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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소설 윤성희 - 바이킹을 타자
바이킹을 타자 윤성희 1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요일이면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호숫가의 트럭 카페에 가서 삼천 원짜리 커피를 사 먹거나,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정자에 가서 가끔 맥주 한잔을 마셨다. 그게 나에겐 여행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그 장소들을 잃어버렸다. 먼저 정자에 불이 났다. 정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문 옆에 있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해서 늘 숨을 헐떡이며 등교를 해야 했다. 여름에는 교복 겨드랑이가 땀에 젖곤 했다. 교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거기에는 운동기구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거기서 매일 철봉을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늘 철봉을 했다. 그리고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지금은 조금 늦는 거지만 나중에는 아주 많이 늦게 된다고. 이제 운동기구는 없어졌고, 아마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겠지만,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면 나는 그곳에 갔다.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닭 다리 모양의 과자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맥주는 텀블러에 옮겨 담았다. 너네는 공부해라. 나는 맥주나 마시지.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몰래 맥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텀블러 안에 술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통쾌했다. 바람까지 불어 주면 근심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자에 불을 낸 사람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시험을 망쳐 기분이 우울한데 정자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나서 그랬다고 뉴스에서 아이는 말했다. 나는 불에 탄 정자 사진을 찍어 민정에게 보냈다. ‘헉, 낙서도 사라졌어?’ 민정이 물어서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자 기둥에는 연경의 낙서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거기서 치킨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 학교는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 치킨이나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는 게 유행이었다. 그날 연경은 닭 다리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정자 기둥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닭 다리 양보한 사람은 평생 복 받을 것!’ 연경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닭 다리 과자를 살 때 꼭 프라이드맛만 샀다. 핫숯불바베큐맛은 절대 먹지 않았다. 민정에게 새로 정자가 지어지면 같은 자리에 같은 낙서를 하자고 말했다. 민정이 꼭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그날 밤에 나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훌라후프를 하는 꿈을 꾸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며 서로 웃었다. 삼 년 전, 나는 엄마의 병간호를 핑계로 고향에 왔다. 그 전에 나는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상사인 경리실장이 횡령을 하고 잠적하는 일이 생겼다. 동료 직원과 함께. 퇴근 후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같은 먹방 유튜버를 좋아했다. 그래서 새 영상이 올라오면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길란 - 법의 아름다움
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2상세보기 -
소설 조재윤 -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2상세보기 -
소설 박민경 - 별개의 문제
별개의 문제 박민경 내가 병주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버즈랑? 의외다. 버즈는 친구들이 붙인 병주의 별명이었다. 맞다. 〈토이 스토리〉의 버즈 라이트이어. 크고 동그란 눈매에 능글맞은 입꼬리도 닮았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도 버즈 그 자체이긴 했다. 친구들이 의외라고 한 것도 이해는 갔다. 병주는 나랑 워낙에 정반대였으니까. 간디와 처칠, 잭슨 폴락과 앤디 워홀, 스폰지밥과 징징이, 기쁨이와 슬픔이처럼···. 내가 나쁘게 말하면 방구석 회의론자이자 소심한 현실주의자라면, 병주는 아침 햇살 같은 낙관과 긍정 엔진을 탑재한 채 지치지 않고 광야로 달려가는 로봇이었다. 성향이 정반대인 커플의 경우, 서로의 영토를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는 한 같은 성향의 사람을 만날 때는 느끼지 못한 달콤한 상호 보완성을 경험할 수 있는데 나와 병주가 딱 그랬다. 병주는 나에게 없는 고출력 엔진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감정 기복이 큰 병주의 정서적 지지대 역할이었으므로 우리는 함께 있을 때 자신을 더 나은 사람처럼 느꼈다. 그래선지 결혼을 결심하기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나는 우리의 관계성이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잭슨 폴락과 앤디 워홀, 스폰지밥과 징징이···) 우리의 핑크빛 미래를 의심해 마지않았다. 그래서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싸우지 않는 커플은 없다는 진리에 불경하게도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우리는 다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Oh, love is blind···. 어쩌면 사랑이란 두 사람만 맹신하는 종교 같은 걸지도. 하지만 본격적인 결혼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결혼 선배님들이 고꾸라졌다는 그 수렁 맛집에 우리도 보기 좋게 빠져 버렸다. 병주는 체면을 중시하고 있어 보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유명 브랜드와 격식 있는 예단, 누가 봐도 신경 쓴 티가 나는 살림살이에 돈과 마음을 쏟았다. 반면 나는 허례허식이라면 질색이었고 가성비와 실용성이 우선이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고 자주 불거졌다. 싸움은 집을 계약하고 살림을 들일 무렵 극에 달해서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파혼’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냈다면 정말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식이라는 메인 퀘스트를 해치우고 나서는 동지애가 생긴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싸울 기력이 바닥난 탓인지 일단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나는 적과의 공동생활이라는 사회 실험에 자처한 피실험자의 마음으로 신혼집에 입주했다. 서로의 예민함이 빵빵한 풍선과 같은 상태라는 걸 알고 있기에 우리는 가능한 상대를 긁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손톱이 드러나는 순간은 찾아왔다. 사건의 발단은 내가 만든 음식물처리기였다. ‘오천 원으로 미생물 음식물처리기 만들기’라는 영상을 보고 혹해서 다이소에서 흙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2상세보기 -
소설 김근수 - 보호 구역
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김덕희 - 이상한 고리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mi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조시현 - 목소리들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윤보인 - 연변에서 만나 샤넬 백을 줬을 뿐
연변에서 만나 샤넬 백을 줬을 뿐 윤보인 “뭐어? 연변이라고? 연차를 내고 거기를 가요?”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회사 대표에게 말했을 때, 옆에 있던 조 실장이 끼어들었다. “갈 수도 있지 않겠어?” “거길 왜 가요?” “으음.” 굳이 자세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조 실장은 팔짱을 끼고 나에게 다가와서 다짜고짜 캐물었다. 내가 별말이 없자, 회사 대표인 자기 오빠를 쳐다보면서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거기 가 본 적은 없는데, 조선족 많지? 또 뭐 있어?” “백두산 있잖아요.” 고작 동갑인 놈에게 머리를 조아려 가며 매달 월급을 챙긴 지 벌써 2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입사 초반에는 회사에서 왕따를 당했으며, 모욕에 무시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걸 겪었다. 원래 회사 생활이 개 같은 데다 남의 돈 받아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나 말고도 이런 일을 겪는 인간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알겠어. 연차 써.” 대표가 냉담하게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거 얼마 만에 쉬는 거냐? 주말 끼고 이틀 연차 내면 총 4일을 쉬는 건데, 연변에 가서 종희도 만나고 양꼬치도 먹고 술도 마셔야지. 그래 봤자 먹고 노는 일뿐이었지만, 하필 종희 년이 중국에서 그것도 연변에서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서 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오빠는 그야말로 개판인 인생을 살았는데, 여동생이라도 타국에서 잘 지낸다면 멀리서 박수를 쳐 줄 수 있었다. 내 나이 마흔이 넘었고, 그동안 가까운 인간들에게 배신을 당했고 이제 정신 좀 차리고 회사를 다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창밖에 있는 개 두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논현동 단독주택이 짱이야. 저 집구석은 얼마나 하려나?” 회사 맞은편 주택은 세월 가는 것도 모른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잘 만나서 그래. 부모 말고 그 위 세대.”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나 오대길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얼마나 잘 만났는지, 돈도 많고 땅도 많아서 이거 친일파 활동을 했나, 남몰래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런 활동을 했어도 남들만 모르면 되지,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과거 할아버지가 어울렸던 사람들이 은행장, 정치인 등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서울의 중심가 뚝섬이며 성수, 왕십리 지역의 땅을 사들였고 할머니와 본인의 외아들, 그러니까 내 아버지에게 많은 땅을 증여했고 그 덕에 나까지 웃음꽃이 피게 되었다. 돈이라는 게 참 좋은 것이어서 어릴 적부터 걱정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너 초장 끗발 개끗발이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박솔뫼 - 사과
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2상세보기 -
소설 최재영 -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2상세보기 -
소설 반수연 - 프레살레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홍성구 - 헝가리 워터
헝가리 워터 홍성구 은수는 자신을 대학주보 기자라고 소개하였다. 나와 동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걸로 봐서는 한국적 정서에 기대는 MZ인 듯했다. 속단하는 부류에 드는 건 꺼림칙하지만, 곤란할 때는 한국식 정을 부르짖다가 느긋할 때는 서양식 합리를 따져 보는 MZ를 몇몇 봐 온 탓에 스마트폰 너머에서 이제 막 알게 된 후배가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경계심이 들게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터뷰는 성사되었다. 은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남자 조향사라서 관심이 생겼어요.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향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일까. 남자가 조향사라는 게 관심이 생길 만한 일인가. 인터뷰하러 온 은수는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았다. 그녀의 나신(裸身)에 미간이 찌푸려졌을 것이다. 향수는커녕 화장수조차 뿌리지 않았다니. 매일 밤 샤넬 No. 5를 입고 잠든 마릴린 먼로가 알았다면 야만적이네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얀 치맛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어떠한 향도 느끼지 못했다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은수의 반소매 니트 티에서 플로랄 계열의 향이 풍겼다. 흔한 싸구려 섬유유연제 냄새. 합성 향료의 조악한 외피를 두르고 있으니 누더기 정도는 걸치고 있는 건가. 나와 꼭 인터뷰하고 싶었다는 은수의 말이 진심인지 의심이 들었다. 은수는 향수에는 문외한인 데다 향수를 뿌리는 문화적 행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야생의 신입생처럼 보였다. 인터뷰는 지루하고 단조로웠다. 은수는 예상이 가능한 질문의 목록을 들추었고, 나는 잡지인지 유튜브인지 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인터뷰 답변을 하나둘 꺼내서 내놨다. 하품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러나 은수가 노트북 화면을 덮자 드러난 그녀의 오른손 때문에 졸음기가 싹 사라졌다. 저런 손으로 타이핑한 건가. 은수의 오른 손목 부근에서 검지에 이르는 데까지 초록뱀 한 마리가 몸을 펼치고 있었다. 은수는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려다가 뭔가 잊은 게 있는지 화면을 다시 열었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화면은 바닥에서 15° 정도 위로 펼친 탓에 초록뱀이 키보드를 누비며 꿈틀거리는 게 여실히 보였다. 은수가 검지를 까닥일 때마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은 아닌지 움찔 몸서리가 났다. 마을에서 독수리 삼촌, 용 삼촌, 호랑이 삼촌으로 불리던, 혈연이 아닌 삼촌들이 떠올랐다. 친숙함의 범위에서 한껏 벗어나 있지만, 두려움의 실체를 덮으려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정반대의 호칭을 얻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독수리,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당장 달려들 듯 노려보는 호랑이가 등에 새겨진 삼촌들. 대중목욕탕의 온탕에서 독수리, 용, 호랑이가 물 파편을 튀기며 솟구치면 따뜻한 물속인데도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유독 샅이 근질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한테 삼촌이라고 부르라 하고 정작 그네들은 육시랄 놈, 벼락 맞을 놈, 급살 맞을 놈, 욕했다. 호랑이 삼촌이면서 육시랄 놈이 나를 불러 세운 기억이 난다. 다섯 살 연상인 그는 한참 어른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에게 그가 물었다. 요새 너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1상세보기