···전부 주워들은 이야기였다. 솔지의 역할은 제조된 물건을 가져다가 주변에 판매한다고 해야 하나 일
작성일 2026-01-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신연선 - 늦은 오후의 일늦은 오후의 일 신연선 1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가려는데 병원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생전 땡볕 아래에서 맨얼굴 내보인 적 없던 듯 희디흰 얼굴이었다. 떨고 있는 모습이 사뭇 눈길을 끌었다.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진 모습 같기도 했다. 나의 멍한 눈과 그 사람의 흔들리는 눈이 흐린 하늘 아래 잠깐 마주쳤다. 추운데 얼른 타요, 차 안에서 동생들이 소리쳤고 나는 그야말로 쓰러지듯 차에 올랐다. 차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와 앞으로 나아갔다. 차의 속도만큼 빠르게 창밖 풍경이 뒤로 달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너무나 피곤했다. 누님, 다 왔소. 일어나쇼. 막내 목소리가 꿈결의 경계를 지나 점차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른 동생들을 내려 주고 또 이동하는 내내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바윗덩이가 짓누르는 듯한 어깨의 피로는 여전했다. 습관처럼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차에서 내리자 막내가 뒷자석에 있던 남편의 유골함을 조심히 꺼내 내게 안기고는 돌아섰다. 막내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살뜰했다. 하염없이 넋 놓고 있는 나를 대신해 번거로운 장례 절차를 세심하게 따져 가며 봐주었다. 큰소리 한 번 나지 않게 해 준 것이 고마웠으나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가 밥을 차린단 말인가. 대충 한 상 차리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치가 어땠는지 막내도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걷는 뒷모습이 이십오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꼭 닮아 있었다. 많이 늙었구나. 내가 쟤를 업어 키웠는데. 작기도 작았고, 울기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녀석이 잠시 숨을 고르느라 울음을 멈추면 귀가 멍할 정도였다. 시간은 어째서 쏘아 놓은 화살일까. 그 까칠한 아기가 늙은 아버지 뒷모습을 하고 구부정 걸어갈 때까지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기분이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묵은 공기 냄새가 났다. 그 경황 중에 습관대로 개켜 둔 남편의 이부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현관 한쪽에 유골함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자리를 찾아 줘야 할 것이었지만, 일단 그대로 두자. 집이 적막하다. 남편과 있을 때도 소란한 적은 거의 없던 곳이다. 남편은 말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귀찮아하다가 잘 못하게 된 사람. 질문을 하면 행동으로 답하던 사람. 술을 마시면 말이 다소 늘었지만 곧 잠이 들어 버렸으므로 그러는 시간도 짧았다. 그런대로 산 지 사십 년이 훌쩍이었다. 든든하지도 믿음직스럽지도 않은 반려자였는데 빈자리가 이렇게 나나. 신발을 벗고 집에 올라서서 TV부터 켰다.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들으니 어느 정도 평상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운데가 꺼진 소파, 색이 바랜 커튼, 구석구석이 들뜬 장판, 시간에 닳은 채 집의 일부가 된 것들. 이곳도 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연년생 칭얼대는 두 애들을 데리고 이사하면서도 그때는 힘든 줄을 몰랐다. 평생 처음 가져 보는 내 집이었고, 창틀이니 화장실이니 구석구석 묵은 때를 닦느라 한동안 근육통을 달고 살면서
작성일 2026-01-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2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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